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사회생활

아빠와 함께 2021. 6. 30. 08:37

대전-70강 사무엘상 24장10절(사회생활)20210628a
(강의:이근호 목사)


사무엘상 26장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6장은 다윗이 숨어있는 광야에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오는 그때부터 이야기합니다. 찾아오는데 찾아온 본인이 올무에 빠져버렸어요. 왜냐하면 광야죽음의 사회거든요. 광야는 죽음이 지배하는 곳.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 살려고 하는 자가 들어온 겁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 살려고 하는 자가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광야 때 광야란 것이 이스라엘 너희들은 죽어 마땅하고, 죽어 마땅한 너희들을 동행한 하나님이 살렸다, 이 상황을 계속해서 유발해주는 장치가 광야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세례요한 생각하세요. 세례요한이 멀쩡한 마을에 살지 않고 낙타 옷 입고 광야에 나갔지요.

광야에 나가서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너희들이 광야에 들어와라. 너희들이 광야에 들어올 때 그냥 들어오지 말고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이 광야에서 나와 만나자. 이렇게 되지요. 그리고 예수님도 세례요한 할 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마태복음 11장에 말씀.

그러니까 선지자의 특징은 세상 사람과 달리 바로 등짝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그 영토와 사이에 딱 선지자가 놓여있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절개 면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땅이 있는데 땅이 갑자기 중간에 끊어졌다고 합시다. 끊어지고 갈라졌다고 해봅시다. 갈라졌다 하면 여기서 갈라지겠지요. 그럼 여기 갈라졌으니까 절개 면이 양쪽으로 다 노출되겠지요.

세례요한이 이쪽에 서있는 거예요. 그러면 세례요한이 있는 곳이 뭐가 된다 했어요? 광야지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오기 전에 통과했던 곳이에요. 광야 통과하고 난 뒤에 약속의 땅이니까 약속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뒤 배경에 광야가 딱 세팅돼있어야 돼요. 연극무대에 그림 같은 게 있지요. 광야를 세팅해놓고 그 앞에 광야를 배경으로 해서 그 다음에 약속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 확 다가오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가 사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구사일생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라, 이 말입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는 조건 하에 사는 건데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이 살려주는 조건 하에 살지요. 그걸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바꿉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음을 기대하는 사람은 이건 안 돼요. 나는 역시 살만해, 이런 인간들은 이스라엘 약속의 땅에 살 자격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일관성 있는 그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광야에서 와서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머리 좋은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광야를 통과해서 약속의 땅에 왔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일군의 많은 단체가 움직였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주님이 그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보시면 돼요. 이 세상에. 인간들만 고생시키는 게 아니고 주님이 찾아오시는 경로에 떡에 묻어있는 콩고물처럼 떡은 주님이고 붙어있는 콩고물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떡이 이동하니까 콩고물이 같이 붙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구원자가 계시다가 이슈가 돼야 되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이유가 돼야 되는 겁니다. 광야란 것은 죽음의 땅입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에요. 이곳은 아무것도 살 수 없습니다. 특히 광야에 죽음이 지배한다는 것은 이걸 신약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이것을 죽음이 지배하는 곳을 이렇게 세 자로 표현해볼게요. 이게 오늘 본문 강의와 관련돼있어요.

무승부. 이 무승부란 말이 광주강의에서 무승부.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하면 그림도 있지만 이기려고 해요. 작품 출품할 때 꼴찌하려고 안 내잖아요. 끝내 이기리라. 라틴 말로 빈체로Vincero, 끝내 이기리라. 이기려고 살아요. 애부터 어른까지. 난 여성인데, 그 말 뒤에는 뭐냐? 나는 여자의 미모로 이겨보겠다는 게 있어요. 여러분에겐 해당되는 사람 없습니다만.

