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여성성

아빠와 함께 2021. 11. 28. 22:05

여성성 

2021년 11월 28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6

(4: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4: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이방인들과 다른 삶을 보여주는 성도입니다. 거룩이란 ‘구별됨’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의 기초적인 삶은 마태복음 6:31-32의 말씀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그저 자신의 생존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4에 나오는 말씀을 보세요. 그들은 음란한 자들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음란이나 간음이란 이미 혼인한 자에게 성립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중에서 이미 자신의 신부가 될 자를 점지하셨고 그 자들을 데려오려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신부(新婦)란 필히 남편을 지향합니다. 바라보며 삽니다. 이는 자기를 바라보며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빈번하게 이스라엘을 자신의 신부라고 간주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 2:16) 여기서 간음이나 음란의 원형적 뜻이 펼쳐집니다. 이 개념 속에서 창조 때의 비밀이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남자는 여자없이 홀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없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남자는 자충(自充)적 존재라서 홀로 충분한 자아가 되려고 한 반면에 여성은 자신의 빈 자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마저 채워 ‘한 몸’이 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 처음에는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이 ‘하나됨’이 깨어집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남성성’을 추구하고 되었습니다. 남성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단독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남성성’과 대비되는 개념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성성’입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 이 범죄한 세계를 이끌고 가면서 상호 대립되는 요소를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은 소속에 관한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고 반대편에서 ‘뱀의 후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이 약속이 무의미하지 않는 것은, 여자의 이름을 ‘생명’으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남성의 이름‘흙’입니다. 곧 물질로 폐쇄될 존재입니다. 여성성의 등장은, 스스로 결코 온전히 되지 못할 존재의 등장이며 이곳에 바로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성성은 누구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것은 남편되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그 어떤 사람도 이런 여성성이 상실되어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면 그 사람은 남성성에 속한 인물입니다. 비록 여성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성성을 갖지 못한 여성은 남성이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인생 모델로 여기고 갖고 싶어합니다. 이 세상ㅇ디란 남성의 동의가 표준으로 통하는 세계인고로 모든 사람들은 남성성의 유혹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남성성이란 항상 후퍠하고 파멸적인 힘이 작렬하는 영역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를 만나게 되는데,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바로, 권력의 맛이요 대중들의 인간의 맛이요 여유로운 생계 대책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유혹을 받는다면 여전히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제 자리를 확보하고 위해 조달되는 것이 ‘남성성’입니다.

‘남성성’의 특징은 내가 나로 인하여 충족되는 성질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남성의 세계입니다. 창세기 4:23-24 에 가인 후손의 세계가 나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즉 ‘나는 내 가진 것으로 충분하고 그런 식으로 생을 살아왔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 결코 ‘여자의 후손’의 요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남성성’으로 꽉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혼인을 통해서 남성성, 곧 나만의 행복상태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혼인이 도리어 세상 고난을 자초한다고 말씀하십니다.(고전 7:32-33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간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는 혼인을 통해서 여성성을 어떤 식으로 구원되는 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남성적 세계에서 전혀 보탬이 못하는 여인이 어떻게 율법을 통해 천국의 경계선까지 이르는가를 말해주십니다. (마 22: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곧 세상 남성성에 보탬이 못되는 여성성을 통해서 천국이란 이 세상의 남성성과 완전히 반대가 되는 세계임을 말씀해주십니다. 가정도 모든 곳이 이 세상은 힘의 세계, 곧 기업이요 회사가 되고 말랐고 모두 자본시장에 휘말려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남성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자신의 얼굴, 자신의 머리, 자신의 지휘통제소를 남편되시는 주님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몸으로만 움직이야 합니다. 왜나하면 거룩이란, 주님께서 스스로 주님을 드러내시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거룩이나 경건이나 나의 구원을 위한 온점함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여성성)21112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종말로’라고 하는 것은 ‘끝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런 뜻입니다. 세상 끝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편지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정돈된 내용을 너희들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표출하라. 그것을 드러낼 때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3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너희를 통해서 방출하게 되어 있다.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그다음에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는 4절의 말씀이 나오지요. 성경에서 우리의 전부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남편을 취할 줄을 알고’가 아니고 “자기 아내를 취할 줄을 알고” 그다음에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아는데 몇 가지 필요한 개념들이 나옵니다. 이방인같이 되지 말라. 이방인과 성도의 차이점을, 네가 그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떤 인간입니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전부에요. 갑자기 우리가 이방에서 못 벗어난 느낌이 확 들지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그런 것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방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내가 명령이고 뭐고, 하나님 뜻이고 뭐고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예요. 솎아내니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양과 염소,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야 되거든요. 3장 13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를, 주의 날이 올 때를 생각해 볼 때 주의 날과 결부된 하나님의 뜻, 거룩, 이것은 뭐냐? 이방인 솎아내기. 이방인은 못 들어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형제들이니까, 성도지요, 성도가 아니면 형제라는 말을 못 붙이지요, 형제들이기 때문에 그들 속에서 이방인이 아닌 요소가 나오고, 음란이 아니고 그리고 간음이나 색욕이 아닌 그런 요소가 너희들에게서 필히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나오는데 나올 때 결혼한 자들에게 이제 말하는 거예요. 대부분이 결혼했으니까요. 그때는 강제로 다 결혼하는 거니까요.

