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터치고 나옴

아빠와 함께 2021. 12. 23. 08:31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9 - 터치고 나옴

21,12,0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제목이 '9강, 야곱언약' 인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래서 이 야곱언약이 창세기에서 마지막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야곱언약이 끝나면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아브라함, 이상, 야곱, 이게 다 가정문제인데, 야곱언약이 끝나면 국가가 성립되고, 이 국가는 그 안에 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에 영원한 국가가 된다는 겁니다.

* 영원한 제국 !!

이것을 다니엘서에서는 영원한 제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과 비교가 됩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에 등장하는데, 바벨론의 그 금신상이 인간들이 만든 국가의 최종적인 본성을 다 담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금신상의 마지막 부분인 발이 철과 진흙으로 되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돌맹이 하나에 의해서 깨어지면서 금신상이, 즉 세상의 제국이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깨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제국이 세워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나라가 멸망한 장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겁니다. 작은 돌맹이 하나가 금신상을 다 부수어 버리고, 그 돌맹이가 커져서 태산을 이룰 때, 그 태산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겁니다.

(단 2: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단 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짐승의 나라인 국가특징은 권세에 있는데, 즉 힘이라는 말이죠.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고 하니, 희생의 가치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라는 겁니다. 희생은 자기를 포기하고 비우는 것이고, 반면에 힘은 자기를 확장시켜서 더 키우는 것이란 말이죠.

* 국가는 천국의 반대편에 !!

천국과 이 세상은 그 차이점은 분명한데, 이 세상은 국가라는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땅은 국가가 다 점령하고 있는데, 약 220개의 국가가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은 국가형식인데, 천국과는 반대편, 혹은 맞은편에 포진해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희생의 가치가 들어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천국은 걸림돌이 출입구에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국가는 희생이 아니고 힘을 끌어 모으는 것인데, 즉 가인이 만든 나라라는 말이죠. 그래서 가인과 아벨,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쉽다는 겁니다. 아벨은 하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이 달아나고 말았는데, 반면에 가인은 가해자였다는 말이죠.

그러면 짐승의 나라는 가해자 역할이고 천국은 피해자 역할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힘을 모으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 힘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경험했던 힘인데, 그러니 먼저 경제적인 것이고, 그리고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으는, 소위 유명세라는 겁니다.

이 유명세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는 초월성이 담겨있는데, 즉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신비로운 것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하나의 힘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이 이 세상의 권세를 다 가지는 것인데, 즉 정치적이라는 겁니다.

* 예수님을 알아차린 악마 !!

이러한 경제적인 것과 유명세와 정치적인 권세를 악마가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내 밑에 오면 이것을 모두 주겠다" 라고 흥정을 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악마는 예수님을 알고 있는데, 악마가 보기에 예수님은 악마의 세계를 허물어뜨릴 유일한 분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악마는 이미 눈치를 챘다는 것이죠.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악마가 예수님을 놓쳤는데, 그렇다면 악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장은 놓쳐버리고, 그에게 속한 백성들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가진 힘을 너에게 주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경제적인 것, 출세하고 싶은 것, 그리고 세상권력을 악마가 다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자기에게 복종하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말이죠.

(계 12: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계 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다니엘과 세 친구들 !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인데, 그들이 고난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리우스왕 때 고위 공무원이던 다니엘이 그만 모함을 받아서 사자굴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출세를 하는데 있어서, 너는 내 앞길을 방해한다" 라는 것이죠.

현재 다니엘은 왕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데, 그런 다니엘의 자리가 너무나 탐이 난다는 겁니다. 옛날에 왕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였는데, 그래서 왕을 자리에 앉혀놓고서는 자기들의 권력을 서로 가지려고 권력싸움을 한다는 말이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그러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 보면 어떻습니까? 임금을 올려놓고는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을 했다는 겁니다.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져서 말이죠. 그렇게 권력에 대해서 탐을 나는데, 이 권력이란 것은 자기의 말빨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자기의 말빨이 먹혀들게 되면, 그만 자기가 신이 된다는 느낌을 확 받게 된다는 것이죠.

* 다니엘이 나빠요 !!