남자는 힘이죠. 그냥 힘 가졌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뒤에 말하지 않은 말이 있어요. 뭐냐? 힘으로 내가 세상에서 살아남았다는 승리를 쟁취하겠다. 그러니까 이기겠다. 이기는 게 뭐냐 하면 살아남는 게 이기고, 이왕 이기는 것 잘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예요. 어쨌든 이기는 것은 빠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오늘 다윗 나오는데 다윗은 어디로 쫓겨 갔습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의 땅으로 쫓겨 간 거예요. 다윗이 돌아다니는 것은 다 죽음의 땅이에요. 다윗은 죽음 경로를 보여주는 겁니다. 시멘트 새로 해놓고 시멘트가 굳어지는 양생도 안 됐는데 제일 미운 것이 강아지 있잖아요. 줄 쳐놓고 인간들 보라고 들어가지 마시오, Keep Out! 했는데 강아지는 영어를 할 줄 알아야지. 귀여운 발자국으로 아주 신이 났어. 돌아다닌다고.

남들 보기에는 사람들이 없는 광야지만 다윗은 본인도 모르게 어떤 임무가 있는데 그게 뭐냐? 죽음의 발자국을 찍어버리는 거예요. 다시 우리가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그때 순수했잖아. 그때는 아무것도 의지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어디 갈지도 모르고 자기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도 모르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코에 꼽는 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을 때 그냥 그야말로 죽은 시체지요.

시체가 가장 시체다울 때 가장 하나님다움이 등장하는 겁니다. 유월절 용서의 죄 사함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데 이 광야 지나고 사람들이 너무 까불었어. 너무 촐싹댔던 거예요. 자기 재주와 자기 지혜가 너무 많이 관여해서 주님 어떻게 하면 제 삶을 적용시킵니까? 뭐를 어디 요령을 꼼수를 부리려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면 바르게 잘 살 수 있습니까? 같은 말이에요.

나 바르게 살았음을 과시하려고 구원받은 게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셨다. 어찌 이런 일이?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과 사는 게 똑같은데 가는 곳이 천국으로 합류가 됩니까, 어떻게 주님 가신 그쪽으로 가도록 이렇게 몰아세우십니까, 놀랍습니다. 그 놀라움과 감사함만 나오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다윗은 쫓겨나서 이 광야, 아까 이야기해봅시다. 남녀노소, 직업, 이방인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 자기가 걸치고 있는 것은 다 없어지고 그냥 무승부에요. 왜냐? 죽음이 마땅히 승리해야 되는데 죽음 안에서 살아 있게 한다는 그것은 죽음을 이긴 하나님의 뜻이 다윗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으로 하여금 실연, 실연이 뭔 뜻인지 아시죠. 실제로 연기해서 보이는 거죠. 역할로 실제로 보여주는 거예요.

티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사건의 범죄자나 희생자, 피해자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값싼 배우를 써서 어설픈 연기하면서 사건현장을 다시 재현하잖아요. 재현배우로 실연해 보이는 거예요. 주님께서 아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 인간은 버틸 수 없는 이 땅에서 어떻게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셔서 거기서 생명을 얻는 사람이 등장하게 하는가? 그 주의 뜻을 실연에 옮기는 재현하는 일을 누가 하느냐? 다윗이 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가는 곳은 죽음의 경로에요. 죽음의 경로란 말은 뭐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죽음이 인간보다 더 세다는 것, 죽음이 강하다. 어떤 인간도 죽음보다 센 인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송이나 또는 신문이나 여러 가지 뉴스에 보면 전부 다 한 결 같이 뭔가 놓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죽음보다 더 센 게 없는데 그들은 마치 본인이 죽음을 이길만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예능프로에 나오고 드라마에 나오고 뉴스에 나와요.

그러면 복음을 아는 사람은 저 죽을 인간인데, 윤석열 죽을 인간인데, 문재인 죽을 인간인데, 김정은 죽은 잔데, 복음적 그렇게 봐야 되거든요. 그런데 본인들은 뭘 누락시키느냐 하면 죽을 때 죽고 아직은 멀쩡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죽을 때나 죽음을 만나지 이 땅에선 죽음을 안 만난다고 한 사람이 누구냐? 사울이에요.

왜 사울과 다윗을 붙여줬을까요? 오늘 26장에서. 사울의 모습과 다윗의 모습이 이 절개 면을 통해서 확연히 달라요. 제가 지금 세례요한이 절개지 광야에 섰다 했지요. 세례요한에서,“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하는 예수의 말씀처럼 세례요한 입에서 이쪽을 향하여 계속해서 외치는 게 있어요.

