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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1강

아빠와 함께 2022. 3. 14. 15:46

교회사 1강 녹취

강의 : 이근호목사   녹취 : 정석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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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라는 말은 교회역사라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가 없으면 교회역사가 없다는 말은 역사란 교회가 계속 있다는 말에 역사라는 말이 따라옴. 만약 중도에 교회라는 것이 없어져 버리면 교회사란 없다.
어떤 인물이 있었다. 죽었다. 했을때 그 사람의 역사는 끝나버렸다.

 

교회가 있다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확실히 보장되는가? 사람들이 사회에서 확실히 교회다라는 것이 있지만 주님께서 확실하게 교회가 있다는 것은 보장 못함.
교회사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교회에 대한 내력이다.
교회사를 공부하는 것은 흔히들 사람들이 교회라는 것이 과연 복음 적인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자기 우호적, 옹호적 시대의 교회사는 인간적 일방적이다.

 

여기서 동화사의 역사라고 이야기 했을때 동화사의 역사를 해도 괜찮지만 이것이 복음과는 상관이 없다. 동화사 역사라고 했을때 공부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반 학문을 하는 사람중에 많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적인 안목에서 동화사의 역사를 볼때, 동화사의 역사가 비복음적이고 죄악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거해 준다에서 이 때에만 복음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동화사의 역사란 이렇게 비복음 적인 것을 도출하기 위해 공부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역사라 해도 마찬가지로  비복음적이고 죄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어떤 책음 보아도 되고 보지 말라는 것을 누가 간섭할 수 있는가?
교회사에 집착하는 자들이 복음적으로 볼때 얼마나 죄악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복음적 교회사 관점이다.

 

교회사 공부이유는 복음적이 아니라 비복음 적이다.
두 번째로는 교회사 공부를 통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누가 뭐래도나는 교회에 소속된다 생각했다고 생각ㅎ하고 교회사를 공부해 보니 아하 이런 한계가 있구나, 이것 때문에 내 교회사는 우수하고 남의 종교사는 그렇지 열등하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복음적인 관점에서 교회사를 볼때 두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기존 다른 종교사와 다를 수 없다. 두 번째는 내 스스로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자기 자신의 주제파악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과거교회에 어떤 영향이 있었을 때 교회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타협했는가를 공부함으로서  지금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사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속적 세력과 타협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과거의 자기의 입장을 스스로 자아비판하는 그런 교회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교회사에서 긍정적인 점을 찾을 생각을 안하는 것이 좋다.
교회사를 생각할 때 교회 바깥에 교회를 유혹하는 세력을 의식하면서부터 교회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어떤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예수님은 교회 역사를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옳은 말이다. 사울이 살전에서 어떤 암시를 주는 고 하면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곧장 오신다고 말했다. 마라난타. 세례요한도 내 뒤에 메시야가 곧 오신다고 했다. 그러니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볼때 메시아 올때까지의 기간이 불필요할 정도로 급박하다.  세례요한은 상당히 다급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니 다급할 때는 곧장 오신다고 느끼질 때에는 역사를 구태여 염두에 둘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엄마가 시장다녀오실 때 내 곧장 가니 숙제를 다 해 놓아라 했을때. 곧장 온다고 했을때.
역사란 불필요하다.

 

그런데 교회가 역사를 따지고 계산 했다는 말은 어디에서 나오는 고 하면 곧 오신다고 했을때 곧 오실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시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이 지연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일방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러하면 교회를 붙들자.
두 번째로 외부에서 교회를 공격할 때 교회를 사수해야 하고 이 사수한 교회가 진짜 교회라는 것이라는 것을 후배나 후손에게 남겨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후손들이 진짜배기 교회구나라는 것을 후손들이 알 수 있다.
교회를 없애버리고자 할때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주님의 교회는 늘 하나 밖에 없는 교회니 역사를 남길 이유가 없다.
아버지가 죽을때, 자식도 죽을때 이것 저것 다 필요 없지만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살아 남을 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남겨야 한다.

 

하늘나라 보다는 지상에 관심을 많이 둘때 역사를 기록한다.
지금 나를 알아 주지 않더라도 후세가 알아 준다.

