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69강 사무엘상 23장12절(역할)20210531a
(강의:이근호 목사)
사무엘상 23장 13절부터 할 차례인데 13절에 그일라라는 그 동네사람들이 배신을 합니다, 다윗을. 오늘은 배신이야기부터 해야 되겠네요. 원래 23장에 보면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에게 탈취를 당했어요. 1절에 보면.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가자 지역에서 유대인 마을이 습격당했다는 말이죠. 하마스한테. 팔레스타인한테 습격당했는데 다윗이 와서 그들을 구출해줬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사무엘상 이 대목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다윗의 적이 둘이란 말이죠. 다윗의 적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는 겁니다. 이 둘을 나눠봅시다. 객관적인 적, 이건 블레셋이 돼요. 그리고 내부적인 적은 누구냐 하면 사울이 되는 겁니다. 적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위상, 다윗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로 변환되어야 되는가, 바뀌어야 되는 것에 대해서 반드시 두 개의 적이 필요하다고 보신 거예요.
그럼 두 개의 적이 되면 블레셋이란 나라는 누구의 적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적이죠.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입니다. 그러면 여기 이스라엘 있고 블레셋이란 이스라엘의 적이 있다면 그럼 또 하나의 적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내부에 또 있어요. 사울 왕이 이스라엘 적이죠.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 자체가 진짜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 참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배양한다 할까요,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에 이스라엘 만들 때는 누가 있었느냐 하면 처음에 히브리인들이 주변에 있었고 중심은 핵심은 사람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유월절의 어린양 그 앞에 뭐 붙는다면 ‘죽임을 당한’ 유월절의 어린양이 하나의 자석처럼 또는 접착제처럼 작용을 해서 그 죽음 안으로 응집되도록 쏠리도록 주변인들이 히브리인들이 이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십자가. 부활 아닙니다.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해서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십자가, 예수님 중심을 자신의 새로운 핵심으로 가지고 거기에 자석 끌리듯이 끌린 사람들의 집합체, 단체,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지요. 천국의 백성입니다. 저는 집합체란 말을 더 쓰고 싶어요. 공동체란 말보다는.
공동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서로 생각을 해서 단합하자, 우리 결합하자, 하나 되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지만 집합체라 하는 것은 마치 사물 같아서 자석이 있으면 쇠붙이가 어떻습니까? 쇠붙이가 저 자석에 끌려볼까, 이런 의도가 무산되지요. 인정받지 못하지요. 그냥 있어도 그냥 끌리지요.
그래서 새로운 이스라엘은 오늘 사무엘상에서 뭐냐 하면 다윗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전에는 뭐라고요? 죽임을 당한 유월절의 어린양이죠. 그럼 다윗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든다면 앞에 죽임을 당한 유월절 어린양이기 때문에 다윗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어디에 노출되느냐? 죽음, 살해당함에 노출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 이해 쉽지요. 죽음이 모든 것을 당길 수 있는 모든 힘의 중심체로서 될 때 이스라엘 된다. 하나님께서 그게 하나님 백성 만드는 거다. 십자가가 그렇듯이 구약도 마찬가지다. 그건 이해되겠지요.
그럼 죽음을 할 때 다윗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부추겼고 죽이도록 선동했고 다윗을 없어져야 돼, 라고 먼저 기치를 걸었던 그들이 바로 블레셋도 마찬가지고 사울도 마찬가지로 다윗을 없애려고 그렇게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건져준 사람 있잖아요. 오늘 그일라 사람들. 이 사람들이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배신합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12절에 보면,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붙이리라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그일라 사람만 너를 배신할 것이다, 그 말이에요. 구해줬는데 배신하지요. 이게 오늘 첫 번째 나오는 핵심입니다. 이게 너무나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에 다 지우겠습니다.
