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림
2021년 10월 31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17-20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2: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사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교제할 수없게 하는 용어를 집어넣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단’이라는 것과 ‘강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지금 악마가 벌리고 있는 일을 모르는 자는 나 사도와 대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단과 결부해서 대화를 구성하지 아니하면 ‘강림’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조용한 일생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말썽없고 탈없이 살고 싶어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육’ 혹은 ‘옛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의 그런 계획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세우신 것은 ‘죽음’이 끝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어버린 예수는 더는 자신들을 찾아와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죽음이 다가 아니었던 겁니다. 죽음 뒤에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인간이 예상했던 그 계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강림하심을 실시하는 기준이 곧 심판이 기준이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일대기인, 탄생→기도→십자가→부활→승천→강림이라는 계열에서 모든 항이 다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 지셨기에 부활도 되고 승천도 되고 강림도 되는 겁니다. 십자가 지셔야 하기에 탄생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신 겁니다.
바로 이 계열에 관한 내용은 인간들이 모여 짜낸 계획에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의 의미에 하나님의 계획이 담기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사단의 존재와 그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체험하는 모든 것은 악마의 사주의 범위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마태복음 23:13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천국문은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이 천국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못들어가게 합니다.
악마는 참소하는 자입니다. 완전하라고 늘 닥달하는 자입니다. 인간들을 들볶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네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가 압력을 가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자는 복된 자라”고 말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기생라합은 거짓말로서 조국이 멸망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거기에 비해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거짓말을 했을 때, 자신이 거짓말했음을 본인이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수정과 반성이 가능한 일시적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야곱이나 기생라합은 이미 이 세상 자체가 거짓이기에 그 안에서 작용하는 거짓말이 곧 진실됨이 존재하는 방식임을 압니다.
이 방식에 따라서 예수님은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진실만을 찾고 있는 그당시 종교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은 거짓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다시 만들어져야 함’을 거부했습니다. 죽어야 됨도 반발했습니다. 안 죽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예수님 노선에 가담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정신이 이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하여 사는데 매진하는 겁니다. 종교, 예술, 철학, 과학,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그 자신을 위하여 살도록 조정했습니다. 아무리 심도있는 윤리와 도덕으로 장착해도 그들의 계획 안에는 ‘그들로 인해 죽은 하나님상’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멀쩡하듯이 자신들로 멀쩡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이로 인해 성도들만 죽어나가는 겁니다. 핍박받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수님의 아픔을 재질로 하고 생명나무 원칙을 금형으로 하여 새롭게 창조된 ‘아픔의 결정체’입니다.
이로서 이들은 예수님만의 노선에 가담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강림의 시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껏 자신의 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강림하시는 심정으로 출발하여 예수님이 걲었던 과거를 자신의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이어가는 체험이 된 겁니다.
강림이란 하나님쪽에서 벌리는 복수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의 꿈에 일단의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와서는 자기에게로 집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32장에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이름지어진 천사의 집합체를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이들 천사들이 역할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담당해야 될 일임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즉 야곱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세상을 향해 전쟁하는 하늘나라의 군대가 되어야했습니다. 이 이스라엘이 탄생하는 첫 번 째 밤은 사람들의 그렇고 그런 밤이 아니라 ‘여호와의 밤’입니다.(출 12:42) 이 밤에 천사들이 죽음의 무기로 작동하면서 애굽에 있는 모든 맏이들, 나이 불문하고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기능을 인수받은 이스라엘은 신명기 2:34에서 다음과 같이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부분 안에ㄴ 주님의 계획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분은 전체를 감당하지 말아야 했던 겁니다.
인간의 일이 아니라 전체, 곧 악마의 일은 전체(주님)이 나서서 대결하시고 해결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신선노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살해사건과 연류된 범인을 색출하는 수사관의 심정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면 복이 온다고 하는 그 선악적 사고방식인 악마의 주장에 대해 그동안 자아들은 놀아났습니다.
이제 성도는 내부적으로 육과 영 사이의 격차를 파악하게 됩니다.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음의 원천으로 삼을 수 없는 정도로 파괴되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모조리 엄살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날마다 밀어내어도 밀리지 않고 도리어 우리 자아를 문제삼으시는 주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데살로니가전서 2장 17-20절(강림)21103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20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7-20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짧은 이 문장 가운데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늘 대하는 그런 생활용어가 아니고 일상의 용어에서 이탈되는, 도약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사단’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18절에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악마가)이 우리를 막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상용어에서 남과 대화할 때 악마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면 이것은 대화 자체가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하고 상대하기 원하지요. 얼추 할 수 있는 일들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사단이 개입해 버리면 이것은 평소에 내가 하는 일에 혹시 사단의 일이 아닌지, 이게 하나님의 일이 아닌지를 구분해야 될 심적인 부담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인생 사는 것이 그냥 사는 것이지 내가 사는 이것이 악마가 진두지휘하는 인생이 아닐까, 그런 쪽으로 한 번쯤 생각해 본다는 것 자체가 열심히 살아가는 나에 대한 어떤 배신감, 반칙 같은 것을 느끼게 되거든요. ‘열심히 살아가는데 뭐가 잘못이냐? 사탄? 그거 굳이 꼭 알아야 돼?’ 이렇게 나오지요.
