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얼굴 보자

아빠와 함께 2021. 11. 15. 07:16

얼굴 보자
 
2021년 11월 14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3:6-10

(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3: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사도는 성도의 출현 자체를 참으로 신기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보통 인간들이라면 궁핍과 환란 가운데 있는 현실 자체를 어떻게든 모면하고 벗어나고자 시도할 것이며 “이 상황은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라고 여기면서 몸부림칠 것입니다. 따라서 궁핍과 환란을 기뻐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디모데를 통해서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극한 궁핍과 환란가운데서도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20:29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의 원칙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자 되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보면서도 믿지 아니한 자는 도저히 보지 못할 것을 보게 하시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도대체 불신자들은 뭘 못보는 겁니까?  그것은 매일같이 자신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못보게 합니다.

시간이란 인간의 모든 과거를 뜯겨져 나가게 합니다. 지금 ‘과거의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는 벌써 사라진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나도 내일되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을 상대로 자기 백성을 만드시는 것은 그 ‘사라짐’속에서 매일같이 복음만이 새롭게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위해 만들지게 됩니다. 즉 인간에게는 얼굴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낼 때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에게 얼굴을 만드신 겁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3-27)

즉 인간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통해서 전달해주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수용체로서 작용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비와 평강을 주시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굴은 그 하나님의 자비와 평강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원리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사야 50:6에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를 향한 진노를 아들에게는 퍼부어주십니다. 여기서 형성된 얼굴이 바로 메시야의 얼굴입니다.

그 망가지신 얼굴은 이사야 53:2-3에 보면, 사람들에게 흠모할 게 없는 얼굴로 나타나게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에게는 자비를 베푸신 얼굴을 특별히 허락하시는 이유는, 총체적으로 아담의 자식으로 범죄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비가 나오는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그들에게 저주입니다.(신 31:17)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이니셜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인물이 롯의 가족에게는 이 하나님의 얼굴과 관련한 환경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산 채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는 도시에 그들이 거주하게 된 겁니다.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이들 도시주민들은 죽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산 채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정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처참한 저주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본성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배후에 하나님께서 화를 돋우는 의식이 자라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가 하나님께 화를 나게 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행위가 자기 자신을 줄곧 이 지상에서 존재하게 하는 마땅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이 여인은 결코 소돔과 고모라에서 동성애나 간음을 한 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소금기둥이 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몰랐습니다. 시범쪼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성에 불심판을 내렸습니다. 성도란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미리 받은 그 심판에 참여된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한 그 취지를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들은 모든 인간들이 양같이 그릇 행하며 사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는 자입니다.(사 53:6) 고린도후서 4:4-6에 의할 것 같으며 이들 성도의 마음 속에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얼굴의 광채가 가득차 들어온 자들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성도의 이러한 얼굴을 보고 싶은 겁니다. 거울에 비쳐도 나타나지 않는 얼굴, 성도의 얼굴은 DNA의 저주 위에 나타난 예수님의 초상입니다. 하지만 망해야 될 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가 들어오지 않아 마음 전부가 깜깜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얼굴로 나타난 진노를 감당하지 못할 자들입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6-17) 지금도 이 세상은 하나님의 화를 같이 돋우어줄 자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산다. 이게 뭐가 나쁘냐?” 그러고서 씩 웃지요. 그 웃는 얼굴이 악마의 얼굴입니다. 애초에 인간은 자기 얼굴이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 불편한 진실을 똑바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데살로니가전서 3장 6-10(얼굴 보자)21111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3장 6-10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6-10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편지를 보내는 대상이 같은 교인들, 성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의 내용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야 되는가? 편지 내용 속에 그게 포함되어 있어요. 7절에 보면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궁핍과 환난을 과연 믿음이 대처할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궁핍과 환난을 믿음으로 대처하는 사람에게만 편지를 보낸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궁핍이라 하는 것은 가난한 것이지요. 먹을 것이 없는 것이 궁핍이고, 환난은 고생 되게 하는 겁니다. 이런 환난과 궁핍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대처하는 방법은 돈을 버는 것이고, 그리고 고생이 안 되는 쪽으로 피신하는 방법이 기껏 조치하는 방법인데, 궁핍과 환난이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음으로써 그게 충분히 대처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 그런 사이, 그 편지를 우리가 인터셉트해서 중간에 남의 편지를 엿본다는 입장에서 한번 성경을 봅시다. 보게 되면 도대체 이들 뭐야? 도대체 세상에 같은 인간이면서도 믿음 하나로 모든 환난과 궁핍이 찾아와도 저는 괜찮아요, 이런 식으로 버티고 살아가는 사람,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으니까 나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큰 위로를 받는다, 라고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 도대체 이들은 누구냐? “누구야, 너!”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이런 놀라운 현상들이 일어나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편지를 보내면서 “우리가 현장에서 만나자” 그렇게 된 거예요. 도대체 믿기지가 않으니까요. 사도바울이 받은 계시에 의하면 이 땅에 믿는 자, 성도가 주님께서 일을 하셔서 성도가 생겨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요. 성도가 생겨나게 할 것이라는 그런 취지는,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사도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 맞는데요. 과연 그런 성도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걸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돼야 천국 간다니까 누구나 너도나도 성도 되고 싶지요. 하지만 이 세상의 환난과 궁핍이 왔을 때 성도라고 우겼던 그것이 전부 다 가짜로 들통나는 겁니다. 아, 이건 참 불편한 진실이지요. 성경에는 성도가 있다고 하고, 세상의 교회도 성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성경이 왜 있겠어요? 진짜 성도인지 아닌지는 성경을 들이대야, 비교를 해봐야 알 수 있는 겁니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성도라고 했지만 사실은 불신자들이 성도 되고 싶어서 환장해 가지고 자기를 꾸미면서 거짓말하는 그런 경우를 사도도 얼마나 봤겠습니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보시고 이게 어느 정도로 불편한 진실인지를 여러분이 감 잡기 바랍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자식한테 다른 손님들이 묻습니다. “우리 성도님, 어머니는 교회 권사님이 좋은 데 갔겠지요?” 할 때 그 성도가 하는 말이 “우리 엄마는 지옥에 가 있습니다.” 이게 불편한 진실이에요. 이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나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현 엄마의 상황에서 아주 적절한 표현을 한 거예요. 대인관계에서는 아주 적절하지 않아요. 이것은 묻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는 내가 지켜보니까 아무리 봐도 교회는 다녔는데 성도 티가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살아생전에 기회를 줬건만 기어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엄마 어디가 있느냐? “우리 엄마는 지옥에 지금 잘 계실 겁니다. 지옥에 잘 살고 계십니다.”