아무튼 이 다니엘이 자기의 출세를 방해한다고 여겨서, 죄를 짓지도 않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묻겠는데, 어느 쪽이 나쁩니까? 다니엘이 나쁜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다니엘을 모함하는 자들이 나쁜 겁니까? 물론 모함하는 자들이 나쁜데, 그런데 그가 자기 남동생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촌에서 농사를 지어가면서 남동생 하나를 잘 키우려고 애를 썼는데, 그래서 공무원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니엘 때문에 진급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동생 편에 선다는 겁니다. 그렇게 구약의 이야기가 신약에 넘어오면, 인간의 내부까지 파고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쉽게 다니엘을 모함하는 자는 나쁘다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하수에로왕, 에스더, 모르더개, 그리고 하만이 있으면, 이 하만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악한 하만의 속성이 자기 안에 들어있음을 까발리는 것이 신약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하셨는데, 누가 누구를 평가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죠.

* 희생자인가? 가해자인가?

천국은 희생의 나라라고 했는데, 그러면 "누가 이 세상에서 누가 진정한 희생자인가?" 라는 것인데,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희생해서 출세를 하겠다는 것은 희생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그것은 가해자라는 말이죠. 자기가 바르게 살아서, 그렇게 바르게 산 것을 기초로 해서 이 세상의 권력을 노리는 것, 이것이 바로 가해자, 즉 짐승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 아들의 나라 !!

목사가 "교회에 충성하면 자식이 교회와 국가에 큰 일군이 된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까? 짐승의 마음입니까? 이 세상에서 희생하신 분은 유일하게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래서 천국을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나라' 라고 모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아주 구체적으로 '아들의 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처음으로 돌아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족의 문제였는데, 그런데 야곱에 들어가면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국가를 형성합니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언약의 취지, 즉 희생적 취지를 살려낸 유일한 국가가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바쳤는데, 키우던 개를 잡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아들을 바쳤다는 것은, 자기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죽음으로 향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단절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나타난 할례언약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할례언약의 특징은 단절성에 있다는 겁니다.

자기 생식기를 자르는 것인데, 그러니 "내가 낳은, 나 같은 자식은 천국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스스로 자인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끊어짐 속에서 새로운 자손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복음은 불교와는 전혀 다른데, 그렇지요? 불교는 자기가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란 말이죠.

* 나무관세음보살 !!

원시불교, 부파불교, 유식불교, 그렇게 불교가 발전을 한다는 겁니다. 원시불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다고 하는 공(公)사상이고, 그리고 부파불교는 모든 것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어서 그물망처럼 짜여있다고 하는 연기(緣起)사상인데, 화엄경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유식(唯識)불교는 인간의 모든 것음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 유식불교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곧 부처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처보다도 보살이 더 중요한데, 보살이 더 위에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혹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최고의 보살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인데, "자유자재로 지켜본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고 유신론이라는 겁니다. 신을 인정하는데, 다만 자기가 신이라는 것이죠. 이게 인간의 본성에 맞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악마의 마스크라는 겁니다. 악마의 대변자인데,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티를 낸다는 말이죠. 인간은 신이 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 말빨의 필드 !!

조금 전에 강의한 대로 하면, 인간은 자기 말빨의 필드가 아니면 거기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말빨의 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교회에 오래 다니면 장로와 권사자리를 준다는 겁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는 평신도에게 말빨의 권력을 쥐어준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주어야 다른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말빨이 세워진다면, 거기서는 자기가 신이라는 말이죠.

직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던 아버지가, 그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그냥 집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잔 걸치고 온다는 겁니다. 그때는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하는 가장으로서의 심정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바깥에서 힘들게 일을 했으니, 너거들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이것을 주사라고 하는데(ㅋㅋ), 그래서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말이죠.

그러니 모든 인간은 각자 각자가 다 관세음보살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원효라는 중이 이러한 행함의 불교를 믿음의 종교로 바꾸었는데, 즉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죠.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것과 같아 보이는데, 아닌가요?

불교를 비롯해서 모든 종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언약이 없다는 것인데, 그리고 이 언약의 특징은 단절성에 있다는 겁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라는 것이죠. 즉 "나는 이단으로 태어났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 아니고 이단인데, 그러니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할례언약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곧 이단인데, 그러니 이단논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말이죠.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이단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단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게 중요한 문제라는 말이죠.

* 이단으로 태어나 이단에 누워 ♬

그러니 먼저 출발점이 자기는 이단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말이죠. 에덴동산에 쫓겨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이단으로 태어나 이단에 누워 저무는 은총을 바라본다 ♬" 라고 노래를 살짝 불렀는데(ㅋㅋ), 지옥에서 태어나서 지옥으로 사람으로 지옥에서 산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고,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요? 여기에 대해서 교재 181페이지를 보면, 거기에 마태복음 16장 17절과 18절의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이는 혈육이 아니요 !!

