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71강 사무엘상 25장10절(상처의 전이)20210726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사무엘상 25장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는 주인공이 세 명 나와요. 한 사람은 아비가일이고 남편이 있는데 이름이 나발, 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다윗의 일단, 다윗의 일행. 이 세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서 사무엘상 25장을 다 끌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 셋 조합에서 A란 사람, B란 사람, C란 사람 이 셋 조합에서 C를 다윗이라 본다면 A, B 나발과 아비가일은 부부였습니다. 부부였는데 다윗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 둘 사이가 찢어집니다. 둘 사이가 찢어져요. 다윗이 개입해서 찢어졌다는 말은 다윗이 여기 등장하지 않았으면 일단 나발과 아비가일 관계는 찢어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평탄 또는 평온한 것, 평화로운 그런 관계지요. 평탄하다, 평온하다? 세상에서 상당히 좋아하는 겁니다. 분란이 일어나지 않잖아요. 좋은 이야기지요. 좋은 이야기인데 그러면 다윗의 배후엔 누가 있느냐 하면 다윗은 아시다시피 기름부음을 받은 자죠.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것은 배후에 하나님과 연결돼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돼있어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다윗을 하나님과 연결돼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올 때 어떤 식으로 찾아올 거냐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다윗이 ★하나님과 관련된 인물로써 어떤 평탄하고 평온한 인간세계에 왔을 때 그 인간세계는 어떤 분란이 일어나는지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요.
그래서 이 평온과 평탄이 지금 다윗이 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어떤 상태냐 하면 사람들은 좋은 상태라고 여깁니다. 평화로우니까요. 좋은 상태. 그런데 다윗이 개입하니까 이 좋은 상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첫째는 나쁜 상태가 될 수도 있고요. 두 번째는 뭐냐? 더 좋은 상태, 이 말로 표현 안 돼. 더 멋진 상태. 영어로 하면, good! 좋은 상태, 더 멋진 상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관련돼있는 다윗이 이 땅에 관여하는 순간 ★어떤 사람들은 그걸 나쁜 상태로 보고 어떤 사람은 이건 상상도 못할 좋은 상태가 돼버린 겁니다. 왜? 아비가일과 다윗이 결혼하니까. 아비가일 입장에서는 땡 잡은 상태지요. 왕의 처가 되잖아요. 좋은 관계 되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평온한 상태에 다윗이 개입할 때 여기서 필히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이것은 ★예외 없이 일어나는 상태로 뭐냐 하면 바로 다윗이 마음에 상처를 입은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오신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 이 세상에 관여할 때 하나님 일에 관여할 때 그 다윗은 또는 그 예수님 일은 또는 선지자는 이 땅의 상태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게 돼있습니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밉상 받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다윗은 이 땅의 정상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미움 받을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미움 받을 요소가 있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은 다윗을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비가일이 다윗과 나중에 결혼한다는 것은 특수한 상태에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특별한 일이거든요.
그러면 특별한 일은 우리가 나중에 진행을 보면서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했구나, 라고 알지만 초창기에는 아비가일이 다윗이 결혼해서 더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은 예상도 못한 겁니다. 그러면 예상할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우리는 평온하게 평탄하게 평범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평탄하게 평온하게 산다는 이것이 뭘 준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 사람을 뭘 준다? 상처를 주게 돼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요소를 예수님이 갖고 있어요. 반드시 예수님에게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요소가 있어요.
자, 나발 같은 경우에는 그냥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평온하고 평탄하고. 이 사람이 부자거든요. 25장 초반에 나옵니다. 굉장히 부자로 돼있어요. 마온이란 지역, 마온 지역은 여기 지중해 있고 사해가 있고 갈릴리 호수 있는데 요 사해 꼭대기와 예루살렘과 같은 위도에 있어요. 중간쯤 되는 여기에 마온이란 장소가 있습니다. 엔게디란 장소에서 좀 더 가면 마온이란 데가 있어요. 같은 위도에. 그 장소에 굉장히 큰 부자였습니다.