이걸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세상에 어찌 자식이 되어서 부모를 그렇게 저주하느냐 하고 욕 얻어먹을 것을 각오하면서도 오직 비난과 궁핍과 환난보다도 믿음의 그 현장성이 이게 보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성도 될 자만 성도 되게 하는 이 현장을 인간의 자기의 구원 욕망으로 이걸 버려 놓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그것을 그대로 간주하고 보존해야 되지 내가 구원받고 싶은 자신의 욕심으로, 다른 대인관계에서의 사람들 체면치레한다고 그걸 갈아엎을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지옥에 가 있어, 라고 해서 평소에 엄마에게 억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것은 더 깊이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의 자기 생애나 자기 시간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내가 성도 되고 싶어서 성도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를 유지해 줘야 돼요. 그걸 보존해야 돼요. 그래야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는 그런 믿음 없는 사람들, 불신자들과의 차이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환난과 궁핍을 줬을 때 사도는 예상하고 있지요. 저런 환난과 궁핍 속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것은 참으로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주님이 직접 성도 만들지 아니하면 저기서 성도 생겨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디모데를 보내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환난이 뭐예요? 가난이 뭐예요? 그게 내 운명하고 무슨 관계 있어요?”라는 이런 식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에 사도가 얼마나 기뻤는지.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큰 위로를 받았다.” 큰 위로를 받았다는 거예요.

그들이 신자 된 것도 위로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스케줄대로, 자기 계획대로 여전히 차질이 없구나, 라는 사실이에요. 이것을 생각해 볼 때 그 현장성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현장성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바로 망상이라는 겁니다. 망상이란 내가 엄연히 있다고 여기는 것이 망상이에요.

그러면 뭐가 있느냐? 지나간 시간인데, 시간은 지나가 버렸는데 마치 그 시간이 나에게 그대로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망상입니다. 예를 들면 여고 시절 사진첩 속에 있는 사진, 그 여고생들이 교복 입고 소풍 가서나 여행 가서 단체 사진 찍잖아요. 그것도 마음 맞는 애들끼리, 마음 안 맞는 애들은 안 넣어주고 마음 맞는 애들끼리 한 열 명씩 떼를 지어서 옆으로 나란히 사선으로 서요.

