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8 - 다른 이름의 나라
21,11,15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파충류 뇌 !!
인간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가르치는고 하니,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데, 자기가 가르침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것이 교육의 첫걸음인데,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흡수하고 빨아 당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환경에서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생물학적 적응이란 말이죠.
이것을 동물로 생각하면 쉬운데, 동물을 어떤 환경 속에 집어넣으면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을 한다는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이 점잖은 척을 하지만, 그것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살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을 정신 생리학에서는 '파충류 뇌' 라고 하는데 말이죠.
뇌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에는 피질이 있고 변형계가 있고 편도체가 있다는 겁니다. 이성적인 사고와 윤리와 도덕과 같은 게 여기 대뇌의 피질부분에 정보가 누적되는데, 그러니 피질이 두꺼우면 그런 정보가 많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변형계는 감정부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파충류 뇌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도마뱀이나 악어의 뇌와 같은 것인데, 때리면 자극을 받아서 그냥 뛴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극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는 상태인데, 그러니 파충류 뇌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 즉 모든 것의 출발점을 거기서부터 시작을 한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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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뇌는 크게 세 부분(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위인 1층은 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후뇌(뒤뇌)로, 뇌줄기(뇌간)와 소뇌로 구성되어 있으며, 호흡, 심장, 박동, 혈압 조절 등과 같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생명의 뇌' 또는 '파충류 뇌' 라고 부른다.
둘째 부위는 후뇌 바로 위에 있는 중뇌(중간 뇌)다. 중뇌는 위아래로 모든 정보를 전달해 주는 중간 정거장 역할을 하며, 감정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포유류들이 흥분과 공포로 울부짖거나 으르렁거리며, 꼬리를 흔들며 애정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감정적 행동을 담당하는 이 부분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인간 뇌에서는 이런 감정은 변연계 부분에서 일어난다. 감정 표현은 파충류에게는 발달하지 않은, 포유류만이 가진 고유의 행동이기 때문에 '감정의 뇌' 또는 '포유류 뇌' 라고 부른다.
셋째 부위는 대뇌 피질부가 있는 전뇌(앞뇌, forebrain)로 가장 최근에 진화한 것이다. 전뇌는 고도의 정신 기능과 창조 기능을 관할하고 있는, 인간만이 가진 인간의 뇌이기 때문에 '인간의 뇌' 또는 '이성의 뇌' 라고 부른다. 또한 이 부위는 학습과 기억을 하는 중요한 뇌 부위이다. 대뇌 피질부가 발달한 덕분에 우리 인간은 오늘날과 같은 인류 문명을 창조하게 되었고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여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 - 인체기행(2010, 서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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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인간의 신체이기도 한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육이라고 하지만, 과학에서는 육이라고 하지 않고 신체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 말하는 육이란 것은 무엇을 포함하는고 하니, 신체성과 그 신체성이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요소,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기 욕망, 혹은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충동과 욕망은 좀 다른데, 충동은 그냥 발작하는 것이고, 욕망은 자기가 노리고 있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충동에서 욕망이 나오고, 욕망에서 도덕이 나오고, 그리고 이 도덕이 좀 더 나가면 초월적 신의 세계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유토피아, 즉 망상이라는 것인데, 본 적도 없지만 상상한 초월의 세계, 그것이 바로 신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나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그 기초가 바로 욕망인데, 그리고 그 욕망은 충동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충동까지는 동물이고 욕망부터는 인간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우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는 그렇게 다급하고 시급한 것이 아닌데, 인간의 본성인 충동에 의하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한고 하니, 대뇌의 피질부분에서, 이게 이성의 영역인데, 이런 이성의 영역에서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충동 앞에서도 과연 선과 악이 있을 수 있을까요? 배가 고프면 일단 먹고 볼 일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이런 충동적인 것이 잘 나타나는 곳이 전쟁터인데,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 북이스라엘이 아람나라에 포위가 되었을 때, 아줌마들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돌아가면서 집안의 아이를 잡아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성이나 부모와 자식의 정이란 것이, 충동 앞에서는 웃기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고상함이나 도덕이라는 것,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부자들 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교도소에 부자가 갑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갑니까? 가난한 사람들인데, 부자들은 자살을 택한다는 말이죠.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죠. 금요일 파출소 유치장에 가면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가난한 서민들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과 도덕은 취미생활과 비슷한 것인데, 교회도 그렇고 말이죠. 밥이나 먹고 살면 되는데, 시간이 남아도니 그런 짓을 하는데, 인간의 대뇌피질이 이러한 초월세계를 추구한다는 겁니다. 이상세계, 즉 죽어서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 살아있는 자기는 살만하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것 전체를 '육' 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정리해보면, 성경에서는 육에서 영으로 가는데 있어서 이런 육을 죽인다는 말이죠. 죽여서 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취미인 교회생활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육이 그대로 살아서 영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것이 인간의 대뇌피질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서 가니 남들에게 티를 내야하는데, 그게 종교적인 조직이라든지, 예배당, 세례식, 성만찬과 같은 형식과 제도를 만들게 된다는 겁니다. 예배와 기도와 헌금과 전도는 어떻게 하고, 그런 식으로 말이죠. 그러니 이런 것은 조작된 것인데, 복음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티를 내고 싶은 것인데, 즉 "나는 신자이고 싶다" 라는 것이죠. 하지만 진짜 신자라고 하면 "왜 저를 살려주십니까?" 라고 나와야 하는데, 즉 주님께서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신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살아있으니 더 살겠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종교적인 핑계를 붙여도 범죄라는 말이죠. 주님이 보시기에 화를 돋우는 죄라는 겁니다.