4절에 보니까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자기의 아내를 취하는 그 사고방식이 이방인들이 아내를 취하는 방식과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아내 취하는 것과 성도가 아내 취할 때는, 아내를 가질 때는 그 아내 속에서, 아내와 결혼한다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창조 전에, 창조 때 있었던 그 비밀,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그 비밀이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아내를 취한다는 것, 이러한 것이 주의 뜻이 되는데 과연 아내 취하는 것이, 결혼하는 그것이 주의 뜻이냐? 그것이 아니고 아내 취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이방인들과 다른 하나님의 거룩한성도들, 성도 자체가 거룩한 사람들이니까요, 거룩한 사람의 거룩한 태도가 아내 취하는 그 것을 통해서 내가, 사도바울이 ‘멀리서도 너희들 다 알아’ 하는 식으로 편지를 보낸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것이 참 어려운데요. 아내들이 남편을 취할 때 네가 하나님의 성도답게 취하라. 그 이야기를 안 하고 있어요. 이게 창조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3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여성이 남성 없이 홀로 있었던 적이 없어요. 여성은 없는데 남성만 덜렁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게 아담이 여자 없이 먼저 창조되었습니다.

이게 창조의 비밀과 오늘 본문에 아내 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아내들이 남편 취하는 것 아니고요, “남편들아” 남편한테 묻는 거예요. 여자가 없을 때, 남편만 있을 때 남편보고 묻는 거예요. 남편들아, 장차 너에게 아내가 있을 때, 그 아내 취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고 하나님의 뜻을 품어서 취할 줄 알아야 그것이 나중에 주의 강림하실 때 성도로 분류가 된다는 겁니다. 이방인과 다른 거니까요. 이방인들은 천국에서 탈락이니까요.

그러면 그 남자, 그러니까 여자한테 묻는 게 아니에요, 남자한테 묻는 거예요, 남편에게 묻는 겁니다. 물을 때 그 거룩함과 존귀함을 어디서 찾는가 하면, 음란과 색욕 또는 간음, 이런 것에 대해서 성도가 성도답게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그때 티가 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뜻이.

여자한테 묻는 게 아니에요. 남자한테 묻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남자 없이 여자였던 적 이 없기 때문에. 여자는 태어나고 보니까 벌써 아담이, 먼저 선방 날렸다, 그식으로 먼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남자는 뭐냐? 나는 나만 있으면 되는데 여성에게서 나는 뭐냐 하면, 남성과 비교해서 나는 뭐냐, 가 돼요. 이것은 여자가 종속적이고 예속적이고 의존적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반해서 남성은 뭐냐? 자충적(自充)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분하다고 여길만한 것이 남성입니다. 이 남성이 범죄하고 난 뒤에 어떻게 뭉개지는가? 그 내막을 성도라면 알아야 돼요. 아내 취한다는 말은 뭐냐? 아내가 피해자로 등장하고 아내가 연약한 자로 등장해서 직접 아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대상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왜? 여자는 남성 없이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여자는 항상 그 옆에 남성의 자리를 전제로 하고 여성이 되는 거예요. 이 여자는 뭐냐 하면, 자기가 의지해야 되고 종속 되어야 될 대상을 기대하고 그리워하고 고대할 입장에 있습니다. 뭔가 여지가 있어요, 여성은.

그러나 남성은 건방지기 짝이 없습니다. 왜? 나는 내 몸 하나로 충분하니까요. 내 몸 하나로 충분해요. 여자는 결혼하기 전과 달라서 결혼하고 나면 남성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에 내 남자의 자리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남자는, 물론 철딱서니 없는 남자겠지만, 남자는 오늘도 취미, 내일도 취미, 모레도 친구 만나기, 그게 전부에요. 왜? 내 몸 하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자충적 존재예요. 여성은 결합을 원하지만 남성은 여성을 소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짜 좀 더 기다렸다 해야 돼요. 왜냐하면 지금 늦게 오시는 분이 있어서.