2절에 보면,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이렇게 돼있어요. 그리고 그 아내는 부자니까 아내가 예쁘겠지요. 용모가 아름다운 아비가일이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발의 입장에서는 지금 다윗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도 불구하고 평온하고 평탄하고 본인이 만족스럽겠지요. 그렇지요. 상당히 만족스러운데 만족스러운 가운데서 다윗이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왜? 자체적으로 만족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사무엘상 25장 10절에 보게 되면 누가 사무엘상 25장 10절을 읽어보세요.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다윗이 도움을 요청하니까 요새 어중이떠중이가 왜 그리 많으냐 그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다윗이란 존재에 대하여 내가 침해받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요걸 요즘 말로 고쳐볼까요? 나는 예수라는 그 인물을 통해서 내 인생에 침해받는 걸 원치 않는다 그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있느냐를 여기서 다윗이 나발을 만나면서 있었던 그 일로 요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점검이 가능해요.
지금 나발은 누구 입장이냐 하면 나 중심입니다. 절대적인 나 중심이에요. 자아중심이죠. 나만 편하면 돼. 내가 스스로 만족하는. 부자지요, 아름다운 아내를 가졌지요. 그러니까 이건 부족함이 없이 만족스럽다 이 말이죠. 만족스러운 걸 일부러 깰 이유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만족스러움에 비해서 그가 나발이 알고 있는 다윗이란 인물은 자기 영역에 끼어드는 것을 나발이 원치 않아요. 요새 주인을 떠나서 돌아다니는 피신해서 도망치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제발 내 구역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내칠 수 있는 거죠. 그 말은 나발에게는 예수님이 그다지 인기가 없고 예수님한테 흠모할 것이 전혀 없는 겁니다. 방금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 잘 아셨지요. 그러면 이건 지우겠습니다.
땅이 있는데 여기 땅에 선이 있다고 하고 나발은 여기 있다합시다. 나발 아내도 같이 있고. 여기서 다윗이 등장할 때에 다윗은 하나님과 같이 움직이고, 기름부음 받은 자니까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같이 작동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다윗은 사람들이 여기 있을 때 이 사람이 가진 게 이만큼이라면 이걸 더 키우고, 더 키워주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덜 키우고 더 키우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뭐냐 하면 다윗은 나발 때문에 상처 받았으니까 배척받았으니까 이걸 깎아버리는 거예요. 이게 다윗이 인식이라면 평균 이하로 이걸 깎아버려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음각이라 합니다. 조각할 때 깎는 거예요. 덧붙이는 게 아니고 유화처럼 캔버스나 뭘 덧칠하는 게 아니고 있는 것도 깎아버려요.
있는 것도 깎아버린다는 이 말은 다윗이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찾아왔다는 말은 오늘날 같이 언약으로 움직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의 있는 것도 어떻게 합니까? 깎아버리죠. 밥을 줄 때 머슴밥처럼 더 많이 주면 이게 정이 있는 거고 있는 밥도 깎아버리면 이거는 살벌한 관계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여기 있는 것에 대해서 상처를 받게 만들어요.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입게 돼있어요. 누구로 인하여? 나발로 인하여 상처를 입어요. 여기에 아비가일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25절에 보면,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자기 남편에 대해서 미련하다고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했으니까 정리해봅시다. 다윗에게는 나발이 미워할 요소가 있고, 나발에게는 다윗을 미워할 이유가 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 다윗은 쫓겨 가는 신세지요. 아무것도 권력이고 뭐고 다 박탈된 상태지요. 현상범으로 쫓기고 있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세상으로부터 쫓겼지만 다윗에게는 여전히 뭐가 있습니까? 기름부음이 있지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그와 함께 있죠. 하나님과 함께 있죠.