* 살리고 살리고 !!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든, 그 근원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살고 싶다" 라는 것인데, 자기는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그게 한나의 기도인데 말이죠. 오늘 먼저 질문을 하시는 바람에 순서가 조금 바뀌었는데,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여기 6절에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봅니까? "여호와는 살리시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또한 7절에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여호와는 부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죽이는 것, 가난하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구 살리고 또 살리고, 그리고 부하게 하고 더 부하게 하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똑같은 성경을 보고 있는데도 그렇다는 말이죠. 왜 그런가요? 그것은 충동 위에 욕망이 있기 때문인데, 그 욕망에서 나온 것이 오락이고 취미라는 겁니다.
자기 욕망을 더 품위 있게 한 것이 종교인데, 그러니 목사는 무엇을 하면 되는고 하니, 사람들이 원하는 초월적인 취미생활을 도와주고 커미션을 챙기면 된다는 말이죠. 완전히 사기꾼들인데,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라는 말을 왜 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지난밤에 모기에 물린 것도 행운인데, 왜냐하면 주께서 모기를 불렀다는 것이죠.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인간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 주님께서는 인간을 죽었다고 보신다는 겁니다. 교과서에서의 죽음은 숨을 쉬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를 생산하지 못하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본다는 말이죠. 창세기 3장에서 이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끊어졌는데,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 다시 하면 !!
다시 하겠는데,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교육을 받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자기 생존에 유리한지, 그것을 자기가 선택해서 스스로 골라잡는다는 겁니다. 즉 '파충류 뇌' 라는 말이죠. 그래서 같은 형제나 자매라고 해도 크면 모두 다 다르다는 것이죠.
2015년에 태어난 아이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고 하니까, "아, 옛날이여 ♬"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래서 사회자가 "무슨 그리운 옛날이 있어요?" 라고 하니, 자기는 코로나 이전의 마스크도 쓰지 않고 마음대로 놀고 하던 시대가 그립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정을 넣어서 이선희처럼 노래를 부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도 나름대로 자기 인생의 기승전결이 있는데, 7살 먹을 동안의 순간순간은 치열한 자기 생존의 현장이었다는 말이죠. 자기의 과거를 어떻게 관리해야 미래가 더 좋아질지, 거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집중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오히려 나이가 80이 되면 집중을 하려고 해도 체력이 바쳐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 강력한 생존 집중력 !!
인간은 나이를 떠나서 자기 생존에 대한 집중력이 강력한데, 그것을 외부에서 뺏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타고난 본능이라는 말이죠. 그런 인간이 성경을 보면서 천국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성경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천국에 가야지" 라고 나오는데, 그럴 위인이 아닌 자가 누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게 육인데, 그러니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바꾸는데 있어서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인간은 왜 자기밖에 모르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출처가 시편 51편에 나오는 말씀처럼, 어미의 죄에서 태어났다는 것인데, 그것을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피질로 무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취미라는 겁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래서 목사가 뭐라고 합니까? "바르게 살면 복을 받아서 천국에 가고, 악하게 살면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출처는 전혀 감추고 애써 모르는 척을 하면서,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단수, 즉 하나로 끌어 모으는 인간들 !!
그렇게 최선을 다했을 때 그 열매가 무엇인고 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의 강의를 시작하겠는데 말이죠. 그 열매가 바로 자기가 끌어 모은 것인데, 그것을 여기 교재 169페이지에 보면 '단수'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단수, 즉 하나밖에 없다는 것인데, 두 개나 세 개가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가 끌어 모은 것을 여러 개로 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집대성을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결혼을 하면 가정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식들이 있게 되고 집도 있게 되고 적금통장도 있게 된다는 겁니다. 아닌가요? 그것이 바로 자기가 끌어 모은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 자식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 "내가 내 인생을 잘 살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끌어 모은 것이니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결국 자기 열매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인간은 육이 맞다는 것이죠. 여기에 무슨 하나님이 나오느냐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기가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인데, 빼앗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것을 끌어 앉고 죽는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목사고 장로고 집사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이런 것을 가지고 자랑질을 한다는 것이죠. 자기 위신, 체면, 그런 것이 다 자기 것이란 말이죠.