또 하나의 단어가 나오는데요. ‘강림’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하늘로부터. 뭐를 준비해야 돼요? 오신다는데 뭐 잡채라도 준비하고 이런저런 음식이라도 준비 해야 되는지. 왜 오십니까? 가셨으면 그냥 가 계시지 왜 오셔야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오신다’를 감안해서 인생을 안 살아 왔잖아요. 주님께서 들이닥친다는 것을, 밀어붙인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냥 최선을 향하여 그냥 사는 겁니다. 그냥 최선을 향하여. 죽을동살동 그냥 사는 거예요. 누구한테 검사 맡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살아 있으니까 그냥 살아보는 거지요. 누가 감히 나를 검사해요? 누가 나를 측정합니까? 듣는 나는 굉장히 기분 나쁜 거예요. ‘감시받으면서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런 울화통 같은 것이 늘 내부에 울렁증처럼 늘 넘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사도바울이라는 작자 만나면 멱살 쥐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왜 같은 인간끼리 대화하면서 사탄이라는 말을 왜 거기에 굳이 집어넣어서 좋게좋게 지낼 사이를 틀어지게 만드느냐, 하는 것과 강림이라는 것, 강림이라는 말, 이렇게 각자 우리 인생에다 ‘강림을 대비했느냐?’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게 되면 우리는 난감합니다.
예수님이 강림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거든요. 인간들이 나름대로 계획하고 설계한 이 세상이 있습니다. 지금 이탈리아에서 전 세계 20개국 정상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인간 세상, 어차피 주인공은 인간이니까 우리가 여기서 마음 맞춰서 계획을 세워보자. 앞으로 21세기, 22세기, 계속 잘되도록 후손들에게 알찬 열매 물려줄 수 있도록 해보자. 그렇게 의논하는 거예요. 전 세계 20개국 선진국이.
이 세상은요, 종교에서 뭐라고 하든, 성경에서 뭐라고 하든,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간에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인간들이 계획대로 진행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계획대로 진행하면서 벌어진 일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메시아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죽였어요. 예수님을 죽여버렸다 그 말이지요.
인간들은 그걸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정치적인 우리 계획을 방해 놓으니까 정치범으로 몰아서 죽였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끄집어내는 모든 생각 가운데는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계획이 내 인생에 또는 인간세계에 끼어드는 것을 인간들은 그걸 허용을 안 해요. 용납을 안 하고 싶은 겁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사단이 우리를 막았다”고 되어 있어요. 사단이 뭘 막았다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 쪽, 사도바울 쪽 생각이고요. 예수님의 계획을 우리가 막은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막은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인간들이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바탕에 깔고 하는 겁니다.
그 계획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든 누가 오든 간에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이, 인간계획에 인간들 전체의 모집된 일치된 뜻에 예수님이 반대하는 것을 갖고 있으니까 정치적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강림이 뭐냐 하면, 인간이 끝까지 밀어붙였던 그 예수님이 다시 인간을 찾아서 들이닥친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아무리 계획해도 알 수 없는 인간의 생각 생활환경 그 너머에 있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너희들을 처벌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강림의 취지입니다. 처벌하겠다 그 말이지요. 단체로 벌주겠다고 찾아오시는 것이 주님의 강림이에요.
그 강림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성경 여기에 집어넣은 겁니다. 네가 아무리 구상하고 아무리 짜내도 예수님이 강림한다는 그 취지가 포함되지 않는 채로 너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죽여놓고 깔끔하게 정리됐잖아요. 그 당시 인간들, 세력자는 그렇게 했어요. “어딜 까불어. 어디 감히 우리에게 대들어. 죽으려고!”
그래놓고 그만 지나갔어요. 아무문제 없어요. 아무 일 없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는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죽었다는 분이, 분명히 인간들이 죽음으로 몰아세운 그분이 인간세계에 다시 온다는 그 의미가 뭐냐? 도대체 왜 오느냐? 뭐 때문에 오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예수님을 죽일 때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태어나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림한다는 것은, 네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느냐,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고 네가 진정 끝을 생각하려면 예수님이 왜 강림하는지 그 시점에서나 알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너 자신을 다시 한번 보라는 겁니다.
