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10528a 여호수아 22장 31절(함께 하심)-이 근호 목사
오늘부터는 광주모임에 <복음이냐 교회냐> 이 책 뒤에 부록으로 나와 있는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글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서울 강남에 있는 합동 정통 신학교에서 있었던 한국개혁주의 신학회 정기모임 논문발표에서 자기들, 신학자들만 논문 발표하지 말고 목회자 중에서 발표하도록 해서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과 목회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한번 알아보겠다고 해서 목회자로서 제가 여기에 발표한 겁니다.
다니엘 70이레 대한 해석이란 말 앞에 ‘비(非)역사적’ 해석이라 했거든요. 해석 말고 비역사적 해석이니까 결국 인간의 의식에서 나오는 해석은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의식이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함’입니다. 의식이란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곱게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자연에다가 질서를 부여하는 겁니다. 자연이라 해도 되고 환경 또는 주변 환경, 삶의 환경. 삶의 환경이나 주변 환경에다가 질서를 부여하는 것, 이것이 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하는 일이에요.
의식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죠. 살았다/ 죽었다가 뭡니까? 의식 있는지 막 이름 불러보잖아요. 아무개 불렀을 때 자기 이름을 알면 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의식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질서를 부여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 중간에 뭐 하나 집어넣는다면 의식은 ‘나 중심으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거예요, 나 중심으로. 그러면 의식이라 하는 것은 이미 거기에 구심점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의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무턱대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나 있잖아요, 나, 나 중심으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고 하는 것은 변동이 있을까요, 변동이 없을까요? 변동이 있으면 안 되죠. 왜냐하면 중심이니까. 이 중심의 특징은 다른 말로 하면 완전, 불변 또는 무(無)모순 또는 독립성, 유일, 절대, 일관성, 항상성, 늘 그렇다는 겁니다. 중심이라는 말을 할 때는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되는 겁니다, 중심이라는 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의식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살아있다. 어떻게 살아있는가? 나 중심으로서 자연이라고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자기 삶의 환경에다가 질서, 체제, 구조, 무엇을 부여하는 식으로 의식은 작용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심이라는 말은, 내가 있는 그곳이 바로 중심이라는 말은, 내가 중심이 된다는 그 뜻이거든요. 나=중심이 되는 겁니다. 중심이라는 것은 최종성이에요, 최종성. 어떤 최종성? 의미의 최종성. 모든 의미는 최종적으로 나한테 와야 한다. 완전하다, 변하지 않는다, 모순 없다. 자기 자신이 무슨 모순이 있어요.
자기 아버지가 국회의원인데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난 뒤에, 옛날 이야기에요, 요새도 마찬가지지만, 국회의원 되려고 돈을 막 뿌렸잖아요, 그 때는 현찰로 해야죠, 현찰 막 뿌려서 국회의원 되니까 당선되고 돈이 남았어요. 돈이 남아돌았어요. 2억이 남은 거예요. 2억이 남아서 그 아들을 불러가지고 네가 지금 어디 서울 가서 빨리 2억을 소비해라. 이거 남아있으면 검찰 수사 들어오고 안 되니까. 빨리 소비해라. 그 아들은 친구 불러다가 며칠 내에 그 2억을 다 썼답니다. 옛날에. long long ago, 아주 옛날에. 아주 먼 옛날도 아니죠.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면 “세상에, 왜 그렇게 돈을 허비해서 쓰나?” 이렇게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때 뭐라고 합니까?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왜?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왜 관여 하냐? 내 돈 내가 쓰는데. 거기에 뭐 모순 있습니까? 아니 내 돈 내가 쓴다는데 거기에 누가 시비 거느냐 이 말이죠. 그게 전혀 모순되지 않죠. 왜 2억을 가난한 사람한테 못 줍니까? 가난한 사람한테 주게 되면 나중에 들통 다 나거든요. 어째든 술을 파서 먹든지 어떻게 하든지 돈 2억을 다 써야 돼요.
그게 유일한 절대, 일관성인 신을 닮은 거예요. 자기가 신처럼 이미 신이 된 겁니다. 또다시 이야기 안 해도 되겠죠? 의식이란 살아있는 것이고 질서를 부여하는데 그 의미가 있더라. 그 의미가 뭐냐? 나는 절대적이다. 나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다. 이 질서를 부여하면서 이게 제2의 현실이 되는 거죠.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또 이해되죠? 제 2의 현실.
그러니까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이것이 이 세상 현실 맞죠? 세상 나 혼자 사는 게 아니죠? 우리 집만 덜렁 있는 게 아니고 많은 아파트들이 집결되어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생각하는 의식은 뭡니까? 이 아파트가 많고 사람들이 많더라도 누구만 생각한다? 나만 생각하는 식으로 현실이 조성되고 구성됩니다. 그렇죠? 이게 바로 객관적으로 어떤 현실이 있든 간에 나한테 중요한 것은 내가 의미를 주는, 나 중심의 현실만이 나한테는 중요한 거죠. 나한테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연이라는 환경에 변동이 생기더라도 이 변동에 웃고 울고. 웃고 울 때 어떤 때 웃고 어떤 때 웁니까? 바로 현실을 보고서 ‘현실은 이렇게 되어야 돼’라고 자기 챙기는 거예요. 울고 웃으며 변동이 일어나니까 변동을 챙기는데 주력하니까 여기서 공포가 생기는 거예요. 공포, 두려움은 왜 생기느냐? 지킬 게 있어서 생기는 거예요, 지킬 게 있어서.
죽으면 그만인데. 죽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지킬 게 있는 거예요, 지킬 게. 죽더라도 내가 술 먹고 한강에 빠져 죽든지 내 마음대로 죽을 거야. 그러니까 죽더라도 끝까지 내 의식이 있다는 말은 이걸 어떻게 고쳐야 되고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요. 의식이 있다는 말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이 의식이 있다는 자체가. 의식이 고장 난 거예요. 이건 망한 거예요. 수요일에 설교한 것처럼 다른 가능성 없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당신 중심이고 늘 공포를 달고 다니는 겁니다. 내가 지킬 게 있기 때문에.
아시겠죠? 이거 지웁니다. 이 지우개는 서울에 어느 집사님께서 강의 시간에 이 지우개 참 좋다는 한마디 들으시고 시중에 문방구 가니까 없어가지고 도매상에 가서 없는 걸 미리 주문해서 택배 받아서 강의 때 나눠주라고 해서 리필 하는 거 달아서 이렇게 가져 온 겁니다. 그래서 강의할 때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 의식이라는 말이 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은 의식이 있으면 필히 내 중심이기 때문에 여기서 내 중심은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으로 나의 현실구조를, 질서를 부여하고 있거든요. 그럴 때 반드시 나 중심에서는 역사를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란 말은 아주 거창하죠? 그럼 역사는 뭐냐. ⓑ역사는 그냥 기억입니다. 기억을 한 줄로 쭉 나열하는 것이 역사에요.