* 죽이시는 하나님 !!
그런데 사무엘상 6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지만 먼저 죽이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죽음이란 것이 없으면 살리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냥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죽이시는 분이 살려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죽일 수 있는데, 오늘의 아이템은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얼마든지 가난해도 되는데, 오늘의 컨셉은 맛있는 고기를 먹게 해주시는 것이란 말이죠.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이 마음대로, 그렇게 주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중세시대에는 계급문제가 없었는데, 양반이던 상놈이던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는 겁니다. 누가 귀족을 하던 무엇을 하던, 자기를 농사를 짓는 것도 자기 운명이라고 여기고 감사하면서 살았다는 것이죠.
이것이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자의 투표권이 왜 필요 없는고 하니, 남자가 알아서 하면 된다는 말이죠. 투표권이 없어도 하나님이 살려주시는데, 굳이 자기가 투표를 해야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중세시대의 마인드라는 것이죠.
* 하늘의 초월성이 세속성으로 !!
그런데 19세기에 막스 베버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산업혁명 이후에 하늘의 초월성이 세속성으로 바뀌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하늘에서 복을 찾던 자들이, 즉 자기가 농부이던 무엇이던 간에 그게 복이니 감사하면서 살았던 자들이, 그만 세속성이 되었다는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세속성이란 무엇인고 하니, 산업혁명 이후에 자본이 들어오니까, 그래서 이제는 "돈이 있는 것이 복이 된다" 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세속성이니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복을 따낼 수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여기에 개입한 것이 놀랍게도 개신교인데, 그래서 개신교는 노동을 중요시하는데, 즉 "노동을 통해서 그 결과가 복이 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개신교의 세속화라는 겁니다. 즉 노동을 하면 돈을 벌고, 그렇게 돈을 벌면 그게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는 말이죠.
* 돈이 자본이 되어서 힘이 되는 사회 !!
인간이 노동을 하면 그냥 돈을 버는 게 아니고 자본을 축적하게 되는데, 그것은 힘이 된다는 겁니다. 그냥 돈은 쓰는 것이지만 그게 축적되면 자본이 되어서 무기가 된다는 것이죠. 돈은 백이면 그 백으로 물건을 바꾸지만, 자본은 백이면 그게 천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화폐사회와 자본주의사회의 차이점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노동에서 얻은 돈이 자본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려면 근면절약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미래를 위해서 쓰지 않고 저축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우리가 듣기에는 당연하게 들립니까? 나쁘게 들립니까? 당연하게 들리는데, 그러나 중세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시간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의 시간을 자기가 계산해서 이자를 받는다는 것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짓이지,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러니 시대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마땅한 줄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 죽어 마땅함 !!
이것은 영적인 시대로 그 버전을 바꾸어서 설명을 하면, 성도란 죽어 마땅함인데, 피곤해도 마땅하고 깨어져도 마땅하고, 헤어져도 마땅하고, 가난해도 마땅하고, 아파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가족이 모두 다 해체가 되어도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 성령 안에서의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성도는 무엇을 아는고 하니, 자기에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관여했다는 겁니다. 자기는 잘나고 싶고, 종이 아닌 대장이 되고 싶고, 아픈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싶다는 말이죠. 남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싶은데, 그런 욕망이 너무나 강렬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을 자기 힘으로 끊어낼 수가 없는데,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너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너는 망해도 당연하고, 죽어도 마땅하고, 가정이 무너져도 마땅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을 아는고 하니, 자기는 너무나 남들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그리고 병원은 그 근처에도 얼씬도 하기 싫다고 하는, 그러한 욕망이 너무나 강렬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아는 자가 바로 성도라는 것이죠.
그런데 기존교회에서는 자기 욕망을 감춘 상태로, 은근히 그것을 종교의 힘으로 달성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헌금을 드리면 우리 가정이 다시 화목해지겠지요?" 라는 식으로 말이죠. 자기가 교회봉사를 하면 며칠 뒤에 수능을 치는데 그 점수가 더 올라갈 것이라고, 그러한 기대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위선자이고 육의 사람이라는 말이죠.
* 성도의 특징은?
이제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의 차이점을 알았지 싶은데, 영의 사람은 모든 것이 감사함이고 고마움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말이죠. 남들에게 지기 싫고, 최고가 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무엇을 해도 아쉬움이 없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은 그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거리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자기의 본래 모습인 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주여, 이런 인간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살려주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 욕망을 어렴풋이 주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죠.