인생은 죽었다. 끝. 이 안목에서 너를 보지 말고, 이왕 죽을 것 맛있는 것이나 많이 먹고 죽자, 이런 안목 말고 죽음 그 이후에 강림이라는 그 시점에서 다시 거꾸로 지금의 인간세계를 다시 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체험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인간이 기껏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기체험이 전부에요. 자기체험.
그러나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야기합니다. 너의 체험 말고 주님의 체험에 가담되어 있는 사람, 합류되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지금 묻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성도의 체험이에요. 성도의 체험은요, 인간으로서 체험하지 못한, 인간이 겪지 못한 다른 노선, 다른 과정으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데리고 집어넣어요.
우리의 노선은 이미 한번 부모로서부터 만들어진 거예요. 부모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부모를 통해서 나타난 기존의 육적인 생산물입니다. 우리의 몸이라는 게.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그것은 고장 난 거니까, 그것은 불량품이니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지 않으니까 내가 새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인간을 새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새로 만들 때 뭐로 만드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수모를 당했던 그 아픔, 그 아픔 가지고 새로운 인간을 제조해 나가겠다 그 말입니다. 주님의 아픔을 가지고. 주물공장에서 회사에서 요구하는 제품생산을 위해서 금형 틀을 만들어요. 틀을 만들고 거기에 쇠붙이를 녹여서 금형, 그 틀에 담으면 새로운 형태의 제품이 부속이 등장하겠지요.
그때 압력을 가해버리면 어떤 새로운 재질의 결정체가 그 금형틀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압박감이 주어져요. 주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했던 그 아픔과 고통을 재료로 해서, 그 고통을 재질로 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제2의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제조 생산하시는 거예요. 이 계획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되느냐? 우리가 태어났다, 그래서 어느 학교를 다녔다, 취직했다, 결혼했다, 아파트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애 낳고 가정 꾸렸다, 그다음에 나중에 늙어서 요양병원에서 죽었다, 하는 이 인간의 노선 있잖아요. 인간의 노선. 인간의 노선에서는 거기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의 계획도 안 들어있고, 나로 인하여 주님이 죽으셨다는 그 내용도 거기에 담겨 있지 않고, 오직 자기만을 위한, 그것밖에 모르는 계획이 있는 거예요.
성경은 그걸 육이라 하는데요. 육의 노선과 영의 노선을 항상 겸하여서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그 육과 영이 그 두 개의 배열, 두 개의 노선이 얼마나 점차 점차 벌어지고, 격차가 나고, 간격이 벌어지면서 각자 가는 길이 하나는 지옥, 하나는 예수님의 나라 천국 가고 있다는 그 두 면을 다 성경에서 보여줘요.
보여주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지옥 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들은 아무것도 거짓말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요. 지옥 가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설사 자기가 거짓말을 했더라도 자기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은 거짓말이 안 돼요.
예를 들면 이삭의 아들 가운데 두 사람이 있었어요. 하나는 에서고 하나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에서는 아버지의 상속을 받는 데 있어서 일체 거짓말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뭘 요구했느냐 하면, 내가 내 재산 모두를 물려줄 그 아들은 내가 원하는 그 고기를 사냥해서 가져오는 아들이다, 라고 지침을 줬고 그 지침에 따라서 큰아들은 곧이곧대로 사냥하려 바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사냥하러 안 갔습니다. 안 가고 아버지를 속이고 거짓말했습니다. 자기가 형이 아니고 동생이면서도 아버지가 형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 형으로 위장했어요. 이 거짓말 한 야곱은 천국에 가고 거짓말 안한 이 에서는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갔답니다. 갔대요. 저에게 따지지 마세요. 성경에 그렇게 나와요.
이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거짓말을 해도 자기가 알아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요. 진실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거짓말 한 게 아니에요. 왜 이 세상은 거짓말하지 못하느냐? 자기체험밖에 모르기 때문에 거짓말 안 하는 거예요. 자기체험밖에 모르기 때문에.
기생 라합은 거짓말했습니다. 기생 라합과 살았던 그 여리고 성 사람들은 거짓말 안 했어요. 왜? 내 나라 내 조국이기 때문에. 이 여리고 성은. 그 당시는 성에 모여 살았거든요. 자기 눈에 보이는,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이 터전, 이 터전은 누가 봐도 내가 후손에게 물려줄 내 나라에요. 내 국가, 내 민족, 내 조국입니다. 조국 알지요? 조국, 내 조국이에요.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지요. 그게 향토예비군 정신 아닙니까? 내 나라는 내가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기생 라합은 나라를 팔아먹은 겁니다. 나라를 팔아먹었어요. 그것도 거짓말을 해가지고. 경찰이 와서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스파이가 왔다는 소문이 있는데 너 봤나, 안 봤나?” “못 봤습니다.” 뻔뻔하기도. “못 봤습니다. 어디로 갔나? 아, 이제 생각해 보니 봤네요. 어디로 갔는데……, 여기 잠깐 들렀다가 빠져나갔습니다.” 실제로는 두 사람을 자기 옥상에 숨겨놨는데. 그 기생 라합 천국 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멸망 당했습니다.