여기 17절에 보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라고 하는데, 혈육, 즉 부모로 물려받은 DNA 덕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의 아버지, 즉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아시는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가 베드로로 하여금 천국백성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혈육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혈육에 속한 것만 이해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버지도 이단이고 자기도 이단인데, 그리고 자식도 이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외부성' 이라고 하고 싶은데, 즉 외부에서 주어지는 성질이라는 말이죠. 이런 외부성이 없으면 우리는 천국백성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찾았으면 누가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 13절에도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사람의 뜻에는 누구의 뜻도 포함이 됩니까? 자기의 뜻도 포함이 되는데, 즉 "나의 뜻대로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자기의 희망과 요구사항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 당신은 왜 괴롭지 않아야 하는가?

그런 것은 불교에 가서 찾아보면 되는데, 도를 닦으면 된다는 겁니다. 불교교리는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 괴로운 것이 자기 욕심 때문인데, 따라서 괴롭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욕심을 제거하면 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저는 묻는데, "왜 인간은 괴롭지 않아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교는 답변을 할 수가 없는데, 왜 자기는 괴롭지 않아야 하느냐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당신은 왜 지옥에 가면 안 되는가? 증명해봐라" 라는 것인데,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불교에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침묵을 한다는 말이죠. 생로병사, 즉 힘들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당신은 왜 힘들면 안 되는가? 그것을 증명해봐라" 라는 것인데,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한 욥과 똑같다는 말이죠. 욥이 어떤 소리를 하고 친구들이 어떤 소리를 해도, 결국 해결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의롭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슨 근거에 의해서 의롭다고 하는가?"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왜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까?

그것은 그 맞은 편에 대조가 되는, 자기가 아닌 다른 인간형, 즉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인간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만고만한 인간들끼리 비교하니, 그것은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라는 겁니다. 서로가 "내가 잘난 것은 당연하다" 라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이죠. 언약을 모르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언약을 알고 복음을 안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의 맞은 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우리의 맞은 편일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상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여기 13절에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그것을 "나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라고 하자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 본문을 외우라고 하면 잘 외우는데, 그런데 이 말씀을 들고 세상에 나가면 그만 어떻게 됩니까? 무슨 고기를 먹었는지 몰라도 다 잊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밀어부친다는 겁니다. 이단으로 태어났으면서도, 그야말로 이단이 아닌 척을 한다는 것이죠.

* 신앙인 코스프레는 이제 그만 !!

저는 이것을 "제발 칭얼거리는 신앙인 코스프레를 하지 말자" 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코스프레라는 것은 흉내를 내는 것인데,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그런 경우가 많은데, 사람들이 거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복장을 흉내내서 하고는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이제는 그러한 코스프레가 아니고 전사가 되자는 것인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라는 말이죠. 자기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하지말고,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싸움꾼이고 전사들인데, 그것도 그냥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죠.

* 진짜 이 세상의 위기는?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로 난 자' 라고 하면, 그러면 그런 자는 누구를 닮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인데, 그런데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 언급했는데, 이 세상이 위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코로나 때문이 아니고, 요즘은 오미크론 변이가 대세라고 하는데, 델타(Δ), 오미크론(Ο), 이것들은 헬라어, 즉 그리스어 알파벳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이 세상의 진짜 위기는 코로나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 그게 바로 위기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왜 이런 더러운 곳까지 직접 찾아오셨느냐는 말이죠. 인간세계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위기 중의 위기라는 겁니다.

시어머니가 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보내주는 용돈이나 받고 계시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왜 김장을 했다고 하면서 바리바리 싸들고 서울에 올라오시느냐는 겁니다. 찾아오지 말라고 아파트 이름도 일부로 영어로 다 바꾸어놓았는데 말이죠(ㅋㅋ). 그리고 그냥 조용히 잘 계시면 보일러도 바꾸어드리고 할텐데, 왜 직접 찾아오시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와서는 하룻밤만 자고 가시는 것이 아니고, 서울구경도 좀 하고 두 달만 있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그리고 노인네 냄새는 또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가자마자 청소업체를 불러서 대청소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손주에게는 초코렛을 먹여 가지고, 아이의 치아를 다 조져놓는다는 겁니다.

