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32강 마태복음28장10절(나다운 것)20210628b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 28장 1절 보게 되면 부활의 이야기였고 마리아,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될 줄 몰랐습니다. 이 말은 부활 자체가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의 머리에서는 인간의 한계 바깥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에요. 자기의 능력 밖의 이야기에요.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게 정상이고 부활을 만약에 믿게 되면 나는 없다가 돼야 정상이에요. 나는 기존의 나의 모든 것이 박살나고 밟혀도 부활만 알았다는 그걸로 저는 충분해요. 그걸로 나는 대만족입니다. 감사합니다가 나와 줘야 그게 부활을 믿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도 믿고 돈 믿고 다 믿고, 부활 자체가 뭔가 이상해,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의심하는 것들은 자기 권한 밖으로 권역 밖으로 내보내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마리아, 제자들은 부활을 의심했잖아요. 그러니깐 내가 있는 이 영역에서는 부활 자체가 들어올 자리가 없음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을 찾아갔는데 뭘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갔느냐 하는 거예요. 진짜 죽었을까를 확인하려고 갔을까요? 아닙니다. 진짜 죽고 예수님 시체는 백퍼센트 무덤 안에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안다. 그 앎이 자아를 구성하는 겁니다. 내가 아는 것, 이걸 동그라미 치면 이게 자아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죽어있다. 다른 말로 하면, 시체가 거기 있다.
예수님 시체가 거기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거기 있음을 확신하는 내가 여기 있다가 나에게 더 중요한 문제에요. 나는 내가 나답게 여기 있다. 또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이렇게 있는데 합치면 인간은 인간답게. 부활은 이 자체를 뭐로 보느냐? 이 자체를 부활되지 못한 죽음의 세계로 보는 거예요.
내가 나답게 되는 것, 내가 성도답게 되는 것, 내가 목사답게 되는 것, 이걸 가지고 저주의 세계로 봅니다. 아직도 저주의 세계나 통용되는 개념들을 사용하는구나,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모든 개념은 무엇과 다 연결돼 있느냐 하면 내가 나답게 되는 것과 연관해서 저것은 수박이다, 저건 장미다, 저건 선풍기다, 전부 다 그것을 의미를 개념을 갖다 붙이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 시작하면서 어렵더라도 여러분들의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꽃입니다. 나는 여기 출판사 직원입니다. 이름은 아무것이나 김춘수라 합시다. 자기 책상 앞에 있는 꽃을 보면서 내가 꽃이라 이름을 부를 때 개념이죠. 부를 때 꽃은 나에게 하나의 의미 된다, 할 때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나에게로 와서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의미라 하는 것은, 내가 나답게 되는 일환이에요. 방식이라고요. 내가 나답게 되는 방식.
모든 행동과 생각이 내가 원하는 나답게 되기 위해서 거기다가 예수도 집어넣고 부활, 십자가, 언약, 하나님, 여호와, 삼위일체 다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나답게 되기 위해서.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이나 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그 사회가 무슨 사회냐 하면 여호와 믿는 사회에요. 그러면 여호와 믿는 사회에서 내가 나답게 된다는 말은 여호와가 주신 율법, 그 율법을 해석하고 이해할 때 그 사회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가장 내가 나다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어떤 자들을 상대해서 제자라 부르시고 어떤 자들을 해서 구원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좀 아셔야 돼요. 철 있다, 너 믿을 만 하구나, 이게 아니에요. 완전히 꽉 막혀있어요. 어디에 막혀있다? 내가 나답게 되는데 막혀있다고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인가 4장인가 잘 모르겠는데요. 마태복음 5장인가 보면 그건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20절에 보면 나오지요.
너는 나를 따르라. 베드로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했지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 사람을 어디서 낚습니까? 고기는 바다에서 낚는 건 아는데 사람을 어디서 낚는단 말이에요. 낚을 장소가 어디냐 말이죠. 그거는 흔히 말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
여기 보세요. 낚는다는 말이거든요. 낚는다는 말은 고기가 낚시꾼 만나서 낚시꾼 인물 예쁘다고 지가 물에서 기어 나오려고 애씁니까? 고기가 낚시 바구니에 담기는 것은 낚일 경우에요. 낚이는 거예요. 그런데 현재 인간들은 어디에 낚이느냐 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를 위해서 사람 낚는 어부로서 이미 인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저 사람 같으면 우리 집 사윗감 된다. 또 저 사람 같으면 우리 집 며느릿감 된다. 낚이고 싶은 대상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손예진도 있을 것이고, 그건 너무 비싸게 쳐서 안 되죠. 예를 들어서 아들이 결혼 안 했으면 좋은 색싯감 있으면 생각이 나지요. 아들이 괜찮은 며느릿감과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그게 절차상 그런 결과, 결과해서 결국 돌아오는 것은 뭐냐 하면 나 괜찮은 시어머니라는 티를 내는 일환이 되고 방편이 되는 거예요.
