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10423a 마가복음16장 19절(땅이 사라짐)-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6장 19절-20절 말씀입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마가복음 마지막 시간 같아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갔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땅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땅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 이유가 하늘로 올라갔을 때 땅이 땅으로 행세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전부다 앗아가 버렸거든요, 땅이 땅일 수밖에 없는 조건.
천지를 창조할 때 땅이 땅일 수밖에 없는 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시간, 하나는 공간. 시간과 공간을 누가 뺏아 갔느냐 하면 주님이 와서 쏵 뺏아 간 거죠. 쉽게 말해서 기를 확 뽑아내고 가버린 거예요.
그러면 시간과 공간, 전부다 주님이 와서 빨아갔다면 나머지는 멸망이죠. 그러니까 결국 멸망 시점을 지나면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땅이 사라진 거예요. 그런데 이 땅 위에 결속되어 있는 인간이 있죠. 그래서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인간이 없는 겁니다. 인간이 사라진 거예요.
기분 좋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 왜 고민합니까?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고민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를 없애버렸어요. 그럼 고민할 것도 없네. 고민할 건덕지가 없어요. 뭐가 있어야 고민하지, 없는데요.
마가복음 끝을 아주 장렬하게 끝내버립니다. 깔끔하게 끝내버려요. 여기 적합한 노래가 있다면 <연극이 끝난 후에>. 모든 연극은 끝났어요. 이걸 일본말로 ‘시마이(하던 일을 마물러서 끝냄)’라 해요. 인생사 다 시마이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조건, 땅의 조건을 몽땅 끌어서 일방적으로 강탈해서 하늘로 올라가버렸어요. 땅에 남겨진 것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가지고 이제는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졌던 불심판만 주어질 판입니다.
참, 주님의 일처리가 정말 산뜻하지 않습니까? 아주 깔끔하죠. 깨끗하게 끝내버립니다. 뭐 백신을 구했니 안 구했니 쓸데없이 그건 고민거리도 아니에요. 그 시마이, 끝장, 파장이죠, 파장에 20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이제는 장날에 모든 것이 끝났어요. 끝났으니까 제자들이 할 일은 뭐냐 하면 뒤치다꺼리하면 되는 거죠.
뒤치다꺼리할 때 규정적으로 나오는 의성어, 소리 말이 있어요. 워이 워이. 가, 가. 가버려. 워이 워이, 끝났어. 중국말 하는 거 아닙니다. 다 끝났어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독수리가 폭격기처럼 날아다니면서 “화로다 화로다”. 그런데 천사가 또 연거푸 “끝났다 끝났다 끝났다” 또는 “무너졌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마지막을 믿는 사람 같으면 이게 있어요. 크게 쓸게요. “여유가 있다”. 여유가 있다는 것은 서랍장에 뭐가 꽉 있는데 그게 다 비워지고 나니까 텅텅 빈 상태. 전에는 내 것이 내 것으로 꽉 차있었는데 그게 다 텅텅 비어진 상태. 여유가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다루지 않겠다는 겁니다. 요즘 파출소나 경찰서에 애 하나 잃어버리면 난리도 아니죠. 치매 걸린 노인네 하나 잃어버리면 전 동네가 산으로 작대기 들고 찾으러나가고 하는데 그럴 필요도 없는 겁니다. 여유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 어릴 때 자기 집이 너무 너무 잘 살았다는 표현을 하는데 아주 실감나게 들은 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서랍을 여는데 서랍이 잘 안 열렸다는 거예요. 서랍마다 돈이라는 종이로 꽉 차 있어가지고. 이게 얼마나 돈이 많았으면 서랍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돈이 많았다. 아주 멋진 표현방법이에요. 그 정도로 잘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세가 기울어지고 난 다음에 서랍이 가벼워졌어요. 뭐 있어야지. 돈으로 꽉꽉 찼었는데 쑥쑥 잘 빠져나와요. 그게 바로 아무것도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니까 성도의 삶이 여유가 있어요.
그래서 20절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이렇게 되어있죠. 주께서 함께 역사했다는 말이 마가복음에는 그렇게 되어있고 사도바울 편지에 보면 “성령이 함께 하사”. 사실은 사도행전도 마찬가지고 같은 뜻이에요.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성령이 함께 하사, 예수님이 힘을 주사, 예수님이 함께 하사, 성령이 힘을 주사. 이 말은 뭐냐 하면 파장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종말의 영, 마지막이 되어야 등장하는 마지막 연극 캐릭터에요. 무대의 마지막이 성령의 등장입니다. 명성황후 마지막 장면, 명성황후가 죽은 귀신이 되어서 한국의 독립을 부르짖기 위해서 일제를 공격하는 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거 있잖아요. 그처럼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 그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미 주께서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뭘 이루었어요? 땅이 사라졌어요. 땅이 사라졌는데 땅과 더불어 인간도 같이 사라졌어요. 멸망했다는 말보다 더 시원한 말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멸망했다고 하면 “그럼 난 멸망 안 하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하고 여전히 자아가 꼬장을 부리잖아요. 꼬장이라는 말 아시죠? 자아가 꼬장을 부린다고요. 이 멸망을 앞두고 난 어떻게 처신을 하면, 멸망 스케줄을 어떻게 미리 입수하게 되면 나는 살 수 있을까요? 베리칩을 받지 말까요? 천년 왕국이 어떻게...? 계산이 복잡한데. 그건 꼬장 부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라져버렸는데 뭐, 사라졌는데 꼬장 부릴 것도 없죠.
