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빠져나간 감사

아빠와 함께 2021. 12. 23. 08:32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40 - 빠져나간 감사

21,12,20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8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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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텔이나 호텔에 아침이 되면,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와서 투숙객이 남긴 모든 지저분한 것을 깨끗하게 처리해줍니다. 침대보를 빨면, 지난밤에 침대 위에 있었던 모든 것들도 같이 빨리는데, 이처럼 주님께서는 섬들 사이를 누비면서 인간들이 내뱉은 그 모든 더러운 것을 처리해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 주변을 누비면서 우리가 흘려놓은 더러운 것을 처리해주는 것이 보여야,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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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이란?

그러니 신앙생활에는 자기의 우수함, 잘남, 그런 것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욕심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를 건사하는 것은 도사라는 말이죠. 매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인데, 그래서 반대로 자기가 한 것을 족집게로 뽑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현장에 자기의 지저분한 것들만 있게 된다는 말이죠. 단지 자기가 여기에 존재하고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자기로 인해서 자기 주변이 오염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감추고 싶은 것이 드러나고, 그것을 주목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라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잘나서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정반대로 해왔다는 겁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면, 완전히 반대로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러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 지옥인데, 아무리 목회에 성공해도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지옥에 가는 교회가 아무리 커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죠. 자기 자랑이 몸에 베여있는데,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 결국 자기 발만 보는 인간 !!

쉬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8,440미터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정상에서 무엇을 보겠습니까? "(1)산 정상, (2)주변의 풍경, (3)자기 발밑" 이라고 하면, 여기서 몇 번입니까? 에베레스트에 한 번 올라가는데 비용이 무려 1억이 든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 정상에 올라가서 무엇을 보겠느냐는 것인데, 산 정상에 태극기도 꽂고, 주변의 산도 둘러보고 하는데, 하지만 결국은 자기 발을 본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니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 것은 신앙생활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교회에 50년을 다녀서 권사가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처음에는 축하도 받고 하는데, 마지막에는 자기 발이, 즉 자기 몸이 보인다는 겁니다.

* 인간의 희생을 거부하시는 희생자 !!

그러니 그것은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닌데, 신앙생활은 자기의 더러운 것을 치워주는 분이 눈에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흔히 하는 말로 '희생' 이라고 하는데, 그 희생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희생을 거부하시는 희생자, 그분이 곧 언약의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가족을 위해서 희생을 했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는 당사자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결국 가족을 위해서 희생한 자기 자신이, 즉 늙어버린 자기 발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인데, 자기 희생에 가려진 언약의 주인공이신 주님의 희생은 아니라는 말이죠.

자식을 키운다고 고생을 하면, 그러면 천국에 갑니까? 과연 그런 겁니까? 이 세상에 자기를 위해서 고생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고생은 자기를 위한 것인데,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심지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도 그렇고 말이죠. 자기 가정, 자기 교회, 자기 국가, 그러니 이게 무슨 신앙생활이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이란 것은, 자기가 자기 일에 분주할 때, 거기에 몰입할 때, 그로 인하여 희생을 당하신 분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언약중심으로, 희생자 중심으로 성경을 보는 것인데, 창세기부터 그렇게 봐야한다는 말이죠.

교재 18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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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들은 실선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인물이 등장해서 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닙니다. 이게 점선인데, 점선으로 된 인물이 와서 점선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실선으로 보이던 우리가 점점 점선으로 바뀌면서 사라질 지경이고, 그와 병행해서 점선으로 보였던 주님이 뚜렷하게 우리 마음에 실선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주님만이 존재가 되고, 그동안 존재라고 여겼던 우리는 하나의 사라질 사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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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선에서 점선으로 !!

친하게 지내던 친구나 친척들이 죽으면, 처음에는 슬퍼하면서 마음이 아픈데, "아이쿠, 참 안 되었다. 그 나이에 벌써 죽다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 양반이 죽었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처음에는 기억 속에서 실선으로 있는데, 나중에는 점점 점선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자기는 분명히 자기 발이 보이기 때문에 실선으로 보이지만, 남들은 점선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어떻게 볼까요? 우리는 점선으로 취급이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상대자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언약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데, 우리는 들러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해와 달과 별의 주인공이 아닌데, 그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시편 24편 1절에 보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소유라는 겁니다. 이게 새로운 세계인데, 이 새로운 세계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 하면 참여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시 24:1) [다윗의 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하면,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이 주인공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모르는 것이 아닌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여호와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편 24편 1절에서는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 주인공인데, 즉 우리의 소유자가 따로 있는데, 그런데 막상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이 그만 주인공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하면, 굳이 사자머리나 오유경 박사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심리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면, 지금부터 2분간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말이죠. 알기 쉽게 번호를 붙여가면서 해보겠습니다.

(1) 인간은 지기 싫어하는 존재다.

