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2022년 1월 2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5-8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구원이란, 지금껏 내가 살던 곳이 아닌 곳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내가 일구어놓은 나를 위한 터전은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겁니다. 구원된 자가 앞으로 살 곳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곳입니다. ‘왕’이라는 직위는 현대인들으로 참으로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옛날 구약 때, 왕으로 이스라엘과 동행했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왕의 위상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1-17)
이 구절에서 왕과 더불어 있는 백성은 마치 ‘종’의 처지가 됨을 유념해 봐야 합니다. 이것은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낙원을 만들 때, 그 낙원이 구조화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동산 한 가운데서 두 개의 특이한 나무가 있어 낙원에 들어와 있는 피조물의 운명은 이 구조에 얶매이게 되어 있습니다.(창 2:9)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창조를 통해서 왕(=주님)을 세워시려고 하신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왕되심을 미워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낙원에 악마가 들어오시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 악마가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인간에게 옮겨 놓는 것을 유도하셨습니다. 선악과 나무가 훼손되고 난 뒤, 하나님의 조치는 생명나무와의 분리입니다.
이로서 세상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분리되었습니다. 이 분리됨의 이 땅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그 내막이 구체화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으심’과 ‘사랑받으심’ 양쪽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즉 대립되는 구조를 자신의 일상을 통해서 모두 보여주십니다.
피조세계의 구조는 예수님의 이렇듯 하심과 그래서 심판주(왕)이 해내신 내력에 순응해야 될 처지에 있습니다. 어느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 왕으로 오신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있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시 24:7-10)
이렇게 보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철저하게 왕에게 종속되는 영을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악령이 이끄는대로 삽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나의 가치로 최종 귀결된다”는 모토를 유지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쪽으로 좋은 조건으로 제안하면 나는 그 조건을 사인할 용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나의 운명과 미래는 나의 선택과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왕은 철저하게 둘로 분리될 세계를 구축하려 오셨기에 지옥갈 자는 기어이 지옥보내시고 천국갈 자는 기어이 천국보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어디까지나 그분의 일방적 결정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의 맞은 편에 악마와 그 추종적들이 영원히 갇혀 있는 세계를 따로 만들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활동에 있어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점을 자석과 관련된 과학 이미지로 설명하면 간편입니다. 전선에 전류가 흘려가면 주위에 자석의 성질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유위하게 본 과학자들은 자석의 성질이 전자라고 하는 입자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철과 니켈 같은 금속은 자석에 잘 달라붙지만 나무나 고무나 플라스틱은 같은 물질이면서 왜 자석에 달라붙지 않는지를 궁금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이 구성에 전자의 활동에 깊이 관여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전자를 같이 공유해서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수소같은 것이나 혹은 남아 도는 전자를 모자라는 물질과 결합해서 안정성을 찾는 물질 같은 것은 전자의 활동이 상쇄되어 자석의 성질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금속같은 것은 기본 원소들은 양이온으로 결합되어 있고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있습니다. 그 전자가 스핀(회전)을 하면서 자체적으로 N극과 S극을 창출합니다. 그러다가 외부에 자석이 다가오면 N극은 S극에 달라붙고 S극은 N극에 달라붙습니다. 전자가 외부에서 오는 반응을 보이며 정렬합니다.
이게 바로 구조를 형성합니다. 즉 죄인에게 성령이 임하면, 성도가 되는데 성도가 된다면 말은 작은 새끼 구조들이 새로이 발생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막대 자석이 둘로 잘라져도 각자가 새로운 자석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성도의 존재 의의는 복음 앞에 종으로서, 백성들로서 왕이신 주님에게 충성하기 위함입니다.
시초의 창조 구조를 증거하기 위함이고 그 구조는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는 환경임을 알리는 역할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쁨이란 왕에게 아낌없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부터 나오면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능으로 따로 형성된 차원의 영역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조적입니다. 구조를 가름하는 그 불이 오늘날 성령의 불로서 성도의 마음 내부까지 자리잡고 있습니다. ‘더이상 너를 위해 살지 말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의 죄인을 사용하는 바가 다 주님의 왕적 구조 형성을 위함인 것을 기뻐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5-8(구조)21010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5-8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5-8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 말씀 하시는 분이 사람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그냥 아바타고, 실재는 그 배후에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가, 지난주 말씀에 ‘도적같이 오시는 분’은 사도바울이 도적같이 오는 게 아니에요. 누가 오느냐? 지금 이 말씀을 미리 알려주시는 그분이 도적같이 오시는 거예요. 그리고 미리 예고하시고 오는 도적입니다.