나의 역사는 쉽게 말해서 나의 스토리, 나 인생 이렇게 살아왔어. 소설책 10권이라도 내가 쓸 수 있어. 뭐 <태백산맥>보다 내가 더 써낼게. 나의 역사. 나의 긴긴 꼬리. 지나온 나의 꼬리. 스크루지, 구두쇠 영감님의 과거사 이런 것도 되겠죠. 그리고 나의 기억의 단선 철로에 과거가 의식되고 현재가 의식되고 그 다음에 미래가 의식되죠. 죽으면 이런 거 다 없어질 건데 살아있으니까 자꾸 이런 것이 같이 있고, 지금은 내가 현재 위치에 있고 과거가 현재의 나를 되게 했고 현재가 나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이게 바로 나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 중심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 타자 또는 타인, 남들에게 나는 나의 절대성, 내 위주, 나의 의식이 나 중심이니까 여기서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방어 또는 변명, 핑계 또는 공격, 반항 이런 쪽으로 타인들에게 이야기하겠죠. 지적하게 되면 이런 게 나오고 호응하게 되면 감사와 고맙소, 뭐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그런데 고맙다 해도 나 중심이란 것은 변동이 없어요. 철통같이 내 중심으로 고맙고 내 중심으로 감사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 이 타인 가운데 하나님이 섞여서 들어왔을 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인간은 변명하고 핑계하고 방어하고 반발하고 반항하고 그렇게 되겠죠. 반항하는 이유가 나의 기억, 나의 역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해석은 어떤 해석이든 간에 비역사적 해석이 아니고 역사적 해석 외에는 나올 게 없어요, 역사적 해석밖에는.
<옥경이>라는 노래 가사에 보면 네가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았느냐. 희미한 등불 밑에서, 그것도 밝은 등불이 안 나오는 모양이라, 희미한 등불 밑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 가사 쓴 사람이 유명한 작가에요.
그러니까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라 하면 그 내용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모든 인간들이 현실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공격하겠죠? 심판하고 공격하는 해석이 되는 겁니다. 심판하고 공격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인간세계에 대해 언약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언약.
언약을 볼링공에 비유해봅시다. 그러면 10개의 핀이 있죠. 볼링공을 10개 핀을 향하여 세차게 돌진하듯 굴리는 이유가 뭐 볼링핀하고 뽀뽀하려고 옵니까? 얼싸안으려고 오는 거예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각자 핀들이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불변하는, 무모순적으로 완전으로 자기가 지탱하고 있죠. 이것은 제가 아까 얘기했듯이 나쁘다가 아니라 고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이것은 태어난 의식이 있으면 다 그런 거예요. 독립적이고 항상 그러해야 되고 일관성 있고 자기가 유일한데 이것을 반드시 전부다 무너뜨리는 거예요.
아주 무성한 갈대나 잡초도 불도저 지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납작하게 흙 속에 묻혀버리죠. 인간은 자기가 의식이 있으니까 독자적으로 서 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흙과 섞여야 될 아담이고 흙이다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볼링공 가지고 좌악 굴려버리면 커브를 돌아서 자기한테 안 올 거라고 보는 모든 인간한테 강한 회전력을 먹여가지고 10개 핀 전부를 다 무너뜨릴 때, 스트라이크. 그거하면 300점까지 올라요, 점수가. 완전히 전부다 스트라이크되죠. 마지막 표시는 이거였습니다. X. 점수판에 X가 딱 남는 거예요. 9개 남았다? 1개도 마찬가지고 남는 거 없어요. 그냥 X한 거예요, 모두 X.
따라서 ⓓ목회자 입장에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글을 쓴 이유는 모든 신학은 구라다. 모든 개혁 신학은 사기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 한 거예요. 진짜 허리띠 잡힐 만하죠. 모든 신학은 사기다. 좋게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은 그냥 철학이다. 헛소리다 이 말입니다. 해석도 안 되면서 해석을 해온 거예요, 그동안. 해석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데.
그러면 한국에 있는 목회자들이 어디서 배우겠습니까? 신학교에서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거짓말하고 헛소리하는 개혁주의에서 양성된, 양성소에서 만든 개혁주의자로 오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교회 와서 푸는 모든 썰은 결국 거짓말만 풀고 있는 거예요. 성경해석은 스트라이크! 모든 인간을 짓밟아버리고 무너뜨리고 심판하는 말씀인데 인간을 못 키워줘서 안달 난 식으로. 잘한다 잘한다 하는 식으로.
언약의 완성이 될 때 이것을 새 언약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있었던 볼링공이 쭉 빙글빙글 돌다가 마지막 스트라이크가 된 부분이 언약인 거예요. 기존의 이스라엘을 표본조사해서, 이스라엘이 인간이잖아요, 그 서있는 인간들을 언약이 와서 계속 무너뜨리는 겁니다. 무너뜨리다가 마지막에는 전 세계를 다 무너뜨리죠. 사도행전 17장. 내가 이방민족한테는 그냥 묵과했지만 마지막 때에 죽은 자를 살림으로써 이제는 모든 심판이 이스라엘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민족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심판할 그 날이 오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성령 받은 사도바울. 귀신도 알아주는 분. 뭐 총신교수 말고 사도바울. 귀신도 영적 세계에서 저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영을 받았다고 인정해준 ⓔ사도바울의 설교에 보면 오직 이거 하나에요. 전 세계는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심판에 돌입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라면 이 땅에서 살아있을 동안 자기의 사명과 해야 될 일은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성령과 더불어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안겨줬어요. 이 현실세계에 나가서 무엇을 증거 하라는 말이냐. 너희들은 죽었어. ‘죽었어’라는 말도 모자라요. ‘죽었어’라는 말은 지금 살아있지만 곧 죽을 거야, 이런 뜻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진짜 너희는 죽은 자야, 이미. 성경에서는 이것을 ‘이왕’이라 하는데 ⓕ‘벌써 너는 죽은 자야. 곱게 죽은 자가 아니고 저주받은 자야.’ 라는 것을 말이나 행동이나 태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성도를 그렇게 활용해주십니다.
이 사명,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어떻게 즐겁습니까? 장로님 즐거워요, 이 사명이? 사모님이 식사 차려주면 오늘 당신이 참 수고했어. 이런 맛있는 반찬 만들어줘서 고마워. 그래도 당신은 죽었어. 나한테 식사 차려 준다고 당신이 산 자가 아니야. 당신은 죽었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먼 데서 벗이 와서 이야기할 때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처럼 이게 얼마나 즐거워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즐거움 있잖아요, 답이 나와 있는 즐거움. 답을 아는 즐거움 또는 달리 이야기해서 이미 합격한 자의 즐거움. 여유 있는 자가 피울 수 있는 농땡이. 이런 거. 가진 자의 여유, 이런 거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은 더 이상 나부터 해서 이 세상 의식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우리한테 의식이 있다고 했죠. 그 의식은 역사, 시간의식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성령께서 먼저 나를 치는 방식으로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깨끗한 식당에서 깨끗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계란을 튀게 하는 방법, 옷에 계란을 묻히는 방법은 계란을 던지는 방법도 있지만 그냥 앉아 있는데 계란 놓고 망치가지고 계란을 갑자기 때려버리면 계란이 다 튀잖아요. 성령께서 소위 성도라는 우리를 계란으로 간주해서 깨는 거예요. 이놈아, 네 의식은 엉터리야. 깨다보니까 나는 깨졌는데 주변에 깨진 이 종말의, 심판의 현상들이 바깥에 다 튀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비(非)동일자에요. 분명히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죠. 다른 사람은 승진 같은 거하면 막 좋다고 웃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승진했다고 지 차에 앉아가지고 엉엉 울어요. 엉엉 운다고요. 다 이 잘못은 내 탓이요. 나의 의가 많아서 이런 겁니다. 막 운다고요. 승진된 게 그렇게 나쁜 짓입니까? 그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본인이 하잘것없는 존재인 것을 놀랍게 자각한 거죠, 놀랍게.