이렇게 옆으로 비스듬히 서고 고개는 한 15도 각도로 들어서 위를 쳐다보면서 활짝 웃어요. 똑같은 교복을 입고 활짝 웃는다고요. 그렇게 웃을 때 그 사람은 자기의 미래를 장담 못하는 그 얼굴들입니다. 모습들입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속고 할 그 자기의 5년 뒤나 10년 뒤의 미래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냥 활짝 백합처럼 웃고 있어요.

애 둘 낳고 뚱뚱해지는 그것도 전혀 그들은 모릅니다. 병든 시부모 모시다가 자기도 병들었다 하는 그것도 전혀 몰라요. 자식 때문에 구치소 면회 왔다 갔다 하는 그것도 몰라요. 마냥 15도 각도로 고개 들고 미래를 모르면서 그저 활짝 웃고 있어요. 그들의 사진첩 속의 주인공은 본인입니다. 그들은 현장에 없는 사진을 갖고 있어요. 현장은 이미 지나간 거예요. 내 생애와 내 시간 내 인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제는 지금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매일 살게 하는 것은 그 뜯겨 나가는 시간, 사라져 가는 시간 속에서 모든 내 몸도 하나하나 모래알처럼 흐릿해지는 그림처럼 말이지요. 애니메이션의 그림처럼 빨리 달리면 몸들이 있다가 속도의 현장감에 의해서 뚝뚝 다 떨어져 나가지요. 등짝부터 점점이 떨어져 나가잖아요.

그렇게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그게 우리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과거는 없는 거예요. 떨어져 나가는데 신기한 것은 그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서도 복음은 매일 나온다는 거예요. 복음이 매일같이 거기서 생산되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거예요, 복음이 살아 있는 거예요? 복음이 살아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기대하는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자기 백성이 성도 되는 그 과정을 사도바울은 목격하고 있으면서 지금 위로를 받고 있는 겁니다. 특히 얼굴 한번 보자, 하는 것은 현장성을 강조하는 겁니다. 10절에 나오지요.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밤낮으로 간구하는 것은 너희 얼굴 보고 싶다. 그렇게 궁핍과 가난, 환난 속에서도 복음이 나오는 그 얼굴, 낯짝, 그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게 현장성이에요. 주께서 일을 하실 때에 주님만 아는 식으로 또는 주의 영이 임한 사람들만 아는 식으로 일한다는 것을 여기 안에 이 모든 현장성 속에 복합해서 작용하고 있어요. 요한복음 20장 2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씀이 말씀대로 주께서 성취하기 위해서는 늘 보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보지 않기 위해서 지리산이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고 그게 믿음이 아니라, 늘 보면서도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그런 얼굴, 그런 얼굴과 얼굴끼리 만날 때 이게 얼마나 감격스러우냐 그 말이지요.

아까 한 이야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례식에서 “지금쯤 너희 어머니 참 좋은 데 갔을 거야. 교회 권사도 하고 봉사 많이 했으니까.”라고 할 때 자식이 하는 말이 “솔직하게 표현하겠습니다. 우리 어머니 지금 지옥에 잘 갔습니다. 살아 계실 때부터 지옥 생활 하더니만 기어이 지옥에 가 계십니다.”

그것은 동일하게 돌아가신 그분이 교회에서 봉사한 그것을 똑같이 보는 거예요. 자식도 보고 옆에 같은 교회 교인들도 똑같이 보는데 한쪽은 지옥 가는 사람으로 보고 있고 한 사람은 성도로 보고 있는, 보고 있어도 흔하게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것, 복음의 작용, 믿음을 볼 수 있는 눈, 이것은 보면서도 함부로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오늘 설교를 통해서 규명해야 되겠어요. 그것이 얼굴, 얼굴 보자는 제목으로 설정을 해놓았습니다만 현장성이 현장성으로 드러나려면 얼굴이 있어야 되겠고요, 그 얼굴은, 개개인의 얼굴은 사실은 내일 되면 뜯겨 나가는 존재하지 않는 얼굴들이에요. 그렇지만 내일 되면 또 주어지는 새 얼굴로 그들은 살게 될 겁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얼굴 가지고 살아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될 것은 우리가 얼굴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신기한 것으로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서 핵심은 뭐냐 하면, 인간 자체에 인간이 있을 이유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미리 사람이 만들어진 거지요. 우리에게 얼굴이 있는 것은 ‘우리의 얼굴이 있다’가 당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얼굴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게 신기하게 여러분 느껴져야 돼요. 왜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느냐 하면, 인간의 얼굴을 하나님께서 뭘 로 사용하느냐?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스크린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불신자에게는 분노하는 얼굴로 나타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얼굴로 등장합니다.