아까 응집력을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한 것은 응집력, 죽음에는 당기는 힘이 있다. 참 신기한 힘이죠. 죽음은 보통 죽음은 기피하는 힘이잖아요. “죽을래?” 하면, “으으응.”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주신 이스라엘 되게 하는 죽음은 당기는 힘이 있어요. 죽음의 힘이 더 세면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더 당겨주니까. 어떻게 이렇게 죽음과 가까이 할 수 있는 복을 주십니까, 이런 거요. 우후, 땡큐.
두 번째는 그 힘이 당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음의 가치 때문에. 죽음의 가치가 나의 생존의 가치보다 우월할 때 이것이 하나님 백성이에요. 왜? 내 생존이 더 세면 천국은 나의 나라가 되지 나 아닌 나라가 아니거든요. 나의 나라가 돼버려요. 내가 호강하는 나라가 돼요. 생존이 더 강하면. 사람이 생존하는 이유가 뭡니까? 호강하려고 하잖아요.
나의 호강은 이제 물 건너간 거예요. 내가 호강하는 나라가 천국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가 호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를 사모한다는 것은 정말 괴이한 일이죠. 이건 납득이 안 되는 본인이 이해가 안 되는 그런 현상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가치가 나의 생존의 가치보다 더 우월할 때 그러한 작용한다.
세 번째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천국은 뭐가 있느냐 하면 그 용서하는 나라지요. 죄를 거론하고 그 죄와 용서를 만나서 천국 백성 하잖아요. 그 죄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여기서 배신이 등장하는 거예요. “배, 배, 배신자여!” 이런 영화대사 있지요. 배반.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너 훌륭하다, 자질 있다, 반성 잘하네, 어떻게 다른 사람보다 착하냐가 아니라 너 나한테 배신했음을 네가 어떻게 알았지, 라고 신기해하는 거예요. 내 일상이 주님을 배신하는 짓이라는 걸 알게 되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죠.
용서가 용서 값을 하려면 배신자와 배신상황과 연계돼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만약에 배신 안 한 상태에서 용서를 받아버리면 용서받을만한 그러한 이점이 장점이나 요소가 자기한테 있는 줄 안다니까. 용서가 백 퍼센트 주님의 용서이어야 되는데 내가 참 착실하긴 착실해, 이렇게 돼버린다니까. 내가 그동안 죄 안 지려고 애쓴 보람이 있네,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이건 지 자랑이지 주님의 용서를 빙자해서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자기 훌륭함, 자기 의를 용서에다 연계시킬 수 없어요. 사람이 자기의 장점과 자기 의와 자기 착실함을 나타낼 때는 그만한 실적과 업적 같은 것이 있을 때 자식을 잘 키운다든지(이 동네사람과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할 때 “내가 자식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아무 것도 가질 수 없고 모든 것을 박탈당한 입장에서 나의 장점, 나의 훌륭한 점, 내가 착실한 점, 이것이 주변에 의해서 전부 다 박탈당하고 배신당할 때 우리는 뭐만 오롯이 남겠습니까?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한 것은 주님의 용서, 사랑뿐이라는 게 남게 되겠지요. 그걸 수요일에 제가 깎아낸다 한 거예요. 깎는다.
연필을 깎아야 연필심이 나오잖아요. 소위 나라는 괜찮은 주체를 주께서 주변에 있는 사기꾼 같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만나서 나를 깎아내는 겁니다. 깎아낸다는 것은 그들과 협상하거나 타협을 못하도록 주께서 개입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제목을 이걸로 적겠습니다. 요 세 가지에 대해서 다윗과 연관시킬 때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크게 쓰겠어요. 오늘 제목은 역할.
자기의 역할만 있어줘야 돼요. 역할만 있어줘야 된다는 말을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대전 시내에 가다보면 맛있는 냄새 나잖아요. 그리고 즐거운 노랫소리. 대전에 중간에 흐르는 천이 무슨 천입니까? 갑천. 갑천이라는 아름다운 꽃피는 풍경, 그런 모든 것들을 느끼고 보고 아름다운 음식을 맛보고 하는 다윗이 그렇게 인생을 낙으로 누리는 게 아니고 어떤 인물을 자꾸 맞닥뜨리게 해요. 그러니까 그 인물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안 만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23장, 24장 계속해서.