그래서 방금 읽은 대목 ‘우리는 빛의 아들이요 낯의 아들이라 어두움에 속하지 말고 낮에 속하라’는 그 통보를 해주시는 분이 온다면, 그걸 안다면 그 사람에게는 도적같이 오시지 않는 게 되어버리지요. 그리고 그분이 8절에 보면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그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구원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내가 경험하지 않고 내가 살지 않는 곳으로 벗어나서 다른 곳에서 사는 거예요. 그 다른 곳이 뭐냐? 주님이 계신 곳에 사는 것,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나 있는 곳에.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가 평생 공들여서 쌓아놓은 이 아파트고 직장이고 사업체고, 이것은 내가 만든 장소거든요. “네가 만든 그 장소에 네가 살아서는 안 돼” 이것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네가 한평생 네가 일궈놓은, 개간한 너의 영토 있지? 너의 자리 있지? 너의 삶의 터전 있지? 알아. 그런데 거기에 이제 살지 마. 거기에 살지 말고 너희들이 그렇게 미워하던 나 예수, 이 예수 내가 살던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게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참, 이 말을 곧이 들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지금 이 터전 만드는데 평생을 다 소비를 했는데 여기서 살지 말라는 이야기는 우리 보고 헛살았다는 이야기 밖에 안 되잖아요. “네가 구원을 몰라” 구원도 모르면서 너만 챙기면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걸 가지고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실 때 너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시는 거지요. 지금 말씀하시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는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 가슴팍을 강하게 밀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뭔데? 네가 뭔데 공들인 내 영역, 내 성곽, 내 성채, Castle, 이 성을 왜 이걸 무가치하게 보고 무시하느냐?” 하고 밀치지요.
구약에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그분이 구약시대에 주신 예언에 의하면 이렇게 자기를 표현합니다. 시편 24편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표현함으로써 자기소개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왕이라는 것은, 근대 현대사회에서 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민주주의에요. 민주주의라는 이것이 이단이거든요. 민주주의가 이단입니다.
왜 이단이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서 예수님과 있는 곳에 함께 있다는 말은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관계에요. 왕과 백성의 그 관계를 믿음이라 하는데 그 믿음에 대해서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9절에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거기에 무슨 토를 달 수 있습니까? 왕인데요. 왕은 자기 맘대로에요. 제멋대로에요. “너 오지 마” 하면 못 오고요, “오라” 하면 오는 게 왕입니다. 마태복음의 혼인 잔치 비유가 22장에 죽 나오는데 혼인 잔치 비유에 보게 되면 왕의 횡포가 얼마나 독하고 심한지요.
자기 아들 결혼식 한다고, 임금 아들 결혼식 한다고 “다 참석해!”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합당해 보이는 이유를 댑니다. “저는 제 결혼식인데요.” “네 결혼식 하지 말고 내 아들 결혼식에 참석해.” 또 어떤 사람이 “제가 밭을 샀는데요.” 혹은 “제가 소를 샀는데요.” 그게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 결혼식 연기하고, 보류시키고 임금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내가 진노로서 다 몰살해 버릴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놓고 그게 천국이랍니다.
그게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이렇게 생각할 때 현재 자본주의에 찌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제도가 현재 이상적인 제도라고 여기고 여기에 찌들어 있는 우리의 삶, 그 환경 안에서 나의 삶을 따로 챙겨놓는 식으로 하루하루 rountine,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그걸 헌법으로 보장받는 우리가 이런 나 말고 타인을 나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졸지에 자기가 쪼다 되는 거예요. 바보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는 배알도 없어요? 우리는 의지도 없는 겁니까?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지요.
성경은 창세기부터 전체가 왕의 이야기에요. “내가 왕 되는데 싫은 사람 내가 지옥 보낸다. 내가 없는 곳에, 왕이 없는 곳에 너희를 보내고 천국 가는 사람은 내가 있는 자리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지금 이런 생각이 일괄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돌파하지 못하는 것은요, 왕을 만나지 못해서 그래요. 왕이 간만에 축구 하겠다고 나왔을 때 공들고 잔디 구장에 나가서 “나 왕인데 축구 좀 해볼까? 골 넣는 재미를 맛볼까?” 이러고 있는데 곧이곧대로 하는 어떤 축구선수가 “임금님, 제가 골키퍼 할게요” 하고 나선다면 그것은 총살입니다. 그게 말이 되지요. 왕이 골 넣는 재미 누리겠다는데 골키퍼가 왜 필요합니까? “어이, 당장 죽여.” 이렇게 되지요. ‘저런 인간은 내가 골 넣는 것을 싫어하는 자다’ 이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 골키퍼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우리 동네에서는 축구게임 이렇게 하는데……” 하고 구시렁구시렁 하면서 갈 거에요. 신자가 신앙생활 한다는 게 뭐냐 하면, 기쁨이 어떤 기쁨이냐? 이것은 성경에 맞는 이야기인데요. 이제야 제가 말합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게 뭐냐 하면, 왕을 위해서 죽는 기쁨 외에 더 큰 기쁨이 없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 이게 신앙생활의 기쁨이에요. ‘나 말고 왕이 좋다고 한다면 기꺼이 시원하게, 영하 한 12도 정도, 시원하게 아낌없이 제 목숨 드리겠습니다.’ 그게 찾다 찾다 못 찾았다는데 이제야 발견한 나의 존재의 기쁨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 그걸 가지고 세상에서는 세자로 이야기하지요. 광신도.
광신도라는 말을 듣기 싫은 것은 자아가 돌파되지 않아서 그래요. 아직도 남들이 나를 뭐라고 정상으로 봐주는가, 거기에 신경 써서 그래요. 그런데 그 광신도를 넘어서 버리면 이게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 다른 세계, 오늘 제목으로 이걸 정하겠습니다. ‘구조’ 이게 구조에요. 구조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 만들어질 때 인간은 구조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구조냐 하면, 생명 나무와 선악과, 생명 나무와 선악과, 선악과는 죽음이 뭐냐를 알려주고 생명 나무는 생명이 뭐냐를 알려주는데, 생명이 이거라고 알려주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 구조적으로 설명합니다.
