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기준
2022년 1월 9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9-11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하나님의 ‘노하심’이라는 출발점을 치워버리고 그냥 ‘하나님으로부터’가 되면, 구원되는 양상의 특징들이 사라집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고 사라지고, ‘함께 살게됨’도 사라집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사랑을 듬뿍 주셔서 천국가서도 지금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처럼 나 홀로 편한대로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신의 첫 출발점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닙니다. “제발 홀로 살도록 내버려도”입니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조상의 성품을 그대로 물러 받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만나게 됩니다. 결국 이 만남은 폭력과 폭력의 만남입니다. 타인은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람이 의자를 만들 때는 궁극적으로 자기만 앉기 위해 의자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설계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는 순환구조에서 인간은 벗어날 길을 모릅니다.
벗어날 자주나 방법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의 평소에 설정해놓은 기준은 ‘자기를 위한 기준좌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은 범우주적인 보편성을 갖지를 못합니다. 오로지 최후에 나만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 기준으로 세상과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결국 이것이 타인에게 폭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0:30-36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여기서 강조해야 될 것은 강도의 나쁜짓이 아닙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아픔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새롭게 등장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나타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강도를 굳히 주님께서 책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모든 인간은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더불어 산다는 것’ 자체가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이웃’이 뭔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고 칩시다. “잘 계셨어요? 안녕하세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의 각가지 반응들이 우리 내부에서 들끓기 시작합니다.
①정말 나를 그리워했어요? 정말로 당신을 나를 안다고 장담하십니까? ②나를 알아서 어떤 목적에 써먹을려고 하십니까?③ 요즈음 심심하세요? 날 갖고 놀려고 하는 것 보니까요. ④정작 하고 싶은 중요한 말은 없지요. 그지요?
즉 내가 그 사람을 굳이 알고 지낼 사이가 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이용해야 될 필요성이 없는 이상은 말입니다. 이것을 “할렐루야”로 대신 때워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이처럼 본능적으로 인간들은 주변 인물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가려서 상대해야 될 자인 것을 압니다.
이 폭력에 대해서 너무나도 하나님이 잘 알고 계십니다. 에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실 때에 이 폭력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5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우리는 말씀을 전할 때, 필히 자신의 감정을 전하게 되면 마치 상대로 하여금 나의 감정에 동의해 달라는 강압, 혹은 정신적 폭력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도처럼 말씀을 경유해야 해서 말씀이 전달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해석에 있어 실제적으로 주님의 작용으로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0:17에서, 사랑은 오직 아버지와 예수님에게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실 때는,‘하나님의 진노’로부터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만 있어야 할 이 공간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비로소 사랑이 나옵니다. 다른 이는 말씀을 지키기 못하기에 사랑을 거론할 자격이 못합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나타납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예수님의 행함은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폭탄의 위험을 알고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몸을 던져 백성들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작자들은 그것을 알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나→나→나’의 순환고리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폭탄입니다.
그 폭탄에 자기 순환고리를 가진 자기 백성을 함께 죽여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가 할 일이 ‘망하기만 하면 된다’라는 것을 뜻힙니다. 즉 사적인 기대나 목적과 의도는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구원받겠다고 기대하는 것도 사적인 기준에 해당됩니다. 보편성이 없습니다.
남에게 복음의 말을 할 때, 내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임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망해야함의 마땅함을 바탕으로 할 때만 가능한 겁니다. 이성이 작렬하는 이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에 이것은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이것은 곧 내가 나를 따라잡아서 관리할 대상이 아니라 너머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3에 의하면. 우리는 그저 망하기만 하면 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즉 “나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손으로 구원이 되지 않음이 얼마나 마땅한 사실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9-11(절대기준)22010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9-11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11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 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여기에 “세우심은 노하심……” 진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라고 ‘아니요’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특별혜택을 주는 겁니다. 이것은 진노하심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뭘 준비했느냐 하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일을 시키시고, 그 일로 인하여……, 9절에 보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구출이지요, ‘구원’ 하니까 너무 상투적이라서 구출로 바꾸겠습니다. 너희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건져내는 거예요. 구출을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여기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10절에 나오는 내용이 만든 그 자리가 형성되어야 돼요.
거기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 ‘우리’에 해당 되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인데요. 구원받는 사람은 무엇을 정립해야 되느냐 하면, ‘살았다’와 ‘죽었다’ 둘 다를 알고 있어야 됩니다. 현실에서 말하는 ‘살았다’는 무엇이고 ‘죽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에서 ‘살았다’ ‘죽었다’ 둘 다가 정립이 된 사람에 있어서 하나님의 조치가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10절에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자기와 함께 산다니까 여기서 또 뭘 알아야 되는가? ‘홀로 산다’는 것과 ‘함께 산다’는 것의 차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살았다는 것이 뭔지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죽었다는 것이 뭔지, 그 두 개의 차이를 알아야 되고요.