여러분 마음의 서랍을 열어보세요, 뭐 있는가. 모든 것은 이미 주님께 다 기 빨려서 강탈당한 입장에서 아무것도 남겨둘 수 있는 게 전혀 없습니다. 방금 이 이야기한 것, 어째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간 것이 이런 결론으로 귀결되는지, 그 근거가 뭐냐.
그것은 이 그림(첨부파일 참고) 하나로 다 해결됩니다. 주님이 이렇게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잖아요. 이것은 수직적입니다. vertical 수직적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죠.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면 이 지상은 vertical의 반대말, horizontal 수평적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여기(수평적)에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도모하려고 아주 악바리 쓰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영어 과외 받아가면서 몸부림쳐가면서 애 공부하라고 닦달내고 배울 만큼 배워놓고 집에서 노냐고 잔소리해대면서 아주 닦달 내죠.
그런데 여기서 수직적, 수평적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면
실체
A
B
C
D
E
e d c b a 그림자
이 (수직적)사건 A, B, C, D, E,...과 (수평적)사건 a, b, c, d, e,...이 전부다 1:1 대응이 됩니다. 그러니까 땅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알 수 없는 vertical, 수직이 있었는데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 그 때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a, b, c, d, e,...일들은 장차 오실 수직을 일대일 대응하는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수직은, 예수님의 올라가심은 실체가 되는 거예요, 실체가.
그러면 이 수직에 있는 사건들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될 때 이 a, b, c, d, e가 뭐냐 하면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었던 겁니다. 존재가 아니고 사건. 존재를 쉬운 말로 하면 이것은 바로 ‘있음’이죠. 그리고 사건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니까 반대말이죠. 존재의 반대말은 무(無)존재, 비(非)존재, 없음이 아니고 존재의 반대말이 event, 사건이에요. 해프닝이에요.
이 땅은 하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순간순간이 사건이었던 겁니다. 자녀가 있고, 우리가 있고. 사건이죠. 이게 사건이라고요. 사건 한번 보세요. 사건 잘 생겼잖아요. 사건이라고요. “똑바로 해” 이렇게 묻는 것은 존재한테 묻는 거고 사건 같으면 “네가 보여줄 주인님은 누구시냐? 네가 너 되게 했던 배후의 주인님은 누구시지?” 이렇게 묻는 겁니다. 그럼 뭐 우리는 정답 안다고 “우리 주인님은 예수님이 주인님이죠.” 어디 들은 풍월이나 있어서 우린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그냥 사건이라 하지 않고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라고 제가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의 일대일 대응되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줄곧 우리는 존재로 이해했단 말이죠, 존재로. 존재로 이해된 거예요.
이 근처 유치원 몇 개 있습니까? 아파트 단지 근처에 서너 개있죠? 유치원 애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이렇게 물어보면 애가 뭐라고 합니까?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그냥 하나의 사건인데요.” 이렇게 답변하는 애 없어요. “우리 아버지 회사 다녀요.” 이렇게 되는 거죠. “엄마는?” “엄마는 어디 직장 다녀요.” 이렇게 이야기하지, 사건으로 이야기 안 해요, 유치원 애들이.
분명히 성경은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던,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주변에 우리한테 통보해주는 우리의 의미조작은 사건이 아니고 존재입니다. 너 커서 뭐 될래? 이런 거 있잖아요. 지금 있는 네가 5년 뒤에 뭐 될래? 존재에서 존재로 엮어 들어가죠.
마지막에 오신 예수님이 사실은 처음부터 계신 분이었어요. 그러면 이 세상은, 이 땅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사건화된 땅임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뭐가 꼬이고 일이 잘못되었는지 이 땅이 자기를 불멸의 존재로서 간주하는 것이 대세가 되고 만 겁니다.
구약에 선지자들이 살아가는 것과 그 당시 선지자 외에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세계관이 어떤 점에서 차이나겠습니까? 많은 점에서 차이나겠죠. 엘리사가 선지자해서 이 땅에 뭘 기대했습니까? 내가 선지자 노릇하는데 총회장 안 시켜주나. 이런 거 했겠어요? 엘리사가 기적을 베풀면서, 너 기적 베풀어주면 얼마 줄래? 그런 거 했겠어요? 안했죠.
그런데 가짜 선지자, 거짓 선지자를 보세요. 권력에 밀착했잖아요, 권력에. 그 당시 선지학교 출신들. 총신 몇 기 출신이야? 이런 거. 몇 회에요? 난 몇 회인데. 야, 우리 그룹이네. 이런 거. 이거 전부다 사건과 관련된 게 아니고 존재와 관련 있거든요, 나라는 존재. 눈에 보이는 땅이 있고 그 땅 위에 내가 있다 이 말이죠.