이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있고 교묘히 숨기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나 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만나서, 이게 드러나는지 숨기고 있는지, 그것만해도 90퍼센트는 안다는 말이죠. 친구 사이든 교인 사이이든 간에, "저 사람은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강도가 노골적인가? 숨기는가?" 라는 것만 알면, 이미 그 사람은 거의 파악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2) 초라한 내 모습보다 더 괜찮아 보이는 상대는 제발 망해버려라.

자기보다 더 괜찮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기보다 더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망해버리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죽어버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더 나아 보이는 존재에 대해서 참지를 못하는데,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자기가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해 보인다는 말이죠.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러한 말을 했는데, "사람의 본성은 돈만 있으면 착하다" 라는 겁니다. 사람의 심보가 더러운 것은, 돈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돈만 있으면 모두들 여유가 있고 착한데, 그런데 자기가 돈이 없으면, 그리고 주변에는 다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지기 싫고, 하지만 자기 집에는 돈이 없고, 그러면 그런 사람의 모든 말투나 행동이 어떠한고 하니, "이 인간아, 제발 망해버려라. 어서 죽어버려라" 라는 식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고 감추는 사람이 있고, 그 두 가지 부류뿐이라는 겁니다. 이게 없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게 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예쁘다든지, 자기보다 더 많이 배웠다든지, 그런 것은 참을 수 없는 자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애써서 억누르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억누르다가 실패해서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지기를 싫어한다는 것이죠.

(3) 상대방을 칭찬한다. 접근한다. 그리고 같이 망한다.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참 훌륭하십니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나옵니까? 그것은 같이 망하자는 소리라는 겁니다. 칭찬을 하면서 접근해서 아는 사이가 되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나옵니까? "너 죽고 나 죽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더 이상 잃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이것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런 본심을 너무 억압을 하니까, 여기에서 정신병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죠. 정신 신경증, 노이로제, 도착증, 사이코패스, 이런 모든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지시 싫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는데, 무조건 지시 싫다는 말이죠. 먹지 못하는 감을 찌르는 식인데, 즉 "내가 못되면 너도 못되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인데, 신도 아니면서 신 흉내를 내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남들은 파괴되고 망해도 자기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즉 자기는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익히 이것을 아시고 이것과는 반대의 길로 가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 하나님과 싸우는 인간 !!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데, 지기를 싫어하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겁니다. 이게 언약인데,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누구와 붙었습니까? 천사와 씨름을 했는데, 미리 오신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좋게 의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씨름을 하는데, 즉 싸움을 한다는 겁니다.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결과로서 지기를 싫어하는 야곱의 본성은 감추어질 수가 없었는데, 그대로 드러내었다는 말이죠. 야곱이 이겼는데, 이것은 자기를 축복할 상대자를 자기 손으로 없애버린 것과 같다는 겁니다. 총으로 하나님을 쏴 죽였다는 말이죠.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부흥되기를 원하는데, 이런 것이 다 지기 싫어하는 본성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 대화와 기도 !!

그리고 시시한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를 않는데, 자기보다 뛰어나야 그 앞에서 자기는 초라해진다는 말이죠. "칭찬하면서 접근한다" 라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말을 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을 대화라고 하고, 하나님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기도라고 한다는 겁니다.

초라한 자기 모습으로 인해서, 즉 지기 싫어서 기도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 기적을 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기적을 바라면서 교회에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인데, 교회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 이게 기적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가 저주를 받아야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기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남들에게 지기 싫어서, 남들에게 없는 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 하는 것은 기도이고, 남들에게는 하는 것은 대화인데, 그것은 슬슬 시비를 건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발견해서 일거에 쳐냄으로서, "내가 너보다도 낫잖아" 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그래서 상대방에게 접근을 시도한다는 말이죠.

우리교회 교인들은 이것을 알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예 말이 없다는 겁니다. 적극적이 아니고 소극적으로 지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래서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용감한 행위인데, 그것은 "나를 죽여주세요" 라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 주여, 목회를 망하게 하소서 !!

그래서 교회에서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데, 물론 목사가 몰라서 그렇기도 한데 말이죠. 교회를 키우는데 환장한 인간이, 남들에게 지시 싫어하는 인간이 무슨 복음을 알겠느냐는 겁니다. "주여, 목회를 하다가 그만 망하게 하소서" 라고 하는 목사를 보셨습니까?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봉투를 돌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교회를 더 하고 싶다는 것인데, 교회는 주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목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목사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교회가 내년까지 이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누구의 것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것이란 말이죠. 시편 24편 1절의 그 말씀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의미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것이라고 여기니 기적을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것이 아닌데 말이죠.

