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아빠와 함께 2021. 11. 22. 07:47

갭(gap) 

2021년 11월 21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3:11-13

(3: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의 편지에는 구원의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 ‘흠없음’, ‘강림’ 같은 것들입니다. 특히 ‘흠없음’에서부터 시작한 개념은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강림’이란 ‘흠있음’이 그 극치를 보이는 시점을 감안해서 세상을 심판하료고 나타나는 겁니다.

‘흠없음’이란 원형은 이사야 7:14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 대목에 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자식을 세상에 등장시킵니다. 그 아들은 ‘처녀가 낳은 아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의 처녀성을 그대로 지니고 태어난 인간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처녀성이 훼손되지 않고 유지되어야지만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받아들여집니다. 이는 곧 그 어떤 ‘흠있음’도 하늘나라에서 받아줄 의시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자는 ‘흠있음’에서 출발했기에 인간의 능력으로 결코 ‘흠없음’으로 바꿔지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흠없음’으로 출발한 하나님의 작업이 ‘흠있는’ 인간과 만남에서 ‘구원’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흠있는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등장합니다. 사랑이란 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흠없는’자의 꺽어짐이 필요합니다.

시편 51:8에 보면, “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흠없는 자를 꺽어지도록 해서 흠있는 자로 하여금 구원의 기쁨을 베푸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체입니다. 즉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심판을 위해 강림하십니다. 이것은 모두 공적인 환경입니다. 이 공적 환경 안에서 사적인 것들은 다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오직 쓰레기 아닌 분을 대신 꺽어지게 하셔서(죽게 하셔서) 구원의 기쁨을 발생시키십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뭘가요?

구원이란 자신이 건너오게 된 상황을 말하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도저히 해낸 적이 없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6:26에 보면,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과 지옥은 인간으로서는 건너고자 해서 건너갈 수 없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차이’, 혹은 ‘간격’, 혹은 ‘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만이 이 사실을 알고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도달된 세계가 이러합니다.

우선 에베소서 2:5-9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리고 로마서 8: 32-39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갭을 건너온 자들은 비로소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압니다. 주님의 강림은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시점에 맞추어서 실시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것은 다니엘 8:10-12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자가 애굽나라를 쳐들어가려고 하다가 로마군대가 미리 애굽에 들어온 것을 알고 어쩔 수없이 후퇴하면서 분풀이용으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 분노를 드러내었습니다. 이자는 그 당시 유대민족이 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옵니다.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리고 하나님께 대한 제사도 유대민족에게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섬기라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 민족들에게 신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헬라문화를 유포시켰습니다. 스포츠 같은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항해서 마타디아서 일어서고 전쟁에 이겨 3년 동안 태평했지만 그 왕조는 결국 B.C 63년 경에 로마의 장군 폼페니우스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것은 그 어떤 종교권력도 이 짐승같은 세속 권력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이 적-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짐승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세에 센 쪽에 붙여 목숨을 부지하려는 본성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지킬 생각하는 자들은 결국 지옥갑니다.

성도가 증거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 아닙니다. 도리어 타고난 자신의 흠있음의 생리는 자기 힘으로 고치지 못하고 늘 자기를 위해서 살 수밖에 없음을 알고, 그런 자신을 지옥의 골짜기를 넘게 해주신 주님의 피에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처녀성을 유지하는‘흠없는 자’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계약 상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아무리 험담을 하고 악담을 해도 예수님의 피 안에 있는 성도는 여유롭게 웃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데살로니가전서 3장 11-13(갭)21112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3장 11-13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1-5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것에 주의 계시의 내용을 담아서 전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서 전할 때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여기에 몇 가지 구원에 관한 개념을 사람이 있다고 여기고, 사람이 존재한다고 여기면서 관여된 개념들을 여기다 집어넣어요.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한 것 같이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준 그 사랑을 누구 대상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편지 받을 사람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 데살로니가전서라는 이 편지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한 그 사랑을 그대로 받을 대상이 어떤 사람에게 해당 되느냐, 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의 개념을 여기 13절에 단어로 집어넣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흠이 없게 하사 “거룩함에 흠이 없게” 흠 없는 사람, 흠이 없다는 사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서 그렇게 규정하시는 겁니다. “너 왜 흠이 없어? 너 왜 완전해? 완벽해?” 흠이 없는 사람을 생산해 내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이 편지에다 어떤 구원의 개념을 집어넣느냐 하면, “강림하실 때” 13절에 나오지요, “강림하실 때”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니까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이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서 어떤 내용을 보게 되느냐 하면, 흠이 없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천국에 간다는 내용을 편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준 사랑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편지를 받는 그 당시 사람이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나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사랑’ 알아야 되지요. 그다음에 ‘흠 없음’이 뭔지를 알아야 되고요. 그다음에 뭐가 중요하냐 하면, 주께서, 왜 떠나가신 주께서 도로 오시느냐 하는 이 강림의 문제.