그렇다면 이 사무엘상 25장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닌 분이 이 땅에 나타났을 때 공식이 뭐냐? 다윗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예수로 바뀌고요 나발을 인간으로 바꿔봅시다. 예수님에게는 인간이 미워할 요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뭐냐 하면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하지요. 이게 이 예수가 진짜 살아계신 예수가 아닌 거예요. 예수님에게는 인간에게 미움 받을 요소가 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미워해요. 구세주라 이야기하면서. 이상하게 이건 가짜 같아.
그리고 인간에겐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가 있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예수님을 좋아할까요, 미워할까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내내 이야기하는 것이 예수님은 심지어 제자들한테도 버림받았어요.
그러니 교회가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건 분명히 백 프로 가짜 예수에요. 진짜 예수가 아니고 다른 예수를 전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키워주는 예수, 내 소망을 들어주는 예수, 나에게 희망을 갖게 해주는 예수, 내가 잃어버린 것은 만회해주는 예수, 내가 아픈 것을 병 고쳐주는 예수, 내가 아쉬운 것은 채워주는 보충해주는 예수, 옛날에 칠성님 믿던 그 속성과 동일한 예수에요.
사람들은 그 예수를 믿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서 교회 가는 게 아니고 누구를 상상해서 가느냐 하면 하나님을 상상해서 간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뭘 가르치느냐? 하나님과 예수가 같은 편이라고 이렇게 가르쳤거든요. 그러니까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예수가 어떤 하나님이다?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십자가는 다 날아가 버려요.
십자가는 그냥 예수님이 폼 잡는 거고. 우리 죄를 스스로 못 씻으니까 그냥 우리 대신 죄 씻어주는 착한 일하는 덧붙여주신 분이고, 예수님 본인이 우리한테 미워할 요소가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한 겁니다. 있지도 않는 우상적인 예수, 우상적인 하나님으로 교회에서 줄곧 영업을 하는 거예요. 점치는 사람들이 교회 가고 전부 다 영업한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다윗은 세상적인 인물로 보이는 나발, 모든 것이 풍성한 나발로 하여금 만남에서 다윗 같은 존재는 나한테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냉정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 나발이 다윗을 배척하고 냉대하는 이걸 인간의 표준으로 삼을 것이냐, 말거냐? 그게 중요하겠지요.
인간 가운데 그렇게 성질 더러운 인간 있더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렇게 나쁘더라도 다른 사람은 점잖다. 이렇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나발이 모든 인류의 속성을 대신하고 대변한다고 그게 밝혀지기만 한다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들통 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우리가 맞이한 거예요.
절호의 찬스가 사무엘상 25장을 통해서 알려지는 겁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진짜 예순가, 아니면 내게 필요하다고 내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내 자유의지로 받아들인 그런 예수인지를 그걸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규명을 해봐야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발이 그냥 그렇고 그런 인간 하나 있다, 이거냐? 아니면 아담의 속성의 모든 인간이 기본을 나발을 통해서 대표해서 들춰낸 거냐? 이 점 규명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여기 음각이란 것, 파낸다는 것,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본성을 파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나발은 뭐냐 하면 현재 내가 아까 평탄하고 또 뭐라고 했습니까? “평온하게 살고 있으니까 나 건드리지 마. 나 이대로 좋아. 이대로 갈 거야. 날 건드리지 마. 파내지 마. 누구든지 파내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전부 그런 입장이지요. 다윗 같은 인간에겐 떡 하나 줄 수 없다, 그런 쪽이거든요.
