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요셉의 종점

아빠와 함께 2021. 4. 22. 08:41

대전-129강 마태복음27장 57절-61절(요셉의 종점)20210329-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7장 57절에 보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59절,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절,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죠.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한 거예요. 예수님의 어떤 죽은 시체, 시신을 달라고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나 위주로 살지 않겠다는 거예요. “나의 종착점은 당신입니다.”라는 고백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죽음이야말로 나의 죽음입니다. 나의 끝 지점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롤러코스터를 탄다고 하죠.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 곡선 점을 가지고 변곡점이라고 합니다. 변곡점. 그러나 요셉은 변곡점을 말한 게 아닙니다. 내 인생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는 달라졌겠다, 하는 변곡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종착점을 원해요. 최종점을 원하는 겁니다.

내가 스톱이 되는 그 지점, 나의 터미널, 나의 종점과 나를 바꿔버리는 겁니다. 그 종점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에서 혼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학생이나 하여튼 아르바이트 하는 젊은 사람이나 그 사람이 결국 버스가 서는 자리가 이게 종점이죠. 종점에 도착하면 가려고 해도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내려야 되잖아요. 그 내리는 나의 종점을 미리 땡겨서 자기 인생과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시신은 어디서 생산이 되었느냐 하면은 다수적 일관성 속에서 생산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관되게 속성을 갖고 있는 세계. 다수적 일관성이 있는 세계에서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다수적 일관성이 있는 세계에서 내린 결론은 뭐냐, 죽여라! 이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치가 않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치가 않는 거예요. 사람은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기고 필요치 않는 것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으로 의견이 다 통합된 그 일관성이 흐르는 세계, 그 세계에서 내린 결론이 뭐냐, 예수님은 필요치 않다는 결론이거든요.

그 필요치 않다는 예수님을 달라고 한 거예요. 스스로 뭘 자기로 인정하느냐 하면은 자발적 비-일관성 존재가 되겠다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이렇게 되겠다는 말은 내가 세상이 하라고 하면 안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나는 하겠다는 거예요. 청개구리도 그런 청개구리가 없어요. 마스크 하라고 하면 안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마스크 하고. 황사가 있으면 자발적으로 알아서 하고, 코로나 때문에 하라고 하면 안 하고.

그래서 요셉의 이러한 결정은, 첫째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건 다른 영토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시체를, 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시체를, 그 쓰레기가 바로 내 모습이라고 받아들인다는 말은 내가 이 땅에 쓰레기가 되어도 좋소! 가 되는 거예요. 내가 쓰레기로 취급받는 이것이 나는 무한한 영광이요, 라는 뜻이에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시신마저도 분류하는 작업을 주께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멈추지 않았어요.

이처럼 자기 자신을 볼 때에, 비-일관성속에다 자기를 집어넣었을 경우에 이 사람이 평소에 세상에 나가서 대화할 때에 어떤 식으로 대화하겠어요? 상대를 유인할 의사가 전혀 필요치 않는 말만 골라서 해요. 상대를 내편으로 유인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대화에 나섭니다. 이걸 아주 고상한 전문용어로 ‘싸가지’라고 하는 거예요. 말하는 폼새가 싸가지가 없는 거예요. 말을 할 때 서로 좋게 지내자고 해야 이게 말하는 사람의 보람이 있잖아요. 그러나 상대방이 꼭 필요한 말만 할 때는, 근처에 뭐 몽둥이나 뭐가 있으면 줘 패고 싶은 거예요. “이 싸가지 없는 것!”

사람이 내가 낮춰서 이야기하면 그쪽에서도 낮춰서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낮춰서 뭐 어떻게 꼬셔볼라고 뭘 하게 되면, “쓸데없이 낮추기는 왜 낮춥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죠. “당신은 날 유인할 의도가 있지만 나는 당신을 유인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라는 것을 아주 냉철하게 이야기합니다. 냉철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는 이걸 신앙적 자신감이라고 봅니다. 신앙적 자신감. 그걸 어려운 말로 자발적 비-일관성, 나는 너희들의 일관성에 참여할 마음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 너희들은 기껏 변곡점과 변곡점, 내일 어떻게 될까? 모레 어떻게 될까? 변곡점과 변곡점 사이에 갇혀 있지만, 나는 이것을 완전히 벗어나서 최종점, 종점에 내려버려요. 종점에서.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마음가짐 이런 것에 대해서 잘 묘사한 옛날 노래 가사가 있어요. 하나님이 만든 가사거든요. 하나님이 만든 가사를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간다.’ GOD가 만든 거예요. GOD가 만든 노래인데 가사가 참 촌스러워요. 요새 초등학생도 이렇게 써요. 진짜 촌스럽게 썼는데, 그 다음에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또 걸어가네.’ 이것이 굉장히 촌스럽기는 촌스러운데, 그 내용 가사를 보면 그렇게 투박스러워요.