“이게 생명이다. 모르겠지? 이게 죽음이야.” 죽음과 생명을 나란히 연결시켜서, 구조화시켜서, 구조의 비교를 통해서 생명은 생명이고 죽음, 저주는 저주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구조 속에서 인간은 처음 시작했습니다. 구조에요.
이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조를 만들었는가? 그것은 신약성경에 창세 전의 그 비밀이 드러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구조인데 그 구조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과 관련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올라가는 그 경로가 구조의 원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오시기 그 전부터 구조가 만들어졌고 그 구조의 비밀은 예수님의 십자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 이렇게 일했다가 아버지께서 이렇게 살렸다는 그 경과, 절차가 구조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리 에덴동산이 구조적으로 그렇게 된 거예요.
이 구조에 대해서 그러면 왜 선악과와 생명 나무 구조가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십자가부터 해명이 되어야 되는가? 낙원에 하나님께서 악마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을 했어요. 악마가 뭘 무산시키려 하느냐 하면, 악마는 이미 구조적으로 저주받도록 되어 있어요. 이것은 예수님께 귀신들린 청년하고 대화할 때 이미 멸망 받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악마 본인이 알고 있어요. 지옥이라는 것이 날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악마는 알아요.
그래서 악마가 있는 이유가,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이 너무 일방적이고 왕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다 처벌 받는다, 라는 것이 왕의 왕 됨,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주되심은 비교되는 대상, 주 되심과 왕 됨을 싫어하는 다른 대상, 악마지요, 지옥 갈 악마, 악마와 비교하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거예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하니까 악마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따먹으라고 부추깁니다. 악마의 본인의 존재의 자리에 인간을 집어넣는 거예요. 선악과의 쉬운 예를 예배 전에 어느 집사님이 알려줘서 제가 그대로 써먹겠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담가놨는데 아버지가 되게 싫어하는 동네 아저씨가 와서 “야, 너희 아버지가 술 담가놨지?” 그러니까 아들이 있다가 “어, 그거 아버지가 먹지 말라 했어요. 그 술이 귀한 거라서요.”
그렇게 하니까……, 지금 술 이야기를 하니까 확 들어오지요. 그때 동네 아저씨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아버지가 혼자서만 술 마시면 기분 좋거든. 아버지가 혼자 술 먹고 혼자 기분 내려고 먹지 말라고 한 건데 너도 그 술 마셔보면 기분 좋아져.” 지금 그걸 부추긴 것이 악마가 부추긴 거예요.
악마는 예수님의 왕 됨을 싫어하는 겁니다. 구조를 무너뜨리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내가 또 하나의 구조에서 벗어난, 구조에 매이지 않는 하나의 존재로서 자기 자리를 고유적으로 독자적으로 확보하는 거예요. 악마는 이미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 마음을 인간에게 전부 다 할당을 했어요.
아담에게 할당하면 아담에서 내려오는 모두에게 ‘이제부터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가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확정 짓는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나간다. 내가 왕이야. 내가 왕이야.’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 그런 식으로 말하거든요. 나한테는 왕이 필요 없어요. 왜? 내가 최고 명령자니까, 내가 왕이니까. ‘무슨 왕이 필요해?’
이게 선악 구조입니다. 이 선악 구조는 이미 주께서 그걸 알았어요. 이 선악 구조를 따먹게 함으로써 주께서 첫 번째 조치가 뭐냐 하면, 후딱 생명 나무를 못 따먹게 생명 나무를 격리키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야 구조가 굳어지니까.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생명 나무가 사라진 거예요. 그러면 구조적으로 생명 나무는 내가 있는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생명이 없는 겁니다. 건너갈 수 없는 다른 장소에 생명 나무가 있었어요. 주께서 후딱 그 조치를 하신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이 복음에 대해서 공격을 해요. “하나님이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 날 구원하라고 주께서 십자가진 게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자기 목숨을 대신 줘 가지고 우리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에 죽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야, 이 사람이 진짜 마귀적이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인간’이라고 하는 그 인간이라는 단어는요, 선악과 따먹기 전의 그 인간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미 독자적으로 악마적인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 내가 뭘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은 결정될 거야.’ 그 악마적 사고방식, 구조적이 아니고 비구조적이지요, 오직 나는 나에게 환원되는 그 구조를 가지고 ‘자, 하나님이 나에게 뭐 해 줄 거예요? 좋게 결재 올리면 내가 사인해 줄게. 하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 죽을 거요? 그러면 십자가 믿어줄게요.’ 그렇게 나온 거예요.
인간이라는 단어에서 구조적인 그 단어는 모르고 인간이라는 단어가 내가 아는 그 인간이라는 단어와 동일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인간이라고 우기지만 구조적으로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구조적으로 생각을 못 한 겁니다. 진짜 인간은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한 거예요. 인자와 인간의 대결구조에요.