모든 생각은 뭐냐 하면 꽃이라도 저게 꽃이라고 불러줄 때는 나에게 와서 나를 나답게 되는 의미로 풍성화시킬 때나 우리는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이미 어부로 살아가고 있어요. 어부로 살고 있다고요. 괜찮은 남자나 여자나 낚였으면 좋겠다. 낚인다는 것은 내 뜻이 보다 우세적으로 관철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낚는 내 뜻이 상대방 뜻은 완전히 눌러버리고 내 뜻으로 그냥 관철되는 것.
회사에서는 그것을 뭐로 나오느냐 하면 월급으로 하지요. 월급 다른 데보다 많이 줄게. 돈, 월급, 사회는 바로 사람 낚는데 돈으로 낚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봅시다. 주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바로 그런 세상에서 빼내준다, 구출한다 이런 뜻이에요. 낚인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간단해요.
낚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공통된 특징은 예수님처럼, 이에요. 베드로처럼 아닙니다. 나 열 명 낚았어, 이러지 마세요. 베드로처럼, 베드로는 하나의 수단이고 그 사람이 누구처럼? ①예수님처럼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처럼 되는데 우리가 공부하는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거든요.
그러면 베드로로 사람 낚으란 말은 결국은 뭘 생산하란 말입니까? ②부활된 사람을 생산하도록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진짜 그렇게 제대로 낚인 사람은 뭐로만 기뻐하겠어요? 죽어야 될 내가 부활됐다는 이것으로 충분하지요. 그래서 충분하게 되면 예수님처럼 됐지요. 그러면 예수님처럼 되려면 뭐가 탈락돼야 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하는 ‘나답게’가 여기서 여지없이 탈락해야 되지요. 논리 고리가 그렇게 진행되는 겁니다.
결국 마지막엔 뭐냐? 나답게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부활할 때 나답게 되려는 자를 예수님의 부활과 중간에 매치되도록 주선을 하십니다. 주선할 때 여기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두 사람이 등장하지요. 모습은 사람인데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3절에 보면,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그거고.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천사가 어떤 데는 둘로 돼있는데 하여튼 천사입니다. 천사가 와서 그 여자들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천사는 어느 쪽이냐 하면 인간 쪽이 아니고 영적 세계에 속하지요. 영적 세계에 속한 그 요소가 누구한테 전달되었습니까? 인간들 세계 속에 전달이 된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돼요. 지금 이게 가당한 이야기인지 가당치 않은 이야기인지 가능한 이야기인지 보세요. 영적 세계의 사실, 내용이 육적 세계에 전달됐단 말이죠. 육적 세계란 몸뚱이만 있는 게 육적 세계가 아니잖아요. 모든 스며든 정신이 완전히 무엇과 반대입니까? 영적 세계와 반대가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던 그 세계란 말이죠.
예수님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호응하던 사람이 제자들 중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영적 세계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그저 육적 세계밖에 몰라요. 육적 세계밖에 모르는데 여기에 영적 세계가 왔을 때 고분고분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겁니다. 육적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고분고분 넘어갈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넘어갈 수 없겠지요.
여기 뭔가 조치가 있어야 되고 큰 변혁이 일어나야 되겠지요. 그걸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아무런 변혁도 없이 그냥 지식 하나 챙기면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제가 다시 검토해보자는 이야기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육적 세계에서 살다가 졸지에 영적 세계로 옮겨갈 때 이걸 수학적으로 이항, 항을 넘어선다고 하거든요.