왜 강림하셔야 되는가? 흠이 없다는 그것이 어떻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냐? 그리고 인간세계에 없는 예수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 그런 내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 이 본문에 관심을 두게 될 겁니다. 편지 값을 한다는 겁니다. 편지 받는 값을 하는 거예요.

“편지는 반드시 도착하게 되어 있다” 그런 말이 있어요. 상당히 무서운 말이에요. 편지는 도착하게 되어 있다는 말은, 편지를 거부한다 할지라도 편지는 반드시 그 주인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편지를 썼다는 말은, 너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해당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이 편지 내용이 너한테 해당이 안 돼? 안되면 그러면 해당 되는 사람 내가 만들고야 말리라.” 이런 식으로 해서 기어이 편지의 취지를 살려내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왜 이게 무서운 이야기냐 하면요, 사람이 누구한테 뭐가 오게 되면 내 쪽에서 거부하면 그걸로 일이 종결돼요. 내가 거부하면 그 일은 내게 있으나 마나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 편지라 하는 것은 “싫어?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가지 뭐.” 이렇게 되니까 나만 소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나만 내용에서 소외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편지를 내가 수납했다는 말은 이 편지에 담겨 있는 사랑과 흠 없음과 주님의 강림이 나를 통해서 구현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나는 내가 공부해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그것이 완전히 무시되는 거예요. 편지를 받는 순간 나라는 것은 이제는 사라지고 편지 내용대로 그대로 현실화되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그래서 여기에 사랑이다, 흠 없다, 강림이다, 이 세 가지 다 구원과 관련해서 주께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를 통해서 이 세 개를 다 합쳐봅시다. 독수리 5형제 크로스! 해서 다 합치듯이 이 사랑과 흠 없음과 주의 강림을, 다 같이 주님의 구원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이걸 합칠 수가 있어요.

어떻게 합치느냐? 처음에 흠 없음부터 시작합시다. 흠 없음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흠 없음은 처녀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사야 7장 14절, 크리스마스 때 주로 읽어주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목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아들을 낳는데요. 처녀가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이걸 처녀성이라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성령으로 그 처녀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에게는 무엇이 개입되지 않느냐 하면, 육의 요소가 일체 개입되지 않습니다. 흠 있는 것이 개입되지 않아요. 이게 처녀성이에요.

그래서 처녀가 낳아서 예수님이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처녀성이 고스란히 유지가 되어줘야 돼요. 성도가 된다는 말은 육에서 태어난 자는 성도가 아니에요. 처녀에서 태어난 그분에 의해서 성도가 된 자만이 처녀성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태초의 처녀성, 인간의 육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순수 그 자체. 그래서 흠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우리는 왜 안 되는가? 우리는 육에서 태어난 거예요. 부모의 죄에서 태어난 겁니다. 부모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부모가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태어나봤자 너의 생리와 너의 본성에 대해서 네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흠으로 태어났기에 흠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게 우리 모습입니다. 인정해야 돼요. 이거 인정해야 됩니다.

이말은 뭐냐? 인간이 개과천선한다고 흠 있는 인간이 흠 없이 되지를 않아요. 인간이 흠없는 인간되는 방법은 애당초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흠 없음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주께서 강림하실 때 흠없는 것만 챙겨가시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갑니다.

왜? 흠 없는 자만이 주께서 강림하실 때 구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주님은 부실한 일이 없어요. 허투루 일한 적이 없습니다. 시작부터 처녀로 아기를 태어나게 해서 그 아기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영을 성령이라 합니다. 성령에 의해서 흠 없는 자만 주께서 강림하실 때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뭐 교회 다녀서 말씀대로 열심히 살면 어떻게 수가 나지 않겠습니까? 수가 나지 않습니다. 수가 안나요. 이미 우리의 본성 자체가 흠이 있기 때문에 흠 있는 인간이 흠 없겠다고 시도하는 발상 자체가 흠이 있어요 그게. 처녀도 아닌 게 애 낳고 남편이 있으면서도 처녀가 애 낳았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육으로 태어난 인간은 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제 말이 아니고 요한복음 3장 6절에 있는 말씀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흠 없이 되지를 않아요.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교회의 시도가 다 헛짓이에요 그게.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젊을 때, 젊을 때라기 보다는 어릴 때지요. 10대 때 우리 동네 대구 서문시장 장돌뱅이들 많은 그 동네요, 그 동네에 멀쩡하게 차려입은 남자 4, 50대가 번듯한 직업이라고 설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까 그 사람들의 그 멀쩡한 직업이 뭐였냐 하면, 부동산 브로커 들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멀쩡하게 옷 입고 대낮에 돌아다니는 그것 있잖아요. 공장 안 가고 회사 안 다니고 대낮에 돌아다니는 그 사람들 있잖아요. 잘 차려입고 다방에서 쌍화차 시켜 먹는 그 사람들. 지금 생각하니까 사기꾼들이에요.