다시 말해서 나는 승진될 자격도 없고 그럴 위인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런데 승진 문제만이 아니고 앞으로 가면서 더 나아가야 되죠. 나는 살 자격도 없고 살 필요도 없는 존재로서 주께서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자, 이걸 한다고 광고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읽어보셨겠죠. 전에 읽어보신 분도 있지만 그 땐 벌써 세월이 몇 년도에요. 십년 됐죠. 십년 전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이걸 보면서 함축된 내용이 너무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제가 늘 이것을 하기가 주저스러워요. 왜냐하면 성도들이 너무 어려워서 아이고 나 포기할래, 나 안 할래 하고 도망칠 가능성이 있는 글들이에요. 단어 하나하나가 문장 하나하나가 억수로 함축되어 있어요. 전 이 글을 쓰는데 50일이나 걸렸어요, 50일이나. 그리고 앞에 있는 영어초록 있죠? 영어초록은 내 동생한테 돈 15만원 용돈 주고 한 거예요. 내 동생이 영어를 꽤 잘해요. 영어문장을 보게 되면 전 영어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는데 제가 보기에는 영어문장이 상당히 세련됐다고 느껴져요.
자, 그러면 이 교재 209페이지부터 나와 있는 한글초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아들으라고, 네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이라고 알려준 취지에서 줬기 때문에 당연히 말씀 들으면 우리는 그것을 해석해낼 수 있고 그다음에 해석해냈다는 말은 지킬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해석하고 지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이 말은 아직까지 인간이 그다지, 망가져도 아주 완전히 처참하게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주께서 생각하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사상이 바로 천주교 사상이에요, 천주교. 천주교가 지향하는 것이 국가종교거든요.
현재 전 세계에 국가종교가 있는 나라가 몇몇 나라 돼요. 그 중에 대표적인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이죠, 탈레반. 탈레반이 추구하는 것이 국가종교입니다. 이슬람의 코란, 자기들 말로는 꾸란이라 하는 코란의 정신으로 나라를 만드는 것, 이것이 탈레반이 하는 주장이에요. 모든 여자들은 일체 공부하면 안돼요. 여자는 남자의 종이 되어야 코란에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엘리트 여자들을 공격하죠. 배운 여자를 공격합니다.
그 비슷한 사람이 캄보디아 50만을 학살한 사람. 유학 가서 마르크스 이론 배워가지고 자국민 50만 명을 죽인 그 사람(폴 포트)의 사상은 소위 엘리트들이 문제라는 거예요. 이상적 농업 국가 건설을 위해 실제로 근육질 힘을 쓰지 않으면 전부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킬링필드>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그 영화를 보게 되면 얼마나 죽였는지 해골을 선반 위에다 채워놓는 거예요. 마치 아우슈비츠 유대인들 죽고 난 뒤에 하는 것처럼 한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학자들이 인간에 대해서 그들이 얼추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인간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어요. ⓗ근대 사고방식에 입각해서 인간이 인간을 분석할 때 이해가 안되는 게 2가지 있어요. 하나는 어떻게 인간이 명분을 갖는가? 이데올로기, 이념 때문에 사람들을 죽였잖아요. 그런데 이념이라는 것은 허구란 말이죠. 왜 허구를 믿어서 타인을 그렇게 죽이냔 말이에요.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인간이 분석할 때 인간에 대해,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모르는 이유가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맹신할 수밖에 없느냐, 인간은. 화투를 친다든지 바둑을 둔다든지 골프를 친다든지 거기에 완전히 미쳐버리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께 바둑 항상 이기는 방법을 알려 드렸죠? 안 잊어버렸죠? 이건 인공지능도 몰라요, 이기는 방법은. 상대방보다 빨리 두는 겁니다. 상대방이 만약에 1초 만에 두면 나는 0.5초 만에 두는 거예요. 실제로 0.5초 만에 두면 어떻게 두는지 압니까? 그냥 이렇게 두 손가락으로 차분히 두지를 못해요. 손에 바둑알 쥐고 줄줄 흘려요. 씨 뿌리듯이 흘려야 0.5초가 돼요. 어떨 땐 0.1초 만에 둘 수도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래야 바둑이라는 명분을 해체할 수가 있습니다. 바둑을 이기는 방법은 바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때 그게 바둑의 진수에요. 바둑의 진리입니다. 프로기사는 그걸 못해요. 자기는 바둑이 중요한 게 아니고 돈, 상금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가 중요한 거예요. 바둑은 하나의 명분이란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인간이 이해가 안되는 게 현대이론에서 인간은 누가 중요하냐 하면 본인이 중요하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죠. 의식이 있다는 것은 본인이 중심이라고. 본인이 중요한데 그 본인이 남을 죽이려 하는 이유가 뭐냐?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를 학대까지 해가면서 자기를 버려가면서 명분에 빠지는지 거기에 대해서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현대 철학의 한계입니다. 철학자들이 그 점에 대해서 무식해요. 몰라요. 그것은 영적으로 마귀 들렸다는 것 외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첫 번째는 왜 인간은 스스로 미치는가, 미쳐버리는가? 명분. 설명이 좀 필요한데 그래서 이 강의가 어려운 거예요. 설교시간에도 했듯이 현대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본력 때문이죠. 그렇죠? 모든 것은 자본이 토대가 되어 돈의 흐름에 인간은 자기 몸을 맡겨야 살 수 있어요. 돈 자체가 흐름이거든요. 돈의 교환흐름에 몸을 못 맡기면 외톨이 되면 인간은 못 살아요. 돈 되는 곳에 끼어들어야 돼요, 돈 되는 곳에. 다섯 식구 다 끼어 들 수도 있지만 한 사람 뛰어들어서 다른 사람이 먹고 살든지 어째든 돈 되는 것과 관련성을 맺어야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그 흐름에.
그런데 돈 안 되는 곳에 인간이 미쳐버리니까 이게 문제에요.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해보니까 이거에요, 딱 나온 게. 인간은 돈 때문에 사는 거예요. 누구나 오케이, 정답 맞다고 하는데, 왜 인간은 자기 무시한다고 사람을 죽여 버리냔 말이에요. 도대체 이것은 벌써 거기서 벗어나 있거든요.
왜 스스로 미쳐버리는가? ⓘ두 번째가 같은 이야기에요. 스스로 미친 걸 알면서도 왜 못 고치는가? 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왜 자기 자신을 컨트롤 못 하는가? 컨트롤 못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에요. 어떻습니까, 성경공부보다 이게 더 재미나지 않습니까? 다 이것이 성경과 관련되어 있어요, 나오겠지만. 복음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아들이 술 먹고 한강에 빠져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아버지가 됐으면 죽은 걸로 끝나야 돼요. 미련두지 말아야 돼요. 친구가 죽였다 그런 소리하면 안돼요. 자식 죽는 게 한 두 명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내 아들 의대생이라 이거에요. 의대생이 뭐라고? 그게 뭔데? 돈벌이하는 직업 중에 하나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 아는 친척 가운데서도 연대 의대 나왔다가 술 먹고 친구하고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있어요, 내 사촌이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위로했어요. 내 아들 죽은 거 가지고 네가 신경 쓰지 마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끝났어요. 어떻게 때리고 그랬는지 묻지도 않았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죽인 거다, 네가 죽인 게 아니고.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경찰청장까지 나와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이게 미친 거예요, 이게.
미얀마 군사독재 보세요. 그거 미친 사람 아닙니까? 김정은도 마찬가지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어요. 오랜만에 성경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6장 한번 봅시다. 디모데전서 6장 8절을 누가 아주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때는 아멘 나와야 돼요. 와 참......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
제가 주일 낮 설교했지만 인간으로서 손해 본 게 없어요. 왜 인간이 손해를 봅니까? 없는 게 만들어줬으면 감사해야지. 손해라는 게 어디 있어요? 손해라는 게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은.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의대를 다니든 뭐하든 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었으면 술 먹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야죠. 지가 잘못해놓고 누구 탓, 세상 탓하고 있어요. 술 먹은 것이 왜 죄냐. 담배 피우는 것이 왜 죄냐. 그리고 또 이야기해야죠. 술 안 먹는 게 왜 죄냐. 담배 안 피우는 게 왜 죄냐. 이야기를 다 해줘야 되는 거예요. ⓙ인간은 의식하는 자체가 죄가 숨 쉬고 있는 거예요, 의식한다는 자체가. 지 자식 오냐오냐해가지고 지 자식이 지금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는 관심 없고 그저 이뻐하는 것만 부모가 자식에 대한 도리인줄 알고 거기에 푹 빠졌어요. 그래서 그 부모한테 뭐가 명분입니까? 자식이 명분이에요. 왜 거기에 빠지냔 말이죠, 의미도 없는 건데.