* 천국에 '나' 라는 인간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주의 나라, 즉 천국인데, 그 나라에 '나' 라는 인간은 전혀 필요치 않은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자가 천국백성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구원을 시켜주실 때, "저는 천국에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라는 것을 확정짓는, 그런 자만을 주님이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러니 '나' 라는 인간의 죄를 바꾸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죄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가지고 오라는 말이죠.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뽐내고 싶어하는, 그리고 남들을 짓밟고 싶은,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것을 알게 한 것도 주님의 은혜라는 말이죠.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죄를 지어서 가놓고도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 탓을 한다는 말이죠. 부모가 돈이 없어서, 부모가 이혼을 해서, 그렇게 환경이 좋지 않아서 죄를 지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천주교의 경우에는 자동차에 "내 탓이요" 라고 하면서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데, 그런데 정작 그것을 어떻게 이용합니까? "나는 모든 것이 내 탓인 것을 아니, 그러니 나의 욕망을 채워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기사양반, 200원만 받아라 !!
제가 예를 세 개 들어볼 테니, 이게 무엇이 잘못인지 지적을 한번 해보시라는 겁니다. 어떤 할머니가 택시를 탔는데 그 요금이 1,000원이 나왔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는 기본요금이 800원이었는데, 그런데 할머니는 택시기사도 같이 택시를 타고 왔다고 하면서 1,000원의 요금 중에서 200원만 자기가 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영화를 보았는데, 그때 자기는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간다고 10분은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만큼 요금을 깎아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는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으니 피를 가지고 자기를 심판할 권한이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게 무엇이 문제냐는 겁니다.
여기서 세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인고 하니,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비용을 지불할 의무가 없다" 라는 것인데, 할머니만 택시를 탄 것이 아니라 택시기사도 같이 타고 왔다는 것이죠. 이게 뽀빠이 이상용이 한 코미디에 나온 것인데 말이죠.
왜 그렇게 나옵니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지 않은 것은 자기가 책임을 질 의무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보고 피를 흘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피를 흘려놓고는, 그런데 왜 자기에게 그 피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에 보내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나온다는 것이죠.
* 나를 위하여 !!
이 모든 논리는 그 앞에 다 '나를 위하여' 라는 것이 붙어있는데, 그러면 오늘날 교인들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1,000원이 나와도 200원만 내겠다고 하는 자들이란 말이죠. 집에 있어도, 직장에 가도, 심지어 교회에 가도 다 '나를 위하여' 라고 하는, 그런 자들이라는 겁니다.
성경에는 자기 교회란 없는데, 주님의 교회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는 자기 교회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교회도 좀 그러한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얼마나 자기 중심으로 살아왔는지 모르는데, 그게 파충류 뇌라는 말이죠. 태어나서부터 자기 생존에 대해서 자기는 양보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유도 없이 형제간에 싸우고,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유산을 가지고 싸운다는 말이죠.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명절에 찾아가서는 어느 가정이 잘 사는지 싸우는데, 그래서 "언니는 참 좋겠다. 아들이 좋은 대학에 가서"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일종의 자존심 싸움인데,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하여' 라는 것이란 말이죠.
* 하나님 자신의 피 !!
우리가 이것을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있습니까? 없는데,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사람이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으니 거기에 요금을 지불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대가로 성가대에 봉사한다고, 그렇게 나오지 말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는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게 사람의 피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피라는 말이죠.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교회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의 집합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흘린 피 앞에서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그게 되갚음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그냥 얻기만 하면 되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얼마든지 죽이기도 할 수 있는 자를 지금껏 살려내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 좋아라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하신 일을 우리에게 복사하기 위해서 살려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종의 복사용지라는 말이죠.
그것을 에스겔서에 보면, "이스라엘아, 유다야, 너희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였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건사해서 예쁜 옷을 입혔다. 그런데 왜 너희는 다른 신을 믿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말이죠. 살려주는 것은 여호와께서 살려주었는데, 그런데 그들은 정작 이방신을 믿었다는 겁니다.
(겔 16: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바벨탑 사건 !!
그러면 이방신에게 어떤 요소가 있어서 끌려들었을까요? 그것이 교재 169페이지에 나오는데, 거기에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이 교재의 큰 제목이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인데, 창세기 11장까지가 교재 169페이지까지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40페이지도 남지 않는데, 그것으로 창세기가 끝난다는 말이죠. 기초가 확인되었다고 보고 그대로 속도를 내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창세기 11장 1절에서 4절을 보겠습니다.
(창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렇다면 바벨탑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성경을 문자로 보면 보이지도 않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결론부터 말하면, 바벨탑은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시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는데, 여기에 인간 대신에 인간 이름을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교체하는 것이 바벨탑 사건인데, 즉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을 정지시키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선 인간들로 하여금 바벨탑을 쌓게 하시는데, 아까 인간은 모든 것을 하나로 모은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이름'으로 모인다는 겁니다.
* 첫 번째, 인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자 !!
그런데 인간과 인간이 모이면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게 창세기 11장 4절에 보면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라고 하는데, 여기에 '우리 이름'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우리 이름' 안에 들어있는 속성을 들추어내신다는 말이죠.
