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류
2022년 1월 23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6
(5:16) 항상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곧 심판의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무리한 요구처럼 들릴 겁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다보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기에 항상 기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도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항상 기뻐하라’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요 주님의 하시고 있고 지금 벌리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성도에게 계속해서 적용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항상 기뻐하라’에 낯설어 하는 이유는 인간 내부에 항상 일어나는 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옛 사람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주워모으고 긁어 모으는 일을 ‘항상’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고린도후서 5:17에 보면, ‘새로운 피조물’(if any man be in Christ, he is a new creature)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순전히 예수님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이로서 이 새로운 피조물의 생각도 예수님의 생각도 동일한 생각을 하는 새로운 인간입니다.
반면에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사람들은 옛날 방식대로 그대로 유지합니다. ‘항상’ 기뻐하지 않고 어쩌다가 기뻐합니다. 기뻐하고 싶을 때만 기뻐합니다. 옛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선악체제에 의해서 생각합니다. 즉 내가 잘나고 훌륭하고 복받을만 하고 더 풍족하게 존재할 만한 일이 일어날 때만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내게 나쁜 것과 내게 좋은 것만 신경쓰면서 구분짓습니다. 이런 옛사람에게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은 모조리 나의 검증을 거쳐서 내가 처리합니다. 만약에 굳이 나를 좋게 해주지 못할 것이 들어오게 되면 모조리 허비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과 천국은 철저한 인간들의 관리책이 아니라 그 인간 자체를 포기하라고 종용합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현 자아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기 위애 몸에 좋다는 모든 시도를 다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율법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생각해놓은 것은 옛사람을 수리, 보선하는 식의 구원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주님만이 해내세는 일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그 청년에게 자신을 포기하기를 종용합니다. 즉 ‘뭐든 포기할 수 있는 것을 네가 찾아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부자에게 있어 자기 포기의 끝은 자신의 재산이 자기에게 다 떠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청년은 거절합니다. 당연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영생은 예수님 자신을 포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53-55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것은 참 이상한 요구이십니다. 선악체계 속에서 인간들의 행동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채택에서 가져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신 말씀에 의하면, 인간들은 자신의 살과 피를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옜사람 속에 해당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갈라디아서 4:29-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즉 우리의 옛사람은 주님이 벌리시는 일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억 속에 이 옛사람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이 옛 성품 때문에 ‘항상’기뻐하지를 못한 겁니다. 자체적으로 자기괸리에 열중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아멜렉 군사들이 이스라엘 진영을 덮치면서 공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의 군대를 막게 하시면서 동시에 모세로 하여금 높은 산꼭대기에 지팡기들고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두 광경을 다 보여지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세의 지팡이가 산밑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어떤 식으로 조율시키고 있는 가를 보게 합니다. 산밑의 전쟁은 옛사람들의 방식 그대로입니다. 인간이 가진 힘과 힘의 대결입니다. 하지만 산 위의 지팡이의 높낮이에 따라 옛사람의 방식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과 근접해 있고 그가 하나님(모세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대상)을 높이드는 여부에 따라 산밑의 전쟁의 추이가 달라집니다. 이는 곧 인간들의 옛 사람 방식에 따르지 않는 이 이스라엘은 기존의 이방민족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는, 동류(같은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감잡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작업으로 인한 새로운 피조물 요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민수기에 나오는 발람 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신이 임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축복과 저주에 관한 이스라엘의 권한을 말한 사람입니다. (민 24:9)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저주를 받아 죽습니다.(민 31:8)
발람 선지자가 그토록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이 얼마나 이방민족과는 완전히 다른 복된 위상인 것을 알면서도 결국에 돈 유혹에 빠져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했다가 본인이 축복한 그 이스라엘에게 저주받아 죽습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 31:16)
왜 발람은 이스라엘을 망하도록 행동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자신이 동류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매달아 죽게한 것도 예수님과 자신이 동류의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점이 도리어 항상 기뻐하는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을 소급해서 보니 참으로 포행자요 살인자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딤전 1:13,15)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옛 성품을 그냥 배설물로 흘러 보냅니다.(빌 3:8) 십자가이야말로 구원이 자신의 옛사람을 손질해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됨을 안 겁니다.(갈 2:20-3:1) 항상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옛사람을 짐으로 여기게 하시고 자키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동류)22012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