눈에 보이는 땅이 있죠. 거기 땅이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 우리가 회의가 되고 내가 잘못된 생각이야. 뭔가 미친 생각이야. 그런 생각을 합니까? 안하잖아요. 주일에 예를 든 것을 다시 해볼게요. 정동길 언덕에 조그만 예배당 있다. <광화문 연가> 이문세 노래에. 그 가사를 보세요. 조그만 예배당이 있잖아요. 있음, 존재라고요. 오랜만에 가보니까 광화문 그 길을 연인들이 걷고 있는 그 모습이 옛날에 자기가 걷던 모습이 떠올라 그리웠단 거잖아요. 그러니까 뭐가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미친 짓입니까, 이상한 겁니까? 이걸 시비 건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지. 그렇잖아요.
그 정동길에 눈 덮인 조그만 예배당 찾아서 기도하려고 이거 했어요? 아니죠. 예배당 바깥 외향만 옛 추억이 생각나서 보러 갔잖아요. 그러니까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중요시여기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 마가복음 16장 19절이 결정적 중요한 사태로 평소에 자기 인생 속에 박혀있지 않은 겁니다.
뭐 올라갔겠지. 도사니까 못하는 거 뭐 있겠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니까 재주부리겠지 뭐. 내 몸무게 가지고는 구름에서 빠지지 싶은데. 이런 생각하고, 주님은 가벼웠나? 어떻게 구름을 타나? 이런 생각하지 자기는 꿈쩍도 안하잖아요, 꿈쩍도. 이 단단한 존재는 꿈쩍도 안하죠. 주님한테 기 다 빨렸다는 건 생각 안하고 있는 거예요. 갈려면 가든지 말든지 나는 여기 살련다. 이거잖아요. 주님이 올라가든지 내려오든지 난 모르겠고 난 여기서 임영웅 노래나 들으면서 그냥 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규정해야 될 것은, 누가? Why? 왜? 우리로 하여금 사건인 것을, 자꾸 존재라고 강변하고 그게 옳다고 우기는 짓을 누가 했는가. 그것을 살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멀쩡하고 아무 일 없고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사건 있었어? 멀쩡한 것은 해와 달, 별, 육지, 이거 멀쩡하잖아요.
미국 멀쩡하고 한국 멀쩡하고 소련 멀쩡하고 말썽인 북한도 멀쩡하고 미얀마는 약간 혼란스럽다만 베트남 멀쩡하고 다 멀쩡한데...... 눈에 보이는 것은 다들 멀쩡해요. 복음 들어도 친구 만날 사람은 친구 만나고. 복음은 복음이고 난 내 친구 만나고. 뭐 중요한, 요란스러운 일이 있었어? 없어. 그냥 고요하고 조용해. 이렇게 되죠. 언덕 밑 정동길에 조그만 예배당 가끔 찾아가면 되고. 아무 일 없는 거예요. 이렇게 존재 위주를 꼬장 부린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뱀을 한번 보세요. 창세기 3장 15절에 지상과 가장 밀접하게...... 오체투지라 합니까? 그냥 절하는 것이 아니고 온 얼굴 다 대고 기어가서 한번 절하고 3미터 가서 한번 절하고 그렇게 하듯이, 오체투지보다 더 밀접하게 땅과 밀착되어 있는 존재가 있죠. 누구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이죠.
그 뱀이 대지에서 올라오는 모든 저주스러움을 온 몸에 다 받아요. 받아가지고 그 뱀이 성경에 나오듯이 이 세상의 신이니까 온 저주스러움을 다 받아서 이 세상 오야붕, 대장이니까 그것을 이 세상 땅에다 전부 확 토해버린 거예요. 다 토한 거예요. 악마의 모습, 악마의 기를 다 토한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산이 있는데 갑자기 마그마가 약한 층을 뚫고 터져 나왔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마그마가 완전히 산 전체를 발라버리겠죠. 마그마가 지표면에서 식은 걸 화성암이라 해요. 완전히 다 발라버리죠. 악마의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발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땅’이라 하고 ‘대지’라 하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아담과 하와가 이 위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악마의 세력권에서 못 벗어나는 인간들의 knowledge, 지식, 안다는 개념은 전부다 어디서 제공받고 공급받은 거예요? 악마로부터 공급받은 사고방식이죠, 안다는 게, 지식이라는 게. 인간은 지식으로 살고 지식을 축적해서 사는데 그 지식의 원천제공자가 누구냐 이 말입니다. 온몸으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대지의 저주를 다 받아야 될 운명의 소지자가 인간에게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지식을 계속해서 주입시키고 개입시킨 거예요, 여기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것은 존재의 불멸성이죠. 이것은 영혼의 불멸성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내 존재의 불멸성. 영원하고 싶다. 죽어도 또 살고 싶다 그런 거예요. 영원히 불멸의 존재가 되고 싶은 겁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뱀 따로 인간 따로가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 이미 가인이 자기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죄가 가인을 덮친다는 말은 이처럼 악마가 토해놓은 그 토사물 위에 인간이 거기다가 칩을 꽂아서 뿌리를 박고 거기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아는 것이 뭐냐. 인간의 존재의식입니다. 인간의 존재의식.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의식이라 하는 것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내가 생각해도 골치 아프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exist. ex, 바깥에 + ist, 있다. 영어로 ‘존재’란 뜻이 이런 뜻이거든요. 바깥에 있는 거예요, 바깥에. ‘바깥에 있다’는 말은 ‘나를 나로 지켜주는 것’, 이게 바로 존재입니다. 바깥에서 나를 지켜주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이, 자기 자신이 분열되어 있어요. 주체의 분열이라고 하는데 자아라는 나가 하나가 아니고 계속 내부적으로 갈라져 있어요. 왜냐하면 악마로부터 유입된 지식이 나로 하여금 네가 선하냐? 선한 나와 악한 나. 두 가지의 possibility, 두 가지의 가능성을 자꾸 우리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너 착하게 살래, 나쁘게 살래’가 외부에서 자꾸 주어지니까 내가 바깥에서 관리해야 되는 거예요. 안에 들어있는 것이 착한 나냐, 악한 나냐 이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하죠. 자기가 하나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을 원하는 나와 또 뜻을 원하지만 나 내부에는 나보다 더 센 어떤 괴물이 있는 거예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깥 나는 뭐라고 합니까? 오호라 곤고하다. 곤고하다고 고상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나는 조졌다. 이 말입니다. 나는 이제는 난감하네.