거짓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돼요. 이것은 곧 나의 의로움을 파괴할 수 있는 용기, 나의 의로움을, 나의 순전함과 온전함을 파괴할 수 있는 용기, ‘러브 이즈 뭔들’ 하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사랑을 위해서 뭔들 못할까요. 주님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나까지 파괴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렸어요. 나의 출생까지, 나의 바탕까지, 근본까지 아낌없이 파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바로 강림이라는 관점에서 봤거든요. 강림하신다는 것, 주께서 강림하실 때 어떤 취지로 왜 다시 이 땅에 오시는가, 그 취지 그 시점에서의 세상보는 관점을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거기에 가담되어서 그래요. 그 안에 들어가서 그래요.
여러분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노선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탄생, 그리고 기도, 특히 겟세마네 기도, 그다음에 십자가, 그리고 부활, 그다음에 승천, 그다음에 강림이지요. 그런 노선이 있는 거예요. 탄생 - 기도 – 십자가 - 부활 – 승천 – 강림, 이 노선에는 모든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노선이에요. 어떤 인간도 이 노선에 관여가 안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모에게서 태어났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어요. 애초부터 시~작부터 관여가 안 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아니하면 관여를 할 수 없는 거예요. 그 관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냥 있는 그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거예요. 생긴 대로 살아가고 ‘죽으면 죽지 뭐.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이 자기의 끝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나 다시 말씀드려서 강림은 인간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는 것은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하나는 지옥으로 하나는 천국으로, 그 분류작업이 남아 있다는 그 말이에요. 그 분류작업이. 그 분류작업을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참으로 정당하다는 그런 관점을 공유해야 만이 우리는 예수님의 계열에 참여가 되고 가담되어 있는 계열의 존재라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사도바울로 하여금 사단이라는 용어를 집어넣었고 강림이라는 용어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함부로 아무도 이 하나님의 성령의 단체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시고 기도하시고 십자가 부활 승천 강림할 때 이 모든 능력에 있어서 이것은 인간이 평소에 체험할 수 없는 다른 체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왜 저의 이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니냐 하면, 인간이 끝까지 예수님을 죽음으로 밀어냈거든요. 절벽에서 밀어붙이듯이 인간은 ‘당신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내 인생에 일절 당신은 발들이지 마세요. 당신은 내 인생에 하등 도움 되지 않습니다.’ 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밀어붙였던 그 바리새인들의 사고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는 죽으면 천국 간다는 사고방식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신 예수님은 밀어붙여 놓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결말을 준비해 둘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어디서 나온 체험이냐? 본인이 인생을 살면서 너무 힘들잖아요. 모든 인간은 사는 게 힘들어요.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간주해놓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인간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을 그냥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뭔가 좋은 세상을 준비해 놓을 것이다, 고생에 대한 충분한 보답 같은 것, 보상 같은 것이 있는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은 열심히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서,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메시아가 와 가지고 자기를 데려간다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모두 합의를 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하나 놓친 것이 있었어요. 그들의 종교성, 열심히 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 종교성이 그게 사단의 생각이라는 것을 그들은 생각을 못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사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돼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해 드립니다. 사단의 생각은 참소하는 거예요. 참소가 뭐냐 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위반했다고 고자질하는 생각이 바로 참소고 고자질이고 그것이 사단의 생각입니다. 사람은 완전하고 남보다 더 바르게 살 때는 그만큼 하나님께 복에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끔 악마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다루어 왔습니다.
바로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악마가 아담을 선악과 따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은 악마의 인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자손들 족족 전부 다 악마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고 그 바깥으로 다른 생각을 일절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를 어떻게 만들었느냐?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거짓말하는 것은 나쁘고,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 죽이는 것 이것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것은 살인죄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악마의 생각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악마의 생각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방식을 사용한 거예요.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쁜 짓 하는 것이 마귀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마귀의 일이었던 거예요. 자기를 위하여. 그래서 바리새인의 종교는 뭐냐?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었던 겁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마지막에. 그게 종교에요 천주교고 기독교고 그게 종교라는 거예요.
악마는 불안에 떠는 깍쟁이들을 다 만들어놨어요. 그러나 성령께서, 진짜 성령께서 유발하는 것은 뭐냐? 내 안에서 예수님의 노선을 생산해 내는 겁니다. 감히 인간이 체험을 할 수 없었던 다른 체험, 다른 길로 가셨던 그 예수님의 체험이 이제 우리 체험이 된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과거를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도록, 지금 현재가 될 수 있도록 날마다 주님의 아픈 체험에 우리를 집어넣어 버렸다 그 말이지요. 그래야 이쪽 노선에서 옛사람의 노선에서 새사람의 노선으로 변경되었잖아요. 성도가.