여기에 ‘항상’이라는 말이 들어간다는 말은, 이것은 공격용 멘트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가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항상’이라는 말을 쓴 겁니다. 이것은 도발이지요. 그래서 항상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삭제 대상이고 제거대상이 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자체가 심판의 기준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변명을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 뜻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고 우리는 항상 기뻐하지를 못하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그것은 바로 ‘항상’이라는 말 속에서 인간에게 항상 있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게 항상 기쁨을 방해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항상 있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본인이지요. 내가 항상 있는 거예요. 내가 항상 있는 거니까 내 걱정을 항상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키고 관리하고 유지하려고 하니까 항상 기뻐할 틈이 없어요.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변명 늘어놓지 말고 항상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게 바로 없어져야 될 것을 네가 지금 붙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항상 기쁘지도 않은데 그걸 왜 붙들고 있느냐 하는 거지요. 항상 기쁘지도 않은데. 사람들은 말합니다. 항상 기쁘지는 않지만 ‘우야다가’ 기쁘다는 거예요. 여기 ‘우야다가’라는 것은 ‘어쩌다가’의 경상도 사투리지요. 그런데 ‘우야다가’ 가 더 정답게 들려요. 우야다가, 가끔, 드문드문, 때로는.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야다가 기쁜 것, 드문드문, 가끔 기쁜 것 가지고 항상 기쁜 것에 대해서 이걸 대체하려고 하지 말고 “항상 기뻐하라” 앞에서 비로소 내가 우야다가 기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존재라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가끔 기쁜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 ‘항상’을, 어쩌다가 기쁜 것 말고 항상 기뻐하라, 를 네가 발휘할 수 없다면 그 ‘항상’을 방해하는 요소가 네 속에 있다는 거예요. 네 속에. 그러니까 너를 그냥 건성건성 지킬 생각하지 말고 그걸 쪼개보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쪼개버리면 항상 기뻐하라, 에 반항하고 저지하고 방해 놓는 그런 요소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항상 기뻐하는 거예요. 드문드문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어쩌다 기뻐하는 것 아니에요.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네가 지금 바깥에는 와 있는데 네속까지 안 들어왔다는 표시로서 항상 기뻐하느냐를 우리에게 내밀고 있습니다. 주의 일이 네 속까지 들어왔느냐, 아니면 네 바깥에 머물고 있느냐를 보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게요, 열심히 노력합니다, 항상 기뻐하도록 하려고 하는데 환경이 안 받쳐 주네요, 이런 식으로 구시렁구시렁 뒷말 나오는데 지금 주님께서 항상 기뻐하라, 하는 이 말은 주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내 일에 항상 기뻐한다. 그런데 너는 내 사람이면서, 나는 내 일에 기뻐하는데 왜 너는 나의 일, 주의 일에 항상 기뻐할 줄 모르는가? 뭔가 수상하잖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적어도 네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누굴 닮아야 되느냐 하면, 아담을 닮지 말고 새롭게 창조하신 주님을 닮아야 되잖아요. 그래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 이전에는 뭐냐? 드문드문 기뻐했어요. 드문드문 기뻐했고 우야다가 기뻐했지요.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어떤 수준이냐 하면,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 그 수준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하는 일에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다음 말이 중요해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전 것은 지나갔다는 거예요. 그러면 지나간 게 뭐냐? 뭐가 지나갔느냐? 이전 것. 이전 것이 뭔데? 이전 것은 우야다가 기쁜 내 존재, 그것은 지나갔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삭제 안 되는 것을 내가 삭제해 버렸잖아.” 그런 뜻이거든요. 주의 일이 네 코앞에 멈추는 것이 아니고 네 안까지 쑥 들어와 버리면 네가 스스로 지울 수 없는 그것을 내가 삭제를 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옛날 네 모습이에요. 우야다가 기쁜, 어쩌다가 기쁜, ‘우야다가’ 이거 유행 되겠다, 어쩌다가 기쁜 그것을 이미 삭제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너를 없애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 안타깝지요. “왜 저를 없앱니까? 주님과 좋은 관계 유지하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내가 너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잖아. 그거 어디로 치웠어? 그거 어디에 갔다 버렸어?”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러면 옛것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즉 “새것 어디 있어? 갖다 버린 거야? 도대체 어디에 처박아 놓은 거야? 새것 어디 있어? 새것 내놔봐. 항상 기뻐하는 새것 내놔봐!” 다그치지요. 그래서 말씀은 공격용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없나이다.” “내가 줬는데?”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성령을 모셔서 대질 심문 한번 해봐? 내가 줬잖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건 뭐예요? 사달 난 거지요.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씀 하나가 우리의 현 형편을 완전히 노출 시켜서 사달 내는 겁니다.
그냥 우야다가 기쁘면 성도인 줄 알았지요. 우야다가 기쁘면 성도가 아니고 오늘 본문에는 “항상 기뻐하라” 에요. 지금 항상 기뻐하라는 이 이야기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하는 이유가, 그들이 지금 환난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어요.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고 옛날 그 인간 그대로 있으면요, “항상 기뻐하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옛날 피조물 그대로 있으면 “항상 짜증하라” 하면 아멘,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원망하라” 그러면 아멘, 이렇게 해요. 왜? 그게 옛날 인간의 한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어떤 한계치를 갖고 있어요. 한계치 안에서 인간은 생각하고 한계치 너머를 인간은 생각지 못합니다. 옛사람 그대로 갖고 있으면 옛사람을 넘어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생각할 줄을 몰라요. 왜냐하면, 그 테두리를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나는 이것까지 안다는 그 테두리를 본인이 만든 겁니다. 울타리를 만든 거예요. 프레임을 만든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그 울타리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쳐놓은 울타리입니다. 인간이 쳐놓은 울타리는 뭘 못 넘어가느냐 하면, 선과 악, 그 지식 범위를 못 벗어나요. 선과 악. 악하면 지옥 간다. 그걸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마침 우리가 생각도 못 했는데 여러분이 예배 시작 전에 들었던 그 말씀이 딱 적용되네요.
