대전-보충강의 20220328
보강1(언어와 의미)
본 강의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현실은 언어의 그물망으로 돼 있다. 그물망은 관계망으로 돼 있다. 언어는 뭐냐 하면 인간적인 망상, 또는 환상으로 돼 있어요. 언어라는 게. 어떤 사물을 보고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냥 이름을 짓는 게 아니고 갖고 싶다는 자기 의지를 드러내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가수나 또는 댄스 팀이나 또는 야구 팀 같은 경우에 사람들은 원래 이름 말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름, 별명을 붙여요. 쏘니, 쏘니. 손흥민이죠. 별명을 갖다 붙여서 관계, 그 사람 만나본 적도 없지만 손흥민과 나와 엮이는 인생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손흥민이 한 골 넣을 때마다 자기가 엔도르핀이 확 도는 거죠. 자기가 필요한 사람을 주어모아서 자기만의 언어의 세계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축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손흥민이 누군지 모르지요.
그래서 이게 망상이고 망상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망상은 나만의 기억에서 나와요. 아까 여기까지 설명했잖아요. 나만의 기억은 어디 있는가? 그 밑에 설명할게요. 인간에 자기만의 기억에서 어떤 꿈이 있고, 망상이라 했는데 꿈이 있고, 꿈을 억지로(억지입니다)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사물에 자꾸 이름을 붙이지요. 억지입니다. 지가 손흥민과 언제 봤다고? 손흥민이 보면 아무 소리 안 해 줄걸요? 그래도 마음속의 팬이 된 거예요. 억지에요, 억지.
그래서 아무리 손자가 좋고 손녀가 좋더라도 자기가 한참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 앞에 가리면, “빨리 나와, 빨리 비켜 안 보여.” 그러면 그 망상은 나만의 기억에서 와요. 기억과 과거 체험이 다릅니다. 과거 체험 가운데서 지금의 나를 스스로 옳게 볼 수 있는 그것만 모아모아 골라서 카드에 담아서 그걸 기억이라 하는 거예요. 기억은 과거가 아닙니다. 기억은 지금 현재에요. 현재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지 과거가 아니에요. 과거의 노래라도 지금 내가 부르면 지금의 노래가 되는 거예요. 지금 나를 나로 지탱하는 노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만의 기억은 어디서 나오는가? 나만의 기억은 기성세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통용되었던 나의 시작이 되었던 나를 탄생시켰던 삶의 환경이 있습니다. 정신적 환경이에요. 이건 뭐냐 하면 가족이 되고 가정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모든 게 생겨요. 인간의 마음의 상처, 트라우마라 하죠. 마음의 상처도 생기고 인생의 좌절도 여기서 생기고, 그 다음에 나는 이 음식은 먹고 싶고, 이 음식은 싫어, 하는 음식의 좋고 나쁨도 여기서 결정이 돼요.
이게 몇 퍼센트로 보냐 하면 심리학자들은 80%로 봅니다. DNA를 80%로 보고 환경을 20%로 보거든요. 이미 같은 DNA를 지닌 소박한 폐쇄 공간, 같은 DNA거든요. 같은 아빠, 엄마 닮은 동질의 DNA기 때문에 강요가 가능해요. 너 같은 행동은 내가 눈뜨고 있는 내 집안에서는 용납 못한다. 일방적인 부모가 갖고 있는 DNA를 자식의 DNA로 발현시키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거예요. 출생적 환경이에요. 얘는 가정 밖에 못 나가니까. 가정 밖에 나가면 죽으니까요.
가정 밖으로 튀어나가는 것은 언제냐 하면 자아가 형성될 땐데 자아는 언제 형성되느냐 하면 엄마, 아빠를 내 몸과 분리된 몸으로 인식할 때 자아가 생겨요. 그 전에는 엄마가 조금만 옆방에 가도 얘는 울어요. 왜? 내 몸을 그냥 던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같이 있어야 되는데, 볼펜이 여기 있잖아요. 같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 있으면 대번 옮깁니다. 원래 있던 자리에.
엄마는 아이가 볼 때 원래 있던 엄마의 자리는 내 옆의 자리에요. 엄마가 딴 방에 가면 안 돼요. 화장실에 가서도 안 돼요. 항상 내 옆에 엄마 자리가 아니라 내 자리가 되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분리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엄마 시장 갔다 올게, 하면 뭐가 형성된 거예요?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처음엔 그게 안 벌어질 땐 할머니가 그 공간을 메우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보완, 이때는 대체보완, 동일하지요. 대체물로 딱 집어넣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와 같이 있단 말이죠. 엄마가 식사할 때 기도하게 되면 아이는 당연히 기도하는 줄 알지요. 기도할 때 어떻게 하느냐? 엄마를 보고 눈 감고 두 손 모으는 걸 보고 얘가 따라 해요. 근데 자아가 생겨버리면 엄마 종교 따로 있고 그 다음부턴 내 종교 따로 있지요. 말 안 듣지요.