그다음에 홀로 사는 것과 함께 사는 그 차이, 그 차이를 확대 시켜 나가시는 것, 주님께서 구원의 현장에서 이 두 개의 대립 되는 개념이 확대될 때 확대되는 그것을 아는 그 사람이 ‘우리’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11절에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여기서 그 덕이 뭐냐 하면, 그 차이를 유지하고 확대시켜 나가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둘 다, ‘살았다’ ‘죽었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분노의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살았다’ ‘죽었다’도 모르고 ‘홀로 산다’와 ‘같이 산다’의 차이점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노하심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이 마땅히 진노해야 돼’ 부터 시작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없으면 너는 구원될 수 없어’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이 되게 되면 너희들은 이제 나와 함께 살아야 되는 거야. 그런데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서 죽어야 되는 거야.’ 이 연속적인 개념들의 사슬, 연결,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분노하심부터.
그래서 ‘분노하심’을 만약에 치워버리면 뒤에 나오는 ‘구원’이라는것도 무의미하고요. 그다음에 ‘혼자 산다’ ‘같이 산다’의 그 차이도 모르고, ‘살았다’ ‘죽었다’를 그냥 숨끊어지면 죽은 줄 알고, 숨 안 끊어지면 산 줄 알고, 이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가지고 출발을 하려면 하나님의 진노부터 출발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부터 출발할 때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좀 수사를 합시다. 자기가 수사반장이 되어 가지고 우리 자신을 수사를 해보자는 말이지요. 네가 귀신 씨나락을 까먹었는지 아니면 네가 이성적인지를 한번 수사를 해보는 겁니다.
그 수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성경 구절 하나 거론하면서 어떻게 시작하는 지를 제가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5절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5절에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전도해도 “너는 네 사적인 견해를 나한테 강요하지 마” 이러면 끝나는 문제거든요. “너는 네가 믿는 것을 왜 나한테 집어넣으려고 해? 너는 너대로 살아. 네 인생 네가 살라고. 남한테 강요하지 말고.”라고 했을 때 뭐라고 반박해야 됩니까? 사도바울은 그런 이야기를 얼마나 들었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요 주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우리가 우리 전파하는 경우에 어떤 증거를 갖고 있으며, 우리가 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전파할 때는 어떤 특징적인 증거를 갖고 있는가, 상반되는 두 개의 증거를 내 놔야 되지요. 그냥 뭐 ‘내가 믿으니 너도 믿으라’ 이러면 말이 안 되지요.
사람들이 복음을 이야기할 때 자기의 느낌과 감정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드시 우리의 감정도 이게 문제 있다고 하는 이것을 왜 감안을 안 합니까? 그것은 철저하게 내가 나에 대해서 수사를 안 해서 그래요. 내가 나를 조사하는 형사가 안 되어서 그래요. 내가 언젠가 했잖아요. 자기 자신을 의심하라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면서 내가 좋으면 남도 좋은 줄 알고 밀어붙이는데요.
제가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지금도 우리 반 그 동창생을 잊을 수가 없어요. 키가 작아서 제일 앞에 앉았어요. 2학년 2반 제일 앞자리에 앉았어요. 그런데 지금 고등학교 졸업하고 세월이 몇 년 지났습니까? 거의 한 40년 이상 더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 동창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자꾸 걱정이 돼요.
왜냐하면 저 키 큰 애들이 가면서 한번 툭 치고 오면서 한번 툭 치고. 수업시간에는 그렇게 못 하지만 화장실에 가면서 그런 식으로 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 소리 안 해요. 걔 얼굴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파리해서 몸도 약해요. 골조도 약해서 그냥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앉아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원초적으로 폭력적입니다.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논리적으로는 모르지만 살아가면서 그것을 느껴요. 누굴 만난다는 것은 폭력배를 만나는 거예요. 이 세상 살면서. 그러면서도 구차 없이 만나야 될 이유는 그놈의 돈 때문에 구차 없이 만나지 사실은 전부 다 나를 괴롭히려고 있는 자들이에요. 서로가 다 그렇거든요.
사람들이 만약에 의자를 만든다면 그 의자는 누구 앉으려고 그 의자 만듭니까? 자기 앉으려고 자기 엉덩이에 맞춰서 만든 의자에요. 인간은 자기 만족하면 끝나는데 그 만족을 주변 사람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뭐 주변 사람이라 해서 멀리 사업하는 사람이나 거래 관계에 있는 사람만 말고요, 그런 사람은 물론이고요, 같은 식구, 가족, 자식, 부부도 폭력적입니다. 폭력적이에요.
그동안 폭력적이지 않았던 이유가, 원래 태생이 그런 우리가 폭력을 몰라서가 아니라 많이 참아준 거예요. 그냥 ‘아이고, 나 하나 참으면 그냥 가정 잘 되겠지.’ 해서 그냥 참아준 것이지 절대로 그 내성적인 폭력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갑자기 우리 교회 실험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기존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목사들이 “여러분이 일주일 만에 만났는데 반갑지 않습니까? 이게 형제의 사랑입니까? 서로 옆 사람이나 뒤에 앉은 분 보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평화를 빌라 했으니까 잘 계셨습니까, 주안에서 할렐루야,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도 잘 따라 안 할 때는 목사가 폭력적으로 나오지요. “진짜 앞뒤로 지금 인사 안 하면 설교 안 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억지로 할렐루야, 를 시키는데 할렐루야, 해보면 정말 어색하고 뭔가 이상스럽지만 “여러분, 먼저 인사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평안이 먼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인사해 보세요. 마음이 기쁠 겁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 시험을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해보고 싶어요.