여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보통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그다음 빈칸에 뭐가 들어갈까요, 물으면 “그것은 우리가 의롭기 때문입니다” 선악체계에서는 이게 아구가 맞아요. 이빨이 딱 맞아들어간다고요. 그런데 여기서는 뭐냐?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시편 143편 2절 말씀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이게 지금 앞뒤가 논리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이여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왜? 제가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옛날 인간들이, 새로운 피조물 말고 옛날 아담에 속한 그런 인간이라면 뭐 뻥~ 할 거예요. 멍~할 거예요. 무슨 말이에요, 이게? ‘악했으면 매를 맞아야지. 매 맞아도 싼데 왜 심판 하지 말라 하지?’ 이게 바로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선악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흔적이에요. 선악이니까 나쁘면 매 맞고 착하면 상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시편 143편에 나오는 이 신앙인은 프레임, 자기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프레임이 이게 넓혀진 거예요. 넘어선 거예요. 선악,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벌 받는다는 체계를 넘어선 겁니다. 넘어서니까 주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사적으로 내가 악하기 때문에 심판 안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친히 준비해놓은 그런 자리가 있어요, 자리가. 이미 정죄함이 없는 자리가 있다고요.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의 눈앞에서, 목전(目前)이니까 “주의 눈앞에서 의로운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도 그래?” “나도 그래” “너도?” “응 나도.” 전부 다 똑같은 고백을 해요.
이 말은 뭐냐? 이미 심판을 받지 않는 이유가,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내 한계를 넘어서 버린 주께서 마련한 그 자리의 원리원칙이 그러하기 때문에 누구나 동의합니다. 사람들은, 옛사람은요, 흔히 하잖아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고요. 옛사람의 특징이 그거예요. 경솔한 짓을 안 하겠다는 겁니다. 나한테 실수가 되는 짓을 안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뻐하는 것도 기뻐할 것만 골라서 기뻐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처럼 항상 기뻐하라고 하니까 옛사람과 옛사람, 새사람 되지 못한 사람은 불뚝 성질내지요. 불끈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데 무슨 수로 기뻐합니까?” 여러분, 하루하루 사는 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routine(일상)대로, 그냥 패턴대로 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일이 생기느냐는 말이지요. 그게 이상하게 납득이 되지 않는 거예요. 무슨 기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아무 일도 없는데 무슨 수로 항상 기뻐하라, 이건 윽박지르는 소리 밖에 안 되거든요. 무슨 수로 항상 기뻐합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그러니까 이 항상 기뻐하라, 가 얼마나 도발적이고 우리를 공격하는 이야기인지 몰라요. 어떤 코미디언이 그런 이야기 했다고요. 어떤 선배가 “너는 그 사람 결혼식 하는데 왜 참석 안 했어?” 하니까 그 조세호라는 코미디언이 하는 말이 “모르는데 어떻게 참석해요?” 이게 복음 아닙니까? “네가 천국에 대해서 기쁘지?” “천국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기뻐합니까?” “네가 구원받았는데 안 기뻐?” “저는 구원 관심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기뻐해요?”
아, 정말 정말 복음적이에요. 왜 이 복음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느냐 하면요 스물네 시간 줄창 자기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생각 요만큼도 안 해요. 주님은 항상 기뻐하고 있는 중인데 우리는 전혀 감이 없어요. 감이! 감 다 죽었어요. 감은 가을철에 열리는 거지만, 감이 다 죽었어요. 기쁨은커녕 벌벌 떨고 있어요. 항상 공포에 휩싸여 있어요. 항상 두려워하라, 하면 아멘, 해요. 항상 두려워하라, 아멘, 그 외에는 아멘이 안 들어와요.
인간은 얼마나 자기 문제에 조심스러운지 매사가 그냥 주식 투자해놓고 그 추이를 바라보는 심정이에요. 모든 게. ‘오늘도 올라가야 될 텐데, 내려가면 안 되는데, 올라야 될텐데, 목돈 넣어놨는데, 센티온 내려가면 안 되는데……’ 그런 거요. 그래서 ‘항상’이라는, 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정말 옛사람은 사도바울에게 욕하고 싶어요.
