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
2021년 12월 12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3-18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4: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성경에서 인간이 해내는 것을 찾아 골라내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가지고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구축하는 바가 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복음 이외에 일체 아무 것도 허용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이는 천국가고 싶어하는 나를 먼저 챙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들이 해내거나 이해하는 것만 따로 챙기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수님 홀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죽음이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천국, 혹은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치지 않는 방도를 따로 형성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예수님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결국은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복음은 인간의 의도가 담기게 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의 배격하는 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는 하나님’으로 일하시는 것은 사전에 미리 아시고 실행에 옮기신 일입니다.
요한복음 3:13-14에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의 휴거는 예수님께서 먼저 이 땅에서 보여주신 절차를 따르는 현상입니다.
‘인자가 들리듯이’예수님과 연결된 자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줄줄이 소세지처럼 천국으로 달려들어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마저 죽으심’이라는 내용이 유일한 천국 입성과 관련된 기준이요 표준으로 꽂혀 스스로 일을 만들고 전개하는 현상입니다. 성도된 자는 이러한 일관성 있는 주의 계속되는 일에 말려든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2::32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승천하는 일의 후속작업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휴거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휴거는 우리 인간들이 애쓰고 달성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휴거를 탐내고 기대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평소에 하는 일이 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획투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가만두지 않고 자꾸만 미래를 향해 이상적인 자신의 존재를 고대합니다. 현재 자신을 A라고 한다면 자신의 멋진 미래상을 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A→A*’입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이 사이에 결핍과 결여를 느끼고 부지런히 자신의 목표물을 현실화하기 위해 분투노력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도는 구원에 대해서나 성경 내용을 보고서는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멋진 천국 사람으로 전환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공중에서 주님과 해후하는 놀라운 미래상을 대하고서는 우리는 자신을 휴거 대상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즉 복음이란 ‘하나님마저 이 세상에서 죽음당하심’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내용을 아는 자들은 자신의 파멸과 저주와 망함과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밀어붙이시는 일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에 관한 일이지 나의 관한 일이 아닌 겁니다. 이 인간들의 기획투사로 인하여 인간들은 시간과 공간을 헤아리게 되고 의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껏 이 정도의 세월을 보내었으니 앞으로 몇 년에 이런 존재가 되었다”는 포부를 드러내게 됩니다.
혹은 “나는 지금까지 바닥생활 했으니 이 사회에서 이 정도의 상위층에 속하여 살아야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의할 것같은 이 인간 세계에서는 오직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만 인정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어서 부활하신 그 일로 이 세상 전부가 몽땅 죽은 자들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시간적으로 모든 인간은 한 시점으로 모아지게 되는게 그곳이 바로 음부입니다. 죽은 자들의 집합소입니다. 인간들의 시간 카운트는 오로지 자신의 죽은 순간을 위한 시간 측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인간들의 미래의 분홍빛 계획을 갖지만 실은 전지구적인 장례식의 일부를 점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약부터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요건을 철저하게 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죽음’을 운반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 안에 ‘유월절의 양’이 반복된 제사 방식으로 품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차갑고 냉정하게 참된 이스라엘 본질에서 과감하게 이스라엘에 들어올 수 없는 자의 기준을 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제단’입니다. 일체의 양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 기준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왕상 18:30-31)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이스라엘 내의 가짜 선지자 850명을 현장에서 죽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아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된 자는 이제 부담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장례식장에서 미련 둘 필요없습니다. 성도는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되어서 아쉬울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역(代役)이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를 알아서 “아, 내가 살던 이 세상이 하나님마저 죽이는 그런 세상이구나”를 미리 알게 되면, 바로 이 사람만이 복음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되어 버리운 자가 되지 않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
가짜들을 향하여 떠나버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잊길 바래 나를 지워줘 내가 없는 내가 아닌 그 자리에 다른 사랑으로 채우지마”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가여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7강-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휴거携擧)21121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사도바울이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에 본인이 납득이 되고 설명이 되는 것만 챙기고 설명이 안 되고 이해 안 되는 것은 자꾸 뒤로 미루는 경향들이 있는데요. 그것은 결국은 우리가 미뤄놨던 그 성경 구절이 우리를 고발할 겁니다. 우리를 심판할 겁니다. 너 가짜야, 라고 하실 거예요.