얼굴의 이중성이에요. 얼굴의 이중성을 위해서 같은 종류의 인간이지만 하나는 지옥 가는 인간이 있고 하나는 천국 가는 인간이 만들어진 겁니다. 이거 사실입니다. 민수기 6장 22-26절에 보게 되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축복할 때 이렇게 하라는 축복의 내용이 나옵니다.

축복 내용이 길지 않으니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인간에게는 얼굴이 있잖아요. 인간에게 얼굴이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얼굴과 통하는 얼굴이냐, 아니냐’를 판정받기 위해서 얼굴을 준 거예요. 모든 인간의 얼굴은 그래요.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을 받는 수용체로서의 얼굴, 주님은 얼굴을 통해서 은혜 주시고 평강주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얼굴은 그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나오는 평강과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용체로써, 받는‘체’로서 얼굴이 너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작용 되는 하나의 현장성으로서의 얼굴로써 이스라엘에게 제대로 된 의미를 하나님께서는 민수기를 통해서 부여해주시는 겁니다. 이 점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나에게는 얼굴이 없는 거예요. 나에게는 아예 얼굴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오징어 게임 같아요. 완전히 얼굴이 없어요. 얼굴은 하나님의 어떤 무엇으로 채워 주느냐에따라서 수용체로서 은혜의 수용체냐,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 받을 수용체냐? 그것은 그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결정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판단이나 선택의 과정이 아니에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뒤집어 씌워주는 겁니다.

놀이동산 가게 되면 돈 내고 물주머니 막 던지는 게임이 있어요. 평소에 자기 여자친구에게 스트레스 풀라고 남자는 얼굴만 구멍 뚫어놓은 그림 속에 얼굴을 내밀지요. 웃통 벗은 람보 같은 그림이 그려있고 얼굴만 동그랗게 비워놓았는데 거기에 남자가 얼굴을 쏙 내밀면 여자는 남자의 그 얼굴을 향하여 물풍선을 던져서 터뜨리지요.

또 사진 찍는데도 그런 것이 있지요. 멋있는 그림 그려놓고 얼굴만 자기 얼굴로 바꿔서 사진 찍는 것. 예를 들어 천사의 날개 그림이 있습니다. 충무 시의 그림 그려진 골목에 보면 그런 게 있는데 저도 거기서 사진 한번 찍었습니다. 몸체는 천사요 얼굴은 자기 얼굴 나오도록 찍는 것이 있지요.

그 얼굴 부위를 하나님께서 따로 비워놓고 장차 하나님의 얼굴이 되셔서 오실 얼굴, 인격화되어서 오신 그 하나님의 자기의 독생자의 얼굴을 그들 속에 사진으로 집어넣는 그 작전, 그 계획을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이 하나님의 계획에 철저하게 인간은 손댈 데가 없습니다. 자기 인생에 손댈 데가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 맘 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굳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모습으로만 전달되는 그것이 왜 복이냐? 복이라는 것은, 복이 복되기 위해서는 복이 주어지는 그 판이 저주스러워야 돼요. 출애굽기 33장 19,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났어요. 모세를 단독으로 만나서 모세에게 일러준 일이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일러준 그 업무와 동일한 업무가 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게 인간의 형편입니다. 인간의 입장은 하나님의 얼굴을 못 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못 보는데 하나님은 지금 억지스럽게 자기 얼굴을 비추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능력이 없는 인간들에게,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볼 능력이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얼굴이 나타나 버리면 그 자체가 재난이고 재앙이에요. 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은혜라는 말을 하고 평강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 지금 화를 돋우고 있는 거예요.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아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는 나 하고 싶은대로 산다. 왜!’ 이런 식이에요.

‘나 하고 싶은대로 사는데 누가 나를 말릴 것이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고려하지 않느냐 하면, 인간이, 본인이 하는 그 자기 맘대로 하는 행동이 하나님이 얼마나 화를 돋우는지를 전혀 계산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온 거예요. 지금 내 행동과 말씨 태도가 얼마나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도 그걸 가르쳐주지 않아요. 이번 주 화요일 첫 시간은 하나님을 화나지 않게 하는 방법, 이런 것을 과목으로 집어넣은 적이 없어요. 성경 과목도 없는 판에 그런 것을 생각하겠어요?