그래서 여기서 나만의 기억은 어떻게 생기느냐? 이미 가정이란 기성세대에서 강제적으로 세뇌 받았고 주입된 그 부모의 기억의 일부를 대를 이어받습니다. 그게 나에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타인의 욕망이라 해요. 타인의 욕망의 화신이 나가 되는 겁니다. 오늘 첫 번째 강의에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모의 영향력에서 자식이 평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게 나만의 기억 속에 부모는 돌아가셔도 부모는 살아 있지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망상, 쉽게 말하면 꿈이죠. 그 꿈은 아버지가 못 다 이룬 사업이라든지 엄마가 못 다 이룬 발레리나의 꿈, 엄마가 못 다 이룬 피아노의 꿈을 자기가 이룸으로써 자기가 받은 피아노대회 대상을 엄마의 묘소에 갖다 놓지요. 벌써부터 죽으란 이야기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참 훌륭한 음악인으로 어머니 없었으면 내가 오늘 대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거는 제가 받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받아야 마땅합니다.” 책 써놓고, “이 책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그래서 종교라 하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뤄진다 하는 거예요. 경상도 사람은 기도할 때 뭐라 합니까? 아버지, 그것 보면 좀 이상해. 같은 아버지 이름인데 하는 내용이 다 다른지 몰라. 아버지~, 그 다음에 주여, 주여~ 그런 식으로 하지요. 거기에 어린아이 데려가면 그 애도 아버지 믿씁니다, 동영상 보면 나와요. 기도하고 부흥회 하는데 나온다고.
자기가 이미 형성되었어요. 이제 남은 것은 자기 정당화.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정당화. 벌써 마귀 들린 거죠. 마귀는 죽기를 무서워하도록 독려하거든요. 무조건 내가 죽으면 안 돼요. 무조건 살아야 돼요. 마귀의 종이죠.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언어를 동원하는 겁니다. 언어 중에서도 헬라어, 히브리어니까 그걸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자기만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정리하는 방법은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어요. 성경해석은 반드시 자기를 미워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돼요. 왜냐하면 십자가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로 해석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기를 미워하는 거거든요. 어제 주일 낮 설교 때 잘 안 하는 전라도 말을 제가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나는 이미 죽었다. 너는 뭣하냐?” 못하느냐, 이런 식으로. “빨리 죽고 와. 뭣하냐?”
죽음이란 목숨 끊어지는 게 아니고 이 망상, 나의 모든 현실이 예수님과 관계없는 상관없는 죄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거는 제거대상이에요. 노아 때는 물로써, 그리고 인자가 올 때는 불로써 제거대상입니다. 이런 가짜가 있어야 십자가가 현실화되기 때문에 이런 가짜가 주님 보시기에 꼭 필요한 바탕이 되는 겁니다. 언어강의 끝.
보강2(우리의 뜻)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개역한글)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the cattle,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kjv)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ccording to Our likeness; and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sky and over the cattle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on the earth."(nasb)
아까 한 질문,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 ‘우리’가 뭐냐? 그 우리는 구약 자체가 모형이기 때문에 실체는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실체는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이 실체에요. 예수님을 실체로 보고 구약을 모형으로 해석을 해야 되거든요. 그 해석을 할 때 요한복음 14장에서 그게 나옵니다. 우리라는 게 숫자, 쪽수 채운다고 우리가 되는 게 아니고 장소가, 처소가 먼저 마련돼야 되지요.
요한복음 14장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이야기할 때 내가 너희 처소를 예비하게 되면 데리러 오겠다. 처소를 예비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있는 처소를 활용해서 하나님과 같이 있읍시다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베드로 있고 예수님 있고 이 처소를 주께서 안 받아주는 처소에요.
어떤 처소냐 하면 인간은 결코 올 수 없음을 분명히 속성으로 자리가 잡는 그 처소에요. 결코 너희들은 이곳에 참여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었음을 분명히 하는 그 처소, 그 처소가 비로소 마련되게 되면 그 처소 안에 하나님의 가족이 마련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 21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들은 처소부터 먼저 해야 되는데 그냥 쪽수만 채우면 우리가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단수에서 복수로. 또는 엘로힘이라는 장엄 복수라 해서 그래서 우리라 했다고 원어적으로 따지고 하는데 아까 인간의 언어는 해석할 능력 없다 했지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이상 자기 해석 능력을 미워하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아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거는 뭐냐 하면 처소 보고 달려드는 거예요. 아버지, 아들, 그 다음에 뭡니까? 성령. 23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이 거처를 예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 예수님의 형상이 완성되게 되면 자리가 마련되고 그 자리에 아버지와 아들의 선택을 받은 자만 여기에 참여함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고 더 깊이 들어가면 이 형상은 무엇을 의미하냐? 기능을 의미하는 거예요. 지상은 모형이기 때문에 기능은 모형을 통해서 본래의 기능이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두 번째 보충강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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