그러니까 나의 나다움을 제시할 때 바깥 나가 마음에 들지를 않는 거예요. 아무리 그럴싸하게 괜찮은 나이고 싶어도 실제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추잡스러운 겁니다. 지저분한 거죠. 이것은 사도바울 아니더라도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알고부터 뭔가 지식이 들어오고부터 자기 모습을 어떻게 봤습니까? 본인도 알았어요. 나는 내가 봐도 수치스럽다. 만족스럽지 못한 존재.
만족스럽지 못한 존재라면 인간이 그냥 가만히 있지 않죠. 만족스럽지 않다면 결사적으로 만족스러운 지경에 이르기 위해서 투쟁을 하겠죠. 노력을 하겠죠. 그러니까 평생을 다 가도록 마음의 쉼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서랍이 안 열릴 정도로 아무리 돈이 있어도 돈이 많으면 이게 없고 이게 많으면 이게 없고. 인간의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죠. 왜 그러느냐 하면 선과 악은 서로 대립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갈라지는 속성이거든요, 선과 악이.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이 갈라진 주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어떤 수완을 발휘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듣고 있던 사람이 지금부터는 힘들어질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힘이 들든 말든 간에 난 모르겠고. 갈라진 주체, 나, 갈라진 틈이 있으니까 여기서 반드시 결핍이 발생되겠죠. 결핍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상하게 불만족스러움이에요. 만족스럽지를 못해요. 결핍이 소멸되어야 되는데 결핍이 있으니까 자기가 보기에도 자기가 수치스러운 존재이다.
이럴 때 인간을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는 악마가 또 가만히 있지를 않죠. 이 결핍의 불만족을 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인간에게 제공해줍니다. 그게 신(Oneness)이에요. 대일자(大 一 者), 신이에요. 모든 모순과 결합이 해소가 다 된 상태. 전부다 종합이 되어서 더 이상 모순이 없는 Oneness, 최후의 유일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갈라진 불만족은 유일자에게 뭘 해야 돼요? 여기서 상납을 해야겠죠. 그게 바로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드렸던 제사가 되는 겁니다. 종교의 출현이에요. 알타미라 동굴 있죠? 그게 바로 신에게 제사 드리는 거예요.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된 동굴이다, 학자들은 뭐 6천년이다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인류 역사가 6천년까지 그렇게 긴 적이 없어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과거 우리가 몇 년을 했는가 그런 것은 몰라야 됩니다. 그것은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누가 기 다 빨아 가져가 버렸습니까? 주님이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존재 같으면 시간과 공간이 허락되지만 사건 같으면 없어요.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에 대해 계산 자체를 하면 안돼요.
사건 事件 [사ː껀]
- 명사 물리 사차원 시공간에 있는 한 점. 특정한 위치와 시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왕이 몇 년 되었다 하는 그것은 어떤 연대기를 표시하는 게 아니고 그 사건에 대해서 주목하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의 경우에는. 이방역사도 마찬가지에요. 요즘처럼 총괄적인 시간 연대를 정한 게 아니에요. 이방민족도 마찬가지에요. 00왕은 왕이 된지 몇 년인가, 이런 식이에요. 백성들의 시간은 의미 없어요. 왕의 자리가 된 지 몇 년인가가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일반종족에서는 왕이 모든 시간과 공간을 기 빨아서 본인이 가져갔기 때문에.
제가 사극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극도 아니고 뭐 이상한, 철인왕후 그런 건 좋아하지만 진짜 사극은 안 좋아하는 이유가 그건 깡패들이에요. 왕이라 하지 말고 깡패, 더 나쁘게 말해서 놈팽이. 그 밑에 있는 부하들은 양아치. 양아치들이에요, 그냥. 할 짓 없어서. 등쳐먹는 양아치 있잖아요. 카세트 파는데 카세트 500원 주고 두 개 가져가는 그런 양아치를 뜯어먹는 나쁜 경찰들. 그런 영화 있었어요. <투캅스>인가 있어요.