그 속성의 특징은 "첫 번째로, 모든 인간은 인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라는 것인데,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보라는 겁니다. 유엔총회에 원숭이가 참석하는 것이 아닌데, 북한이나 이슬람 국가도 모두 참석을 한다는 말이죠. 종교든 뭐든 간에, 그런 것들은 다 악세사리라는 겁니다. 그냥 툭툭 털면 다 털린다는 말이죠.
인간은 파충류 뇌인데,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살고 싶어한다는 본심, 그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어렵지만, 살겠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기본이라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 욕구충족 !!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나는 나를 살리고 싶다" 라는 것, 이것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란 말이죠. 아이들은 어릴 때 우는데, 말을 하지 못하니 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배가 고프면 우는데, 그러면 아기가 운다고 해서 국제평화나 탄소 줄이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면 우는 것을 멈춥니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입에 무엇을 넣어주면 그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아아는 왜 울까요?" 라고 하는 것과, "아이가 왜 울음을 그칠까요?" 라는 것 중에서 어떤 질문을 해주어야 하겠습니까? 어느 쪽에서의 질문이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 나오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후자인데, 아이가 왜 울음을 그치는고 하니, 그것은 자기 욕구가 충족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나중에 100살이 되어도 인간의 기본은 자기 욕구충족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인간은 달라진 적이 없는데, 종교든 뭐든 간에, 목사든 장로든 간에 이것, 즉 욕구충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악마가 그것을 감추게 했다는 점인데, 그래서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감추어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외면하는데, 정작 자기는 파충류이면서도 인간인 척을 한다는 말이죠. 악마가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는데, "당신은 우수해. 훌륭한 가수야. 정말 목사다워. 아프리카의 성자야" 라고 하면서, 주특기 속에 파충류라는 것을 감추어놓았다는 겁니다. 어떻게 나병환자들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결국에는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다 죽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모든 인간은 파충류인데, 즉 인간의 이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인간의 이름이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인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모든 인간은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이름을 내자" 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 이름도 아니고 원숭이 이름도 아니고 인간의 이름이라는 말이죠. 즉 "우리 인간은 이만큼 대단하다" 라는 것인데, 인간은 달에도 가고 목성에도 갈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코로나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즉 "우리가 지혜를 모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게으르지 말고 서로 공유해야 하는데, 그러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 이름이고 속성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저 집의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게을러서 그러한데, 우리 집 아이를 봐라. 열심히 하니 되더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조폭들의 구호가 무엇인고 하니, "하면 된다" 라는 것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차카게 살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예배당에도 이런 두 개의 구호가 걸려있는데, 그래서 "기도하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당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빼면 교회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핑계로 삼아서 전부가 다 "나는 살고 싶어" 라고 하는 것에 꽂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마귀의 집단이라는 말이죠.
* 두 번째, 하늘을 정복하자 !!
그러면 두 번째 그 속성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 이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있는데, 그게 4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하늘에 닿자" 라고 하는데, 즉 '하늘정복' 이라는 말이죠. 초월적 세계인 하늘세계는 인간세계보다 완벽한 세계라는 겁니다.
인간세계는 모든 것이 다 고통이고 불합리한데, 부처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생로병사의 모든 것이 모자라는 세계라는 겁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완벽한 나라는 하늘에 있다는 것인데, 그 하늘나라에 인간의 이름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인간 이름의 속성을 이렇게 드러내놓게 하고선, 그만 인간을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이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그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출발시키는 것이 죽이는 방법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을 개무시한다는 겁니다.
흔히 드라마를 보면, 재벌회장이 자기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하니 아들이 완전히 개망나니라는 말이죠. 마약에 여자문제로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회장이 다른 여자에게 낳은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아들을 완전히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인데, 주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분명히 인간인데, 그런데 인간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시작을 하신다는 말이죠. 인간의 속성을 다 드러내는 것이 창세기 11장이고, 다른 이름을 내는 것이 12장이라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 이라는 이름을 등장시킨다는 말이죠.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죠.
인간들이 모이면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는데, 그런데 바벨탑이 깨어짐으로서 지면에 흩어지게 되고, 민족이 단수에서 복수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전 세계의 국가가 하나로 통합이 되는데, 그게 곧 짐승의 나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다른 이름을 가진 씨가 새로운 국가가 되겠습니까?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것이 성경에 보면 나와있는데, 출애굽기 19장을 보겠는데, 5절과 6절을 누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 제사장 나라 !!
하나님이 만든 나라는 인간들이 집대성해서 만든 나라와는 완전히 다른데, 그 다른 나라를 여기 출애굽기 19장 6절에 보면 '제사장 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사장 나라의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은 이미 죽은 시체인데, 하지만 죽은 너희들에게 제사라는 언약이 들어가게 되면, 그 언약을 통해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라는 겁니다.