일본에 파친코라는 게 있잖아요. 파친코라 하는 것은 위에서 구슬을 내리면 구슬이 무작위적으로 장애물에 통통통통 바쳐서 밑바닥에 떨어지게 돼있어요. 자연적으로 장애물들이 구슬의 길을 자동적으로 만드는 거예요. 계곡에 물이 흐를 때 그냥 흐르지 않고 바위를 부딪치잖아요. 바위에 부딪치면서 자동적으로 뭐가 생깁니까? 물길이 계곡 물이 생기지요. 계곡 길이 생기잖아요.
다윗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쫓기게 만드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성경 대충 알잖아요. 제가 지난번에 쫓겨난 열여섯 가지 위치를 이야기했잖아요. 그처럼 자꾸 다윗이 쫓기는 이유는 쫓기면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낙을 누리고 맛있는 걸 먹고 좋은 향기로 호사를 하는 그런 게 아니고 자꾸 누구와 맞닥뜨려야 돼요. 물론 메시아지요. 누구와 맞닥뜨리려면 내가 즐기는 것을 주께서 용납을 안 하고 후달리게 만들어요. 자꾸 뒤에서 밀어내는 것 같아.
밀어내면서 다윗이 발휘한 역할이 어떤 역할이냐 하면 이런 역할이지요. 사가지 없는 역할이죠. 역할은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기적과 태도와 행위가 이 세상 사람들의 구미를 맞춰준다든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참으로 싸가지 없는 일이라 해서 결국 그 결과 끝은 뭐였습니까? 살해당한 거잖아요. 아무리 도와줘도 결국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손가락으로 전부 다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잖아요.
싸가지 없다는 것은 뭐냐 하면 상대의 의도를 거부하는 거예요. 기피하는 것. 상대의 요구사항을 이쪽에서 안 들어주는 겁니다. 상대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다윗은 만나야 될 분만 만나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성도의 고충이 여기 있습니다. 만나야 될 분과 만나는 것, 이 말은 뭐냐 하면 주일오후에 그런 기도했습니다만 자기 옆에 누굴 두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수준을 말해준다고요. 옆에 개를 두든지 어떤 사람을 두고 사귀느냐에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주님과 함께 있을 사람은 주님만 만나야 될 그 파친코의 길을 주에 의해서 밀어붙임을 당하는 겁니다. 갈 수밖에 없어요. 그때에 다윗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처참하겠습니까? 자기도 하나에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것, 누구처럼 팔자 좋아서 동양화 치고 이렇게 살면 참 좋겠는데 쫓기는 거예요. 없는 적들이 자꾸 발생되는 겁니다. 계곡의 물이 고요했으면 아름다운 연꽃 피는 연못 되겠는데 주께서 연꽃을 파괴시키는 거예요. 자꾸 아래쪽으로, 아래쪽으로 물줄기가 내려가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이 문제에요. 과학은 물을 뭐라고 봅니까? H₂O로 보잖아요. 그런데 성경의 물은 H₂O로 보는 게 아니에요. H₂O로 봐선 물의 의미를 몰라요. 예를 들겠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인간들은 그걸 물로 보고 H₂O로 보는 거예요. 수소 두 원자, 산소 한 원자로 결합된 물의 분자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뭘 놓쳐버리느냐 하면 물이 위에서 떨어지게 하신 분을 놓쳐버려요.
과학은 하늘에서 비가 어떤 식으로 관찰되는지는 보는데 누가 관찰 안 되느냐 하면 비를 주시는 분이 관찰 안 돼요. 햇빛과 공기를 주신 분이 관찰 안 된다고요. 그래놓고 과학은 진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진리는 관찰하는 지가 진리지요. 이미 진리가 자기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주님이 진리 될 수 있겠어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제가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습니다만 저는 과학자로 이걸 알고 싶습니다. 뭘 알고 싶냐 하면 지구는 몇 년 전에 만들어졌습니까?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시다. 그걸 하나님께 왜 응답해야 되지요? 그 사람이 그 기도만 했을까요? 몇 천 년 전에 했을까, 자기가 조사하고 거기에 대해서 탐색을 평생에 걸쳐서 하겠지요.