네가 어떻게 이 험난한 세계를 이겨낼 수 있는가, 그런 기술과 지혜와 지식을 갖춰라, 공부 못하면 너는 빌어먹는다, 그것만 이야기하지 내가 나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이것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한 행동이 얼마나 하나님의 화를 돋우는 행동인지를 사람들은 아무도 이야기해준 적이 없어요.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똑같은 통속, 한통속이니까요. 그래서 사람 말 듣는다는 것이 이렇게 위험해요. 복음을 아는 자식이 복음을 모르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그렇게 위험합니다. 복음을 아는 동생이 복음을 모르는 형한테 잔소리듣는 그것이 그렇게 위험한 짓이에요.

어느 정도 위험하냐? 그것은 성경에서 주님께서 아주 친절을 베풀어서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24, 25절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짐승들은 또 무슨 죄가 있습니까? 26-28절에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불로 심판 내린 것은 사람이 죽어서 경험하는 죽음 말고요, 산채로 경험하는 죽음의 진수를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겁니다. 산채로, 살아 있는 채로 하나님의 저주를 온몸으로 옴팍 다 받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성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평소에 무슨 일을 했습니까? 기자가 가서 소돔과 고모라가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조사해 보자 그 말이지요. 동성애가 어떻고, 뭐 성적으로 문란했고, 이런 소식을 전하면 그것은 본질을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한 일은 뭐냐 하면, 동성애를 하고 음란한 죄를 범한 게 아니고, 그들은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 일 했습니다.

그냥 살았어요. 그냥 살았다고요. 내가 그냥 산 게 하나님의 분통을 터뜨릴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그들은 그냥 살았어요. 그들은 말합니다. “내가 여기 있잖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말합니다. “어제의 너는 어디 있어? 18세 여고 시절 어디 갔어? 사진첩 속의 그 얼굴들, 교복 입은 아가씨들 어디 갔지?” 그러면 뭐라 하겠어요? “없나이다” “그래, 너는 지금 없는 거야.” 하나님의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잠시 있게 한 것이지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인간들은 자기 얼굴이 있고 거울로 비추니 자기 얼굴이 있으니까, 그 얼굴이 있으니까 자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존재하는 얼굴은 악마의 얼굴입니다. 거울 보면 씩 웃고 지나가요.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화딱지 나는 일인 것을 그들은 생각지 못한 거예요. 아니 존재하는 게 화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고 있다고 자기가 의식을 하는 것이 화날 일이에요. ‘나는 없어야 되는데 왜 있지? 복음 때문에 있구나.’ 이게 바로 믿음이거든요.

이게 성도고 이게 신자예요.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오시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얼굴로 오신 거예요, 얼굴로. 얼굴이라는 말은 쉽게 말씀드리면 이시셜(initial)이에요, 이니셜. 예를 들면 원소주기율표 15번이 포스포러스(phosphoros)라는 인(燐), 빛을 가져온다는 뜻의 인이에요. 그걸 원소주기율표에서 P라고 표기하는 거예요. 앞글자 P자를 따가지고. 그게 원소의 인의 이니셜이에요.

하나님의 이니셜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얼굴이에요. 하나님의 자기 얼굴. 인간에 있어서 이니셜은 뭐냐? 자기 얼굴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 얼굴이 너를 향하기를 원하는 것, 그게 복이에요. 그 얼굴, 주님께서 어떻게 오셨는가? 인간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이 멀쩡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거울에 자기 얼굴이 비취니까 자기가 있다고 여기고. 그 다음에 그 비췬 얼굴이 항상 행복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이사야서 50장 보면 주님의 얼굴, 진짜 하나님의 얼굴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인가? 6절에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처참하게 망가진 얼굴, 채찍에 맞는 얼굴로 이 땅에 왔습니다. “너희들의 낯짝과 내 얼굴을 한번 비교해보라. 어느 쪽이 이 지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그대로 표현한, 하나님의 화나심을 그대로 표현한 얼굴이, 너희들 가운데 누구 얼굴이 하나님의 화나심을 그대로 보여주느냐?” 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처참하게 망가진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7절에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망가진 얼굴이 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그만큼 망가졌다는 뜻이고 이 인간세계에서 가장 되기 싫어하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얼굴을 주님께서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들이 가장 기피 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내 얼굴이 부끄럽지 않다.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줄 아노라” 수치스러운 얼굴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수치스럽지 않다고 이야기할 때 그때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는 그것이 화나게 하는 거예요. 또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이사야 53장 2, 3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이니셜, 하나님의 마음의 모든 표정을 대변해주시는 분이 왜 이런 모습으로 와야 됩니까? 사람들은 그걸 귀하게 여기지 않았지요.