창조에 남자 여자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거기에 어떤 개념을 강제로 뒤집어씌웠느냐 하면, 남자와 여자를 하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라고 이야기했는데 남자는 나 홀로 하나라고 이해하는데, 범죄하고 난 뒤에 그런 큰 착각에 들게 됩니다. 분명히 여자 남자가 있어야 이게 하나인데 남자는 나 혼자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시건방짐을 떨게 되는 거예요. 결혼해서 맨날 취미 생활이나 하게 되면 결혼 왜 했습니까? 결혼 왜 했어요? 뭐 월급 안 줘도 되는 하녀 구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는 창조의 비밀을 어디 한테 맡겼느냐 하면, 남성에게 맡기지 않고 여성에게 맡겼어요. 여성에게 맡겨서 여성에게서 새로운 남성이 나와요. 그게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아들이에요. 그 여자의 아들이 다시 뭐가 되느냐 하면, 여성성이 되는 겁니다.

여성성에서 출발해서 남성이 되고, 남성에서 출발해서 다 여성성으로 돌아가요. 여성성은 뭐냐 하면, 결함의 존재예요. 이 땅에서 자충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을 이 땅에서 충족할 수가 없음을 증명하는 존재가, 그걸 확인하는 존재가 여성입니다.

구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자꾸 여성이라고 들이대십니다. 자꾸 이야기해요. 이사야 54장 5절에 보면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남편을 기다려라. 이 세상에 남편이 없다 그 말이에요. 예레미야 3장 14절에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남편을 거론해요.

그리고 시편 같은데 보면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시온의 딸들아”라고 해요. 시온의 딸. 여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남자, 여자가 이미 범죄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계속해서 전개해 나가느냐 하면요, 여성성을 동원해요. 여자가 아니고 여성성이에요. 여성성의 특징은 뭐냐? 연약하고 의존적이고 종속적이에요. 항상 자기의 빈자리가 있어요. 그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으면 자기완성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게 여성성입니다.

그러면 여성성이 등장하게 되면 반대 것이 나오지요. 그게 남성성입니다. 남성성은 나로 인하여 그걸로 충분하다고 우기는 세계입니다. 그 여성성이 등장하고요, 여자의 후손의 반대말이 뭐냐? 뱀의 후손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남자든 여자든 남성성의 매력을 느끼고 유혹을 느낍니다. 여자라도 예외가 아니에요.

이 세상은 남성이 동의하는 그것이 표준이 된 세상이에요. 남성이 동의하는 것, 남성이 갖고 있는 것이 여성에게, 여자의 일생에서 자기 인생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남자가 가진 것 왜 여자가 못 가져?’ 이런 식이에요. 그게 여성성이 아니고 그것은 남성성을 추구하는 여자들이에요. 남성성을 추구하는 여자들.

여자가 트랙터 몰고요. 남성들이 하는 직업 다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목사도 여자가 하겠다고 덤벼들어요. 유혹이라는 것은 간음, 음란, 다 유혹인데 유혹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제자리를 못 찾은 겁니다. 제자리를 못 찾기 때문에 계속 찾고 있는데, 찾는데 뭘 동원 시키느냐? 남성성을 동원 시켜서 제자리 찾고자 시도하는 것 그게 바로 유혹입니다.

그래서 남성성을 찾아서 이제는 만족하다, 나는 스스로 족하다. 그것은 여러분, 유혹을 이긴 그것이 바로 유혹이에요. 유혹을 이긴 것이 유혹에 넘어간 거예요. 여성성의 특징은요, 늘 이 세상 것으로 결핍되어 있어야 돼요. 그리고 내가 남한테 종속되어야 됩니다. 의존해야 돼요. 종속이라는 말은 그쪽 없으면 나도 없는 게 종속이에요.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이 속으로 한번 맞춰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창조주가 이 땅에 오셔서 죽었습니다. 창조하신 분은 이 땅에서 사라졌는데 인간들은 왜 안 사라지지요? 이거 궁금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제작자는 사라졌는데 제작물은 그래도 있다는 이게 말이 돼요?

제가 어릴 때 영화관이 다 후졌어요. 그 후진영화관 중에서 더 3류가 있었습니다. 천정은 있는데 쏠려서 비가 오면 앞으로 비가 떨어지고 의자도 없이 거적때기에 앉는 그런 극장, 60년대나 70년대초 대구의 칠성극장, 대구에 오래 사신 분들은 다 알 거예요. 칠성극장이 얼마나 후진지. 거기다가 화면상에서 수직으로 비가 내려요. 지지직, 하면서.

그것도 극장이라고 그나마 볼거리가 없어서 거기에 앉아 있는데 누가 영사기 전기선을 건드려서 빠져버렸어요. 화면에서 온갖 즐거운 것들로 신나 있는데 누가 선을 건드려서 코드가 빠져버렸어요. 그 좋던 것 한꺼번에, 일식 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창조주가 죽었으면 창조주가 죽는 순간 모든 인간도……, 그야말로 창조주잖아요, 창조주. 자기가 만들었잖아요. 창조주가 없어지면 같이 다 없어져야 돼요.