그래서 여기 교재 209페이지 봅시다.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하는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이러한 인간들의 선입견에 반박한다면? 인간 이해력 자체가 진리를 훼방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자, 이거 중요합니다. 사실은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거예요. 지금까지 하는 건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이고.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 이해력 자체가 진리를 훼방하는 계기’ 이를 두 자로 줄인다면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좀 더 달면 ⓚ‘언약의 실제성’. 이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이 하는 일은 인간의 이해력, 해석, 인간의 의식 자체가 무엇을 방해합니까? 진리, 주님이죠, 주님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수상한 괴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그 기능이 이 땅에 주어지는 언약의 효력입니다. 언약의 효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어진 거예요.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아니고 자기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난 너희를 사랑한다 해서 언약을 주셔가지고 언약을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럼 저 믿습니다, 언약을. 이렇게 이해되잖아요. 그럼 그 언약은 누구를 안 건드립니까? 나를 안 건드리고 그냥 주어진 거죠.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선물이다.
그 선물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아는 개념으로 덥석 잡으면 안돼요. 그ⓛ은혜 개념은 어디서부터 도출되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도출되어야 돼요. 그래서 자신의 죄를 아는 게 은혜고 복이에요. 승진하고 울어야 돼요. 그 분 요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승진하고 울어야 돼요. 주어진 상황이 나로 하여금 내가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알려주시는 식으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겁니다.
갑자기 누가 25억 준다든지 그럼 엉엉 울어야 돼요. 주여 이 종이를 왜 주시는 겁니까, 그것도 현찰로? 때로는 금덩어리로 이걸 왜 주시는 겁니까, 이게 얼마나 무거운데. 주여, 제가 이걸 팔면 아파트 열 채를 사는데 그 많은 아파트 열 채를 어떻게 관리하라고 이렇게 고된 인생을 허락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울어야 되죠. 그렇게 울 사람 없죠. 그러니까 인간은 훼방하는 자 맞잖아요. 입이 막 벌어져서 난리도 아니죠, 좋아가지고. 겸손하니까, 복음을 위해 사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는구나. 이렇게 이상하게 해석하고......
자, 다시 한 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인간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생각해요, 하나님을 생각한다고요. 하나님, 절대자죠. 이것은 인간의 투영이 되는 겁니다. 나의 투영.
나는 유한(有限)하다. 유한이란 말은 뭔 뜻입니까? 나는 한계가 있잖아요. 내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무한을 전제로 하니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죠. 이 무한(無限)이 뭐냐 하면 신, 절대자죠. 절대자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나는 유한하다.
내가 이 관계를 보면서 자신을 자부하게 되고 흐뭇하게 여깁니다. 나의 겸손에 내가 매료됩니다. 아, 나 미치겠어. 왜 이렇게 겸손한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자기 겸손에 자기가 매료되는 거예요. 자기가 매혹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착한 일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는 아시겠죠? 자기 겸손에 자기가 매혹되니까 다시 그 결과는 뭡니까? ‘역시 나는 잘났다’로 오죠.
결국 나는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다. 나는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니까 여기에 뭐가 빠졌습니까? 절망이 빠졌죠. 절망을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시간에 제가 물었죠. ⓝ절망은 왜 싫은데? 왜 당신이 망하고 절망하는 게 싫으냐 이 말이에요.
티벳 불교에 보면 어떤 교리가 있느냐면 나쁜 짓한 사람은 박피형벌을 받아요. 피부를 벗겨내는 극한 고통을 주는 형벌을 받는다는 거예요, 지옥 가면. 티벳 불교 교리에 이런 게 있어요. 그럼 한번 생각해봅시다. 피부 벗겨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한테? 아프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왜 안 아파야 되지? 내가 뭔데 안 아파야 되지? 거기에 대한 답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정답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무(無)모순적이라 해요. 내가 질문하고 내가 답변하니까 모순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게 바로 모순 덩어리에요. 아무 정답이 없어요. 정답이 없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진리가 없어요. 그럼 진리가 없으면 진리는 외부에서 다가와야죠, 외부에서.
진리가 나한테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라는 사람이에요. 저는 강의할 때 사람이름 나오면 제가 싫어요. 플라톤 이름 나오면 짜증이 확 나는 게 내 이름도, 나도 지금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거기다 추가적으로 다른 사람, 플라톤이라는 아저씨까지 내가 꼭 알아야 돼? 그거 모르면 진도 안 나가는 거야? 왜 우리한테 부담을 줘? 막 이런 생각이 날 것 같아. 그런 생각이 안 나요? 나죠. 그래서 강의할 때 사람 이름 좀 이야기하지 말라고, 사람 이름. 칼빈이고 칼빈총이고 루터고 다 치우고 그냥 내용만 해. 그냥 내용만 우리한테 봉사해. 가르치려 들지 말고. 가르치는 건 내가 알아서 가르치니까.
플라톤 얘기할 때 플라톤 이거 없애버립시다, 나도 짜증나요. 지우개 좋은 거 줘가지고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그 현장에 늘 이 지우개 봉사도 같이 전달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비극’을 이야기한 거예요. 이 사람 이전에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인간 나름대로의 추구를 해온 것입니다. 인간은 의식이 있으니까. 진리가 무엇인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때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그걸 연구한 게 있어요, 플라톤이라는 사람 이전에. 그걸 정리한 사람이 이 사람, 플라톤이에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인생은 비극이다’.
이것은 시간 좀 가더라도 이어지는 것은 계속 하겠습니다. 인생은 비극이다. 어떻게 비극인가? 비극을 설명하겠습니다. 남녀가 서로 연애하는데 둘이 결혼하기로 드디어 다짐을 했어요. 지들끼리 반지 주고받고 할 것은 다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각자 부모한테 연락을 하니까 각자의 부모가 절대로 이 결혼은 해서는 안 되는 결혼이라고 한 거예요. 양쪽 부모가 다 반대한 거예요.
특히 남자 아버지가 반대하고 여자 어머니가 반대한다고 할 때 여기서 두 가지 나와요. 비극이 나오고 희극이 나와요. 우선 희극이 뭐냐 하면 부모의 반대를 완전히 잘라버리고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외국에 나가 사는 건 비극이 아니고 희극이에요. 그런데 비극은 뭐냐 하면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 어머니가 과거에 부부사이였어요. 둘이 결혼하면 남매 간에 결혼한 게 돼요. 아침 드라마에요. 막장 드라마. 사랑은 하는데 결혼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비극인 거예요.
이걸 ‘운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옛날부터 인생을 비극, 운명으로 본 거예요. 운명은 인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고 아무리 천하의 인간이라도 결국 이 대자연 앞에서는 막히는 슬픈 팔자가 인간이다. 이게 비극입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10528b 여호수아 22장 31절(함께 하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인간들이 어떤 절대적 진리를 추구했는가, 그것도 의미 있는 거예요. 그 대표자로서 그것을 총정리한 사람으로 플라톤(Plato)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사람이 중요한 건 이겁니다. 그 사람 이름은 중요하지 않지만 사상은 중요하거든요.