고상하게 이렇게 이야기 안 해도,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현재 끝을 못 벗어났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길을 어디로 가는지, 가는지..’ 이걸 그 god는 이십대에 이야기했잖아요. 나중에 송해처럼 94살 먹어가지고 ‘내가 이 길을 어디로 가는지, 가는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계속 길타령을 하고 있어요. 길타령.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길이 없어요. 애초부터 길이 없었습니다. 제자리 뛰고 있어요. 제자리 뛰기. 제자리 뛰고 있었던 겁니다. 한치도 못 벗어났어요. 벗어난 적이 없어요. “엄마, 내가 나중에 살인하면 내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니는 니 자리 뛰고 있다. 제자리 뛰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길이라 하는 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은, 길은 이 땅을 창조한 그분만 길이 있지 다른 사람은 길이 없고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갇혀있는 상태에 여기서 1인치 옆에 있다고 해가지고 갇혀있는 것이 안 갇혀있는 법이 없거든요. 맨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호박 안에 들어있던 씨앗처럼 백날해도 호박 안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뭐 굳이 호박을 하지 않더라도 현재 이 지구상에 모든 사람들을 보세요. 어디에 박혀 삽니까? 지구에 박혀 살죠.

그림 한번 그려볼까요? 제가 어릴 때 의문점 하나가 이거였습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했잖아요. 사람들이 여기에 산다고요. 근데 우리는 북반구라서 안 떨어지는데 남반구에 있는 사람들은 왜 안 떨어질까? 이게 왜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가? 이게 굉장히 궁금했었어요? 1664년도에 뉴턴이 와서 중력이야기 할 때, ‘아, 인간은 하나의 물체고 지구도 물체라서 서로 땡기고 있구나!’ 이런 원칙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 때 그게 되는데, 실제로 그 법칙을 안다고 할지라도 가만히 보면 이게 신기한 겁니다.

어쨌든 간에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 관계없이 인간은 지구에 매여 산다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땅에 매여 살아요. 땅에 매여 살기 때문에 이 땅 말고 다른 새 땅이 있다면, 이 땅에 묶인 모든 사람은 자동사(死) 되는 거예요. 자동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어떤 공장 밑에 바퀴벌레가 있다면, 만약에 그 공장에 불이 난다면 바퀴벌레는 자동적으로 불에 타죽죠. 이 지구는 불에 타기 위해서, 불태우기 위해서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 불태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그 동네에서 그림 좀 그려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따라서 뭔가 거기서 우리가 어떤 좋은 의미에서 훔쳐낼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시체입니다. 용이 정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것을 남들이 갖다 버린, 어떤 의미에서 예수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가 위험의, 공격의 표적이 된다면 자진해서, 자발적이니까, 자발적 비일관성이잖아요. 비일관성은 일관성으로부터 항상 공격의 표적이 된다고요. 공격의 표적이. 그걸 자발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있겠어요? 못하죠.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냉정하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그 근처에서 나타나는 효과. 이것의 시작은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 시신을 달라고 하는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죽었지만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십자가 사건은 살아나는 겁니다. 본래 본질을 획득한 거예요. 죽은 자가 있어야 죽은 자의 효과가 사건으로서 효력을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효력의 발생에 첫 번째 나타나는 효력은 뭐냐, “시체 저 주세요.”라는 거예요. “시체 저 주세요.” “뭐 하려고?” “그냥 저 주세요.”

나는 나로 인하여 살지도 않을 것이고, 일관적인 이 세상에 의해서 살지도 않을 것이고, 나는 시신과 함께 더불어 나의 인생의 모든 문제점을 나는 끝내버리겠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나한테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거고, 그 시신 앞에 나는 일찌감치 죽은 자로 간주하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더 이상 내가 또 남을 유인하기 위해서, 또 남을 포섭해서 외롭지 않기 위해서, 또 남을 조종하기 위해서 부질없는, 쓸데없는 말을 안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세상에서는 그것을 싸가지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무 냉혹하고 냉철하고, 뭐든지 딱딱 끊어서, 어느 것 하나 쓸데없는 말은 하나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누가 말하듯이 감정도 없고 너무 차가운 그런 자가 되겠죠.

그러나 이렇게 차갑다고 욕 얻을 먹을 것이 아니고, 정말 따스한 그 죽은 예수님의 시신이 나의 따스함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따스함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이 시신을 달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느냐 하면은, 이런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거대한 댐이 있는데 이 댐을 인간들이 구축한 세상이라고 봅시다. 이 세상을 가지고 사람들은 그걸 문화라고 하고 또는 문명이라고 하거든요. 문화와 문명의 그 시작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바로 인간의 옷에 있습니다. 옷. 옷의 특징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에서 못 벗어날 때 감출 수 있는, 최초로 시도한 작업이 옷 만들기였습니다. 옷.