그러면 남아 있다는 것은 뭐냐? 이거 뭐 가짜지요, 가짜. ‘창조주가 죽든 말든, 이순신 장군이 죽든 말든 나만 있으면 되지’ 이거 가짜거든요. 이거 가짜에요. 하나님이 무너지면 우리는 무너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남성이고 여성이고 다 무너져야 되고 주께서 무너지는 가운데 새로이 창조를 할 때 그때는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 아니고요, ‘여성성’부터 출발해요. 그게 여자의 후손이에요.

물론 노래 가운데 같이 무너지면 안 되는 노래가 있어요. 다섯 명 중에서 세 명 앉고 두 명 일어서고, 그리고 다시 세 명이 일어서는 그런 노래가 있어요. “get, set, ready go! everybody~!”크레용 팝, 50cc 오토바이 모자 쓰고 춤추는 그것 있지요. “점핑! 점핑! 다 같이 뛰어뛰어! 엄마도 파파도 같이 go~!” 그런 노래가 있어요. 두 명은 일어서면 세 명은 앉고 그렇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크레용팝이 아닙니다. 창조주가 죽었으면 이것은 무슨 시그널이냐 하면요, 네가 멀쩡히 살아서 나 잘났다 해도, 그리고 서 있어야 봤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쳐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창조의 비밀, 최초의 인간이 뭘 따먹었고 사달이 어떻게 났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여성성을 집어넣습니다.

그게 뭐냐? 여자의 이름이 그다음부터는 생명이 돼요. 생명은 남성성에 있는 게 아니고 여성성부터 출발합니다. 하와의 뜻이 생명입니다. 이 생명 되는 하와, 그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아내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아내는 피해자입장에서 이 땅에 등장하는 사람이에요. 피해자입장에서.

남자든 여자든 이 땅에서 아내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여성성이 네 안에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남자보고 아내와 결혼하라고 한 겁니다. 여성성이 네 안에 있는지. 성경 볼 때 참 어려운 대목 중 하나가 그거예요. 뭐냐 하면, 지금 오늘 본문에서는 거룩함으로 아내 취하라고 했잖아요. 지금 우리는 거룩함의 의미를 몰라요. 거룩함이라든지 주의 온전하신 뜻이라든지 존귀함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 뜻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간음과 음란이라는 환경을 일부러 조성하고 거기에 전부 다 집어넣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도 간음과 음란의 상황을 통과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간음과 음란이라 할 때, 나는 지금까지 바람 피운 적이 없다고 얍삽하게 빼지 마세요. 그것 빼버리면 하늘나라에서 배격됩니다. 제거돼요.

음란과 간음은 이것은 ‘다는 아니고’가 아닙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이 거기에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남성성으로 인하여 여성성을 고려하지 못한, 여성성이라는 종속적인 존재, 피해적인 존재를 고려하지 못한 모든 인간의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이 이방인적 요소가 다 간음이고 음란이라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16장 4절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요. 예수님께서 지금 마태복음 신약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구약에서 계속 흘러내려 오는 것이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 이스라엘 가지고 여성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여성. 스스로 자충할 존재가 아니라 그 말입니다. 너는 누구를 기다리라고, 하나님을 신랑이라고 여기고 기다려야 되는 입장에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 이스라엘이 간음했다는 것은 뭐냐? 남편을 바꿔치기한 거예요. 남편을 왜 바꿉니까? 남편이 권세를 가졌잖아요. 힘을 가졌잖아요. 그게 바로 남성성이에요. 그게 바로 유혹이었던 겁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여유로운 생계대책 그리고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것, 그 인기의 맛, 그리고 권력의 맛, 이거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은 세 가지입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여유로운 생계대책, 그다음에 대중들의 인기의 맛, 세 번째 시험은 권력의 맛, 이게 바로 세자로 합치면 남성성, 이게 남성성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이것 달라고 환장하지요. 이거 있어야 산다고요. 그래서 이 세상 전체가요, 남성성 맛에 들어버렸습니다.

창세기 4장에도 나와요.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후예가 나오는데 가인의 후예가 갈수록 남성성이 극도로 심해집니다. 그 심화된 내용에 대해서 라멕이라는 왕이 뭐라고 하느냐? 창세기 4장 23, 24절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아내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내는 자기 소유물이니까요. 라멕은 스스로 자충된 존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그 말이에요. 그게 바로 남성의 세계입니다. 남성성의 세계에요. 남성성의 세계는 권력을 다 갖고 있고, 힘을 갖고 있고, 돈을 갖고 있고, 세상의 모든 인기를 다 갖고 있으니까 어느 여자인들 그걸 안 부러워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 여자는 여성성에 빠진 게 아니에요. 남성성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서는, 이걸 광야에서는 유혹이라 하지만 인간은 유혹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리를 그런 힘으로 메우려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남성성을 뚫고 탈출할 수 있는 어떤 아이디어가 이 세상에는 없어요.