그걸 고상한 말로 부동산 브로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당시 그런 사람들이 다 사기꾼들이었습니다. 그 사기꾼들 오늘날 교회의 사기꾼들하고 똑같은 사기는 치는데 그쪽은 돈만 챙기는 사기꾼인데 이쪽은 영을 챙기는, 사람을 지옥 보내는 사기꾼들이에요. 멀쩡하게 차려입고요. 저도 이렇게 차려 입었습니다만.

애초부터 구원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부모님 집에 계십니까?” “계십니다.” 그러면 구원이 안 돼요.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되는 사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까 무엇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주님의 강림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재림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는데……” 이러고 있습니다. 아무 관심이 없어요.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착하게 일했는가? 자기 진도 나간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 26절에 보면, 유명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오지요.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음부에 가 있는 부자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이 끼어있다. 큰 골짜기가 있어요. 지옥과 천국은 그 사이에 골짜기가 있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나들 수가 없어요. 넘어갈 수가 없어요. 건널 수 없는 그것이 뭐냐? 그게 바로 갭이지요. 갭이라는 것은 간격 또는 간극, 또는 차이.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 여러분이 성령을 받게 되면 무엇에 주목 해야되느냐?

‘내가 얼마나 훌륭하다’에 주목하면 안돼요. 어디에 주목해야 되느냐 하면, 나의 천성은 내가 못고친다, 에 주목해야 돼요. 왜? 간격이 보이니까요. 나는 나를 고친 적이 없는데 그 간격이 보인다는 말은 이미 그 사람이 천국에 와 있는 사람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지금 같은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이미 그 골짜기를 건너왔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편지가 여러 가지 많은데 에베소서 2장 5-9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간격이요, ‘인간의 힘으로 건너뛸 수 없는 골짜기가 보이거든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이미 흠이 없는 거예요. 흠이 없기 때문에 그 간격이, 골짜기가 보이는 거예요. ‘내가 미쳤어. 내가 어떻게 건너왔지?’ 못 건너왔지요. 성령이 건너가게 하신 거예요, 성령이.

여러분, 이거 놓쳐버리면 강림하실 때 오직 흠 없는 자만 건진다는 그 취지를 놓친 것이 돼요. 흠 있는 자는 주의 강림하실 때 구원받지 못합니다. 흠이 있는 자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자력으로 구원되고자 하는 사람은 전부 다 탈락이에요. 천국 못 옵니다.

이렇게 건너온 사람은요, 세상 모든 조롱과 비방과 비난과 악담과 험담을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사람이에요. ‘비웃어라’ 나는 그 간격만 골짜기만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 웃어라. 실컷 웃어라. 나는 그 골짜기만 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총회, 하나님의 교회는 히브리서 12장에도 잘 나와 있어요. 히브리서 12장 22-24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그 피뿌림을 받은 자, 피뿌림을 받은 자가 함께 있는 곳에 너는 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골짜기를 건너서 아브라함과 거지 나사로처럼 이미 천국에 온 사람이 골짜기를 놔두고, 앞에 두고 건너 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성도는 이해한다는 거예요. ‘아, 건널 수 없는 곳을 건너 왔구나. 인간이 가능하지 않은 것인데 성령께서 불가능을 나한테 뒤집어 씌웠다.’ 불가능을 나에게 덮어 씌워 가지고 인간으로서는 차마 건너올 수 없는 곳을 이미 건너온 거예요.

로마서 8장 3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고소하리오, 송사하리오. “의롭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기에다 느낌표 딱 쳐야 돼요. 의롭게 하시는 분이 나의 양심이 아니고 내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 거예요.

뭐 때문에? 우리 안에 들어온 예수님의 피 때문에 의롭게 하신 거예요. 그다음에 34절에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다음에 나오는 여러분 잘 아시는 것, 35절,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거기에 하나 더 집어넣으세요.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일? 장래일? 능력? 높음? 깊음? 이렇게 전부 물음표 다 치세요.