그 차이점을 정리해보면, 기존의 인간나라는 인간에 의해서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나라라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1863년에 행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인데, 즉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링컨도 아브라함인데 말이죠(ㅋㅋ).
* MSG !!
다시 말해서, "국민에 의한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인간의 나라에서는 인간 자체적인 요소와 역량으로 나라를 만든다는 겁니다. 'MSG'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음식의 맛을 내는 일종의 식품첨가제라는 말이죠. 그것은 자체적으로 음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다 만들고 나서 거기에 맛을 내기 위해서 뿌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자체의 역량에 감미료를 뿌리는데, 그것이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이고, 그렇게 간을 본다는 말이죠.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을 할 때 성경책을 펴놓고 선서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간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영국의 국가를 보면 "하나님이여, 우리 여왕을 보호하소서" 라고 하는데, 루터가 만든 독일의 국가도 그렇고 말이죠.
그렇게 나라의 국가에 하나님이 들어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하느님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모두 일종의 감미료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인간자체의 역량으로 하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중세 때는 교황이 황제를 임명하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든 제사장 나라는 어떻습니까? 이 나라는 인간의 역량과 요소자체를 거부하고, 거기에 제사의 의미를 꽉 채운다는 말이죠. 인간나라에는 왕이 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나라에는 왕이 아닌 제사장이 있다는 겁니다. 왕이 아닌 제사장이라는 것이죠.
그 나라의 왕은 하늘에 따로 있는데, 지상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왕이신 분이 지상에서 통치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통치하는 모습은, 이 땅에서 죽음을 다루는 제사장의 모습으로만 나타난다는 겁니다. 제사장의 모습으로만 말이죠.
히브리서에 보면 이 영원한 제사장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멜기세덱, 즉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사장 나라의 왕이 되시고, 그리고 성도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죠. 제사장 나라의 백성들은 자기 역량을 뽐낼 수가 없는데, 자기가 한 것이 전혀 없으니 말이죠. 다만 예수님의 공로만 높여드린다는 겁니다.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이스라엘은, '힘빼기' !!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그렇지요? 그러면 그 차이점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자체적인 역량, 이 역량이 바로 잠재성인데, 그것이 모이면 힘이 된다는 말이죠. 이방나라의 특징이 바로 이 힘으로 운영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스라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인데, 즉 '힘빼기' 라는 겁니다. 그렇게 힘을 모은 민족과 뺀 민족의 전쟁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여호와 전쟁' 이라는 말이죠. 성경에 이게 분명히 나와있는데, 이게 보이지 않으면 성경해석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인간세상에서 자기 힘을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일종의 감미료라는 말이죠. 여기서의 교회는 인간세계에서의 교회이니, 당연히 힘을 모은다는 겁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힘은 곧 돈, 즉 자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서 헌금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헌금을 모으려면 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져야하고, 그렇게 되면 부동산이라는 자본집결체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교회는 이런 부동산이 없는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여기서 요한복음 2장을 보겠는데, 19절에서 21절입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제사기능을 함축한 육체 !!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19절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46년 동안 지은 그 성전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자신인데, 자기의 육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육체는 죽었다가 살아난 육체인데, 즉 제사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는 육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난 자는 반드시 그 이전에 죽어야 하는데, 그것을 제사장 나라의 핵심으로서 자기 육체를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육체가 과연 부동산인가요?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는 힘인데, 자기가 살겠다고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힘은 아니라는 말이죠. 오히려 살겠다는 자를 죽게 만드는 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된다면, "나는 죽어야 당연한데 왜 이렇게 살아있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감사와 고마움으로 주님의 능력이 표출되고, 그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나라인 이방나라와의 차이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매일같이 사고를 치는 자식을 보고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나?" 라고 하는 것은 힘을 모으는 것인데, 자식에게 해대는 힘 자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아니라 "교도소에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집에 있으니 참 고맙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제사장의 에너지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불행은 자기 본성, 즉 파충류 뇌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 포도원 비유 !!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인간세계에서의 승리라는 것이, 그것이 신약시대에서 이방나라가 이겼습니까? 제사장 나라가 이겼습니까? 이방나라가 이겼다는 말이죠. 누가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나라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이게 포도원 비유인데, 9절에서 16절입니다.
(눅 20: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눅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눅 20: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눅 20:12)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눅 20: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눅 20: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눅 20:15)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눅 20: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지금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주인이 보낸 종과 포도원의 농부들로 설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라는 것이, 하나님이 보낸 종, 그게 선지자인데, 그 선지자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환영을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때려 죽였다는 말이죠. 바로 그 노선을 따라서 누구를 보내는고 하니,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보낸다는 겁니다.