이쪽은 뭐냐 하면 화려한 옷을 입은 왕궁에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세례요한 쪽에 있는 게 아니고 세례요한과 대척관계, 맞은편에 있어요. 저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절개 면을 한 겁니다. 이게 끊어진 겁니다. 끊어져서 세례요한 쪽으로 오려면 여기 반드시 뭐가 있는 하면 회개를 해야 돼요.

회개가 뭐냐? 제 표현대로 하면 회개는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승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무승부의 세계다. 똑같다는 거예요. 잘나고 못 나고 모든 게 특선이든 금상이든 전부 다 똑같은 거예요. 모든 게 똑같아요. 맛있는 수박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전부 다 모든 게 똑같아요. 동일해요.

왜? 죽음의 색깔은 까맣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선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어둡다, 끝. 그냥 어두운 거예요. 어두움에서 예쁜 애 있고 못난 애 있고 하는데 그러나 위에서 보면 검은 색깔로 다 덮여있어요. 깨끗하게 덮여져있습니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덮여져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상대 못하는 죽음과 예수님이 상대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빛이고 세상은 어둡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귀에 날벌레 들어갔을 때 끄집어내는 방법은 후레쉬로 귀에 비추면 날 파리가 빛 따라 지가 알아서 기어 나와요. 그 날 파리가 바로 성도입니다.

나 빛을 보고 구원받았다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건 틀린 거예요. 빛을 보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에 날 파리로 성가시게 했다는 것을 자인해야 돼요. 내가 어두운 것만 좋아했구나. 빛이 있을 때나 빛으로 나올 수 있다고 요한복음 1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나오면 무엇을 아느냐 하면 빛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차이 없이 모든 게 어둡다는 것, 까만 색깔로 덮여져있다는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과 사울의 차이에서 다윗과 사울의 만남에서 다윗은 사울과 안 싸우려고 해요. 여러분 고 점을 체크하시면 파악하시면 사무엘상 26장 다 뚫은 거예요. 다윗을 싸울 이유가 없어요. 지금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왜 죽이려고 하느냐 하면 이 광야가 이스라엘 땅이니까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자기 나와바리, 자기 영역에서 다윗이 설치고 다니는 걸 못 보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울은 다윗이 무섭다는 거예요. 다윗이 사울이 무서운 게 아니고 사울이 다윗이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은 다윗이 갖고 있는 것이 본인에게 전혀 없다는 그 사실이 겁이 나는 겁니다. 그걸 다윗을 없애버려야 자기와 사고방식이 똑같은 것들을 자기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데 다윗은 자기 영역에서 권세에서 빠져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다윗이 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골리앗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골리앗으로 사울은, 나는 골리앗한테 졌다, 라고 포기 먹을 때 사울이 졌으면 사울 밑에 있는 사람들 다 사울과 같이 져야 돼요. 항복해야 되는데 철딱서니 없는 소년, 소년이 눈에 뵈는 게 없잖아요. 소년이 와서 골리앗을 이기니까 이것은 사울 권역 안에 손가락 안에 뭔가 빠져나온 구석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다윗의 요소가 빠져나온 거예요. 자기가 온전하게 자기 사람으로 장악할 수 없는 겁니다.

공군에 어떤 여자 중사가 있었는데 지속적으로 선배한테 성노리개로 다뤄졌지요. 그래서 자살을 계획하고 유서 비슷한 것을 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높은 사람한테 이야기하니까 한숨을 쉬면서, 너 때문에 조직이 무너지겠다,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죽은 여자 중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조직한테 버림받았다고 했어요.

너 때문에 조직이 무너진다, 라고 이야기하니까 죽은 여자 중사가, 나는 조직에게 버림받았다. 그러니까 죽은 중사나 회유하는 상사나 둘 다 뭘 생각합니까? 조직이에요. 조직이 뭐냐 하면 나를 살게 하는 뿌리에요. 나를 생존케 하는 뿌리, 환경이 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 요소에 뭐가 빠졌어요? 하나님이 널 살리고 있다는 요소가 빠졌지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빠졌지요.