물론 여러분은 일체 안 할겁니다. 여러분은 워낙 시키는 대로 전혀 안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 하지만 머릿속으로 한번 상상해 보는 거예요. 할렐루야, 해도 되고 안녕하십니까, 해도 되고요. 우리 장로님 두 분이 여기 앉아 계신 데 우리 교회 장로님께서 옆에 있는……, 자꾸 지금 장로님 고개 숙이지 말고요, 안녕하십니까, 해보세요.
그래서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하게 되면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게 할렐루야,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려요. 그러면 장로님은 어떻게 나와야 되느냐? 할렐루야, 할 때 “잘 계셨습니까?” 이렇게 받아들이면 안 되고요. 그렇게 하면 기존교회하고 똑같이 되고요. 이렇게 해야 돼요. “당신 나 알아요? 내가 당신 꼭 알아야 돼?”
그래서 한번 생각해 봤어요. ‘왜 저 사람이 나한테 인사를 건네는가?’ 그래서 1번부터 4번까지 제가 한번 말씀드릴 테니까요. 이 중에 틀린 것 있으면 한번 말해보세요. 저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건넬 때 “안녕하십니까? 잘 계셨어요?” 했을 때 1번, ‘정말 날 그리워했어?’ 2번, ‘나를 자기 일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것이 아닐까?’ 3번 ‘심심하구나. 날 갖고 놀려고?’ 4번, ‘정작 나한테 할 말 없지, 그치?’
자 이 중에 틀린 것이 있습니까? 없어요. 인간이 타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요, 자기의 폭력성을 감추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게 너무 중요해서 몸이 막,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모든 자기의 에너지가 자기한테 다 쏠리게, 응집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마귀가 아담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가는 것, 그 외 다른 머리는 인간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로마서 11장 35, 36절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거든요.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순환구조에요. 순환루프, 순환구조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마귀가 이걸 알고 인간을 뭐로 바꿨느냐 하면, 모든 것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다 바꿔놨습니다.
그런데 오늘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절에 예수님께서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나는 나 혼자 이고 싶어요. 모든 인간은. 사람이 언제 선한 줄 알아요? 자기가 혼자 있을 때 제일 선해요. 혼자 있을 때. 제일 긴장이 없고요. 제일 편안합니다. 혼자 있을 때가.
그런데 오늘 본문 5장 10절에서는 뭐냐? 주님께서 같이 살재요.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 사는 그것을 본능으로 본성으로 아는 우리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부담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웠던 모든 삶의 방식과 모든 삶의 태도는 마지막으로 나 혼자 잘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거기에 맞춰서 우리는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5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원받았다는 상태는 ‘너 혼자 이제 못살아. 너는 나하고 살아야 돼.’ 이렇게 그 상태를 제시했을 때 여기서 우리는 벽을 느끼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남한테 전도한다고 자꾸 “예수 믿으세요” 하는 그것, 예수 믿으세요, 할 때 상대방이 “네가 지금 예수 증거 한다고 그렇게 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예수님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너 증거 하는 것이야. 고린도후서 4장 5절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말하는 너는 잘났고, 너는 유식하고, 내 말 듣는 너는 무식하고 나한테 한 수 배워야 돼, 너는 나한테 가르침을 받아야 돼, 라는 그런 태도 외에는 다른 태도가 나한테 안 느껴진다.” 그렇게 했을 때 여러분 뭐라고 반박하겠어요?
반박할 재주가 없습니다. 왜? 인간 자체적으로 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 홀로 살고 싶은 그 벽, 내가 그 벽을 깨고 상대방에게 나아올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 봤던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에서 11절의 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네가 알아서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재주는 너한테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노하심,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이르게 하지 않겠다, 오직 그리스도께 너희에게 구원을 주겠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해서 죽었다, 그렇게 주님께서 너와 함께 살고 싶어한다, 라는 이런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여력의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못하는 이야기만 여기서 나열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진노 받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납득될 수가 없어요.
‘나는 그냥 세상 조용하게 사는데 내가 왜 진노받아야 돼? 내가 왜 죄인이어야 돼?’ 거기서 그 누가 나서서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악과 따먹어서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지옥 간다고 한다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우리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은 네 생각이고! 왜 네 생각을 나한테 강요해?”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아버지 엄마 교회 나온다고 자식들이 교회 나와 줍니까? “그것은 아버지 생각이고 내 생각 따로 있습니다.” 할 때 그 때 부모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여러분 뭐라고 설득했습니까? “용돈 줄깨 나오너라” 이런 식으로, “결혼하면 교회 나와 줄래?” 결혼식 하고 난 뒤에 인사치레로 한번 나와 주고 그다음에 끝났어요.