내가 어떻게 철저하면 됩니까, 를 묻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살면 되느냐고 묻는 노선은 그것은 악마에 속한 노선이에요. ‘주님, 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어요?’ 이게 바로 새로운 노선입니다. 새로운 계열이에요. 죄라는 것은 나쁜 일이 죄가 아니고 나를 위하여, 나쁜 일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은 전부 다 이게 사단의 일이고 마귀의 일이에요.
교회는요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교회는 망하라고 교회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23장 14절에 나오는 이 말씀, 이것을 남의 말로 들으면 안 돼요. 거기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천국 문이 없다고 주님은 이야기하지 않아요. 천국 문이 있는데 이 땅에 사단의 앞잡이에 의해서 천국 문이 지금 막혀 있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야 되지만 사단이, 마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돼요. 사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이게 오늘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나옵니다.
악마는요, 천국 문이 있다는 것, 이미 있다는 것을 사단은 알고 있어요. 이미 있으니까 그 천국 문을 없앨 수는 없고 이제 마귀가 하는 일은 그 문을 막는 일을 하는 거예요. 천국 문을 막는 일을 하는 겁니다. 천국 문을 막는 일은 딴 게 없어요. 간단해요. 평소에 우리가 내 인생 살 때 누구한테 의지합니까? 본인한테 의지하잖아요. 구원받는 것도 누구한테 의지합니까? 자기한테 의지한다고.
‘내가 무엇을 행하면 구원받습니까?’ 자기한테 의지하잖아요. 그걸 그대로 장려하고 독려하고 격려하고 부추기면 그게 바로 천국 문을 스스로 막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목사가 잘못 가르쳤다고 목사 탓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양심, 여러분 자신이 자신의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있어요.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이 자신을 때치,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강림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대규모로 쳐들어오는 거예요. 강림이라는 것은 그냥 쳐들어오는 거예요. 수색영장 들고 쳐들어오는 거예요. 검거하러 오는 겁니다. 악마와 악마에 속한 자들을.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미리 봅시다. 4장 15절부터 보게 되면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절, 17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휴거지요)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뜰채로 건질 자는 건져내고 나머지는 다 불 심판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아까 설교할 때 뭡니까,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할 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 대목도 놀랍게도 성경에 나옵니다.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나란히 다 겸비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냥 있다 하니. 아무리 그들이 자신의 체험, 사람들의 체험과 체험들을 모아서 거기서 어떤 지혜를 끄집어내고 자연의 질서를 발견해 낼 때에 자연은 지금껏 그다지 큰 원칙에서 변동이 없었다. 이게 내린 결론이에요.
제가,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 안 한다 했잖아요. 그들은 심사숙고하고, 따지고 또 따지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진짜 우리가 믿을만한 것들을 우리 손에서 찾아내는 것, 발굴하는 것이 그게 인간들의 호기심이고 그게 인간들의 지혜의 작업이에요.
‘주의 강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세상은 지금껏 똑같이 돌아가고 있다. 서해에 오늘 지는 해는 내일 되는 동해에 다시 뜬다. 그 해가 그 해고 그 태양이 그 태양이다. 어제 잠잤던 내 몸은 오늘 아침에 그와 동일한 몸으로 왔다. 뭐가 달라진 게 있어? 세상은 그런 거야. 세상은 안 달라져. 똑같아. 가는 것이 똑같으니까 그 똑같은 것을 원칙을 끄집어내서 수학으로 함수화시켜서 방정식 만들어서 거기에 집어넣으면 세상은 인간들이 개발한 발견한 물리적, 생물적원칙에 의해서 꾸준히 영원히 영원히 수천 년 후에도 동일하게 그 원칙을 준수할 것이다.’
