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30강 마태복음27장62절(강도의 죄)20210426b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 27장 62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방금 읽었던 계획, 그 스케줄 누가 짠 겁니까? 주님이 짠 거예요, 인간들이 짠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짠 겁니까? 바리새인이 짠 거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존재 자체가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들 자기의 본성을 스스로 끄집어내게 만들어버렸어요. 이러한 계획, 부활이란 계획은 주님에게는 없어요. 놀라운 사실은.
부활이란 개념을 할 때 인간들이 아는 개념은 뭐냐?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개념은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는 개념이에요, 이 부활 개념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소생이지요. 소생과 부활의 차이점은, 소생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시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게 소생이라 합니다. 벌써 어렵지요.
5월 26일 죽어서 5월 29일 태어나면 그건 소생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부활은 부활 동시에 시간에 매이지 않는 새로운 나라가 등장하는 거예요. 영원히, 영원히, 영원한 나라가 오는 거예요. 그게 부활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얼마나 많진 않았지만 있었잖아요. 에녹도 그렇게 엘리야도 그렇고 뭐 엘리사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으니까 있단 말이죠.
하지만 부활의 첫 열매는 누굽니까? 그들 아니에요. 마리아 오빠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났지요.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니고 시간상 앞섰다고 해서 첫 열매가 될 수 없어요. 부활의 첫 열매는 부활한 나라의 시작이에요. 더 이상 죄가 성립되지 않는 나라의 시작이에요. 그 나라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그냥 소생으로 여겨지는 부활만 있을 뿐이에요. 저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난다, 이게 인간이 알고 있는 부활 개념의 한계입니다.
여기 등장인물이 등장하지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그 다음에 빌라도 나오지요. 인간들이 내세울 수 있는 지혜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에요. 이 인물들이. 그래서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몸은 앞선 몸이 있어도 자아는 앞선 자아가 없다.” 우리의 몸은 앞서 누가 있느냐 하면 부모가 있어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까 부모보다 앞선 몸이 있지요. 그런데 나라는 것은 나보다 나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나는 반칙인 거예요. 이게 없는데 생겼어요. 나가 없을 때 생겼기 때문에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악마가 내 몸을 가지고 사용하면서 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특징은 뭐냐? 자아의 특징, 나의 특징은 뭐냐? 불멸을 요구해요. 이게 누구 요청이냐 하면 악마가 신에게 하나님에게 요청한 게 이겁니다. 제발 나를 그냥 놔두세요. 이게 악마의 생각의 전부에요. 그냥 내가 나대로 건드리지 말고 가만 놔두라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선 악마를 어디로 보냅니까? 지옥 불에 보내지요.
지옥 불이라 하는 것은 글자로 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실제로 용광로 앞에 들어가게 되면 끔찍합니다. 쓰레기소각장 있지요. 여기에 어떤 둥그런 건물이 있는데 쓰레기소각장이라 합시다. 여기에 쓰레기가 잔뜩 플라스틱이고 쇠붙이고 종이들이 비닐이 산처럼 쌓였다고 합시다. 이 뒤에 뜨거운 용광로가 지하에 불타고 있다고 합시다. 여기서 여기까지 컨베이어벨트가 있고 이 중간에 분쇄기가 달려있어요. 파쇄기.
여기 있던 어떤 형태가 분쇄기에 들어가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조각조각 나지요. 이걸 몸의 형태라 보고 조각조각 난 이걸 흙으로 봅시다. 그 다음에 뭘 기다립니까? 이걸로 끝이에요? 인간은 공동묘지 장례식에서 이걸 끝이라 보지요. 심지어 기껏 화장터에 가서 화장해도 마찬가지지요. 쭉 가서 그 다음에 어디로 빠지느냐 하면 조각조각 난, 화장터에 사람을 조각내지 않잖아요. 있는 채로 불태우잖아요.
그러나 쓰레기소각장에선 어떻게 합니까? 분쇄해서 조각내서 용광로 불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분쇄되지 않는 상태에서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면 미리 용광로 불을 보세요. 끔찍합니다. 그리고 특징이 높낮이가 내리막길이에요. 브레이크를 잡을 수가 없어요.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형태가 있으니까 흙이 되지 않았으니까 흙이 될 때는 죽어야 흙이 되니까.