옷을 만들면 그 다음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자아가 긍정이 돼요. 자아가 긍정이 된다고요. 그럼 자아가 긍정이 되게 되면 이 자아를 본인이 안 죽으려고 해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여기서, 자아가 살아남기 위해서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은 이거는 힘이 필요하고요. 힘을 얻는 방법은 자기가 선하고 착하고 의롭다고 여기면 되고, 선과 의로움이 어떻게 판정되느냐 하면은 여기서 법이 동원되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악마의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법을 자기 몸에다가 칭칭 감은 거예요.

왜냐하면 법에는 저주가 있다는 사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법대로 안 하면 저주를 받거든요. 자기에게 저주가 주어지는 그것을 뭐가 좋다고 칭칭 감았습니까? 감은 이유가 뭡니까? 법이 있어줘야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판정할 수 있기 때문에. 남들이 해준 판정이 나의 판정으로 그대로 수입이 돼요. 옷을 입는다는 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은 카드 패를 자기 이마에 붙이는 거예요. 이마에 붙이면 자기는 이마에 있으니까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남들은 내 카드를 보겠죠. 남들이 내 이마에 붙인 카드를 보고 남들이 나한테 이야기를 해주겠죠. 그 이야기한 것을 모아놓으면 그게 셀프self,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남을 찾지 않을 수 없어요. 계속 남한테, 남이 원하는 재주를 부리고 미스트롯 대회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사업은 망했는데 노래는 잘하네.” 뭐 이런 소리를 들으면 다시 한 번 되는 거예요. 길거리에서 고구마만 굽다가 노래하니 너무 잘 부르네. 영웅이다 해서 임영웅이 된 거예요. 남들이 인정해줄 때 살맛이 나요. 남들이 인정해줄 때. 그림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노래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남이 요구하는 대로 내가 맞춰줄 때 그것이 나다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한테 칭찬해주고 나를 지켜주고 나한테 돈 벌어주게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면 저절로 누가 사라져요? 내가 사라지는 겁니다. 내가 사라져요. 그러면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내가 그때그때 수위를 조절해가지고, 레벨을 조절을 해서 같이 내가 맞춰주면 그거 밥 먹고 사는데. 이 땅에서. 남들은 나를 개무시 한지가 오래 됐는데 아직도 자기가 뭔가 옛날 평가에 그대로 눌러 앉아 그것이 자아라고 우기면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살입니다. 왜? 현실적인 자아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자아의 갭이 너무 크니까, 그 괴로움에 미쳐가지고, ‘잊으면 행복하겠지.’ 도대체 누굴 잊는 건지, 그냥 없는 걸로 쳐버리는 거예요. 없는 걸로.

자살하는 그 순간은 유일한 나고, 그동안 남이 나를 나쁘게 본 것은 내가 그걸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판사 하다가 퇴직했는데도 불구하고 “판사님!” 국회의원 하다가 그만 둔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의원님!” 여기 아파트 단지에 소규모로 과자를 파는 데 있잖아요. 과자도 팔고 음식도 팔고 있지요. 오게 되면 뭐 남자가 무조건 “아이고, 사장님!” 내가 뭐 언제 사장됐다고. “사장님!” 좋았던 그때 그 시절에서 당신 떠나지 말아야 살맛이 나잖아. 뭐 그런 식이죠. 자아가 긍정될 때에 이 법을 통해서 그걸 확인받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법은, 법을 통해서 자아가 어떻게 긍정되느냐 하면은, 옷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신분이 된다고요. 옷이 신분이 돼요. 신분이.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인간이 처음에 인류가 발달하면서 가축하고 같이 살게 되었어요. 가축하고 같이 살게 된다는 말은 그 시대를 토테미즘이라고 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그때는 자연을 대항할 의지가 없고 자연한테 잘 보여야 사는 거예요. 그러면 곰이라든지 독수리라든지 양이라든지 염소, 그들도 우리와 같이 정령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령. 어떤 영이 있다고 생각해서, 배는 고프고 저 가축이 젖이나 고기를 안 주면 못 사니까, 저 염소가 잘 살기 위해서 살살 빌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기는 고기로 먹되, 자기가 사냥한 고기에 대해서 대신 신으로 승격시켜주는 겁니다. 신이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먹을 것을 제공하는 거예요. 그걸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그 토테미즘 가운데 우리나라한테 제일 친근한 것이 곰이에요. 그 곰이 단군입니다. 우리는 곰의 자손이에요. 곰은 인내성이 있어서 끝까지 마늘을 먹고 견뎠는데..., 뭐 이런 거 나오죠. 그래서 널리 이롭게 해가지고 홍익인간이라고 해서 홍익대학교도 만들어졌잖아요. 토테미즘이라고 하는 것은 가축을 기르면서 미안하니까 가축의 신을 달래야 사냥이나 가축이나 자연이 우리에게 너무 힘들지 않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그렇게 한 거예요.

