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시련의 장소

아빠와 함께 2021. 4. 28. 08:57

대전-68강 사무엘상 23장6절(시련의 장소)20210426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무엘상 23장, 다윗이 쉴 새 없이 사울에게 쫓기는 그 대목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계속 추적하는 이유는 다윗 생각과 사울 생각이 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이질적이라 할 수도 있고 또는 세상사는 방법이 다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선 그 정도까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더 나가죠.

끝이 다르다. 결국은 그 사람의 가는 방향이 달라서 그래요.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어지간하면 사울이 다윗을 통해서 뭔가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걸 배우면 될 텐데 사울의 고집도 대단하지요. 마음이 완악하고 완고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다윗을 통해서 이겼잖아요. 이겼으면 뭔가 있음을 알고 눈치를 채야 되잖아요. 다윗 대단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구나.

그러나 사울은 생각하기를 내 것은 요만큼도 빼앗기지 싫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건 좋은데 그러나 평생 동안 나라고 쥐고 있던 내 것에 대해서는 내가 손해 볼 그럴 의향은 전혀 없다. 그런 식이죠. 부부사이에 아내가 교회 다니고 아내가 하는 일을 잘하는 걸 보면 남편들이 아내 위로하는 건지 달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네 하는 일을 보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 같이 보여서 굉장히 좋아 보인다.” 그런 좋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이야기하는 바탕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조금도 내가 살아온 방식을 바꿀 의향은 없다. 그것은 뭐냐 하면 결정적으로 내가 바꿀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끝까지 한 번 가보자. 과연 네가 말하는 끝이 뭐가 있는지 아니면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인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끝이 다르다 할 때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세상 사람들은 가봐야 알지. 이게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세상 사람뿐만 아니고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한 번 다녀는 보지만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걸쳐놓으면 나중에 급할 때에 여차 싶을 때 발을 좋은 쪽으로 들여놓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계산이 있지요.

두 번째는 신자들이죠. 또는 성도들의 생각은 뭐냐 하면 이걸 전미래적 시제,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뭐뭐 前이란 말이죠. 앞이란 뜻이고. 미래 앞둔 시제, 전미래적, 뭔가 앞두면 뭐가 되느냐 하면, 현재의 전은 보통 과거가 되잖아요. 과거가 되는데 미래와 과거가 결합이 될 경우에 이렇게 돼요. 필히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간관, 시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이게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입니다.

사울은 뭐가 중요하냐 하면 내가 지금껏 해놓은 게 소중한 거예요. 그걸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사울의 특징은 탄탄하다, 단단하다, 현재 자기 삶이 확고하다,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뭐냐 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꾸 후달리고 강제로 어느 쪽으로 가라고 모든 인생에 있어서 삶의 정황이 내 원대 뜻대로 되지 않고 몰아세움을 당하는 겁니다. 필히 그렇게 될 것이라는 그런 약속에 의해서 강제로 이끌려가는 겁니다.

필히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이 어려우니까 쉽게 해서 9월말 되면 국민의 70%가 백신접종이 됩니다, 라고 1시 뉴스에 나왔거든요. 9월말 되면 국민의 70%가 백신접종이 된다. 필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현재라 하는 것은 필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과 연결돼있어요. 현재 눈에 보이는 그게 전부가 아닌 거예요. 이걸로 됐습니다, 라든지 이걸로 인생 마감하겠습니다, 라는 게 안 돼요.

끊임없이 필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입장에서 미래는 다윗은 지금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기 때문에 자기가 누리는 시간은 자기 시간이 아닙니다. 자기가 채워나가는 시간이 아니에요. 그러면 미래는 누가 쥐고 있는가? 미래는 하나님이 쥐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되기 위해서 다윗을 미래 조종하고 있다 보면 되는 겁니다. 몰고 가고 있는 거예요. 이끌고 가고 있는 거예요.

다윗이 쓴 유명한 시가 있어요.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리고 마지막에 나의 상이 큽니다. 원수를 물리치시고 나에게 큰 상을 주실 것이다. 한식정식 한 상 차려 준단 말이거든요. 결국은 한식정식 반찬 50가지 있는 그 상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원치 않는 길을 주께서 강제로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맞닥뜨리는 모든 풍경은 내가 원한 풍경이 아니죠. 무주 가서 강냉이 심는 것은 집사님 원한 풍경이지만 내가 원한 풍경 아니지요. 그럼 누가 원한 풍경이냐? 구약에는 몰라요. 그러나 신약엔 나타납니다. 예수님 다녀갔던 코스 그대로 밟아가요. 그렇지 않으면 길이 아니에요. 주님이 챙긴 게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겁니다.