수학문제 하나 풀어보세요. 4x=3x+7, 요샌 초등학생도 할 줄 아는. 보통 3x 이항해서 x를 풀잖아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항이 안 된다는 거예요. 육적 세계에서 이항해봐야 맨 육적 세계지 영적 세계로 넘어갈 수 없어요. 천사가 개입했잖아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소식을 전했는데 반응들 보세요. 믿을 수 있어요, 못 믿어요?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다면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게 제 말은 극히 수상하다는, 굉장히 수상한 거예요. 이게 가짜에요. 내가 나답다는 게 없어지지 않는데 믿는다?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그럼 이걸 어떻게 푸느냐 하면 ‘=’이니까 이쪽과 이쪽이 같다는 뜻이에요. 닮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걸 닮게 하면 돼요. 1x+3x=3x+7 같으면 여기 3x 닮은 게 나왔지요. 보통 1x를 그냥 x라 해요. 양쪽에 3x를 지워버리면 x=7 나오잖아요. 정답은 7이잖아요.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 육적 세계에다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일어난 그 상대자를 우리 곁에 붙이는 겁니다. 마귀를 우리한테 붙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귀와 붙어서 싸웠으니까. 예수님이 붙어 싸웠던 그 마귀를 주님께서 우리한테 갖다 붙여주는 거예요. 이것 수학 아시겠습니까? 다시 다른 예를, 자칫하면 분노를 유발하겠다.
2¹⁰+x=2¹¹ x는 뭐냐 할 때 2¹¹ 됐으니까 이것과 똑같은 걸 하면 돼요. 2¹⁰+2¹⁰=2¹¹, 정답은 2¹⁰이에요. 더하기니까. 같은 걸 붙여주면 2¹¹ 돼요. 왜? 열 번 곱하기를 한 번 더 했으니까. 이건 좀 어렵구나. 어려운 건 후딱 지웁시다. 제 말은 천국 가려고 생각하지 말고 이 땅에서 예수님이 경험한 것, 체험한 것 고대로 우리한테 붙이는 방식으로 체험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이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을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은 잘못 없어요. 예수님은 죄가 없으니까 잘못은 누구한테 있어요? 예수님을 둘러싼 이 세상이 잘못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면 이 땅에 와서 죽은 예수님을 주님께서는 네가 회개하고 천국 오라하고 이항을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예수님을 죽였던 그 사건을 우리 곁에 두는 겁니다. 구원받을 성도 곁에다 예수님을 죽였을 때 의견일치 봤던 예수 죽여, 죽여. 죽여를 우리 곁에 두는 거예요. 우리 곁에 깔아두는 거예요. 그것도 매일같이.
이렇게 돼버리면 나라는 인간이 이래 서있지만 나란 인간을 시간 따라 눕혀봅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이가 육십 칠십까지 눕혀보자. 그러면 이 순간을 사건으로 잘라보는 거예요. 이 개입된 사건 하나가 무슨 사건이냐? 전부 다 십자가 사건인 거예요. 십자가로 나를 잘라보는 거예요. 큰언니가 와서 돈질하고 하는 모든 사건, 이 사건이 뭐냐? 나를 나답게 하는데 방해하는 사건들이에요. 내가 잘나야 돼.
세상에 돈 좀 없어도 살 수 있고 집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나를 개 무시하면 죽여 버리듯이, 너 돈 없다고 나를 무시해. 도끼 맛을 봤어, 이래서 나중에 명절에 와서 도끼질하고 하죠. 너하고 의절이다, 끝났다. 니가 돈으로 시비 걸어서 의절이 아니라 니가 내 의견을 개 무시해서 한 것이다.
왜 내 의견을 무시하면 화가 나느냐 하면 꽃은 나한테 의미가 되었거든요. 그럼 내 의미의 창고에 내가 애써서 내 의미로 전환시킨 것들이 가득 차있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10장에서는 뭐냐? 자기 의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는 자기 의가 가득 찬 거예요. 나는 성의껏 설명했는데 못 알아들어. 싫으면 족보 파자, 끝났다. 이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그 언니를 주님이 보냈다는 거예요. 왜? 부활만으로 기뻐해야 할 네가 내가 나다운 것으로 기뻐하려고 하는 거예요. 나 목사 맞지, 나는 집사 맞지, 나는 성도 맞지, 날 무시하지 마, 내가 기도를 얼마나 했다고. 자꾸 어떤 내가 한 것이 의미가 되어 누적이 된 거예요. 오늘제목이 좀 길지만 4x=3x+7, 이걸로 할까요?
천당 갈 생각 이왕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당했던 것을 내 삶의 현장에 고대로 가져오는 거예요. 4x=3x+7에서 4가 둘로 분리돼요. 4는 뭐냐? 1+3 해서 4잖아요. 그러니까 x+3x=3x+7 할 때 x가 뭐냐? 귀신이다, 귀신. 악마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나한테 붙여준 것, x=7이 아니고 x=악마의 자식이다. 내가 십자가에 죽인 장본인입니다.