토테미즘적인 사고방식은 알타미라 동굴이든지 그런 동굴 보면 많아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사냥감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사냥한 고기를 신에게 드리는 거예요. 각 종족마다 신봉하는 동물들이 다 있어요. 그래서 성씨라고 하는 것은 다 동물에서 나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신라시대 조상이 ‘박혁거세’가 아닙니까? 사실은 세 명 다 알에서 나왔을 걸요. ‘주몽’ ‘김알지’라고 뭐 있어요. 전부다 알 출생이라고요. 알 이게 뭡니까? 계란이잖아요. 계란. 새 종류 아니에요. 새 종류에서 나온 거예요. 전부 다.

그렇게 하다가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어요. 이제는 인간이 고기를 뜯어먹고 난 뒤에 농업이 발달하면서 가축하고 더욱 더 발달하게 되고 이제 노동을 부리는 거예요. 고기만 주는 게 아니고 가축을 부리는 거예요. 실제로 농사일에 가축이 동원되는 거예요. 그럼 가축은 인간의 하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얼마나 자연이 노하겠어요. 그 자연을 달래기 위해서 중간에서 하는 기능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무당입니다. 이 시대를, 토테미즘 시대를 지나서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거예요. 샤머니즘.

샤머니즘은 신을 달래는 거예요. 그 샤머니즘을 누가 하느냐, 바로 왕이, 이방민족의 왕이 샤머니즘의 노릇을 하는 겁니다. 매년 정월이 되면 비는 거예요.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빌어야 돼요? 왕이 빌어야 되고.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면 왕자 중에서 비리비리한 왕자가 있잖아요. 그냥 놈팽이 왕자. 그걸 잡아죽여가지고 신을 달래는 거예요. 아들 바쳐서 하는 것, 구약 성경에 나오죠. 몰록 신에게 아들 바쳐서 하는 것. 신에게 아들 바침으로서 집안 형편이 나아지게 하는 거예요.

조상제사 지내는 것도 뭐냐, 둘째는 안 해요. 누가 합니까? 맏이가 하기 때문에, 옛날 아버지어머니들이 모든 재산을 맏이한테 주는 이유가 자식 걱정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좋을 데 가라고 자식 보고 계속 살아생전에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계속해서 너 잊지 마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살아 있을 때.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면 뭐합니까? n분의 1인데. 장남은 손해 봤어. 제사는 제사대로 드리고 돈은 동생들이 다 가져가고. 입 싹 닦아버리데요. 장남 위신 완전히 추락됐죠.

그래서 신의 보호가 없으면 농사가 안 되거든요. 농사는 특히 메소포타미아지역이라고 해가지고, 현재 이란 이라크 지역을 메소포타미아지역이라고, 티크리스 유프라테스 강 그 사이인데, 이 지역에 있어서의 모든 농사는 해가 아니고 달에 맞추어서 캘린더가 제작되었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농사 물의 조소간만의 차이를 생각해서 한 거예요. 따라서 여기에 대한 신들이 많이 발달된 겁니다. 폭풍의 신 뭐 부활의 신 전부 다 신들이 많이 되었어요. 그 신들을 모신 전문가가 무당 또는 왕, 또 바쁘면 제사장이 있던 거예요.

이들의 신분을 체계로 해서 서열, 사회적 서열이 있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은 법이 필요하고, 이 법을 위해서 옷으로 법을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몽고, 유목족 그들이 중국을 쳐들어왔을 때 이유가 뭐냐 하면은 성문을 열고 교역을 하자고 쳐들어온 거예요. 교역은 뭘 하느냐, 우리가 말을 줄 테니까, 우리보기에는 그들이 양식을 달라고 이렇게 하겠죠. 하지만 그들은 말을 줄 테니까 비단을 달라는 겁니다. 왜? 비단으로 옷을 해서 그 사회 공동체가 안정적인 체계가 있는, 법적체계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결국 무슨 뜻이에요? 이방민족이거든요. 이방민족에게서는 법이 있어야 돼요. 그 법의 최정점이 뭐가 있느냐 하면은, 법 중에 법을 갖고 있는 것은 왕이고, 그 왕에 의해서 내려가는 것이 뭐냐 하면은 그게 국가거든요. 국가가 마귀단체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악마의 치명적인 실수는 법으로 자기 몸을 휘감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악마에 속한 모든 인간들도 남들이 보기에 자기가 정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사람대우 해달라고 뭘 칭칭 감았습니까?

