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진짜 맘 잡고 공부 좀 해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라는 딸의 말에 이미 늦었다는 말보다 해보자는 격려를 보내며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면 될지 물었다. 다른 과목은 인강 듣고 혼자서 하면 되고 수학은 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다고 나름의 계획을 말하면서 영어는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한다. 주중에는 일이 늦게 끝나서 일단 과제를 내주고 주말에 집중적으로 설명해 주기로 약속하고 다음 주말이 되었다.
속아 마땅함을 알게 하시려고 자식을 주셨음을 잠시 망각했다는 ‘아차’라는 바람이 휙 지나간다. 본인이 계획했던 것의 10%로 실천이 안 되어있는 모습에 이미 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니 애미는 너와 달리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기로 영어 문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딸의 얼굴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내가 알아야 할 것만 설명해 주면 되지 왜 상관없는 말들을 자꾸 섞어서 혼란스럽게 만들어요?”라는 말에 어이가 없지만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반격했다. “네가 지금 알아야 할 것이 뭔지는 알아? 상관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능력이 돼?”라는 말에 내 복제품이 더 차분하게 반격한다. “관둬요. 엄마 설명이 나랑은 안 맞네. 그냥 학원 다닐 게요” 게임 오버. 졌다. 돈도 없고 인내심도 없는 애미의 치졸한 마지막 발악으로 상황이 종료된다. “깨진 바가지에 물 부으려고 쓸 돈 없다. 태도부터 고치고 와”
뭘 기대한 걸까. 딸이 철들었기를 바란 건지 내가 그간 말씀으로 도 닦아 포용력이라도 생겼기를 바란 건지. 잠시 마음에 올라왔던 비타민 C 같은 희망이 A, B, C...하다가 씨로 에이 씨로 끝난다. 딸이 노트에 끄적거린 낙서가 의미심장하다. ‘나는 문제를 풀고 채점을 할 때 해설지랑 답이 나랑 다르면 해설지에 짝대기를 긋는다. 내 답은 틀리지 않았거든’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쫓아내신 건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함이지만 내가 딸을 빨리 출가시키고 싶은 건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나를 힘들게 하면 그깟 DNA쯤은 무시할 수 있다는 객기를 부리며 딸이나 나나 신이 되고 싶어 환장한 아담의 복제품임을 부인할 수 없는 잠시의 순간에 알 수 없는 감사가 나온다.
뭔가를 듣고 있다는 것이 그 듣는다는 귀가 내 귀이면 결국 ‘나’라는 막에 걸려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나만 듣는다. 그런데 나의 귀로 들었던 모든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사람을 믿지 않게 되는 순간에 사로잡히게 하셔서 죽기 전에 평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진정한 감사를 해야 할 분을 바라게 된다면 그것에 모든 것을 걸만큼 그 순간이 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주장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이 덮쳐줄 때 그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시는 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흐름이 그분을 향하고 있다는 방향성을 느낀다. 나를 잘 데리고 다니던 베스트 드라이버 마귀님께서 핸들을 휙 꺾어야 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 어디로 꺾든지 이미 차에 치여서 찢긴 살과 피로 흥건하신 분이 가로막고 계신다. 너는 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 통 안에 갇혀있는 사실을 그래서 지옥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죽어야 한다는 말씀의 칼이 기적같이 내 귀를 걷히지 않고 마음을 뚫고 들어와 쪼개고 잘라내신다. 이미 죽었기에 애초에 너는 없었고 흙으로 만든 빈 깡통을 갖고 놀아주시는 분만 있었다. 스스로 계신 유일한 ‘나’가 되시는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에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위한 재료로 사용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언약성취를 위해 맘껏 이용하신다.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하고 이용당하면서 ‘네가 나를 갖고 놀아?’라는 반발심과 원망과 복수심으로 가득했던 한때를 허락하셨기에 ‘갖고 놀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나를 관리하고 있다는 착각을 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낯설고 새로울 수 있다.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나의 통증과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또는 자존심이 박살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무수히 나를 위해 해보았기에 나라는 껍데기를 상관해 주시는 낯선 주인이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죽는 날을 기쁨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신기할 수 있다.
이미 주인 있는 집에 들어와서 주인을 겁박하며 꽁꽁 묶고 세간을 강탈하는 도둑이, 다 살자고 난리인데 죽고자 하는 것이 진짜 해답이라고 외치며 아무 힘도 없이 처참하게 죽은 분이 우리의 구원자인 것을 믿는 것이 이상한 일이 분명한데 기존의 정상적인 세상 풍조에서 벗어나 이미 이상한 나라에 옮겨져 인테리어 가구로 재창조된 주님의 생산품인 것을 믿게 하는 믿음의 출처가 어디일까. 말씀을 깨달아 알고 행함으로인지 듣고 믿음의 일방적 이끄심으로 끌려가고 있는지.