‘아버지가 나한테 뭘 원하는지 알아요. 아버지는 교회 다니고 복음 알아서 기쁘니까 그 기쁨을 자기 혼자 간직하기가 너무 아쉬워서 사랑하는 자식 나한테 그걸 전달하려고 애쓰는 것 알아요. 난 알아요. 그런데 그 아버지의 마음은 개인이에요. 아버지는 네 맘밖에 모르지요? 난 내 마음만 알면 되잖아요.’ 이게 본성인데 이 본성을 무슨 수로 고칩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이걸 무슨 수로 고칩니까?
그래서 이 본문을 볼 때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오늘 이 본문 말씀, 사도바울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말씀이니까 지키겠다?’ 그것은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다시 우리로 하여금 바닥 상태, 우리 자신이 나밖에 모르고 말씀을 지키기보다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가는 이 본성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확인차, 확인하라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어떤 인간도 나 잘되면 끝나는 거예요. 내가 만든 의자는 내 엉덩이만, 나만 편하게 앉으면 그만이에요. 남 앉으라고 만든 의자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을 자기 자리 만들기 해요. 평생을 내가 맞춤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남한테 양보하는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더라도 이 말씀을 뜻도 모르면서 지켰다고 우기고,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만든 자리에다 방석을 딱 깔고 앉아서 나 구원받았다, 이렇게 우기는 겁니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여태껏! 이것은 뭐 쉬지도 않아요.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구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할 것이 아니고요,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나 천국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 아, 그런 뜻이었군요.’ 그걸 알면 그 사람은 천국에 속한 사람이에요. 구원 같은 것은 신경 안 써도 이미 합격한 사람입니다.
주의 마음이 중요해요. 왜냐하면 주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죽음으로 찾아왔잖아요. 우리는 죽기 싫어요. 왜냐하면 나로부터 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갈 때 절대로 죽음이 끼어들면 안 돼요. 살아야 됩니다. 버텨야 되거든요. 죽어버리면 중간에 끊어지니까요. 끊어지면 지금 공들인 것이 다 헛수고가 되니까 그 낭패를 감당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9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라는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나로부터 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가는 그 기준좌표, 쉽게 말해서 그냥 삶의 기준, 그 기준에 대해서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우리 기준에 대해서 탓을 하지 않습니다.
“네 기준 바꿔라.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전에는 네가 이렇게 네 맘대로 살았지만 성경은 폼으로 있나? 이제는 성경 말씀을 믿고 그것 가지고 하나님의 새롭게 만든 새생명, 하나님의 새로운 형상을 닮기 위해서 너는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춰서 살아라” 이런 것으로 닦달 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기준을 세웠는지 거기에 대해서 시비 걸지 않아요.
새로운 표준적 기준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 가지고 그 기준을 주님 자신에게 적용시켜 버립니다. 왜? 우리한테 해봐야 말이 안 통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한테 해봐야 말이 안 통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게, 사람이 자기 인생을 통해서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몸부림 쳐보지만 사실은 발악을 해도 자기 인생조차도 자기가 감당이 안 됩니다.
인간은 감당이 안 되는 이유가, 내가 내 위주로 살려고 세운 그 표준, 기준, 기준좌표가 어디까지나 보편적이지 않고 나만 챙기기 때문에 이 세상 돌아가는 것하고 이게 어깃장이 나요. 맞지를 않는다고요 이게. 세상 돌아가는 기준이요.
콜로라도에 산불이 일어나서 집을 다 태웠어요. 거기에 수많은 집들이 불탔는데 그 중에 우리 한국 사람이 살던 집도 일곱 가구가 불태워졌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 사람들이 한국 살다가 미국에 이민 갈 때 얼마나 포부도 많고 기대감도 있고 목적도 있었을 게 아니겠습니까? ‘어서 우리 집 불태워주세요.’ 이런 목적으로 산 적 없어요.
나로부터 시작한, 나로부터 계획한 그 계획, 아무 차질없이 나로 말미암아 내가 열심히 살므로 말미암아 기어이 내가 원하는 미국에서의 안정이 보장된 괜찮은 삶, 그걸 기대하고 그 힘든 미국 이민 생활을 했을 것인데 산불이 와서 일곱 가구 집을 다 태워버렸어요.
그때 바람이 불었는데 시속 197킬로, 시속 197킬로로 불어서 뭐 산불이 와서 다 휩쓸어 갔습니다. 만약 그 사람에게 제가 가서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받기에 합당합니다” 하면 아마 넥타이 쥘 거예요. “너는 남의 말을 왜 그렇게 쉽게 하냐? 느그 집에 불 한번 나볼래? 그따구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막 쥐고 흔들 거예요.
“저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네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네가 지금 배부르니까, 편하니까 네 소리 하고 있는 거야” 하고 달려들 때 우리는 뭐라고 답변합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을 때, 사도바울에게 달려들 때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당신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미국에 이민 왔던지 상관없이 주님은 기준을 따로 세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서 당신은 살아오면서 선악 체제에 의해서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나쁘게 하면 저주받는다. 그러면 내가 미국에 이민 왔으면 미국에 이민 와서 하나님 믿고 착하게 잘 살면 내 원래 바랐던 뜻, 미국에 와서의 안정적인 삶, 평화로운 삶, 그게 보장되겠지.’ 이게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벌 받는다는 이 기준, 이 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생각하지를 못한 거예요.