우리가 똑같은 현실을 맞이하면서 누가 나를 자꾸 끌려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는 사람, 이러면 인생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지 않지요. 인생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으면 좋은 점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채점하거나 내가 나를 저주할 하등의 권한이 나한테 없습니다.

내가 저 행동 잘했다, 못했다, 세상에 아파트 오면서 마스크를 안 쓰고 이야기하고 오다니. 이렇게 자책하거나 후회하거나 반성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주께서 천국 보내기 위해서 마스크 안 쓰게 하신 거예요. 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똑똑해도 어떤 주어진 상황이 오게 되면 말한테 깊숙이 빠져든다든지 어떤 상황이 오게 되면 그 상황을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인간이 극복할 수 없어요. 그냥 뒤늦게 자책할 뿐이죠.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하지 마세요. 한 곳에 빠져버리면 딴 곳에 신경 못 쓰는 그게 나에요. 안경 쓰고 안경 찾는다고 얼마나 애를 쓰고, 휴대폰 찾는다고 지 휴대폰에 전화하는 것, 그게 나에요. 그게 나라고요. 전에는 똑똑한 게 아니고 그때는 주어진 상황에서 정신 차렸을 뿐이고 지금은 그 정신이 혼미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것이, 내가 왜 이러지, 정신 나갔나보다 하는데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고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지옥 간 사람 특징이 뭐냐 하면 정신 차려서 지옥 가요. 내 인생 단도리를 철저하게 빈틈없이 하려고하니까 주도권을 계속 자기가 쥐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인물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에요. 아까도 강의 시작할 때 이야기했습니다만 다윗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으면 사울이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다윗 인생에 합류하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다윗 쪽에 쏠려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장차 대통령 감으로 이미 비율이 기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론조사에서 사울이 밀려도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권세, 권력을 사울이 못 버립니다. 버릴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울을 덮고 있는 그 세력이 다윗과 함께 있는 세력과 질이 달라요. 그걸 사울이 악신 들렸다고 성경에선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그런데 악신 들렸다, 그리고 다윗은 성신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악신과 성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눈에 들리지도 않아요. 이게 바로 인간의 한계거든요. 자기가 보이는 것만 보는 게 아니고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요. 인간은.

참 이런 어려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실력이 되니까 말씀 드립니다. 눈이 사물을 본다. 눈이 있어서 사물을 본다. 이것 거짓말입니다. 과학적으로 안 맞아요. 과학적으로 말씀 드릴게요. 기억이 사물을 봐요. 왜냐하면 어디서 편집하느냐 하면 우리의 두뇌에서 편집합니다. 바로 옆에 있어도 못 보거든요. 이 말은 뭐냐? 두뇌에서 편집해요. 두뇌가 추구하는 게 있어요. 두뇌가 추구는 것은 뭐냐 하면 예전처럼, 전에 했던 그대로 가줘야 무엇이 유지되고 굳어지느냐 하면 self라 하지요. 자아, 나라는 것이 유지가 될 수 있어요.

아주 갓난아이는 이게 없기 때문에 ‘나’가 없기 때문에 갓난아이나 어린 새 같으면 자기 엄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의 둥지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아줌마가 지 키워줘도 엄마라고 짹짹짹 하고 있단 말이죠. 새 키우는 다큐멘터리 보면 그렇게 돼있어요. 자아가 형성되지 않을 때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그냥 자연적인 본능만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일단 애가 세 살, 네 살 되어 자아가 있으면 그때부터 ‘아니요’가 나와요. ‘싫어’가 나와. 싫어, 아니요. 그렇게 나온다는 것은 그 애 머릿속에 뭐가 장착됐다는 겁니다. 엄마는 엄마를 너라고 이야기하고 그 엄마 앞에 있는 나를 나라고 이야기하는 시기에 들어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나에게 충실하고 나에게 충성하는 겁니다. 나에게 넙죽 절하는 거예요. 내게 유리한 것.