성경을 보실 때에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만 골라보지 마시고요, 행하지 못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바탕으로 깔려 있는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걸 주목하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할 수 있다고 우겼던 너 자신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죽은 자 티를 낸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주께서는 알려줍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는 죽은 자인데 스스로 내가 안 죽었다고 우기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 이것은 내가 지킬 수 있다, 이것은 내가 믿을 수 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자기가 뭔가 실적을 올린 것 같으면 이것은 골라내서 기억하기 위해서 액자에 담는 식으로 하고 그다음에 자기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주 무시해 버리고 안 들은 척하고 그냥 넘어가 버리지요.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이것은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13절에서 18절 죽 보면서 무엇이 확 다가오던가요?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도 하나님은 죽여서 활용하신다. 그게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산자보다. 15절에 보면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아 있는 우리를 어디다 견주느냐 하면, 먼저 죽었던 사람과 의도적으로 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죽은 자의 우위성이에요. 죽은 자가 산자보다 더 하나님 일하시는데 활용도가 높다는 겁니다. 이것은 살아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죽은 자보다 활용도가 낫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려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거울 보면서 이렇게 동작하면서 살아 있잖아, 살아 있잖아, 살아 있다고 우기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죽은 자 위주로 말씀한다는 것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겁니다. 아까 찬송가 109장을 시작 전에 불렀잖아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가사 제일 끝 구절에 보면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1절 가사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이렇게 해놓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태어남에 대해서 인간이 파악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예수님이기를 원해요. 우리가 이해가 가능한 상대자로서 예수님을 이해하기 때문에 아기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1절 마지막 가사에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라고 되어 있어요.
잘 자는 아기 예수님뿐이겠습니까? 아기 태어나서 보채면 어떻게 할 거예요?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가 보채면 감사기도 중간에 훼방 되는데요? 아기 잘도 잔다, 할 때 그 의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니까 부모 애 안 먹이고 부모가 감사 기도 할 때는 알아서 벌써 효도하는 아기로서 태어난 줄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가사에서 너무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엿보여요.
그런데 2절, 3절, 4절, 가사 끝에 보면 “왕이 나셨도다” 되어 있습니다. 왕이 나셨도다, 하는 말은 뭐냐 하면, 폭력적이다, 하는 뜻이에요. 왕이 나셨도다. 지금은 왕이 없어요. 대통령이라도 법안에서 대통령이에요. 법이 지정한, 국민, 주권자들이 지정한 법안에서 대통령은 대통령의 지위를 가질 뿐이지 법안에서의 대통령의 지위를 벗어나서 뭘 하게 되면 촛불한테 걸려서 교도소 갈 일 있어요? 대통령의 법이 지정한 지위를 벗어나게 되면 재직기간 5년 끝나고서 감옥 생활 5년, 이렇게 되는 수가 있어요.
왕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폭력적입니다. 다 부숴버려요. 또 왕의 특징은 그 폭력에 대해서 말릴 신하가 없다는 게 왕의 왕다움이에요. 그래서 왕은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아기로 태어난 거예요. 가사가 제대로 이야기한 거예요. 가사는 제대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왕이 태어나셨다. 겁나 겁 난 분이 태어났다. 우리 인간들의 건의사항이 일절 통하지 않는 분이 태어난 거예요. 이 땅에 작살 내는 분이 태어난 거예요.
그게 뭐냐?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주의 강림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싶어서 고상한 성경 구절, 이웃을 사랑하라, 착하게 살아라, 이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선뜻 마음을 주면서 이 세상이 불로써 타 버린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주 기겁을 해버립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이 우리가 보존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습니까? 이 세상에 누가 들어있느냐 하면, 내가 가꾸고 싶은 나의 미래가 들어 있잖아요. 그 괜찮은 미래, 내가 그리워하는 내가 되고 싶은 그 미래상을 위해서 평생을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 그 왕이라는 분이 오셔서 그것을 다 불로써 불쏘시개로 만들어서 다 태워버리면 그러면 내가 평생을 노력한 것이 다 허사가 되지 않습니까? 그분을 믿어라, 그 말입니까?
그분을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이 폭력적인 예수님은 자꾸 밀어내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자꾸 곡해해서 이 세상에 유포를 하는 거예요.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두 달 전부터 사랑의 하나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막 파견해 가지고. 저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가운데, 어릴 때부터 봤는데 복음 전하는 산타할아버지 본적이 없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할게요. 왕은 폭력적인 존재예요. 폭력적인 존재라 하는 것은 맘에 들지 않으면 용납을 하지 않고 심판하시는 분이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심판할 때 기준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기준이 뭐냐? 천국은 일체 복음 외에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세계, 복음 외에는 일체 허용하지 않는 세계, 이게 천국입니다.
그래서 그 왕은 사람들을 일체 상대하지 않았던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이 미리 아셨겠지만 와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 복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을 남겨야 될 이 업무를 예수님이 하시는데 그 남긴 업무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마저도 살해당해야 된다는 그 사실을 복음으로 남겼습니다.
복음은 뭐냐?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있는 말씀처럼 복음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죽음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 이게 복음이에요. 하나님이 죽은 겁니다. 하나님이 아기로 태어나서.
그런데 그 아기의 기능은 왕이었어요. 폭력적인 왕이었습니다. 폭력적인 왕이 아기로 태어나서 결국 그 폭력적인 발언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몰매 맞아서 죽은 사건,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어느 누구도 이 땅에, 죄의 희생자가 안 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전부 다 죄 안에, 죄가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 갇혀 있는데 그런데 그 주 예수님 만이 거기서 사흘 만에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휴거(携擧)에요, 휴거. 강림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불신자의 세계기 때문에 이 세상은 폭력의 대상이 되어서 망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주님의 강림이고, 그 망해야 되는 가운데서 생명이 출현해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사건이 뭐냐? 휴거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림과 휴거가 취지가 서로 다릅니다. 여러분이 주보에 보면 강림과 휴거가 서로 취지가 다르다 되어 있지요.