그렇다면 간음과 음란 속에 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기에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 탐심, 그 뿌리가 동일한 뿌리라는 거예요. 그 뿌리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땅에 있는 지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네가 성도라면 너에게 살인하라, 너를 죽여버리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지요.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율법대로 한다고 돌로 쳐 죽이려고 돌을 들고 왔잖아요. 거기서 주님께서는 땅에다 무슨 글을 쓰셨는데 그 글 내용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그 현장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현장성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현장성이! 백날 지식 알아봐야 현장에 들어가 봐야 알아요. 현장성에서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들고 있는 그 짱돌 있잖아요. 그 짱돌을 저 여자보고 치지 말고 네가 너보고 쳐라. 그 말이지요. 네가 너보고 돌로 치라. 그게 율법이라는 겁니다.

율법은 짱돌 들고 남을 치는 게 아니고 나를 치는 거예요. 죽으라고 치는 거예요. 땅의 지체를 죽으라고 치는 거예요. 음란이고 탐욕이고 전부 다 나 자체가 우상을 섬기니까 남성성을 섬기니까 돌로 치라는 거예요. 돌로 칠 용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 내뺐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묻습니다. “왜 너는 도망 안 가지?” 간음하다 잡힌 그 여인보고 “너는 왜 도망을 안 가느냐? 왜 자리를 안 피하느냐? 너도 죽으려고 했느냐?” 여자가 다시 그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여자에게 역할이 있어요. 그게 뭐냐? 움직이는 용서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 여인보고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것은 다시는 네가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은, 이게 전환이 된 거예요. 남성성에서부터, 모든 간음과 음란, 이것은 남성성부터 시작하니까 남성성을 추구하던 여인이 이제는 주님 없이는 못사는 여성성으로 바뀐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나로 충족하려고 했던 존재가 주님의 용서 없이는 못사는 존재로 바뀐 거예요.

그게 주님이 남편 되는 거예요. 주님이 남편. 주님이 남편 아닌 모든 남자 여자는 전부 다 간음한 자요, 음란한 자에요. 시온의 딸이니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이니까요. 따라서 그 여인이 다시 간음하고 안 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다시 간음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뭘 감사하느냐 하면, 감사한 마음으로 뭘 하느냐?

‘저 용서 받았어요’ 어딜 가도 ‘용서받았어요’ 나는 이런 존재였는데, 이렇게 남성성을 추구해서 그게 나를 정립할 수 있는 스스로 만족하려는 남성성의 노예가 되었는데 주님께서 그런 남성성을 나에게서 빼내서 이제는 주님만 고대하는 여성성으로, 주님의 신부로 달라지게 했어요. 이게 주님의 용서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아내예요, 이게! 이게 아내라고요.

그래서 부부라는 것은, 이 부부가 한 몸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성립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둘 다 여성성을 가질 때나 부부가 돼요. 둘 다 남성성을 가지고는 부부가 안 돼요. 둘 다 여성성이어야 돼요.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지금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냐? 부부가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비밀이 크도다’라고 했어요.

둘이 한 몸이 되는 것, 둘이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본질상 두 개의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어야 그게 하나의 본질에서 나온 두 사람인 것을 비로소 알거든요. 여성성을 가진 아내, 여성성을 가진 남자가 비로소 둘이 동일한 본질 때문에, 여성성이라는 본질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되고요. 왜? 여성성 때문에 남자가 여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당신은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여성은 어떻게 하느냐? 여성은 자기의 얼굴을 남편에게 넘겨야 되지요. 얼굴이라 하는 것, 머리라 하는 것은 지휘통제소입니다. 내가 의존적이고, 종속적이고, 남편만 기다린다면 자기의 머리 부분을 넘겨야 되고, 주님께 넘기고 자기는 몸만 있어야 돼요. 그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되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권총으로 자기의 이 머리통을 날려버려야 됩니다. 총을 쏴서. 요즘 이상하게 과격해져요. 지난 수요일에는 전기톱이 다 나오고요. 이 머리가 문제에요. 내가 나한테 지시, 명령한다는 것이 이게 남성성이거든요. 이걸 날려보내야 돼요. 이 남성의 세계는 힘의 세계입니다. 이방인들은 힘밖에 몰라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문제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그것을 왜 하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뭐냐?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니까 나를 위한 나라, 나를 위한 의는 이게 머리통이 날아가지 아니하면 이게 지옥 가요. 나를 위한 나의 의, 나의 나라, 이런 인간이 지옥 간다고요. 나의 구원, 이런 것.