여러분 잘 이해 안 되지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이미 기준은 정해졌어요. 너는 진노 받기에 합당한 기준, 끝났습니다. 진노 받을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진노가 취소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선악을 알았으니까 나름대로의 선악기준에 의해서 ‘제가 따로 성실하게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해도 ‘네가 만든 기준은 내가 우주를 운영하는 기준과 애초부터 이게 안 맞’게 되어 있어요.
사적으로 어떤 기준을 세우든 그 기준은 삑! 이게 안 맞습니다. 윤리 도덕이 왜 나쁘냐 하면, 그게 사적 기준이기 때문에 안 맞는 거예요, 그게. 사적 기준.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착함을 보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 해드리면 여러분에게 확 와 닿을 거예요.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인데 찾아볼 필요도 없어요.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여기에 강도 만난 사람,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었으매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고, 그리고 어떤 유대인한테 사람 취급도 못 받고 개 같은 취급을 받는, 어떤 이방인 취급 받는 사마라인이 그 사람을 불쌍하게 여겨서 현장에서 임시적 처방 해주고 나머지는 자기 비용 대가면서 병원에 가서 치료하라고 해줬다. 자, 이 강도 만난 사람 입장에서는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지금 그 이야기잖아요. 그 이야기할 때 여러분이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강도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느냐? 그리고 강도만난 사람에 대해서 왜 언급이 없느냐? 지금 집중 그 이야기는 강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서도 언급 안 해요.
뭐냐 하면, 강도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개입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이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연결시키거든요. 왜 강도를 책망하지 않느냐? 그게 제일 나쁜 사람인데. 강도 만난 사람이나 심지어 강도에 대해서도 왜 책망하지 않느냐 하면, 강도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이에요. 강도 만난 사람이 강도 되고 나중에 강도가 강도 만난 사람 돼요.
모든 인간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기 때문에 사기당한 사람이 사기를 친다니까요. 자기가 어디서 사기를 배웠겠습니까? 자기가 사기를 당했기 때문에 사기를 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나중심이 되게 되면, 다시 말해서 누구하고도 살고 싶지 않다면 마지막에는 결혼을 하든 자식을 낳든 내 속편한 게 최고라는 것, 그래서 자기뿐이라면 그자가 바로 강도요, 그 사람이 자기 맘대로, 자기 뜻대로 살기 위해서 돈을 얻기 위해서 살다가 결국은 자기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똑같은 강도한테 자기가 강도를 당하면 자기가 강도 만난 자가 되는 거예요.
강도가 더 센강도 만나면 자기가 강도 만난 자가 돼요.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지요. 일찍 강도 된 자가 일찍 성공하는 법이에요. 젊을 때 교회 다니면서 ‘간사’라는 것을 해가면서 주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이 장래 보장해주겠지, 먼저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주겠다고 마태복음 6장에 나와 있으니까 그 말씀 믿습니다, 해가지고 간사 일 하면서 그 나라 복음 위해서 살았더니만, 나중에 사회 나갔더니만 복음 전한다고 해서 아무도 돈 안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본인이 고쳐지지 않았어요. 나로부터 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가는 그것은 본인이 고치고 싶어도 못 고치고 이것은 지병 같애! 기저질환 있지요. 기저질환, 코로나 백신도 막 돌파하는 기저질환 있지요. 이것은 못 고쳐요.
젊을 때 이렇게 말씀대로, 그게 순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씀대로 해보니까 나중에 다른 친구들 보니까 전부 다 성공했잖아요. 뒤늦게야 간사 때려치우고 돈벌이에 나가보니까 늦은 거예요 이게. 여러분 신학교도요, 20대 말에 신학교 가서 대학원 졸업해서 목회하는 사람들 별로 목회 성공 못 합니다.
언제 성공하느냐 하면, 40대 넘어서 거의 50대 다 되어서 신학교 온 사람들 다 목회 성공해요. 왜? 그동안 강도로 살았기 때문에. 강도로 살았기 때문에 교회도 강도식으로 하면 반드시, 이것은 보통 강도들이 하는 이야기지만, 돈 흐름이 다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를 볼 때 돈 흐름이 다 보이는 거예요.
외로운 사람에게 심방 가주고 처음 온 사람에게는 친절을 베풀고, ‘아, 목사님이 나 알아준다’ 해서 돈 막 내고요.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이런 이야기나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런 말씀 딱딱 대 버리는데 나로부터 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가는 그 순환구조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어떤 목적이라는 것이 있고 어떤 기대감이 있어요. 이게 문제에요. 인간이 목적이 있다는 게 문제에요. 기대가 있다는 게 문제에요.
그냥 잘하지 마세요. 그냥 망해버리세요. 그냥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러면 어차피 구원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데. 내가 왜 주의 일에 낍니까? 주제넘게 낀다는 자체가 음흉하잖아요, 음흉. 겉으로는 주의 영광, 하지만 속으로는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한 것, 원래 내가 뭔가 노리고 있는 그것이 주께서 능력 줘가지고 빨리 이뤄지기를 바라는 그런 이중잣대, 그걸 주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다 알지요. 나도 아는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어요?