“강림과 휴거는 서로 취지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은 강림 이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에게 그 어떤 혜택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일단 죽은 자에게는 그 사람의 포부는 묵살됩니다. 그 인간의 포부에 담긴 죄로 인해 그 인간은 죽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주보)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죽음이에요. 그러면 온통 이 세상은, 하나님마저 죽었다는 말은 죽음이 이 세상의 전부를 꽉 채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채워져 있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은 일종의 이 세상을 장식하는 미장센이에요. 하나의 무대장치 같은 겁니다.
렘브란트 그림에 보면 온통 삼분의 1이 어두워요. 17세기 그 때 화가의 그림 전체가 까만데 그중에서 주제 되는 부분만 약간, 눈 나쁜 사람은 보지도 못해요, 주제부분만 약간 빛이 나는 것, 렘브란트 그림이 그래요. 까맣고 주제만 조명 비추듯이 약간 밝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의 성경을 볼 때에 그런 미장센, 무대장치를 염두에 두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깜깜한 세계에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요. 십자가 복음의 조명발이 거기만 모여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마저 이 땅에 와서 죽었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죽음에 대해서 안다는 겁니다. 복음,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그래서 주님의 죽음을 알아버리면 나의 죽음은 몰라도 괜찮아요. 그게 중요치 않습니다. 이게 복음을 아는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 지금도 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일한다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기적은 뭐가 기적이냐 하면, 이 세상 전부를 한꺼번에 알게 된 것이 기적이에요.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고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계다. 왜? 하나님마저 죽어야 했던 그 환경이기 때문에. 그걸 아는 게 이게 기적입니다.
따라서 기적 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떤 기적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기적을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어떤 것도 신기함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땅에 더 이상 신기할 것이 없어요. 기적도 필요치 않습니다. 내게 기적이 필요치 않아요.
왜? 하나님이 보여준 마지막 기적은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게 기적이었기 때문에 나 혼자 내가 괜찮은 미래를 구상해서 좀 도와주세요, 하는 식으로 기대하는 그런 기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을 인간이 죽으면 그만이에요. 무슨 욕심을 냅니까? 욕심을 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어느 것 하나 우리 인간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성경을 보고 지키려고 하는 자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주 고상한 표현으로 기획투사(企劃投射)라 하는 거예요. 기획투사. 기획 부동산 그런 것 있지요. 기획한다는 것, 미리 계획한다, 설계한다, 기획투사라 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것을 미리 기획해서 그 대상에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을 말합니다. 기획투사.
나로부터의 탈출, 지금 현재의 나로부터 탈출해서 미래의 나로 성공적인 나로 시도하는 것을 존재론에서는 자기의 기획투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바로 그런 기획투사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은 이 세상을 그냥 버리고 탈출하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 14절에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이 말은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왕의 폭력입니다.
그리고 16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스도안에서 죽은자가 우세하다 했지요. 우선권이 있습니다.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끌려 올라가는 거예요. 이걸 휴거라고 해요. 끌려 당겨져서 올라가는 거예요. 위에서 아래쪽을 당기는 겁니다.
이러한 조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의 경로, 이 땅을 거쳐서 올라갔던 경로가 아까 요한복음 3장 14절의 말씀대로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그 절차 그대로 실시해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 28, 29절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이때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그 내용이 뭐냐? 32절에 나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내가 땅에서 들리면, 예수님이 땅에서 들리게 되면 예수님만 혼자 달랑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연관된 사람들이 같이 딸려서 예수님 가신 그곳에 올라간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생명의 출현입니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게 어둠밖에 없는 이 속에서 생명이 출현해서 먼저 예수님이 1번 타자로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거기에 줄줄이 사탕처럼, 줄줄이 소시지 있지요, 그처럼 딸려서 같이 올라가는 거예요.
그게 휴거다 그 말입니다. 올라갈 때 산자가 먼저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가 우선권을 가지고 먼저 죽은 자가 딸려 올라가는 거예요. 왜 죽은 자가 우선 되느냐?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기획 투사에 의해서 인간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거기서부터 카운트하는 거예요.