자, 지금부터 나발의 이게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하냐?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이냐? 이것을 한 번 규명해봅시다.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있다, 이것이 틀린 말이에요. 이것이 맞습니까, 물어보기도 싫어.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 틀린 말입니다.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 주전자 있다합시다. 주전자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이걸 받아들이죠. 카메라가 있다. 이것 다 받아들여요. 이 뒤에 뭐가 붙었습니까? 있다, 있다가 붙었지요. 하나님 있다가 붙지요. 하나님이 있다고 하게 되면 필연적인 그 다음 질문이 나와요. 누가 만들었느냐?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그냥 있다는 게 아니고 분명히 누가 만든 자가 규명될 때 있다의 온전한 것이 다 알려지게 돼있어요. 그냥 있다는 것은 인간에겐 참을 수 없습니다. 여기 수박이 있지요. 집사님, 수박 있지요. 수박 누가 가져왔어요? 수박 있음으로 인간의 궁금증은 끝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있다를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기 있는 내가 나의 있음과 연결시켜서 같은 있다를 사용했단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한테 하나님이 있다할 때는, 이태한테 물어보지요. “하나님이 있어, 없어? 그것 누가 만들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를 규명해야 있음이 그 내용이 충족되는 거예요. (괜히 참석해서 어려운 답변하게 해서 미안해요.)
사람이 하나님에게 질문을 한다든지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있습니까, 하는 질문한다는 것은 지금 누구 좋으라고 질문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질문한다고 해서 하나님 좋으라고 질문하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누구 좋으라고 하느냐 하면 나의 있음을 더욱 다지고 다지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뭐든지.
“이 수박 누가 줬습니까?” “집사님이 가져왔습니다.” “아이고, 인사도 못 드리고.” 왜 그런 일을 하느냐 하면 수박을 맛있게 먹고 그 다음에 먹은 사람으로서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치레를 해줘야 나의 나다움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이 쭈그리 되는 걸 용납을 못합니다, 인간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 전체는 ‘있다/없다’ 이런 생각 자체가 인간의 한계점이란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한계 넘어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젯거리도 안 돼요. 있다, 없다가 문젯거리가 안 되고 뭐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건 죄냐, 의냐? 이겁니다. 이 영역을 인간은 못 넘어가요.
인간은 그냥 있음 자체를 뭐로 보자고 우기느냐 하면 있으니까 잘나서 있는 걸로 쳐주세요, 이러는 거예요. 신이시여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걸 훌륭해서 살아 있는 걸로 그냥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기어이 살아남는 것이 성공한 인생으로 보는 겁니다. 이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은 그겁니다. 오직 살아남는 거예요. 백신을 두 번 맞든 세 번 맞든 살아남는 게 이게 승자가 된다는 거예요. 살아 있다는 게.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냥 연세 많아서 흰머리 되어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뭡니까? 예수님이 나이 많아 연세 많아 돌아가셨다, 그것 보여주려는 십자가입니까? 누가 처리했다는 거죠. 누가 처리한 거예요. 어느 쪽에서 처리했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게 죄와 의는 인간은 이미 의라는 것이 규명됐어요. 내가 나답게 내 의로움이 유지되면 그건 무조건 자기는 있는 것은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매 이야기해볼게요. 두 자매가 있는데 그 언니가 엄마 몰래 엄마 화장품을 썼다고 칩시다. 옛날이야기에요. 요새는 지 화장품 있으니까 그럴 일 없는데 화장품을 몰래 했다 칩시다.
그런데 동생한테 들켰거든요. 동생에게 엄마한테 고자질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동생은 언니가 뭐 주는 것 없으면 입 다물 일 없잖아요. 인간은 받아먹고 챙기는 게 없으면 남의 말 들을 위인들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엄마한테 고자질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언니와 동생은 벌써 어릴 때부터 상처가 삐뚤어졌지요.
화장품 누가 발랐느냐, 그것 때문에 엄마가 화나 있는데 마침 그 집이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서 부도나서 집이 몽땅 망해서 촌으로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러면 두 자매간에 둘이 껴안고 화해합니까, 안 합니까? 그게 질문이에요. 집안이 쫄딱 망해서 촌으로 비참하게 살아도 언니고 동생 간에 화해할까요, 화해 안 할까요? 화해 안 하지요.
그렇다면 그 문제를 확대시켜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범죄가 많아서 이 세의 모든 것을 불살라버린다, 불 심판 내린다 할 때 인간의 마음이 달라질까요, 안 달라질까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안 달라지지요. 안 달라집니다. 자매가, “언니 우리 이렇게 작은 문제로 싸울 게 아니고 우리 집안을 걱정해야 되지 않느냐?” 이러지 않아요.