창세기 4장에 가인의 7대손 라멕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그냥 신이잖아요, 신. 가인의 후예가 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후예는 비리비리해요. 없고 이 세상을 장악하는 것은 악마 편에 서야 존재의 세계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겁니다. 그것이 이 세상 신의 능력에 부합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신은 누구라 했습니까? 악마죠.
그래서 옛날의 왕들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포도원, 되게 잘 키웠거든요, 그 포도원을 아합 왕이 바꾸자고 나와요. 그 포도원 주인인 나봇이 포도원 주인이 아니었었습니다. 그걸 선지자가 알려줬죠. 당신 건드리면 당신 마누라 죽는다고 했는데 진짜 마누라 피 터져 죽었죠. 나봇은 소유권이 자기가 아니기 때문에 못 파는 거예요. 자기 것 같으면 팔죠. 바꿔치기가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합 왕은 땅의 세계에서 왕이지만 여호와는 하늘의 세계에서 왕이에요. 그러면 나봇이 포도원을 갖는 것은 자기 소유가 아니고 자기는 그 포도원을 관리할 하나의 사건, 이벤트에요. 삶 자체가 이벤트라니까요. 자기가 자기 존재를 위해서 포도원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내 존재를 대체하는 존재가 따로 있어요.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죠. 여호와 하나님의 포도원입니다. 자기는 그냥 품꾼이고.
그게 바로 율법이라는 계약서에 나와 있어요. 율법이 계약서거든요. 언약이거든요. 그 계약서에 내 것은 전무하다. 그게 계약서에요, 그게. 이스라엘 계약서는 그래야 된다고요. 언제부턴가 갑자기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고 여길 때 그 계약은 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민족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라엘을 쳐버리죠.
네가 계약서대로 안한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지? 그래서 언약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내가 이 나라를 완전히 작살내버리겠다. 계약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네가 몸소 체험해야 된다. 그래서 그 다윗의 장막, 만남의 장소가 완전히 무너지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뭐라고 항변하겠어요? 꼭 이래야만 했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야 속 시원했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또 항변하죠, 마치 악마의 대변자처럼. 우리 악마를 이렇게 지옥불에 집어넣어야 속이 시원했었습니까, 하나님이여! 그럼 하나님이 에스겔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래, 네가 지옥가야 내 속이 시원하다. 됐냐? 뭐 할 말 있어? 피조물 주제에 어디 창조주한테 따박따박 대들고. 그 못된 버릇 누구한테 배웠어? 이렇게 되죠.
그럼 악마가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우린 당신이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무슨 자로 봅니까? 아까 땅에서 주님이 철수해나갔죠? 그럼 땅에 있는 것들은 뭐가 돼요? 죽은 자니까 이미 죽은 자 되죠. 죽은 자가 되죠.
그러니까 성도는 땅에서 이미 죽은 자에요. 골로새서 3장 1절-3절에 나옵니다(“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막 지어낸 거 아니에요. 너는 땅에서 죽었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는 땅에서 죽었잖아요.
땅에서 죽은 이 성도, 이게 바로 두 자로 ‘무기’에요. 영적 전쟁의 무기입니다. 쏴라, 쏴. 자기가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쏴라, 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두두두두두 쏘았다 이 말이죠. 이미 죽은 자에게 쏜들 마귀 쪽에서 힘을 못 쓰는 거예요. 뭔가 파닥파닥 망둥이나 미꾸라지처럼 살아줘야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재미가 있을 건데 이미 죽은 자거든요.
누가 제 그림자 한번 밟아보세요, 아픈가. 밟아봐야 아프지 않죠.실체는 몸과 지체거든요. 예수님 몸 안에 들어가 버렸어요. 머리가 하는 전쟁을 지체가 하는 거예요, 같은 몸체기 때문에. 주님이 하신 전쟁을 지체가 하게 된 겁니다. 얼른 납득이 안 될 때는 이 그림 다시 하면 되죠. 여기 그림자(수평) 있잖아요. a, b, c, d, e, ... 일어난 모든 일들, 내가 여기 살았다, 뭘 했다하는 이 일들은 그냥 내가 하고 싶어 한 일들이 아니고 수직적인 A, B, C, D, E,...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올라가셨던 그 모든 사건들이 여기서 대응이 되는 겁니다. 지상에서 되풀이, 반복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당했던 수모를 같이 당해야 성도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떠나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떠나려고. 뭘 남기고 떠나느냐 하면 죽을 자도 의롭게 되어서 천국에서 살 자 될 수 있는 그런 그라운드, 근거 하나 남기고. 그게 예수님의 피인데 그게 새 언약이거든요. 내 살과 내 피, 그 새 언약을 남기고 그냥 수직으로 올라가시려고 온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그럼 일은 게임오버, 끝났어요.