그때부터는 엄마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는 것 없고 그 다음부터는 거래를 하는 겁니다. 네가 김치를 먹으면 엄마가 기쁘겠다고 하면 애가 하는 말이, 김치를 먹을 테니까 엄마는 나에게 뭘 해줄 겁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애들 키워봤으니 잘 알지요. 뭐 해줄 겁니까, 그렇게 나온다고 뭘 포기 못하는 거예요, 뭘 사수하겠다는 겁니까? 나를 사수하겠다는 거예요.

나를 톡 깨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살아온 것 가운데서 내가 나를 지키는데 유리한 것들만 기억다발로 모여 있다고요. 방금 제가 한 말이 과학적인 이야기인데 모순 느껴지지 않습니까? 모순 느끼지요. 나가 나 되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지시 내린다. 이게 모순되잖아요.

저건 받아들이지 마. 이건 받아들여야 돼. 내가 나에게 지시를 하는 그 주인공이 내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들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 믿어라 할 때 누구 좋으라고 믿는다 합니까? 내가 좋기 때문에 예수 믿겠다고 나서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그냥 나를 믿는데 자료로 예수, 하나님 하나 슬쩍 옆에 걸쳐둔 거예요.

사울이 하나님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믿지요. 그러니까 선지자 사무엘을 그렇게 따라다니는 거예요. 자기에게 자기 왕국 이스라엘을 지키는 데 사무엘이 필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왜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이스라엘 사이에 중간 선지자로 권위를 인정해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사무엘 내친다면 백성들이 가만두지 않지요. 그러면 자기 기억 속에 있는 자기의 권력이 무너지지요.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줘 버리면,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증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23장에 보면 그일라 있지요. 이름도 어려워.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 사람을 쳐서 타작마당을 취했다고 1절에 나오지요. 그래서 5절에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이게 어떤 시점이냐 하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시점이에요. 지금 쫓기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치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7절에 보면,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이렇게 아까 사울이 하나님을 인정한다 했지요.

그런데 9절에 보세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9절입니다. 9절에서 다윗이 어떤 물건 하나를 가져오라 했지요, 그 물건이 뭡니까, 아비아달에게? ‘에봇’이라는 겁니다. 에봇이 어떤 물건이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물건이에요. 제가 광주강의 땐가 어느 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이니까 여러분들이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하나님의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까 성신, 악신 안 보이지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물증 또는 흔적 또는 징조, 징후가 물질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물질 속에는 무엇이 포함됐느냐 하면 아까 나온 에봇도 포함되고요, 더 핵심적인 것은 인간, 인간 같으면 육체도 있겠지요. 이것도 바로 하나님의 징후와 징조와 흔적, 물증에 해당돼요. 나라는 게.

골리앗과 다윗이 싸웠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는 반드시 적이 있다는 물증으로써 다윗은 하나님 편에, 골리앗은 적의 편에 속했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누굴 대적한다? 다윗을 대적한다 하면 사울이 중요하느냐, 다윗이 중요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겐 적이 있고 그 하나님이 누구와 싸우느냐는 물증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성도에게 뭐가 필요하냐 하면 성도에게는 사명감이 필요하거든요. 목사님만 아니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명감이 필요한 이유가 흔히 교회 와서 뭘 하느냐 하면 마트에 가서 물건 사듯이 교회 와서 천국을 사려해요. 천국을 구입하려 해요. 천국은 교회에서 구입하고 세제는 마트에서 구입한다. 왜? 셀프한테 나한테 필요한 거기 때문에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한테 성령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내가 뭘 구입하는 게 아니고 도리어 사명감에 내가 빼앗기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어서 천당 가겠다는 게 아니라 천국을 위해서 내가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내가 뭘 하나 소유하기 위해서 천국을 소유하고 하늘나라를 소유하려고 왔는데 막상 하나님의 뜻이 와버리면 낚아채 인 게 돼요. 그게 사명감이에요.