그 이유가 뭐냐? 6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냥 각기 개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각기 개성 앞에 뭐 붙는 것이 있어요. 그릇 행하여 잘못되게, 세상을 잘못 보고 나 자신을 잘못 생각하면서 이게 옳다, 이게 옳은 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 거예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왜 분노했는지, 노아 때 왜 홍수를 내렸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걸 알지 못해요. 그냥 자기 얼굴 곱게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잖아요. 그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진 그 저주, 아버지의 진노를 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옴팍 다 그걸 다 새겼어요. 그걸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그러진 거예요. 예수님의 얼굴은 아버지의 분노와 화내심을 그대로 표출한 거예요. 표현한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주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 곳곳에 그 얼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하시면서 자기 얼굴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궁핍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기뻐하는 성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보지 않고 믿는 거예요. 그게 보지 않고 믿는 겁니다. ‘나 같으면 자살하겠다. 저렇게 왜 사나?’ 그런데도 기뻐요. ‘내비둬.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가 산채로 심판을 받게 하잖아요. 예수님도 산채로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는 얼굴로 살아가셨습니다. 서서히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결정을 보여주고요. 그러면 성도의 입장은 뭐냐? 성도가 가난하고 궁핍하고 환난 받는다. 이것은 내 입장에서 아들이 받는 하나님의 공격, 하나님의 폭격,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산채로 먼저 선제적으로 받은 얼굴이에요. 성도의 얼굴이, 우리 얼굴이.

그래서 되게 기쁜 얼굴이에요. 언젠가는 얻어터질 얼굴, 미리 받았으니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요. 먼저 맞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오병이어가 바로 얼굴 없는 얼굴이에요. 어린애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에 보리 떡 다섯 개, 아무것도 아닌 도시락, 주님께서는 그걸 시발점으로 해서 배불리 먹이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축복해서 우리가 배불리 먹었다고. 아니야, 아니야. 이름 모를 얼굴의 그 작은 것이 너희에게 큰 배부름이 되었다는 거예요. 주님은 모든 의미를 이 땅에 와서 뒤집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이 땅에서 악마에게 배후 조종받는 버림받은 자들은 불신자죠, 버림받은 자들, 그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가요,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더 화를 돋을 수 있는가, 사람 모집한다고 살아가요.

제사 드리는 것, 조상제사가 이게 주의 뜻에 맞는지 아닌지도 전혀 모르고 제사 드린다고 대구까지, 이 멀리까지 오고요. 이게 왜 하나님이 화나는 일인지를 몰라요. 같이 하나님을 더 약 올리자, 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그것을 매일같이 구상합니다.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하나님 화 돋울 일만 구상하고 생각하도록, 그런 식으로 악마로부터 조종받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이 모든 정치판이 다 그래요. 뭐 누굴 찍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얼굴이 곧 악마의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얼굴이 곧 악마의 얼굴이에요. 그러나 성도의 얼굴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미리 받은 그 아버지의 심판의 얼굴을 성도가 그대로 같이 참여되었다는 그 기쁨이 들어 있어요. DNA라는 그 아담의 저주 안에 돋아난 예수님의 초상, 그게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44-46절에 보면 “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성도 자체가 자신의 얼굴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선제해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받았던 그 얼굴을 이제는 나의 얼굴로 그때그때, 현재현재, 지금, 오늘, 오늘, 늘 그 얼굴로 새겨 넣어주시는 것, 이게 바로 복 받은 겁니다. 나의 얼굴이 나의 얼굴이 아니고 주님의 초상이 되는 것이고 주님의 초상이 십자가에서 벌 받으시는 그 얼굴로 살아가게 되는 환한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성도의 얼굴은요, 순백의 연유 같은 그런 깨끗한 얼굴 아니에요. 다만 성도가 감사하는 것은 진즉에, 진즉에 밟아 죽여도 되는데 왜 계속해서, 계속해서 오늘도 살려내시고 또 살려내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복음, 주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려내시는 거지요, 라는 그 기쁨과 감사가 나오는 그 얼굴로 살아가는 거예요.