요즘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한 쪽은 성경구절이고 반대쪽은 그 구절을 베껴 쓰도록 해놓은 것들이 있는데,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아니 성경말씀을 가지고서 무슨 글씨공부를 할 일이 있느냐는 겁니다. 성경이 그런 용도입니까? 그런 행위, 즉 글 쓰는 행위를 왜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의 초라한 모습이 싫으니, 하나님에게 말을 걸어서, 자기가 남들에게 지지 않도록, 그런 위대한 모습으로 바뀌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믿음을 달라고 하는데, 아니 자기에게 믿음이 왜 필요하냐는 말이죠. 주님의 뜻이면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죽인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게 기적이란 것이죠.

* 기적은 곧 감사 !!

그러니 기적이 무엇인고 하니까, 두 글자로 '감사'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 기적이 감사입니까? 우리는 자기 발만 보이는데, 그러니 어디까지나 물체라는 말이죠. 이러한 물체에서 감사가 나온다고 하는 것,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거울을 보면, 요즘의 거울은 유리 뒷면에 알루미늄이나 은을 발라서 반사하도록 되어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본다는 겁니다. 되비치는 자기 모습을 말이죠. 옛날에는 거울이라는 것이 금속을 닦아서 만들어서 썼는데, 학교에서 배울 때는 "그렇게 해서 제대로 보이겠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박물관에 가서 보니, 그게 청동금속에 광택을 낸 것인데, 잘 보인다는 말이죠. 성경에도 보면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본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희미하지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성경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고(ㅋㅋ), 아무튼 충분히 화장을 할 수 있는데, 요즘 거울은 거의 완벽하게 반사가 되지만 말이죠.

* 자아는, 이미지이고 허상 !!

그런데 그렇게 볼 때 자아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몸이, 즉 신체가 보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신체는 물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거울을 봐도 자아는 없다는 것이죠. 이것을 '이미지' 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미라주(Mirage)' 라고, 즉 신기루라는 겁니다. 있지도 않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허상이고 망상이라는 겁니다.

특히 사막에 가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오아시스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막상 가보면 그게 없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여름철이 되면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이 그런 현상을 만든다는 말이죠. 그것이 이미지인데, 즉 허상적인 이미지라는 것이죠.

자아는 이런 이미지인데, 실제로 있는 것은 자아가 아니고, 막상 만져보면 몸이라는 물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몸, 즉 사물이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이 무엇인고 하니, 이 물체에서 감사가 나온다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사람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 감사는 언제 생기는가?

제가 여러분에게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젓가락은 음식입니까? 아닙니까? 젓가락은 분명히 음식이 아닌데, 그렇지요? 그처럼 우리 몸은 하나님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송과 감사가 나오게 하신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기적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 감사가 생겨나고 어떤 경우에 사라지는지, 그것을 알면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있는 게 없어질 때 불평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자기가 불안하다는 것인데, 그러면 감사는 어떻게 됩니까?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기게 될 때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기적을 원하시는데, 그 기적이 무엇입니까? 물체에서 감사가 나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 라는 허상인 이미지를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그것을 물체로 바꾸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물체에서 감사가 나오게 하신다는 것이죠.

* 낙망이 아닌 찬송이 !!

'나' 라는 것이 있게 되면,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되는데, 그러면 시편 24편 1절과 어긋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물체로 바꾸어서 감사가 나오게 하시는데, 그러면 시편 24편 1절이 가동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인데, 자기 것도 아닌데 왜 걱정을 하고 낙망을 하고 난리를 치느냐는 말이죠.

"나는 저 사람보다 돈이 없어요. 실력이 없어요. 아, 나는 내 속에서 낙망하는구나"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네 것도 아닌데 왜 낙망을 하는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주여, 기적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 사람을 이기게 하소서" 라고 하는데, 물론 이기게 해달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데, 하지만 그게 더 음흉하다는 말이죠.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이 없어질 때, 우리는 짜증이 확 올라온다는 겁니다. '나' 라는 몸은 내부적인 것이고, 주님은 외부적이라는 말이죠. 이런 관계가 곧 신앙관계인데, 우리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있게 함으로서 있다는 겁니다. 자기 것이 있다가 없어지면 불만이 생기니, 주님께서는 불만이 있는 자기 백성을 감사하는 자기 백성으로 바꾸는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이죠.

*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

집에서 수도꼭지를 열면 물이 나오는데, 그러면 그게 집에서 물을 생산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은데, 그러면 수돗물은 어디서 생산하는 겁니까? 우리 집 내부가 아니고 외부에서 온다는 겁니다. 만약에 영하의 날씨에 수돗물이 터져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사는 꼬라지가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초라한지 모르는데,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이죠.

그러니 외부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이 수돗물이든 햇볕이든 공기든 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에 종속되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외부가 있음에 자기가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외부가 없으면 '나' 라는 것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 그것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보시기에 없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우리 자신을 없는 존재로 바꾸어놓고 다시 있게 있을 때, 그러면 우리는 자기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 계신 주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작업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성도에게 해줄 때, 우리에게서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 구원이란, 나로부터의 탈출 !!