‘완전한 것이 불완전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불완전, 불완전한 것이 완전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완전을 신이라 보는 거예요. 신, 절대적인 것. 이것은 지상에 없는 것, 하늘에 있는 것. 천상. 인간은 그저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죄수에 불과하고 인간은 동굴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만 바라보고 산다는 거예요.
그림자는 입체가 아니죠. 표면에 얼른거리는 이미지일 뿐이죠. 그래서 현대철학에서도 인간의 세상이라는 것은 진리는 없고 이미지뿐이라는 그 말이 전부다 플라톤 이야기이고 플라톤 이전의 사람들이 모아놓은 생각이에요.
불완전이 완전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거예요. 불완전이 무슨 완전을 설명해. 그래서 ⓟ플라톤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그 속에 완전한 것이 있다. 지상은 하나의 감옥 생활이고 죽어서 영혼이 가는, 영혼들끼리 가는 세계가 바로 완전한 세계다. 그 비슷한 영화가 <신과 함께>라고 있잖아요. <신과 함께>라는 이상한 무당 영화 있죠. 그 비슷한 논리가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완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상기(想起), 기억을 되살리는 거예요. 기억을 되살리게 되면 부분적으로 들어있는 것이 완전과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완전은 아까 얘기한 것처럼 하나의 운명이죠. 운명에 인간은 갇혀있고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운명을 인간의 손으로 바꿀 수 없는 거죠. 그러니 인간은 근원적으로 비극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제자가 있어요. 또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름이 길어. 플라톤은 세 자인데 이건 일곱 자, ⓠ아리스토텔레스. 이 사람은 완전한 것이 있으니까 완전한 것을 우리가 찾으면 될 것 아닌가.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은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 희극을 15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에, 르네상스, 다시 회복한다는 뜻이에요, 옛날 인간들이 중심이었던 것을 회복하는 거예요. 그 르네상스 시대 때부터 본격화되면서 이 때를 ‘근대’라 해요.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를 근대 사회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희극이라는 것은 ‘고생이 없다’가 아니라 고생 뒤에 낙(樂)이 오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고생이 없으면 낙이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 고대 전래동화인 심청전, 춘향전 전부 다 이런 이야기 아닙니까? 마지막에는 비극이 아니고 고생은 했지만 마지막에 그 보상을 받는 거예요. 희극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비극 중심이 아니고 희극 중심으로 되는 거예요.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무소의 뿔로서. 불교 금강경에 나오는 한 구절이라 하는데, 무소의 뿔로서. 뿔이 하나밖에 없잖아요, 막 치고 들어가는 거예요. 여자나이 서른셋, 뭐 그런 것도 비슷한 소설이거든요.
근대에 있어서는 운명 앞에 무엇을 붙이느냐 하면 ‘내’ 운명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안 되거든요. 안되는데 아까 얘기했잖아요. 인간이 의식이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나’의 운명인 거예요, 나의 운명. 나의 운명이라는 말은 친구가 몇 명 있더라도 그것은 다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식으로 난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이 말입니다. 이게 근대적 사고방식이에요.
어떤 인간도 내 말 안 듣고 내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지 않고 어떤 인간도 내 말 듣지 않는다. 그럼 그 대안이 뭡니까? 개, 고양이 키우면 돼요. 말 잘 듣고 나에게 위로를 줘요. 대화상대가 된다고요, 대화상대. 이 힘든 세상에서 꾸역꾸역 그래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 우울증 안 걸리게 하는 힘은 개 키우는 거예요, 개.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게 있어요. 내가 개를 키우잖아요. 보통 내가 개를 키운다, 고양이를 키운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사정을 몰라서 그래요. 내가 개를 키우면 내가 뭐가 되느냐 하면 개가 돼요. 내가 고양이가 된다고요. 이걸 몰라. 할머니가 손자 키워보세요. 할머니 수준이 손자로 변하죠.
‘상호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호영향. 상호영향을 주는 것, 이게 바로 해석학의 중심사상이에요. 상호간에 영향을 준다. 과거에 살던 사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현재 내가 사는 삶과 두 가지의 판을 따로 두는 게 아니라 중첩해서 결합해버리면 여기서 융합이 생기고 이 융합이 바로 진리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성경은 누구 이야기입니까? 과거 이야기죠. 과거 이야기를 지금의 나의 의미로 해석해낸다. 이게 바로 신학에서 말하는 세속적 해석법이에요. 세속적 해석법인데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해석학에서 나온 거예요. 가다머라는 사람이 한 해석학에서 나온 겁니다. 융합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는 융합이 아니고 그냥 볼링공 굴려서 작살내는 거예요. 그래서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답게 되는 거예요. 언약이 언약답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백성, 성도를 늘 원천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이 원천, 원천이 무슨 자리입니까? 이게 바로 죄인이고 저주이고 심판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언약을 가지고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되돌아보니까 죄인에게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뭐 대단한 나라를 구하고 그런 것 하지 말고 그냥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돼요. 술 먹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서 죽었잖아요.
원인을 운명에 탓하지 말고. 운명은 끄떡도 없어요. 고정되어 있어요. 운명에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 탓하지 말고 모든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내가 본래의 자리를 안 찾은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구약 이스라엘 역사, 보세요 역사, 이 역사가 무엇과 만납니까? 하나님의 언약, 구체적으로 율법이죠, 율법과 만남으로써 이스라엘 역사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통해서 항상 너는 목이 곧고, 쉽게 말해서 건방지고 교만한 애굽인, 애굽사람이라는 거예요.
애굽은 하나님으로부터 열 가지 재앙을 받아야 될, 재앙 받을 대상이에요. 그러니까 진작 심판받아 마땅한 거예요.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심판받아 마땅함’이라는 이 요소가 갖추어지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내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 ‘나는 진리를 훼방하는 사람이 맞다’라는 그것을 유지시켜 주는 거예요. 누가? 성령께서. 그것 때문에 죽을 때까지 우리의 자아의식은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늘 우리는 건방떨고 교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자인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일단 한번 정리하고 나가봅시다. 문제를 하나 던질게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방법은 뭐냐? ①전에 있는 인간의 지식,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잖아요. 헬라인들이 누구입니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 전의 철학자들 말이죠.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는데 그 지식에 의하면 ‘인간 속에 완전의 조각이 들어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내 속에 완전이 있으니까 그 자체로서 함께 있는 것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철저하게 자기 긍정이죠. 이게 자기 긍정이잖아요.
그렇다면 ②하나님의 언약을 주신 이스라엘에서 함께 하는 방법은 뭐냐? 여호수아 한번 찾아봅시다. 22장 31절,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치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난관에 집어넣는 거예요, 난관에. 홍해도 마찬가지죠. 맞닥뜨리는 모든 인생사에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서는 더 이상 할 게 없게 만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어떤 인간도 본인이 할 수 없는 지경을 스스로 가는 것은 없어요. 자살할 때도 번개탄이든 뭐든 뭐 준비할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난데없이 죽거나 난데없이 인간을 죽게 만드는 경우를 인간은 거부할 수가 없어요. 내 뜻이 아닌 상태에서 내가 돌연사하는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닥쳐온다면 우리가 매일매일 사는 것이 결코 내 뜻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인간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게 낯설게 느껴져야 되는 게 아니에요?