지금 여러분, 나보고 욕하고 싶지요? 아니에요. 지금 사도바울 욕하세요. 사도바울보고 욕하는 것은 예수님 보고 욕하는 것이고, 예수님 욕하는 것은 하나님 욕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욕 못해서 화가 나 있어요. ‘왜 내 인생을 이따구로 만들었습니까?’ 내가 인간성 좋으니까 교회 나와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항상 기뻐하라’ 하는 이 극단은요, 선악체제를 갖고 있는 인간에게는 금물이에요. 인간은 뭐냐? 극단이 아니고 균형이에요, 균형. 인간은 균형 맞춰 사는 이게 옳은 인생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기뻐하는 경우에는 선악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선악에서 자기는 자꾸 선한 편에 서려고 하거든요. 내가 선하고, 복 받을만하고, 이러한 증거들을 주신다면 나는 거기에만 우야다가 기뻐하겠다, 이렇게 나와요.
개구쟁이들 엄마가 키운다고 애먹잖아요. 특히 딸보다 아들 키울 때 힘들 거예요. 집에서 목욕 시킨다고 옷 막 강제로 벗기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엄마, 나빠!” 그렇게 해요. “엄마, 나빠!”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하면 “사도바울 나빠!” 이게 옛사람의 본심이 툭 튀어나온 겁니다. 푹 쑤시니까 옛사람이 툭 튀어나와요. “나빠. 우야다가 기뻐하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항상 기뻐하라? 그것은 사도바울이 나빠. 그것은 너무 극단적이야.” 이렇게 대듭니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성경 보면서 성경도 내 속에 들어오면서 내 허락 맡고 들어오기를, 내가, 옛사람이 균형 맞춰서 조절하고 있지 않았었는가, 한번 되돌아보세요. 나는 선악 정도의 균형은 내가 알아서 할 수준이 되고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만 주신다면 내가 사정 봐서 말씀 더 들을 때 있고 안 들을 때 있고,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성경에 다음의 말씀 같은 것은요, 그냥 건성으로 넘어가 버려요. 뭐냐 하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것도 얼마나 극단적인 겁니까? 우리가 기뻐하는 균형 맞추기 아니잖아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 살과 네 피를 버려라, 는 겁니다. 사람들은 주의 말씀을 봐도 안 받아들이는 이유가, 자꾸 주의 말씀을 허비를 해요. 더 시급한 문제가, 자기 잘나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선악체계니까요, 참 이런 것이 어려운데, 선악체계에서는요, 내게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그것뿐이에요. 좋은 놈 나쁜 놈만 있어요. 수상한 놈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 하니까 예수님을 뭐로 보느냐? 수상한 놈으로 보는 거예요. 수상한 자로. 그러니까 그들은 수상한 자는 유보적이에요. 다 그 자리에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떠났다는 것은 뭐냐 하면, ‘아이고 큰일날 뻔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의 선악체계는 뭐냐 하면, 말씀을 듣든 뭘 듣든 언제든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여지를 남기고 외부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성경 자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옛사람한테는 그게 외부적인 거예요. 내 허락 없이는 내 안에 못 들어오는 요소라고 보는 겁니다.
50년, 60년, 교회 다녀도 마찬가지예요. ‘어딜 내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들어와?’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우야다가 기쁜 것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항상 기쁜 것이 내 안에 들어와 버리면 나는 바보 병신 된다는 겁니다. 뭐 그리 기쁜 일이 있다고. 아무 일이 없는데. 지금 요구하는 것은 항상 기뻐하는 것이고 실제 인생을 현실을 살아가면서 내가 느끼는 기쁨은 어쩌다가 기쁜 거예요. 어쩌다가. 두 달에 한 번이라든지, 주식 확 오를 때나, 보너스 받을 때, 이렇게 어쩌다가 기쁜 거예요, 어쩌다가.
과속했는데 안 걸렸을 때, 이런 거요. 어쩌다가 기쁜 거예요. 나를 두고, 너는 선하다, 너는 훌륭하다, 너는 복 받을만하다, 너는 대단하다, 그렇게 누가 칭찬해주는 그것만 골라서 나에게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게 옛사람이 자기 관리하는 방법이거든요.
바로 그 이야기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그 오류를 계속해서 사는 평생 동안 범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자기가 자기를 기쁘게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 앞에서 나와서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누구 좋으라고 지키는 겁니까? 십계명이 괜찮아 보여서, 그리고 그렇게 지키면 그 방법이 나의 값을 올리고 나의 가치를 키워준다고 생각해가지고 그래서 십계명을 지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19장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청년이 재물 많다는 것을 본인이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꼬깃꼬깃 숨겨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뭐든 네가 포기하고 싶은 것을 네가 찾아보라는 이야기에요. 인간은 뭐든 내 성에 안 맞으면 허비를 하지 자기가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깥에서 외부적으로 찾아온 것을 갖다 버리지 나 자체를 갖다 버리는 그런 일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뭐냐? ‘너를 갖다 버려라. 너를 외부적으로 찾아오거든 그걸 네가 접합을 해서 이참에 너 자체를 갖다 버려라. 네가 새사람을 방해한다. 네가 영생을 방해한다’ 그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포기할 줄을 몰라요. 새사람이 와야 옛사람이 포기되는 겁니다.