기획투사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설명하게 되면, 인간은 나가 여기 있고요, 내가 지금의 내가 뭘 기대하느냐 하면, 장래의 괜찮은 이상적인 내 모습을 앞에다가 미래에다가 그리게 돼요. 그걸 그냥 나라고 하지 않고 ‘나☆’, 또는 나를 A라고 한다면 ‘A☆’라고 하는 거예요. 가운데 화살표를 그어놓으면 돼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내가 현재 있는 것을 A라 하고 화살표 긋고 ‘A☆’를 치는 거예요. ‘A→A☆’ 장차 내가 될 공상적인 나, 상상적인 나, 그 시도하면서 뭘 하느냐? 시간을 카운트해요. 10년 내에 달성할 거야, 5년 내에 달성할 거야, 공무원 시험 3년 내에 나는 합격할거야, 경찰공무원 그런 것 있잖아요. 합격하고 제복 입은 내 모습이 나의 스타(☆)가 되는 거예요. 지금의 나는 아니에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살아서 어떤 경찰서라는 특수한 공간에 경찰공무원이 되어서 근무할 때 경찰서라는 그 공간, 그 공간에서 ‘나☆’, 거기서 근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미리 보면서 흐뭇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시간도 무너지면 안 되고요, 공간도 무너지면 안 돼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인간들이 시간과 공간을 카운트한다는 것을 알고요. 어떻게 하느냐? 시간을 압축시키고 공간을 압축시켜버립니다. 공간을 압축시키는 대목을 예수님께서 언급을 했어요. 마태복음 24장 30절에서 이미 언급을 했습니다. 길지만 26절부터 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그러니까 순식간이다 그 말이지요. 시간 측정이 안된다 그 말입니다.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주님의 그 번개 치는 장소가 뭐냐 하면, 바로 공동묘지에 번개 친다 그 말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뉴욕이고, 도쿄고, 보스턴이고, LA고, 서울이고, 전부 다 공동묘지라는 거예요. 대구고 간에.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공간이 압축되는 겁니다. 축소되는 거예요. crunch되는 것, 으깨지는 거예요, 공간이. 빅뱅만 있는 것이 아니고 빅크런치가 있다 그 말이지요. 크런치, 같이 으깨져서 합쳐지는 거예요.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했어요. 구름 타고 오는 것을 본다. 이 말은, 모든 공간은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 하나로 이미 응축이 되고 압축이 된 거예요. 나를 위한 공간개념은 사라져 버리고 오실 분을 바라봐야 될 공간으로 전부 다 연계되고 연결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고깔콘처럼. 고깔콘 알지요. 삿갓처럼.
그 정점에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고 세상 모든, 전 지구적인 인간들은 자기 공간성을 잃어버리고 유일한 공간의 극한점,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는 그 지점,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거예요. 보게 되는데 그 사건은 뭐냐 하면, 심판사건이에요.
그러니까 불신자들을 위한 십자가 사건의 연속성이 강림하심입니다. “나 너희들 손에 죽었잖아. 이 하나님이. 나는 너희를 창조했지만 창조된 너희는 나를 죽였잖아.” 그 십자가 죽었던 그분이 영광스럽게 귀환하고 있는 겁니다. 왕의 왕 다운 면모를 보이면서요. 왕은 뭐라고 했습니까? 폭력적이지요.
왕은 폭력적이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저주해버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복음이 아닌 것은 일체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그 작업을 왕이 되신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복음은 뭐냐? 벌써 잊어버렸지요. 다시 하겠습니다. 복음은 뭐냐? 하나님의 죽음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죽음.
구름 타고 온다는 것. 구름은 이 수평적 공간과 숨어 있는 수직적 공간의 경계면이 구름이에요. 사도행전 1장에서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지요.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보는 데서 올라갔습니다. 그때 제자들 있는 곳과 예수님 올라간 곳의 가림막으로 등장하는 것이 뭐냐? 구름이에요. 9절에 “구름이 저를 가리워” 가리워지는 거예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 말은 예수님 언제 오십니까, 예수님 어느 때에 오십니까, 어디에 오십니까, 언제 주께서 다시 오십니까, 어느 자리에 오십니까, 하는 그 공간개념과 시간개념은 어디까지나 너 중심, 너 살고자 하는 너의 기획투사에 관련된 그 공간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님 중심의 응축된 시간과 공간을 위해서는 모든 인간을 죽은 자 중심으로 즉 자기 백성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미리 죽은 자가 휴거되는 거예요. 미리 죽은 자가.
주님은 공정함의 끝판왕이에요. 봐주고 그런 것 없어요. 살벌합니다. 시간이 응축된다는 말, 참 어려운 말이고 공간이 응축된다는 말은 거기에 비하면 약간은 쉬워요. 왜냐하면 구름타고 오는 것을 보면 되니까. 나머지 공간, 아름다운 지중해, 더운 아프리카, 그런 것은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아프리카는 덥다, 북극은 춥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공간이 뚫리고 하늘과 땅의 경계면에서 누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의 정체가 드러나는 그 공간, 한 지점으로 응축된 공간이 우리한테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없을 겁니다.
문제는 시간 응축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이것은 상당히 난해한 문제지요. 어느 정도로 난해한지 제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감을 고르는데 그냥 고르는 게 아니고 이렇게 고른다고 합시다. 참 말도 안 되지만 이게 그 정도로 어렵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거예요.