그럼 이것(수평)은 뭡니까? 장날의 마지막 파장되어서 저녁 노을에 바람만 부는 거죠. 황야의 무법자. 다 끝났어요. 덤불 같은 것이 사막에서 불어서 돌아다니고 망토 걸친, 더운데 망토는 왜 입나, 망토 걸친 무법자가 마지막 장면에 멕시코 악당들 죽이고 권총 세워서 훅 불면 따다다다~ The end해가지고 아름다운 음악 깔리고 석양 노을 지고 다음 시리즈 제4편 시작되면 또 다른 동네 가서 악당 죽이고 돌아다니잖아요. 그 권총은 가만둬도 식을텐데 뭐한다고 부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넣으면 되는데 폼 나게 훅 한번 불고 망토 한번 휙 뒤로 젖혀가지고 이 바닥 완전히 마무리지었다 이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거예요. 이건 파장이에요. 왜 신을 믿고 제사함으로 상납하고 왜 이런 게 일어났느냐 하는 그 논리적 구조는 두 번째 시간으로 미루겠어요. 왜냐하면 그 논리, 마귀가 준 지혜가 너무 복잡해서. 왜 신을 믿고 왜 예수 믿어서 자기 존재를 계속 붙잡고 포기를 못하고 종교에 귀의하고 교회에 귀의하고 기독교에 귀의해서 자기 및 가족들이 천국가려고 시도하는 그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왜 여전히 자기 존재에 대해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가.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두 번째 시간에 하겠는데 여기 첫 번째 시간을 마무리 지으면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까 이야기한 성도의 특징인 여유를 가지는 거예요. 성도되기 전에, 성령오기 전에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자기 존재에 집착하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였겠죠. 집착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승천하시고 위에서 뭐가 내려왔습니까? 여기서 성령이 오죠.
성령이 성도 머리 위에 오게 되면 이 성도는 목이 꺾이고 숨을 못 쉬고 죽어버리죠. 모가지를 꺾어버려요. 어떤 방향이냐 방향은 정해진 것 아니니까. 이거 고개 안 숙이나? 이렇게 되는 거죠. 모가지를 따버리는 거예요. 성령께서 나의 모가지를 따버리는 거예요. 모가지를 따버리면 나의 어느 부분이 날라가 버립니까? 머리 부분이 날라가니까 이 지체는 껍데기에 불과한 겁니다.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멸치 머리 딸 때 그 멸치가 살아있다고 누가 생각합니까? 멸치 머리부위를 떼버리죠. 다시물 낼 때 그렇게 하잖아요. 우리는 주님의 다시물 용도에요. 다시물거리밖에 안돼요. 다시물 내기 전에 우리의 머리를 떼버린다고요.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얼굴 부위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목 없는 미녀... 목 없는 미녀라는 말이 이해가 안되는 게 목이 없으니 미녀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요. 목 위가 날라가버렸으니까.
그런 식으로 성령이 머리 부분을 차지한다는 말은 모든 우리의 사고, 안다는 것, 지식, 내가 앞으로 이렇게 행동해야겠다, 그 모든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평소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을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겠죠. 여기서 나온 것이, 요새 얼마 전부터 계속 강조하는, 바로 뭐가 문제냐 하면 예측한다는 거예요.
예측은 시간요소를 자꾸 가미한다는 거예요. 너 이렇게 지내다가 뭐할래? 뭐해서 밥 먹고 살 건데? 자꾸 예측을 요구하죠, 예측을.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동안 너 뭐 할 거야? 이렇게 되죠. 이 모가지가 꺾여버려야 돼요. 그러면 정답은 뭐냐 하면 주께서 앞으로 인도할 겁니다. 이것은 어설픈 정답이에요. 어설픈 정답이라는 말은 예측을 안 하면서 마치 주님이 오시면 나에게 예측할 거리를 준다는 식으로 꼼수를 부리는 것 같이 하면 안돼요.
전도서 11장 1절 한번 읽어보세요.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그 음식물을 던지라 하는 것은 전도서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나님이 언약백성, 성도를 어떻게 다루는가. 전도서 1장 1절에 보면 허무하죠, 전부다.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바람이고 강물이에요. 그뿐 아니고 모든 것이 크게 허무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허무하게 느껴지잖아요. 거기에 누구를 띄워 보내라? 네 자신을 실어서 사방팔방으로 너를 날려 보내라 이 말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는 네가 이 세상에 그냥 뛰어드는 거예요. 뛰어들면 세상이 나를 살릴까요, 아주 뭉개버리고 박살낼까요? 내가 만든 나라는 어설픈 뗏목을 가지고 태평양 바다에 나가게 되면 그 뗏목이 무사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겠습니까, 도중에 난파되겠습니까? 난파되겠죠. 그 깨어지게 하는 것, 주의 뜻은 이 땅의 세계에서,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나의 존재가 악마의 영향력 밑에서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걸 원해요.