그거는 결국 그것 해봐야 그 행위 자체가 배신하는 행위라는 것을 본인은 못 느껴요. 그게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라고. 그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다윗이 받았던 독특한 역할을 모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본인은 이 세상에서 사가지 없는 인간이 돼야 되는데 본인이 이게 싫은 거예요. 남한테 대우받고 싶고 남한테 환영받고 싶은 겁니다.
자, 싸가지 없다는 것은 상대의 의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 다들 그렇게 살지요. 이것은 공통적인 은사입니다. 싸가지 없는 건 공통적인 은사에요. 그 이유가 뭐냐? 상대가 미워서가 아니라 상대의 수를 알아서 그래요. 어떻게 수를 아느냐? 본인이 성령 받기 전에 그렇게 놀았거든요. 본인이 주님을 알기 전에는 뻔했거든요. 지 의도가 뭔지 알거든요.
만약에 그들의 의도를 내가 맞춰주면 이것은 계곡에 흘러가서 주님 만나야 될 그 길에서 내가 정지하는 게 되는 겁니다. 내 갈 길을 가지 않고 중간에 노닥거리는 게 돼요. 토끼라 하더라도 뒤에 거북이 따라오는 걸 모르고 혼자 잠자고 있으면 나중에 사람이 자면 의식이 없잖아요. 깨보니까 거북이가 깃발 들고 있잖아요. 자기는 잠깐 잔다 했거든요. 잠깐 자는 게 벌써, 그래서 졸음운전이 위험한 거예요. 자기는 잠깐 잤는데 차는 벌써 전봇대 박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성도에게 고독이란 게 위험한 게 자꾸 하나님께서 만나지 말아야 될 사람을 만나게 해줘요. 안 만나고 싶어도 자꾸 만나게 해줘요. 만나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사가지 없다는 소리가 한두 사람이 아니고 늘어나게 시작합니다. 그 과정을 지금 다윗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다윗은 두 가지 적이 있지요. 외부적 적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블레셋 그 다음에 사울. 내부적 적은 자기 자신. 주님께서 안 만나고 싶은데 자꾸 만나고, 그러니까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것은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자아가 용납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내가 살기 위해서 애쓴 모든 기능을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쫓겨 다니면서 했던 글이 있어요. 그 글이 시편입니다. 여기 사무엘상 23장 19절 봅시다.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해놓고 또 고자질 들어왔어요. 다윗이 가는 곳마다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 편에 서서 다윗이 여기 있다고 고자질하는 그런 사람들을 자꾸 만나지요.
왜 만나느냐 하면 다윗의 진정한 적은 다윗의 자아성입니다. 그래서 이 자아성이 왜 허락이 안 되느냐 하면 다윗이 있는 땅이 보통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중에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수아 5장 13절에서 15절 읽어보세요. 왜 성도는 자아성을 주장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역할 때문인데 역할이 어떠했기에 어떻게 관련해서 역할이 정립됐는지 여호수아 5장 13절에서 15절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 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도달할 곳은 약속의 땅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의 응집력에 의해서 집합된 자들이 이스라엘이라 했지요. 저는 공동체란 말을 안 좋아한다 했지요. 인간들끼리 의논해서 합의해서 좋은 나라 만들세, 이건 절대로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땅에 갔을 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네가 접수하도록 돼있는데 접수하기 위해서 그냥 나갔지요.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그냥 나왔습니까, 칼을 들고 빼서 나왔습니까? 한 사람이 칼이 칼집에 있는 게 아니고 칼을 들고 있지요. 누굴 만납니까? 여호수아를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우리의 적이냐, 라고 질문을 칼 뺀 사람한테 했지요. 이것은 마치 얍복 강에서 야곱이 오해한 것, 야곱이 밤에 찾아온 사람을 자기의 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질문을 야곱이 하면 안 되고 여호수아가 하면 안 돼요.