그럼 다윗은 뭐냐 하면, 사울의 뿌리는 조직이에요. 이스라엘은 조직이라고요. 죽거나 살거나 관계없이 죽은 자도 조직 때문에 조직에서 버림받았다고 죽었고, 회유하는 그 사람도 조직을 위해서 니 하나 희생하라고 강요했고. 이 조직이 바로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잖아요. 이걸 다른 말로 두 자로 바꿀 수 있는 사람 혹시? 이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이게 교회잖아요, 교회.

집사가 어떤 여자 집사를 자꾸 괴롭힌다고 이야기하니까 목사가 또 여자 집사를 괴롭히네. 그건 뭐예요? 자기를 보호받으려고 목사한테 지켜달라고 했는데 목사를 또 여자 집사를 괴롭히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입 다물라. 왜 다물어야 되는데요? 조직이에요, 조직. 생존과 명예, 체면, 위신 거기에 다 포함돼있는 그 조직, 이걸 뭐라 했습니까? 이걸 사회생활. 초등학교 학과에 있는 사회생활, 자연, 과학, 사회생활. 국어, 산수 나오는 그 사회생활. 그 사회생활 이리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회생활 가지고 하나님은 뭐냐 하면 그 뿌리를 보면서 어둡다, 이걸 죽었다. 이게 죽은 거예요. 죽은 자들의 모여서 사회를 이뤘고 그 사회생활 통해서 네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함을 티를 내는 생활이? 다 같이, 사회생활이에요. 조직이 날 살리는 거예요. 취직 안 하면 굶어죽듯이 조직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뭐 개인적으로 윤리로 주님 앞에 달려들 생각마세요. 윤리도덕 아무 소용없습니다. 괜히 윤리도덕 언급하는 것은 바로 내가 사회생활에서 더 생존에 유리할까 싶어서 종교적인 꼼수 쓰는 거예요. 문제가 다윗은 힘이 있다는 이 사회가 자기의 뿌리가 되고 기저가 되고 기저, 바탕이 되지만 다윗의 뿌리는 뭡니까? 이게 좀 어렵습니다.

다윗의 뿌리는 기름부음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사울을 안 죽일 때 오늘 본문에 나오거든요. 나중에 사울이 자고 있을 때 죽을 수 있었어요. 다윗의 군대장관 하나가 아비새인데 내가 단방 죽이겠습니다, 할 때 죽이지 말라 하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안 죽이느냐 하면 사울을 보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을 볼 때는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의 언약적 요소, 약속적 요소가 자기한테 공히 같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게 뭐냐? 다윗 본인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잖아요.

다윗을 이걸 장난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쌍둥이 아들이 있지요. 에서한테 있어서 장자가 됨을 에서는 그걸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먼저 태어났으니까 맏이다. 이거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보통 인간에게나 흔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야곱은 장자 된다는 것이 그냥 태어났기에 장자고 그게 아니고, 그건 일반 이방민족들이 하는 짓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집안, 아브라함의 약속의 집안 같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안에 흐르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과 그걸 뒤집어버리는 그러한 내용으로 차고 들어온다는 것을 야곱은 알았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나게 하고 먼저 태어났다는 단지 이유 때문에 맏이가 되었다면 그 맏이는 이건 어디까지나 한시적 유보적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 발상, 나중에 태어나면서도 언젠가는 맏이가 된다는 그런 발상을 한다는 이것이 바로 리브가가 봤던 하나님의 계시를 야곱은 곰곰이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거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겁니다. 그 찬스를 노칠 리가 있습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데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게 그 찬스를 노칠 리가 있어요?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내가 말씀을 달성하는 게 아니고, 이게 참 어려운데, 내가 그 말씀을 내 힘으로 애써서 성취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 애씀과 관계없이 모든 절차와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야곱은 받아들인 겁니다. 따라서 자기가 거짓말하는 것도 무엇의 일환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의 일환이 된 거예요.

그것을 쉽게 다윗은 자기 일이 없어요. 사울은 하나님의 일이 없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 일이 없기 때문에 어렵게 이야기해서 다윗은 자기를 위한 시간과 자기를 위한 공간이 없어요. 나를 위한 시간과 나를 위한 공간을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가든지 간에.