그리고 39절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이 편지를 데살로니가 이 편지에 집어넣는 거예요. 흠 없는 자만 주께서 강림하실 때 구출 받는다. 그런데 그 흠 없다는 것이 어떤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 착하다’가 아니라 처녀성을 유지해야 돼요. 육의 어떤 요소도 거기에 끼어들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 ‘흠 없다’에 반대말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반대말이 ‘흠 있다’입니다. 참 쉽지요. 자, 여기서 ‘흠 있다’가 ‘나는 죄를 지었어’ 그걸로 흠이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흠이 있다, 혹은 없다, 하는 것은 주께서 강림하시는 사건에 의해서 결정이 되기 때문에 내가 양심상 흠이 있다, 없다, 하는 그것은 갖다 버리세요. 그것은 소용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강림에 의해서 ‘흠 있다’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돼요. 그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때 주께서 강림하세요. 언제 강림하는가? 타이밍이 언제냐? 14절에, 그제야 끝이 온다 하는데 그 끝이 언제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다시 말해서 흠 있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그 방향성이 있어요. 나는 죄지었다, 흠이 있다, 그게 아니라 노리는 것이 있다고요. 결국 ‘흠 있다’가 노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니엘이 예언한대로만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가 주의 강림하시는 그 타이밍이 ‘멸망할 자가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는 그 타이밍인데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적그리스도라 하니까 남의 이야기 같지요. 그게 우리 이야기입니다. 지금 적그리스도라고 하니까 본인이 적그리스도인 것을 모르고 자꾸 적그리스도를 찾고 있어요.

다니엘 8장에 보면, 이 적그리스도, 모든 인간이 생래적으로 또는 본성적으로 그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 8장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다니엘 8장을 설명할텐데요. 아, 이거, 성경에 자신 없는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거예요. 그러나 다니엘 7장, 8장, 9장, 10장, 11장의 내용을 빠른 시간 내에 짧게 여러분의 불편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죽 갑니다.

다니엘 7장 8장에 보면, 다니엘이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을레 강(변)이라는 곳에서 환상을 보는데 환상의 내용이 역사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모든 역사는 흠 있는 자들이 어떤 흠을 드러내는 사례를 나열하는 연결연결, 고리고리를 지었던 그 스토리를 역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 역사가 뭐냐? 환상이에요. 다니엘은 환상을 본 거예요. 무려 다니엘 시대부터 3백 년 이상, 다니엘이 서기 600년대니까 3백 년 이상의 미래의 역사를 다니엘은 그 강에서, 지금 이라크에 있는 그 강에서 환상을 봤어요. 환상의 내용이 곧 역사가 된다니까요. 역사 따로 그리고 환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 자체가 환상이에요. 그러면 실제로 역사는 뭐냐? 숨겨져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은 환상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여러분이 거대한 앰프 알지요. 거대한 스피커 있잖아요. 록밴드가 공연할 때 큰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잖아요.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 하고요, 내가 그 스피커 안에서 하나의 소자 부속품이 되는 것하고 어떻습니까, 차이가 나지요?

이 세상 현실은 뭐냐? 예수님이 처녀로 잉태하는 것, 그다음에 십자가에 죽은 것, 그다음에 부활하신 것, 그다음에 승천하신 것, 그다음에 강림하시는 것, 이게 역사에요. 이게 실제로 역사에요. 이게 앰프에요, 앰프. 이게 앰프인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자꾸 들으려고 하지 말고 자기 성도로 하여금 그 안에 앰프의 세계, 그 필드 안에 우리를 부속품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오늘 아침에 밥 먹는 것하고 십자가, 부활, 강림하고 다 관련성이 있어요. 그 안에서 다 공명이 일어나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의 세계, 내 인생사가 따로 없다는 겁니다. 성령 받게 되면 ‘내가 주의 말씀 들어야지.’ 아니에요. 그 사람이 주의 말씀 안에 들어가 있어요. 앰프 안에 들어가 있다고.

운동경기할 때 체육관 들어가잖아요. 들어가지 마시고, 체육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체육관의 의자가 되고 체육관의 하나의 농구대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자체가 거대한 체육관의 하나의 부속물이고 앰프의 하나의 부속품이 되는 거예요.

나에게서 나오는 왕, 왕, 왕, 하는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강림, 처녀로 예수님이 태어난 그것과 같이 공명상태가 돼요. 왕, 왕, 왕, 울리는 거예요. 나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보자는 말이지요. 세상을, 앰프 안에서 그 바깥을 보면 그쪽은 환상이에요. 왜? 자기 세계밖에 없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해 살련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망상인지요.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사는 세상같으면 마스크 쓰겠어요? 언제부터 마스크를 썼습니까? 코로나 오니까 쓴 거잖아요. 이 세상은 ‘코로나야! 기다렸다. 반갑다. 코로나.’ 이런 인간은 없어요.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이 적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예하 부대원으로 만들어서 이 세상 환상 속에서 모든 인간을 권세로 통치하게 된 겁니다. 통치하는데 다니엘 7, 8, 9장, 통치하면 통치하지 왜 그걸 알아야 되느냐? 거기 보면 그 환상을 본 그대로 역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다니엘 8장을 보게 되면요. 제가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에 나온 거예요.