살던 곳에 잘 계시면 되는데 집구석까지 찾아오시면, 그러면 도저히 같이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가구배치부터 모든 환경을 자기에게 딱 맞추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게 주님의 언약환경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러면 세상은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그것도 주님이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을 대동하고 오시는데, 이 천사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 저주를 내린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끼리 살 때는 죄가 없었지만, 내가 등장함으로서 너희는 비로소 죄인이 되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요 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니 우리끼리 하는 짓은 죄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이 왔을 때 비로소 우리가 깨닫지 못한 죄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 죄는 결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데,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유가 복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오히려 자유가 형벌이라는 말이죠. 이 자유는 선택과 판단을 의미하는데, 자기의 선택과 판단이 자기 마음의 무게를 무겁게 하면, 그러면 이 세상이라는 늪에 점점 더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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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트르는 일생에 거쳐 수많은 감동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표출하였다. 그러기에 사르트르라는 이름 뒤에는 실존주의란 말이 따라오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요소들과 융합하며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대전의 상황 속에서 쓰여진 '존재와 무'로 대표되는 초기의 사르트르가 순수한 의미에서의 실존주의자라면 냉전상황 속에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쓴 후기의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적 실존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고 말했고 또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라고 선포하였다. 그가 볼 때 인간은 기독교적 교리와 사회적 제도의 구속을 넘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기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가톨릭교회와 프랑스 공산당의 비판에 대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라는 말로 응수하였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고 자유롭게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생성의 존재로서의 인간 모습을 사르트르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어느 곳에 정착하지 않는 보헤미안적인 삶, 그리고 시몬느 드 보브와르와의 특별한 관계는 부르조아적인 안정과 삶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자 비판이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정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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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간다고 하셨는데, 거기에 비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왜 천국에 가기가 힘이 듭니까? 가난한 자보다 부자는 왜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우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체적인 중량감 때문인데, "나는 이 정도야" 라고 하는 말이죠.

그런 중량감으로 인해서 스스로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마는데, 그러고도 그게 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아이가 계속해서 전교 1등을 하다가 이번에 2등을 했다면, 그러면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너 죽고 내 죽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ㅋㅋ). 이것은 자기가 자기도 모르게 얼마나 교만해졌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죠.

처음에 짐승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힘을 끌어 모으는 것인데,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1등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그것 때문에 주님이 희생을 당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났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품고 등장하는 존재들이 드디어 이 땅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 야곱언약 !!

오늘은 야곱언약에 대해서 하려고 하는데, 야곱언약은 그 출발이 이삭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삭언약에서 야곱언약이 나오고, 그리고 야곱언약의 완성으로서 국가 이스라엘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계시를 준 것이 이삭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네가 쌍둥이를 낳을 것인데, 그들의 살아가는 인생의 끝이 다르게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에서 이렇게 끝이 다르게 나왔다는 것은, 한 쪽이 복이면 다른 쪽은 당연히 저주라는 말이죠. 즉 복과 저주,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러면 누가 복을 받겠습니까? 여기서 "제가 받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복과 저주는 분명히 나누어져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차지하는 방법에 있어서, "(1) 사람의 뜻, (2) 하나님의 뜻", 그렇게 구분이 된다는 겁니다. 즉 사람의 뜻을 동원해서 차지할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동원해서 차지할 것인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뜻부터 먼저 시작을 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런 걸림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25장에 나오는데, 29절에서 34절까지 보겠습니다.

(창 25: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창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 25: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창 25: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 25: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창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 !!

야곱이 죽을 쑤었는데, 그때 에서가 들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에서가 그 팥죽을 좀 달라고 하니, 야곱이 뭐라고 합니까? 31절에 보면,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야곱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조건을 형에게 제시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도저히 성립이 될 수가 없는 조건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먼저 태어난 것이 장자고, 그 다음은 장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떻게 바꿔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 당시에 장자가 아닌 차자는 달리 의미가 없는데, 오직 장자만이 복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언약에서 복과 저주를 제시했을 때, 에서 쪽에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은 먼저 태어난 장자 쪽으로 전달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먼저 태어난 것으로 말미암아서 에서 쪽에서 보면 복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확정되어서 끝이 났는데, 그런데 동생 쪽에서 뭔가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에게 장자명분을 팔면 팥죽을 주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야말로 헛된 조건이라는 겁니다. 팥죽을 먹는다고 해서 그게 바뀔 리가 없다는 말이죠. 먼저 태어나면 장자고, 그 뒤에 태어난 차자는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장자에게 종속된 신분이고 운명이란 겁니다.

오늘날처럼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옛날에는 땅이든 무엇이든 장자에게로 상속이 된다는 겁니다. 둘째나 셋째는 장자에게 빌어먹든지 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그들의 운명이라는 말이죠. 장자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는 그런 개념이라는 겁니다.