그런데 새사람이 오지 않은 한 포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꾸 흉내 내기를 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복음이 좋아요, 복음이 기뻐요,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왔습니까?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그 사람들 어디 갔어요? 그 사람들 복음 좋아하는 것 우야다가 기쁜 거예요. 어쩌다가, ‘어쩌다가’ 보다 ‘우야다가’가 훨씬 발음이 좋다, 우야다가 기쁜 거예요, 그 사람들.
그 사람들 나가면서 이런 핑계 댑니다. “신앙 강도 키워서 오겠습니다.” 포기하라니까 포기는 안 하고 신앙 강도를 키우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게 뭐냐 하면, 오뚜기근성이에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으키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옛사람들 다 아는 거예요. 옛사람들이 다 아는 거라고요. 아까 이야기 했지만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너는 겁니다. 이 근성. 물론 요즘은 그거보다 더 뛰어나요. 돌다리 두드려보고 안 건너요. 그 정도로 아주 철저합니다.
그러나 성도는요, 돌다리 건너 가지고 돌다리 부숴버립니다. 왜? 그쪽으로 안 왔거든요. 진짜 이게 웃을 일인데 이게 위에서 왔거든요. 내가 신앙생활 해서 내가 새로운 피조물 된 적이 없어요. 내가 노력해서 신앙생활 된 적이 없습니다. 이거 생각할 때마다 ‘항상’이에요, always, 항상 기뻐요. 이걸 생각할 때마다. 이건 미친 거예요. 이건 극단이에요, 극단. 이건 균형이 아닙니다. 수상한 놈! 그렇게 욕하다가 내가 수상한 놈이 되었어요.
그런데 옛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옛사람은 우리가 노력해서 구원 못 받는다, 천국 못 간다, 하니까 그쪽에서 하는 말이 “네가 가라, 하와이” 이런 거예요. “나는 그런 식으로 천국 안 가겠다. 하와이 네가 가라. 난 안 갈란다. 그런 천국은 네가 가라” 하는 식으로. 그러면서도 자기 식대로 천국 안 넣어준다고 주님 나빠, 차마 그 말은 못 하지요. 교회 나오니까. 그냥 꾹 누르고 있지요.
옛사람의 특징에 대해서 사실은 성경은 그 전부를 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9, 30절에 보면, 주님 쪽에서 하나님의 약속, 말씀이 오게 되면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나누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왜 너의 옛사람을 안 쫓아내려고 하느냐, 그 말이에요. 왜 안 쫓아내려고 하느냐. 자꾸 복음의 간만 보고 이걸 기뻐할까 말까, 본인이 선택하고 있어요. 옷가게 와 가지고 신상에 손때 다 묻혀놓고 “둘러보고 다음에 올게요.” ‘black consumer’ 악성 소비자에요. 나쁜 소비자. 교회마다 간만 보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포기 못 하겠다는 거예요. 너무 극단적으로 흐르는 것을 내가 용납 못 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극단 가보기는 했습니까? 뭐가 극단인지 극단, 극단, 해도 최고의 극단은 예수님뿐이에요. 그렇다면 왜 인간들이 주님 곁을, 아까 요한복음 6장에서처럼 ‘아, 너무 이상하다. 우리가 생각한 방식이 아닌 데?’ 내 살과 피를 버리라고 나를 버리라고 하니까 ‘이것은 안 되지. 이것은 안 되겠다’ 하고 떠나는 이유가 뭐냐? 그들은 주님과 자기하고 동류 같은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게 포인트에요. 사람이 왜 복음을 듣고도 안 받아들이느냐 하면, 나는 이 종류를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새로운 종류의 피조물이 들어오는 것을 하나의 모험으로, 그것도 아주 위험한 모험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복음 막 믿었다고 자부하고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피조물이고, 주의 백성이고, 나는 곧 죽어도 천당 간다고 여겼던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 준비한 것은 데살로니가전서의 이 교인들처럼 환난을 줘버립니다.
환난을 줘버리면 분명히 자기는 뭐 지식으로 자기의 프레임 안에, 자기의 지식 안에 나는 복음을 알았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환난이 들어오고……, 그 환난이 나의 새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에요. 어디를 건드리느냐 하면, 옛사람을 건드려 놓으니까 거의 내가 새사람 되었다는 그 지식이 그저 옛사람을 숨기는 용도로써 활용되었다는 것이 그만 들통나버린 겁니다.