“나는 뭐 마음속으로 간음했지만 절제력이 뛰어나서 실행에는 못 옮겼습니다.” 자랑이다! 그거 지옥 가서 자랑해요. 영원한 불 속에서 그거 자랑하세요. “나는 마음속으로도 간음이 안 일어나요.” 그런 인간이 있거든요. 병신이에요? 여러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남성성을 갖고 있는 자기가 자기를 지켜서 천당 가려는 사람에게 이게 성립됩니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른다? 벌써 풍 왔어요?

날 위한, 나 스스로 완성을 이루는 그러한 성경 말씀을 준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맘속으로 음란을 안 해도요, 간음을 안 해도 꿈에는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꿈속에선 보이나봐~ 꿈이니까 만나나봐~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 꿈속에만 있는가봐~” 당신은 꿈속에 삽니까, 하는 <생각이 나>라는 부활의 노래입니다. 부르는 것은 생략하고요.

얼마나 보고 싶은지 당신은 꿈속에 다 나와요. 꿈속에서 본 사람하고 실제로 본 사람이 달라요. 그리워한다는 것은 세상 것으로 마저 채우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유혹을 초청하는 거예요. 성령의 일이 뭐냐? 주의 일이 뭐냐? 복음의 일이 뭐냐? 심방하는 게 주의 일인지 알아요? 기도하는 것, 예배 참석하는 것이 주의 일이 아니에요.

성경 공부하는 것이 주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은 뭐냐 하면, 내가 죽음에 대한 절박함으로 나서지 않으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나 이 일 하다가 내가 죽을게.’ 이거 아니면 복음의 일이 아니에요. 설교자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남한테 성경 가르치는 것이 설교자가 아니고, 자기가 죽어 마땅함을 조리 있게 말하는 그것이 설교자예요. 그것도 매일 달리해서. 내가 오늘로 인생 끝내야 될 이유를 조리 있게 말하는 그것. 더 이상 살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이 세상은 힘의 세계라서……, 골로새서 3장 5절 다시 보게 되면, 이 세상은 힘의 세계거든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 숭배라는 말은 새삼 설명 안 해도 돼요. 왜냐하면 구약에서 ‘내가 남편인데 너희들은 바알을 네 남편으로 섬겼잖아.’ 이게 호세아 2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호세아 2장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바알이 힘을 가진 거예요. 아까 본대로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힘 이야기했지요. 권력의 맛, 힘 맛.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아내를 거론할 때 사람들은 다 결혼을 해요.

그런데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평소 생각이 뭐냐 하면, 결혼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편지할 때 아내에 대해서 언급하고 에베소서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목숨 바쳐라, 그렇게 하지만 사도바울의 속마음은 사실은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다 나옵니다. 네가 결혼한다는 것은 사서 고생한다는 거예요.

7장 27, 28절에 보게 되면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벌써 이 말투를 보세요. 말하는 투를 보세요. 장가가는 것이 죄짓는 것도 아니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난 뒤에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세상에, 결혼을 하다니, 내가 기혼남자가 되다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할 때 주님께서 어깨 탁탁 치면서 “장가갔다고 너무 자기를 책망하지 마” 이런 거예요.

지금 “아빠, 장가보내줘.” 환장한 것이 아니고요. “장가갔어? 너 시집갔다고? 아이고 참 어째 그런 실수를 다 하냐. 결혼이라는 이 실수를. 너 남성성, 스스로 네 것 만족하려는 그 자세 그거 어쩔래? 너는 완전히 이제 지옥에서 못 빠져 나온다.” 그런 식이에요. 자기 힘으로 못 빠져 나온다고.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네가 왜 고난을 자초하느냐? 이 바보 등신 같은 인간아. 나 봐라. 혼자 살잖아.’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그러면 결혼하는 사람은 죄짓는 거냐? 죄짓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의 죄가 이제는 자기를 넘어서서 파급이 된다는 것을 염려하는 거예요.

29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이 세상 유혹과 즐거움으로 스스로 충족할 생각하지 마라. 그래서 37절에 보면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이 말은 “결혼했나?” “예” 그러면 이제 마음을 단단히 먹고 38절에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지금 내가 지어낸 말 같으면 욕 되게 얻어먹을 거예요. 성경에 있으니까 망정이지. 39절에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것이나” 마치 가정을 감옥처럼 여깁니다. 남편 돌아가셨어요? congratulation~! 축하합니다. 아이고, 축하합니다. 무슨 저런 복을 다 받았어요? 남들을 받지 못한 복을 받고 말이지요.

그러면 또 결혼해서 또 헤어졌어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이나 헤어졌어요.” “아이고, 축하합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요, 거룩이라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완전해지는 것이 거룩 아니고요, 간음 안 한 게 거룩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그대로 드러내는 것, 결혼하든 안 하든 여성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거룩이라 합니다.