본인이 본인을 수사해 보세요. 본인이 냉철하게 수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사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이게 나옵니다. 아하, 교회 다니는 것도 다 자기 좋으라고, 자기 성공하려고, 하나님 능력 빌리려고 교회 다니고 성경 본다는 것 다 압니다. 본인이 알아요.
하나님의 화목이라 하는 것은요. 비극적인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이성의 승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 삶을 수사할 때요 어떻게 수사하느냐 하면, 수사본부장인 내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가는 그것을 기준좌표로 해서 수사를 한다는 말이지요. 기준좌표로 할 때는 나한테 반드시 손해 되는 일이 없어야 된다는 그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내 행동에 대해서 내가 잣대를 가지고 들이미는 거예요.
들이밀게 되면 내가 나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기도 왜 하느냐, 기도 왜 하고 너 헌금 왜 했어, 전도 왜 하는데, 교회 왜 나왔어, 성경 왜 보는데, 이렇게 내가 나한테 추궁을 하는 겁니다. 끝까지 추궁을 하는 겁니다.
추궁을 하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나올 거예요. 하나는 뭐냐? ‘이거 다 나 천당 가려고, 나 좋으라고.’ ‘천당 가서 뭐하는데?’ ‘내가 천당 가니까 내가 원래 원했던 목적을 이루는 거잖아.’ 나 홀로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교회 다닐 목적부터가 나 혼자 잘되기 위해서 교회 다녔기 때문에 주와 함께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니까요.
그러니까 남이 나를 지적하기 전에 내가 나를 알아요. 그때 난 알아요. ‘너 구원받으려고 네가 그렇게 교회 다녔구나’ 그러면 그 이야기를 내가 나한테 듣고 ‘쉿! 내 안에서만 이야기하고 남한테는 이야기하지 마라, 응!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그걸 나만 알고 있자.’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수사를 보면, 그런 일은 거의 드문데 이런 일이 있을 거에요.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수사해 보니까 귀신들렸어. 그 귀신이 뭐냐? 성령이라는 이름의 귀신이 들려버린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이성을 능가하는, 이성을 뛰어넘는 행동과 태도가 나라는 몸체를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수사하는 내가 나를 수사하다가 ‘뭐지? 이건 미쳤나? 남들이 그렇게 주의하라, 했던 광신도,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 하는 그 레벨이야 지금? 그 차원이야?’ 도대체 수사하면서도 수사받는 내가 더이상 수사할 수가 없어요. 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니까 여기서 수사를 멈춰야 돼요. 내가 나를 추적하다가 추적하는 그 범주 바깥으로 내가 누구한테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교회 왜 나왔어’ ‘나 몰라’ ‘그러면 헌금 왜 했어?’ ‘몰라’ ‘전도 왜 했어?’ ‘몰라’ ‘다른 뭐 목적?’ ‘아니 없어’ ‘예수 잘 믿고 나중에 생활에 보탬되고 복 받기 위해서?’ ‘아니, 그거 아니야’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바로 사도바울은 이 말씀을 누구한테 줬느냐 하면, 바로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그걸 귀신이라 하는데 ‘성령이 이미 너희에게 덮쳤다. 팍, 덮쳤다.’ 사자가 노루를 덮치듯이 성령이 너희를 덮쳐서 이제는 네가 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만 오늘 본문 말씀을 주신 겁니다. ‘야, 이게 인생을 한평생 사는 이게 내가 꾸려온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되면 뭐가 달라지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셔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것, 교회 한 번만 다녀도 너나 나나 다 아는 그 이야기, 해석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기존에 이성적으로 나를 판단할 때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가기 때문에 이것은 양보를 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착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서 저주받은 우리에게 오셔서, 폭탄이 있는데 마귀가 던진 폭탄, 주님께서 우리가 당해야 될 저주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그 이름을 지금 잊어버렸습니다만 월남전 훈련하다가 오발 사고 난 수류탄 대신 덮어서 죽은 대위 있어요.
죽고 나서 소령으로 된 사람이 있어요. 강재구 소령처럼 나 대신 팍 그 저주, 지옥의 심판, 나 대신 그 폭탄을 덮어 줘 가지고 ‘아, 이게 바로 주님의 사랑이구나. 우리는 주님 덕분에 살았어.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전에는 해석했지요.
그렇게 해석했는데 이게 수사를 해보니까 주님께서 주님이 폭탄을 덮어주는 분이 아니고 주님 자체가 폭탄이었습니다. 같이 죽재요. 같이, 같이 죽재요.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이 수사를 하게 되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역시 나는 옳았어. 교회 다니는 그 선택은 잘했어. 나는 정당했어. 나는 옳았어. 나는 문제 없어.’ 이게 수사 결론으로 나올 텐데 성령 받은 사람은 ‘나는 수사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다. 내가 뭐 가치 있다고 나를 수사해? 주님 저 수사하지 마세요. 이미 저는 버린 몸입니다. 뭐 수사할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그저 주님의 뜻대로 마음대로 하시면 돼요. 저 같은 것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이게 바로 함께 사는 거예요. 이게 함께 사는 거예요. 이게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그 순환구조에 말려든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강도 탓하지도 않아요. 주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에게 너 고생했지, 그것도 하지 않아요. 둘 다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왜 하느냐? 그런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는 거에요. 선한 사마리아인은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족속이라서 자기로부터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에게로 돌아가요. 자기 이익이 없이는 절대로 행동하지 않아요.