* 서열이 바뀌었습니다 !!

그러니 에서는 야곱의 그런 조건제시에 대해서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는데,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다는 말이죠. 팥죽을 먹는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문제인데, 그러니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속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속았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사람의 뜻으로 풀어내겠다고 한 것인데, 그런 인간의 상식으로 풀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겁니다. 새로운 언약이 오면 거기에 맞추어서 환경도 새롭게 바뀐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언약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환경을 바꾸어버린다는 겁니다. 언약적 환경으로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기 교재 182페이지에 보면, "서열이 바뀌었습니다. 시간의 역전입니다. 에서는 수평적으로 바뀔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수직적으로 바뀌고 말았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서 무슨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야곱은 속였던 말던 장자의 명분을 얻었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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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산 제물을 받으실 때, 죽은 짐승의 제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제물이 점점 인격화가 되어서,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경우에만 천국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을 창세기부터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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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제물을 죽여서 바치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죽여서 바쳤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 죽은 제물, 그것이 희생인데, 그 제물을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제물을 누가 죽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가 죽이는데, 자기가 죽여서 바치는 제물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살하신 것이 결코 아닌데, 그 어린양을 믿는다고 하면, 그러면 거기에 누가 가해자라는 겁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찔렀다는 것인데, 그래야 자기가 그 제물의 효과를 얻게 된다는 말이죠.

* 누가 가해자인가?

그게 십자가인데, 목걸이를 하라고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자기가 예수님을 죽인 자로서, 그래서 자기 손에 죽은 자가 예수님이란 인식의 연관성을 가지고 들어가야, 예수님이 죽은 그 효과를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겁니다.

이것도 모르고서는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효과가 없는데, 십자가가 무슨 마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 죽음이 거기에 하나의 요소로서 참여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럴 때 십자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완성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목표가 있는데, 그게 시편 37편에 나오는데, 10절에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라고 하는데, 그게 천국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게 어떻게 없어지느냐는 겁니다. 그 없애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자기 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아들의 죽음에 모든 인간들이 다 관여하게 만들어서 없애버린다는 말이죠.

(시 37: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데, 그 죄의 마지막 종착역은 인간이 하나님을 죽이는 것인데, 어제 낮 설교에서는 그것을 '밀어버린다' 라고 표현했다는 겁니다. 아담은 악마의 마스크인데, 악마는 이미 예수님을 자기 라이벌로 생각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멸망시킨다는 것도 아는데, 대적관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십자가는 걸림돌 !!

지금 진도가 중요한 게 아닌데, 다시 해보면, 천국의 입구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걸림돌이 있다고 했는데 말이죠. 로마서 9장 33절에 보면,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성이라는 말이죠.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기존의 종교는 무엇인고 하니, 차용된 신, 즉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인데, 마치 관자재보살과 같다는 겁니다. 기존 장로들이 기도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무한하시고, 그런 것은 차용된 신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신은 무엇이 빠졌는고 하니,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신에 대해서 알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걸림돌이 없는 가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6세기에 발달된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관자재보살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같다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그만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부딪치는 돌, 그런 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밥에는 돌이 있으면 좀 곤란하겠지만 말이죠(ㅋㅋ). 하나님께서는 천국입구에 돌을 박아놓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위한 하나님, 자기를 위한 예수, 그런 것은 모두 걸려서 넘어지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죠.

* 걸림돌이 없는 수덕사의 여승 !!

왜 이것이 인간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인간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목사가 말리고 해도 새벽기도에 나와서 거침없이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노래가사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제목이 '수덕사의 여승' 이라는 겁니다(ㅋㅋ). 여승이 수덕사에서 밤새도록 울고 있는데, 속세에 두고 온 님이 그리워서 말이죠.

절에서 새벽에 목탁을 두드리는 것과 교회에서 새벽에 기도하는 것과 무슨 차이점이 있습니까? 불교는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와서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냥 빕니다" 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과, 절에서 부처에게 기도하는 것과, 그 노림수가 무엇입니까? "나를 지옥에 보내주세요" 라고 하지는 않는데, 그렇지요?

* 주여, 균형 쇼핑을 하게 해주세요 !!

모두가 다 자기 잘 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식이 잘 되기 위해서, 그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남편이라는 말이죠. 남편이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히지 않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자기가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는데, 양손에 균형이 잡히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이게 여성들의 로망인데, 그렇지요? 그렇게 양손 쇼핑을 하고 나서는 유명하다는 맛집에 가서 수다를 떨면서 저녁을 먹고, 그 다음에는 피부미용실에 가서 피부와 몸매관리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대한민국의 부잣집 마나님들이 하루종일 하는 짓거리라는 말이죠.