흙이 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대선이 어떠니 뭐 이재명은 몇 퍼센트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코로나에 마스크 안 하면 벌금 삼백 만원 문다. 이런 것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미끄러져서 파쇄기는 어떻게 피했다 합시다. 멀쩡한 채로 가니까 더 무서운 거죠. 여기서 갑자기 거대한 포클레인이 내려와서 달랑 지옥 불에 가기 전에 건져내는 이 장면, 이 장면이 영화 <토이스토리4>에 나와요. 디즈니 만화영화.
용광로 들어가기 전에 위에서 포클레인이 내려와서 주인공 일행을 데려가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 안에요. 십자가 안입니다. 죽었다가 살려주는 게 아니고 그냥 이제는 죽은 체로, 죽은 자로 간주되어서 예수 안에서 살게 하는 거예요. 미리, 미리. 성령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살게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 성경 가운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너희들은 십자가 밖에 있고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이 무지무지 어려운 이야기에요.
십자가가 반복성 사건이란 것을 일러주는 겁니다. 십자가 졌다는 것도 어려운 이야기지만 십자가가 반복된다는 것도 정말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몸은 우리 조상님이 있기 때문에 앞선 몸은 있지만 자아라 하는 것은 나보다 앞선 자아는 없어요. 어제 오후설교에 이걸 약간 언급했지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는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상태가 하나님 걱정하지 말고 네가 내 앞에 누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거다. 네 앞에 네가 없는 입장에서 하나님 앞을 걱정하는 것은 너부터 챙겨라. 네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서 질문을 엉뚱한 사람에게 하고 있다 이 말이에요.
몸이 끊임없이 자아가 생기니까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반복으로 끊임없이 이 자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주님의 것으로 바꿔야지요. 주님의 지체로서의 자아를 바꿔야 되는 거예요. 방금 한 이 이야기를 지금까지 한 어떠한 어려운 말보다 더 어렵게 해줄게요. (아니고)
“사건은 전의 이름과 명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건은 또는 십자가 사건은 주님의 사건, 주님의 일은 전의 이름, 전의 이름이 누구 이름입니까? 내 이름이죠. 내 이름은 내 이름이죠.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죠. 그 이름과 명칭, 개 이름 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내 이름을 지속시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①이 허상뿐인 나를 날마다 토막을 내요. 결국 우리 몸은 흙이 되잖아요. 우리 몸만 토막 내는 게 아니고 ②우리 자아도 사라지기 전에 토막이 납니다. 토막이 나면서 여기서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③주님의 사건이 개입돼버려요. 사건이 개입되면 이 사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운명, 예수님의 팔자가 여기에 응축해서 담기게 됩니다.
너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마치 누구처럼? 나처럼. 너 죽었다가 살아났어. 마치 나처럼. 이것이 십자가 사건 속에 매일 반복되잖아요. 그걸 약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너는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너는 죄로 인하여 죽었잖아. 그런데 의로 인하여 산 거야.” 그 다음 날 되면, “너는 죄로 인하여 죽었잖아. 그러나 나의 의로 산 거야.” 이것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로마서 4장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더불어서 우리는 죽어야 하지만 예수님이 살아서 사건, 성령주시는 사건, 십자가 사건, 우리에게 성령을 주게 되면 사태파악이 돼요, 우리가. “아아, 내가 자아가 생각한 현실이 내가 생각한 예수, 내가 생각한 부활이, 부활이 아니구나. 예수님이 아니구나.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니구나.”
주께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활용하고 있다. 내 육신을 마음껏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내가 값을 주고 산 내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바로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증거하라. 그 말이 그 말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방금 이 말이 맞는다면 주님의 사건이 온 사람의 특징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여기 있을 때에 나타날 수 있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감수성 있는 여고생들에게 그런 경우가 많은데 여고생들이 우리 클 때 검은색 교복을 입게 돼있어요. 나 고등학교, 중학교 때. 옷은 검은데 깃을 하야네요. 하얗게 풀 먹여서 빳빳해야 돼요. 그래야 티가 나니까. 스타일이 사니까. 그래서 선도학생들 선생님들 만날 후줄근한지 지저분한지 그것 조사하잖아요. 그러니까 풀 먹였으니까 어떻게 돼요? 모가지를 빼는 거예요. 학교 갈 때는. 교복 입는 게 고욕이죠.