다시 정리를 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감사가 없는데, 남들에게 지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기고 진다는 것은 "내 것 때로, 네 것 따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물론 열심히 하는 것은 있지만, 여기에는 감사가 빠지고 없다는 겁니다.

"악착같이 기도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얻어야지" 라는 것은 되는데, 여기에는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살고자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버티겠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데, 왜냐하면 그 있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나' 라는 것은 이미지이고 신기루인데, 그런데 그런 자기를 위해서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버틴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지기를 싫어하니 말이죠. 감사가 나오지 않으니 불평이 나오고, 그리고 그런 불평은 남들을 힘들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주위에 오염물질을 마구 남긴다는 것이죠. 따라서 "나는 있다" 라는 것에서, 탈출이 필요한데,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여기에서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보겠는데, 여기에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가 나오는데, 이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30km정도 되지 싶은데 말이죠. 이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데, 예수님이 가까이서 동행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15절에서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라고 한다는 겁니다. 또한 18절에 보면,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 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으면 자기가 경험했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럴 때 그들은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사가 아니라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남들에게 지기는 싫고, 자기 몸은 자기 것이라고 여기니, 그게 한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그 되어진 일에 대해서 직접 설명을 해주신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알지 못하는데, 그러니 성경공부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30절과 31절에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라고 하는데, 즉 소유권이 이전된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그들은 불안해서 예루살렘에서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자기 신체를, 즉 물체를 버티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폐쇄된 내부인데, 외부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니, 이 두 명의 제자가 어떻게 됩니까? 계속해서 엠마오로 갑니까? 아니면 방향을 돌립니까?

33절에 보면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라고 하는데,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두렵지 않습니까? 그것은 외부와 연결이 되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더 이상은 폐쇄적인 내부가 아닌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은 내 것이다" 라는 것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눅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눅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눅 24: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눅 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눅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 24: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눅 24: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눅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 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 주님은 살아계신다 !!

하지만 자기가 단독적으로 자기 것이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도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기어이 남을 이겨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시시한 것들과는 붙지도 않고, 자기보다도 잘난 것들을 상대해서, 그들을 이기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본능인데, 즉 "너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남들이 자기보다 잘 나갈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음흉한 미소가 나왔으면 나왔지 결코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이 눈을 열어주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34절에 보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살아계시고 자기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한다는 말이죠. 분명히 사람들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주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잘못된 겁니까? 자기가 잘못된 겁니까? 자기 인생관이 잘못된 것인데, 그야말로 터무니가 없다는 말이죠.

* 평생을 짝퉁으로 살면서 !!

자기가 가짜인데, 자기의 평생이, 자기의 모든 모습이 짝퉁이라는 겁니다. 남들이 자기를 가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짜를 원했는데, 자기가 가짜라도 그게 남들보다 좋아 보인다고 하면, 자기는 기꺼이 그런 가짜를 원했다는 말이죠. 이게 폐쇄적인 내부성인데,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도 없고, 또한 빠져나오기도 싫어한다는 말이죠.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별 게 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죠. 자기보다 못난 인간에게는 "나는 너를 이겼어" 라고 하는 자위감을 느껴가면서 말이죠.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보람을 얻는다는 겁니다. "잘난 놈들에게는 기죽고, 못난 놈들에게는 기살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하루종일 케이블TV 채널을 돌린다는 겁니다. "내 자식이 잘났나? 네 자식이 잘났나?" 라는 것을 가지고 싸우고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눈을 열어주시니,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물체가 아무리 까불어도 물체인데, 젓가락이 음식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데, 그러니 이 가련한 인생들을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자아가 살아있으면 지옥에 가서도 까부는데, 이 자아로 인해서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는 말이죠.

* 천국은 염치가 없는 자들에게만 !!

외부에서 일어난 그 일, 즉 외부자이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에 우리가 종속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공로인데, 그렇게 해서 얻어진 나라가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아무런 행한 것도 없이, 값없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여러분, 천국이 우리의 나라입니까? 예수님에게 종속이 되면 벌써 자기 것은 없는데, 주님의 나라로 인해서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주님의 나라에 행여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해서 방해를 받고 가려지면 안 되는데, 그래서 기도를 하는데, "주님이여, 나를 제거하소서. 그래서 주님이 주신 감사 덩어리가 나로 인해서 불평으로 전환되지 않게 하소서" 라고 말이죠.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삶의 한 조각이 엮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내용이 "감사와 기쁨이 가득해서, 거기에 나 자신이 방해하지 않도록 나를 제거해주세요" 라는 기도라는 겁니다. 지금의 이 몸을 자기 몸이라고 여기지 않게 해달라고, 감사하면서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 광야라는 환경 !!