누가 해야 되느냐? 칼을 뺀 쪽에서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이 쫓겨 다니는 이 땅의 주인은 지금 다윗이 아닙니다. 사울도 아니고 블레셋도 아니에요. 누가 주인이냐? 한 결 같이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에요.
지금 인간들로 하여금 이게 중요한데 인간들로 하여금 나 호강하기 위해서 살았던 그 인간들이 내 위주로 살던 그 삶의 방식으로 감히 하나님 곁에 같이 붙어살겠다고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나 다윗이나 모든 우리들도 마찬가지고요. 바뀌어야 되겠지요. 내가 편안하게 사는 땅이 아닙니다. 이 땅은.
나의 적은 뭡니까? 나의 적은 나지요. 어제 주일 낮 설교처럼 거짓된 나가 거짓된 나를 붙들고 있는 거예요. 새사람 되었다고. 그 새사람 평가는 주님의 평가가 아니고 본인의 평가에요. 새사람 판단 자체가 거짓된 거죠. 그동안 여러분 얼마나 교회에서 속았습니까? 속았어요, 속았어요, 하는 코미디프로 있어요. 기분 좋았지요.
지금 우리가 사무엘상 보면서 나는 다윗 편, 사울은 나쁜 사람 이러잖아요. 다윗의 적은 다윗 본인이에요. 역할만 사가지 없는 역할을 누가 좋아합니까? 대우받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지. 자진해서 밉상 받는 것을 누가 원합니까? 그런데 만나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몰아세워서 만나는 모든 사람 족족 그쪽에서 다윗이 하지 못한 일을 다윗에게 가합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미워, 미워, 미워.
그러니까 다윗이 미운 게 아니고 그들은 어떤 살고 싶어서 다윗을 고자질하잖아요. 배신자들, 비겁한 자들. 그렇게 도와줘도 골리앗을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이 이겼잖아요.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에요. 박근혜 대통령 쫓아내려고 촛불 집회할 때 민주당 좋았지요. 다 우리 편이구나. 무슨 우리 편이 있어요. 인간은 자기편이에요. 그래서 나의 적은 나에요.
그런데 나의 적은 난데 문제는 그 적이 나로 하여금 천국에 못 가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천국에 못 가게 만드는 겁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바르게 살았는데 하나님 시키는 대로 다했는데 자꾸 궁시렁거리면서 되지도 않은 변명들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호수아 5장에 근본으로 돌아가게 되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칼을 빼들고, 쉽게 말해서 네가 어딜 함부로 들어오느냐 말이죠. 칼을 빼들고 멀쩡하게 뚜벅뚜벅 기세 좋게 들어올 생각 마라. 꿇어, s! 뒤에 에스가 붙지요. 비타민c 비슷한. 꿇어! 여호수아가 그냥 꿇어버렸어요. 신발 벗어. 꿇어.
이 땅의 접수는 점령은 내가 한다. 칼 들고 군대장관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 편에 속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엄청난 작업을 해요. 뭐냐 하면 하나도 하나님 편이 아닌 인간을 하나님 편이 되어야 갈 수 있는 나라에 집어넣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다윗을 쳐서 하실 겁니다. 그러면 적은 뭡니까? 적은 다윗이죠. 다윗을 죽일 수밖에 없지요. 다윗을 죽이라고 다윗의 적들로 하여금 토끼몰이하게 만드는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령 받고 성도라면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어떤 점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수십 년 전부터 농구천재가 있었어요. 이름이 허재에요. 허재가 농구대통령, 농구천재라 했어요. 농구 너무 잘해요. 그래서 허재가 친구들 만나서 우리 오랜만에 게임하자. 허재가 마당에서 드리블하면서 자기가 농구천재인 것을 자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화가 나서 야 게임하러 가자. 야구하러 가자.