나 이제 예수 믿고 천당 가게 되었고 예수의 피로 용서받았으니까 슬슬 내 할 일이나 강냉이나 키우고 그렇게 살고 몸이나 안 아프고 살면 되지 뭐. 개나 키우면 되겠다. 그건 전혀 사명감 있는 게 아니고 사울과 똑같지요. 내 것 안 다치면 되지 뭐. 나라는 건 기억의 덩치고 내가 아는 나, 내가 나를 키워내는 나, 내가 나한테 봉사해서 건진 결과가 나, 나는 조금도 손상되기 싫다. 그걸로 족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내팽개치지 않습니다. 처음에 끝이 다르잖아요. 사울 간 길과 다윗이 간 뜻이 다르지요. 신약성경에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가 나오지요. 이 공식을 거기다 대입하면 거지 나사로가 거지 된 이유는 당연하지요. 그 인간 끝은 어떤 사람의 끝은 천국이고 낙원이고 어떤 사람 끝은 앞서 있는 부자의 끝은 뭐다? 지옥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징조 쪽으로 봐버리면 아까 전미래적 시제에 의해서 전미래적 시제와 이것을 결합시키면 천국이 있느냐, 봤어, 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지옥이 있기는 있어, 라는 이러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물증이 나와 있기 때문에. 물증이 나와 있어요. 천국으로 이끌림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천국과 연결돼있는 사람이에요.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

그런데 부자는 뭡니까? 천국과 연결이 안 돼 있어요. 그러면 부자는 지옥과 연결돼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지옥은 연결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살면 다 지옥 가게 돼있어요. 굳이 이 땅 자체가 아담이 저주받은 땅이기 때문에 그냥 곱게 사시다가 곱게 지옥 가시면 되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부자처럼 사명감이 전혀 없어요. 누가 나를 이끈다는 감각이 전혀 없고 자기가 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과 똑같아요. 교회 가서 천당이나 가볼까, 이런 식으로 오는 거예요. 교회 가서 기도해서 우리 가정이나 옛날 과거의 실패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회해서 잘해볼까, 그런 생각이 급하지요.

어제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이 안다는 것,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무엇을 방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심을 방해애요. 인간을 하나님을 아니까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아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한 겁니다. 이건 자기 생각에서 나온 추론이에요, 논리에요.

내가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은, 네가 알기는 뭘 알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의 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훼방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할 때 베드로가 제대로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혹시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날 사랑한 결과일 뿐이죠.” 그게 바로 사명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주님 계심의 물증이 뭐다? 지금 내가 주님을 알게 되었다는 자체가 물증이고 증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같은 인간을 바라보지만 신자는 사람을 먼저 보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을 저 사람 되게 하신 주님을 먼저 생각하게 되지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이게 영어로 쓰면 굉장히 쉬워요. test라 하는데 영어로 test라 하면 뭡니까? 시험 치다. 시험이란 말의 본 뜻은 뭐냐? 시련이에요. 무슨 시련이냐? 주님의 시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고난 받았잖아요. 시련 받았잖아요.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내 백성이냐 백성 아니냐를 가려내는 시련의 장으로서 하나님께서 활용해주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광야의 의미가 뭐냐 하면 달랑 두 사람 빼놓고 다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잖아요. 갈렙과 여호수아. 숫자로 봐서는 0.001%밖에 안 돼요. 아주 숫자 적어요. 그 광야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나님의 약속의 땅과 연결돼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차이성을 성경에서는 믿음이라 하거든요. 믿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성을 바라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자꾸 앞에서 나를 당겨. 자꾸 나를 당기는 어떤 분이 있어요. 왜 앞에서 나를 당기느냐 하면 이 시련의 세계,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시련과 시험의 세상에서 시험과 시련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과의 차이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을 오면서 시련의 세계, 시험의 세상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하거든요. 나 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의도적으로 이 세상을 무대로 보지 않는단 말이죠. 인생이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만들어가는 거지 누가 미리 설정해놓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불신자들의 공통점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개척해나가는 게 운명이죠. 나 하기 나름이란 말이죠. 잘 되고 못 되고는 얼마나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안 되는 게 없다.