그렇다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보면,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 것, 즉 "내 생각, 내 기억 등등", 그런 것을 다 잘라내는 것이 광야라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들만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동행하시는고 하니, 여호와께서, 즉 주의 이름이 동행을 하신다는 말이죠.

시편 24편 1절에도 나오듯이, 이 세상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인데, 그래서 "나의 것으로 새로 구성된 세계를 만들자" 라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끌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것을 잘라내는데, 하루를 단위로 해서 잘라낸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데, 그 단위가 하루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과거와 끊는다는 말이죠. 장로님, 지난번 모임에는 오셨는데 오늘은 오시지 않은 분이 기억납니까? 모르겠지요? 그게 은혜인데, 과거는 끊어졌다는 겁니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자꾸만 과거를 생각하면 안 되는데, 어제는 어제로 끝났다는 말이죠. 이것이 죽는 연습인데, 나이를 헤아리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리 카운터를 해도 죽는 순간에는 그게 1살이든 10살이든 100살이든 간에 그냥 '꼴까닥' 이라는 말이죠. 과거의 그 긴긴 시간이 죽는 순간에는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왕년에 아무리 무엇을 했어도, 그게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나는 새로움 !!

그러니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나는 그 새로움에 대해서 감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과거가 떨어질 때 마귀도 같이 떨어지는데,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과거의 자기가 떨어지면, 자기에게 붙어있던 마귀도 자기의 죽음과 함께 같이 떨어져 나간다는 겁니다.

보통 친구들을 보고 놀릴 때, "요즘 어깨가 좀 무겁지?" 라고 하는데, 마귀에 양쪽 어깨에 올라타면 무겁다는 말이죠. 세상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들을 한다는 겁니다. 현재의 자기 삶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지난날의 삶이 기억되기 때문인데, 지난날은 없는데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죠.

이런 것을 주님께서 다 치워주시는데, 우리의 지저분한 배설물들을 말이죠. 과거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 간에 다 치워주셨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외부로부터 온 효과라는 겁니다. 이게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오래 했던지 간에, 그런 것은 자기 어깨만 무겁게 할 뿐이라는 겁니다.

* 외부와의 연결 !!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외부와의 연결'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외부는 주님이고 내부는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주님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의 것이니"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굉장히 간단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간단해도 우리는 돌아서면 내부의 더러운 속성이, 즉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속성이 또 다시 올라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18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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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강원도에서 오신 이상진 집사님 부부와 3명의 자녀, 즉 찬희, 대희, 환희가 뒤에 앉아있는데, 그러면 부모의 눈에 자녀가 실선으로 보일 때 보모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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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상진 집사님과 그 가족이 실명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 이름이 나오면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아도 기분은 좋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면 제가 왜 특정한 이름을 거론했는고 하니, 여기서 창세기 24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창 24:20)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긷는지라

지금 리브가가 시집을 가는데, 남편 얼굴도 보지 않고 간다는 겁니다. 멀리 고향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와서 이삭의 신부감을 구한다는 말이죠. 12절에 유명한 단어가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순적히' 만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새로 번역한 개역 개정판에서는 '순조롭게'로 바꾸었는데 말이죠.

(창 24:12)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 여자가 아브라함의 종의 마음에 들어서 드디어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60절에 보면, 그 리브가를 아브라함에게 보내면서 뭐라고 오빠가 합니까?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창 24: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창 24: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그렇게 해놓고 다시 교재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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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강원도에서 오신 이상진 집사님 부부와 3명의 자녀, 즉 찬희, 대희, 환희가 뒤에 앉아있는데, 그러면 부모의 눈에 자녀가 실선으로 보일 때 보모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찬희는 MIT, 대희는 예일, 그리고 환희는 프린스턴 대학교에 보내서, 남들에게 자식을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찬희가 와서 '우리 형제가 힘을 합해서 원수의 성문을 열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부모의 반응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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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가 하바드를 제치고 지난 10년 동안 계속해서 1등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런 세계 유수의 대학에 자식들을 보내서 공부를 시켰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자식들이 돌아와서 "우리 형제가 힘을 합해서 원수의 성문을 열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부모의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느냐는 겁니다.

자기 여동생이 시집을 가는데, 오빠가 뭐라고 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데, 즉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가 자식에게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느냐는 말이죠. 부모는 자식들이 미국의 명문대학에 입학해서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나은지, 그게 아니면 원수의 성문을 여는 것이 나은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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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원수의 성문을 연다' 라는 성경말씀에는 관심이 없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안으로 더욱 더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언약을 발생시키되, 그 발생은 앞으로 전개되는 시간의 바탕에 펼치십니다. 즉 아브라함은 죽어도 '아브라함 언약'은 역사라는 평지 위에서 후속적인 언약을 양산하면서 생생하게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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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라고 하니, 우리는 그 말씀을 보고, 원수의 성문을 여는 것보다도, 아브라함에게 주신다는 그 복에 관심을 둔다는 겁니다.