이게 슬퍼서 하지 마시고 이걸 알려줘서 고마워서 이런 고백이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자체가 주님의 주님 됨이거든요. 우리는 어디 고집하느냐? 내가 나됨에 고집해서 자꾸 주님을 내게 끌어당기려고 생각한 거예요. 주님, 저 예쁘니까 천당 보내주세요. 십자가 피로 나를 죄 씻어달라고 요구만 해요. 지는 멀쩡하니 건재하면서, 멀쩡하니 있으면서.
그리고 목사가 하도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는다고 하니까 그걸 지식으로 달달 외웠어. 외워서 지는 나다움에 멀쩡하고 그것에 보태주는 요소로서 십자가가 훅 들어와 버리니까 그 십자가가 뭘 나를 토막 내. 오히려 그냥 걸치고 있는 지식에 불과하지요.
부활이란 말은, 네가 더 이상 이 세상을 간본다, 또는 점검한다, 그럴 이유는 없어졌다는 겁니다. 네가 나서서 전에는 점검해서 이게 나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 따져서 당신은 나한테 뭐 해줄 거요, 나는 당신한테.... 이렇게 계산적이었는데 부활세계는 그럴 조차 필요 없는 거예요. 그렇게 살았다는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된 마귀의 짓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주신 환경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십자가 사건은 왜 터졌는가, 왜 일어나야 하는가? 그런 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스데반 집사 이야기하면서 사울 이야기했거든요. 사도가 되기 전의 사울. 사울이 뭐라 했느냐 하면 저 스데반은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설교에서 그 내막을 다 설명을 못해요. 시간 관계상. 무엇을 내가 약간 생략했느냐 하면 도대체 사울이란 자는 어떻게 해서 성도가 되었는가, 그 문제에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걸 마땅하다고 여겼던 자기 입장에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 그 사울이 어떻게 해서 성도가 되었느냐 이 말입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사도 될 의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 없다는 게 없는 데서 있게 함을 더 빛나게 만들지요.
그리고 그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장님이 되었어요. 장님이라 하는 것은, 눈 뜨고 살아도 살까 말까할 판에 눈 감겼다는 것은 거의 뭐 죽는 날만 기다리지요. 장님이 되었는데 아나니아 그 사람한테 안수 받고 눈 떴지요. 그러면 소급해서 볼 때 전에 내가 스데반 집사 잘 죽었다고 옷 지켜줄 때 그때 눈 떴어요, 안 떴어요? 눈 떴잖아요. 그때 자기는 귀 열리고 눈 떴다고 생각했지요. 세상을 보고 있지요. 그게 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나가 자신을 정상이라고 본 거죠.
정상이라고 봤는데 주님께서 정상을 뭐로 바꿨습니까? 비정상인 것을 티를 내버리고 그걸 노출시키고 제대로 된 정상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다시 정상이 됐을 때에 사울은 기존 세계에 그냥 살면서도 이미 그쪽 세계를 떠나서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거예요. 들어와 버린 거예요.
방금 제가 진입이란 말 했잖아요. 천국은 진입하는 곳이지 소유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어떤 공간이에요. 공간이기 때문에 비록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말씀인가, 두세 사람이라도 이 공간에 들어온다면 두세 사람이라고 숫자가 적다고 해서 이 천국의 공간이 그 값어치가 훼손될 리가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많이 들어오면 훼손될 가능성이 좀 있겠지요. 왜? 사람들이 숫자 많은 것에 정신이 팔려서.
조회수 보고 몇 명 들어왔느니, 왜 ‘좋아요’를 안 누르는지 몰라 하면서. 돈 되거든요. 좋아요 이런 것 숫자에 정신이 팔려서 차 떼고 포 떼고 다 떼도 그러니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이니까 두세 사람이 목사 본인하고 사모님하고 애 하나 세 명, 세 명이라고 주의 이름과 함께 있으면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주의 이름 부르면.