한 번 엉켜있는 언니에 대한 미움과 동생에 대한 미움은 천지개벽이 나도 안 풀립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의 세트장이니까. 이 세상은 세트장이에요. 이 세상이 뭐가 있는지 이 세상에 아파트가 있든지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이건 절대적인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지옥 가는 것은 인간에게 안 중요해요.
진짜 너무 중요한 것이어서 써야 되겠어요. 우리 마음을 알아야 돼요. “내가 지옥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에 들어있는 악령적인 심보입니다. 악마적인 심보에요.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러면 다윗이 왔을 때 나발은 다윗이 어떤 위대한 영웅이라도 나발의 마음은 다윗 앞에 변하겠어요, 안 변하겠어요? 안 변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있음, 그리고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잘나서 있음이 이거는 본인이 만든 게 아니고 악마가 집어넣어줬기 때문에 악마의 뜻이 풀리지 않는 한 이 마음은 지옥 가도 계속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지옥 간 사람 있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사로와 부자 있지요. 그 부자가 지옥 가서 개과천선했습니까? 안 바꿨지요. 이건 나사로가 거지인줄 알고 시키지요. 안 바뀌었지요. 환경이 좋으면 마음이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안 바뀝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좋은 것, 주님께서 수박 주고 프로바이오틱스 이것 줘서 우리를 개과천선시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우리로 인하여 받은 상처 있잖아요. 상처를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상처를 줄 때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에서 상처를 입힐만한 요소가 영원히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이유에요. 요샌 교회에서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게 아니고 교회부흥을 앞장세우지만. 교회를 앞장세우잖아요.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 존재가 왜 이게 복음이 아니냐 하면 교회 존재는 나발로 하여금 진짜 나발로 계속 가게 만들어요. “아 내가 괜찮은 사람이구나. 내가 집사 할만 해서 집사했고 내가 장로 할만 해서 장로 했구나.” 자기 긍정을 계속 유지를 하는 거예요. 주님의 상처가 그 사람 속에 상처로 음각, 파헤치질 못하고 있어요. 인간과 인간들의 모든 만남은, 목사와 교인들의 만남은 상처를 보듬어주려고 애를 써요.
그 인간이 갖고 있던 아까 인간이 뭐 갖고 있다 했습니까? 인간은 뭘 갖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선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의인 거예요. 그걸 어려운 말로 의미라 하는데 모든 의미는 내가 여기 있음을 내가 확정할 때 의미 되는 거예요. 수박 예를 듭시다. 수박을 사왔는데 수박을 드세요, 드세요, 드세요 다 했는데 한 사람만 쏙 빼놓고 안 줬다. 다른 사람은 다 잡숫고 있을 때 본인만 수박이 없을 때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나쁘지요.
거기서 자기 음각이 된 거예요. 자기가 파헤친 거예요. 자기 의미가 상대적으로 손상이 간 겁니다. 이게 인간의 기초공사에요. 이게 인간이 꽉 박혔어요. 그래서 인간의 육신이라든지 자아라 하는 것은 이미 악마가 심어준 그 대들보에 그냥 장식용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 서울대학 나오고 재산이 얼마나 있나, 그건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그냥 장식용이에요.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덴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아쉬운 것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지금 그것으로 장사하잖아요. 마땅히 아쉬워야 되고 더 아쉬워야 돼요. 십자가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파헤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피난을 가는데 주님의 지적을 피해서 도망을 치는데 도망칠 때 보따리 쓰고 도망치거든요.
요샌 유식하게 캐리어 끌고 도망치는데 캐리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의롭다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나는 의롭다를 캐리어 끌고 도망치는 거예요. 이 교회 아니면 다른 없나, 하면서 계속 가는 거예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의롭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이거는 본인도 그 병을 못 고칩니다. 나는 인간 말종입니다, 인간도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빌립보 2장에 마음을 낮춰라. 곧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버리시고 종까지 왔으니 그 마음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하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을 듣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버려요. 어디다 담아버려요? 캐리어에 담아버려요.