* 원수의 성문을 열게 하소서 !!

우리 인간의 본성이 뭐라고 했습니까?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 자식들은 미국의 명문대학을 나오게 되면"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결과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우리 집안은 남들에게 지지 않는 명문집안이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서 "복을 받으세요" 라고 하면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니, 그래서 "2022년에는 라이벌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는 부귀영화를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감사가 그만 빠져나와 버리고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있는데, 그래서 더 있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감사는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아예 없다고 여기면, 수돗물이 나오는 것도 감사가 된다는 말이죠. 아무리 세세한 것이라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걷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죠.

* 그게 신앙생활이냐?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등산을 하다가 그만 넘어졌는데 광대뼈가 함몰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급히 수술을 해야하는데, 마취 부작용이 겁이 나서 주저하고 있다는 말이죠. 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평소에 등산을 하면서 감사를 했습니까? 감사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몸을 자기가 잘 건사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즉 건강관리를 잘 했다고 하면서, 그 찬양을 자기에게 돌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이 과연 신앙생활이냐는 겁니다.

흔히 야당 정치인들이 여당과 대통령을 공격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게 나라 꼬라지냐?"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남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의 질문인데, "인간아, 그게 신앙생활이냐?" 라고 말이죠. 자식 3명이 명문대학에 들어가면 너무나 좋아서,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게 신앙생활이냐?"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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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후손, 잉태치 못한 자, 할례, 원수의 성문, 이런 고상한 것은 다 잊고, 생활의 지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서, 고등을 구울 때 커피가루를 뿌리면 냄새가 제거된다. 싱크대의 찌든 때는 미지근한 물에 식초를 타서 씻으면 된다. 가스레인지에 묻은 때는 레몬 껍질로 문지르면 된다. 냄비가 넘칠 때는 나무 주걱을 냄비 위에 잠시 올려놓으면 된다. 냉장고 냄새는 소주 병 뚜껑을 열어놓으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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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생활의 지혜에 마음을 빼앗기는데, 그렇지요? 하지만 여자의 후손, 잉태치 못한 자, 할례, 원수의 성문, 그런 것에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선 "그게 신앙생활이냐?"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던지신다는 말이죠.

* 두 자식을 축복하는 야곱 !!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자기 아들인 요셉의 자식,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데, 16절에서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을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창 48: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창 48: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창 48: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자기에게 웅크리는 토속신앙 !!

야곱이 요셉의 두 자식들에게 복을 비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 손자가 명문대학에 들어가게 해주시고, 그리고 일년 내내 건강하게 남산의 노루새끼처럼 뛰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남산의 노루새끼는 우리 할머니의 18번인데 말이죠(ㅋㅋ). 할머니가 민중신앙에 심취해서, 그것이 토속신앙인데, 쉽게 불교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이 토속신앙은 철저하게 자기 안으로 웅크리는 신앙인데,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어서 복과 저주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에게 웅크리고 있으니까, 자기가 잘 되는 것이 복이고, 자기가 잘못되는 것이 곧 저주라는 것이죠. 오늘날은 그런 토속신앙에 껍데기만 기독교나 불교로 뒤집어씌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할머니가 불경을 보고 있는데, 그러면 아무리 옥상에 물이 샌다고 해도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믿음이 좋은 겁니까? 할아버지가 아무리 고함을 쳐도 반응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 시간은 복과 저주가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복이 날아가고 저주가 쏟아진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웅크리고 있다는 말이죠.

* 과연 무엇이 복인가?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복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인데, 기독교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이 누구에게 복을 줍니까?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다는 말이죠. 물론 나중에는 나머지에게도 다 주는데, 12지파에 하나를 집어넣어서 13지파가 되게 한다는 겁니다. 요셉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그렇게 두 개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고 하니, 앞에 나왔는데, '여자의 후손', '잉태치 못한 자', '할례', '원수의 성문', 이런 상황이 되게 해달라는 것, 그게 복이라는 겁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십자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십자가를 알게 하옵소서", 혹은 "성령을 받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바로 이게 복이라는 말이죠.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시는데, 성령은 외부적인, 즉 예수님과 통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을 받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게 된다는 말이죠.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날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 !!

이게 복인데, 이것 외에 다른 복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 보면 복을 뭐라고 합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그게 복이라는 말이죠. 신약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날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다시 말해서, "내 소유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그것을 날마다 묵상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즉 "내 인생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신경을 쓸 것이 없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복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남들에게 이기고 지고 하는 것, 이런 것은 여기에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짜증이 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내가 어떤 존재인데 남에게 진다는 말인가?" 라고 나오는데, 이것 때문에 인간들은 복을 차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야곱이 자식들에게 복을 주면서 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거론하는고 하니, 여기에서 마태복음 22장을 보겠는데, 29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 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29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라고 하는데, 지기를 싫어하는 인간, 또한 자기밖에 모르면서 웅크리고 살아가는 인간이니, 그런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성경말씀에 대한 오해밖에 없다는 겁니다.