지는 이 땅에서 하나님, 이렇게 훌륭합니다, 이렇게 성경 많이 백독했고 기도했고 전도, 선교했습니다, 라고 지 농구천재 같이 성경천재, 목회천재, 전도천재, 기도 천재, 기도 천재 한둘이 아니고 많아요. 기도 천재해서 은사천재 많이 했는데 게임 판이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소몰이 당하고 토끼몰이 당해서 내 몸체 육신이라는 것이 적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고 자아가 있는 이상은 주님에 대해서 불편하게 했던 당사자 그걸 아는 자가 누구냐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여러 가지 고민거리, 걱정거리 있다면 아직까지 여호수아가 만났던 군대장관처럼 엄청난 분을 못 만나서 그래요. 엄청난 분을 만나버리면 세상의 모든 걱정거리가 소소한 문제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문제에요. 지금 우리가 엄청난 분 만난다고 골리앗 같은 사람 만나는 게 아니고 뭘 만나느냐 하면 십자가를 만납니다.
그래서 다윗이 쫓겨 다니면서 했던 시편의 모든 내용은 다윗으로 하여금 십자가 지는 사람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게임 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몰아세웠습니다. 그래서 시편 54편 봅시다. 시편 54편에 먼저 글이 있지요.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그다음에 ‘십인’이라고 욕도 아니고 열 사람도 아니고 지명입니다.
아까 사무엘상 23장 19절에 그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서 누구한테 고자질했습니까? 다윗을 어떻게 하라고 고자질했습니까? 잡아 죽이라고 고자질했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디에다 집어넣느냐 하면 맹수의 아가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이게 죽음의 응집이거든요. 유월절 어린양의 그러한 체험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토끼몰이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맛있는 거는 먹고 싶고 좋은 향수는 쓰고 싶고 아름다운 풍경은 사진 찍고 싶고 그림 그리고 싶고 뭐 온갖 호사를 이 땅에서 살만큼 사적을 행복을 누리고 싶기 때문에 행복 누리고 싶은 욕망을 내가 스스로 못 접습니다. 나는 복음을 안다 하는 그 순간 맛있는 것 주면 복음은 나중이고 수박부터 먹고 합시다.
인간은 자기 육신의 욕망을 본인이 이기지 못해요.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손을 대지요. 너는 누굴 만나야 돼. 나로 하여금 나만 챙기는 이 모습 자체가 누구의 배신자였음을 알려주는 그 누구를 만나는 지점까지 주께서는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나오는 시편 54편 봅시다.
3절에,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외인’이라 했어요. 그러니까 십이란 마을사람이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뭐라 합니까? 외인, 남이에요. 외인부대 할 때 남,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이건 사울이죠.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여기서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 누구나 여호와를 믿잖아요. 그런데 뭡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으로 그들이 드디어 들통을 내는 장소로 주께서 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교회에 등록해서 다녔는데 그 교회에 다니면서 눈치도 없이 십자가 이야기, 그것도 살짝 흘렸는데 자기 의로 구원받지 않고 주님의 거저주시는 의로 구원받는다고 그냥 이 정도는 다 알고 있잖아요, 라고 흘렸는데 벌써 목사부터 교인들의 안색이 확 달라지면서 수상한 놈 들어왔다고, 교회에서 수상한 놈은 나쁜 놈이 돼요.
좋은 놈 아니고. 좋은 놈, 나쁜 놈, 수상한 놈에서 수상한 놈 들어왔다고 할 때 그때 뭘 느끼느냐 하면 뭐지? 속으로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이토록 달랐었는가? 그걸 경험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른 거예요. 재미나는 교회를 위해서 친목단체 만든 그 교회에 서로 위로하고 서로 정보교환하고 재미나게 취미 활동하는 재미로 다닌 그 교회에서 왜 눈치도 없이 십자가 이야기를 흘렸느냐 말이죠.