여기서 왈칵 울음이 쏟아지지요. 그냥 우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실컷 울고 그 다음부터는 항상 기뻐하라.”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는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컷 울고 난 뒤에 그 자리에 생기는 것이 항상 기뻐하라, 입니다. “이제 알았냐? 네 옛사람 내가 없애버린 것 이제 알았어? 네 옛사람은 너한테 오는 고통과 고난에 네가 휘둘렸잖아, 그동안. 속아 넘어갔잖아. 거기에 네가 어쩔 줄을 몰랐잖아. 네가 감당되던가? 안 되잖아 봐! 안 되어서 네가 벌벌 떨었잖아. 하나님 도와 달라고, 살려달라고 막 빌었잖아. 그래서 안 될 것 같아서 네가 울었잖아. 그래 울어.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사람이 왜 우는지 아십니까? 과거의 기억 때문에 울어요. 기억 때문에 운다고요. 기억이 있으면 항상 울 준비된 사람입니다. 어떤 노래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모든 걸 다 주니까 떠난다는 그 여자”
노래를 여기서 부르면 안 되는데.
“모든걸 다 주니까 떠난다는 그 여자
내 전부를 다 가져간 그 여자
한때는 내가 정말 사랑했던 그 여자
다 믿었었어 바보같이~”
그다음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
“여자는 다 똑같나봐~”
바이브라는 가수가 불렀던 <그 남자 그 여자> 신용재가 커버했던 그 노래. 이 남자는 자기의 순수함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혹시 니가 다시 돌아올까봐
다른 사랑 절대 못해
남잘 울렸으면 책임져야지
니가 뭘 알아 남자의 마음을~”
막 이래가지고 여자한테 하소연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여자를 몰랐는지요. 모든 것을 다 주니까 그때 떠나는 거예요. 가방에 뭐에 내 전부를 다 주니까 그때 떠나 버린 거예요. 떠난 이유는 간단하지요. 지루하다. 그걸로 충분하지요. 재미없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헤어져도 자존심 상하고요, 아니어도 자존심 상해요. 그냥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 균형 맞추는 그것으로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그래서 인간은 어떤 대박이 나기를 원하는 겁니다.
“It,s raining men! hallelujah!” 하늘에서 남자가 비처럼 떨어지면서 부르는 노래 있어요. 할렐루야~. 우리나라 유명한 팝송 가운데 할렐루야가 들어가는 노래가 이 노래가 처음이에요. 마구 쏟아졌으면 좋겠다. 할렐루야~ 하세요. 성경에 그 대목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게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출애굽기 17장 8, 9절에 나옵니다. 여러분, 이 말씀 듣고 할렐루야, 해야 됩니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멜렉 군대가 비겁하게 평온한 이스라엘 진 끝쪽을 덮쳤어요. 마치 짐승이 양 떼를 덮칠 때 제일 뒤쪽의 병든 것, 연약한 것, 그것부터 사냥감으로 덮치듯이 아말렉이 사냥감으로서 이스라엘을 덮친 겁니다.
덮쳤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산 밑에 내려가서 전투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옛사람 방식이에요. 적이 왔으니까 싸워야 되지 않습니까? 안 싸우면 누가 다칩니까? 내가 다치는 거예요. 이걸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옛사람이 다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우야다가 기뻐하지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모든 것이 주위에 적입니다. 저 사람이 날 도와줄까, 싶어서 들어가다가는 저 사람이 날 본 척도 안 하고 외면할 때 항상 기뻐하기는커녕 속에서 울분이 튀어나오지요. 상대방에게 막 화가 나서 따집니다. “너 왜 나를 알면서도 모른체 하느냐?” 그쪽에서는 입을 다물지요. 왜? 말하면 더 상처받기 때문에 입을 다뭅니다. 해석은 내 쪽에서 내려야 돼요. 뭐냐 하면 ‘아, 내가 짐이구나’
이 세상은요,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에요. 여러분, 언제까지 살 지는 모르지만 이거 하나 알아야 돼요. 가족도 서로가 짐이 된다고요. 그런데 뭐 이거 먹어라, 김장했다, 야야 뭐 도와줄까, “아이고 어므이예!” 그 뒤의 말은 괄호에요. ‘그냥 짐입니다’라는 말은 차마 못 하지요. 성의를 봐서라도 적어도 인간이라면, 예의가 있다면 말은 못 하지만 짐이에요.
설교 안 나오는 목사 그거 짐입니다. 교인들에게. 정말 죽이고 싶어요. ‘좀 알아서 떠나 주면 안 돼요?’ 속으로만. 그러면 결국은 이도 떠나고 저도 떠나고 여러분 주위에 남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 짐이기 때문에. 그러면 서로 인사하고 “예, 안녕하세요” 해놓고는 모르는 척하는 그다음 절차가 꼭 필요하지요.
남편이 운전한다. 그러면 아내는 모른 체 하고 잠을 주무셔야 돼요. 그래야 스피드광을 하든지 할 수가 있어요. 자꾸 아는 체 하면 짐 돼요. 제발 나 혼자 좀 놔둬 Ple~ase! 제발! 인간의 본능, 본성은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뭘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인간은 오뚜기인데요. 오뚜기 맞아요. 라면, 그 오뚜기같이 칠전팔기하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 재미 때문에 살아가는데요.
