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진리의 전부(전12;13-14)이근호070422

아빠와 함께 2013. 7. 4. 20:01

 

진리의 전부
2007년 4월 22일                              본문 말씀: 전도서 12:13-14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항상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구분해서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이러이러한 사람은 지옥갈 사람’이고 ‘이러이러한 사람은 천국 갈 사람’이다 고 구분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똑같은 성경 본문이라도 갈 방향에 따라서 전혀 달리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 내용을 미리 알려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라는 대목에 대해서 지옥 갈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이 말씀을 지켜서 마지막 심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 이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제가 최선을 다해서 지켜내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날에서 천국편에 속한 사람으로 선언해 주옵소서”라고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천국 갈 사람은 이 본문을 대하면서 이 본문을 포함해서 모든 성경 말씀이 어느 한 곳으로 모아지는 곳이 따로 있음을 압니다. 즉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뜻에 충족되게 경외하고 지키시는 분이 따로 계시고, 또한 그 분이 그 성과를 적용시키기 위해 일부로 이 세상 속으로 오심을 압니다.

 신약성경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러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이것은 곧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그 인간 육의 한계가 영으로 오신 분 앞에서 들통나게 되는 시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이 시점임을 압니다. 이것은 육으로 그 육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육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 육의 힘으로 자신의 육적인 한계를 잇고 회복할 수 있다면 결코 예수님께서 육적인 몸으로 이 땅에 오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예수님이라는 육신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들을 ‘육’으로 규정짓기 위함입니다. 이들의 육은 하나님의 제대로 경외할 수 없고, 하나님의 명령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있을 뿐만아니라 더나아가서 도리어 그 육으로 자신의 의로움과 잘남을 뽐내는 짓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취지가 여지없이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경외와 ‘명령 지킴’을 모독해놓고서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나름대로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내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력으로 통과하지도 못할까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온 산천에 라일락 향내가 진동합니다. 이웃집 담너머로 펴져들어오는 그 향기를 맡는데 일부러 돈을 낼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야말로 은혜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육이니 영이니 구분 자체를 접어두고서 그냥 편하게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서, 밀려오는 행복감에 감격했다면 그는 신에게 무의식적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공짜로 자연물을 통해서 저의 기분을 좋게 하니 이 모든 영광과 기쁨은 신의 은혜로 돌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럴 때 과연, 신에게 감사하는 그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할 것이 될 것이라고 간주될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조차 구태여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라고 따져야 될 대상으로 삼아야 할까요? 꼭 성경 들춰가면서 성경 구절 따지지 않더라면 평소에 일상 속에서 신의 은혜를 감사하면 그 사람은 천국 갈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만약 산에서 라일락 향기를 맡고 신에게 감사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량에 불이 나서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면 그래도 신에게로 감사하겠습니까? 감사보다는 원망할 것입니다. 라일락을 통해서 감사했던 그 업적까지 들먹여 가면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주신 작은 은혜도 은혜라고 찬양했는데 왜 저를 평생토록 처참한 지경으로 살게 하십니까 너무 하십니다”라고 원망할 것입니다.

이처럼 육적인 인간들이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노라고 주장해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드러내는 자기 정당함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행하심을 모독하고 무의미하게 마는 죄악된 태도인 것입니다. 사울왕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왕과 다윗왕의 대비에서 확연하게 압니다. 사울왕은 자기 마음조차 제대로 정돈하지 못합니다. 왔다갔다합니다. 다윗에 대해서 그토록 좋은 호감과 존경을 표하면서 지속적으로 다윗을 없애지 못해서 안달이 나있습니다. 사울왕이 믿을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육으로서 과연 하나님의 관계를 잇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입니다. 실패합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수도 있는 기회에서 겉옷만 살짝 베고 다치지 않게 했을 때에도, 사울왕은 다윗의 처사에 대해서 칭찬을 쏟아놓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자기 입으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도 뜻대로 조절될 수 없습니다. 악신을 걸렸기에 악이 자신을 가지고 놉니다. 이게 바로 육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다윗왕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살려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곧 자신은 ‘상한 심령’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신이 임하니까 이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이점을 알았던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사울왕은 자력으로 구원받고자 하여도 실패해야만 하는 자인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따라 다니시면서까지 말씀을 통해서 ‘상한 심령’임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이 나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을 통보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을 의지하게 되면 항상 오늘이 어제보다 낫다고 여깁니다. 지식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오늘이 어제보다 더 깊은 진리를 소지하고 있다고 자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압니다. 영적으로 더 안다는 것은 자신이 왜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일 수 밖에 없는 가를 아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의 구원문제가 자신의 문제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주님이 책임질 문제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두 번 다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친히 놓치지 않고 맺게 하신 그 영적 관계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과 영적인 관계에 놓여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