20-22절에 “네가 본바 두 뿔 가진 수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이요 털이 많은 수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곧 그 첫째 왕이요 이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네 뿔이 났은즉 그 나라 가운데서 네 나라가 일어나되 그 권세만 못하리라” 이렇게 죽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여기 성경 다니엘 8장에 메대바사, 헬라가 나오는데 다니엘의 이 이야기들이 미래의 일이거든요. 미래의 일인데 그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환상 중에 다 알려준 겁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여기 왕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메데바사, 이것은 당시 페르시아라는 나라입니다. 헬라라는 것은 헬라마케도니아라고 해서 마케도니아를 수도로 가지고 현재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심지어 애굽까지, 터어키까지 전부 지배한 민족이 있어요.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사람이 지배를 했거든요. 그 사람을 큰 뿔이라고 해요.

그게 큰 뿔이고 그 뒤에 나오는 네 뿔이 뭐냐? 카산더, 리시마쿠스, 셀레쿠스, 프톨레미, 이래 가지고 네 뿔이 나와요. 네 뿔이 나오는데 왜 다니엘 8장 9장에서 그 이야기를 언급하느냐 하면, 적그리스도의 모형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적그리스도의 모형이 뭐냐 하면, 그중에 셀류쿠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BC 200년경부터인데 그걸 북쪽 왕이라 해요. 다니엘 11장에 보면요. 거기에 남쪽 왕은 애굽왕인데 그게 프톨레미입니다.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 네 명이 통치하는 지역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성경에서 인간의 역사 이야기를, 영적책에서 왜 육적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거기서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어떻게 생겨나느냐 하면, 이 세상 역사 속에는 큰 힘 가진 자가 더 작은 힘을 가진 자를 부서뜨리고 으깨는 그 짓을 하는 겁니다.

환상 중에 그걸 인간이라 하지 않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짐승’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걸 짐승이라고 하는데 다니엘 8장에서 다니엘이 기절을 해버려요. 수일 동안 기절, 혼절해서 깨어나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자기는 사람으로 봤거든요. 사람으로 본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냐? 환상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사람이 아니고 짐승의, 짐승의 다양한 작은 복제물이라고 본 거예요. 짐승의 복제물. 짐승의 자식들이에요. 짐승의 자식들. 개념변화 때문에 다니엘이 혼이 나가버린 거예요.

그러면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었더랬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집안에 식구 네 명이 있잖아요. 그러면 짐승 넷이에요. 짐승들이에요. 짐승돌, 그런 것 아니고 짐승들, 그냥 짐승들이에요. 짐승들의 특징이 뭐냐? 어느 쪽이 힘이 센 쪽인가, 힘이 센 쪽에서 자기 자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능을 해요.

딸이 하나 있는데 아빠 엄마하고 사이가 좀 안 좋다. 그런데 할머니는 아빠 편이고 할머니도 엄마를 싫어해. 그러면 딸이 딱 지켜보다가 내가 어느 편에 서야 나로 이 가정에서 인정 받는가? 엄마를 내치고 아빠 편에 서버리는 거예요. 자식이 짐승입니다. 다시 할게요. 짐승의 특징이 뭐냐? 큰 권세가 작은 권세를 으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연달아연달아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사자 같은 짐승, 곰 같은 짐승, 표범 같은 짐승, 네번째 짐승, 짐승도 아닌 것이 짐승, 이런 것. 철 짐승, 철로 만든 짐승, 이빨이 철 짐승. 그래서 다니엘이 본 계시의 특징이 뭐냐? 힘 있는 자, 힘 있는 자를 다른 말로 하면 흠 있는 자가 돼요.

이 세상 육의 세계의 특징이 뭐냐? 흠이 있는데 이들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골짜기를 건너뛸 수가 없어요. 그 나름대로 그들이 추구하는게 뭐냐? 힘을 축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안티오쿠스 4세지요, 에피파네스라는 안티오쿠스 4세가 등장해요. 기원전 167년도에. 그 사람이 북방왕인데요.

이 내용은 역사책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다니엘 11장에 나오는 겁니다. 거기 보면 북방왕이 남방왕을 치는데요. 여기서 클레오파트라라는 그 여자가 원래 시리아 공주거든요. 북쪽왕은 현재 이란,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거기 땅 차지하고 남방왕은 프톨레미라 해서 애굽땅을 차지한 거예요. 둘이 서로 권세싸움을 하는 겁니다. 이게 지금 다니엘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권세는 가만있지를 못해요. 계속해서 힘겨루기를 하는 거예요. 하는데 이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안티오쿠스라는 것은 안디옥을 수도로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의 선교센터라는 안디옥이지요. 애굽을 치러 갔는데 로마군대가 등장합니다. ‘깃딤의 배’라고 하는데 로마군대가 등장하니까 에이, 하고 선 긋고 뒤로 도망하다 화가 나서 자기 생일인 12월 16일에 안티오쿠스 4세가 기분 더럽다고 화풀이를 예루살렘 성전에다 해버립니다.