내 자식, 참 내 맘에 쏙 들도록 괜찮은 자식을 내가 먼저 눈으로 보고 이 자식을 낳아줄 여인을 차후에 내가 고르고 싶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나는 내 맘에 드는 자식을 갖고 싶은데 그 맘에 드는 자식이 생긴다면 그 자식을 보고 꼭 이 자식을 낳아줄 태를 가진 여인이 이 세상에 어딨지, 라고 1순위로 자식을 먼저 보고 그다음 2순위로 이 자식을 낳을 내 아내를 찾겠다. 이게 인간세계의 시간의 흐름에서는 말도 안 돼지요.
인간세계에서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파란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빨간불 켜질 때 안 건너는 그 정도 수준이에요. 빨간 불에 안 건너면 그 다음 차례에 파란불이 들어오면 그때 건너겠지. 이게 인간들이 경험하는 시간 논리, 시간 의식이에요. 생기지도 않은 자식 먼저 보고 자기가 아내를 고를 수는 없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을 죽여버립니다. 우리 자신을 죽여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보니까 성도는 휴거 되고 다시 영광스럽게 공중에서 하나님과 만나는데 그 만나는 사람 내가 되고 싶어, 라는 생각, 기획투사를 하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성경 보면서 그것을 느끼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인간들 모조리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모조리.
휴거 되는 그 사람이 휴거 될 때 그 휴거 되는 현장에 그게 나이고 싶어, 라는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내가 자식을 보고 난 뒤에 자식을 낳아줄 아내를 구하는 그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인 거예요. 내가 갖고 있는 시간관 가지고 이걸 왕이 벌이시는 시간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애쓰다 보니까 ‘야, 성경에 괜찮은 것 있네. 나중에 죽고 난 뒤에 공동묘지에 있지 않고, 현대 묘원에 그냥 누워 있지 않고 거기서 일어나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대. 야, 그거 나이고 싶어. 내가 그 소망 가지고 교회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할 거야.’ 그런 인간들 다 잘라버려요. 죽어라 인간아!
이 일은 누가 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을 죽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휴거는 어디까지나 누구 소관이냐 하면, 주님이 홀로 결정할 순간이에요. 이 우주는 주님의 결정만 남고 그중에 주님의 결정에 영향을 준 사람은 아무도 살려두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일관된, 십자가에 의거한 작업입니다. 나 이거 할래, 찜할 수가 없어요. 이거 할래, 라고.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이 본문을 보면서 내가 장차 휴거 될 구원받을 사람인 줄을 어떻게 확인하느냐? 그것은 휴거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버려지는 사람이 아, 저렇게 저 기준으로, 복음 기준으로 버려지는 것을 알게 되면 그 기준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휴거될 사람입니다. 참 쉽죠 잉!
누가복음 17장 34, 35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잡초를 뽑고 있는데, 농사짓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뒤끝 있습니다. 그냥 잊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세상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이 세상 전부를 뭐로 보느냐? 거대한 장례식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장례식 공간에서는요, 인간들의 인품, 재산, 숫자, 능력, 재주, IQ, 학력, 아무 소용없습니다. 교회 다닌 기간 몇 년, 일체 소용없습니다. 그냥 공간 자체가 장례식 공간이에요.
이 안에서 개개인 사적인 공상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고 그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장례식이 아주 장대하고 거창하게 벌어집니다. 하늘의 천사까지 다 동원하고 이 땅에서 이미 죽었던 사람들까지 다 오는 거예요. 모든 것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살았다는 공간은 없어지고 하나의 공간,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음부라는 죽은 자만 집합하는 그 공간에 다 집어넣고 거기서부터 주님께서는 어떤 자는 버려두고 어떤 자는 빼가는 거예요.
그 빼가는 기준이 무슨 기준이냐 하면, 바로 복음만이 기준으로 작용해요. 하나님은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 세상에서 너는 살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썼지? 내가 그 세상에서 죽었어. 너희한테 맞아 죽었어.”라는 것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서 그 기준에 의해서 한 사람은 택하지요. 택할 때 “하나님, 맞습니다. 이 세상은 그 정도로 더럽습니다.” 인정하게 되면 그 사람은 휴거될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그것은 네 생각이지 우리 생각은 다른데?” 하면 그것은 버려두는 거지요.
공간의 축소라는 것은 모든 인간을 한 음부에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의 과학, 인간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학문에서는 공간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세계의 공간을 지도라는 것을 만들어서 네모난 직사각형, 정사각형으로 다 쪼개요. 줄로 그어서 작게 다 쪼개서 거기다 번호를 매겨서 이 면적은 중국 공산당, 여기는 러시아, 여기는 일본 땅, 이처럼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대로 구획하는 거예요. 잘라내는 겁니다. 너는 1203동 125호 그런 것.