야곱이 대놓고 사기 치고 거짓말하면서 저주받을 짓을 서슴없이 했음에도 복이 몽땅 오게 된 결과가 일관된 세상 속 사람들이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저주받기 위해 서슴없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율법의 자명함을 보여주시려고 아버지도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율법 시한폭탄에 촘촘히 둘러친 저주가 예비 된 곳을 보란 듯이 들어오셨다. 십자가 사건 없이는 누구도 자신을 정당함이 조금도 없는 저주받을 자로 알 수 없으며, 십자가 저주를 복으로 바꾸신 부활의 능력 없이는 일말의 자비도 남기지 않고 오직 지옥만 예비 되었음을 알릴 대적자가 들통나지 않는다.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할례지점에서 생긴 구멍으로 쏟아지는 사건을 통해 죽음이 나를 소급해서 해석하는 소식을 듣는다. 죄인지 의인지 아들인지 종인지 하나 됨인지 개별인지를 칼같이 가르며 최종점에서 이미 준비된 유일한 해답지가 안에 있는지 물으신다. ‘너는 죽었고 네 안에 속건제의 취지만 살리시는 하나님의 뜻이 살아있는지’
있지도 않은 내가 딸랑이 흔들어 주며 나를 달래고 나에게 질척거리는 짓거리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근원까지 꿰뚫고 눈에 보이는 그 너머에 영적세계까지 닿아있는 이미 승리한 십자가가 진리를 뿜어내며 인간의 무능성을 선포하신다. ‘넌 빠져!’ 인간으로 말미암는 어떤 것도 땡 탈락이라는 진리에 덮여 그분의 공의를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무차별적 공격을 순순히 받게 제압해 주시니 이 죽음의 기원에서 비로소 성도는 죽어가면서 생명 되시는 분을 증거 하는 약속의 시그널이 된다.
자연 세계의 흐름을 역행하지 못하고 썩어짐에 합류되어 후패하는 몸에서 새로움으로 빚어진 생명력이 뿜어져 나올 때 그리스도의 충만 속에서 느끼는 사랑은 규정도 없고, 금지도 없고, 한계가 없는 불가능한 사랑이며 성도 안에 담긴 그분의 사랑이 껍데기 밖으로 발산될 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의 주인을 사랑하는 실체가 없으나 실재하는 사랑을 느끼게 된다.
십자가 승전가가 시체를 담은 관 속에서 사랑의 노래처럼 흘러나올 때 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이 되고 의의 왕이 승리하심을 외치는 찬양 소리로 가득하다. 마피아 영화에 보면 한 주인공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주인공이 아이의 귀에 헤드셋을 씌워주니 시체가 바닥을 뒹구는 혈전의 현장이 감미로운 노래로 가득 찬다. 아이가 그 품에 안겨서 죽고 사는 것을 생각했을까. 아무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더 나아가 자신을 돌아볼 필요도 없이 십자가 승리의 노래만 흘러나오는 안식 안에서 자신도 찬송의 선율이 되고 리듬이 될 뿐이다.
내가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으로 예수님을 죽이고 있음을 발각당하는 사람만 주님의 아픔으로 아파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에게 조차도 아들의 생존이 아니라 그분의 찢긴 살과 흐르는 피를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하물며 피조물 주제에 나 없음으로 환원되지 않은 모든 것을 진멸하심이 얼마나 합당한 조치이신지. 나를 지운다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아시기에 주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려고 친히 찾아오신 것이 단순히 인간구원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할례를 통해 주의 아픔이 밖으로 돌출되고 그 아픔을 유발하는 옛 자아가 마음 가까이에서 생생히 함께하며 내가 흙이 되는 죽음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흙 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들어오신 주님의 아픔에 압도당하고 그 아픔에 같이 녹아 없어지게 해주시길. 자신이 유발한 주님의 아픔을 머금은 알알이 빨간 피로 가득 찬 알갱이들이 주 안에 박혀 주의 능력이 작용할 때마다 피가 빛을 발하며 의를 뿜어내니 주의 공로만 빛난다.
아파서 골골하며 침대에 누워있는데 배고프다고 투정 부리며 엄마 배가 터지든 말든 침대로 돌진해서 점프하는 아들이나 청개구리 전래동화를 읽고 나서 엄마 말 잘 들을 테니 죽지 말라고 우는 아들이나 차별 없이 한통속으로 처리하는 주님의 한마디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라”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원해서 주님을 찾았던 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각자 자신이 만들어낸 일관성 안에서 자기 배를 채우고자 하는 본성 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어린양의 피를 경유해서 고백하게 하시려고 오늘이라는 하루로 살려내셨고 하루라는 공간 속에 주의 지시가 작렬하기에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의 뜻대로만 이루어짐을 안심하고 누리게 하옵소서.
이근호
거짓이 우리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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