그래서 여기서 다시 세례요한 언급하겠습니다. 절개 면 나왔지요. 갈라졌습니다. 여기에 세례요한이 서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서있는 이 공간, 이것은 자기를 위한 공간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 맞은편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모든 각자의 자기 아파트 있고 집 있을 게 아닙니까. 이 공간은 누굴 위한 공간입니까? 자기를 위한 공간이죠. 그리고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재산과 시간들, 누굴 위한 시간이에요? 자기를 위한 시간이죠.

여기서 뭐냐? 이쪽은 뭐냐? 저주받는 곳이에요. 지금 세례요한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 하나님 나라 가까이 왔다, 심판 날이 가까이 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앞에 건너올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례요한은 이걸 가지고 회개하라고 돼있어요. ‘회개하라’를 세 자로 옮기면 무승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하여튼 나라는 말을 쓰면 그것부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만약에 나를 써버리면 ‘너’가 돼버리는 거예요. 너는 특선, 나는 금상, 은상 이렇게 나와 너 돼버리면 무승부가 안 돼요. 천국은 승부가 없는 곳이에요.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비유할 때 아침 아홉 시에 온 사람, 그 다음에 열 시에 온 사람, 열두 시에 온 사람, 세 시에 온 사람, 마지막 오후 다섯 시 퇴근 한 시간 전에 온 사람, 그들 사이에서 승부가 났습니까, 안 났습니까? 주님 뜻은 뭐냐? 한 데나리온 씩 줬기 때문에 그 받은 품삯에 차이가 없어요. 승부 낼 게 없어요. 승부 낼 게 없는데 먼저 온 사람이 화를 내는 순간 이거는 하늘나라를 전혀 이해 못하는 하늘나라 맞은편에 있는 세계, 인간세계, 아까 말한 네 자로 하면 사회생활, 사회생활에서는 그게 뭐냐 하면 분노의 유발요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왜 다윗을 죽이고자 하느냐? 딱 이유는 하나입니다. 화가 났어요. 화가 나서 그래요. 이기고 싶은 거예요. 승부를 끝까지 보려고 하는 겁니다. 승부 볼 필요 없는데. 승부를 보겠다는 말은 뭐냐? 승리하겠다는 뜻이지요. 자, 묻습니다. 승리하겠다, 앞에 주체가 누구 들어갑니까? 뭔가 승리 나오면 앞에 누가 승리한단 말이에요? 나.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어야 승부라는 게 성립이 되거든요.

그런데 지금 다윗의 동네는 하나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음의 발자국, 경로를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이 가는 길은 곧 기름부음 받은 자의 길이고 기름부음 받은 자의 길은 곧 장차오실 신약의 예수님이 가는 길을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핍박받고 고난 받는 그 길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승리해야 된다는 나를 자기를 살아 있는 자로 보고 이왕 살아 있는 것 지기는 싫잖아요. 이왕 살아 있는 것. 사람이 죽는다고 했는데 일주일 만에 살아나보세요. 그분 살아난 뒤에 할 일이 뭔지 압니까? 지 잘났다, 남한테 저 노인네보다 건강하다. 그것도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마음과 행동하는 태도는 지고는 못 산다는 거죠. 크게 쓸게요. 딴 거 쓰려고. “나를 지키는 자는 나다.” 나를 지키는 자는 only 나뿐이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자는 나뿐이다. 시작을 뭐부터 시작합니까? 나부터 시작하지요. 끝나는 건 뭡니까? 내가 주어가 되고 목적어가 뭐예요? 나잖아요. 그러면 중간과정에 뭐냐 하면 내가 지켜진다면 이거는 바로 나 자체적으로 나는 승리로 간주하겠다. 이게 바로 사무엘상 26장에서 사울입니다.

그런데 여기 26장 5절에 보세요. “다윗이 일어나 사울의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대장관 아브넬의 머무는” 아브넬은 어느 쪽이냐 하면 사울 쪽이에요. 아비새는 누구 쪽이냐? 다윗 쪽입니다. 사울의 장관은 아브넬, 다윗의 군대장관은 아비새, 일종의 보디가드, 친위대지요.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밤이니까 당연히 누워야지요.