인간의 자기를 위한 공간은 많은 공간 가운데 타일 하나, 또는 몇 개, 이렇게 합치는 것은 자기 공간을 따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공간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요. 죽은 자가 갈 수 있는 공간은, 네가 어느 아파트에 살고 몇 평대에 사느냐 관계없이 그게 바로 음부다 음부, 죽은 자가 가는 음부에요. 음부에 무슨 25번지가 있고 26번지가 있습니까?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같은 동네인데요. 지금 거대한 장례식장이라니까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뒤끝이 있고 예수님이 뒤끝이 있는지 요한계시록 5장 5,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책을 펴는데 주님의 이 세상 설계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망한다는 설계도인데 사도요한이 그 책대로 되어야 되는데 그걸 펼 수가 없어서 울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일찍 죽었던, 이미 순교했던 그 장로가 말하기를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요한계시록의 장로는 순교자를 말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그다음에 뭐라고 표현되어 있느냐 하면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이게 바로 시간을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 미래를 과거로 읽을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때부터 우리 인간들이 카운트하는 시간은 일체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인간의 시간 계산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확정되어 버렸어요.
시간이 백날 가봐야 제자리 뛰기에요. 음부, 죽은 자들의 나라에서 제자리 뛰기 해 봐야 산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빠져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죽은 자에서 죽은 자, 죽은 자, 죽은 자……,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되어서 휴거된다는 이 기쁨, 아까 했지요, 성도란 뭐냐? 어느 기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버리시는가를 일찍이 알게 된 사람이지요.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휴거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면 거대한 장례식장이기 때문에 거기서 휴거할 때 하나님의 생명의 출현으로 살 때 우리의 기쁨은 뭐냐? 아싸!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홀가분하게 살 수 있어요. 이 땅에서. 마지막 휴가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즐기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휴가에요. Save Last Dance for Me, 마지막 춤을 이 세상에서 추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성도라는 것은 예수님이 먼저 구름 타고 올라간 그 일에 대한 대역자로 채택이 되었기 때문에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을 탈출에 성공한 넉넉함과 여유로움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시간들이 성도의 남은 시간들입니다.
왜? 예수님의 대역이거든요. 예수님의 대역. 내가 예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빠져나갔다. 이런 심정으로 빠져나가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빠져나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델타변이, 오미크론, 헬라어 다 동원했어요. 괜찮아요. 팔에 주사 바늘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백번 맞아도 괜찮아요. 이것이 성도의 입장입니다.
‘잘 있거라 인간들아. 주께서는 나를 대역자로 만들었다. 나로 주님을 대역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대역하는가? 이 땅에서 인간 취급 못 받고 이 땅에서 죽어서. 그런데 생명의 부활의 영이 와서 이 땅에서 빠져나오는 그 역할을 감히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그 대역의 역할을 맡겼다는 게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한번 죽 보세요. 보게 되면 성경에 이해 안 되는 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다 이해돼요. 다 이해 된다고요. 기적이 어디 있어요? 내가 죽어가는 게 기적이지요. 이게 기쁨이지요. 때로는 이렇게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서 일가친척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들이 복음 안 받아들이는데 대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죽었다는 그 사실을 안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서, 또 걱정을 해서 ‘주님이여, 저는 되었는데 저 애는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하잖아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주님께서 분명히 했습니다.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그냥 내어버려 둬. 왜? 주께서 내어버려 둬, 가 없으면요, 뽑히는 자도 없어요. 내어버려둬, 가 있어 줘야 뽑힌다는 의미가 내가 착해서 뽑힌 것이 아니고 주님의 대역을 하라고 뽑혔다는, 주님의 그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뽑혔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다시 지금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천국은 복음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성 좋다가 받아주는 그런 것은 없어요. 하나님의 사람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오실 때 그때 별세에 대해서,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사람들 중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모세 말고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그 엘리야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열왕기하 1장 9절에서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엘리야 그 몸 하나, 그 키가 몇 센티인지 모르고 몸무게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 남성 하나 잡기 위해서 처음에 군대가 5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아하시야라는 왕이 군사 50명을 동원해서 엘리야선지자를 잡고 자 한 겁니다. 지휘관까지 하면 51명이지요.
51명이 엘리야를 잡으러 갔는데 갈 때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51명이 다 죽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뭐 안 했어요. 가만 있었어요. 엘리야는 예수님의 대역이에요. 그냥 가만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왕이 약이 올랐어요. 왕은 폭력적이라 했지요. 그 왕이 자기 영역, 자기 영토, 자기 시간대, 이걸 지키기 위해서 또 엘리야에게 덤벼듭니다.
이번에도 또 50인에다 한 명 더 보냈어요. 첫 번째 보낸 것까지 포함하면 총 102명을 보낸 거지요. 다 죽었습니다. 엘리야가 있는 자리와 비교시키는 거예요. 엘리야를 잡으려고 하는 자리,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고 엘리야의 자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리다. 엘리야는 미리 오신 예수님의 대역이니까요. 죽지 말아야 될 분을 너희들이 죽음의 세계가 멋도 모르고 덤벼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51명 다 죽였어요. 총 102명이 죽었습니다.
또 왕이 약이 올라서 50명에다가 대장을 보내니까 이번에 그 대장은 뭔가 감을 잡은 사람이에요. 엘리야 근처에서 설설 기어들어 갔습니다. 이제는 자기를 보낸 왕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엘리야가 무서워서, 엘리야와 함께 있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벌벌 기면서 “엘리야님, 구차없이 오기는 왔는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잡으러 왔다는 것을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곱게 좀 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빌빌 기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것이 아니고 엘리야가 그래 가자, 해서 갔어요.