자기는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안다고 생각했지요. 복음 전할 때 그건 기본으로 안다는 소릴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데 안색이 확 바뀌었을 때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때 거기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사가지 없는 것, 다시 말해서 분위기 파악도 안 되고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알아서 동조해주는 것이 늦게 온 사람의 기본 예의가 아니냐. 다시 말해서 너는 뭐가 없다는 뜻이에요? 너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 좋게 말해서 부족하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성도의 역할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성도의 역할이에요. 자, 난 배려해줬다. 돌아온 것은 뭡니까? 칭찬이죠. 칭찬이 돼버리면 나는 어떻게 돼요? 군대 장관한테 무릎을 꿇은 게 안 되잖아요. 내가 괜찮은 존재가 돼버리면 타인이 나와서 무릎을 꿇기를 원하고 있어요. 나는 괜찮은 존재, 나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군대 장관한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은, 내가 가야 될 그곳은 현재 내 가치가 여전히 존속한다고 느껴진다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인 것을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알아버렸잖아요. 살아 있는 주님이 아니고 죽어 있는 주님이 나를 이끈단 말이죠. 죽어 있는 주님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나를 이끄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세상 사람은 더 살고 싶어서 환장을 한 세상 아닙니까.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전부 다 지금 죽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그 세상 속에 우리가 놓여있단 말이죠. 그런 쪽에서 뭐냐 하면 나한테 배려를 요구하고 친목을 하고 화친의 악수를 내밀 때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어떤 사람은 본의가 있어요, 본의 아니게 싸가지 없는 짓을 욕 얻어먹을 걸 뻔히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특히 여기 시편 54편 4절에,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이런 고백이 상투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물론 아무 일없이 평안할 때는 이 말이 그냥 문장에 불과한데 정말 다윗처럼 가는 곳마다 cctv 다 찍히고 가는 곳마다 추격대가 쫓아오고 가는 곳마다 내 생명이 뭐 귀하다고 내 생명을 노리면서 자꾸 찝쩍대는 거예요. 안 찝쩍대요? 뭐 찝쩍댈만한 가치가 없어서? 집에만 있어서 인기가 하락해서 가치도 없는가.
계속해서 괴롭히는 거예요. 계속해서. 어디 정착할 곳을 주께서 용납을 안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드디어 다윗의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만이 나를 돕는 자다.” 그러니까 다윗이 서서히 뭐가 사라지냐 하면 자아라는 것이 이게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돼요. 나라는 것이 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사울 만나서 그런 이야기하죠. “나 이 벼룩 같은 아무 것도 아닌데 왜 자꾸 갉습니까?” 그런데 사울이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사각의 링, 또는 무대라 합시다. 위에서 보이겠죠. 어느 무대에 여기에 어떤 사람에게 역할을 줘요. 역할을 주는데 새카만 역할, 또 어떤 사람은 하얀 역할을 줘요.
이쪽 까만 역할이 뭐냐 하면 누구를 잡아 죽여라, 라는 역할을 줘요. 이 역할이 뭐냐? 사울 왕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항상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염두에 둬야 돼요. 아무 것도 없는 운동장에 어떤 역할자가 등장하는데 뭐냐 하면 누굴 잡아 죽여야 될 역할자로 사울을 두신 거예요. 그러면 누굴 잡아 죽여야 될 역할이 역할답게 되려면 이 사람에게 쫓기는 사람이 누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역할을 누가 하냐? 다윗이란 자가 역할을 한 거예요.
그러니 다윗이 가치 있고 사울은 나쁘고 다윗은 좋다가 없어요. 그냥 역할뿐이에요. 그 역할 끝나면 이거는 다시 은퇴를 해서 다시 텅 빈 공간이 되겠지요. 우리네 인생이 이렇습니다. 대전바닥에 세상으로부터 쫓기는 역할과 쫓는 역할, 이유도 없어.
