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과 전도자
2007년 4월 15일 본문 말씀: 전도서 12:9-10
(전 12:9)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 12:10)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
사람은 부러운 것이 있으면 살기가 괴롭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전도자는 전혀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간상이란 말씀을 되비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부러울 것이 있다는 말은, 여전히 자아가 배고프다는 말입니다. 더 채워넣을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만큼 미흡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욕심이 다 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죄를 유발케 합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축약하면 욕심이 생겨나 사망을 낳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다른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자아가 더 채워넣어야 하겠다는 것이 사망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중지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이기를 금지당하는 것은 자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들은 독자적으로 자기 절대성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은 자기 절대성을 가지면 안됩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인간이기를 박탈당하고 흙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분리되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정리해보면 이러합니다. ‘흙+말씀=인간’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떨어져 나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말씀이 누락된 채로 여전히 자신이 ‘인간입네’ 하고 버팁니다. 말씀과는 관계가 끊어진 채로 ‘인간이다’고 나서게 되면, 자기 절대화에 빠져있습니다.
자기 절대화를 주장하는 것이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온 사회 속에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에서 ‘자기 절대화’에 방해자와 도움 주는 자를 임의대로 구분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방해자는 배격하고 도움 주는 자에게는 아부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홉스라는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고 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들의 철학과 진리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나는 나다!”입니다. “왜 당신은 행위를 그렇게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라는 답변으로 모두 모아집니다. 즉 자신에게서 발산될 것이 오직 자기 자신 뿐입니다. 이처럼 말씀에서 괴리되어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 된 입장에서 말씀을 보게 되면 어떤 착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성경 말씀도 마치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명나무에 관해서 이런 오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즉 생명나무 이름 자체가 ‘생명을 주는 나무’처럼 간주되기에, 이미 죽어가는 아담과 하와로서는 생명나무에 기대를 걸만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생명나무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나무를 따먹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 식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조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나무의 생명은 인간 좋아라 하는 식의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즉 인간을 살리기 위한 생명나무의 생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점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조차 인간을 위한 말씀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흙으로 취급하시지 결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즉 그들에게 생명을 취득할 그 어떤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갖지 말라‘라는 말씀이 없다면 그것으로 인간으로서 권리는 없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말씀과 관련 있는 것이지 결코, ‘사람’ 모양의 신체의 보였다고해서 그것을 근거로 삼아 사람이라고 우길 수는 없는 겁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것이 사람이기에, 이 사람이 아무리 많은 글을 읽고, 책을 쓰고, 학문에 열중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인간, 생명으로서 인간은 어떻게 발생하는 겁니까? 신약 성경에 보면, 빛의 사람이 나옵니다. 성도는 빛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빛이 와서 그 사람을 통해서 빛 그대로 반사되는 사람이다 는 말입니다. 즉 외부의 진리나 말씀이 그 사람을 통해서 다시 진리나 말씀으로 되비쳐나오는 그런 자리에 놓인 것이 인간이다 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독자적으로 아무리 자신을 가꾸어도 그것은 ‘ 자기 절대성’으로 번질 뿐이며, 이 ‘자기 절대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소로 쳐주지 않는 요건입니다. 사람이 자아절대성에 빠지면 지속적으로 자아를 확장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하늘나라까지 자기 이름을 빛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절대함에 만족하는 자는 없습니다. 항상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자기 보다 못한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보고서는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왜 열심히 노력해도 저 사람을 따라잡을 수가 없는가”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자칫하면 자폭내지는 자살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자기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우쭐대면서 깔 볼 수가 있습니다. 교만해지지요. 드라마 같은데 보면,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자주 분노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여러분, 그들이 왜 분노하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자기 절대성에 오점을 남겼다고 분노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평소에 품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자기 절대성이었습니까? 당연히 자기 절대성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인생들이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인간들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 절대성에 훼방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분노한다는 것은 평소에도 늘 그런 요소들로 가득 찬 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참된 인간이란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아가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말씀을 다 지킨 분이 따로 계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그 빛되신 분을 소개하고 반사하는 식으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지혜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자존심을 품고 살기 말고 말씀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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