생명은 우리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 당신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라 하는 것을 알아서 기고 엎드려서 간구했습니다. 그 오십부장이 엘리야 앞에서 꿇어 엎드려 간구했다고 13절에 되어 있어요.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그 엘리야가 그 전에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유명한 엘리야 제단을 일시적으로 만들었지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대 1로 붙을 때에 엘리야는 단독으로 그들과 붙습니다. 붙으면서 제단을 쌓아놓고 그 제단 위에 제물 얹어놓고 진짜 하나님과 관련된 쪽이 네 쪽인지 내쪽 인지 분명히 하자, 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이 제물을 태우면 하나님은 너희 편이고 그렇지 않고 내 쪽에 불이 붙으면 내 쪽이 진짜 하나님이다, 됐냐, 하고 배틀 들어갔지요.
제단이 있다는 것은 제단을 경계로 해서 버려질 자를 다 버리는 거예요. 그 제단이 구약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 제단,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지만 열왕기상 18장 31절에 엘리야가 돌 열두 개로 단을 쌓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30, 31절에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이스라엘이 무너졌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을 세우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LINE, 선이에요. 그 이스라엘을 세울 때에 이스라엘사람이면서도 이스라엘 될 수 없는 자들을 아주 깔끔하게 잘라냅니다. 무를 자르면 그 단면이 나오듯이 이스라엘은 뭐냐? 하나님의 죽음을 운반하는 자들이에요. 유월절 어린양을 운반하듯이.
그게 제사거든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죽음이 있고 그걸 운반하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는 하나님의 죽음을 담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대역자들이 성도에요. 성도의 운명은 자기의 착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윤리 도덕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십자가 들어 있는 여부에 따라서 우리가 휴거되고 안되고가 결정되는 거예요.
그걸 아주 깔끔하게 잘라내는 것, 아주 매정하게 잘라내는 것이 엘리야의 제단입니다. 제단에다가 물까지 부었지요. 물 세 통을 부어버립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요. 이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하다. 맞습니다. 불가능해요. 그 불가능을 계속 증거 하는 것이 성도의 임무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약이 올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도에게 그렇게 하게 하셔요. ‘복음 믿지 말라. 그래가지고 너는 복음도 아니야.’ 그런 일을 하라고 성도가 있는 겁니다. 크리스마스쯤 되면요. 교회에서 성탄절 봉투 돌리잖아요. 봉투 왜 돌리냐 하면, 교회 계속 하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교회 자체가 시간을 카운트하는 거예요.
교회는 유지하고 말고는 주님에게 달렸지 교회가 교회 유지하겠다고 나서면 안 됩니다. 교회 해서 뭐하려고요? 교회 해서 지옥 가려고요? 기준이 교회 있음이 기준이 아니에요. 교회 등록했음이 기준이 아니고, 교회는, 내가 사는 이 땅은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었던 그곳에서 내가 죽었던 주님의 대역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엘리야로 다뤄가지고 그 850명 가짜들을 전부 다 잘라내는 그 작업의 한 가운데 성도들을, 성도들이라는 말을 바꿔서 여러분들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니까 그냥 성도들, 성도들을 그렇게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때 주님께서 가짜들을 떠나 보내면서 어떤 말을 하시는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거기에 대응하는 가짜 성도들, 교인이지요, 교인들의 반응이 어떤 노래 가사에 잘 나와 있어요.
이제야 깨닫게 되었어 네 맘 떠나간 것을
설마 하는 그런 미련 때문에
그래도 나는 나를 위로해
나 이제 이러는 내가 더 가여워
이제라도 널 지울거야 기억의 모두를
이제 다시 사랑 안 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를 잊길 바래 나를 지워줘
“전에 교회 다니면서 예수 십자가 복음 이야기했잖아. 이제 지워버려. 네가 가짜인 것을. 네가 알잖아. 그런데 어디서 네가 십자가를 언급하고 예수님을 언급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내 예수를 잊어버려. 너, 너 잊어버려.”
제발 지금 내가 바라는 하나 내 얘기 너무 쉽게 하지마
차라리 나를 모른다고 말해줘
시간 지나 알게 될거야 내 사랑의 가치를(십자가의 가치를)
백지영이 와서 한번 불러야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거예요.
나를 잊길 바래 나를 지워줘
“네 입에서, 그따위 입에서 예수 이야기 하지 마. 복음 이야기 하지 마. 이 가짜들아.”
내가 없는 내가 아닌 그 자리에 사랑 채우지마
이게 결정적입니다. “나는 너를 버렸는데 네가 아직도 내게 미련을 가지고 예수 믿습니다, 휴거 되게 해주세요? 저리 안 가? 내가 너를 버리고 난 뒤에 너를 살리기 위한 어떤 복음도 그 자리에 채우지 마.” 이게 가스펠송인지 알았어요. 너무 좋아서. 그러니까 50년, 60년 교회 다니면서 장로, 목사, 집사, 권사, 온갖 것 다 하다가 주님한테 발길로 채인 사람이 하는 노래가 뭡니까?