출애굽기 17장 보기 전에 로마서 9장 33절 보겠습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이게 십자가거든요. 주님께서 잔소리하면서 찾아온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찾아오시는 겁니다. 앞장세워서. 이거는 뭐냐 하면, 제발 자빠지라는 겁니다. 자빠져서 정강이 깨고 그리고 너를 일으키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너를 일으키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너를 일으켜 준다는 거예요.
그게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아말렉 전쟁이에요. 인간은요, 자기가 자기한테 꼭 전우 같아요. 위로하고, 격려하고, 부추겨주고, 용기 북돋아주고, 일으켜 세우고, 연민의 정을 보내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그런 전우 있잖아요. “내쫓아버려라.”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몸은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몸이 만들어진 몸을 관리 못 합니다. 하면 안 돼요. 주님 하시는 일에 맡기세요. 내가 나를 관리하면 안 돼요.
항상 기뻐하는 게 없는 이유가 나 말고는 남들이 나보고 짐이라 해 가지고 나를 전부 다 도외시하니까 나 말고는 나를 이끌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드문드문 감사하고 안 그러면 다음 날에는 찡그리고 있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출애굽기 17장에 다시 돌아와서, 옛사람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방식이에요. 적들이 오니까 이 귀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 ‘우짜든간에’ 이것도 경상도 방언이에요. 어떻게 하든지 우짜든간에, 이건 나훈아 사투리거든요, 어떻게 하든지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바보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호수아가 전쟁에 나섭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그 프레임, 인간이 알고 있는 옛사람의 프레임은 거기까지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보고 모든 사람이 다 지켜볼 수 있는 데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게 산꼭대기예요. 산꼭대기로 올라가는데 모세한테는 칼도 없고 활도 없고 창도 없고 그딴 것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올라갑니다.
왜 올라가는지? 자, 백성들 입장에서는 아말렉을 수비하기 위해서 전쟁하는, 맹렬하게 전투하는 여호수아장군의 옛사람 방식과 그리고 산 위에 올라가서 모세가 하는 행동과 두 가지를 다 보게 하는 거예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훤히 시야가 다 트이게. 감추지 아니하고 훤히 보이게 하는 겁니다. 마치 십자가를 보라 하는 것처럼, 갈라디아서 3장에서처럼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보라, 하는 것처럼 훤히 다 보게 하는 거예요.
봤지요. 보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졌습니까? 전쟁이 조율이 되네요. 희한하게. 여호수아가 밀리고 진격하고. 이것은요, 여호수아의 능력은 어디와 조율되느냐 하면, 모세의 지팡이가 올라가게 되면 땅밑에서 전쟁하는 여호수아가 이기고, 힘이 빠져서 모세가 아, 하고 지팡이 든 손이 내려오니까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멜렉에게 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는 어느 쪽에 강점을 두고, 어느 쪽에 액센트를 두고, 어느 쪽이 본질인지를 두고 그 전쟁을 봐야 됩니까? 바로 모세에게 일어난 그 방식이 바로 이 아말렉이라는 이방 민족과는 차이 나는, 차별되는 정말 이상한, 이상한 인생살이 아닙니까? 그런 희한한 예를 보게 하신 거예요.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완전히 여호수아의 옛사람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허수아비로 만든 거예요. “봤지? 봤지? 용맹해? 용맹 같은 소리 하지 마. 내가 지금 지팡이를 높였잖아.” 모세보다 더 지팡이를 높이 드는 거예요. 모세 위에 여호와 있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일으킨 전쟁이에요 너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말렉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한 겁니다.
전쟁에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고, 네가 누구냐부터 먼저 정리해야 된다는 거예요. 네가! 네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옴이 왜 새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네 쪽에서 정리하라. 바로 너는 너 자신에게 허수아비가 되어야 되고 쭉정이가 되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되고 십자가 앞에서 자빠져야 되는 겁니다. 엎어져야 되는 거예요. 7전 8기 할 필요 없어요. 그냥 그대로 가는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너는 술 좋아하잖아요. “너 그 좋아하는 술 요즘 왜 안마 시는데?” “내가 알아야 술판에 가지” 이런 식으로요. 술을 왜 마시는지 그쪽을 잊어버렸어요. 주께서 delete, 삭제해 버렸어요. 내가 왜 담배를 피워야 되는지. 결정적인 것은 그겁니다. 이제 더는 내가 나와 동류가 아니라는 것, 같은 종류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같은 종류가 아닌 겁니다.