30절에 보면,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 제 아무리 예쁘고 멋있고 해도, 그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라고 하는데, 천사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 천사는 몸이 없어 !!

천사란 무엇인고 하니, 천사는 몸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천사가 아닌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러니 육신이 있다는 말이죠. 그 이전에는 육신이 없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예수님은 몸을 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몸의 영광스러운 변화가 성도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미리 보여준다는 것이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몸이 없다는 것은, 몸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몸이든 간에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몸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사의 특징은, 몸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몸이 아니라 주님의 지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외부의 지시, 즉 주님의 지시에 충실한 것이 천사라는 말이죠. 천사가 "나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 소리를 하는 천사를 두고 악마라고 한다는 겁니다. 범죄한 천사, 대든 천사, 그렇게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천사가 악마라는 말이죠.

* 자의식을 가져라 !!

그래서 뱀이 에덴동산에 와서 아담과 하와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기처럼 되라고 하는데, 즉 "자의식을 가져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우리의 자아가 'A' 라고 하면, 그런 'A'에서 'A스타'로 나가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기획투사(?)' 라고 했는데, 즉 "현재의 나에 만족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나로 바꾸어 나가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꿉니까? 선과 악의 지식으로 바꾸면 된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윤리와 도덕인데 말이죠. 그렇게 바꾸면 의로운 인간이 된다고 악마가 유혹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로마서 4장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의인이 된다" 라고 하는 복음과는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말이죠.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 즉 예수님이 이루신 의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의를 따로 챙기게 되면 하나님의 의가 모욕을 받는다는 말이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십자가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지, 자기가 착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화를 내는 교인들 !!

이게 복음의 기본인데, 그런데 이것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이 그만 화를 낸다는 것이죠. 절이 아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말이죠. "당신이 기도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화를 낸다는 겁니다.

"우리교회 목사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목사마다 다 다르잖아" 라고 하는데, 물론 목사들마다 다 다른 것은 맞다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이 둘로 분류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르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분류가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 그러면 인간은 왜 몸이 있을까?

천사는 몸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은 몸이 있다는 겁니다. 왜 인간은 몸이 있을까요? 그것은 이 몸이 둘로 나누어지기 때문인데, 천국과 지옥에 가는 몸으로 말이죠. 이 몸은 진짜 주인이신 예수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예수님의 천국과 지옥을 심판하는 권세에 의해서, 우리 몸도 예수님이 하신 일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몸을 가진 인간은 한 쪽은 천국에 가고, 다른 쪽은 지옥에 가야한다는 겁니다.

천국의 특징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인데, 물론 지옥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구경 삼아서라도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지를 못하는데, 그러니 살아생전에 이 지옥과도 같은 이 세상을 제대로 경험해보시라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지옥구경을 하시면 되는데,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휴가라는 말이죠.

그러면 "아하, 이게 지옥이구나. 어떻게 주님의 몸을 가지고 자기 것이라고 우기지? 저게 지옥에 가는 사람의 공통점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주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이런 것을 발견하지만, 요즘은 편리하게도 TV 드라마나 유투브 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많이 만나볼 수 있다는 겁니다.

* 쏟아지는 지옥 이야기들 !!

아침에 눈만 뜨면 지옥에 갈 사람들의 이야기만 쏟아지는데, 심지어 교회에 가도 목사가 하는 설교와 기도가 그러하다는 말이죠. "올해 우리교회를 축복하신 것처럼 내년에도 축복해주옵소서" 라고 하는데, 이게 지옥에 가는 소리라는 겁니다. 남들에게 지기 싫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내 자식, 내 남편, 가정, 내 교회, 내 국가" 라고 외치고 있지만, 하지만 정작 자기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겁니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모든 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들이 모두 다 환상이고 신기루라는 것이죠.

부자가 지옥에 간다는 것은, 천국이란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부자는 어디서 대우를 받는고 하니까, 지옥도 천국도 아니고, 이 땅에서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죠. 분류가 되기 이전에 이 땅에서는 부자가 대우를 받는다는 겁니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그렇게 이 땅에서는 부자가 대우를 받는데, 그러니 더러운 자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죠. 인간이 성질이 더러운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은 진리가 맞다는 겁니다. 갑자기 200억이 생기면, 그 사람은 천사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 200정도는 내가 보태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 그래, 십일조는 내준다 !!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한다는 말이죠. "그래, 십일조는 준다. 내 것을 지켜야지" 라는 것인데, 그런 심보라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에게 줄 것은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것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것이 있어야 남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교인이 "나는 일주일에 만원을 헌금하겠다" 라고 마음을 먹고 있으면, 그것을 흔히 주정헌금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줄 것은 주고 자기 것은 지키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곤란한데, 더 이상은 달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자기 것이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있음이 없음이 되면, 그러면 불안하게 되고 엄청나게 짜증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살고자 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내부에서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는 말이죠.