 

기독교는 없다. 성경은 복음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어떤 대상으로 남아 있다. 조직체가 보이는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복음이란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으신 분이 장악하고 있다.
교회가 있다. 교회라는 것은 모이는 무리 집합체이다. 사람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인간이 장악할 수 없다.

 

성경은 복음이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만드는데 관심이 없다.
감독 집사의 직분도 성령께서 그때그때 마다 은사를 내려 줄때 가능하다.
그런데 은사를 내려 주는 것은 내려 달라고 해서 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필요때마다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만일  이것을 소유하고 만들어 내려고 하면 연장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복음으로 구원받지 교회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복음을 외쳤지 기독교를 외치지 않았다.
만약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외부의 적은 비복음이다.
비복음적인 악령이 복음을 공격함.

 

교회공격은 지존 정치 집단이 기독교와 복음을 공격한다.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몸을 공격해서 무너뜨릴 수 없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로마가 되었던 공산당이 되었던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공격받든, 우리가 공격받을 입장에 놓여지지 않았다.
요한복음 16장32-33 “세상에서는 너희 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
보이지 않는 분은 이미 세상을 장악한분,세상을 이긴분이다. 환난이 와도 거부하지마라  환난을 두려워 마라 이미 주님이 이기셨다. 환난이 이것을 취소할 수 없다.
그런데 교회가 되어 버리면 이기자 이기자로 나아간다. 잘하면 이길 수 있다.  우리가 담대하면 이길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조직체이기 때문에 무너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 장악된 교회는 이미 승패는 끝나버린 교회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되어 버리면 교회가 없어져 버리면 복음이 없어져 버렸다고 간주한다.
요한계시록 일곱교회가  다 무너졌다. 이 교회가 어디에 가었는가.  그러니 이교회가 무너져도 없어져도 여전히 주님 손에 완벽한 일곱교회가 있다.
환난이나 기근이나 핍박이나 천사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니 교회사가 무너지지 않는 복음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만일 복음으로하면, 복음사. 묵시적 역사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가 단절절이다.
그러니 작년보다 오늘이 믿음이 좋다 안좋다라는 것을 말할 수 없다.
믿음이 주님 것이지 내것이 아니다. 작년에 내 믿음 괜찮았는데 올래 내 믿임이 좋다라고 할 수 없다. 나와 주님과의 관계이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교회사이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가끔이야기할 것이다.

 

복음에는 역사가 필요치 않고 복음이 무너졌다는 것을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깜짝놀라는 것은 교회사를 쥐고 있는 자들이다.
주님은 무너지지 않는데,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주님이 무너지는 것처럼 착각하고 떨고있다.
이 자체가 교회사 하는 사람들의 큰 오류이다.
이런 자체가 이런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기존 정치 집단이 교회를 공격할 때 교회를 무엇으로보는고 하면 볼때 정치 집단으로 본다.
왜 큰 정치적 집단이 시키는대로 소수의 집단일 말을 듣지 않는가?

 

왜 거시적 정치 집단이 있는데 미시적 정치 집단이 깔짝깔짝 그리는가?
왜 우리 말을 듣지 않는가?

 

그렇다면 로마 정치 집단이 어떤 핑계를 갖고 기독교를 공격했는가?
사도시대100-313 속사도 시대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증오 로마통치자에게 고소함,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로
기존 정치 집단으로부터 인정 받던, 기독교와 유사종교로 인정받던 종교-유대교교 있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여호와 증인 교를 전도 하지 못하도록 나라에 호소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 정부에 이것을 요구하라 수 있는가? 전도하지 못하도록 다 잡아 가도록  합동측에서 요구할 수 있는가? 요구할 수 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답변은 대한 민국은 국교가 인정되지 않는 국가이다. 합동측이 국교라면 여호오증인이 설자리가 없지만.

 

이슬람교는 국교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이상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합동측에게 여호와증인을 고발하는가? 왜 그런고하면 이 세상에 먼저 성장한 종교이고, 후발주자로 여호와증인이 들어왔다.
자신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여호와 증인이 설치면 우리 대한예수교 합동이 오해 받지 않는가?
그래서 저들을 차버릴 이유가 있다.
그래서 유대교가 기독교를 핍박했다.
유대교는 역사적으로 이미 로마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비슷한 기독교가 들어오니 이들을 처단해 달라고 요구함. 만일 요구를 받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데모를 잘하니 시끄러우니 들어주었다.