시간 지나서 다 잊어버렸을까 다시 말씀드릴게요. 가상이니까요. “서로 인사하세요.” 해서 “자매님, 오셨습니까?” 하면 그냥 하지 말고 퉁명스럽게 딱 정색을 해 가지고 “당신 나 알아요? 왜 내가 당신 알아야 되는데? 나는 왜 당신을 알아야 되고 당신은 나를 왜 알아야 되는데? 날 알아서 당신의 무슨 목적을 이루려고?”
뭐 이런 이야기는 속으로만 담고 있지 겉으로는 절대로 내지 않지요. 그것도 다 교양있고 이성적인 승리를 내야 할 것 아닙니까? 이성적인 승리, 윤리 도덕의 승리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게 있지만 사실은 뭐냐 하면요, ‘당신이 나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날 이용하는 것밖에 안됩니다.’라는 그것이 절로 나오지요.
그럴 때 정색하고 “장로님, 나한테 인사 왜 했어요? 뭐 좀 아는 사이라고, 인사성 좋다고 그 소리 들으려고 했습니까?” 하면 인사한 장로님이 그 소리 듣고 가만 있으면 안 되고 이렇게 나와야 돼요. “아이고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러면 끝나지 아무 문제 아니거든요.
그런데 정색을 하고 “당신 그렇게 해봐야 날 이용하려고 했잖아요.” 하면 “맞습니다. 나는 당신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하면 오히려 정색을 하신 ……, 이게 두 분이 나와서 직접 해야 되는데 그냥 앉아만 계시니 참, 그래서 정색을 하고 퇴박을 주신 장로님께서 “뭐 이런 분이 다 계시네! 내가 80 평생 다 되어가는데 이런 분 만난 적이 없는데 아니 세상에 이런 사람도 다 있네요.”
그러면 그것을 받아가지고요, 가만 있으면 안 되고 “나도 몰라요. 내가 왜 이런 인간이 되었는지. 왜 나는 나의 이익을 챙기지 않는 인간이 되었는지 나도 몰라요.” 그게 뭐냐?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고 그 함께 있는 그 단위가 넓어지면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가 네 이웃이 되겠느냐” 이웃 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그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아는 체하는 사람, 율법사가 주님께 하는 말이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지요. 25절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때 26, 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웃이라는 단어는 다 알겠는데 이웃이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지금 그 사람은요, 자기와 대화하는 그분이 유일한 이웃이에요. 유일한 이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절대기준, 우리가 아는 기준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고 주님 자신이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 기준이 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양부터 시작해요, 양. 목자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랴 양부터 시작해요.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는 여호와의 양이다. 시편 21편 잘 알지요.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그걸 그 사람들이 달달달 외웠습니다. 누굴 위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외웠겠지요.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메시아가 오게 되면 메시아와 잘 알고 있는 사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전혀 대척관계에 있는 것을 모르고 본인이 양이니까 목자 되시는 메시아가 올 것이다. 시편 대로 이렇게 기다렸던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사야 53장 7절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는 양 같아서 다 제갈 길로 갔지만 그 도망치는 양 말고 진짜 양이 있어 줘야 진짜 목자와 양의 관계가 수립된다는 것을 예수님과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여러분이 잘 아는 10장에 보게 되면 양과 목자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목자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데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말씀 가운데서 다른 말씀 드리기가 힘들고요, 요한복음 10장 17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여기서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인간의 시작은 하나님의 진노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진노부터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부터 시작하는 그 일에 왜 예수님이 굳이 끼어들어야 될 이유가 여기에 나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진노의 반대말이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스스로 진노 가운데 있는 사람이 몸부림 친다고 해서 빼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사랑이 주어져야 돼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말씀대로 안 살면서 사랑을 해 달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 강재구 소령 식으로 대신 죽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주님 자체가 폭탄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죽어버립니다. 함께 죽어버리면 더이상 우리에게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가는 그 순환구조가 찢어지고 깨져요남지 않습니다. 남지 않고 그러면 그걸로 우리는 폭삭 망한 거지요. 망해야 되는 것이 망했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요한복음 10장 17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땅에 저주밖에 없는 곳에 주님이 풍덩, 뛰어드니까 저주만 있어야 될, 진노만 있어야 될 곳에 사랑이 처음 생긴 거예요.
그런데 처음 생겨봤자 소용없는 게요, 그 사랑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채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서슴없이 받아들일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죽으면 네가 믿으면 그만이라는 이러한 거래 관계는 이것은 이성적이지 성령적이 아니에요. 예수를 우리가 믿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이것은 우리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우리가 해석을 한 겁니다.
여러분, 해석이라는 것은 뭐냐? 어떤 나타난 현상 가지고 일방적인 오독을 하는 거예요. 코로나 자기점검 키트에 보면 줄이 두 줄이 있는데 뉴스에 보면 나와요. 제가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 반응이 한 줄 있고 두 줄 있고요. 임신 테스트도 마찬가지지요. 한 줄이나 두 줄이 그냥 줄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한테는 그게 해석이 돼요. 그게 해석이 된다고요. 남자보고 그것 해석하라고 하면 그것은 필요치 않은 해석이에요.