주님을 나타내는 게 거룩이예요. 그 외에 다른 거룩은 없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나 같은 인간도 주님께서 건져줬다는 거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이 여성성이 그렇게 중요하냐? 이제 오늘 설교에서 핵심 부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무척 어렵습니다.

핵심 부분의 본문을 먼저 읽어드리면 마태복음 22장 24-28절까지 후딱 읽겠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한 거예요.

이 질문의 취지가 너무나 어려운 거예요. 뭐냐 하면 천국과 지상의 경계선에 다른 사람은 가지 못하고 결핍을 가진 여인네가, 여자가 올라가는 거예요. 영적 세계의 경계선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남자가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여성이 올라가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과 비교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대조되거나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김장할 때 저 쪽에서 준비를 해야 되는데 이쪽에서 젊은 집사님들이 놀고 있었어요. 그때 어떤 천사가 등장해서 하는 말이 “일은 늙은것들한테 다 시키고 젊은것들이 뭐하노!” 하고 천사의 음성이 뇌성같이 터졌습니다. 칼 들고 막 “늙은것들, 멀리서 온 것들에게 일은 다 시키고……”

자, 그래서 그 천사의 말을 한번 분석해 봅시다. 여기서 늙은것들과 젊은것들을 대비시켰는데 그 대비는 잘못된 대비에요. 왜냐하면 세월 가면 다 늙어요. 늙는다는 것이 권세를 가질 자격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구분은 뭐냐? 늙은 것과 젊은 것의 구분이 아니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이에요.

결혼했는데 아기를 못 낳았어요. 그러면 남성성의 세계에서는 그 여자는 탈락입니다. 바람피워도 할 말이 없어요. 왜 자식을 생산 못 했으니까. 여자가 여자의 할 일을 못 했으니까요. 옛날에는 농경시대니까 이 땅 농작물 누가 키울 거예요? 힘 없는 여자가 키울 거예요? 아들이 키워야지요. 남성성이 키워야지요. 왜? 이 땅에서 먹고 살려면 그게 생계대책이 되니까.

아들 낳지 못한 여인은 서러움을 받습니다. 결국 여기서 피해자가 발생 돼요. 꼭 예수님 같아요. 그 여성성은. 아무것도 이 땅에서 할 게 없습니다. 그 여자를 율법이 딱 잡아서 천국까지 데려갑니다. 천국의 세계가 이 남성성에서 상상하는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를, 그 집안에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여성을 통해서 천국까지 데려가요. 얼마나, 이 남성성의 세상이 실제하는 여성성의 세계 천국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

‘예수님이 죽든 말든 나는 멀쩡히 살아 있으니 나는 아무 문제 없다’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한테 예속되지 않고 종속되지 않은 사람이에요. 주님이 죽었을 때 실은 우리가 다 죽은 거예요. 다 죽은 겁니다. 창조주가 죽었다면 창조된 우리도 죽는 게 마땅하지요. 예수가 죽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없다. 이래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성성을 그 가정에다, 그 현장성에 계속 집어넣는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한 나를 위한 거룩과 나를 위한 경건은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 나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거룩함과 경건함과 그리고 온전함은 주님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그것은 자축하는 거예요. 성화 되어서 좋~다고, 예수 믿고 나는 이제 성화 되어서 천당 간다고요. 지옥이나 가라!!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 그것은 지옥행이에요. 반면에 이 세상에는 남성성입니다. 잠깐만 그 이야기 더 해야 되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들이 성경 말씀을 잘못 집었다. 남성성에 입각해서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면 천국도 남성성 천국이 돼요.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가 돼요. 그것은 지옥입니다.

여기서는 뭐냐?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간다. 남자, 여자는 이 땅에만 있지 하늘나라 가 면 남성성, 여성성밖에 없어요. 여성성은 교회고 남성성은, 남자는 오직 여자의 아들 예수님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여성성을 가지면서 천국 가는 거예요.

반면에 이 세상은 남성같은 여성을 원해요. 그래서 심지어 교회, 성당, 이게 다 뭡니까? 자본시장에 편입되어서 하나의 회사지요. 전부 다 회사입니다. 거기는 자본이 들어와야 되거든요. 교회고 성당이고 돈이 있어야 예배당 짓지요. 교회나 성당이 스스로 자충하려 하는 거예요. 스스로 충만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름 빙자해서.

심지어 여러분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의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가정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회사에 가면요, “직원을 내 가족처럼” 하는 슬로건이 있다고요. 그 회사 사장님이 그런 구호를 붙였으면 자기 가정의 식구들은 뭐냐? 그 식구들은 전부 다 “직원을 내 가족처럼” 하는 그 회사의 직원들입니다.