참 인간들은 그런 못된 짓하는데 개 보세요. 개는 그런 생각 없잖아요. 강의하든 말든 주무시고 있잖아요. 얼마나 초월했어요. 인간들의 성과는 뭐냐 하면 내가 잘 되는데 있어요. 내가 얼마나 다짐을 하고 결심을 하고 얼마나 지식을 확보하고 얼마나 겸손하고 저축하고 성실하고 노력하면 뭔가 신은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돕는 자에게 한해서만 도와주신다는 것. 앞에 나오는 게 스스로거든요. 스스로 나한테 충성봉사하면 하나님도, “참 대견하고 훌륭하구나. 네 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니 내가 덤을 주마.” 그걸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는 뭐냐 하면 이게 하나의 무대에요. 무대는 본인이 설치한 게 아니에요. 주님이 설정했다는 말은, 과연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유혹인데 시련이거든요. 이 시련과 유혹에서 내가 지옥 같은 세상에 빠져나올 역량이나 능력이 나에게는 없음을 인정하는 자, 내 스스로 셀프, 자아한테 어떤 짓을 하고 나에게 충성을 해도 그 결과는 이 세상의 시련의 무게 앞에서 터널 앞에서는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겁니다.

세상사는 보람을 신자한테 일체 주지 않은 거예요. 내가 이 세상사는 희망 같은 것을 아예 주님께서 가위로 잘라버렸어요. 할례에요. 그냥 잘라버린 거예요. 네가 스스로 네 아는 모든 기억이나 그런 것이 이 땅에서는 시체가 돼야 마땅함을 안다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너를 그런 식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아무일도 안 했다는 게 아니라 다 주께서 시킨 일이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주께서 가장 적합하게 하도록 하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여러분 관심사가, 누가 나를 누가 이 세상을 시험케 하느냐, 누가 나를 시련을 주고 하느냐, 라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지요. 구약에 시련, 고난 돼있지만 신약에 가면 이렇게 돼있어요. 혼미케 한다. 우리의 정신을 혼미케 하는 거예요. 주님 생각하는 시간이 짧아요.

주님 잠간 생각했다가 돌아서면 돈벌이 생각으로 거의 스물네 시간 다 채워집니다. 돈 벌 생각과 돈 쓸 생각과 자기를 편하게 할 생각, 자기 즐길 생각, 그게 다수에요. 이게 뭐냐 하면 혼미케 하는 겁니다. 신약에는 혼미케 하는 거예요. 혼미케 하는 것은 무엇을 무시하느냐 하면 사명감을 없게 만들고요.

아까 다시 할게요. 사명감이란 하는 것은 나는 누구누구의 물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거는 신자에게서 나올 이야기지만 불신자 같으면 내가 여기 있다 하면, “너만 거기 있어. 너만 있지 아무리 봐도 뒤돌아봐도 없잖아. 없는데 자꾸 누가 있다고 이상한 헛소리하고 있는데 네가 미쳤어.”

너는 너밖에 없어. 거울 비춰봐. 너밖에 없지, 라는 불신자의 생각을 매일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한다는 거예요. 30년 예수 믿었는데 이건 뭐 하나님 계시겠나, 라고 본인이 혼미해져버리는 거예요. 그래도 붙잡아야지. 주여, 그래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그 순간 나오는 발언이고 지식의 일부고 실제로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신앙 없다는 생각을 내가 가질 생각을 겁이 나서 스스로 자기한테 최면을 거는 방법이 뭐냐? “주여, 믿습니다. 주여, 기도합니다.”

주변에 상황이 만들어져야 되는데 상황이 나로 하여금 시련과 이런 걸 주는 게 내가 억지로 내 신앙을 견지, 견고하다는 것을 티를 내고 싶어서 내가 나한테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이 작업을 바로 인간들은 신앙생활이랍시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오늘 본문이 중요한 이유를 알겠지요.

다윗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 혼자 도를 닦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믿음 있다, 믿음 있다 이걸 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쫓기고 있습니다, 실제로. 난데없이 쫓기고 있어요. 자기가 골리앗 이긴 것도 자기 평소에 골리앗 맞을 대비해서 연마하고 수련한 게 아니에요. 그냥 그 순간 맞닥뜨린 겁니다.

그러니 이건 뭐냐 하면 다윗에겐 사건이 뭘 이긴 거예요? 사건이 자기 존재를 이긴 거예요. 골리앗이란 사건이 자길 이겼고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그 사건이, 내가 내 존재를 근사하게 신앙 있게 간수하려는 모든 것을 다 박살내버린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내릴 결론은 뭐냐 하면 나의 신앙은 날마다 박살나야 된다. 이게 신앙이에요. 내 신앙을 날마다 박살내지 않으면 우리는 착각에 빠집니다.