그러니까 나한테 위험하다, 나는 극복 못한다, 불가능하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내가 되는 절호의 찬스가 되는 거예요. 찬스 정도가 아니고 챈스가 온 겁니다. 아, 드디어 내가 불가능한 나의 망가짐이 드디어 성사되는 멋진 순간이구나. 그럼 내 존재는 깨지니까 존재는 날라가 버리고 나는 뭐로 전환되죠? 존재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대변해주는 사건이 되죠. 그러면 하루하루 놀지 않고 사는 거예요. 5년 뒤에 주께서 사건 만들어준다고 하면 5년 동안 놀아야 돼요? 그게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논다는 게 성립 안 돼요. 하루하루 단위입니다.
그래서 첫째시간 이 그림하고 10분 쉽시다. 마그마가 땅에 덮였죠? 안에 악마의 모든 땅의 저주의 기운, 찐~한, 깊은 저주, 찐하고 깊은 저주가 퇴적되어 있어요. 이게 한 덩어리, 존재에요. 인류의 역사에요. 지구는 45억년, 우주는 137억년, 이렇게 우기는 그 진화론적 사고방식에 우리는 운명을 같이 한 같은 배에 타서 힘을 합치자고 하는 그런 과학 세계에, 한 덩어리인 이걸 끊어버립니다. 매 하루하루 기준으로 이걸 끊어버려요. 주님의 시간으로 난도해버리면 이 한 조각이 존재가 되지 않고 사건이 됩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죠.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10423b 마가복음16장 19절(땅이 사라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매일같이 주님의 이미 다 이루신 그 일, 모든 주님의 일로 인하여 예수님이 주가 되셨잖아요. 예수님만이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럼 이 지상은 뭐냐 하면 하나의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에서 이 그림(첨부파일 참고) 하나만 아시면 돼요. 수평에서는 의미생산이 안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에서만 나오는 의미가 여기에 사건으로 뿌려지는 거죠, 사건으로.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인간은 뭐냐. 사건의 흔적으로 물질이 돼요. 해와 달, 인간 모든 것을 다 비롯해서 이 땅에 물질로 된 것은 전부다 사건의 흔적입니다. 이건 과학에서는 모르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흔적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되는 겁니다.
아까 전도서 11장 1절에서 네 음식물을 물에 던지라는 것은 흘러가는 물이죠, 이렇게 할 때 네가 너를 쥐고 있지 말라는 말이죠. 그냥 던져버리라는 말이죠. 그냥 쥐고 있으면 내 존재가 강화되겠죠. ‘오늘 나는 어떤 사건이 되는 물질이면 됩니까?’ 라는 마음. ‘어떤 인간이 되면 됩니까?’ 라는 식으로 늘 지시받고 살아가는 거죠.
그러면 이 사건의 흔적이 물질이라는 그 증거를 창세기 9장 12절부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언약의 증거라 되어 있죠. 언약. 사건의 흔적이 증거로 나타난 거예요. 그 다음에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되어있죠. 여기 무지개 나오죠. 이 말은 이 세상에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무지개 그 바깥으로 인간이 나갈 수 없고 그 무지개 안에 모두 갇혀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무지개를 가지고 언약 세계, 진짜 예수님 세계와 아래 있는 예수님의 존재를 반영해주는 사건의 세계로 나누는 그 경계선이 바로 언약입니다. 노아 방주도 마찬가지예요. 방주는 물질이잖아요. 예수님의 살과 그 다음에 피죠, 피. 인간의 신체에서 나오는 물질 맞죠? 헤모글로빈, 피, 그 피가 바로 언약세계와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계를 구분해주는 겁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백날 해야 무지개가 끝이에요.
무지개가 끝이라는 이러한 인간의 생각을 잘 반영해주는 노래가 하나 있어요. 팝송인데 영어발음도 안 좋지만 짧은 거니까 합니다.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거대한 강, Moon river여. 달의 강이라는 뜻이 아니고 지역 이름이에요. 미시시피 강의 하류 지류에 Moon river라는 강이 있어요.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나 언젠가 보란 듯 널 건너가리라. Oh, dream maker, 오 꿈을 갖게 하는 너. you heart breaker 내 심장을 터지게 하는 너.
이게 뭐냐 하면 Moon river라는 강 자체를 하나의 인격화해서 너와 나, 둘로 보는 거예요. 오드리 헵번과 강, 둘 다 같은 운명이라는 뜻이에요. Wherever you're going, I'm going your way. 내가 어찌 너의 길을 나아가길 주저하리요. 네가 나의 모델이라 이 말이죠, Moon river라는 강줄기가.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세상에 나선 두 표류자. 나하고 강 너하고 둘 다 세상을 표류한다 이 말이에요. 강물은 바다로 나아가기 때문에.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두루두루 찾아 헤맬지니라.
자, 여기서 제가 이 팝송을 선택한 이유가 나옵니다.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waiting, round the bend 훗날 우리가 쫓던 무지개 끝에 이르리라. 무지개는 인간의 희망이고 꿈이에요. 꿈은 이 보이는 세상, 그게 한계선이에요. 보이고 보이고 보이고. 그것을 ‘연속체의 가설’이라 하는데 인간은 보이는 것 다음에 안 보이는 게 나오는 게 아니고 여태까지는 안 보이던 것이 일단 보이는 끝점에 가게 되면 새로운 보이는 것이 거기에 등장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희망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꿈, 무지개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연속된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들의 사고방식이에요.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끝까지, 행복이 있는 곳까지. 아까 행복은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결핍이 없는 만족스러운 그게 무슨 세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이 무지개, 이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존재의 낙을 줬다 이 말이거든요.