이게 과학정신입니다. 이게 다윈이 진화론이고요. 이게 지질학이고요. 이게 화학이고 이게 물리예요.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 킬로미터, 소빙하기 대빙하기를 언급하고요. 지구의 역사는 57억 년, 우주의 역사는 137억 년,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과학 질서는, 우리가 발견한 과학 법칙은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에 변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수학적으로 그 계산이 나온 겁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 과학적으로 통계적확률을 진실에 가까울 정도로 쪼개서 정밀하게 확률 99.9퍼센트까지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수학적으로 있습니다. 0.99999는 1과 동일하다고 그들은 확률적으로 이미 확신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지혜를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내가 아무리 의심해도 이 세상이 그대로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할 재주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그래서 40년, 50년 교회 다닌 사람들 결국에는 주께서 그만하자, 소리 듣고 본인이 알아서 그만둬요. ‘그동안 헌금 많이 했으니까 그만둬도 뭐 설마 천국이 있어도 나를 내치지는 않겠지. 도대체 온다온다 소리가 언제 적 이야기냐? 주님이 온다 해서 온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안 왔잖아. 자연 세계는, 차라리 자연 세계는 예수님보다 뉴튼이 옳았고 사도바울보다 아인슈타인이 더 믿을만하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니까요. 기도해서 코로나 물러간다고요? 백신 맞으면 될 문제를 무슨 기도가 필요해요? 믿을 것은 과학밖에 없어요. 거짓말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믿을 것은 과학밖에 없어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래. 그것이 바로 사단의 생각이었다. 가라! 가버려라. 이 편지의 세계에 들어오지 마라. 강림의 세계에 들어오지 마라.”
주님의 아픔을 유발한 그 바리새인의 생각이요 지금도 유효합니다. 심지어 우리 안, 우리 내부까지 유효해요. 바리새인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 한 사람을 죽여서 국가의 혼란을 방지한다는 것이 인간의 정치적 지혜의 최선이잖아요. 뭐가 잘못되었어요? 말썽꾸리가 하나 제거해서 다시 로마와 정상적인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이단 하나 솎아내면 찌꺼기는 솎아내면 되니까요.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인생에 뭐가 있어요?
우리는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아, 정말 탈 없이 살고 싶어요. 우리는 탈 없이! 안 그래도 힘든데 하나님까지, 복음까지 끼어들어서 그렇게 하기 싫어요. 바로 그러한 국가가 옛날에 있었습니다. 애굽나라였어요. 애굽나라, 거대한 나라의 바로라는 임금은 오직 국가가 정치적으로 통제되는 거기에 온 혼신의 힘을 다 했어요.
여기에 인간이 체험하지 못한 체험을 들고 망발을 일삼는 인사가 두 명이 있었어요. 하나는 모세와 그 형 아론, 모세 형제가 와서 하는 말이 뜬금없이 이야기합니다. “이 중에서 히브리인들을 따로 내보내겠다고 누가 이야기하더라.” 바로가 하는 말이, “누가? 누가?”
그 당시에는요, 노예가 공장의 기계였어요. 만약에 노예가 빠지면 공장이 안 돌아간다는 거예요. 코로나 이후에 미국 남부의 귤 농장의 귤이 썩어나가도 수확할 사람이 없는 이유는 외국 이주민들이 안 들어가서 그래요. 사람이 노동력이 없으면 모든 것이 중지가 되거든요. 국가의 경제가 스톱이 될 판인데 바로 왕이 기가 차서 “누구? 여호와?” 출애굽기 7장에서 “여호와가 누구~?” 놀리고 있습니다.
모세는 두고 보자, 하고 그냥 갔지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그 밤을 성경 출애굽기 12장에서는 ‘여호와의 밤’이라고 해요. 여호와께서 자기 노선을 인간 노선에 집어넣었던 그 날 그 밤에 헬리콥터 레펠 타고 내려오는 수많은 특수요원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게 되면 야곱이 꿈을 꾸는데 거기 사다리가 있고 거기서 웬 한 떼쓰리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되게 바쁘게 설치고 야곱을 향하여 집중하고 있습니다.
야곱을 향하여 집중할 때 그때 야곱이 본인이 야곱인 줄 알았지요. 나중에 야곱이 아니었고, 개인이 아니고 나중에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특수한 기능과 신분을 맡기는데 그 특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될 기능, 직분은 뭐가 되느냐? 바로 천사들이 해야 될 이 땅의 심판의 기능을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에게 떠넘기기 위해서 일단의 천사들 떼쓰리가 야곱에게 몰려온 겁니다.
그 천사의 집단을 ‘마하나임’이라고 이야기하고 마하나임은 번역하면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군대의 그 원형은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상시적으로 정규군을 하늘나라에 양성을 해버린 거예요. 생명을 못 따먹도록 하기 위해서, 영생 영생을 못 따먹게 하기 위해서 체류했던 그 군대가 하나님의 언약계통을 통해서 지상까지 확대가 된 거예요. 그 취지가.
밤중에 몰래 레펠 타고 내려온 그 사람들, 일본 사무라이처럼 내려와서 등 짝에, 제가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등 짝에 칼 한 자루씩 찼는데 그 칼이 얼마나 마광(磨光)이 되었는지 달빛에 번쩍번쩍 달빛에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어 가지고 죽이는데 죽이는 조건은 뭐냐? 어린애는 살려줘라, 여자는 연약하니까 살려줘라, 그게 없어요. 어린애고 젖먹이고 간에 그 집안의 맏이는, 맏아들은, 딸은 놔두고 맏아들은 다 죽여버려라. 살벌한 밤이었습니다, 그 밤이.