* 천사는 자기 소유권이 있는가?

다시 마태복음 22장으로 돌아와서, 천국은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는 겁니다. 여기서 응용문제가 나가는데, 천사가 과연 자기 소유권이 있을까요?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의 지시가 우선인데, 주님의 명령이 말이죠. 천사는 자기의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유라는 겁니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주님의 지시로 인해서 할당이 된 것인데, 그러니 부자는 그 역할을 맡은 것이고, 또한 가난한 사람은 그런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부자라고 해서 다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참 부끄러운데 말이죠. 부자가 되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에게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라고 하면,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호시탐탐 부자가 되기를 노리면서 철야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자가 되어도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물론 부자라도 모두가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닌데, 아리마대 요셉을 보세요. 그는 부자라도 천국에 갔습니다" 라고 하면, 이것은 위로입니까? 아닙니까? (ㅋㅋ)

* 부자라고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

"저는 부자라서 매일같이 울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너무 울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해서 위로가 되면 정말 좋겠는데, 사실은 그런 위로조차도 줄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부자가 된 것을 자랑한다고, 그런 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고, 또한 듣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겁니다.

"나는 저 남자가 멋있어. 저 여자가 아름다워" 라고 할 필요도 없는데, 연애감정도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의 지시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연애감정은 소유인데, 마치 예쁜 구슬을 하나 가지듯이 말이죠. 그래서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소유하고 싶고, 여자가 멋진 남자를 보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것이 된 남자 앞에 다른 여자가 얼쩡거리면, 그만 살인충동이 생기는데, 죽이고 싶다는 말이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것이,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것들만 자꾸만 발생을 시키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이죠.

* 산 자의 하나님 !!

이제 미루었던 것을 본격적으로 하겠는데,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31절과 32절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마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예수님 당시에 아브라함은 살아있습니까? 죽어있습니까? 인간들의 눈에는 죽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은 살아있다고 우기는데, 그러면 진짜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으면 아브라함도 역시 살아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삭도 살아있고, 야곱도 살아있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자기 백성들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다는 것인데, 즉 "내가 생명을 줄게. 네 소유를 내놔라" 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바치라는 소리가 아니고, 현재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즉 자기 소유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소유케 하신 주님이 살아있다고 하면, 자기는 덤으로 살아있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즉 천사처럼 지시를 받는다는 겁니다.

오늘 다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일단 시편 116편 15절을 보겠습니다.

(시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여기에 보면,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렇게 귀중하다고 하면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통해서 아벨을 죽여놓고, 그리고 나서 그 아벨을 귀히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죽음인데, 우리의 살아있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우리가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죽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주님 자신의 죽음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죠.

* 어느 동창생들의 대화 !!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의 흔해빠진 이야기를 하겠는데, 왜 세상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실제로 복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응용이 되는지,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겁니다. 두 명의 중년에 접어든 여자동창이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 동창(A) : 영자야, 너거 남편이 교회에도 잘 다닌다고 하는데, 요즘 뭐하노?
* 동창(B) : 응, 사업을 해.
* 동창(A) : 무슨 사업을 하는데?
* 동창(B) : ESS(Energy Storage System) 사업을 해.

그러니 만나서 말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들이나 남편 이야기, 즉 사업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ESS' 라는 것은 전력저장장치를 말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태양광 사업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주 고상해 보인다는 겁니다. 사채업이나 기획 부동산과 같은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환경에 도움이 되는 에너지를 저장하는 사업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태양광 사업이 완전히 내리막길인데, 대부분이 망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불행한 겁니까?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그만 무엇이 빠져나오고 말았습니까? 오늘 강의를 잘 들었으면 알 수 있는데 말이죠. 감사가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자기와 자기 남편의 기를 살려주던 괜찮은 사업 그 자체, 그게 자기의 자존심을 키워주고 지기 싫어하는 본성을 충족시켜준다고 여겨서, 그래서 자기 남편의 사업을 동창생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준다는 겁니다. 물론 사업이 잘 나갈 때 말이죠. 이게 응용문제라는 것이죠.

그러니 복음을 아무리 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나가면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어제 낮 설교시간의 마지막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했는데, 그 복이 무엇인고 하니, 이런 것이 다 망해도, 우리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 )의 하나님, 그 ( )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로 이 ( ) 속에 들어간다는 것, 이것이 성도에 주어지는 특권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도 천사와 같이 하루하루를 주님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불평과 불만이 아닌 감사가 계속해서 나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요구하시는데,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정작 우리는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악발이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를 깨닫고, 언제나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12,22 오후 8시에 마침.

주님이 왜 몸뚱아리를 허락하셨는지를 기억하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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