그것이 아니고, 시골에 가서 소를 키우고 고추를 재배하고 하는 것이 로망인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루종일 햇볕 아래에서 일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비닐하우스도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되면 피부도 상하고, 그야말로 온 몸이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남편을 붙들고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을 조졌다. 물려내라" 라고 하소연을 하는데, 그러면 남자는 그냥 입만 쩝쩝거리면서 끝내고 만다는 겁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전원생활인데, 이단은 어디를 가더라도 이단이라는 말이죠. 인생이란 것이 그것말고 달리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

에서의 특징은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복을 받는다" 라는 의식인데, 걸림돌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야곱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겁니다. "내가 복을 차지해야지" 라고 하는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부각을 시키는데, 그런데 그게 한 밤중에 하나님의 사자에게 처박힌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32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창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자기가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나' 라고 하는 무게, 즉 "누구든지 나의 복을 가지고 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 나는 그런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격자다" 라고 우기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처박혀서 죽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었으니 이름이 바뀐다는 것이죠. 야곱이라는 이름은 이제 날아가고, 그게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그런 야곱을 희생물로 만들기 위해서, 여기서 단절, 그게 할례언약의 연속성인데, 주님은 야곱의 인생자체를 할례의 의미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롭게 등장하는 국가는 바로 이러한 국가를 의미한다는 말이죠.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이 아닌데, 예수님의 그 비극적인 삶 속에 자기가 악한 역할로 참여되었음을 찬송이라는 것, 그것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악하다는 것에 대해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말이죠. 즉 "십자가 앞에서 최초로 나를 발견했다" 라는 것인데, 자기가 이단의 세계에 이단으로 태어나서 이단으로 살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유월절 어린양의 효과 안에 있다는 것인데, 그런 필드에 말이죠. 하지만 에서는 그것이 없었는데, 자기가 가질 만해서 가졌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물론 야곱도 처음에는 그러했는데, 그런데 주님에게 처박히고 나서 완전히 반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것을 희생중심으로, 그렇게 쏠리게 만든다는 겁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상상을 통해서 "나는 참 힘들었다" 라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심리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를 통해서 그야말로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말이죠.

* 요셉의 일대기 !!

그렇다면 요셉의 일대기를 써보겠는데, 요셉이 태어났을 때에 야곱은 92세, 혹은 93세였다는 겁니다. 요셉이 10살 때 자기 동생이 태어나는데, 그게 베냐민인데, 그가 태어나는 동시에 누가 죽는고 하니, 라헬이 죽는다는 겁니다. 이게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닌데, 성경이 얼마나 디테일한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니 베냐민은 잉태치 못한 자의 잉태인데, 엄마가 죽고 없다는 겁니다. 물론 요셉은 10살 때까지 엄마가 있었지만, 이제는 둘 다 엄마가 없는 하늘아래에서 살게 되었다는 말이죠. 완전히 왕따를 당한 것인데, 왜냐하면 형들은 다 엄마가 있다는 겁니다.

요셉이 17살 때 야곱은 110살인데, 야곱은 레아와 라헬 가운데 한결같이 라헬을 사랑했는데, 레아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라헬을 사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데, 즉 레아와 비교해서 예뻤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데, 레아는 눈동자가 힘이 없었고, 라헬은 반짝거렸다는 말이죠.