그러니까 사울은 나를 지키는 자는 나라 했을 때에 자기가 잠들었으면 자든 나를 누가 지키느냐? 또 다른 내가 있어서 잠든 나를 지켜줘야 되지요. 말 되는, 잘 안 되는데 되는 것 같은 느낌 들지요. 내가 잠들었으면 잠든 자를 누가 지켜야 돼요? 이 원칙에 의하면 나를 지켜야 되겠지요. 나를 지키는 아브넬 장군이 보디가드가 내 대신 나처럼 충실하게 나를 지키라고 이렇게 세워놓고 지는 마음 놓고 잠을 자는 거예요.

이 말은 다윗이 있다는 소문난 광야에 들어오면서도 사울은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패로 끝났지요. 왜 그러냐 하면 사울에게 뭐가 왔냐 하면 잠이 든 거예요. 잠은 우리의 낮의 활동을 이깁니다. 실컷 이기려고 했지만 밤 되니까 밤의 승자는 누굽니까? 내가 아니에요. 자서는 안 된다, 자서는 안 된다, 자서는 안 된다……, 벌써 자고 있습니다.

잠이 인간을 이깁니다. 잠은 곧 죽음이에요. 성경에서 죽는다 할 때 그걸 잠잔다. 지난 낮 설교에 했지요. 스데반 집사는 자니라. 잠이 이겨요. 인간보다 잠이 더 우세합니다. 사울이 자길 지키는데 실패했습니다. 자기가 잠보다 한 수 아래인 것을 모르면서 승리를 기대했던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이유가 다윗이 무섭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윗이 겁이 난 거예요. 겁이 나서 선빵, 지가 먼저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예수님이 무서워서 그래요. 예수님은 자기들 권역 안에 포함이 안 됩니다.

그 여자 중사는 자기가 조직을 이기려고 했어요. 그러나 조직은 여자 중사가 아니라 어떤 개인이 조직을 이기는 것을 조직이 용납을 안 해요. 그게 군에서 월급 주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래요. 니 할 것 다하고 군대 다니고, 그러면 군대 자체가 그걸 용납 안 해요. 군대에 충성해야 월급이 나옵니다. 월급을 포기하고 퇴직하든지 아니면 군에 남든지 둘 중에 하나해야 하는데 이 중사가 퇴직도 싫고 남으려고 하니까 힘들고 방법은 뭐냐 하면 자기가 너희 한 번 당해봐라, 하고 그냥 자살한 겁니다.

그게 가룟 유다 같아요.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여자 중사의 잘못은 자신의 적이 본인인 것을 몰랐던 거예요. 내 적이 나라는 것, 나의 살고 싶어 하는 내가 정작 죽이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살고 싶은 내가 하나님의 원수인 사실을, 뭐 교회를 안 다녔겠지요. 교회 다녔겠습니까, 다녀도 모르는데 알았겠어요? 나 산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날 파리로 원수로서 살아간다는 걸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 성도끼리 이야기해보게 되면 항상 제가 듣고 싶은 것은, 나의 일이 없다는 걸 참 듣고 싶어요. 그리고 나의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 일을 하게 하셨다는 그 이야기가 참 듣고 싶어요. 언니한테, 엄마 요양원에 보내라고 해볼까, 그게 주의 일이 되길 바랍니다.

주의 일을 하게 되면 내 위신 접어두고 거기서 주께서 하라 했기 때문에 승부가 무승부가 돼요. 내가 누굴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이긴 상태를 가지고 나를 통해서 재현배우, 나를 통해서 이걸 재현시켰구나. 이렇게 망가져도 이게 승리라는 거구나. 분명히 망가졌다 나도 생각하고 남들도 생각하는데 주님만 승리한 거예요.

그게 뭐냐? 뿌리가 이 세상 사회생활 조직에 둔 게 아니고 뿌리가 이 세상에 계시면서도 이 세상을 엎어버린 그분한테, 세례요한 모습이죠. 세례요한 같은 뿌리를 우리한테 우리가 박혀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 순간들을 늘 허락하십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나를 지키는 자는 나다. 같은 말인데요. 이것이 바로 사울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렵게 하겠습니다. 그럼 아까 농축된 것, 엑기스 한 번 끄집어내봅시다.