그렇게 청순하고 그 청춘을 딱딱한 풀 먹인 교복 안에 가둬놓을 때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난 여자는 아니지만 이해하는 거예요. 그런 여학생에 있어서 성당 한 번 보세요. 어릴 때 성당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일단 청소가 잘 돼있어요. 할 일 없는 수녀들이 청소하거든요. 수녀들이 별 할 일 없잖아요.
안의 내부 장식이 그렇게 청순하고 고상하고 신비로워요. 세상의 모든 최고의 선함과 거룩함과 순수함을 성당의 지성소에 간직돼있어요. 깨끗하지요, 깔끔하지요, 의자 하나 때 하나 없지요, 의자 반들반들 윤이 나지요. 성당의 구조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절로 수녀로 귀의하고 싶어. 순수 진리를 믿으며 순수를 지키며, 가사 그런 노래 있어요. <세상 가장 밝은 곳에서>(유익종) 진리를 믿으며 순수를 지키면서 교정을 들락날락하는 그런 내용이 나와요.
그 더러운 세상, 만날 술 처먹고 깽판 치는 자기 집안 아버지를 볼 때와 자기가 봤던 수녀들과 신부들의 깔끔함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인생을 사는 세상을 사는 보람을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거예요. 아아, 세상은 마냥 더러운 곳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처럼 마냥 더러운 것이 아니다. 세상에 나는 우리 집구석은 이렇지만 나만은 순수하고 이 세상에 최고의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다. 그런 여고생 마음에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 없었어요?
그게 바로 유대교입니다. 순수한 나를 계속 순수하게 가서 천국까지 골인시키는 거예요. 어떤 의무감, 나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게 생겼단 말이죠. 그게 바로 유대교거든요. 유대교는 지성소가 있었으니까. 성전에. 그렇다면 적어볼게요. “예수님의 삶이란 인간들의 생각과 의식 중앙을 지나쳐간다.” 예수님의 삶이란 인간의 모든 생각과 의식 중앙을 지나쳐가는 거예요. 뚫고 가는 거예요. 지나가는 거예요. 인간들 사이를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홀로 산에 가 도 닦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인간들이 어떤 생각하고 있는가를 그 한 가운데를 그냥 지나쳐가는 겁니다. 지나쳐가면 이게 뭐냐 되느냐? 예수님의 일대기가 되겠지요. 그 일대기가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누구의 일대기냐 하면 성도, 우리들의 일대기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 꾸며낼 수 있는 것, 모든 고상한 것, 거룩한 것, 근사함을 그냥 그대로 온 몸으로 맞바람 받듯이 받아서 통과해야 그걸 뚫고 지나가야 돼요. 나 저거 되고 싶어, 나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그걸 뚫고 지나가야 돼요. 뚫고 지나가려면 그들의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경험했던 체험했던 그런 벌어진 사건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그 소문 듣고 이건 말도 안 되는 당연히 구라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인데 예수님 보고 뭐라 합니까? 유혹자라 하지요. 이 유혹자가 또 무슨 추가적인 구라를 떨지 모르니까 자기가 죽어놓고 살았다고 거짓말할지 모르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인간의 방법은 뭡니까? 시체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시체가 없으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거짓말이 유효할 수 있어요. 무지몽매한 인간에게 이게 먹혀들어갈 수 있다고요.