이번 수련회 때 발람 이야기 했습니다. 발람 이야기를 마지막 시간에 했는데 그 발람 이야기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발람은 이스라엘이 누군가를 알고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저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민수기 24장에서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봐도 ‘발람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축복권이 있고 이스라엘을 해코지 하면 자기가 저주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 발람이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데 발람이 돈의 유혹을 받고 기어이 이스라엘이 저주받는데 보탬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31장 16절에 보면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그렇게 본인이 이스라엘을 축복해 놓고 왜 이제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유혹거리를 이스라엘에게 남겨서 이스라엘로 붕괴하게 만듭니까? 발람 선지자는 자기의 한계를 못 벗어나요. 이스라엘은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 그 발람을 민수기 31장에 보면 모세가 죽여버립니다. 31장 8절입니다.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저 사람은 하나님의 복 받을 민족이라 한 그 복 받을 민족한테 발람 자체가 저주받아 죽고 말았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뭘 정리할 수 있느냐? 왜 예수님을 떠나는가? 왜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을 떠나는가?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사람들에게 구원을 이야기했건만 왜 떠나는가? 부자 청년은 왜 떠났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마음에 판단하기를 예수님 쪽과 내 쪽이 같은 종류가 아니라는 결심이 들어서 그런 거예요. 같은 종류가 아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주님과 같은 종류입니까? 아니면 아닙니까? 여러분이 판단하기에는 어떤 경우라도 주님과 너무나 거리 차이가 있어서 주님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나 같은 지저분한 인간하고는 같은 종류가 아니라고 여길 겁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 항상 기뻐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 때문에 항상 기뻐하는 이유는, 본인의 과거가 소급해서 전부가 나는 포행자요 살인자요 죄인이라는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항상 기뻐하는 소스(source)가 된 거예요. 사도바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 둘 다 다 있어요.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나는 그동안 나를 지키고자, 나를 개선하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긴다 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러니까 내 입에서 행동에서 나오는 내 모든 것이 에이 더러워라, 하고 아주 흔쾌히 기쁨으로 아낌없이 보낼 수 있는, 쫓아낼 수 있는 배설물이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쏟아진다는 것, 그걸 보고 사도바울은 항상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늘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여러분에게 한번 적용시켜 보세요. 자식 꼬라지 보니 이거 기뻐 아니할 수가 없네요. 왜? 내 뜻대로 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 꼬라지 하고는, 아내 꼬라지 하고는, 집구석 꼬라지 하고는……, 예? 교회 꼬라지 하고는, 목사 꼬라지 하고는……. 모든 게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 소스(source)에요.
왜냐하면 그때마다 모세의 지팡이, 나로 하여금 땅 밑의 열 내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누가 알려줬겠습니까? 지팡이 없이는, 모세 없이는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예? 그 자리가 십자가 자리 아닙니까? 왜? 모세는 하나님과 같이 근접한 자리거든요. 예수님과 함께 있잖아요. 그 함께 있는 것을, 그 십자가를, 십자가의 의미를 내가 이제는 훤히 알게 되었다는 그 사실.
이제부터는 어떤 기쁨이 있느냐? 강의시간 같으면 “따라 하세요”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지금 참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참습니다. 왜 우리가 기뻐해야 되느냐?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지 못한 그 자체가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이거 아멘, 나와 줘야 돼요.
오늘 본문 간단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정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항복하라는 말이에요. 어제도 항복했지만 오늘도 오늘치 항복하라. 항상 항복하라. 그게 항복하는 즐거움과 기쁨, 세상일이, 자식 일이, 남편, 아내, 가정 일이, 사회, 회사 일이 뭐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게 있던가요? 우리는 그 과거의 기억 때문에, 어제의 기억 때문에 오늘 일이 잘못되면 ‘어제 안 잃으려고 했잖아요!’ 불끈 그런 성질이 또 나오는 거예요. 울음이 팍 터지지요.
우는 것은 이놈의 기억이 그렇게 끈질기기 때문에 그래요. 그 기억이. 1시간 반 동안 신제품 주물럭대다가 사지도 않고 가버린 사람에게 1시간 반 동안 주물러 댔다는 그 기억 때문에 그 옷 안 사고 그냥 가면 욕 바가지로 하고 싶지요. 그러니까 그걸 한 시간 반으로 생각하지 말고 1.5초로 생각하면 안 됩니까? 왔다 그냥 갔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인간의 옛사람은 자신의 옛사람의 기억으로 만들어지고 나의 새사람은 완료된, 이미 돌다리 건너간 구원받은 천국의 기억으로 우리를 새사람 되게 이끄시는 겁니다. 어설프게 인생 요령 부린다고 선악체계에서 균형 맞출 생각하지 마시고요, 나 자신을, 내 피와 내 살을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다는 그 정도로, 남들 보기에는 좀 이상해 보이지만 그런 수상한 종류, 주님이 수상한 것처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난 것처럼 여러분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떠난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조차도 항상 기뻐하는 하나의 원료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으로 주께서 찾아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새로운 피조물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저 남들하고 차이 나지 않는 이 삶 속에서 우리의 속은 썩을 대로 썩었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억누른다고 힘들대로 힘든 우리, 이제는 버티지 말고 차라리 쪼개지게 하여 주셔서 옛사람을 우리의 배설물로 날마다 쏟아내는 즐거움이 있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