그럴려고 그랬어
“이제야 깨닫게 되었어. 주님이 나를 떠난 것을.” 아, 인간은 그냥 대충 넘어가요. 왜? 교회가 취미고 이 성경이 오락이니까요. 교회가 이게 친목단체거든요. 이웃사랑하고 북한선교가 어쩌고 누굴 돌보고, 너나 잘하세요, 너나! 남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지금의 현재를, 우리의 미래를 과거로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과거로. 아, 주님께서 강하게 배척해야 될 그 인간성이 내 육신 속에 이렇게 남아 있구나, 를 아주 기쁘게 감사함으로 그걸 보여줘야지요. 성경 구절 하나 보면서 잘했지요, 복 주세요, 이 짓 하고 있는 것, 왜 남들은 기적 주면서 왜 우리에게 기적 안줍니까, 이런 거요.
6.25 전쟁 때요. 전남에 순교하는 교회가 많았대요. 전남 영광 염산교회는 77명이 공산당한테 죽음을 당했는데 교인 3분의 2가 다 죽었어요. 그리고 전남 영광 야월교회는 65명 교인 전원이 다 죽었는데 빨치산에게 죽을 때 몸에다 돌을 매서 물에 빠뜨렸습니다. 지금도 순교비가 그 동네 가면 있어요.
순교, 이게 누굴 위한 순교입니까? 주님을 위한 순교에요, 자기 구원을 위한 순교입니까? 성도는 매일 순교 아닌 날이 없었어요. 매일같이, 매일같이 나는 나의 기획투사를 멈춘 적이 없거든요. 내가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 안 한 적이 없어요. 이게 죽어야 될, 이 땅에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의 본성을 유감없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마음껏 실컷 발휘하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휴거라는 게 그냥 서류만 마련하면 대출해주는 대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나는 내 사람 아니고 아담에 속한 마귀에 속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내가 그 아담에 속한 인간이지만 그 DNA를 내가 내 힘으로 내어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고백하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나를 지옥 보내는 이 덩어리를 내가 내칠 수가 없어요. 왜? 너무 사랑하니까 나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까. 이걸 무슨 수로 내쫓습니까?
주님께서는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말고 내가 너를 죽여줄게. 죽여주는데 이거 하나 해줄게. 죽을 때 죽는 이유만은 알려주고 죽일게.”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있는 이곳이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을 죽이는 그런 못돼먹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장렬하게 죽게 됩니다.
그러니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아까도 말씀 했지만 성경 어느 말씀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 없는 거예요. 끝으로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공중에 있는 그 독수리, 천사 같은 안목은 전체를 전부 불바다로, 허리케인 정도가 아니라 전부 불바다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화, 화, 화, 가 있으리로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남은 우리의 육신, 아직까지 죽이지 않고 남겨 있는 우리는 이 땅을 이런 안목으로 보시면서 이 세상에서 뭐해야 됩니까? 바이, 바이, 바이, 바이, 바이~ <먼데이 키즈>가 불렀던 바이, 바이, 바이~ 하는 노래가 있어요. 그냥 ‘잘 있거라. 잘 먹고 잘살아라, 인간들아!’ 그렇게 여유롭고 부담 없이 그렇게 살 수 있잖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봤던 그 놀라운 미래의 모습을 우리도 같이 보게 해주시고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지속적인 자기 작업의 전개인 것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그럴려고 그랬어 돌아가려고 너의 차가움엔 그래 다 이유 있었던거야 나를 만지는 너의 손길 없어진 이제야 깨닫게 되었어. 네 맘 떠나간 것을 설마하는 그런 미련 때문에 그래도 나는 나를 위로해 나 이제 이러는 내가 더 가여워 이제라도 널 지울꺼야 기억의 모두를 이제 다시 사랑안해 말하는 난 너와 같은 사람 다시 만날 수가 없어서 사랑할 수 없어서 바보처럼 사랑 안해 말하는 널 사랑한다 나를 잊길바래 나를 지워줘
바보처럼 몰랐어 너희 두 사람 아직 기억하려던 그건 그래 다 욕심이야 다짐했건만 매일 아침 눈을 떠 지나간 너에게 기도해 나를 잊지 말라고 제발 지금 내가 바라는 하나 내 얘길 너무 쉽게 하지마 차라리 나를 모른다고 말해줘 시간지나 알게 될꺼야 내 사랑의 가치를 이제 다시 사랑안해 말하는 난 너와 같은 사람 다시 만날 수 가 없어서 사랑할 수 없어서 바보처럼 사랑안해 말하는 널 사랑한다 나를 잊길 바래 나를 지워줘
내가 없는 내가 아닌 그 자리에 사랑 채우지마 혹시 만날 수 가 있다면 사랑 할 수 있다면 아프잖아 사랑한 널 지켜보며 사랑한다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