 

그러니 신흥종교가 설치면 로마국가 존립자체도 손해 보니, 국가 충성하기 위해 아부함. 핍박을 가함.
그러니 유대교도 큰 정치집단 밑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유대교 자체조직을 큰 권력에 의지하면서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도.
로마가 황제를 신처럼 여기는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로마가 워낙 큰 나라이니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로 권력 집중 필요, 모든 사람이, 다양한 의견의 정리정돈을 위해 사람의 절대적인 오류없는 최고자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어느 국가든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인간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교리가 되니.
사실 초대교회도 왕들을 위해 기도하라, 로마서 1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력자에게 복종하라, 하나님이 선한 사람에겐 상을 악한 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 세웠다.
기도한다. 사랑하는 태도. 이런 미온적 태도니 반발.

 

사람의 살과 피를 믿는다는 것이 민중들에게 오해가 되어 사람의 인육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오해됨.
이런 것이 사회에 유포되면 사회 혼란.
제국 내에 다른 교회내에 교회법을 만들어 놓으니 국가법과 교회법이 충돌, 많은 사람들이 교회법을 따름.

 

자연재앙. 이당이 로마제국하의 자연재앙은, 황제의 선정으로 풍년이든다.
국가의 재앙이 들때에는 황제가 잘못해서.
다른 신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유일하게 여호와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종교를 깔보는 행위이다.
기존 신을 믿는자에게는 무신론자이다.

 

이러한 박해가 초대교회에 있었다고 할때 그러면 지금 교회가 이것을 주장해도 왜 박해가 없는가?
이 다섯가지 이야기를 지금 주장해도 경찰이 잡지 않는가?
1945년 이후에 북한에서, 공산당하에서 교회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박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면 실제로 북한의 교회가 박해를 받았는가?
교회가 알아서 가입했다.
일제 통치때에도 알아서 가입했다.
유형기 조직신학. 박형용 조직신학 전에. 유명한 신학자.
신사참배. 알아서 기었다.

 

주기철 목사는 굉장히 고집적이었다.
혼자 반대한다고 교인들이 다 반대했는가? 아니다.

 

해방되어도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드라마의 끝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끄떡도 없다면 내 하나 나서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희망없는 짓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알아서 기었다.
결국 순교는 교회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외부의 권력체가 존재 함으로, 순교라는 방법으로 교회가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방법으로 등장함.
왜 로마 사람들은 , 21세기 사람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기존의 종교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욕망의 흐름이 있는 역사. 이것은 국가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겼으며 왜 생겼으며 왜 사람들은 국가의 최고의 권력단체로 의존하려는가의 내막을 알아야 한다.
왜 알아야 하는가 교회사하면서 이 국가의 권력의 형태를 교회가 그대로 답습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류 사회는 욕망을 생산하는 장이다.
개인의 심리적 억압이 사회적 억압과 연관되어 있다.
국가란 다수읭 욕망이 집결되어있는 것이다.
국가의 본질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떻게 조직체를 구성할 때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인간이 교회를 지키려고 할때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사수하려고 하는가?

 

기계-보통 기계란 용어서 공장에서 쇠로 만들어 낸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기계란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가 아니라 생산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국가란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로 본다.
이것을 생산해 배치 적법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침대가 있다. 사람이 침대가 있다면 보통 생각에는 자기가 의지로 잔다고 한다면, 의자에 앉으면 잠이 안오는데 침대에 누우면 잠이 온다.
침대와 인간이 만날 때 침대를 만나는 순간 자기 속의 욕망이 자기를 이용해 자기를 침대에 눕혀 버린다.
그러나 의자를 만날때에는 잠자는 욕망의 배치가 나타나지 않는다.
침대의 욕망이다. 침대는이성도 의지도 없는데 어떻게 욕망이 있는가?