신명기 2장 34, 35절에 보면 그날 밤 그 천사의 기능을 이스라엘이 부여받았어요. 신명기 2장 34절 오늘 설교에서 핵심구절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오직 그 육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여기 보면 34절에 “그 남녀와 유아와” 어린아이 젖먹이 어린아이까지 싸그리 다 죽여버린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이. 누구를? 정복하는 그 성에 있는 모든 유아 그리고 모든 토착민 열 족속의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다 죽여버린 거예요.
왜 이렇게까지 합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들이 인생에 각자 작은 그림은 있어요. 작은 그림은 있는데 큰 그림, 큰 그림이 없는 거예요. 부분은 전체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체를 새롭게 확 갈아엎으려고 하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따라서 영으로 난 자만이 영이 되기 때문에 육을 갈아엎으려고 하는 거예요. 육을 다 없애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육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처참하게 죽여야 됩니까? 사정없이 어린아이까지. 그 새끼들까지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나름대로의 윤리와 도덕을 장착하고 그리고 종교까지 만들었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강림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위에, 하늘에 지붕이 뚫린 거예요. 그동안 인간들은 갇혀 있었던 겁니다. 선악체제에. 조상이 한번 잘못 발들인 그 선악체제가 그게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사적인 작은 그림으로서는 주님의 큰 그림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이 도대체 납득이 안되어서 예수님을 밀어붙였는데 어디까지 밀어붙였는가? 예 수님을 죽는 데까지 밀어붙인 거예요.
뭘 놓쳤습니까?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그것은 놓쳐버렸어요. 살리시고 다시 승천해버렸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3, 14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들린다는 말은, 죽은 나를 무덤에서 뽑아내서 아버지께서 뽑아내서 나를 다시 하늘로 들어 올라가게 하신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체험에서는 나올 수 없는 계획이거든요. 이 계획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에서는 뭐냐? 그게 왜 계획이 없는가? 네 전체가 큰 그림으로 봐서 인간 전체가 어두움에 푹 갇혀 있기 때문에, 어둡기 때문에 빛을 빛으로 보지 못했다고 그렇게 요한복음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발 살면서 엄살 부리지 마세요. 죽는 것도 싸요. 우리는 죽어도 싸요. 뭐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것, 엄살입니다. 전부 다 엄살이에요. 인간이 살면서 당한 수모, 내가 당한 수모는 주님이 당한 수모에 비하면 이것은 작은 그림이에요. 부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 했던 그 직능은 실패했거든요. 그 실패한 기능을 그대로 인수 받은 자가 누구냐? 새로운 피조물, 성도들, 저와 여러분들이 그걸 인수 받았어요. 성도라 하는 것은 그냥 신선놀음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나 성도가. 그냥 세월을 낚고 요리나 해 먹자, 동양화 병풍 보면 나오잖아요.
병풍의 동양화 보게 되면 사람이 나오는데 풍경은 커다랗게 그리고 사람을 작게 그렸는데 사람의 얼굴도 잘 안 보여요. 왜? 삿갓을 너무 깊게 눌러 써 가지고. 그냥 낚시나 보고 있는 거예요. 신선놀음이에요 그냥. 세월아 내월아, 시간의 의미도 모르고 그냥 대자연 속에 묻혀 살면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느뇨, 이런 식이에요. 지붕 뚫린 것은 모르고.
묻지도 따지지 않고 집집마다 큰아들 사무라이 칼로 다 죽이고, 또 젖먹이고 애고 남자고 여자고 다 죽여버리는데 그것도 모르고 마귀가 세팅한 그 세팅 있잖아요, 악마가 세팅한 그것 ‘너 개인적으로 착하게 살았어, 악하게 살았어?’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착하게 살면 너는 복을 받으리라’ ‘예 썰!’ 우리가 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이것이 전부였어요. ‘죽으면 끝이다. 그 뒤에는 가만 있으면 돼.’
죽으면 끝이 아니었습니다. 강림이 있었습니다. 아까 강림,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봤지요. 데려갈 자만 데려가고 나머지는 다 불바다 만들어요. 이러한 강림 이전에 주께서 먼저 하신 것이 요한계시록 9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9장에 보면“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마귀와 귀신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강림 이전에 모든 것을 깔끔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악마한테 매인 자들로 하여금 악마와 네가 단짝이라는 것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거짓말할 줄도 모르고, 세상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베드로후서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돼요. 그들은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 그들의 말이 맞아요. “세상은 그대로 아무 일 없다. 그대로 가만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옛날에는 물로 한번 작살났잖아. 이제는 불로 작살난다.” 그러는 거지요.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하는 말이, “옛날에 물로 홍수 났다는 소문이 있지만 다시 정상화 되었고 불로 심판받는다는 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현재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데 그게 구라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렇게 나와요. 불신자들은.