일그러졌지만 감사의 얼굴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불신자는 보고도 보지 못하는 주님의 초상이에요. 얼굴이에요 그게. 저 사람 미쳤다고, ‘뭐 돈 얼마 번다고 저렇게 기쁘냐?’ 이걸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불신자들이. 얼굴은 주님이 나타나는 스크린인데요. 성도한테는요, 성도의 인생은 바로 복음을 운반하는 운반체에요. 과거는 사라지니까, 과거에서 현재를 매개로 해서 다가오는 천국에 계속해서 복음만 이동하면 돼요.

그러니까 성도의 할 일은 간단해요. 딴 것 없어요. 복음만 이동하면 돼요, 복음만. 복음만! 복음의 운반체니까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요건을 운반하는 운반체에요. 하나님의 화 돋우는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하면 신이 없음을 증명할까?’ 이런 거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분을 더 더럽게 만들까?’ 그것만 연구하기 위해서 하는 방법은 뭐냐? 간단하지요. 자기를 위해서 살면 되지요. 자기를 위해서 살면 돼요.

얼굴이 곧 땅의 일이 된 것은 주님께서 그 산 얼굴로 오셨기 때문에 그때부터 개시된 일이에요. 하늘의 일은 땅의 성도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 얼굴 좀 보자, 그 말이에요. 오늘 본문 내용은, 이처럼 인간들은요, 불신자들은 단선적 사고 밖에 못해요. 한 선밖에 몰라요.

그러나 성도는 입체적 사고를 합니다. 망가진 얼굴이지만 이 망가진 얼굴이 모든 죄사함이 되는 얼굴, 너의 죄는 과거로 날아가 버리고 주께서 은혜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의 얼굴로 은혜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의 얼굴로 너와 나는 좋은 관계, 평강의 관계, 그런 사이가 되기를 원하노라. 그 복만 계속해서 증거 하는 얼굴, 나타내는 얼굴.

고린도후서 4장 3절에서 6절에 보면 엄청 어려운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상상도 안 갈 정도로 어려운 내용인데 우리는 감히 쉽게 봅시다. 준비됐나요, 하고 싶지요. 3절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하여튼 사도바울은 복음밖에 몰라요. 대선 같은 것은 모릅니다. 복음밖에 몰라요.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 말이지요.

그다음에 6절에 보면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것은요 불신자에게는 말 하나 마나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거울에 비췬 자기 얼굴이 따로 있고 그 얼굴이 멀쩡하기를 바라서 ‘요새 얼굴이 기미가 좀 끼나? 이거 뺄까?’ 혹은 ‘이거 깎아 버릴까? 턱 요거?’ 맨날 늘 씩 웃으면서 자기 감상에 빠져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얼굴은 그게 거울에 비취지 않습니다. 얼굴이 거울에 비취지 않는 얼굴이에요. 주님의 얼굴이, 복음이, 광채가. 왜냐하면 인간들의 마음이 거울이라면 그 거울이 어둡기 때문에 그래요. 어두운 것은 자기 안에 내장 되어 있는 악마의 얼굴만 되비칠 뿐이지 그 바깥에 악마를 악마라고 지적하는 주님의 소리를, 주님의 그 빛을 그 안의 마음이 너무 어두워서 환하게 밝히 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단체를 감히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자기 얼굴 자랑질하려고 오는 교회, 불신자들의 집단체, 그게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진짜 교회는요, 과거는 없습니다. 미래는 보장 못 해요. 그냥 오늘만 불러모으는 거예요. 오늘만. 오늘만 불러모으는 겁니다. 멀리서 오시는 분, 오늘은 안 오셨지만. 그냥 그때그때 불러모으는 거예요. 과거 다 떨어져 나간 사람만 불러 모은 거예요. 과거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만 불러 모은 거예요. 영구 없다, 가 아니라 과거 없다. 과거 없는 사람만 오라는 거예요.

과거가 없으면 내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굳이 내가 있을 이유가 없어요. 주님의 몸으로 있으면 되지 내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세포와 세포, 그리고 기관과 기관 사이에 뭐가 흐르냐? 모세혈관이 흘러요. 그러면 교회가 뭐냐 하면, 복음으로만 흐르게 되어 있어요. 복음으로만. 교인들 오면 “아이고, 안 죽고 살아왔네요.” 이런 식으로.

복음 때문에,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의 운반체니까,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도 복음이 작동하고 작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냥 얼굴 보자, 해서 얼굴 보게 하신 거예요. 얼굴 보니까 지금 복음으로 가득해서 제가 기쁩니다. 제가 잘못 봤나~?