바로 이스라엘에게서 배워야 될 것은 그 주어진 우리의 상황이 우리가 여기에 올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단체로 합의해서 ‘광야로 갑시다. 광야에서 삽시다’ 이런 아이디어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죠. 그렇다면 이 황무지인 광야 그리고 요단강 건너가고 홍해 건너간 것, 이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무엇을 통과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 ‘나의 뜻도 아니고 나의 의지도 아닙니다’를 확정짓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내 뜻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라는 것. 지식이 아니겠죠?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체험하는 거예요, 체험하는 것.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한테 50억을 준다. 주여, 이것은 분명히 내 뜻이 아닙니다. 그럼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증거죠.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증거에요. 공부, 자기 반에서 맨날 꼴찌 하는 애가 전교 1등 했다. 이건 뭐 사전에 자기 아버지가 교무부장이어서 문제를 뽑던지 아니면 이럴 수는 없다 이거에요.
‘우연을 능가하는 불가능성’이에요. 이 예가 바로 아브라함이 100세 때 어린 아들을 얻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어린 아들을 생명이라 보고 아브라함을 죽음이라 본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죽음 속에서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에게서는 있을 수 없어요. 죽어야 된다는 조건을 인간은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죽으면 나한테 생명이 나온다 한들 죽은 자가 좋아할 수 있는 기회는 박탈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유명한 화가들이 그림가격이 오르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살아있을 때는 안 올라요. 죽고 난 뒤에 그림 하나에 500억, 600억 한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 자손들과 일가친척들만 좋아하지, 본인은 전혀 그 기쁨이 없죠. 그래서 섭섭합니까, 그게?
주님께서 우리 죽음을 활용하는 일관성이 있다는 그 점을 우리는 감사히 여겨야 되죠. 쓰레기잖아요. 마르다 여동생 마리아가 그 귀한 향수를 아낌없이 주님 발 앞에 모두 던져버립니다. 그냥 조금 덜어서 묻혀 줄게, 이런 게 아니고 그냥 집어 던져버려요. 박살내버리죠. 향수병이 깨진다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것이 깨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은 자기 장례식을 준비한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장례식을 누구의 장례식으로 미리 보여줬습니까? 마리아의 자아, 자기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보여준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시신이 들어있는 하나의 관이라고 볼 수 있죠.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은 바로 불가능성으로 몰아 부침. 가능성 다음에 플러스하게 되면 뭐 좋은 게 있을 것이라는 나의 노림수마저도 꺾어버려요. 나의 노림수조차도 예상 못하는, 나타나지 않는 지경으로 몰아세웁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구미에서 김천까지 기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산 뿌리로 막 질주하는 거예요. 기차가 미친 것 같아. 아무리 봐도 산 정중앙으로 돌진하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휴- 알죠. 아는데 모른다 치면 그저 박살나는 거죠. 터널을 통과하는 겁니다.
기차는 터널을 통과하지만 성도 안에 터널이 마중을 나왔다고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성도가 버티고 있는데 주님이 만든 터널이, 내가 달려가는 게 아니고 터널이 와서 나의 중앙지점에다가 그 구멍을 뚫어버린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뻥 뚫린 공백, 빈 자리가 생기는 겁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하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의 운명은 둘 다 자리로 결정하는 것이고 이 자리는 일방적으로 언약에 의해 결정 난 자리가 천국 가는 자리, 지옥 가는 자리에요. 제가 아까 인간의 모순점 이야기했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챙기면서 살기 마련인데 이게 완전히 미쳐버릴 경우에는 명분이나 이데올로기, 이념에 미쳐버리면 정신도 없이 사람 막 죽여 버리잖아요. 그건 본인도 어떻게 못해요. 왜냐하면 본인의 자리가 저주받을 자리로 형성된 겁니다. 개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천국, 주님 하나로 기뻐하는 것은 본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훌륭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자리가 문제지, 자아는 그 자리에서 결과로 나온 것이 자아죠.
그래서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죄 많은 자기 백성들 속에다가 주님의 자기 자리를 펼치시기 위해서 인간들은 모르고 주님만 아는 그 길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해서 이끄신 겁니다. 이끌었기 때문에 나중에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지만 사사기 들어가게 되면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치게 하면서 그걸 뚫고 뚫고 뚫고 가는 거예요, 계속해서 전쟁을 통해서.
전쟁에 승리하는 방법은 어떤 힘을 비축해서가 아니라 그냥 붙이심에 붙여주심에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주께서. 알아서 와서 박살나도록. 그럴 때 이스라엘은 우리가 강했다, 믿음 좋다 하면 안 되고 우리 가운데 누가 계시기에, 우리는 적을 이길 수 없었고 우리는 적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지만 함께 계신 분이 우리한테 의도적으로 맞닥뜨리게 하신 그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 세상을 못 살도록 조치하셨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아까 계란 이야기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부터 계란으로써 깨질 때 이 계란 안에 주님이 계셨구나, 라는 사실을 (계란이) 튀는 방식으로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계획이 인간을 망치는 거죠. 거기에 비해서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또 나옵니다만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플라톤은 세상을 어떻게 봤느냐 하면 완전함이 불완전을 설명한다 했죠.
이 완전함을 플라톤은 무엇으로 봤느냐 하면 수학으로 본 겁니다. 현대 물리학과 비슷해요. 수학으로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한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의식이 있는 것은 질서를 부여하는 거죠. 그래서 플라톤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면 다면체는 4면체, 6면체, 8면체, 10면체, 12면체, 20면체, 이것밖에 없다고 이것을 증명했어요,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옛날에 수학, 과학 다 했으니까요. 어떻게 증명하느냐.
대표적인 4면체는 바닥이 삼각형이고 삼각형의 각 변에 삼각형 옆면 3개가 뿔처럼 솟아서 모아진 거겠죠. 이 4면체를 지평에다가 평면에다가 그려버리면 삼각형이 된다고요. 삼각형 안에 0을 집어넣으면 내접한다. 바깥에 0을 그리면 0을 또 외접하고. 외접했을 때 삐딱하게 4면체를 평면에다 그리고 그것에 또 외접하는 0을 그리고 이걸 덮는 평면을 또 집어넣고 또 동그라미치고 이렇게 계산해보니까 4, 6, 8, 10, 12, 20 이 이상은 없다고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수학이다. 자연은 아름답다. 코스모스(cosmos), 질서체제다. 이 질서체제가 인간 속에 있는 완전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수학이다. 물리학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 속에, 인간의 지혜 속에, 머릿속에 수학이 있으니까 수학으로 진리를 파악하자. 그런데 이게 언제 깨지느냐 하면 갈릴레오에 와서 목성의 위성이 4개 있을 때, 4개가 됨으로써 이게 안 맞는 거예요.
중세신학은 이 플라톤의 철학을 그대로 인용해서 세상은 지구 중심으로 된다고 이렇게 주장한 겁니다. 그런데 과학이 이 판을 다 깨놔 버렸어요.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 전체가 전부다 무의미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상대성 원리 때문에. 처음에 갈릴레오라는 사람이 상대성 원리를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는 전제 하에 상대성 원리를 설명했단 말이죠.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만이 정확하고 일정하며 나머지 시간과 공간은 다 무너진다는 그러한 수학의 로렌츠 변화를 동원해서 설명해버리니까 인간조차도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중요한데, 인간은 기계, 조립품이 된 겁니다. 인간이란 건 뭐냐? 질량, 속도, 변화, 부피, 이런 걸로 인간을 설명해내는 겁니다. 특히 인간의 두뇌작용은 전자기적 에너지 장, 필드로서 설명이 되는 거예요. 웃는 것, 감정, 사랑, 기쁨, 애정 모든 것이 전자기장의 변화가지고 설명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이 기계 조립품이에요. 그러니까 현대 젊은 사람들은 누구 말대로 미쳤죠. 개나 고양이 끌어안고 사는 거예요. 미친 거예요. 따져 보는 거예요. 자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따져 보는 거예요. 나는 에너지의 과다로 결정한다. 나의 가치는 에너지의 가치. 에너지의 교환수단은 화폐, 돈이에요. 화폐와 돈의 의미는 좀 다른데요, 같다고 보고 돈이 나의 에너지 출입의 결정 수단이에요. 결정체입니다. 그러면 모든 지식은 의미 없고 돈이 되느냐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 난겁니다. 결정이 나겠죠.