그래서 불신자들이 맞지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 그 말을 하는 게 맞다 그 말입니다. 제 말은 그게 진리라는 뜻이 아니고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주님의 노선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죽음의 의의와 의미를 모르니까 일상적 의미만 품고 살아가는 거예요. 나 편하면 그만이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신선놀음하면 그만 아니냐.
그러면 구약 때 이스라엘의 그 기능은 어디서 찾습니까? 수사요원인데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성령을 준 것은 예수님 살해사건에 수사요원으로 파견해서 범인색출에 나서라고 준 거예요. 그냥 하루하루 놀고 시간이나 때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누가, 왜, 뭐 땜시로, 뭐 때문에, 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자기가 하는 일상과 관련해서 그걸 찾아보라 그 말입니다.
그 정답은 제가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잘못은, 내가 거짓말하고 나쁜 짓 간음하고 그게 아니라 나의 모든 매사가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산다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살해당했어요. 나 때문에.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요, 나를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내가 파괴되는 게 신앙이에요.
어떤 사람이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떠나지 마라
슬픈 9월엔
꿈에라도 내 안에서
쉴 수 있도록
<9월에 떠난 사랑> 유익종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떠나지 마라 슬픈 9월엔~” 그다음 내용이요 “꿈에라도 내 안에서 쉴 수 있도록~” 이게 바로 사단의 사람이에요. “꿈에라도 내 안에서 쉴 수 있도록.” 그 비슷한 가사가 또 있어요.
옛사랑 간곳없다 올리도 없지마는
만날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간다
가고 또가면 기다린 그날이
오늘 일것 같구나.
<고목나무> 올리도 없는데 무작정 기다린다는 그 노래. 지금은 그 노래 부른 사람이 목사가 되었습니다만, 목사는 되었는데 신자가 되었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목사는 일단 되었어요. 올리도 없지마는 무작정 그 고목나무에서 옛날 첫사랑을 기다리는 거예요. ‘주님이 올리도 없지만 일단 강림을 한번 기다려보자.’ 이게 불신자 아닙니까? 이게 자기 구원을 위하여 주님의 강림을 이용하겠다는 사고방식 아닙니까? 내 구원만 챙기면 끝나니까.
강림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면 세상 전부가 오직 자기 편한 것밖에 몰라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지적하라는 말이 아니고 세상 편하게 만드는 그것이 나한테 내 마음 한구석에 이게 유일한 진실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 욕할 이야기가 아니라 나보고 내가 욕할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눈만 뜨면, 마음만 먹으면 나 편하면 되지, 나 건강하면 되지, 그걸로 끝난 거예요.
‘주님 강림? 올 리도 없지만 일단 기다려보면 손해는 나지 않겠지.’ 뭡니까? 이게 내 속 편하면 그만이라는 뜻이에요. 강림은요, 주님의 복수감행이에요. 복수하겠다는 거예요. 복수는 누가 할 수 있느냐? 자기 예언을 박살 낸 자에게 복수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유일하게 예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었고 그 예언을 누가 박살 냈는가? 누가 여러분을 위로해주지요? 여러분!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일상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약속을 지금도 교회 나오면서 박살 내고 있는 거예요. ‘나 편하면 되지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당신은 나한테 행복만 주면 그만이야.’ 이것이 우리 속에서 매일같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립니다. 성도란 내가 갖고 있는 체험, 내 체험과 육의 체험이지요, 주님의 체험이 간격이 벌어지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마귀 말 듣지 마세요.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이 완전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간격을 벌어지게 하는 겁니다.
벌어지게 되면 내가 쪼가리 나잖아요. 내가 쪼가리 나니까 우리는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게 한계에 봉착되는 겁니다. 아, 나는 내가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실패로 끝나게 해주시는 이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고마워하는 거예요. 내가 잘라낼 수 없는 나를 가위로 산산조각 내주시는 이 은혜의 고마움.
다시 쪼개진 나를 다시 붙이지 마세요. 붙이면 사달납니다. 그걸 붙이게 되면 오늘 본문“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 말이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주께서 지금이라도 사무라이 칼로 죽일 수 있는데도 살려주는 것은 아직까지 그 간격 벌어지게 해서 세상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보면서 우리가 이런 일상의 의미로부터 벌써 이탈되고 벗어난 사람이라는 그 능력,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감사하라고 우리를 계속 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본성이 강렬합니다. 주님, 주님, 하지만 위선 같고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복음 이야기하지만 복음을 나의 이익을 위해서 써먹는 용도로 사용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 그것이 바로 파괴되어야 될 우리 자아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이 깨달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