얼굴 보자는 거예요. 얼굴 보자. 어차피 오늘 1회치 인생이니까 얼굴이나 보자. 복음을 비치는지? 다시 말해서 나 까불다가 주님께 이렇게 얻어맞았다는 것. 하나님께 얻어맞았다는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존재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존재케 했다는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오시는 분들, 그게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 성도들 사이에서 오직 모세혈관만 이동하는 것처럼 복음만 주고받게 되지요. 그 복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미 심판에 대해서 내가 용서했다는 표징이 들어갑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피복음, 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놀랍게도, 이게 놀라운 건데요, 놀랍게도 뭘 믿고 있느냐?

여러분이 대구공항에 경운기가 가게 되면 저 경운기가 언제는 활공한다는 것을 믿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경운이가 덜그덕덜그덕, 하면서 가지요. 바로 성도 안에 흐르고 있는 모세혈관의 그 언약의 피는 우리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피는 이 땅을 거쳐서 활공해서 하늘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면 그 피가 흐르는 사람은 비록 남들 보기에 경운기같이 빌빌 기면서 살아가도 언젠가는 활공 될 몸이에요. 그 몸, 안에 생명의 나라로 날아가는 그 몸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 얼굴 보겠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그 2백 킬로미터 북쪽에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좀 보자, 하지요.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보고 얼굴 좀 보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로 휴거, 불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의 입장이.

마태복음 17장 2절에 보면 주님께서 인간의 DNA, 저주 안에 있는 그 얼굴이지요. 그 얼굴을 가지고 갔는데 2절에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주님께서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던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이 해같이 빛나는 복음의 광채가 바로 오늘날 성도의 마음에서 환하게 비추니까 그게 얼굴로 나온다는 거예요. 우리 맘속에 예수님의, 하나님의 복음의 광채가 환하게 빛을 밝힌다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그 사실이 우리 안까지 파고 들어와서 우리를 환하게 전부 다 차지했다는 겁니다. 장악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그게 없거든요. 불신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의 얼굴 앞에서. 요한계시록 6장 16, 17절에 보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주님의 얼굴은 바로 두 가지 양상이 있지요. 하나님의 얼굴은 자기가 택한 자에게는 은혜와 평강의 얼굴이지만 그렇지 않고 버려진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그게 소돔과 고모라에요. 그게 노아 홍수였고,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4절에 보면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주님의 얼굴을 같이 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너 얼굴 좀 보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3장에도 12절에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리고 빌립보서도 그렇고 고린도후서 5장에서도 그렇고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내가 주와 함께 주의 얼굴을 보는 게 소원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출애굽기부터 해서 민수기까지 성경 내내 이어져 오는 하나님의 일관성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그 얼굴을 자기 이스라엘에게 숨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신명기 31장 17절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은혜와 평강이라면 만약에 그 얼굴이 비취다가 얼굴을 살짝 돌렸을 때에 나타나는 그 결말은 어떠냐? 그것은 재앙과 환난이 주어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총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얼굴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 되시는 분이 어떤 식으로 일하느냐를 비추기 위한 스크린용으로 우리에게 두 종류의 얼굴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뒤집어 씌운 거예요.

하나는 뭐냐? 천국 갈 사람들은 자비를 수용할 수 있는, 평강을 얻을 수 있는, 주님의 광채를 보이는 그런 얼굴을 박아넣고 그렇지 않고 버림 받아야 될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하나님의 화내심과 분노가 너희에게 덮친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얼굴을 보여주지요.

그 얼굴이 무슨 얼굴이냐? 악마의 얼굴입니다. 뻔뻔한 얼굴, 맨날 자기만 쳐다보는 얼굴,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얼굴, 내가 먹고 마시는 이게 급선무가 되는 얼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하고 따지는 그 얼굴, 거기에 피 복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은혜도 안 나와요. 평강도 안 나와요. 그 얼굴은 죽고 난 뒤에 저주받을 얼굴 지옥 갈 얼굴, 불 심판에 들어갈 얼굴입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대용물이에요. 우리 인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쓰시는 대로 쓰이면 오케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얼굴 보자 하는데 어떤 얼굴 보일 것인지, 이게 우리 맘대로 되지 않고 주의 맘대로, 뜻대로 하시는 것에 대해서 또 한 번 감사합니다. ‘주여, 왜 그렇게 합니까?’ 묻지 말고 그저 매일매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를 반복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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