내가 인간이라고 여기고 하나님보고 “어이, 우리한테 뭐해 줄 거요? 잘해주면 믿고 잘 안 해주면 안 믿을 거야.” 이게 선악 체계에요. 나한테 이익이 되면 나는 할 것이고 이익이 안 되면 안 할 것이다. 이게 선악 체계에요. 생명체계는 그것이 아니고 왕이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생명 주면 그냥 받아먹고 안주면 지옥 가고, 그게 왕의 왕 다운 면모에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지옥 가라 하면 지옥 가고 천국 오라 하면 천국 오고.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요, 아무도 예수님께 오지 못해요. 성경 자체가 그 구조 이야기한다고요. 내 결정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나중에 1년 지나고 손익계산 이거 하는 게 아니에요.
‘올해는 내가 얼마나 이익을 얻을까?’ 그거 계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엉터리 나기 때문에 그 계산을 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마태복음 26장 33절에서 이런 말씀 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여기 있는 열두 제자 포함해서 자기 빼놓고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베드로가 이게 예수님한테 먹힐 줄 알았어요. 이게 먹힐 줄 알았다고요. “제 성의와 제 신심과 제 신앙과……, 지금 주님 보고 계시지요? 다 버릴찌라도 제 솔직하고 진실된 마음은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믿습니다. 누가 봐도 나는 신자입니다. 주여, 이 마음 알지요?”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구조적으로 뭘 생각해야 했느냐? 구원은 내가 이런 결심하고 이런 고백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몰랐어요. 구조적으로 몰랐어요. 베드로는 이렇게 해야 돼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을찌라도 나는 주를 버릴 겁니다.” 왜 그런 말을 못 합니까? 베드로는 그런 말을 해야 그 위에 교회가 세워져요.
나는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요.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왜? 선악과 따먹은 이후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주님께서 이 세상을 구조적으로 다루는데 광야에서 물이 없지요. 물 없는 곳과 약속의 땅의 물 있는 곳, 젖과 꿀이 흐르는 곳과 구조적으로 대비시켜 놓았습니다. 천사도 구조적이에요. 선한 천사, 악한 천사.
성령 오기 전에, 성신 오기 전에 사울은 악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성신을 받았어요. 구조적이지요. 대립되지요. 주님도 이 땅에 와서 그냥 낚싯대로 건져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친히 저주가 무엇인지 버림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고 자기의 생애 자체도 구조적이에요. 버림받았다. 그다음에 아버지로부터 건짐 받았다.
타작마당도 구조적이에요. 알곡과 가라지. 주보에 보면, 여러분이 보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보에 지난주 설교 요약이 있지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도적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뭘 우리한테 강탈, 빼앗아가기 위함이 아니고요,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빼앗아갈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도적으로 오는 거예요. 가져갈 것이 없어요. 우리한테는.
우리가 평생토록 끌어모은 뭐 기금, 펀드에다 아파트나 부동산, 그거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지를 않아요. 받아주지도 않는 것을 평생에 긁어모은 것을 가지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두 자로 부자라고 이야기하고요. 그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그것만큼 불가능 하다고 본 겁니다.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마태복음 25장 29절에 나오는 것처럼 너는 아무것도 없는 거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음, “아무것도 없는 자야” 그런데 네가 그걸 몰라요. 사실은 그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이야기할 때 상대방을 유령으로 간주하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야 돼요. 죽은 자로 간주해서 대화를 탁 던졌는데 “나 뭐야?” 하고 산자로 탁 튀어나오면 그때부터 대화 끝, 대화는 끝났어요.
아, 이것은 자기 것이 뭔가 있고 그 있음을 동그라미로 테두리 쳐서 그걸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뭔가 내게 있는 것들을 동그라미 치면 그게 자아가 돼요. 그래서 자살하는 이유가 그 동그라미 안에 있는 것이 별것이 없을 때는 자아도 같이 있으나 마나가 되어서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서 죽고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뭐라도 있으면 아직까지도 희망을 가지고 안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타작마당에서 뭘 보느냐? 쭉정이를 가려내지요. 뭔가 껍데기는 있는 것 같은데요, 안에 없어요. 텅텅 비어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데 마귀의 사주를 받은 우리들은 자꾸 남과 비교를 해가지고 ‘너 얼마 가졌나? 나 이거 가졌다.’ 자기 가진 것 가지고 평생을 사는 보람으로 느낍니다. 보람으로.
지금 국민들의 올해 희망은 뭐냐 하면, ‘투표권 있다.’ 이것 가지고 지금 3월 29일 날 투표하려고, 이것 가지고 사는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누가 잘 하는가 한번 보자. 내가 가진 것 있는 것.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그 둘도 ‘이’고 ‘윤’이고 둘 다 유령이에요. 죽은 자에요. 쭉정이라니까요 쭉정이. 쭉정이가 쭉정이 보고 투표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다 바람같이 사라지는 겁니다. 죽는다는 것은 바람같이 사라지는 거예요. 왜? 원래 쭉정이었고 원래 바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누가 노래했잖아요. “그대 이름은 바담 바담 바담~”이라고요. 발음이 잘 안 되어 가지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홀로 있으려고 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홀로 있으려고 하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창조했겠는가? 구조를 구조적으로 노출 시키고 그걸 나타내라고, 그걸 실제 세계에 나타내라고, 우리로 하여금 구조적으로 어느 쪽에 속했느냐, 분류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잠시 과학적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에르스테드(Hans Christian Ørsted:1777-1851)라는 19세기 과학자가 뭘 발견했느냐 하면, 금속에다 전류를 보내니까 거기서 자장이 생긴다는 그것을 발견했어요. 자장, 자석의 성질.