 

어떤 것도 잠재된 욕망이 발생된다.
보통 이런 의견이 사람들로부터 거부가 일어나는 이유가 보통 욕망이라는 것이
가만히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다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인간은 개인이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못되고 욕망이 새로운 자재와 만날때에는 욕망이 알아서

 

해병대 조교를 만나는 동시에 욕망이 자제됨.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개인의 욕망이 수그러듬.
해병대 조교에서 잠시 종속됨.
이것을 코드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틀이 잡히는 것이다.
욕망이란 생성하는 능력의 흐름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고 항상 흘러간다.
그 까부는 행동도 해병대 조교를 만남으로 자신의 욕망을 반납함으로 종속된다.

 

기관없는 신체: 사람이 종속되어 버리면 말성꾸러기 어린이가 해병대 조교를 만나면 해병대 조교의 기관이 되어 버린다. 만나기 전에는 기관없는 신체, 해병대 조교도 기관없는 신체이다.그러면 가만이 있으면 백수이고. 그런데 제가 돈 드릴테니 우리 아기 좀 교육시켜주세요. 헤어지만 기관 해체고 욕망의 흐름만 있는  신체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어디가서 등록하고 해체한다. 이것이 사회를 구성한다.
이 사회에 대해 가타러와 들뢰즈는 세가지 사회로 구분한다.  토지사회(토지사회기계), 전제군주(전제군주기계), 자본주의 기계라 부른다. 우리가 교회사 안에서 왜 이야기를 하는가?

 

로마는 전제군주에 속한다. 로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교회사가 생겼다.
교회가 로마와 만남으로 교회다운 모습을 뛴다.
따라서 로마란 무엇인가라고할 때, 로마의 정체를 파악할 때, 나중에 로마가 교회형태로 바뀐다. 중세되면  교회형태가 로마에 들어감.
이렇게 되면 로마가 행하던 행태를 교회가 그대로 똑같이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로바티칸이 똑같이 한다. 개신교의 건물체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교회는 고딕형태이다. 고딕이란 로마에서 나왔다.
그러니 교회사를 누가 태어 나고 누가 죽고 무슨 일이 일어 났는가 , 순교했는가 만을 하자고 하면
안된다  그러면 교회는 우리편이고 교회 핍박자, 적들은 우리의 복음의 적인지 착각한다.

 


교회사를 붙잡는 자체가 진짜 복음을 가로막는 복음의 원수인 것을 같이 하는 교회사가 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어렵게 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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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토지에 살면서 인간은 기계이다. 기계는 무엇을 생산한하는가? 인간은 욕망을 생산하는데 기계이기 때문에 욕망을 절취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기능을 갖고 있다.
고기앞에 간다 고기가 뜨오른데 고기를 낚아 챈다. 물고리
욕망을 생산하는
그러니 땅 위에서 인간이 살면서 모든 자연 속에서의 욕망을 욕망의 기계로 그것을 내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기계.

 

이것에 힘센 영혼, 더 큰 기계의 등장.
이럴때 많은 생산물이 이쪽에 몰릴때 한쪽에 이런 욕망집중이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쟁 기계가 발생한다. 사전에 이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쟁하는 가운데선물도 주고 물물교환도 하고 아부도 하고.

 

골고루 권력이 분배도 해 주고, 많이 생산해, 많이 베풀어서 저쪽이 나에게 악한 감정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런데 만일 깡패같은 놈이 나타나면 소수가 다수를 억압한다. 전제군주. 국가의 등장.
어떤 돌발적 상태에 의해 소수가 다수지배. 남의 욕망을 자기것으로 만든다.
일단 발생된 국가는 전쟁 기계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

 

국가란 만이 만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을 자기 코드밑에 다 종속시키고 억악해 버리고, 다른 사람은 그 사람에게 종속되어 부속이 되어버린다. 전제군주체재이다.
이런 전제 군주체제가 전능한 힘을 발휘해 하위계급을 만들어. 몰(집단적), 거시적 국가를 이루기 위해 집단화 시키기 위해 계급을 만든다. 이 계급말고 일반 대중자들은 개별자가 된다.