성도의 생각, 의식이란 극도로 자신을 의심하는 거예요. 그냥 대충 두루 뭉실 믿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극도로 의심하는 거예요. 40년 믿었는데 헛방일 수도 있다는 것, 본인이 그걸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교회 믿고 한 달 월급 올랐는지 집구석 나아진 게 뭐가 있느냐 말이죠.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차이점이 전혀 없잖아요. 없는 걸 억지로 차이점을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뭔가 내가 나의 생각을 조작하는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단 예수님의 말은 전부 다 구라에요, 거짓말이에요. 지금 제 이야기가 아니고 저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하는 이야기를 그냥 허투루 듣지 말란 말이죠. 그게 내 안에 잠겨있는 내 본성이란 말이죠. 부활 같은 그런 말도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내가 하고 이야기를 그들이 대신해주는 겁니다. 그것도 신앙생활 50년 하고 난 뒤에. 복음 안지 70주년 되는 날에 그런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제가 어제 낮 설교한 것 예를 들겠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인들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천하에 몹쓸 죄인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땅한 일입니다, 라고 했을 때 “내가 한 번 짓밟아드릴까요?” “아니돼옵니다, 그것은.” 이 말이 거짓말한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나를 지속시키고 싶은 거예요. 나 자신을.
다시 할게요. 자아라 하는 것은 이건 없던 게 생긴 거예요. 몸은 있는 것 맞는데 자아는 없어요. 없는데 뭔가 괴물이 갖다 집어넣은 거예요. 자, 악마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날 건드리지 마라. 안 믿는 남편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네가 교회 가든지 밤 샜는지 모르겠는데 제발 나 보고 교회 가잔 소리하지 마라. 나 건드리지 마.” 그거잖아요.
이게 나중에 남편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자식들도 이야기해요. “엄마, 믿는 건 좋은데 엄마 신앙이고 내 신앙을 강요하지 마라.” 그것도 겁나서 말도 못하잖아요. 밥은 밥대로 해주고 빨래는 빨래대로 해주면서 말 한 마디 못 건네는 거예요. 지금껏 밑천 드렸는데 말을 못하네. “저도 다 컸어요. 저도 생각이 있어요. 믿을 때 되면 믿겠지요. 자꾸 강요하니까 더 믿기 싫잖아요.”
이게 지금 무슨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가. 언제 교회 나가줄게요. 교회 나오라 했어? 나는 네가 그게 바로 지옥 갈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건데 지금 자꾸 엄마 보기에 그럴싸하게 신앙인 티내드릴게요, 예의상. 그동안 나한테 한 투자에 대해서 배려하는 차원으로 교회 가줄게요. 동영상 하나 들어줄게요. 들어서 뭐할 건데.
안 밟히겠다는 거예요. 난 누구로부터 밟히지 않겠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밟히든 자살하든 자살해도 내가 죽지 남한테 강요당해 죽긴 싫다는 겁니다. 김정은 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인간은 자기 생각 빼놓고 다 거짓말입니다. 주님은 이걸 알고 통과해요. 통과란 말을 쓰는 이유가 주님이 따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인간 속을 통과함으로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그들은 하나님에 들어올 수 있는 자질이나 근본적인 본질이 전혀 될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 찾아보겠습니다. 15장 24절,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해서 너무 마음에 드는 구절, 마음에 든다면 말이 안 되지만 너무 제가 늘 느껴지는 생각을 갖게 한 구절이 구절입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말씀 자체가 참 신비롭지요.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참 예수님 말씀 어렵게 이야기하십니다.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내가 너희에게 일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죄가 있었다, 없었다? 죄가 없는 자에요. 왜? 그들은 죄 없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죄를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죄가 있는데 죄가 있음을 알기에 자기가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죄가 있는 것을 없애는 쪽으로 그냥 나를 죄 있는 쪽으로 방치하지 않고 어떤 노력을 가미해서 죄 있는 내가 죄 없는 쪽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왜 우리가 죄인이냐고 의아해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 전하면 그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내가 뭐 뼈 빠지도록 직장에서 돈 벌어서 당신 키우고 애 키웠는데 이제 와서 당신은 어디서 들은 구석이 있어서 나보고 죄인이라 하면 난 도대체 어디를 보고서 울어야 돼, 어느 구석을 보고 울어야 돼? 타이밍 이야기해줘. 내가 죄인입니다, 울 타이밍 이야기해달라고. 울어줄게.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 생일맞이해서 울어줄게. 당신 원한다면 무슨 흉내라도 못내.”