여기 이사 열여섯 번 한 것 봅시다. 카메라에 비춰야 돼. 이 그림입니다. 가까이 봐야 되지. 열여섯 번 이상 다닌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림 아래쪽에 치수 나와 있지요. 10킬로, 20킬로, 30킬로 카메라 보이십니까? 그러니까 이 그림에 다윗에 열여섯 번 다니면서 미로를 쫓아다닌 게 아니고 킬로수를 보세요. 킬로수를 보면 쫓아다녀도 우리 동네 같아. 열여섯 번 다닌 게. 이게 뭐냐? 30킬로거든요. 30킬로 줄자로 대보세요. 여기서 계룡산이 한 30킬로 되는가 모르겠어요. (아니요.) 안 되지요. 집사님 댁이 그 정도 되지 싶다. (그것 넘어요.)

그러니까 돌아다닌 동네가 그림을 보게 되면 미국의 뉴욕에서 엘에이를 왔다 갔다 한 것 같지만 그 동네가 그 동네에요. 그래서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이를 잡듯이 수색한 거예요, 사울이. 오늘 첫 번 강의에서 우리가 알 것을 이겁니다. 왜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왜 사울은 다윗을 못 죽여서 환장했는가? 그 답변을 적을게요. 중요해서. “하나님은 불신자를 태만하지 않게 하신다.” 불신자가 신자 잡는데 불신자가 농땡이 부리지 않게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왜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느냐 하면 어차피 세상은 물증이에요. 지옥에 가는 자의 물증, 부자지요. 천국 가는 물증, 거지 나사로지요.

하나님께선 부자로 하여금 내가 더욱 더 부자로서 행세하고 부자 되는데 진력을 다하게 만들어요. 그 자체가 신자한테 시험거리가 되고 테스트가 되는 겁니다. 이 무대에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물증거리가 된다는 그 역할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걸 아신다면 매사건, 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느 하나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쁘게 받아들일 거예요.

불신자들이 어떤 설치는 것, 북한의 김정은이 어떻게 움직이고 도로공사에서 LH에서 부동산투기하고 뉴스에 나오잖아요. 가상화폐 나오는 것.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겁니다. 다른 사람 투기해서 돈 버는데 너는 지금까지 뭐하고 살아왔느냐, 라고 고런 재료가 되기 위해서 불신자로 하여금 그쪽으로 돈 쪽으로 부자 된 쪽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거예요. 상대적 박탈감을 만끽하도록 신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이 마귀를 통해서 그들을 부추긴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교회 안 다니고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안 아프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유포될 수 있도록 지금도 불신자들은 놀지를 않습니다. 게으르질 않아요. 아주 충실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어떤 이 세상에 잘 되는 이론 같은 걸 내세웁니다.

그게 바로 <설국열차>라고 있는데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거든요. 세상을 하나의 기차로 봐요. 객차가 있는데 저 맨 끝에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 양갱 같은 그런 것만 먹고 사는. 앞에 있는 것은 귀족계층이에요. 그래서 밑에서 하나씩 차고 들어와서 계급을 깨부수자 할 때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계급을 부셔서 네가 잘 사는 사람 되지 말고 이 철도 자체를 탈선시켜라. 이게 해답이라고 본 거예요.

이 세상은 돈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니고 아예 이 자본주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진리라고 보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이론 있잖아요. 이 이론이 바로 불신자에서 나온 이론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에서 나온 그럴싸한 모든 유토피아, 인간세계가 지금 전부 다 더 마음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이론들을 끄집어내는데 불신자들은 게으르지 않고 태만하지 않다 이 말입니다.

불신자가 하는 이야기, 악마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십자가 복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얼마든지 우리 힘으로 우리 아이디어로써 이 세상을 평등한 세계, 갈등 없는 세계, 눈에서 눈물 나지 않는 세계를 만들 수 있는데 왜 너희들은 다른 소리하느냐? 왜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느냐?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이 땅에서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그 주장이지요. 마이클 잭슨도 그 주장한 거죠.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우리한테 유혹이 될까요? 그렇다면 제가 이야기하죠. 그럼 쫓기는 다윗은 뭐냐? 사울은 다윗이 가는 그곳에 합류할 생각이 없어요. 우리 같으면 합류할 텐데 합류할 생각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일부로 사울을 통해서 쫓기게 해서 다윗이 본인도 모르는 하나님 나라에 점점 더 가까이 둬요. 가까이 둔다고요.