그러나 여자한테는 그게 필요한 해석이에요. 임신했구나, 또는 코로나 걸렸구나. 해석은 내가 나로 말미암아 뭐든지 내가 잘되기 위해서 뭐든지 인간은 나 위주로 해석해 왔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해석은 주님한테는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왜? 주님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살 가능성이 없는데 그걸 해석해서 뭐하려고요?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예수님이 멀쩡하게 살아 있어야 뭘 해석을 하든 같이 무슨 미래를 계획을 하든 꿈을 꾸든 목적을 취득을 하든지 할 것인데 혼자 벌렁 죽어버리면 우리는 닭 좆던 개 신세가 되어가지고 우리는 해석할 것이 없잖아요.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간격을 떼어놓는 거예요. ‘너는 해석도 하지 마. 해석하지 마. 그냥 네가 모르는 성령이 너를 휘젖도록 내버려 둬. 너는 그냥 나 믿고 난 뒤에 예수님 나 때문에 미쳐버려. 그냥 미쳐. 그러면 돼.’ 어느 정도 미쳤느냐? ‘망해도 상관 없습니다.’ 이 정도로.
안 망하겠다는 그것도 계획입니다. 그게 인생의 계획 아닙니까? 안 망하겠다는 그것도. 아무 근거도 없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고유하게 혼자서 만들어낸 거예요. 그 사랑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서 협조해서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가 안 믿는다고 사랑이 아닌 게 아니고 그냥 예수님 홀로 만드는 게 사랑이에요.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유일하게 거기에만 사랑이 있어요. 다른 곳은 사랑이 없어요. 다른 데는 양도 아니고 다른 데는 목자가 아니에요.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대로 다른 데는 도적이고 강도예요. 목자만 도적이나 강도가 아니고 목자 앞에 그 목자를 바라보는 양도 도적이고 강도예요.
사기당한 자가 사기 치고, 강도 만난 자가 또 강도질하고, 강도 된 자가 또 강도한테 당하듯이 목자한테 당한 자가 자기가 또 이리가 되고 삯군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거기서 거기에요. 뭐 달라지지 않아요. 달라질 것도 없고요. 줄곧 나로부터 말미암아 나로 가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성도님이 ‘그러면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해도 안 되고 다 안된다면 뭘 어쩌란 말이냐?’ 하실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 초반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만 없어지면 돼.”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 3절에 나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곧 “네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만 있으면 되잖아.” 나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함께 살기 때문에 그리워할 필요도 없어요. 함께 살기 때문에. 함께 사는데 내가 사는 식으로 함께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혼자 사는 식으로 함께 살아요. 우리는 예수님에게 덤으로 붙어 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으니까 우리가 산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주님이 없으면 우리는 산다는 말을 나한테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살았다’ ‘죽었다’를 다시 정립해야 돼요. 예수님이 살았으면 나는 죽어도 살아 있는 것이 돼요. 그리고 ‘홀로 산다’ ‘같이 산다’도 정립해야 돼요. 나 혼자 있으면 무조건 나 혼자 사는 거예요. 같이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죽은 것으로 살고 주님이 내 안에 사는 분으로 살 때 그걸로 함께 사는 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통합해서 결론을 내리면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냥 쳐다보고 살면 된다 그 말입니다. 이게 참 쉽지요, 잉! 이게 참 쉬운 겁니다.
60대 이상 70대들, 옛날에 20대 때 신라면이나 농심 라면보다 더 유명한 라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80대 개그니까 짜증 나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무슨 라면이냐 하면, “바다가 육지라면” 이라는 것이 나와요. 조 미미가 불렀는데 <바다가 육지라면>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같이 있을 때는요 바다가 그렇게 야속한지 몰랐어요. 그런데 이 남자가 떠나고 난 뒤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진 않을 것을~” 이 바다라는 것이 그렇게 야속하고 속상한 것을 몰랐다는 말이지요. 그게 유명한 “바다가 육지라면”이라고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고마움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왜? 더 이상 내가 나한테 신경 안 써도 되니까요. 이미 주님께서는 인간이라는 것은 확정적이었습니다. 진노 받기로. 그다음부터는 누가 하느냐? 내가 할게요. 주님께서 혼자 다 해버리는 거예요. 혼자.
바로 이 사실을 교회기 때문에, ‘서로’기 때문에, 아까 해 봤잖아요. 연습 안 해도 되지요. “나 꼭 알아야 돼요? 왜 갑자기 인사를 하십니까?” 주고받는 그게, 그게 바로 덕입니다. 뭐 덕치고는 좀 살벌하지만 그게 덕이에요. 서로가 주님 앞에서 주님의 사랑 아니면 저주 받아야 될 죄인입니다, 를 서로 나누는 것.
교회, 바로 그 교회를 위해서, 진짜 교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남 이용하듯이 주님 이용해보려는 그 모든 수작이 애초부터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도리어 기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