이러한 천국 공간에서는 뭐가 빠지느냐 하면 나의 나다움이 이게 용서가 안 됩니다. 인간이 하는 짓이 바로 지옥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부활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 십자가부활 사건을 빛내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나의 나다움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가 이런 세계란 것을 늘 주께서는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계 천국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나답다는 이 자체를 우리가 끄집어내는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했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눈이 열려서 뜨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하고 나는 날마다 나의 의가 배설물로 빠져나간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하면서 목사가 해야 할 소리는 목사가 들을 소리는 뭐냐 하면 깔때기에 물 빠지는 소리 그것만 들어야지 물이 어디로 빠지면 어떤 물이 좋으며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라고요. 복음이 들어와서 자기를 통해서 꼬르르 물 흐르는 소리 그것만 생각해야지 내 설교 듣고 몇 명이 감동받고 눈물 흘리고 이런 것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깔때기니까 통과하는 기관에 해당되거든요. 목사는 그걸로 기뻐해야 돼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게 아니고 베드로 자체가 낚싯대가 돼야 돼요. 그리고 그뿐이어야 돼요. 내가 낚은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이런 따지면 안 돼요. 그냥 낚싯대에요. 주님이 쓰신 낚싯대로 족해야 됩니다. 이게 목사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어려운 것 놔두고 자꾸 뜸 들이고 있는데 어려운 것 해봅시다. 자, 수련회 교재에 보면 5번인가 6번인가 거기 보면 나와요. “기호는 폭력이다.” 구원, 언약, 십자가 다 폭력이에요. 폭력이란 말은 상대를 박살내겠다는 거예요. 나의 나됨을 박살내는 기호가 성경적 개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기호는 부활의 세계에서 왔거든요.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세계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부딪칠 수밖에 없지요. 이해한다, 받아들인다, 성립 안 됩니다. 부딪쳐야 나의 나다움, 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나만 무의미한 게 아니고 내가 그동안 간직했던 나의 모든 신앙적인 고상한 것들이 다 무의미하게 돼야 되지요. 풍선에 물 넣어놨는데 바늘로 풍선 찔러보세요. 안에 물이 가만있겠습니까? 내장 흐르듯이 와르르 쏟아져야 되지요. 와르르 쏟아질 때 그 존재의 무게가 얼마나 가볍습니까? 참 가벼워요.
집사님, 특선하고 난 뒤에 굉장히 가볍지요. “사람들 또 내 솜씨에 속아 넘어갔구나. 신난다.” 이런 마음 아닌가요? 아무것도,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언제 느끼느냐 하면 최고의 경지에 오를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걸 알아요. 왜냐하면 남들 보기엔 야 재주가 비상하네, 하지만 진짜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이건 발가락으로도 그릴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데 초자들은 그게 위대한 솜씨처럼 오해를 하는 거예요. 바둑 두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일 말도 안 되는 게임이 바로 한석봉과 그 어머니의 게임이에요. 이건 게임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무승부 해야 돼, 그거는. 지는 평생 40년 동안 떡 썰어왔고 한석봉은 글 쓰는데 어떻게 이게 게임이 됩니까? 게임이 안 되지요. 여우와 두루미의 음식대접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주둥이가 긴 두루미가 음식대접해서 누가 빨리 먹나. 이게 말이 안 되지요. 토끼와 거북이는 달리기하면 안 돼요. 남자와 여자가 싸운다? 이게 말이 안 돼요. 몰라. 여자도 공수특전단 돼서 산야를 누볐던 사람이라면 되지만 이건 안 됩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나답게 되는 것을 박살내는 일을 해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어서 좋은 예수를 받아들이고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 사랑해. 이걸 왜 받아들입니까?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이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왜 이 짓해요? 우리가 천국으로 이항이 안 돼요. 옮길 수가 없어요. 그냥 그 자리 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마귀를 우리 곁에 보냅니다. 그게 바로 4x에서 x. 우릴 그냥 보내요. 옆에 보내는데
그러니까 이게 어떤 예냐 하면 사울에게 누굴 보내느냐 하면 바로 스데반 집사를 보내는 거예요. 붙여줘요. 마귀를 보내게 되면 나의 나다움은 극한에 이릅니다. 역시 믿을 놈은 나밖에 없어. 나를 지키는 자는 나야. 다른 사람은 못 지켜. 이것을 어제 주일 낮 설교에 무슨 의식이냐 하면 주인의식이겠죠. 선악과 따먹은 주인의식.
주인의식은 항상 타인을 뭐로 삼아야 만족하느냐 하면 노예로 삼아야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을 대통령 비서가 뭐로 보느냐? 노예로 보는 거예요. 대통령 비서가 은행대출 46억 해서 60억 빌딩 살 때 대통령이 지켜주는 거거든요. 나는 사고방식 같다고 지켜주니까. 그래서 반부패비서관이 사표 냈잖아요.