마귀는 지 딴에 수 쓴다고 다윗을 잡아야 이 나라 내 것이 된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다윗은 점점 더 하늘나라에 자기의 적을 하늘나라에 가까이 들여보내는 그런 결과를 낳는 거예요. 열여섯 군데 돌아다니면서 나중에 읽어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 나와요. 다윗의 특징은 갈 곳이 없어요. 갈 곳이 없는데 그때 갈 곳이 생겨요. 이 말은 다윗 자기의 신앙의 힘으로 결코 하늘나라 갈 수 없습니다. 자기 신앙의 힘으로, 믿음의 힘으로 갈 수가 없어요.

믿음이란 것은 믿음이 힘 되는 게 아니고 믿음이란 것은 저쪽에서 나를 그때그때 문을 열어주는 것이지 내가 힘 있게 아파트 탕탕 치면서 왔다 갔다 발로 차고 그런 떼쓰는 그런 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교회에서 금요철야기도 할 때나 하는 것이지요. 커피 한 서너 잔 마시고 밤새도록 기도할 것을 사전에 미리 준비해서, 딸기부터 담요 다 준비해서 오늘 쇼부 한 번 보겠다고, 승부 보겠다고 하는 것.

이것은 자기의 시련과 자기가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시험과 고난을 본인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해소된다면 나는 행복해질 텐데. 그러니까 본인이 행복하겠다는 그 목적이 이미 불신자들이 줬던 테스트에 걸려든 거예요. 내가 행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한테 허락한 적 없어요. 그것을 인정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행복하려고 이 땅 사는 게 아닙니다. 이 땅 자체가 시험의 장소에요. 뭘 행복이 있어요, 떠나야 될 장손데 거기서 뭘 행복을 바랍니까. 아무 것도 바랄 수 없지요. 기도 좀 했다고 헌금한다고 좋은 날 오시길 바랍니까? 그거는 교회란 이름의 절간에서 해줍니다.

다윗은 사울에 쫓겨 가면서 늘 하는 소리가 왜 자꾸 저를 잡으려고 합니까, 라고 사정사정 부탁해요. 다윗은 사울이 될 수가 있어요. 나는 당신처럼 될 수 있으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는데 사울이 악신이 들려서 나는 네가 이상하게 다윗이 되기 싫어, 이것 때문에 쫓아오는 거예요. 희한하지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편하게 살고 싶어요. 누가 돈 대주고 돈이나 있으면 있는 돈으로 놀러나 다니고 싶은데 우리의 숨길 수 없는 본성입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돈 있는데 나는 돈 안 쓸 거야. 이거는 미친 것이고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위선자고요. 여유 있으면 여유 있게 쓰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이 그런 환경을 주시질 않습니다. 왜? 부자 되고 싶은 생각이 여전하기 때문에.

주의 축복으로 부자 되고 나도 복 받아 부자로 살다 죽겠다, 이것이 바로 아까 사명감 결여에요. 하나님 누구의 물증이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고 싶은 겁니다. 내가 원하는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사명감 하나도 없지요. 내가 나 지키는 게 무슨 사명입니까? 전혀 사명 아니지요. 뭐 그것 하려고 성령 주십니까?

결국 이렇게 보면 돼요. 첫째 시간 결론은, 다윗은 필히 다윗에게 쫓겨야 한다. 이게 결론입니다. 나는 누구한테 쫓긴다? 나는 나에게 쫓겨야 돼요. 자꾸 나는 나에게 돌아가고 싶어. 내가 원하는 내가 되고 싶어요. 주께서 그 나와 나를 강제로 끊어놓는 거예요. 네가 원하는 너를 나는 그대로 되도록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내가 이끌어줄게. 이게 바로 예수님에 베드로 보고 한 이야기에요. 우리 자신이 우리한테 얼마나 큰 방해물인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주님의 일에 훼방물인지 그걸 아는 자가 바로 이 지옥 세상에서 탈출이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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