그러니까 인간은 스스로 기계가 되죠. Cold, Dry, Colorless. 인간성은 차갑고 메마르고 색깔이 없는 거예요. 뜨내기라 하죠. 모든 게 즉흥적 쾌감, 즉흥적입니다. 이걸 가지고 근대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근대 사고방식이에요. 술을 왜 먹는가? 내가 즐거우니까. 네가 뭔데? 내 두뇌 에너지가 활성화되니까. 그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은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이라든지 도파민이라든지. 그러니까 과학자들은 어디에 매이느냐 하면 도파민, 세로토닌. 이게 뭔데? 이것은 그냥 언어에요. 언어에 놀아나는 존재에요.
개념은 인간의 체험에서 오고 체험이 개념 되려면 여기에 기억이 있어야 돼요. 이 기억은 신경전달물질에 의해서 가능한 것. 해마, 시상 또는 시상하부, 대뇌피질. 그럼 대뇌피질은 뭐고? 언어. 해마? 언어. 이 세상은 언어의 세계에요. 인간의 존재는 언어로 둘러싸인 채 살고 있다. 따라서 진리는 뭐냐? 시(詩)로서 낭송한다, 하이데거. 이게 하이데거 주장이거든요. 아, 이름 또 나왔네. 여러분 골치 아프게.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안에 어떤 괴물이 있는데 그 괴물이 자꾸 어느 쪽으로 몰아가느냐 하면 너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인식을 자꾸 주는 거예요. 그러한 생각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인간들은. 어디서 오는지 몰라요.
지난 화요일인가 용인에 계신 어떤 분이 찾아왔어요. 보고 싶다고 찾아와가지고 지내다가 먼 길 왔는데 그냥 돌아가시는 것보다도 같이 팔공산 가자. 팔공산 케이블카 타러 갔거든요. 황사가 심했던 날이에요. 이 말은 좋았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없어요. 기계 부속품들이 없어요. 기계들이 없어요. 그것도 자기밖에 모르는 기계들이 없어요.
황사여서 올라갔는데 케이블카를 보세요. 자, 창세기 3장 15절에 누구 나옵니까? 여자의 후손 나오죠, 여자의 후손. 팔공산 동봉입니다. 케이블카 올라가는데 12000원인가 그래요, 65세 이하는 9000원. 쭉 내려오죠. 십자가까지 내려옵니다. 누가?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십자가에 내려오잖아요. 성경이야기죠. 내려오면서 여기 이 줄에 대롱대롱 뭐가 매달려 있습니까? 케이블카가, 하필 그날이 또 이탈리아 케이블카 고장 나서 사람 죽었던 그날이에요, 내려온다고요 대롱대롱. 이게 이스라엘 성경 역사로 나와 있죠, 대롱대롱.
자, 대롱대롱 이것을 케이블 선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개념이 체험을 담아야 되잖아요. 그 체험은 인간의 체험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 본인의 체험이니까 그 체험의 마지막이 죽기까지 낮아진 십자가에서 완성되죠. 높은데서 낮음까지. 그러면 이 사실을 알려면 여기 매달린 인간은 몰라요. 어떻게 아느냐? 케이블카에서 창문 열고 밖으로 튀어나가야 돼요. 나와서 보면 아, 내가 있는 이 케이블카 세계가 진리가 아니구나. 진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형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지를 못해요. 창문 열고 나가는 순간 으악~ 이게 추락이 된단 말이죠, 추락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창문 열고 나가는 사람 전부다 으악~해서 저주받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매달려 있는 사람은 뭐냐 하면 성신 받은 선지자들하고 여호수아하고 갈렙 같은 사람 또는 루터 같은 사람. 하나님의 언약적인 특별한 관계, 신약에 와서 보면 그것을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성령 받은 사람은 매달려 있다는 거예요, 이게. 케이블 줄에 매달려 있잖아요. 독자적이 아니죠?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게?
이 구조가 전부다 언약 구조이기 때문에 이게 새 언약에도 그대로 새 언약 구조를 전개합니다. 발산하거든요. 구약이라는 옛 언약에 매달려 있다면 지금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 이 선에 매달려 있는 동글동글 이 사람들이 성도요, 이게 바로 참 교회가 되는 거예요. 창문 열고 뛰어내릴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인간의 육적인 의식은 뭡니까? 의식은 이것을 보고 싶어 하죠, 의식은. 보고 싶어 하니까 주님께서 성령께서 으악~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계획과 기대는 으악~하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은 벌써 케이블카 창문 열고 지금 떨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날마다 우리의 괴물 같은 것은 이 나락으로, 바닥으로 떨어져야 마땅하죠. 매일같이 피어오르는 내 생각은 저녁때쯤 돼서 발길 차여가지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고 우리 면상을 차버리죠. 네가 뭐 이번 게임을 이기겠다고? 이게 먹는 것, 입는 것 주니까 헛된 망상을 꾸고 있구나. 먹는 것, 입는 것을 누가 줬는데 그건 기본이고 이것가지고 남하고 경쟁해서 이길 생각을 왜 하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으악~하고 떨어지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이게 바로 신학이에요. 신학이 떨어져야 돼요. 발길질로 차여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물론 논문 발표할 때 이런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려요. 일부러 애 먹이려고 한 건지 시간 달랑 20분 줘서 어떻게 이걸 20분 안에 설명을 다 해요? 차라리 마스크로 내 입을 막든지 봉하든지 해야지...... 어디 꼼수를 쓰고 있어.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사람 상대로 속 타지 마세요. 우리는 혈과 육과 상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공중권세 잡은 악마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아까 그리스의 사고방식들, 이렇게 운명에 매달리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비극이라 했죠. 이 자체가 얼마나 수상합니까? 우리가 신을 못 이기다니, 이 발상 자체가. 우리가 신을 왜 이겨야 됩니까? 그래서 그리스의 4대 비극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맞춤, 내가 만족하는 운명이 되어보려고 그렇게 노력해도 결국은 모든 것이 예언대로 된다는 거예요. 네가 엄마와 결혼할 것이라든지 너는 장인이 될 것이라든지 운명대로 되잖아요. 그 운명을 못 이긴다는 것이 비극이에요.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니체가 말해요. 니체는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말합니다, 부담 없이.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드디어 ‘모든 과학 속에는 나의 의지뿐이다’라는 것을 증명한 거예요, 나의 의지. 그래서 니체는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하지만 그 허무를 즐겨라. 이것을 긍정적 허무주의라고 하는데 내가 생존하는 에너지를 얻겠다는 의지, 오직 이것만 남는다는 거예요.
그럼 그 의지는 어디서 왔는가? 의지는 계속해서 영원히 영원히 찾아온다. 이것을 무한 영겁이라고 해요. 불교에 해탈하고 비슷한 사고방식이죠. 하여튼 미쳤어, 미쳤어 정말. 신이 못 되어가지고 환장을 한 거예요. 신이 못 되어가지고. 아니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하면 되는데 남이 나를 무시한 것 가지고 하나님께 고자질한다는 거예요. 너 원래 거지야. 거지보고 거지라 하는데 그게 왜 무시당한 겁니까? 딱 내 신체에 맞는 거죠. “너는 인간도 아니야!” “맞췄어. 딩동~ 맞췄네.”