그런데 문제는 어느 대목에 울어야 되고 어느 대목에 박수쳐야 될지 그 타이밍을 못 잡겠다는 거예요. 잘못된 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들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훌륭한 건 알아, 상식적으로.” 학교에서 다 공부했잖아요. 인류의 죄를 위해서 희생했다고. 그런 희생적인 분이 어디 계셔요. 그러니까 박수쳐주는 거예요, 그냥. 참 훌륭하다고, 참 대단한 분이라고. 인간이 못한 일을 했으니까 정말 사대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 끼어들어갈 만하다고.
자, 한 번 적어볼게요. 그 사람들이 한 이야기, “예수님은 희생했다.” 십자가에서 희생했습니다. 예수님이 희생했으니까 희생이란 말이 인간세계에서 이게 좋은 일했다는 거예요, 나쁜 일했다는 거예요? 희생은 좋은 일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착하고 훌륭한 분이다. 그래서 뭐냐? 존경의 대상이다. “예수님을 당신이 존경하는 것, 내가 방해 안 할게.” 이거잖아요.
그러나 그들이 놓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에 결과적으로 희생했다고 들은풍월을 이야기하지 말고 그 십자가 달릴 때 강도가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를 알아봐야 돼요. 강도의 죄에요. 오늘 제목은 [강도의 죄]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강도를 말하는 거예요. 구원받은 강도가 아니고 구원받지 않은 강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했느냐는 겁니다.
누가복음에 보게 되면 강도 둘이 있었잖아요. 처음에는 둘 다 예수님을 욕했어요. 욕할 때는 머리 나쁜 사람은 강도질도 못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머리아이큐 된다고 봐야 돼요. 낮 두 시인지 새벽 두 시인 분간 못하면 무슨 강도질하겠어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머리가 있다는 사람인데 같이 있는 예수님 보고 뭐라고 평했느냐, 뭐라고 자기의 의견을 제시했어요? 니나 잘하세요.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단 조건이 있어요. 나를 지금이라도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서 그 다음에 묶여있는 나를 풀어준다면 당신을 존경할 의사가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결국은 죄 있는 지옥 간 강도가 끝까지 포기 못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잘 되는 나에요. 비록 돈이 가난한지 사회가 그런지 강도 짓했지만 어쨌든 나의 원판은 악하지 않고 나는 행복하게 살아야 될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행복할 이유가 있는 존재,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인간이 그렇게 연구해도 몰랐던 악마의 속셈이에요. 악마의 속마음이에요. 제가 악마의 속마음이라 했지만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바닥에 다 담겨있는 겁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그게 바로 악마의 노래 아닙니까. 모든 것이 행복할 이유가 있는 거예요. 내가 행복할 이유가. 당신은 나에게 행복을 보장할 책임자고 나는 행복을 받을 자격이 있고. 교회가 그래서 운영되는 게 아니겠어요? 교회라는 게.
인간은 탐욕을 못 이긴다. 그 정도 상식은 다 알아요. 그 정도는 인간들 다 안다고요. 그래서 탐욕을 줄이고 탐욕을 안 들키는 방향으로 점잖은 체하잖아요. 인간이 탐욕을 이기는 방법은 더 큰 탐욕 있으면 이겨요. 문제는 작은 탐욕보다 더 골칫거리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느 정도 어리석으냐 하면 더 큰 골칫거리를 수입해서 더 작은 골칫거리를 치워버리고 덮으려고 하는 그게 기껏 인간들이 하는 수법입니다. 이게 얼마나 자기를 더 상황을 힘들게 하는지 몰라요.
예수라는 욕망을 데려와서 내가 죄 지었다는 욕망을 이걸 꺾으려고 하는데 예수라는 욕망이 지금껏 있는 욕망보다 센 욕망이에요. 뭐라고 합니까? “남들은 나를 지금 십자가에게 풀어놓지 못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정말 하나님 아들이라면 지금 나를 이 십자가 사형 직전에서 나를 풀어서 사면당해서 내가 죄인 아닌 것처럼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혜택을 준다면 아낌없이 당신의 추종자가 되어 당신을 믿겠습니까, 섬기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을 수입해서 자기의 지금 곤란한 난처한 자기 불행을 행복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로 삼겠다는 그 노림수, 그게 바로 오늘날 기독교 아닙니까? 교회가 그걸 상품화하지 않을 때 교회가 운영되겠어요? 우리 다 죽읍시다. 이래서 교회 장사되겠습니까? 사람은 다 망해서 마지막 살 희망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신화 판도라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희망만큼 있으면 사람은 버틸 수 있다는 겁니다. 희망, 그게 자식이 되든지 개가 되든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희망 하나 있으면.