이미 기존에 있는 법과 상식과 윤리도덕으로 자기를 칭칭 감겠죠. 그래야 이 땅에서 의로운 자가 되고, 의로운 자의 행세를 해줘야 사람대우 받거든요. 인간쓰레기 대접 안 받고 사람대우 받는다고요. 그 법의 체제에 의해서 결정적인 사항이 뭡니까? 결정적인 사항이 바로 예수님을 죽여라, 이잖아요. 그 죽인 시체를 달라는 거예요. 요셉이. 요셉이 그걸 달라는 거예요. 나는 너희들하고 안 논다 이 말이죠. 너희들이 하라고 하면 나는 안 하고, 안 하라고 하면 나는 하겠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에 의한 효과가 그대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일번타자에요. 모든 성도는 이래 돼야 돼요.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아부하거나 주눅들 이유는 전혀 없다. 왜? 그 자크의 손잡이를 완전히 다 뺐기 때문에 그래요. 확 다 빼버렸거든요. 뭐 부모자식간의 그런 관계, 모든 것이 다 빠져버렸어요. 어제 낮 설교에서 갈라디아서 4장 했잖아요. 모든 육체는 뭐와 연결되었느냐 하면은 율법과 연관되어서 그거는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는가? 이 땅에 잉태되지 못한 자.

이게 말이 돼요? 이 땅에 잉태되지 못한 자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람은 구원된다는 겁니다. 뭐 안상홍 집단인가,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 그런 집단의 이론이 아니에요. ‘성령으로’에요. 성령으로. 그래서 신약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요단강에서 다른 사람들은 물속에만 풍덩 들어갔다가 나왔지만, 예수님께는 요단강에서 무엇이 덮쳤느냐 하면은 바로 하늘이 열리면서, 최초로 열렸죠. 하늘이 최초로 열리면서 하늘에서 뭐가 내려왔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어요. 비둘기와는 좋은 관계죠. 무엇과 대조해서? 비둘기같이 온다는 말은 무엇과 대비하느냐 하면은 불같이 내려온다는 것과 대비되는 거예요. 불은 심판을 의미하는 거예요. 비둘기는 심판받을 게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인데 나한테는 세례 받을 이유가 없는데 왜 세례 받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나한테 세례를 줘야 이 의가 지상에 유포되고 확산된다. 이래서 우리가 의를 이루자.” 결국 그것은, 성령이 왔다는 말은 무엇과 대비돼서 이 땅은 뭐로 지배되어 있어요? 성령 말고 육이 지배되죠. 갈라디아서 4장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무엇과 대비합니까? 육신과 무엇과 대비돼요? 육신과 잉태치 못한 자의 태어남. 성령으로 태어난 것과 육신으로 태어난 것과 대비시킨다고요.

좋은 놈 나쁜 놈이 아니라 있을 수도 없는 이상한 분. 이상한 분과 대비를 시켜놓은 거예요. 이상한 분과. 존재하지 않는 분과 대비를 시켜놓는다고요. 존재하지 않는 분과. 존재하지 않는 이런 대상자가, 이 땅에 없는 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발생시키는가? 그걸 바로 죽은 십자가, 죽은 분의 시신이 그걸 이루어 낸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황당해 보입니까?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지금 성령은, 예수님이 성령 받았죠. 예수님 당시에 아무도 성령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 받았잖아요. 근데 성령 받은 분이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어디에 속했습니까? 인간의 육신의 세계 속에 속해있죠. 이 육신의 세계를 이걸 댐으로 봅시다. 댐으로 보고, 육신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성령 받은 분이 지금 시신이 되었습니다. 시체가. 죽은 분이 되었죠. 죽은 분이 되는데 여기에 누가 관여하느냐, 성령님이 관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뭐냐, 자발적 비일관성이 되겠죠. 이 땅에서는. 여기 댐에 구멍이 하나 생겼다고 봅시다. 구멍이 생겼는데 이게 네덜란드 소년이에요. 손가락으로 막고 있습니다. 꾹. 이 댐이 무너지지 말라고.