‘왜 자석의 성질을 내지?’ 그때부터 점점 조사를 해보니까 전류가 흐르면 주변에 자장, 자석의 성질이 생긴다고 할 때 그러면 자장이 생기는 이유는, 거기에 전류가 흐르는 매개, 전자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에 연구를 더 하지요. 전자가 생기는데 왜 플라스틱은 자성이 안 생기고, 나무는 왜 자성이 없고 금속은 자성이 있어서 들러붙느냐? 그것을 또 연구하고 조사해보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입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이 입자가 자석의 성질을 통해서 보면 구조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입자 중에서 자성은 전자와 관련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전기, 플러스(+)전기, 마이너스(-) 전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전자 때문에 그렇습니다. 핵은 플러스(+)고 전자는 마이너스(-)라 해서 전기적인 힘이 작용하거든요. 에너지 레벨 때문에 뭉쳐지지 않지 에너지 레벨이 없으면 뭉쳐서 들러붙는다고요.
그래서 ‘아하, 이 세상 물질은 보통 세 가지로 연결되어 있구나.’ 전자가 어떻게 연결되느냐 에 따라서 세상 물질이 그렇게 결합이 되는 거예요. 왜 나무는 자성을 안 띠고 왜 금속은, 금속 중에서도 철과 니켈과 코발트는 자성을 띠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 세상 물질이 보통 세 가지로 결합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뭐냐 하면, 전자가 그냥 혼자 있을 때는 불안정 하니까 같은 전자끼리 만나는 것을 가지고 ‘공유결합’이라 해요. 땅콩처럼 수소 전자 하나는 불완전하니까 수소가 두 개가 되어서 ‘H-H’ 공유결합이라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전자가 너무 한쪽은 남아돌고 한쪽은 남아돌아서 결합하는 것을 가지고 ‘이온결합’이라 하는 겁니다.
전자가 공유결합, 또는 염화나트륨(NaCl)처럼 전자가 남아돌아서 안정권을 얻기 위해서 결합할 때 이 전자가 상쇄가 되기 때문에 자성이 띠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금속은 뭐냐 하면, 금속의 전자들이 있지만 원자에 매이지 않는 자유전자가 돌아다니면서 자기 맘대로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이름도 재미있잖아요. 전자가 자유하다는 겁니다. 자유전자.
그렇게 있는데 저쪽에서 자석을 딱 들이대니까 이 전자는 자체적으로 스핀이라 해서 자전을 하거든요. 스핀을 하면서 위에서부터 자전을 하니까 저쪽에서 S가 오게 되면 이쪽에서는 전부 다 N으로 배열 정리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과학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복음이 들어오니까, 구조가 오니까 성령 받은 성도만 배열로서 그 복음을 알아 먹는거예요. 배열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배열을! 자유전자가 아니라 우리의 왕이십니다. “문들아 들릴찌어다. 모든 각지의 성도는 다 문을 열어라. 왕들이 들어가신다.” 주님이 S라면 우리는 다 N으로 배열을 하는 거예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배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자는 왜 있는가? 전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조를 영접하기 위해서, 구조를 반기기 위해서 전자가 된 거예요. 처음 창조 때부터 구조였습니다. 낮과 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라. 그다음에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와 생명 나무, 구조적이지요. 딱 구조적이에요. 거리가 다른 영토를, 다른 자리를 마련했어요.
그 구조를 확실히 하는 방법은 뭐냐? 주님께서 창세기 3장 24절에 불 화염검을 통원시켰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구조적으로 쫓겼지요. 다른 자리에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 그러니까 빙빙 도는 불이요. 빙빙 도는 불로 인하여 이게 막혀 있어요. 불로써는 막아놓는 거예요. 하나님 계신 곳과 하나님 계시지 않는 곳.
그러니까 하나님 계시지 않는 곳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이 모든 구조를 다 무시하고 나만 여기 있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비구조적인 그러한 태도를 갖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복음을 배척하는 거지요. 자석도 자석을 배척하는 것을 반자성체라고 해요. 자체적으로 모든 구조가 상쇄되었으니까 S나 N에 아무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겁니다. 유리라든지 금이라든지 플라스틱 같은 경우에요.
평소에는 복음에 반응이 없다가 복음이 오면 바짝 반응을 보이는 것, 그걸 상자성체 늘 일상적 자성체, 코발트 같은 경우에 그래요. 약한 것. 평소에도 늘 자성을 지니고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것은 강자성체. 평소에도 자성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 쪽에서 다가왔는데 반응이 없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은 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구조가 없는 자가 그게 죽은 자에요.