그 이름이 에피파네스라고 하는데 ‘에피’라는 것은 위로부터, 그리고 ‘파네스’라는 것은 나타나다. 그래서 ‘신이 나타나다’ 그런 뜻이에요. 위로부터 나타남, 신의 현현. 그래서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신에게 경배하지 말고 나에게 경배하라, 고 하면서 성전에다 돼지 피를 뿌려요.

그리고 공격하는 것도 안식일에 공격해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쟁 안 한다. 그래서 굳이 안식일에 공격하고요. 마침 그때 야손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제사장인데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돈을 주고 사독계열의 다른 제사장을 제키는 식으로 대제사장 했고요. 안티오쿠스 4세 이 사람이 자기가 원했던 대로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그 화풀이를 유대인들한테 한 겁니다.

너희들 유대인들이 뭐며, 너희 경전이 뭐며, 구약 율법, 율법이 뭐라는 것도 다 알아요. 알면서 역으로 가는 거예요. 알면서 역으로 피를 성전에 뿌린다는 말은, 절대로 돼지 피를 뿌려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기 때문에 역으로 가는 거예요. 그냥 뿌려버리는 거예요. 권세의 방향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의 반대가 되는 조치를 의도적으로 하게 하는 존재, 그게 적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하니까 할례 행한다고 해서 김나지움이라는 것을 예루살렘에 들여옵니다. 독일 같으면 학교를 말하는데 인문학 강좌도 하고 레슬링도 하고 이를테면 남자들이 벌거벗고 스포츠도 하는 곳입니다. 소위 신문물이에요. 교양적인 헬라인 양성하는 기관이 김나지움이라는 곳인데 그런 것을 많이 지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신문물을 유행시켰습니다. 마치 이태원처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처럼.

젊은 애들이 거기에 확 빠졌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교 그것은 하나의 오락이 되고 만 거예요. 그러니 너희들이 여호와 율법을 찾고 하는 이것은 하나의 오락이라는 겁니다. 그걸 이 왕이 모르는 게 아니라 알아요. 적그리스도의 모형이 안다고요. 알면서 그렇게 해요.

심지어 동전에다도 자기 얼굴을 새겨서 자기 얼굴 새긴 동전만 사용하도록 했고요. 자기만 섬기게 하면서 성전에다 제우스 신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것도 치워버리고 자기만 섬기라고 했어요. 그런 식으로 횡포를 부렸다는 겁니다. 제사는 물론 없애버리고요. 그게 다니엘 8장, 9장, 10장, 11장, 계속 나오는 그 이야기입니다.

아까 본 마태복음 24장에서 그 멸망 받을 적그리스도가 거룩한 곳에 서거든 내가 강림한다, 라는 이게 무슨 이야기냐? 모든 육적인 인간들은 어차피 자기가 흠 있음을 감출 수가 없어요. 흠 있음을 반드시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왜? 그게 본성이니까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만 섬기게 되어 있어요. 무엇으로? 힘 있는 자에 붙어서.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성과 똑같은 거예요.

이 세상에는 힘보다 더 소중한게 없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 생존하려면 힘 있는 자에 붙어 있어야 돼요. 이 본성을 인간은 교회 다닌다고 감춰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이게 짐승의 본능이니까요. 사람이 아니고 쓰레기, 짐승이에요. 교회라는 것은 뭐냐? 짐승의 아랫도리를 가리는 그런 앞치마 같은 것, 휙 들춰버리면 그 안에 권세가 다 나타나 있어요. “예수님의 피? 엿 먹어라. 나는 돈이다 씨!” 이거예요.

이걸 욕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교회가 백만 원 주더라. 아이고, 낼름 받지요. 내 본성이 그러니까. 짐승입니다. 쓰레기에요 쓰레기. 교회가 쓰레기 양성소에요. 적그리스도, 정말 친해요. 참, 정말 친합니다. 그래서 유대가 하는 짓은 뭐냐? 우리 좋은 게 좋습니다, 이래서 허용을 받되 그 본성을 가리는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거기에 맛다디아스라는 혁명군이 BC167년경에 유다 족속의 형제들이라 해서 내전을 해가지고 3년 동안 했지만 하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스모니아 왕조로 이어지다가 BC63년 경에 폼페이우스라는 로마 황제한테 아주 작살이 나버렸지요.

환상은 환상 다워야 돼요. 흠 있는 자들이 바르게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흠 없는자 되는 게 아닌 거예요. 역사에서 아무리 세상의 권세에 항거하고 교회가 순교를 해도 그것은 개죽음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긴 적이 없어요. 협상하지요. 타협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돈 밝히고 교회 와서 말씀 지킬 테니 그냥 눈 질끈 감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그런 평이라도 해주시면 고맙습니다.’ 그 정도로 대충 때우고 넘어가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이.