 

이럴때 전재 군주로부터 빠져 나오려는 욕망이 발생한다. 이것을 탈 코드화라 한다.
하나의 권력체가 나오면 이것에 반발하게 되어 있다. 수긍하면서도 반발하는 요소가 나온다.
억압이 되면 인간욕망에서 반발이 나온다.
교회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로마에서 억압하니 반발이 생기고, 교회에 나오는 뭉치게 되고, 이것은 전제 군주에 대항한 교회의 국가정치화 형태화가 됨. 교회가 전제 군주 형태를 가지만 반발이 나온다. 이것이 다빈치 코드이다.

 

1945. 이집트 사막. 리드함 마디에서 1세 문헌이 발견됨. 빌립복음, 마리아복음, 도마복음등 다수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영지주의,즉 그노시스파에 의해 활용한다.
그러면 이곳에서 나온 것이 왜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를 정치적으로 고려한다.

 

진짜 그당시 예수님이 어떤 모습을 띄고 있었는가를 제대로 알려서 빌립복음, 마리아 복음등을 참조해야 제대로 나오지 않겠는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과 염문이 있다. 애인사이, 부부사이가 된다.
빌립복음을 보게 되면 자주 키스를 한다.
예수님께 애인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신이 아니고 종교적 사도.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고 죽으신 후 무덤에 있을때 예수님의 시체를 돈으로 매수해 빼돌림.
또하나는 예수님과 애인관계이니 임신되어 예수님이 죽은후 이집트 유대인 집으로 가 딸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사라였다. 이 딸과 함께 살다가 돛이 없는 배를 타고 프랑스 남부해안지방으로 감. 이 해안이름이 샹마리드라메르. 지역으로 갔다.

 

돛이 없는 배를 탔다는 것은, 그 근처 성당에 보면, 사라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하녀로 봄.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같이 왔다.
죽을 때에는 영국가서 죽었다라는 설이 있다.

 

이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의 딸이 왜 중요한가.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때 예수님의 피가 혈관을 통해.  딸을 통해 보관됨.
이 딸이 메롤빙거왕조와 결혼, 5-7세기 실제왕조. 할때 이 왕조속에 예수님의 피가 흐름. 우리의 죄를 씻어 주는.
샹그레아 가문.
이 족보가 어떻게 이어져 왔나의 문서가 있다.
1799년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킴.
이때 장군이 샹그레아와 멜로링
시온산 수도회에서 . 템플 기사단.
그래서 그것이 1200대에 오면,. 까딸리. 기존 성직자의 향략과 사치를 비판.
이때 까딸리 종교재판.
이때 수사 네명이 샹그레아족보를 빼돌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기독교가 국가적 형태로 커짐.
인간 욕망상 크진 것은 제거한 것, 많은 것을 제거한 것이 있기 때문에 커졌다.
니케아 회의때,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다 제거함.
그런데 니케아 회의때는 이런 제거하는 일이 없었다.

 

외경. 영지주의적 입장에서 볼때 기존의 순교자의 피로 이룩한 교회말고 개인적으로 양심에 의해 구원이 된다면 교회존립의 의미가 없게 된다.
사도와 사도의 제자들. 이런 사람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교회없이 구원없다.
이미 로마라는 전제군주가 박해가왔을때 교회가 가만있지 않고 자체적으로 단합함. 단합하면서 단단하 영토를 만들고, 코드화가되어 영토를 이루는데 반발되는 코드가 영지주의 복음, 즉 도마, 마리아 복음등이다.

 

부활은 사기이다.
시체가 있었는데.
교회가 만일 예수님의 시체가 있고, 막달라 마리아와 부부사이에서 아기가 나면 정통적인  복음이 다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초반부터 강력한 교회가 자기 교리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다 핍박하고 제거함.
로마는 교회를, 교회는 다른 것을 핍박함.

 

어쨌든 교회가 전통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잘라내야 한다.
메로빙거 왕조가 사라와 혼인을 해서 정통적 예수님의 피가 이어졌다고 했을때, 메로빙거 왕조에 어떤 현상이 있는고 하면 손만대면 다 치유되었다.
이것을 믿는 신부는 기존 교리중심 교회를 버리고, 영지주의 즉 내가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영적인 초월적인 것을 체험하게 되면 더러움 물질로부터 깨끗한 천상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깨달은 자체가 예수이다.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힌트이다.
예를 들면 처음믿을때 십자가의 피를 믿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좀더 신앙생활하면 내가 말씀이 된다.
이렇게 되면 내가 알아서 구원받게 된다.
예수님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나도 깨닫는다.