구약의 구조 보기 전에 마가복음 8장 22절에서 26절에 있는 그 모습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는데요. 지난 오후에 이 본문 했는데 다시 보게 되면, 벳세다에 어느 소경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소경을 데리고 왔어요. 23절에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물으시니까 그 소경이 하는 말이 사람이 제대로 보인다고 하지 않았어요. 뭐가 보인다고 하느냐? 24절에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나무가 보인다고 하는 그 사람을 두번 째 안수를 하니까 뭐가 보이느냐? 25절에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왜 하나님께서 단번에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서 사람을 밝히 보이게 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단번에 눈을 떠서 밝히 보게 해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소경이 원래 보고 싶었던 나의 욕망을 주께서 들어준 게 되어버려요. 내 희망을. 그런데 소경이 있는 것은 하나의 입자고 하나의 전자기 때문에 구조를 모르면 소경은 눈 떠도 지옥 가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 네가 나에게 오는 절차 말고 내가 이 땅에 온 절차를 두 단계로 나눠서 설명한 겁니다.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나무로 본다.” 그리고 다시 눈뜨게 해주니까 그 나무가 사람으로 보이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눈뜨는 과정조차도 우리가 눈뜨고 싶다는 것을 봐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가 누군지를 알려주기 위한 그러한 방편으로서 병 고침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볼 때 악마에 의해서 쫓아냈다 했으니까, 아까 쫓아냈다는 그 말 잊지 마세요, 생명 나무에서 쫓아내 버렸어요, 쫓아냈기 때문에 쫓겨나고 난 뒤에 저희 동네 그 쫓겨난 그 악마와 더불어 사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존재예요. 나 여 기 있음, 그게 시작이고 알파와 오메가에요.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여기서 잘되는 것 끝. 그것뿐이에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 저에게 뭐 해줄 거예요. 해주면 믿겠습니다.” 이게 죽은 자에요, 죽은 자.
그런데 산자는 어떤 모습인가? 성령 받아서 산자는 어떤 모습인가? 고린도후서 4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놓치면 안 돼요.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 방법은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살아 있는 내가 항상 예수님께 죽음에 넘기는 거예요. 왕에게 넘기는 거예요.
홀로 있으면 죽음인데 넘기면 구조입니다. ‘주여, 구조 안에서 생명입니다.’ 그걸 알고 주님께 넘기는 거예요. 넘기는 방법은 뭐냐? 식사할 때 주께서 식사하게 해줬다는 마음으로 식사를 하는 거예요. 모든 일이 구조의 구조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전자 입자로써 사용하시는 거예요. 전자입자로써.
입자는 거의 질량이 없습니다. 작은 입자, 그걸 렙톤이라 하거든요. 6가지 기본적인 구조에 의해서. 아주 작아요. 인간의 힘, 이것은 약력, 아주 약해요. 그런데 강력이라 하는 것, 양성자와 양성자 간에는요, 저기서 마이너스가 당겨도 안 당겨질 정도로 아주 자체적으로 강렬해요. 핵 내부의 입자를 강력이라 해요. 이 세상에 강력, 전자기력과 약력과 중력, 물리학에서 이 네 가지 힘이 기본 힘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고린도후서 4장 10, 11절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는 마귀에 의해서 독자적인 것을 하나의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죽어 마땅함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렇게 깨닫게 하신 것이 예수의 생명임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심이라.
여러분 자석의 특징이 뭡니까? 막대자석이 있다가 아이고, 실수를 해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면 쪼가리 난 두 개의 자석이 붙어야 자석이 아니에요. 떨어진 하나하나가 다 새로운 자석으로 변하는 거예요. 아주 신기하지요. 우리 성도가 등장했다는 것은 곧 구조가 등장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비록 모자라고 작다 할지라도 그 안에 주의 성령이 함께 있으면 그 자체가 구조적이고 주님의 복음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생명에 속한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작은 사람, 그것을 저는 여러분이 잘 아는 옛날의 코미디에 나오는 단어가 있어요, 쪼만한 이쁜이, 경상도 말로 쬐맨한 이쁜이, 누가 봐도 무시할만한 존재, 그런데 그 안에 복음에 대한 반응이 들어 있다면 악령과 구조적으로 대비 되어 있는 성령을 받은 주님의 영을 받은 거예요. 성령이 함께 있는 겁니다.
다시 고린도후서 4장으로 돌아와서요. 11절에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유령으로 살아야 될 이유가, 자기가 유령인 것을 알아야 예수님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12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나는 내 독자적으로 하나의 입자, 독자적인 독립체라고 한다면 나는 주님 보시기에 죽은 것이다. 하지만 이이야기가 너희로 하여금 생명이 되게 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그 모세와 엘리야 우리 보기에는 모세가 구원받았나, 엘리야가 구원받았나, 관심사가 거기로 나가겠지요. 그것은 구조적이 아닙니다. 마귀적이지요. 그러나 거기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별세 이야기, 죽으심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얼마나 구조적입니까? 예수님의 구조,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세 너나 엘리야 본인이나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의 복음에 의한 반응으로서 선지자가 된 거예요. 누가복음 2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전체 다가 그러한데 누가복음 24장 이것도 얼마 전에 말씀 드린 것 같은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사람들이 다 흩어졌지요. ‘아이고, 예수님 대단한 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아니네’ 하고 다 흩어졌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해서 윤석렬 대통령 떨어지고 난 뒤에 다 흩어졌다. 이준석이는 벌써 떠났고 다 흩어졌다. 그 말이에요. 확 다가오지요.