내 주변에 있으면 대통령이든 높은 것 관계없어요. 전부 다 나의 나다움을 지키기 위한 적절한 내가 이용거리가 된다는 거예요. 부교역자에게 목사는 적절한 노예가 돼요. 계속해서 계약을 갱신할 수 있는 적절한 노예. 나는 이 교회에 말만 잘 들으면 밥 먹고 산다. 우리 식구 소박하게 살 수 있다는 그런 노림수가 생겨나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걸 누가 아느냐 하면 당회장 목사가 알아요. 지가 어떻게 알아요? 지도 부교역자 해봤거든요. 수를 안다고요. 이게 일은 안 하고 농땡이 부린다는 걸 알거든요. 늘 감시하는 거예요. 이걸 알고 난 뒤에 부교역자가 주인의식이 안 되잖아요. 안 되니까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선교사로 가는 거예요. 대장질하고 싶은 거예요. 선교사 가는 사람 거의 백퍼센트가 자기가 사랑받고 싶어 가는 거예요. 자기가 주인노릇하고 싶은 겁니다.
선교사 가는 것을 내가 탓하는 게 아니고 선교사하는 건 좋은데 왜 한국에선 안 하느냐 이 말이죠. 한국에서 선교사하면 되잖아요. 부교역자로 복음 전하면 되잖아요. 왜 안 해요? 왜 안 합니까? 지가 생각한 것과 지가 다니는 교회와 생각이 똑같거든요. 더 이상 지날 게 없으니까 대장질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르는 무식한 그런 데 가서 지가 복음 전하면 된다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아무리 성경을 봐도 선교는 누가 하느냐 하면 주님이 선교를 해요.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하는 게 아니고 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선교해요. 하늘나라에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게 의미가 없어요. 천국은 의미가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나와 함께 있으면 그 어디든지 주님 품안에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은 주님의 손아귀에 있는 겁니다. 어디서 어디를 선교한다는 자체가 의미 없어요.
지가 덩치가 작으니까 수천 킬로 떨어진 이란이 남의 나라로 보이지요. 주님 안에서는 거기서 2.5센티미터. 2500킬로미터가 2.5센티미터에요. 그 동네나 이 동네 마찬가지 동네라고. 옆 동네에요. 먼 나라 사람들 선교하기 쉬워요. 그러나 가장 선교하기 어려운 것은 남편, 그것도 교회 좀 다닌 남편 선교하기 힘들어요. 거리가 2500킬로미터보다 더 멀어요. 안 먹혀요. 말 잘 듣는 자식이 선교하기 더 힘들지요. 말 안 들으면, “너 나가. 저주받아.” 그것도 안 되고 너무 착한데 선교가 되질 않잖아요. 차라리 강아지 보고……
선교는 주님 부활의 몫입니다. 천사의 몫이에요. 성령의 몫이고. 인간은 선교를 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선교시키느냐? 니가 십자가의 원수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리핀 보내고 인도네시아 보내고 파키스탄 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가는 것을 내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거기 가서 무엇과 충돌했는가, 이 말입니다. 불신자와 충돌했는지 아니면 니 욕심과 충돌했는지 좀 제대로 고백하란 말이죠.
선교비 뜯어내려고 사진 찍고 하지 말고 내가 선교하면서 내가 선교 당해야 될 복음도 모르는 인간인 걸 고백한다면 그 자체가 주님한테 낚인 사람입니다. 그럼 그 사람이 파키스탄에 있든지 근무 마치고 한국에 오든지 간에 그 사람이 어느 교회 부교역자로 가든지 간에 교회가 문제 아니고 자기가 전도사로 가더라도 선교사 했다 어느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가더라도 뭘 자랑하겠어요? 복음만 전하겠지요. 그게 바로 선교잖아요. 그게 사도행전에 나오는 전도 아닙니까. 도를 전한 거잖아요.
우리의 자신의 의가 타고나서 주님이 손대지 아니하면 우리를 없는 자로 만들지 아니하면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지 아니하면 절대로 우리는 자기 의를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란 말이죠. 바로 그 작업을 위하여 28장 10절 봅시다. 지금 진도 확 나갔어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무서워하지 말라” 9절에는,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그 다음에 10절에 무서워 말라.
자,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여기서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제가 어려운 말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 들으면 아아 쉬운 말, 베드로전서 성경 끝부분에 있어요. 베드로전서 377페이지. 성경 찾을 때 목사님들이 페이지를 빨리 이야기해줘야 돼요. 늦게 찾게 되면 사람들이 찾는 걸 포기해버려요. 성경 얼마나 안 읽었으면 베드로전서 어디 붙어있는 것도 모르느냐고 누가 뭐라 할까 싶어서 난 안 찾을게. 빨리 읽어줘야 돼요.