근데 아리마대 요셉이 하는 일은 손가락을 빼는 거예요. 마개를 뽑는 겁니다. 마개를 뽑아버리면 뭐가 쏟아지느냐, 성령이 쏟아지는 겁니다. 성령이. 성령이 쏟아지는 거예요. 주님 자신이 성령의 몸이죠. 에스겔 47장 한번 봅시다.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문지방 밑에서 뭐가 나오죠? 물이 나오죠. 댐이라고 비유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물의 특징은 멈추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물의 특징은 졸졸 흐르다가 단수돼서 뚝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번 처음에는 물줄기가 이렇게 약했는데 점점, 3절에 보니까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육신적인 의식은 물 앞에서 저항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내 생각으로 살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는 뜻은, 이것은 뭐냐 자기 죽음을 시신을 통해서 확인하는 건데. 죽음이 뭐냐, 죽음이란 내가 나를 관리 못하는 것. 할 수 없는 것. 이게 죽음이에요. 내가 나를 관리 못하는 것. 사람이 자기를 관리하겠다는 것은 무슨 의도가 있느냐 하면은 이 육신을, 천국에 아무 짝도 소용이 없는 육신이에요. 육신은 무엇에 감겨있습니까? 저주스런 법과 감겨있기 때문에 육신이 죽지 아니하면, 법이 살아나면 법이 나를 죽인다 이 말이죠. 법과 육신이 다 없어져야 되거든요.

왜 사람들은 자기를 자기가 관리하고자 하느냐 하면은, 자기 육신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지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이걸 버티기라는 말로 하는데. ‘내가 이래 이야기하면 저 사람은 저래 이야기하겠지. 그럼 저 사람은 나한테 욕을 하겠지. 그럼 내가 쌓아놓은 나의 체면과 명예와 인품에 손해가 가면 내가 안 되겠지. 그럼 내가 문자로 사과해야 되겠지.’ “죄송합니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너무 도가 넘쳐서 까불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겠죠.

그게 뭐냐 하면은, 결국 그렇게 하겠다는 결과가 뭐예요? 내가 수완을 발휘해서 남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지키겠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누굴 지키겠다는 거예요? 나를 지키겠다는 거예요. 근데 나를 지켜서 뭐 할 건데? 나를 지키게 되면 일관성이 있는 세계에 하나의 일원이 되고 구성원이 되겠죠. 그걸 금지하거나 그걸 중지할 수 있는 위력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사과하고 감사하고 있는데 저 5층에서 누가 실수로 물바가지를 부어버리면 이거 뭐 다 흠뻑 젖겠죠. 흠뻑 다 젖어버리죠. 꽃구경 간다고 했다가 흠뻑 다 젖었을 때에, 이게 은혜잖아요. 미리 예상해서 우산 안 썼다 이 말이죠.

이게 우산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이 죽은 시신을 어깨에 메자 이 말입니다. 즐겁게. 나 끝났어. 끝나도 좋아. 괜찮아. 끝나서 좋아. 해버리자 이 말입니다. 이게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입니다. 이 세상이 결정된 것에 나는 동의 못 하겠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일관성, 아까 어떤 일관성이라고 했습니까? 다수적 일관성 속에 우리가 거기 살았잖아요. 다수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그 개인 개인의 품성과 성향이 의도하는 바는 그 다수 속에 일원이 되었던 내가, 평소에 나를 어떻게 관리하고 지키려고 했습니까?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것과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과 동일했잖아요.

근데 이제는 그 생활을 그만두겠다는 거예요. 나를 더 이상 지키지 않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해줄 테니까 당신은 나한테 뭘 해줄 거요?” 라는 말을 일체 이제는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키워줬으니까 나중에 커서 너는 엄마 섬길래? 아빠 섬길래?” 이런 거래 관계는 이제는 중지하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리는 다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나를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왜 나를 관리하고 싶은가, 내가 아직 안 죽었다는 겁니다.

내가 안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아까 논리에 의하면 아직도 나를 알아주는 세상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타인이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집사님 빼놓고 세종시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칩시다. 집사님 빼놓고 다 죽었어요. 그리고 집사님은 바깥에 못 나갔을 때 그림 그리겠습니까? 심지어 그림 그린 것을 아무도 봐주지 않았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동안 남의 시선에 놀아났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게. 내 안에 내 거라는 것이 없었어요. 전부 남의 것이었어요. 자식 교육시킬 때도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는 인간이 되어라. 이게 잔소리의 핵심이었어요. 네가 그런 행동하면 남들이 얼마나 욕하겠느냐? 이 말이 그 말이에요. 네가 너를 지켜야지 누가 지키겠느냐? 하는 거예요.

아리마대 요셉은 바로 그러한 지킬 나를 내가 물에 떠내려가게 만들었어요. 그 물이 어디서 나오는가, 성전에서 나와요. 에스겔 47장. 성전에서 나오거든요. 그러면 나는 떠내려가는 하나의 물방울이라도 좋소. 이러겠죠. 요한복음 7장 봅시다. 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여기 나를 믿는 자라고 했죠. 아리마대 요셉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시신을 강탈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예수님이 아니고 죽은 예수님을 자기 살아있는 것과 바꿔치기 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으나 죽어 있으나 한결같이 예수님은 나를 대신할 분이에요. 예수님이 죽든 살든 상관없이 나는 주님 앞에 없다가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성령이 어디로 흘러들어오겠습니까? 믿는 자에게 흘러들어오겠죠. 그 믿는 자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생수의 강이 흘러나요. 생수의 강이. 이를 믿는 자의 말은 성령을 가리켜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27장에 있어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고, 그 다음에 그 시신을 구경하러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61절에 보면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막달라 마리아죠. 막달라 마리아. 세 명의 마리아가 종종 나타나는데, 막달라 마리아, 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막달라 마리아 그 인생 경로 자체가요.