그러면 그 안에 담는 순간 마음을 낮춘 것이 자기의 의가 돼요. 내가 영원히 존재해야 될 이유가 돼버린다고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기껏 그게 다에요.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아서 그것으로 자기를 안 다치게 만드는 겁니다. 세상은 다 지옥 가도 자기는 천당 가고 싶어요. 아니 제가 지옥 가도 자기는 잘난 척하고 싶어 지옥 가고 싶어 해. 이게 인간입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 놀랍게도 아비가일에 자기 남편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요. 이미 그 부부는 다윗이 오기 전에 균열이 갔는데 다윗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아내가 자기 남편과의 균열을 더 가중시킵니다. 아무리 부부사이가 안 좋아도 제삼자 앞에서는 욕을 안 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여기 사무엘상 25장 25절에 보면 노골적으로 자기 남편을 가지고 이름하고 딱 맞습니다. 미련한 녀석, 미련한 잡니다, 이렇게 욕을 하는 거예요.
이게 다윗이라 그렇지 만약에 제삼자 같으면 남편 욕 안 해요. 아내 욕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남편이 미련하다면 미련한 자와 사는 너는 뭐냐? 너도 미련한 여자잖아, 라고 같이 싸잡아 욕 얻어먹을 게 뻔하기 때문에 그런 욕을 안 하거든요. 적어도 제삼자면 자기편이잖아요. 어제 부부 싸움했던 말든 일단 남한텐 자기편이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비가일은 마치 다윗이 기다린 것 같아. 언제나 우리 부부관계는 쪽 나느냐 이걸 학수고대한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당신을.” 이런 식으로. 왜 그러냐? 본성이 달라서 그래요. 이렇게 돈 있다고 으스대는 이런 인간과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이 안 되는 요소가 있어요. 같이 산 것은 다윗 같은 남자를 못 만나서 같이 산 거요. 그러니까 부부가 그냥 임시적 부부에요. 임시적으로 그냥 살아주는 거예요. 부자니까 뭐 쇼핑할 돈 주겠다, 지가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여기서 제가 주일 낮 설교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한지 몰라서 오 목사님 녹취한 것 보니까 녹취 본에 이렇게 돼있어요. 한 번 적어볼게요. “절도 있는 체계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돼있어요. 녹취에 보니까. 여기 절도 있는 체계, 이걸 쉽게 말하면 안정적 마음상태를 이야기한 겁니다. 절도 있는 체계로, 체계란 말은 인간은, 내가 나를 지킬만한 체계를 수시로 구성하고 있어요.
성경말씀을 보잖아요.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계속 구성해요. 이 원리와 이 논리와 이 체계가 나를 지킬 수가 있을까를 늘 점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절도 있는 체계, 안정적인 나의 삶의 의식과 그러한 논리체계가 그동안 뭘 해왔느냐 하면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자부하고 계속 살아온 거예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교회에서 배운 캘빈주의신학 이런 거죠. 어떤 체제가 있으면 논리가 있으면 교회 안 다닌 사람 같으면 뭡니까? 공자 왈, 맹자 왈 이런 겁니다. 가만있는 공자, 맹자 이용해서 내가 나의 정서와 마음을 다 잡을 수 있는 체제를 계속 인간은 끊임없이 구성해온다 이 말이죠.