(창 29:17)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그러니 야곱의 입장에서는 못난 것은 자기 격에 맞지 않다고 여겼는데,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천사에게 걸리기 전에 말이죠. 예쁜 것은 자기 소유가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그런 인간적인 야곱이라는 겁니다. 또한 그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요셉은 17살 때 노예로 팔려가게 되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다시 만날 때가 39살 때인데, 그러니 아버지 야곱은 나이가 132살이라는 말이죠. 22년 동안을 만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자식인 요셉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좋은 원단을 가지고 특별 유니폼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물론 형들의 시기심으로 인해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하지만 가정에는 없으니 일단은 죽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짐승에게 물려죽은 요셉의 피가 묻은 그 옷을 보고, 그야말로 탈진할 정도로 오열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110살에서 132살까지, 무려 22년 동안이나 자식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언약이란 것은 단절성으로 인해서 자식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다시 찾을 때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야곱은 요셉을 다시 찾을 때까지 22년이 걸렸는데, 반면에 아브라함은 즉각 다시 찾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스톱을 시키고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수양을 잡도록 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이 극히 짧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야곱은 무려 22년인데, 그 세월동안 야곱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식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세월호와 천안함의 고통을 그 부모들이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요셉이 17살에서 27살 때는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가게 되는데, 그리고 28살 때 바로 왕의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게 되고, 그리고 30세에는 드디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다는 말이죠. 2030에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창 41:46) 요셉이 애굽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31살 때에 7년 동안 나라에 풍년이 드는데, 그리고 38살 때는 7년 동안 흉년이 든다는 말이죠. 앞에 풍년 때 모아놓았던 것을 다 까먹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흉년이 들었을 때 형제들이 방문을 하게 되는데, 이때 요셉의 나이가 39살인데, 그 앞에 먼저 한 번 방문을 했는데, 그러니 이때가 2차 방문이라는 말이죠. 이때 야곱은 나이가 132살인데, 그러니 22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45살에 7년 흉년이 끝나는데, 참 국무총리를 할 때 낳은 자식이 있는데, 그것이 풍년시절인데, 그것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말이죠. 요셉은 56살, 야곱이 147살 때, 이 아들들이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셉은 110세의 나이로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야곱언약에 있어서, 가롯유다 역사 속에서 기존의 것이 어떻게 됩니까? 기존의 인간들의 뜻을 모두 다 헤집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언약이 분출하게 된다는 말이죠. 애굽이라는 권력의 세계 속에서, 희생자의 모습이 그 권력을 부수고 나오는 방식으로 언약이 진행된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38장에 잘 나오는데, 27절에서 30절입니다.

(창 38:27)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창 38: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창 38: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창 38:30)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 언약의 자손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이게 시아버지인 유다와 그의 며느리인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말하는데, 쌍둥이라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해서 결혼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언약의 자손이 어떻게 태어나느냐는 것이란 말이죠.

시아버지로 인해서 며느리인 다말이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여인의 임신이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사는 이 인간세계에 걸림돌을 제시했다고, 그렇게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을 주님이 일으키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아이를 낳는데, 산파가 먼저 나온 아이를 장자라고 해서 손을 잡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당연한데, 먼저 나온 자가 장자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까 에서와 야곱을 이야기하면서, 에서가 먼저 나와서 장자인 것처럼 여겨졌는데, 그런데 중간에 야곱이 장자가 되고 에서는 장자에게 종속이 되는, 그렇게 저주를 받은 자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언약은 반드시 서로가 맞은 편에, 그렇게 대조가 되는 운명을 드러낸다고 했는데, 즉 축복과 저주가 동반해서 나타난다는 것이죠.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자기가 천국에 간다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니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그와 더불어 지옥에 갈 자도 생겨난다는 겁니다.

아무튼 산파가 먼저 나온 아이의 손에 붉은 실을 매였는데, 쌍둥이니 표시를 해두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헛갈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장자가 구별이 된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이고 인간의 뜻인데, 거기에는 언약의 취지가 전혀 담겨있지를 않다는 겁니다.

* 터치고 !!

그래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산파가 먼저 나온 아이의 손에 붉은 실을 매였는데, 그런데 그 아이는 다시 엄마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그의 형제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29절에 보면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고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아이가 '터치고', 즉 터뜨리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오묘한지 모르는데,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으로 가득한, 인간은 자기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뭔가 저주를 제치고, 찢어버리고, 거기서 낯설게 미사일처럼 '슈웅' 나오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위력이라는 말이죠.

육은 반드시 있어주어야 하는데, 우리가 이단이 되어도, 저주를 받아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저주 속에서 어떻게 생명이 나오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을 증거하는 자가 성도라는 겁니다. 터치고 나오는데, 그것을 4글자로 표현하면 '야곱언약' 이라는 말이죠.

야곱언약은 외부로 보면 그냥 육인데, 즉 남들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부동산을 좋아하고 권력을 끌어 모으고, 그것이 야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하면 반드시 이질적인 것이 나와주어야 하는데, 이 세상과 동일한 것이 아닌 이질적인 것이 말이죠.

* 이질적 기도 !!

그러니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기도할 때 무엇이 나와야 합니까? 동질적인 것이 나와야 합니까? 이질적인 것이 나와야 합니까? 그러면 기도하면서 먼저 육적인 것을 언급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여기서 잠시 제가 장로가 되어서 기도를 해보겠는데 말이죠.