참 그래서 오늘 본문을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부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됩니다. 인간에게 힘든 인생살이 살면서 유일한 희망을 주려고 부활을 주신 게 아닙니다. 그거는 사기꾼들이 부활절집회에서 하는 소리고요. 예수는 나의 희망이고 예수는 나의 부활이고, 가스펠송에 그런 노래 있지요. 다 거짓말입니다. 이게 하나의 테스트에요, 유혹이에요.
그러면 이 지옥 간 강도의 죄를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그걸 나 자신,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과 그 다음에 대제사장, 그 다음에 권력자들 실권자지요. 본디오 빌라도 권력자, 그리고 이것이 어디까지 세밀하게 침투했느냐 하면 바로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사는 강도, 사람을 죽인 살인강도, 십자가에 죽었던 강도까지 온 천지에 빈틈이 없어요. 이 세상은 이걸로 불신의 세계로 꽉 차있는 겁니다.
이걸 받아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걸 받아들여야 주의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 백성이 된 게 얼마나 형언할 수 없는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기적 중에 기적이에요. 이것으로도 모자라요. 왜? 어느 구석에도 참조할 게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만약에 구원받을 참조할 게 있을 것 같으면 우리가 쉽게 후딱 흉내 내요. 코스프레합니다. 흉내 냅니다. 구원받은 강도처럼 나도 오늘밤에...... 그럼 오늘밤에 죽여 볼까? 그건 아니고 제가 농담도 못합니까?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결심을 한다는 것, 각오를 한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전부 다 헛방입니다. 괜히 믿음이 없어서 허전해서 주님한테 어떤 질책 들을까 싶어서 미리 사전에 작업 건 거예요, 그게. 어떤 누구도 주님 앞에 있을 때 죄 지은 지옥 간 강도가 하는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지요. 강도가 이런 이야기한 것은 뭐 희망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가 살 희망 없기 때문에 욕이나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그리고 부활이 없다고 한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리는 뭐냐 하면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 더 나가서 나는 일체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되는 존재다. 주님께서 이걸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걸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너를 미워하라. 이건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이죠.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나는 나를 사랑하게 돼있어요. 악마가 악마 미워하는 것 봤어요? 없지요. 악마가 악마를 스스로 부정 못한다면 딱 그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이에요. 내가 나를 부정 못하는 것과 악마가 부정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 고개 숙일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외에 어떤 것에도 고개 숙이질 않아요. 고개 숙이는 척하지요. 북한 김정은한테 밑에 부하 똘마니들이 나이 어린데도 빌빌 기는 것은 지 목숨이 있기 때문에 그냥 씩씩거리면서 해주는 것이지 뭐 사랑합니다, 이런 건 없어요.
인간은 우리 자신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꽂히는 모든 성경말씀은 전부 다 불가능한 말씀만 주신 거예요. 인간에게 부활이 있다, 없다? 인간에게 부활할 자격도 없고 인간은 부활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부활을 생각하는 것은 지가 조작한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진정 믿는다면 지금 우린 못 죽어서 환장해야 됩니다. 그럴 일 없잖아요.
우리의 육신은 살고 싶어 하지 나도 빨리 부활을 본받아서, 그런 것은 없어요. 사도 바울은 성령 받아서 그런 고백을 하지만 사도 바울도 막상 겁나서 터키에서 전도하다 도망치고 했지요. 물론 그건 본인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제자들은 다 도망간 상태지요. 그리고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서 규정할 때에 예수님은 구라다, 거짓말이라고 이미 확정이 됐지요. 이 세상 전체가 뜻이 하나로 모아졌어요. 실재하는 실존하는 예수님은 얻을 것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고 내쳐야 마땅한 구라쟁이, 거짓말쟁이라고 이미 확정 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온 예수는 거의 백 프로 가짜지요. 이걸 누가 증언하느냐? 바로 사도 바울 되기 전 사울이란 사람이 이걸 증언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 자체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첫째가 예수님은 이미 죽어버렸고, 부활됐다는 것은 예수 믿던 그 관성의 법칙 있잖아요. 자기가 선망했던 사람이 사라지니까 심리적으로 얼마나 결핍감을 느끼겠어요. 뭐라도 채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강아지 키우는 정도론 안 되거든요.