성경에서 사울에게 뭐가 들렸다했습니까? 악신. 이상하게 악마에 의해서 뭔가 추적해야 될 그런 것을 인간사냥을 해야 될 어떤 역할이 주어진 상황에 그에 부응해서 나는 쫓김을 당해야 될 역할을 성도란 이름으로 하는 역할. 누가 착함이 아니고 그냥 역할인 거예요. 역할 끝나면 둘 다 수고했다고 은퇴하는 거죠. 그러다 다시 한 번 텅 빈 공간이 나타나겠지요.
인생이란 이런 겁니다. 그냥 주어진 역할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맡은 역할. 역할 한 그 인간들은 누구나 마땅히 죽어야 될 자인데 역할을 어떤 역할을 받느냐 하면 그리스도 메시아의 모습을 드러내는 역할을 부여받은 자가 바로 성령 받은 자고 성령 받은 자는 자기 인생을 계곡의 물처럼 자꾸 누가 밀어내는 것 같아요. 가만두지 않고 밀어낸다는. 궁지에 자꾸 몰리고 막다른 길로 가는데 그 막다른 길을 가야 비로소 나오는 고백이 시편 54편 4절,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 진정으로 나를 돕는 자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 나를 용서하는 하나님 자신의 역할을 위해서 우리는 세상 사람과 같지 않은 인생길을 부여받은 겁니다. 주님의 역할 있잖아요. 용서하는 역할, 그것도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면서 그냥 일방적으로 우리를 용서해주겠다는 그 역할에 부응되기 위해서 골칫덩어리 우리를 자기도 모르는 이런 역할로 인하여 자체적인 다윗이 변신해가는 거예요.
다윗 자기밖에 모르는 다윗에서 메시아 같은 예수님 십자가 같은 모습으로 변신하는 그런 과정이 이게 사울 왕이 아니면 어떻게 그걸 해낼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사울 왕의 공로가 드러나는 게 아니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애들이 코로나 사태 이후에 유치원 아동들이 마스크를 하잖아요. 마스크를 하니까 예상 못한 결과가 나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마스크를 하니까 글도 잘 모르고 말도 잘 못하는 언어발달에 장애가 온 겁니다.
그 이유는 말을 배운다는 것은 글자를 배우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눈 모습과 표정을 보면서 그걸 받아들이는 그것이 바로 언어의 기초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마스크를 해버리니까 얼굴의 반이 날아가 버리니까 같은 말을 해도 저게 좋아서 하는 말인지 슬퍼서 하는 말인지 분노해서 나오는 건지 애들이 그게 간파가 안 되니까 정리하는데 언어의 개념정리에 지장이 있는 겁니다. 흔히 애들 보고 천방지축 뛰논다 하지요. 애들이 천방지축 안 뛰놀면 성장발육이 늦어요.
그래서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자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왜? 정상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러다가 와장창 깨지고 욕심 부리다가 사기 당하고. 말로는 보증 잘못 섰다하는데 보증 잘못 선 게 아니고 깨진 거죠. 완전히 주님 앞에 작살난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뭐냐 하면 내 역할이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있는 역할이 이 세상과 헤어지는 역할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사무엘상 23장 보면 나옵니다. 셀라하마느곳이란 지명이 나오는데요. 이렇게 보면 돼요. 다윗이 이동하는 그 경로에, 23장 28절 읽어보세요.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지명 이름이 의미를 두고 새로 정해지는 것은 주께서 손댔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올 수 없는 자를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군대장관을 통해서 또는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손길을 통해서 작업을 벌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새로운 지명이 발생됐다는 거예요. 이 지명 이름이 뭐냐 하면 ‘셀라’는 바위라는 뜻이고, ‘하마느곳’이란 이름은 헤어짐. 여기서 그들은 갈라서졌다, 갈라섰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갈 길이 달랐다. 니는 충청도로 너는 전라도로 너는 경상도로. 갈 길이 따로 구분된 거예요. 다윗 가는 길과 사울 가는 길은 다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도 만나고 부딪치지 않고 싶은 사람도 부딪쳐서 사가지 없다고 온 욕을 다 얻게 한 것은 이게 셀라하마느곳, 그러니까 너하고 나하고는 갈 길이 다르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손길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