먼저 시작하기를, "자비하고 은혜롭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하는데, 아주 상투적인 멘트라는 겁니다. 이게 불교에서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그런 하나님이 남북통일을 하게 해주시고" 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는 개인적인 것을 구하지 않다는 티를 낸다는 겁니다.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하는 소리라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나라가 공산당 국가가 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이것은 노골적인 선거운동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어서 부강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인데 말이죠. 여러분도 잘 들어놓아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이미 제한연령을 오버한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이렇게 공적인 것을 해놓으면 이제 자기는 이단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 다음에는 개인적인 것으로, 즉 "우리교회가 예배당을 크게 지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해주시고,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가 확장되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복을 받게 해주시고" 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까 말한 악마의 3가지 권력을 다 누리게 해달라는 소리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놓고,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하면 됩니까? "주여, 이 모든 것이 육적인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장로직에서 잘리게 되는데 말이죠(ㅋㅋ).

참 한 가지가 빠졌는데, "예수를 믿고 교회의 직분을 맡은 가정은 다 잘되게 해주세요" 라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동질적인 힘인데, "그것 때문에,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 잃어버림, 단절의 틈이 있어야 !!

그러므로 잃어버림이고 단절의 틈이 있어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잃어버린 자식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하면, 야곱은 그것이 확장되어서 그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겁니다.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울지 못하고 참았던 기간이 너무 길다는 말이죠. 조항기의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라는 노래인데, 이제는 다들 아시죠? (ㅋㅋ)

그렇게 이질적인 것은, 동질적인 것이 갖추어지고 난 다음에 그것을 뚫어내는 가운데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나는 복음을 안다. 십자가를 안다" 라고 하지말고 그냥 살면 되는데, 그렇게 살아가면 자기가 추구하는 것과 주님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지를, 그게 서로 반대방향이라는 것을 느끼면 된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울고불고 하는 것이니, 절에 가서 울고불고 하는 것이나, 그것들이 다들 대동소이하다는 말이죠. 몸이 아프다든지, 사업에 실패를 했다든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든지, 모두가 그런 자기의 고민거리이고 자기 가정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성도와 불교신자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성도는 거기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허망한 것들을 꿈꾸며 살아왔다는 것을, 그러한 자기 자신이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아버지 !!

다시 강의 초반으로 돌아가서,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냥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고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겁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면 베드로의 남은 인생이라는 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 풍족하게 되었습니까? 전혀 그게 아닌데, 그야말로 나그네처럼 나그네처럼 말이죠. 이 세상은 결코 자기가 마음을 두고 살아갈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세상의 지식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이런 베드로의 삶이나 스데반 집사님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하게 되는데,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이 있어서 돌에 맞아 죽는다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이질적인 것이 아닌데, 그러니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자체를,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가지고 봐야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안목으로 이 세상을 보는 바라보는 방법이라는 말이죠. 주님의 원수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곧 주님의 원수라는 겁니다. 성경말씀도 제대로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면서 그것으로 자기 이익을 챙겨왔다는 것이죠. (아멘!)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180페이지를 보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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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에 자기 얼굴에 들이대면 그 카메라에는 자기만 보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들이대니 자기만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 잘난 것을 보고 있으니, 성경이 별 의미가 없는데, 성경에서 자기 얼굴을 치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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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무리 성경을 보더라도, 자기의 얼굴을 들이대면서 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자기의 탐심과 욕심만 더욱 더 가득하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을 아무도 읽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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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에 일본에서 '물 없는 정원' 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정원에 물은 없고 대신에 모래가 있고 소나무가 있고 돌이 몇 개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의 '여백의 미'가 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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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없는 정원 !!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돌이라고 여기고, 그런데 그 사이를 물처럼 누비고 다니는 분이 있다는 말이죠. 이삭과 야곱과 요셉도 정원의 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중간 중간을 다니면서 하나로 모으는 분이 있는데,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장차 오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던 제물, 그 죽은 제물이 산 제물로서 우리 가운데 함께 있는데, 그게 '임마누엘' 이라는 말이죠.

그게 오늘날 교회이고 성도이고 형제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나는 성도이다" 라는 것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가운데, 우리와 우리 가운데, 누가 실제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지를 보여주면 되는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분이 계신다는 것을 말이죠.

그렇다면 그분이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는 가해자이고 피해자는 주님밖에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모든 일에, 즉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주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야곱언약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야곱도 지극히 인간적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으로 하여금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었듯이,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도 항상 십자가의 취지가 완성되어있음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12,20 오전 11시에 마침.

오늘도 고통의 비명소리가 아닌, 감사의 찬송이 나오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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