그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예수는 살아 있다, 라는 식으로 스스로 위로하겠지, 라고 사울이란 사람이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은 절대로 노력해서 바울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점이 중요한 거예요. 사울이 바울 될 수 없다면 내가 성도 될 수 없어요. 내가 성도란 것은 나한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성령 받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하세요. 나는 내가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라는 것을 이젠 웃으면서 감사함으로 하는 것, 그게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정말 신자는 성도는 이 눈치 저 눈치를 보질 않아요. 마스크 쓰나 안 쓰나 눈치를 안 봐요. 제가 마스크 쓰는 것은 공기가 나빠서 쓰고, 쓰고 싶어서 쓰고.
이 눈치 저 눈치 볼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지키고자 하는 나는 지켜봤자 구라기 때문에 내가 지켜봤자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나를 지독하게 미련 두고 집착하면서 지키는 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헛수고됨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울은 바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바탕에는 바로 이게 깔려있어요. 지금 말하고 있는 나는 내가 예상 못한 나였다고. 그러니까 어쭙잖은 논리와 신학으로 나를 평가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사람의 종이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네가 그리스도의 종이야? 그렇다면 사람을 기쁘게 할 필요 없다. 심지어 내가 나를 기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러한 마음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어요. 대전강의에서 표현한 것 같아요. 뭐냐 하면 ‘신앙적 자신감’이라고. 신앙적 자신감은 부활을 고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already 있지요. 이미 이 세상이 어떻다 하는 것이 파악이 된 사람은 부활 속에 아까 이야기한 지옥의 불구덩이에 가기 전에 낚아 채인 사람, 주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은 일괄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요.
그것도 편안한 마음에 억지가 아니라 뭘 논리로 따져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거예요. 저 우산 색깔이 뭐예요? 검은색. 당신은 왜 검은색으로 이야기합니까? 꺼매 보이네. 검은색이잖아요. 세상은 지옥이다. 왜 지옥입니까? 지옥인데 뭐. 거기에 다른 토를 달 이유가 없어요. 뭐가 나쁜데요? 아니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지옥이기 때문에 나쁜 거예요.
당신은? 나도 그렇지. 나도 이 세상 사람이니까 몸을 갖고 있으니까 지옥이지. 허허허. 뒤에 허허허가 붙어야 돼요. 이것 안 붙으면 미쳐버립니다. 이것 안 붙으면 또 기도원에 들어가서 구원해달라고 남은 구원해달라고 요청해. 그냥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신학박사라서가 아니라 철학박사가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니고 그냥 그래요, 그냥.
밤중에 남편이 이불속에 들어가면 이 죽을 인간. 지옥 갈 인간이 이불속에 들어간 거예요. 내가 돈 벌어준 게 나쁘냐고 뭐 그러는데 돈 벌어준 것과 관계없이 그냥 그렇다는 거야. 내 보기에 그렇게 보여. 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고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고 그냥 지옥이에요. 왜? 못 빠져나왔기 때문에.
죄 지은 강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어요. “나한테 잘해주면 예수 믿어줄게요. 나 천당 보내준다는 조건 하에 믿어줄게요.” 이 지옥과 저질에서 못 벗어나요, 인간은. 나 위주에요. 벗어날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제가 지어낸 말이지만 이런 말이 있어요. 복음폐인.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까요? 복음 놈팽이.