그래 가지고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 예루살렘에서 10여킬로 떨어진 북쪽인데 15절에 보니까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동행 자체가 구조적입니다. 나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구조적이에요. 16절에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눈이 가리워졌다는 말은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는 그 자체가 눈이 가리워진 거예요. 모든 게 나밖에 모르니까 눈이 가리워진 거예요.
그러면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생명 나무와 선악과 따먹어서 죽게 된 그 사이를 갈라놓았던 그 불, 그 불을 이동시키는 거예요. 불을 이동시키면 그 차이, 간격, 구획 정함,나뉨, 이쪽 동네와 저쪽 동네의 나뉘어짐, 그 경계 자체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 속에 있는 겁니다. 불기둥 속에. 그리고 애굽에는 그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없고요.
<닥터 스트레인지> 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거기에 ‘차원문’이 나와요. 영화를 뭐 봐야 알지요. ‘차원문’이 나오는데 공중, 허공에 구멍이 뚫리고 그 가운데 불이 빙빙 돌고 있어요. 같은 차원인데 다중우주의 원리인지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이 공중, 허공에 있는 거예요. 그것도 보이는 사람만 보고 있고요. 주인공이 티베트에 가서 도 닦아서 얻었다는 거예요.
그 구멍 뚫린 다른 차원으로 천국으로 통하는 허공에 난 그 문 이야기는 최근에 개봉된 <스파이더맨>에, 그 영화에도 또 나와요. “No Way Home”이지요. 닥터스트레인지박사가 또 나와요. 마가복음에서 두 제자가 같이 가는데 눈이 감겨서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계속 다른 차원이 같이 붙어 있는데 못 알아 보는 거예요. 이게 구조적인데.
그래서 30, 31절에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비로소 눈이 밝아지니까 거기서부터 이 두 제자는 자기 가던 길로 안 가고 그 무시무시한 곳, 예수 제자 그러니까 윤석렬이 따르면 다 죽여라, 그런 것 있잖아요, 그 무시무시한, 갑자기 여기서 윤석렬이가 왜 나오나, 그 무서운 동네로 도로 돌아가요.
자기 자신을 생각 안 하는 겁니다. 성도란 뭐냐? 왕의 왕 됨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식으로 두 팔을 벌리는 겁니다.
<비트>라는 영화에 보면 정우성이가 오토바이 타면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포즈를 취하지요. 오토바이에서 두 손을 놓잖아요.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왜? 천장이 뚫렸으니까. 지금 이 두 제 자한테는 천장이 노출되어 있어요. 훤~해요. 하늘에서 바람이 솩~ 불어옵니다. 자신만만해요. 자신만만합니다. 너하고 나하고 둘 중에 누가 올라가나 보자. 자신만만해요.
윤리, 도덕은 필요 없어요. 윤리 도덕은, 나를 돌파를 해버리면 윤리나 도덕 너머의 세계에 도달하는 겁니다. 체면, 위신, 자존심, 그거 필요 없어요. 뭐 교회 필요 없어요. 그냥 다 뚫어버려야 돼요. 독자적인 세계는 다 뚫리는 겁니다. 차에 보면 지붕, roof라 합니까? 선루프라 하지요. 지붕 뚫린 것. 그처럼 문 열어놔 버리는 거예요.
뚜껑 없는 차처럼 성도의 삶은 뚜껑이 없어요. 주께서 왕이 다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왕은 바라보고 있고, 성도는 왕을 쳐다보고 살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뭐할까요?’ ‘시금치와 잡채를 먹어라.’ 그것은 좀 심하다만 그러면 주께서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 이렇게.
어쨌든 간에 뭘 먹느냐가 아니라 뭘 주고받고 있느냐, 에요. 그 복음에 대해서 정렬하는 거예요. 전자스핀이. 정렬하는 겁니다. S는 N끼리, N은 S끼리. 자전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S는 S끼리가 아니에요. ‘나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S에 대해서 N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나 죄인이고 나 주님 미워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찾을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릴 그 모습이 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주께서 받아줬습니다.’
우리 성도의 존재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본디오 빌라도 이야기를 꼭 해야 돼요. 정말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0절에 나오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이렇게 제시합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권세 이야기를 들고 나옵니다. 권세 이야기. 그러니까 아까 설교내용대로 하면 빌라도라는 사람은요, 왕이라는 권세에 동그라미를 쳐서 그게 나라는 거예요. 나는 지금 뭔가 패가 있다는 겁니다. 남에게 내세울 만한 패가 있다는 거예요. 너는 돈 있고 너는 뭐 자식 많지만 나는 이 나라 왕이라는 권세를 나는 동그라미 쳐서, 프레임 쳐서 그게 나라는 거예요.
인간이 나라고 할 때는 뭔가 가진 게 있다는 뜻이에요. 가진 게 있다는 뜻이라고요. 쭉정이가 쭉정이 주제에 그러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구조를 모른다. 네가 가진 권세 그 권세 누가 줬는데?” 요한복음 19장 1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곧 “네가 나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것도 그것도 구조적이야 인간이 구조에 필요해서 너는 나를 죽여야 돼. 구조적으로!”