그러나 이 세상은 주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사적인 것이 백날 설쳐봐야 우주적인, 공적인 주님의 태어나심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강림이라는 거대한 공적세계 안에서 그것은 쓰레기입니다. 쓰레기 종류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요. 의사라는 쓰레기, 판사라는 쓰레기, 뭐 세탁기 발명했다는 그런 쓰레기도 있고요. 장로라는 쓰레기, 목사라는 쓰레기, 교사 하니 뭐합니까? 쓰레기인데. 서울대 가니 뭐합니까? 서울대 간 쓰레기지요. 신약개발 하면 뭐합니까? 신약개발한 쓰레기인데요.

쓰레기 아닌 적이 없었어요. 권세 안 밝힌 적이 없습니다. 권세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남의 약점을 쥐면 돼요. 남의 약점을! 그래서 성도는 약점을 만드세요. 약점을 만드세요! 그게 성도 사이의 사랑입니다. 이 흠 없음이 사랑과 연결되는 대목은요, 흔히 말하는 사랑, 사랑, 그래 가지고는 설명이 안되고요. 성경의 식으로 연결이 되어야 돼요.

흠없음이 어떻게 사랑이 되는지 시편 51편 8절에 보면,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흠 없는 우리아가 꺾으신 뼈가 돼요. 흠 없는 그 자식, 밧세바가 낳은 그 애가, 죄 없는 그 애가 죄 있는 채로 꺽어져 버려요. 낳은지 일주일 만에. 다윗은 그것을 알게 된 겁니다.

야,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 하는 게 사랑이 아니고 누군가 꺾어져야 돼요. 박살 나야 돼요. 대신, 흠 없는 분이 흠 있는 자를 위해서 대신 꺾어져야 돼요. 죽어야 돼요. 작살나야 돼요. 심판 받아야 돼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게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지시한 사항입니다. “너 흠 없지? 죽어라.” 흠없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야 돼요. “너 처녀에서 태어났지? 죽어라. 그냥 죽지 말고 죄값으로 죽어라.”

처녀에서 태어난 그 순수성이 이 땅에 와서 죄값으로 죽는 거예요. 이게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오늘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그 사랑을 성도끼리 주고 받아라, 그 말입니다. 힘 자랑 하지 말고. 그래서 성도끼리 사랑을 주고받을 때 이런 대화 가 오고 가야 돼요. “당신, 나에게 사과하지 마세요. 왜? 나는 당신에게 갑질하기 싫어요.” 이게 사랑이에요.

“나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제발! 난 당신을 용서할 자격도 안 되니까 제발 나에게 사과하지 마라고요. 난 내 것이 없으니까. 난 내 것이 없어. 내 것이 없으니까 사과하지 마.” 만약에 당신이 나에게 사과를 해버리면 난 당신을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서 당신이 갑이 되어서 갑질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꺾어진 뼈가 아닙니다. 잘난 체 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 편이야” 여러분, 이 세상에서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어요? 난 당신 편이야. 들어본 적 있어요? 사기꾼 말고, 부동산 브로커 말고요. “제발 나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내가 당신한테 사과받을 위인이 못 됩니다.” 그러나 힘을 가진 자는 모든 탓을 남 탓해요. “네가 날 건드렸잖아.”

흠 있는 자의 특징이 뭐냐?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뭐냐? 나에게 경배하라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경배하는 것 같이 나에게 경배하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경배하는 것처럼 나에게 경배해. 나는 내것을 지키고 싶어.” 여러분, 아직 지킬 여러분의 것을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여러분한테 있어요? 짐승입니다.

뭐 우리의 본성이 그거니까요. 어쩔 수 없지요. 왜, 흠 있는 자는 왜 천국에 못 가고 주님 강림하실 때 왜 배제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흠 있는 자가 언약을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굉장히 이야기가 간단해요. 여러분, 이 이야기 어렵습니까? 흠 있는 자는요, 하나님이 보시는 그 창세 전 계약의 그 계약당사자가 아니에요. 간단하지요.

지금까지 들은 것 다 잊어버리시고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흠 있는 자는 하나님의 계약 상대자가 아니다. 계약 상대자는 오직 흠 없는 분만 해야 돼요. 처녀에서 태어난 그분만이 해야 돼요. 그분 혼자 그분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계약을 맺었고 계약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어요. 그 계약 때문에, 그 예수님의 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흠 있는 세상의 짐승들은 “피? 우리는 교인 수가 중요해. 피보다 헌금이 중요해. 피? 아이고, 엿 먹어라.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가정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가정이 더 중요해. 왜? 내가 가장 지키고 소중하게 지키는 것은 내 자식이니까. 내 모든 것 나를 잃는다 할지라도 내새끼 만큼은 내가 지키고 싶다.”

이게 짐승입니다. 이게 짐승이에요. 피를 모독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당신이 계약 상대자 맞아요? 아니지요. 아니면서 뭘 지키기 위해서 살아요? 아닌데 뭘 지킨다는 말입니까? 뭘, 지킬 것이 뭐가 있어요?