그러자 농부들이 어떻게 합니까? 서로 의논을 하는데, 즉 힘을 모은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소유성 때문에 그러한데, 즉 "이 나라는 내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만 주인이 보낸 아들을 죽여버리는데, 바로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러한 바벨탑 사건을 보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고 하니, 첫 번째로, 인간은 단체로 모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자기 이름으로 내기 위해서 인간은 힘을 모은다는 말이죠. "우리 가정은 이렇게 대단하다" 라고 하면서 하나로 모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전쟁터에 가면 더욱 더 그러하고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은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초월의 세계, 즉 신의 세계에까지 나아간다는 겁니다. 하늘나라에까지 쳐들어가는데, 그 근가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살아있으니 더 살아야 하겠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른 이름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다시 하니 새롭습니까? (ㅋㅋ) 그렇게 해서 주님은 우리가 내세우는 "내 가정, 내 새끼" 라는 것을 개무시한다는 말이죠. 인간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성전을 보고 "그것은 성전이 아니야" 라고 하시는데, 주님의 몸이 성전이고 교회라는 겁니다.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제 낮 시간에 잠시 언급을 했는데 말이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머리라고 하는 것은 몸에 명령을 내리는 곳인데, 모든 지시가 머리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면 머리에서 손끝까지 무엇으로 연결이 되어있는고 하니, 그게 혈관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혈관에는 피가, 즉 복음이 흐른다는 말이죠.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러니 예수님의 피라는 것인데, 그 피의 의미는 "죽은 너희를 내가 살렸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 살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리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몸의 팔과 다리와 같은 것은 열매인데, 즉 주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그의 열매라는 것이죠.
이것이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이게 도대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지?" 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이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
계속해서 살아있고 살아있어야 하는 '나', 거기에 주목하는 자들에게는 이게 너무나 어렵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머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만 자기 자신이 머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머리가 두 개인데, 하늘에 태양이 두 개라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더 이상 누구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겁니까?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쉽게 말해서, 자기가 세운 교회를 위해서, 자기가 목사로 있는 교회, 자기가 장로로 있는 교회를, 자기가 집사로 있는 교회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말이죠.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부인이라는 것이죠.
* 아프냐? 나도 아프다 !!
이렇게 주님의 몸이 있다면, 여기에는 혈관으로 연결이 되어있는데, 즉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팔이고, 또 어떤 사람은 다리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팔과 다리 사이는 어떤 대화를 주고받아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2장에 의하면, 한 쪽이 아프면 여기도 같이 아프다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면 이게 무엇으로 연결이 되어있습니까? 그게 혈관이고, 그 혈관 속으로 피가, 즉 복음이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같은 인간을 주님께서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이게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끼리 통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누가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 즉 이스라엘의 상속자 이야기가 왜 필요한고 하니,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를 만들어주어도 인간들이 완전히 개판을 만들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었는데도 그만 죽여버릴 정도라는 말이죠.
이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어떻게 고치고 해결할 문제가 전혀 아닌데, 이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알아서 어떻게 할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죽여주셔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들이 개과천선을 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 할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 진정한 거듭남이란?
총신이나 장신과 같은 신학교를 나오면 조직신학을 배우는데, 거기에 '구원론' 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소위 구원의 서정이라고, 이것이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 라는 것인데, 여기에 '중생(거듭남)'이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성화' 라는 것을 집어넣어서, 즉 "새 사람이 되었으면 거룩하게 살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거듭남이 무엇인고 하니, 그때까지 자기가 감추어놓은 자기 죄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 그게 거듭남이라는 겁니다. 그게 거룩이고 말이죠. 그래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죄였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 산 채로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 !!
어제 설교시간에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했는데, 그들이 동성애와 같은 음란죄를 저질러서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고, 특별히 그들은 산 채로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는 재료가 되기 위해서 시범케이스로 뽑혀 나왔다는 말이죠. 즉 그들은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의 저주를 맛보아 한다는 겁니다.
롯의 처가 소돔과 고모라를 나오면서 소금기둥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롯의 처가 동성애를 했습니까? 그게 아닌데, 롯의 처는 먹과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렇게 살면서 그 결과가 자기 것이라는 믿음과 집착을 가졌을 뿐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죄가 아니데, 자기가 노동하면 자기가 가지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남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 것이라고 여기면서 관리하던 것이 어떻게 될지, 그것이 궁금해서 뒤돌아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자기의 모든 정체성, 즉 어린 시절부터 해서 자기가 살아온 과정들이 다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는데, 그래서 뒤돌아보았다는 겁니다. 왜 영화를 보면, 아이가 급히 도망을 가다가 인형 때문에 다시 돌아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뒤돌아보지 말라" 라고 명령을 하셨는데, 그러니 과거는 없는데, 뒤돌아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데, 물론 하기는 했지만 그게 지금 없어졌다는 것인데,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복음의 운반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우리의 몸이 이렇게 있으면 그렇다면 시간이 갑니까? 가지 않습니까? 시간은 의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셔서 완성을 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팔과 다리도 다 이루어졌는데, 그러니 살아도 구원을 받은 것이고, 죽어도 산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소돔과 고모라가 산 채로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산 채로 영생을 받았다는 말이죠. 우리는 천국의 능력을, 즉 죄용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신분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황송한데, 하지만 그게 우리가 잘나서 준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마술사가 마술을 하는데, 옆에는 아가씨가 서있다는 겁니다. 마술사가 보조 아가씨에게 카드를 주면서, "이것을 보여주지 말고 가지고 있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성령인데,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착하게 사는 자가 아니고 말이죠.