순간이 인생이 된 겁니다. 인간들에게는 순간은 없어요. 순간은 없고 뭐만 있느냐 하면 시간만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순간적인 사건은 어디다 다 편입되고 흡수통합이 되느냐 하면은 역사에 흡수통합이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 순간만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놓쳐버려요. 없어요. 그때 참 좋았다. 405장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 부를 때 참 좋았다. 근데 지금 한번 불러보세요. 좋았던 것이 있는가. 좋았다, 라는 역사의 기억만 있을 뿐이지, 그때 그 기분은 없어요.

이걸 두뇌의 지도에서는 언어가 시간을 관리하기 때문에 기억 속에다가 옛날 괜찮은 것을 창고에다가 다 집어넣어서 그래요. 장기기억이라는 해마라는 곳에, 해마다 다 기억을 하기 때문에, 고물만 기억하는 거예요. 고물만. 기억해놓고 그 기억이 아까워서 나를 못 죽이는 거예요. 나를 지키는 겁니다. 내가 그동안 걸어왔던, 쌓아왔던 경험들이 너무 아까워서 그걸 고이고이 지켜주는 거예요. 자식도 나의 기억의 일종이니까, 그 자식을, 내 DNA가 있기 때문에, 50퍼센트 있거든요. 사촌 간에는 1/8, 12.5퍼센트가 하여튼 그렇게 있기 때문에, 내 유전자를 지키는 본능에 의해서 그게 지켜진다 이 말이죠.

지키기 위해서는 말을 할 때 필요한 사람 같으면, 저 사람은 나한테 필요하다고 하면 좋게 말을 해서, 좋게 말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안 해도 될 말을 유인책으로 해가지고, “아이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까불까불 대면서 유인하겠다는 말은 나한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 유리한 게 아니고 나한테 유리하죠. 그럼 내가 나를 관리하는 셈이 되죠. 그게 바로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잖아요. 이게 일관성이 있는, 다수적일관성이 아닙니까? 여기에 아리마대 요셉이 놀라운 혁명을 일으키는 거예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싫어버린 바 된 그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그러면 아리마대 요셉은 거기까지는 몰랐을 거예요. 그냥 예수님의 제자는 제자니까 보고 싶어서 달라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요셉의 경로를, 요셉의 그 모든 경로를 예수님의 내장이, 십자가사건의 내장이, 본질이 쏟아져 나오는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삼는 거예요. 경로가 되게 하는 거예요. 성도에게 주어질 앞으로의 모든 일은 예수님 자신의 일의 경로가 됩니다. 과정이 돼요. 그거는 개인의 역사가 아니고 주님의 역사요. 주님의 십자가사건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중에 누가 참여했다고요? 막달라 마리아. 이거는 일곱 귀신들린 여자에요. 일곱 귀신들렸다는 말은 꽁꽁 묶여서 꼼짝 마라는 뜻이에요. 꼼짝 마라. 어떤 것도 그냥 일곱 밧줄로 묶었다고 생각하면 돼요. 일곱 밧줄로. 꽁꽁 묶인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의 인생이 만약에 마귀한테 풀려나왔다면 이거는 결코 본인의 재주가 아닙니다. 본인의 신앙심이나 능력이나 기도빨이라든지, 헌신, 순종, 이거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외부에서 누가 가위로 다 끊어줬어요. 귀신을 쫓아냈다고요. 그럼 귀신을 쫓아낼 때는 귀신보다 더 센 게 왔을 때에 도망치듯이 빠져나온 것이지, 인간이 무서워서 귀신이 풀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은 악령과 대비가 돼요. 이점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성도는 더 이상 본인의 인생이 아니고 성령이 악령보다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경로를 펼치기 위한 인생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성령이, 주님의 십자가가, 주님의 일하심이 인간이 일하는 것보다 항상 더 세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이겼다. 이겼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도는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겼다. 어디서 이겼는가? 죽음에서 이겼다.