잘났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잘난 사람이에요. 잘난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못남을 감사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뭡니까? 나 복음 알 것 다 알고 나 이제 어떤 짓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이근호 목사님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막 살아도 된다고. 내 말 인용까지 해가면서 막 살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들으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내가 못나고 내가 진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주께서 시키더라도 허드렛일 쓰레기 줍는 어떤 일시키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불만 가질 수 없어요. 왜? 이리하나 돈 버나 저리하나 망하긴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 주홍 같은 죄를 양털 같이 희게 했으니까 도대체 이걸 우리가 행위로 보답이 안 돼요. 그냥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범사에 감사하는 것 그 외에 무슨 보답이 되겠어요. 몸이 아프고, 뭐라고 보답해야 되겠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뭘 보답하지 말고 네가 어느 자리에 있든 간에 나의 증인이 된다 하는 거예요. 증인의 특징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왔던 일대기를 그대로 겪는 거예요. 또 겪으려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렇게 해줘요. 그 길이 뭐냐?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온갖 풍성한 신학과 복음적인 각양각색의 논리와 이론들, 이러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라는 교회의 한 소리를 그냥 나는 그냥 죄인이야, 나는 망해도 싸. 그것 하나 가지고 밀어붙이는 거예요.
너 그러면 망한데이. 주님은 안 망했어요, 이 땅에서? 주님은 망하려고 오셨어요. 네 생각 옹호할 사람 몇 명 있다고? 그럼 주님은 몇 명 있는데요? 제자들 다 도망갔어요. 바로 그렇게 하면서도 주께서 참새를 키우듯이 들풀을 키우듯이 지금껏 하나님께서 입을 것 주시고 먹을 것 주시고 때를 따라서 먹는 것 입는 걸로 감사하게 하시는 거예요. 살아온 인생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럼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활을 둘로 나눠요. 하나는 첫째 부활이에요. 두 번째는 둘째 부활이에요. 둘째 부활의 특징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 그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이 봤던 자태 봤지요. 그 영광스러움이 둘째 부활이에요. 첫째 부활은 뭐냐 하면 성령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둘째 부활은 어떻게 기다리느냐?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고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에게만 이게 해당이 돼요. 그냥 놀다가 둘째 부활에 새치기 들어가지 말고 백신 한 번 맞은 사람이 두 번째 맞잖아요. 화이자 백신인가 맞는 것 있잖아요. 아스트라제네카인가 이차 있지요. 일차 맞아야 이차 되지 이차부터 맞아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일차 부활, 이차 부활.
부활이 되게 되면 특징이 뭐냐 하면 이미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이미 내가 죽었어요. 부활의 특징이. 죽지 않고서는 부활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부활이란 것은 죽었는데 주님의 살아 있다 되거든요. 그러면 죽음 속에서 주님의 반복되는 십자가의 효과, 아스트라제네카의 효과인지 모르지만 십자가의 효과, 백신의 효과로서 죽었는데 살아난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마르다 마리아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어요. 오빠이야기.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죽었지요. 죽었는데 나흘 만에 살아났지요. 마르다의 오빠의 특징은 뭐냐? 그전에 죽기 전에 살았던 것 있잖아요. 그게 죽음인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래야 어느 말이 맞는 일치되느냐 하면 날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날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 말이 일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오직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하나의 물증으로 태어난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①이 세상은 묻지도 따지지 않고 그냥 지옥이야. 지옥이기 때문에 나의 생활은 무슨 생활이다? 지옥 생활에 부합되는 모든 악한 조건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허허 웃으면서 또는 여자 같으면 호호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되겠지요.
②받아들이면 감사가 나와야 되는데 왜 자꾸 불평이 나옵니까? 그거는 욕심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이 일을 피하고 싶은 거예요. 나 같이 배운 사람인데 이런 걸 하다니. 자꾸 나 같은 게 뭐 있어. 마귀 같은 것 외에는 나 같은 것 없는데. 무슨 마귀가 마귀에 적합한 삶을 보낼 수밖에 없지요. 주님은 하나님이지만 고생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이라도 고생했어요. 지가 하나님도 아닌데 왜 고생을 기피하려고 해요.
그냥 주어진 모든 것이 선물로, 인생은 하나의 선물이구나. 하나의 역할이라 생각하세요. 허장강이 나쁜 일했지만 허장강은 나쁜 일해서 돈 벌어먹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죄인 역할, 주께서 밥 먹여 빌어먹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긴 역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강도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하게 해주옵소서. 강도가 주님께 대들고 원망했던 그 심정이 여전히 우리의 바탕임을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셔서 우리가 이 땅에 어떻게 살면서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