여기 1장 2절에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피 뿌림”이죠. 외부 쪽에서 우리 보고 뭘 하라는 게 아니고 그 악마와 x, 악마와 함께 있는 그 자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놓고 여기서 뿌려버려요. 뿌리는 것.
우리 집사님이나 집사님들 옛날에 많이 했지요. 옛날 여름에 광목 다릴 때 어떻게 합니까? 푸우 뿌리지요. 저는 옛날에 젊은 새댁들이 다듬이질하게 되면 무서워요. 누구 복수 못해서 환장한 사람 같아. 다다다다 양쪽에서 박자 기가 막히게 맞춰. 다듬이 방망이가 충돌되지도 않아요. 완전히 피아노 연탄 둘이 하는 것처럼 절대로 중첩되는 마주침 없이 다다다다, 내가 지금 생각하기에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 죽어.
죽어나가는 것은 빨래만 완전히 구멍 뚫려. 다다다다, 푸우 뿌려버리죠. 저 옛날에 많이 해봤어요. 어머니 앞에서 잡아당겨라 해서 물 뿌리거든요. 이거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거예요. 그냥 당한 거예요. 강간당해도 이런 강간이 없습니다. 그냥 당한 거예요. 성추행 당한 중사 정도가 아닙니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일부러 그냥 당해버려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가 의도해서 예상해서 구원될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용납을 안 해줍니다. 왜 그러냐?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계약에서 우리를 배제하기 때문에 계약 당사자가 예수님만 당사자지 그 외에는 안 돼요. 따라서 계약 당사자 할 때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부여받은 역할 중 하나가 죄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죄인들 죄를 씻어주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아시는 택한 자를 골라서 푸우 피를 뿌려버려요. 피를 뿌린다고.
베드로전서 1장 12절 봅시다. 피를 뿌렸지요. 그럼 죄 사함 받았습니다. 끝입니까? 그게 아니에요. 12절에 보면,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뭘 힘입어? “성령을 힘입어” 야. 그러니까 피를 줬지요. 그 다음에 뭐냐? 뿌린 피의 의미를 위해서 피의 의미가 예수님의 예수님다움이거든요.
무엇과 대척되느냐 하면 나의 나다움과 피 뿌림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죄 사함 받았잖아요. 자칫하면 나는 죄 사함 받았다고 까불 수가 있다고요. 그러면 그 의미를 우리한테 완전히 박탈해야 돼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피 뿌림 받았다, 이래 되면 안 되거든요. 의미가 어디로 옮겨가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 쪽으로 옮겨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성령이 와버립니다.
성령이 와버리면 이건 여러분 성경 너무 많이 찾아서 안 찾겠는데 마태복음 12장 봅니다. 인자를 못 알아보는 것은 용서가 되되 두 번째 성령을 못 알아보는 것은 훼방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물론 저주를 받지만 문제는 영원히 오는 세계, 영원한 세대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 했어요. 그러면 기준점이 뭐로 넘어갔느냐 하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준점이 갑자기 뭐로 받았습니까?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여부로 기준점이 넘어가버렸어요.
그때 제가 그 설교하면서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 이야기할 때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도둑이 집 타넘고 오는 이야기했다고요. 인간은 내가 나답게 된다는 것이 마치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전부 다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뭐냐? 우리의 집주인 되시는 게 아니죠. 우리 집주인 되는 악마의 세간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악마가 우리 주인이란 걸 생각 못하고 뭐라고 우리는 오해받느냐 하면 내가 내 주인이 되어서 그걸 오케이라고 여긴 거예요.
그러면 예수 인자라 할 때는 어떤 걸 선택하느냐 하면 내가 내 주인이니까 예수 믿을까 말까 좀 더 있다가 믿을까, 선택결정권을 누가 갖고 있다? 내가 주인이니까 내가 갖고 있다고 하지요. 내가 이것 봐줄게. 너희들이 주인이라고 잘못 오해해서 예수 믿을까 말까 하는 그건 봐주겠다.
하지만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오게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와줘 버리면 이제부터 성령, 악령과 대척관계, 저쪽도 악령도 영적 세계고 성령도 영적 세계잖아요. 영적 세계, 영적 세계 다른 질의 영이 와버릴 경우에는 네가 전에 악마 쪽에 있을 때는 세간이었지요. 주인 따로 있고 나는 그 안에 있는 하나의 작은 물건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이 주도권을 쥐고 나는 나답게 되는 게 아니고 나는 뭡니까? 성령께서 베풀어준 혜택을 그냥 입을 뿐이죠. 그러한 조치가 되지 아니하면 영원히 너는 지옥 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철이 없어서 내가 내 주인해서 내가 예수 믿어줄게요. 지가 결심해서 구원받는 줄 알아요. 특히 침례교 쪽에서 구원파 쪽에서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손들고 나오세요. 요새는 침례교나 장로교나 가리지 않고 하지만. 네가 마음을 낮추면 구원받는다. 마음 낮추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다하고 있는 거예요.