이러한 인간의 시도가 문제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언약의 사람 또는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 앞에 이게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지금까지 강의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이게 안 통하지요. 여기 보세요. 절도 있는 체계가 모든 고통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여기에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상처가 빠져 있잖아요. 상처가. 상처를 없애기 위해서 저 체계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고통을 없앴기 때문에 또 고통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제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사람이 종 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봐라. 아무도 없었다고. 내가 노예 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럼 뭐예요? 그럼 예수님만 바보에요? 예수님만 노예가 됐고 사람들의 종이 됐잖아요. 내가 온 것은 섬기려 왔잖아요. 그럼 예수님만 바보 돼버린 거예요. 모든 인간은 똑똑이가 돼버리고. 격차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흔히 뭐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다고요? 말 똑바로 하세요. 예수님 이용하려고 하지 믿는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과 하나 되고 싶은 마음 없지요. 그냥 알랑 떨어서 빼먹을 것 빼먹겠다는 수법, 수단이잖아요, 이게. 지금 절도 있는 체계가 무너져야 돼요. 나는 멀쩡하고 싶다는 겁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멀쩡하고 싶다.” 이게 어제 낮 설교에 의하면 나만 멀쩡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바로 사회로부터 동의를 받아내는 겁니다. 혼자 집구석 방에 앉아서 멀쩡하다 하면 안 알아주거든요. 밖에 나가서 필라테스를 하든지 탁구모임을 하든지 안 그러면 꽃꽂이모임에 가서 같은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말은 뭡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어떻게 보는지 자체적인 점검에 나서는 거예요.
“아이고 아이들 잘 키우고, 우에 그렇게 훌륭하십니까?” 그런 소리가 막 날아오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뭘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소에 소원이 나는 멀쩡하고 싶어요. 나는 의롭고, 의로운 자에게 뭐가 온다? 웃으면 뭐가 와요? 복이 오죠. 복 받을 자격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토대가 악마로부터 심겨진 거예요. 나발 같이.
하나님 보시기엔 미려한지만 인간은 자기를 미련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다, 난 누구한테 속았다. 인간이 누구한테 속았다는 소리만큼 참 더러운 소린 없어요. 완전히 바보 되잖아요. 내가 가난하다는 건 견딜 수 있지만 너는 바보 같다 하면 정말 이건 화날 일이에요. “내가 멍청이구나. 멍청인데 왜 살지?” 이런 생각 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나발의 이런 경우가 나발에게만 국한된 경우가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될 것 아닙니까,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고치는 방법은 이 방법입니다. 환경(배경),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실 때 또는 오늘 본문에 누가 오지요? 다윗이 오게 되면 다윗은 뭔가 다윗이 몰고 오는 다윗이 속해있던 그 환경이 있고 배경이 있어요. 그 세계가 있습니다. 다윗의 세계가 있어요.
이 다윗의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기름부음 받음의 세계, 이걸 달리 하면 언약이 적용되는 세계. 누가 요한복음 3장 읽어봅시다. 요한복음 3장 36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멘.
자, 여기 보세요. 예수님이 몰고 온 환경과 배경 속에 여러분, 영생만 있습니까, 또 딴 게 있습니까? 뭐가 있지요? 영생만 있는 게 아니고 또 하나님의 진노가 있지요. 그러면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그냥 멀쩡하게 좋게 이야기할게. 좋게 이야기해서 영생 얻자고 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 졌습니까? 사람에게 미움 받았지요.