다윗 그리고 사울,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울을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자기가 승자가 되고 싶지만 다윗은 사울과 게임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승리할 마음조차 없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무승부에요. 인간 대 인간이 누가 승리한다는 게 의미 없는 짓이에요. 아무 의미 없다고요.

그걸 보면 유럽 사람들 축구 보고 또 한국 사람들 덩달아 밤새면서 축구 보고 뭐 야구 보고 메이저리그 보고 또 그것만 스포츠인 줄 압니까? 국민의 힘과 민주당 누가 세냐? 퇴직해서 할 일 없어서 채널 틀고 리모컨 들고 두르르 당기면서 보는 것 전부 다 게임에서 내가 미는 편이 이길 때 사는 즐거움을 거기서 찾는 거예요. 트럼프가 잘했네, 바이든이 잘했네, 그것도 게임이에요.

그런데 다윗과 사울에서 다윗은 게임할 의사는 전혀 없고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게 있다는 거예요. 기름부음 했지요. 기름부음 그냥 메시아로 봅시다. 메시아적 요소, 사울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었으니까 사무엘 통해서 안수 받았거든요. 그러면 메시아적 요소 있지요.

이 메시아적 요소를 사울이 예뻐서가 아니라 메시아적 요소를 하나님이 허락했다는 것은 그 메시아적 요소를 철회하는 것도 누구 소관이란 말입니까? 주신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떻게 메시아 요소가 어떤 과정을 이뤄서 성취가 되고 어떻게 이것이 철회가 되고 또는 성취가 되는 모든 손길은 누구만 있느냐 하면 이거는 하나님에 일임돼야 된다고 본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저 사울은 나를 적으로 보지요. 게임이니까 적으로 보지만 다윗은 적으로 봅니까, 안 봅니까? 적으로 안 보는 거예요. 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전쟁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어쩔 수 없이 사울과 다윗이 내부전쟁은 하는 모양새를 낸 것은 실은 다윗 보기에 적은 뭐냐 하면 블레셋이에요. 블레셋이라고요.

그래서 다윗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이 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통해서 블레셋을 이겨야 되는데 현재는 블레셋을 이긴 게 아니고 오히려 블레셋에 밀리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사울 왕 되고 난 뒤에는 온통 패배입니다. 승리가 아니고 그냥 패배에요. 아말렉한테도 이겼다 하지만 사실 그것도 문제 있고. 블레셋에 지고 있거든요. 사무엘상하 들어가면 완전히 패배당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울이 블레셋한테 죽지요.

그러면 다윗이 계산해보면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 있기 때문에 필히 이긴다. 두 번째, 현실적으로서는 이스라엘이 지고 있다. 이 둘의 모순된 사태를 제대로 자연스럽게 논리가 이어져야 될 문제겠지요. 그럴 이유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 이유를 다윗이 궁금한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 전쟁을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하나님의 원수가 저기 있는데 내가 당장 죽여 버리겠습니다, 할 때 죽이지 말라 하는 거예요. 왜 죽이지 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세워서 전쟁하기 때문에 여기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적하는 적이 등장해야 되고 그 적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정복하는 식이 하나님의 전쟁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에 대적하는 이걸 이스라엘에서는 뭐냐 하면 이게 우상이라고 해요. 그러면 우상과 여호와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바로 블레셋 전쟁에서 나왔지만 사무엘상에 나왔지만 언약궤가 이스라엘 내에 들어와야 돼요. 근데 지금 이 판에 언약궤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진영도 아니고 블레셋 진영도 아니고 그 중간 지점에 와있어요. 블레셋이 반납했으니까. 문화재 반납하듯이 슬쩍 밀어 넣었으니까.

그러면 언약궤가 이스라엘 기름부음과 만나려면 기름부음 받은 자가 둘이 되면 안 돼요. 하나가 돼야 돼요.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사울이 죽는 현상이 일어나선 안 되고 그 주변에 있는 우상 섬기는 나라 블레셋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무참하게 무너질 때 그 무너졌다는 그것과 관련된 기름부음 받은 자가 바로 언약궤를 모실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다윗은 생각한 겁니다.