요새는 부부고 가족이고 전부 다 회사 직원들이에요.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에 기여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전부 다. “네 용돈 네가 벌어 써라.” 여자들이 시집가서 힘들면 친정에 쪼르르 오잖아요. 애 맡길 데 없어서 쪼르르 올 때 친정엄마 아빠의 본심은 이겁니다. 본심이 뭐냐 하면, ‘나 더는 못 키운다. 네 새끼 네가 키워라’ 이게 본심이에요.

왜냐하면 돈이 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도 회사입니다, 회사. 생산성 없으면 이것은 직원으로서 떨어지는 거예요. 어떤 며느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며느리를 내 딸처럼.” 자기 딸이 뭔데요? 자기 회사 직원이잖아요. 우리 딸 돈 벌어온다. 그러면 며느리를 내 딸처럼? 우리 며느리 돈 번다.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게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 돈 없이 못 살겠다. 주님께서는 네가 아직도 머리통이 있으니까 돈 없이는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냥 살 만큼 살면 돼요. 우리 남편이 죽으라, 하면 죽으면 되고요. 가라 하면 가면 되지 왜 내가 지휘통제소를 달고 있습니까? 교회 머리는 주님. 말로만 주님이에요? 자기가 거짓된 행세는 다 하면서.

교회도 돈만 밝히는 교회에요. 앞으로 교회도 65세가 청년회 회장 할지 싶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계’ 하는데 그래 2등을 기억해주면 그 2등이 2등으로 성이 차겠습니까? 아직 남성성으로 다 채우지를 못했는데요.

하나님께서 그 여성성이라는 그 자체를 우리에게 집어넣어서, 이것은 부부관계만이 문제가 아니고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십자가와 십자가를 서로 만나게 해줘야 돼요. 십자가와 십자가를! ‘나 어제부로 죽어도 마땅한데 오늘 주님의 용서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서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돼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 음란, 거룩, 우리 구원받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지금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 여성성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이 현실을, 그 현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복음을 전해야 되는 이유가, 저 사람 분명히 교회 5십 년 다니고, 복음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고, 봉사도 많이 했다, 하는데 복음을 한번 전해 보세요. 전하면 복음이 없는 사람은 뭐가 나오는가? 복음이 나오는 게 아니고요, 자기의 탐심으로 마중 나옵니다. 우리 애 잘 키웠고, 뭐가 어떻고, 내 인생 어떻게 횡재했다는 거예요.

사람이 그냥 쉽게쉽게 살게 되면 전부 다 남성성에 그대로 다 넘어갑니다. 요양보호사로서 요양병원에서 일하면서 어떤 불쌍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있어 가지고 잘 대접했더니만 나중에 그 할아버지가요, “요양보호사 당신이 우리 자식들보다 낫습니다. 내가 꿍쳐 놓은 유산이 있는데 아들딸 줄 필요 없으니 내가 당신 줄게” 해서 어떤 요양보호사는 낚시터를 유산으로 받은 사람이 있어요. 낚시터를 받았는데 그 낚시터가 공항으로 변해서 보상금 받아서 잘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에요. <너를 닮은 사람>이라는 드라마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잘됐다는 것이 뭡니까? 이제는 나 혼자 독립해서 잘 살 수 있다. 그 말이거든요. 그게 남성성이지 그게 무슨 여성성이에요? 우선 자기 자리를 비워야 될 것 아닙니까?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계셨잖아요. 주님이잖아요. 왜 그걸, 왜 평소에 그 이야기를 못 합니까? 나는 나로 인하여 스스로 살려고 합니까? 그게 바로 이방인들이에요.

이게 바로 신비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게 부부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부부일 수도 있다. 결혼한 것이 사달 난 것은 맞는데 혹시 남편도 여성성, 아내도 여성성. “나 같은 것 당신이 건사해주니 살았지” “아니야, 당신이 건사해주니 내가 살았어.” 또 집에 가서 그것 때문에 싸우지는 마시고요.

따라서 남편과 아내가 헤어지자, 하면 헤어져 버려라. 자기 머리통이 없어 버리면 그게 자기로부터의 해방 아닙니까? 자기로부터의 자유거든요. 나는 누구한테 종속되고 예속되는 것. 죽어도 여한이 없지요. 이제 주님 얼굴 볼 수 있으니까. 이제 남편 얼굴 보니까.

매일매일이 이미 천국의 시작이고 매일매일이 감사고 고마운 거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여성성, 주님의 여성성이 살아 있는 것. 그게 여자의 후손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좋은게 좋다고, 사는 게 남는 거라고, 돈 많은 게 이긴 거라고 누가 그렇게 가르쳐 줬는지 생각도 안 하고 나 좋으면 그만이라는 그런 남성성에 푹 빠지지 않았습니까? 주여, 우리로 인하여 주님이 피해자로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심을 이제는 깨닫고 주여, 그런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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