지 힘으로 지 힘보다 더 강한 단어가 나왔어요. 찐찐 찐짜가 나타났다는 진심으로 찐짜, 백날 소용없습니다. 백날 진짜 진심이라고 우겨봤자 진심이 나의 나다움에 하나의 요건이 되고 말았어요. 진심으로 할 때마다 점점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결국은 오히려, 아까 첫 번째 강의 마지막에 했지요. 내가 구축한 그것이 나를 괴멸시키는 그러한 지옥을 형성했다고. 나의 저주의 자리를 내가 만들은 거예요. 내 손으로 내가 저주를 만든 거예요.
두껍아, 두껍아. 두껍이 집 만들 듯이. 평생 한 것이 내 집 만든 거예요. 아파트 샀다는 정도가 아니라 나만의 공간을 만든 거예요. 참 이런 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이렇게 특히 젊은 사람을 보세요. 젊은 사람들 사고방식 기가 찹니다. 자기 세계 밖에 몰라요. “엄마 이게 행복해.” 지옥에서 행복한 거예요. 부활을 몰라요.
그 다음에 세 번째, 베드로전서 1장 22절, 거기에 뭐가 나옵니까?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형제란 게 생겨버린 거예요. 첫 번째는 피 뿌림. 두 번째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천국 안에 들어와 버린 것. 세 번째, 들어와 보니까 누가 있다고요? 형제. 형제를 어떻게 사랑한다? 뜨겁게 사랑한다.
이것을 이렇게 합니다. 이미 가족 됨, 이미 가족이에요. 전에 성령 없을 때는 내가 저 사람 유리하다 불리하다 사귈까 말까 이랬는데 성령에 주도권이 넘어간 새에 이미 가족이 돼버렸습니다. 피 뿌림을 당한 가족이 생겨나버려요. 뜨겁게 사랑 안 할 수가 없지요. 다시 말해서 나의 나다움, 내가 사라질 때 나타나는 것은 가족이에요. 내가 있어버리면 가족은 죽어버립니다.
내가 사라질 때 내가 없어질 때 내가 잊어질 때 이게 뭐냐 하면 복음의 세계가 강하게 나를 눌러버릴 때 말씀이 나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나만 구원받았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나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녀노소, 학력 이런 것 따지지 않고 재산 따지지 않고 실적 따지지 않고 그냥 주님의 가족이 생겨나고 있었구나. 주님의 가족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 그러면 주님의 가족 이게 뭐냐 하면 이 말은 뭐냐? 오늘 부활을 통해서 주님께서 가족 만들기 한다는 이야기를 취지로 이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가족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우리가 판정을 내리는가? 그 판정은 간단하지요. 돈으로 그 바탕이 엮이느냐 복음으로 엮이느냐? 이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중간에 하나 더 넣을까요. 복음을 빙자한 돈으로 엮이느냐?
복음으로 엮이느냐, 복음을 빙자해서 돈으로 엮이느냐, 아니면 그냥 복음 놔두고 나머지 다 빼는 식으로 일하느냐? 이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뭐냐? 나는 곧 주의 일입니다. 당신도 주의 일하고 있고 나도 주의 일하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일어난 주의 일만 이야기합시다. 딴 이야기하지 말고. 그럼 만두 값은? 만두 값은 내가 낼게. 스테이크 값은 당신이 내고. 싼 건 내가 내고. 어쨌든 그게 중요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이야기하다보면 만두 값 그것도 잊어버렸어. 복음 이야기하다보니.
이것이 내가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서 소유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가족 됨이라 하는 것은 소유권이 성령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영원히 가족이라고 그렇게 미리 예상해서 기대는 하지 마세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태복음 제일 마지막에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그러니까 너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너희들, 너희들, 하나의 가족과 함께 있다. 가족중심의 예수님이지 내 중심의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구애받지 마시고요 싸우더라도 그 피 뿌림이 있으면 우리의 가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답게 된다는 것이 이거는 본성상 우리가 감출 수 없고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성령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모든 세상 돌아가는 주도권이 저에게 없고 주님에게 있음을 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