그럼 죽음은 뭐냐,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게 죽음이에요. 더 이상 내가 나를 관리 안 하게 되고, 다만 주께서 “오늘 밤 내 영혼을 데려가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는 것처럼, 주께서 항상 오늘도 살려준 인생이에요. 주께서 살려준 인생.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일같이 댐에서 손가락을 떼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시신과 더불어서 같이 사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다고 했죠. 이거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도의 됨됨이 또는 세상 사람들의 됨됨이는 뭐로 알 수 있느냐 하면은 그 사람의 언어로, 말을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말을 통해서.

말 자체가 행동의 일부입니다. 실제로 주먹질 하는 행동도 있지만 말하는 것도 행동이에요. 그 말속에 본인들이 갖고 있는 기억이 있어요. 이 기억이 나오게 되면 말이 되는 겁니다. 평상시 말에서 이 기억된 것이 내 지도 가운데서, 브로카지역이라고 있어요. 또는 베로니카지역 거기에서 인간의 목청, 성대의 핏줄을 조종하는 신경조직에 의해서 이렇게 음소들이 끊어져요. 끊어진 것을, 이거는 빈 시간이 있을 거예요. 기억하고 ‘아’ 하는 사이에 빈 시간이 있죠. 그 시간을 또 관리하는 신경의 대뇌피질의 조직이 있어요. 그걸 이어버리면 ‘가’가 되거든요.

이런 식으로 해서 언어 안에다가 뭘 담느냐 하면은 시간을 담습니다. 시간을 통해서 언어를 관리하게 돼요. 관리하는데 그 최종적인 목표가 뭐냐 하면은, 26번 자리가 뭐냐 하면은 브레인brain 대 브레인, 뇌중에 뇌인데. 그걸 구성적 셀프self, 내가 나를 구성한다는 말이에요. 참, 이 말이 말 같지도 않은 말이지만 하여튼 과학에서는 이래요. 나는 내가 구성한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이란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게 죽음이죠. 그 결과가 뭐였습니까? 예수님 살해죠.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들의 자기 구성 자체가 이거는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을 추후적으로 주께서 통보해주는 거예요.

아리마대 요셉은 그걸 알았던 거예요. 이쪽하고 안 놀고 나는 주님 시체하고 놀겠다. 나는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겠다. 이래 되는 겁니다. 말로서 이렇게 알거든요. 그러면 이 말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어떻게 성도냐 아니냐를 분간을 하느냐, 보통 제가 보편적으로 이야기해요. 그 사람 속에서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성도가 아니다. 자기를 지키는 용도로 나오면 그거는 성도가 아니다. 이렇게 할 수가 있는데. 그걸 성경에서는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를 합시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베드로를 만날 때 질문을 누가 했습니까? 베드로가 했습니까? 예수님이 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했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먼저 했죠. 그게 바로 정상이에요. 그러면 베드로가 하는 모든 말은, 일상의 모든 말은, “강아지야 밥 먹어라” 하는 모든 일상의 말이 있잖아요. 친구한테 놀러 갈까? 하는 모든 말은 그 친구한테, 개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준 주어진 상황에서 주님한테 답변하는 식이 되는 거예요. 상황을 통해서 주님께 답변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을 한번 봅시다. 세상 사람은 주님중심이 아니고 자아중심이죠. 자아중심이라 이 말이죠. 어느 노래 가사를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오늘 노래 두 개를 준비했어요. 마지막에 하나를 써먹어야죠. ‘말을 못해서 말을 안 했나. 내가 싫어서 말을 안 했나. 이 무정한 사람아 그래도 나는 영원히 너를 기다릴 거야.’ 흔히 나오는 가사죠. 이 가사를 어디서 베꼈는가 하면은 조덕배가 불렀던 ‘나의 옛날이야기’라는 노래에 있어요.

이 대화보세요. 상대방이 아무리 전화하고 찾아가도 안 만나주고 전화도 답변이 없으니까. ‘니가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부끄러워서 말을 못했나. 아니면 내가 싫어서 말을 못했나.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를 하지.’ 물론 싫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안 찾아 갈 사람도 아니지만. 하지만 나는 일방적으로 영원히 기다리겠다. 이 말을 왜 합니까? 왜 해요? 누굴 위해서 해요? 내 심정을 알아달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상태에요? 댐이 안 터진 상태에요. 위에서 바가지로 물을 안 부은 상태에요. 나는 누가 관리한다? 끝까지 내가 관리해야 한다는 거예요. 나는 나를 지킬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똑같은 경우라도 성도는 뭐냐 하면은 ‘당신 말 못해서 말을 안 했어? 싫어서 말을 안 했어?’ 거기에 괄호 열고 (그래서 그것도 주께서 하신 것이지) 이게 들어간다 이 말이죠.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자식이 애를 먹이고 하더라도 주님이 일으킨 상황에 내가 응답하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요셉입니다.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는,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있는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최종적인 영토에 놓여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서 예수님 자신을 지키고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살게 해주시니, 이 사실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고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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