 

예수님께서 너를 나의 친구로 본다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께 벌벌 떨 필요가 없다고 한다.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목사가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하면 가르치는 사람이듯이. 믿음이 좋아지면 예수님은 가르치는 사람으로 바뀐다.

 

약간 믿음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교회도 안나간다. 왜 내가 알아서 다 하는데.
인간이 무한을 향한
이것을 성적 도착증이다.
성적 편집증, 정신 분열증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욕망을 우리가 붙들 수 없다. 욕망 활동하는 곳에 인간이 따라가는데 그 모습은 도착증,편집증, 정신 분열증을 드러낸다.
정상적인 것으로 만족함이 없어서 비정상적으로 나가면서 쾌감을 느끼듯이, 사람들이 예수믿어서 구원얻는 것이 재미없고 내가 예수가 되어야 된다. 이것은 변태.

 

편집증 하나에 집착하는 증세. 파파라치. 너무 지독한 짝사랑.
네로의 박해가. 도미티아누스 박해등. 박해할 때 황제는 전제군주 성적 편집증에 놓인자들, 자기 말을듣지 않는다고해서 심하게 박해함.

 

교회가 전제군주되었을때 똑같은 형상.
부교역자를 질투.
큰 교회를 이룩한 장로급들,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기존 한사람에게 고개숙이는 기관으로, 종속되는 것으로 만족을 느낀다.
부교역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이것을 정당하게 해주는 것이 삼위일체이고 교리이다.
절대적 지도자가 교회를 이야기할 필요 없다.
복음이란 예수님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유포해서 타인을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집단전제주의의 소망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편집증적 욕망이다. 남의 욕망까지 나에게로 다 복속시킨다.

 

영지주의가 2세기때부터 나왔다.
발렌티누스. 영지주의가 히트를 쳤다. 교회내에서 히트를 쳤다는 것은 기존교회가 다른 것을 해 왔기 때문이다. 기존교회가 착한일을 많이 했다.
빵을 주었다.
그런데 교회왔던 이들, 민중들이, 복음에 관심 없이 교회왔고, 영지주의가 쉽게 정복한 것은 교회가 사람 끌어 모으는데 급급했지 교회가 복음 아닌 것에 관심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교회가 두 세력과 싸웠다.
로마와는 아부, 철학과 신학으로,
또하나는 반항하는 자를, 영지주의를 잘라낸다. 이 방법은 기존 사도들로부터 안수받아 세운 교회만이 참 교회.
터툴리안이 속사도를 연계해서 과감히 잘라냄.
이때 나온 것이 교리체제이다.

 

삼페이지.
기존교회가 어떤지역에 분포되었는지.
교회확장 중심지가 예루살렘.에서 로마제국 여러지역으로확장.

 

알렉산드리아-고린도 아테네, 로마 카르타고. 북부 아프리카-튀니지.
알제리와 리비아 사이의 나라. 기독교가 많이 퍼졌다는 말은 복음을 알고 퍼졌는지, 아니면 그들이 기독교를 받을때 어떤 의도로,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인가가 영지주의 확장시에 그 생각이 드러냄.
기존 구세주 사상과 결부되어 예수님이 이해된다.
이미 이집트에도 부활의 신이 있었다.
사람이 죽은 후 불멸의 존재가 된다. 이것을 합리적 뒷받침.
그런데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불멸이다.
유대인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다. 이제는 구름타고 오시기만 기다리면 된다.
진짜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가르침에 등록함으로 개인구원욕망에 의한 기독교였다.

 

아주 잔혹하게 많은 교인들과 지도자들이 죽었다. 죽을 때 도망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교회사는 이들을 기록하지 않는다. 장렬하게 죽은 사람만 기록한다.
교회사란 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도 초월하는 성도 개인이 죽음조차 이겼다는 순교자의 공로가 드디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