미움 받았으면 예수님이 몰고 온 환경, 다시 말해서 영생과 진노 가운데서 우리는 어디에다 먼저 들어가야 돼요? 영생에 들어가야 돼요, 차라리 진노에 들어가야 돼요? 진노에 들어가지요. 이게 바로 왜 아비가일이 자기 남편을 사정없이 내친 이유를 알겠지요. 다윗은 내 남편을 어떻게 한다? 그냥 진노하는 업무와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온 분으로 아비가일은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아비가일은 누구와 결혼합니까? 다윗의 생애에 삶에 아내로서 거기다 일치합니다. 들어가 버려요. 이게 언약의 활동이에요. 언약이 하는 작동방식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 믿으라 하면 자꾸 영생을 생각하는데 영생부터 가면 안 되고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진노에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니까 그냥 못 퍼줘서 환장한 하나님으로 봐요. 못 퍼줘서 못 도와줘서 환장하신 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진노란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분으로 알잖아요. 왜? 금복주 할아버지처럼 인자하신 얼굴…… 진노의 하나님은 예수님의 일그러진 그 모습 자체가 진노에요. 십자가에서 피 흘린 모습이 그게 진짜 하나님의 얼굴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골로새서 1장에 나옵니다. 어설프게 인자한 그런 얼굴 찾지 말고 사람들로 인하여 당했던 찡그린 상처 난 그 모습을 한 번 보세요. 그게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수할 만한 근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뭐로 차지했습니까? 자기를 지키는 체제를 갖고 있지요. 자기의 절도 있는 체계, 안정된 체계, 이 체계 왜 갖고 있습니까, 뭘 지키려고? 주님 지키려고, 하나님 복음 지키려고, 하나님 지키려고? 아닙니다. 누굴 지키려고? 나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신학이라든지 이런 교리 같은 걸 둘둘 감아놓은 거예요. 캐리어 집어넣고. 그런데 주께서 주시는 것은 준비된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면 이 인간이 구원받을 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 제가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배경이 바뀌면 아까 의미 했잖아요. 의미체제가 달라져요. 옛날에 이미 죽은 가수인데 박상규라고 <조약돌>이란 노래있어요. “꽃잎이 한 잎 두 잎 바람에 떨어지고~” 이런 노랜데 그 조약돌을 채석업자가 그 노래를 들으면 뭘 생각하겠습니까? 돌 캐는 채석업자거든요. 괜찮은 조약돌은 돈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보세요. 보통 사람은 조약돌 들으면 옛날에 어릴 때 청춘이 있었는데. 채석업자, 돌 다루는 장사꾼이 보게 되면 어디 조약돌 많은데 있으면 요새 안 그래도 자재 값 올랐는데,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렇지요. 그 다음에 비슷한 이야기하겠습니다. 둘다섯란 가수가 불렀던 <밤배>란 노래있어요. “검은 빛 바다 위를 밤배 저어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봐 한 없이 흘러가네~” 이걸 국정원이 보게 되면 뭐로 봅니까? 간첩선이에요. 검은 빛 바다 위에 몰래 배를 젓는 것은 간첩선입니다.
그러니까 진노하시는 주님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 교회의 종교생활이 뭐로 보이겠습니까? 이거는 자기를 지키는 절도 있는 체계로 보는 거예요. 50년 교회 다녔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나는 직분이 목사입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신학대학 나왔습니다, 신학박사입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게 자기 진노를 부르는 거예요. 그게 아무 의미 없는데 무의미한데요.
주님 덕분에 우리 자식 잘 키웠습니다, 이런 것 있잖아요. 병이 나았습니다. 나발입니다. 욕하는 게 아니에요. 나발입니다. 나발의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다 공히 적용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 바로 성령께서 뭐를 바꾸느냐? 이 토대를 우리가 갖고 있던 나 중심의 토대를 주님께서 성령께서 여기다 기초공사를 따로 해버려요. 십자가를 꽃아 버린다고. 꽂아버리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것 다 외우지요. 십자가 언급하잖아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했잖아요. 2장 마지막은 이 대목이에요.
십자가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십자가가 나타나는데 그 십자가는 나를 지키기 위한 모든 체제는 어디다 말아먹어야 된다? 십자가에 다 말아먹고 주님한테 일임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소유권이 바뀌어요. 지금껏 내 살아온 과거는 나를 위한 인생사가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었음을, 주님 손길의 연속이었음이 밝혀지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 서예 배우고, 난 치고 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것이 결코 뭐가 안 되게? 나의 의가 안 되게. 어디서 어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 다시 말해서 생명이란 반드시 먼저 사망의 자리에 있어야 생명의 의미가 생겨요. 진노의 자리에 있어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건 없음을 그때야 아는 겁니다.
이런 사무엘상 25장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네가 나발이다, 나가리야. 네가 나발이다. 나발인데 뭐로 바꾼다? 아비가일로 바꾸는데 누가 개입했다? 언약의 사람 다윗이 개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