그런데 이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은 불로써 오거든요. 오순절에 성령은 불로써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그 경계선 그 차원문, 생명 나무로 가는 그 차원문이 이제는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까지 들어오는 것이 성령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있거든요. 말이 이상하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 대부분이지요.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갇혀 있으니까 그 빌라도가 가진 권세 그게 겁나 무서워요, 그게. 그 권세가 겁나 무섭다고요. 교인들이 목사에게 말도 못 하는 것은 목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그 권세 있잖아요, 동그라미, 권사라는 것, 집사라는 것, 우리 교회는 해당 안 되니까 맘대로 이야기합니다, 장로라는 것 그걸 동그라미 칩니다, 내가 장로인데 내가 집사인데, 그걸 동그라미 치는 거예요.
날 무시하지 말라고, 나는 집사라고 동그라미 친다고요. 그러니까 자기 동그라미보다 목사 동그라미가 더 크거든요. 그래서 아무 소리 못 하는 거예요. ‘자칫하면 내가 동네 사람에게 우세 당하겠다. 내 처신 내가 알아서 해야지.’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보게 되면 뭐냐? 우리가 이 땅에서 목사가 되든 집사 장로가 되든, 안 그러면 어떤 누구 회사의 직원이 되든 대리가 되든 과장이 되든 그것은 왜 그 일을 하느냐 하면, 하나의 전자라는 말이지요. ‘쪼맨한 이쁜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구조를 설명할 때 무시당할 만한 존재지만 거대한 구조를 위해서 내가 지금 왕에게 지시받고 있는 겁니다.
성령은 뭐냐? 왕에게 종속하는 영, 그 관계를 성령이라 해요. 왕에게 종속되는 것. 전에는 나 혼자 살았는데 이제는 누구에게 종속되는 그게 성령입니다. 여러분, 종속되어 보세요. 좋아요, 그거! 되게 좋다고요. ‘죽이면 죽이고 살리면 살리고 마음대로 하세요.’
마침 성령 받아서 복음을 아는 종속된 어떤 권사님이 계신데 자녀들이 그것도 모르고 죽기 전에 “어머니, 장례식은 어떻게 치러드리면 좋겠습니까? 마지막 힘을 다해서 답변해주세요. 소원대로 장례 치러드릴게요. 관은 뭘로 할까요?” 이런 식으로 할 때……,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제가 지어낸 거예요.
뭐냐 하면, 그 권사님이 하는 말이 “내 장례식 생각하지 말고 구조가 공부해라, 구조나. 내가 죽는 것도 구조야, 인간아. 처음부터 나는 죽어 왔었어. 이제야 죽어 이제. 아이고 좀 쉬려고 하니까 이렇게 닦달을 내고. 너희는 너희 할 일 하고 나는 내 할 일 할래. 죽는 것도 내 할 일이야.” 인간존재는 마네킹입니다. 마네킹은 죽었어요. 그 마네킹, 마네킹에 방향을 주십니다. 복음을 향한 방향, 그게 살아 있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통해서 맺고자 합니다. 밤에는 모든 소가 어둡다는 말이 있어요. 밤이 되어버리면 밤이라는 환경에 의해서 모든 것은 고유의 색깔은 무시당합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것은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어두운 것은 왜 어두우냐? 빛을 못 알아보기에 어둡다는 거예요. 그 어두운 곳에, 그러니까 그 불이, 불기둥이 이제 지상까지 내려온 거예요. 우리 마음 까지 내려올 거예요. 내려와서 빛이 어두움을 비췄을 때 그 빛이 진짜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특히)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오직 구조로 말미암아) 난 자들(결과물)이니라” 오직 구조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의 전자입니다. S극이 떴을 때, 자석이 떴을 때 우리는 정렬하고 배열하면 돼요. 충성! 주님이 십자가 그 용서만이 생명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쪼만한 이쁜이’ 예쁘지도 않지만 쪼만하고 아무것도 아닌 나, 그 나를 세상에! 그 구조에 넣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불로 제사하게 되면 그 제사장도 죽어요. 불 자체가 구조를 이야기하는데 구조, 불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이 땅에 있는 것 가지고 하나님 신앙생활, 종교생활한다고 흉내나 내고, 티나 내고 그럴싸하게 신앙 티 내는 그것, 자기 자신이 입자임을, 독자적인, 그 복음 앞에서 경계선을 안 넘으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 거예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지키기 위해서.
“그게 뭐가 나쁜데? 그게 뭐가 나쁜데! 내 것 가지고 내 것으로 천당 가려는 데 뭐가 나쁜데?” 자기 자신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그 모습, 그게 한창이고 그게 지속 된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두움에 속한 거예요. 구원이란, 내가 알던 그 세계에 있지 않고 주님만 아는 그 세계에 함께 있는 것,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다 혼자 자기 위해 사니까 우리도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사는 게 정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 자신이 마네킹이고 이미 죽은 자요, 흙으로 분해된들 우리는 아무 대책이 없는 막다른 쪽으로, 그냥 막다른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막다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 사실에 눈을 떠서, 구조가 기다리고 생명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음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