소년다윗이 누구 장수를 이겼습니까? 골리앗을 이겼지요. 골리앗이 뭐냐 하면 바로 할례 받지 않은 언약이 없는, 내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소년다윗이 이야기했어요. 할례 받지 않은 언약이 없는 저 민족을 우리가 질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기는 게 아니에요. 우리와 함께 있는 할례라는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저건 그냥 밥이지요. 그냥 이기게 돼있다는 거예요.

마치 갈렙과 여호수아가 광야를 탐지하고 난 뒤에 그 약속의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막강합디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못 이긴다는 뜻이 아니고 갖고 놀만 하더라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시시한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허락한 것을 우리는 감사합시다. 이렇게 보고한 거예요. 다른 쪽은 죽었다 하고 있는데. 즐기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을 안 죽이는 거예요. 형님 왜 이러십니까. 우리의 적은 블레셋이이에요. 형님 지금 오해하신 거예요. 우리에게 누가 이겼다, 졌다는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자기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 일이 일체 없어요. 이게 오늘날 성도가 살아야 될 모습이에요. 다윗처럼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 일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관리한 필요 있다, 없다? 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용하지 마시고 막 사시면 그냥 막 살면 돼요.

왜냐? 내 뿌리가 주님으로부터 주님이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티를 내는 그 삶을 살았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주의할 것은 우리가 인간과 상대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내 믿음의 실력 볼래, 내 기도 얼마나 오래하는지 볼래, 이럴 필요가 없어요. 전쟁은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 주의 이름이 있어도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자, 그들은 그들이 적이고 우리가 할 일이 아니고 주께서 그들로 하여금 저절로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오늘 첫째 시간하면서 끝부분에 나오는 중요한 문제는 뭐냐? “사울은(정말 이건 중요한데) 자기가 만든 현실(시공간)으로 인하여 스스로 괴멸되었다.” 이게 세상 사람입니다. 방송에 나오고 예능에 나오고 드라마에 나오고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전혀 부러워하지 마세요. 자기가 만든 세력권 있잖아요. 자기의 세력권이 오히려 올무가 되어 그 중력으로 12층 아파트가 마이애미에서 무너지는 거예요.

자기가 만든 현실 있잖아요. 나에게 집중하는 현실, 나만 쳐다봐, 라고 구성한 현실, 애 둘 있고 남편 잘해주는 이런 현실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지가 지옥 가는 거예요. 무너지는 거예요. 얼마나 세상 사람이 어리석습니까. 이걸 사울에다가 목사에다가 집어넣으세요. 목사가 지 목회 잘해서 교인들 많다는 교회가 그 목사를 지옥 보내지요.

그런 목사한테 복음 전해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 버리고 십자가 믿으세요. 이런 것 그 사람 안 통합니다. 어디서 이단이 굴러 들어와서, 이러면서 이 교회가 얼마나 성도의 간절한 기도와 새벽제단을 쌓아서 만든 조직인데, 아까 조직 이야기 나왔지요. 교회 이야기 나왔지요. 입 다물라. 조직 무너진다. 조직이 뭐예요? 조폭이에요? 조직 이야기하게 되면?

말했는데 사울에다 이걸 집어넣읍시다. 사울이라 하지 말고 인간은 자기가 만든 시공간에 의해서 현실의 공간에 의해서 스스로 괴멸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현실 속에는 주의 일이 아니고 전부 다 모든 게 자기 일이기 때문에. 자기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큰아들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자기 영향력 아닙니까.

자기의 영향력, 자기의 관계망, 자기의 손때가 묻은 그 영역, 그것이 자기가 무너지게 하는 하나에 부실공사 된 아파트 안에 스스로 그 안에 갇혀서 마스크 쓰고 안 빠져나오고 사는 겁니다. 그 사울의 모습, 우리 주님하고 싸우지 맙시다. 주님은 우리와 안 싸워요. 우리 마귀와 싸우지요. 우리를 여기에서 빼내줄 때 우리가 바로 선지자요, 우리 뿌리가 십자가에 꽂힌 자만이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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