죽은 자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오면, 성도는 거기에 딸려서 영원히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는 주님의 시다바리 역할을 한다는 말이죠. 그게 주님의 신부인데, 주님은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요구한 적이 없는데, 그 어떤 책임도 지우지 않는다는 겁니다.
책임을 지우고 하는 것은 모두 마귀의 짓인데, 그래서 "예배는 어떻게 드리고, 전도는 몇 명을 하고, 헌금은 얼마나 하고, 기도는 어떻게 하고"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런 것들은 다 마귀의 수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마귀의 운명은 참수를 당하는 것인데, 결코 살려주는 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 마귀가 "이렇게 하면 천국에 갑니다.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서, 마치 경품을 내걸 듯이 해서 유혹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비단 교회나 절이나 모두 마찬가지인데, 그런 식으로 종교사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란 말이죠.
* 땅을 정복하라 !!
그러면 주님이 세운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요? 그것이 커지는 나라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이게 선교단체에서 좋아하는 구절인데, 누가 큰소리로 한 번 읽어보세요.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선교단체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데, 그래서 대한민국은 좁다고 하면서 외국에 선교사로 내보내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정복욕을 돋우는 것인데, 이 성경구절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죠.
* 아브라함, 새로운 이름의 등장 !!
이제 인간의 이름은 맛이 갔는데, 주님은 인간 이름은 개무시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름을 주었는데, 그게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란 이름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약속을 주어서 인간 이름뿐인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키우신다는 말이죠. 즉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신다는 겁니다.
(창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그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 택한 민족이, 그 이방민족의 힘을, 악마의 권세를 뚫고 새로운 이름으로 오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작용을 하신다는 말이죠. 이때까지 아브라함 쪽은 그 식구가 얼마 되지 않는데,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몇 명의 종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손들이 심히 번성할 것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내가 옛날에는 그래었었었지 !!
그러니 이것은 이 세상나라에서 뽑아내는 겁니다. 그렇게 뽑혀 나오게 되면, 자기가 진짜 천국의 백성인지, 그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죠.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빠싹하게 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던 곳이었기에 말이죠.
자기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다녔고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았는지, 그런 것을 누구 좋아라고 했는지를 다 안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었는지, 그런 자기 과거를 훤하게 다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옛날에는 그래었었었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천국에 가려고 구원의 서정을 달달 외우고 했었지. 거듭남에 성화가 되려고 노력을 했었지" 라고 하게 되는데, 또한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천국에 가기를 원했었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을 빠싹하게 다 안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살려서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십자가에 집어넣어서 "너는 죽고, 이제는 너는 내가 채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영적 예배인데, 그런 자는 자기 안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래서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인데, 그러니 죽던지 살던지 간에 그 모든 것은 자기가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겁니다. 부유하게 하시던 가난하게 하시던, 모든 것이 다 주님이 신경을 쓰실 문제라는 말이죠. 그게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기도에 보면 다 나온다는 것이죠.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 오늘 아침에도 누룽지탕을 먹여주셨구나 !!
그러니 우리는 "죽여도 되는데 오늘도 살려주셨구나" 라고 하면서 감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굶어죽게 해도 되는데, 오늘 아침에도 누룽지탕을 먹여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과거는 매일매일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이 모습은, 주님이 일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의 성전이니,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그 관계가 바로 머리와 눈의 관계이고, 머리와 손의 관계이고, 머리와 발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성전, 즉 교회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성도는 자기 이름이 하는 행세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 이름을 주신 주님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다는 말이죠.
* 성도의 기도란?
그러니 성도의 기도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곧 주님의 열매이기 때문에, "주께서 알아서 사용하시옵소서" 라고 하면서, 자기 몸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바로 성도의 기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게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 자식이 그만 나쁜 짓을 해서 교도소에 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교도소에 보내신 분이 누구라는 겁니까?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교도소 안에서 주님이 쓰시는 대로 쓰이게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던 삼수를 하던 간에, 주님이 쓰시는 대로 쓰이게 되게 해달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물론 이런 기도는 매를 좀 맞아야 나오게 되는데, 그냥 억지로 그런 기도를 하게 되면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자존심과 위신과 체면이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분출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욕망과 충동을 날마다 혹독하게 경험을 하면서, 이러한 죄에서 건져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만들어주신 주님의 십자가 피와 그 은혜에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11,29 오후 6시에 마침.
아침마다 빵과 커피를 허락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