그러니까 애굽에 있을 때에 모든 히브리인들은 죽은 자이고 재앙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에요, 성경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한 하나님의 그 계획 때문이고 우리는 그 케이블카 줄에 매달린 존재에 불과해요.
그래서 막장 드라마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옛날 한때 부부였다가 지금은 모른척하고 부부 때 낳았던 것이 너희들을 낳았다. 그런데 너희들한테 이야기 안 하다보니까 너희들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겠다고 덤볐다. 진짜 막장드라마죠. 그런데 막장 드라마 아닌 게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담과 하와가 결혼한 것 자체가 막장 아니에요? 둘 다 죄인 되었는데. 우리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여보, 우리 이혼합시다, 아니잖아요. 그들에게는 주의 말씀을 위반한 게 문제가 아니고 이미 마귀가, 악령이 들어와 버렸잖아요. 악령이 들어와 버렸으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아이디어, 어떤 인생을 계획하더라도 바로 진리를 훼방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습니다. 내가 산다는 자체가 막장 드라마에요, 막장 드라마.
그런데 거기다가 겸손을 논하고 신앙을 논하고 하는데......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에요. 신앙이 아니고 함께 있음이에요. 죽어 나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함께 있음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삭은 내 자식이다, 아니다? 내 자식이 아니고 누구의 아들로 돌려줘야 돼요. 주인이 와서 찾아가야 돼요. 그래서 아낌없이 죽이는 거예요. 죽일 때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네 손으로 죽여서 돌려받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차 올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네 개인에 속한 인간이 아니고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내 아들이라고 돌려받잖아요. 돌려받을 때 그 돌려받는 그 취지, 그 의미가 담기게 하는 존재가 성도입니다. 성령이 온 성도가 그런 거예요. 담기게 하는 방법은 바로 우리 육신 자체부터 그 원천부터 건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마귀에 속했다는 사실을. 마귀에 속한 정도가 아니고 마귀에게서 도저히 못 벗어난다는 것을 건드리면서 우리를 데려간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받은 복입니다. 언약은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본래의 자리, 우리의 원 자리, 십자가 지신 주님을 진리를 훼방하는 그 자리가 원래 우리가 있던 그 자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209페이지 봅시다. 벌써 오늘 두 시간 동안 했는데도 다섯 줄을 못 넘었잖아요. 삼 년은 간다니까. “본인들부터가 늘 신앙심을 가장해야 하고 하나님을 조작하고픈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걸 소위 개혁주의 신학자들한테 제가 묻는 거예요. 이런 생각 해봤냐, 이런 발상해봤냐 이 말이죠. “이런 문제와 결부된 말씀 해석이 되려면,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언약 자체가 우리를 깨고 공격하는 식으로의 언약이니까.
우리는 언약을 반기고 있어요. 제가 믿을게요, 믿을게요. 성급하게 믿을게요, 이렇게 한다고요. 네가 나를 믿는 게 아니고 다루어도 내가 다룰 거야. 네가 나를 다루는 게 아니고. 그냥 네 자리에 가 있어. 네가 박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너로 하여금 대략 난감하게 만들어줄게, 내가.
그러니까 미리 어떤 난관을 예상하지 마세요. 난관을 예상하게 되면 거기서 우리는 비극을 빙자한 희극이 나와요. 끝내 이기리라. 박세리 나오듯이 끝내 이기리라, 되어버린다고요. 양말 벗고. 양말 벗고 호숫가에 가서 쳐가지고 US 오픈 대회에서 우승한 것처럼요, 끝내 이기리라가 되어버린다고요. 그런 것은 우리한테 전혀 해당되는 게 없어요. 끝내 이기리라는 건 없어요.
단지 우리가 예상보다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게, 바둑에서 이긴 거예요. 내가 빨리 지고 끝내는 것이 바둑에서 이기는 방법이에요. 백만 원 골프 내기할 때 골프대회를 어쩔 수 없이 했다면 단시간에 첫 번째 홀부터 공을 본부석으로 차는 거예요, 못 찾도록. 그게 이기는 거예요. 게임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내 인생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내 인생을. 나의 계획, 미래를 무효화시키는 겁니다. 벌써 이거 열 번 째도 더해서 내가 예를 들어도 내가 식상된다. 그걸 사자성어로 뭐라고 한다고요? 영구 없다. 진짜 너무 자주해서 미안하다, 빨리 지워야 된다. 이 좋은 지우개로 지워버려야지.
죽으면요, 내가 없어요. 죽은 아들 한강에서 찾는 것은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찾는 것이지, 아들 본인은 없어요. 지는 죽었으니까.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죠, 우리 중에 죽으면 그 동안 살면서의 고민거리가 없어요. 처음부터 우리는 그러해야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해야하는.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존재로 지금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십자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죄 용서가 주어진다는 이 기쁜 소식이 웬 떡입니까? 기정떡이에요? 화순에 있는 기정떡입니까? 사평면인가요? 이런 떡이 어디 있어요. 다시 말해서 네가 죽어도 살았고 살아서 날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이런 기정떡이 시루떡이 어디 있어요. 이 말은 난 이제부터 뭐든지 하게 하시면 할 수 있다, 가 되는 거예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타인으로 인하여 속 터지지 마세요.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을 신비화시키지 마세요. 신앙은 현재 있는 이 모습 그대로에요. 이게 신앙이에요. 신비가 되면 이것 있고 또 따로 있는데 현재 이 모습이 이스라엘의 모습, 성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자기를 신앙으로 꾸미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은 굉장히 냉혹합니다. 우리가 꾸미는 그런 신비를 가차 없이, 우리를 난관에 부딪치게 해서 소용없게 만들어요. 빡시게 금식하고 뭐 기도하고 철야해가지고 주여, 믿습니다 하면 성령이 찾아와서 그딴 거 소용없게 만들어요, 그딴 거. 아무 소용없게 만들어요.
그 다음에 봅시다.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인간을 문제 삼는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주체의 만남의 장은, 하나님의 말씀 쪽에서 지금도 살아 운동하기에, 성령을 일하심에 따라 인간들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도록 친히 열어주신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들을 때 여러분들이 개혁주의 신학자, 다시 말해서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시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분노하겠어요? 그들은 박사들이거든요.
“성령의 일하심에 따라 인간들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도록 친히 열어주신다. 구약 다니엘 이 접했던 ‘70이레’에 관한 계시도 이러한 묵시의 장으로서 오늘날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역사 의식 자체를 문제 삼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다니엘 70이레에 대해서 제가 아는 한 이런 해석이 없어요. 전부다 역사적 해석이에요. 세대주의, 여호와의 증인, 흔히 말하는 이런 해석들이 전부다 역사적 해석이에요. 혹시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걸 접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70이레를 비역사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없어요.
그런데 그 70이레의 해석은 역사적 해석을 하는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 바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복인 줄 알아라 이 말이죠. 너희들 복인줄 알아라. 70이레를 역사적 해석하는 내가 왜 죄인인가, 왜 지옥 갈 인간인가를 알려줄 해석으로서 다가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그렇다면 그 이야기가 뭔가 하면 다시 봅시다, 위에서부터.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유대인들처럼, 바리새인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순수한 신앙심만 있으면 이해된다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성경을 봤단 말이죠. 그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제 말은.
그게 아니고 그렇게 한 그 자체가 오류를 유발시킨다는 식으로 해석되어야 된다는 그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소위 신앙인, 신학자라 하는 것이 아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 이야기도 했지만 그들과 사실은 똑같다. 소위 그들과 동일한 사상이다. 하나님은 위에 있고 우리가 찾아가는 식으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자는 이 사고방식은 바로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 그것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십자가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를 이용해서 내가 천당 갈 생각하지 말고 오직 주께서 하시는 일에 같이 참여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