성도는 압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잠을 잔다는 것. 잠 잔다는 것은 잠자는 순간마다 우리의 모든 가능성은 이것은 파기해서 완전히 놔야 돼요. 나의 모든 가능성은 잠잘 때, 잠에 푹 빠질 때 다 놔버리는 겁니다. 잠은 뭐냐? 죽음의 시식이에요. 시식코너입니다. 주님께서 감사하게도 잠을 자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고 잠자는 것이라고, 제가 강남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너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잔다, 그 말은 그 잠자는 그 모형을, 죽음의 시식코너를 매일같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흠 없는 성도, 성령 받은 성도는 ‘아하, 나의 모든 가능성을 놔버리는 이것이 바로 죽음이구나. 나는 신난다. 왜? 나는 죽어가니까, 내 힘을 놔버리는 시간이 오니까, 우리는 사라지니까 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이처럼 신나는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느냐.’

내가 지킬 것이 없다는데 내가 더이상 지킬 것이 없고 간직할 것이 없다는데 얼마나 신나는 겁니까? 자식 간직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존심 아닙니다, 그거! 자식은 짐승들이에요. 눈치만 발달하는 인간들이에요. 처녀에서 태어났다, 십자가에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 계약자 다른 사람은 안 돼요. 유일한 계약자로 그래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하늘에 승천하셔서 주가 되셨다. 그다음에 강림하셨다. 이 앰프 안의 세계, 이 앰프 안의 세계, 사도바울의 바로 그 편지가 들어와 버린 거예요.

세상에서는 말합니다. “당신의 인생의 점수는 몇 점입니까?” 묻지요. 쓰레기한테 무슨 점수가 있어요? 쓰레기한테 빵점도 아까워요, 빵점도. 그래서 인간세계, 육적인 세계, 흠 있는 자들의 세계에서는 뭐를 보느냐 하면, 누가 힘세냐, 그것만 보는 거예요. 짐승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들 짐승들이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가 끝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 사도의 편지를 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이미 본성을 갖고 흠이 있는 본성이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습니다.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뭘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바로 고치지 못하는 나를 골짜기 넘어 이미 우리가 도착한,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했으니까,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서 우리가 살아 있다 하잖아요, 그 안목에서 우리가 뭘 강조하느냐 하면, 그 갭을 강조하는 거예요. 갭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골짜기를 증거하는 겁니다. 성도의 할 일은. 나 이렇게 해서 이렇게 구원받았다. 절대로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나 이렇게 해서 건너왔다는 소리 하면 안 됩니다. 뭐라고 해야 되느냐 하면, 죽는 일도 나의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어떤 사람이 이미 죽었대” “누가 죽었는데?” “내가 내가 죽었대.” 쉽게 말해서 “평생 나를 위해서 산 것이 이렇게 어리석은 줄 몰랐다. 날 위해서 산 것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평생 자기가자기를 지킨 사람은 지옥간다. 이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어려운 말입니까?

굉장히 간단한 말이잖아요. 이 말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 갭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왜? 본인이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이 본성은 못 고쳐요. 죽을 때까지 못 고칩니다. 요양병원에 갈 때까지 못 고칩니다. 이것은 고칠 수가 없어요. 정신머리가 우리 육으로는 실력이 그것 밖에 안 돼요. 완전히 짐승들이니까요. 짐승들, 짐승돌이에요. 환상에 갇혀 있으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만 알게 된 우리가 골짜기를 발견한 거예요. 골짜기를. 골짜기를 발견하니까 성경 모든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서 골짜기를 보면서 양쪽을 다 보는 거예요. 이미 건너온 나와 그 건너기 전의 내 모습과, 환상 속에 있는 내 모습과 이미 실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 모습을 비교하면서 나는 이렇게 잘 되었다, 가 아니라 나는 짐승이야, 라는 것을 아주 편하게 기쁨으로 감격속에서 ‘짐승이 딱 나야. 내가 짐승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나는 나밖에 몰라. 내 자식밖에 몰랐어.’ 그거 하나 아는 것이 누구냐?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본인은? 본인도 그렇게 살았어요. “내가 삼층천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있는데, 분명히 그 사람이 나 같은데 나 아닌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고요. 분명히 주님이 만든 나인데, 처녀성이 유지된 나인데, 처녀성에 포함된 나인데, 그런데 거기서 바라보는 나는 흠 있는 나, 나밖에 모르는 나.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가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예수님이 불가능한 일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세계 속에 왕, 왕, 왕, 울리면서 그 불가능의 세계 속에 들어온 사람만이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똑바로 보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남한테 안 지려고, 이겨보려고, 그게 타고난 생명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도리어 기쁨으로, 그 본성과 그 죄악들을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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