얼마 안 되니까 계속해서 읽어보면, My Huckleberry Friend, Moon River, and me 사무치게 그리운 벗, Moon river라는 강 그리고 나.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둘 다 신세가 무지개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모험을 즐겨야 될 두 표류자이다.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꿈을 찾아 헤맬지니라. 같은 얘기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1마일보다 더 넓은 그러한 강...
그러니까 사건의 흔적이 물질이 된다는 이 말은 인간의 모든 물질은 원래 의미가 자체적으로 의미를 생산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용납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예수님을 비추는 그림자의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거기서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빨려 들어갑니까, 마지막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처음부터 있어야 될 시간이었고 끝도 예수님께 전부다 도달이 되는 시간이었는데 사람들은 시간은 그대로이고 공간도 그대로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해도 그대로 있고 달도 그대로 있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의 결핍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가지고 이 땅에서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그게 인간의 전부죠. 아프지 말라는 뜻은 뭐냐 하면 죽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죽을 때 안 아프게 죽고 싶다는 거예요. 전부다 이게 마귀 생각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얘기했지만 그러한 마귀와 대적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를 준비했죠. 성도의 무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의 무기는 안 죽는 게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때려봐, 때려봐 이런 식으로. 이미 죽어버린 거예요. 존재가 죽어버린 거예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성도가 주님의 복음의 무기가 되려면 방법은 악마에 의해서 존재가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인간을 뭐로 만듭니까? 사건으로 만들죠.
여기에 개입된 것이 하나님의 언약, 마지막 언약, 새 언약을 집어넣음으로써 존재를 사건으로 바꾸죠. 새 언약,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죠. 십자가 죽음으로 그 사람은 존재가 아니고 주님의 지체가 되는, 주님의 팔다리가 되는, 주님의 사지가 되는 그러한 일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성도와 더불어 살아 있는 거예요. 지체를 건드린다는 것은 몸 자체를 건드린 게 되거든요. 그렇죠? 누가 내 손을 건드리면 이건 나 자신을 건드린 게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이 땅에서 싸움을 해야 됩니다. 싸움을 하는데 그럼 적을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적을 아는 방법으로 주께서 그 무기에 대해서... 이건 중요하기 때문에 누가 한번 읽어봐야 됩니다. 에베소서 2장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아, 보세요. 참 말 희한하죠. 이미 성도가 어디에 앉아있다 했습니까? 하늘에 앉아있다 했죠.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도 같은 말씀이에요.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라는 말이 정답이지만 그것을 달리 바꿉시다. 이 땅에서는 너는 죽은 자이다. 이 땅에는 너의 생명이 있다, 없다? 이 땅에는 너의 생명이 없다.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 그렇다면 참 이게 굉장히 좋게 들리는 말씀이죠. 믿습니까? 를 묻는 게 아니고 굉장히 좋게 들리고 좋은 말씀이지요. 야, 실제로 그렇다면 신나죠, 실제로 그렇다면? 실제로 그런데요. 정말 만세를 불러도 괜찮아요, 만세를 불러도.
그래서 인간이 존재라는 것,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묵직한, 너무나 우리의 목을 조르는 그러한 압박감으로 평생을 시달립니다. 미니애폴리스 경찰한테 한번 밟혀볼래요? 목 눌러서 5분 동안 숨 못 쉬게 한번 만들어볼까요? 우리가 악마로부터 눌리는 이유는 우리가 양(量)을 생각해서 그래요, 양. 질(質)이 아니고 양(量)이에요, 크기. 크기입니다. 크기를 생각해서 그래요. 내가 얼마나 클 수 있느냐, 많아질 수 있느냐 이걸 생각해서 그래요.
껍데기, 그림자의 특징은 폭이 없고 두께가 없다 했죠. 습자지 같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모든 내용은 누가 채워줍니까? 하늘에 계신 분이 채워주는 겁니다. 존재가 사는 것, 이건 악마가 가르쳐주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내 존재가 사는 것은 악마가 가르쳐주는 지혜, 지식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지시에 따라 사건화되는 것. 이게 우리 성도의 인생입니다. 주님의 지시에 따라 사건화되는 것. 무얼 할까요? 이거 하라. 무얼 할까요? 저거 하라. 지시에 따라서 사건 사건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악마가 어떤 지시를 했다는 것에 대해 서서히 감을 잡죠? 악마는 무엇과 무엇을 자꾸 시합붙이고 대결합니까? 체중 또는 크기, 양, 분량 이런 거요. 많다/ 적다, 크다/작다 이런 거요. 돈이 많다/ 적다 이것가지고 그렇게 사람을 기죽이고 업신여기고 힘들어하고. 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것이 없고 있어도 작아요. 그리고 나의 체면, 위신, 이것 때문에 자살하잖아요. 편의점에 그냥 번개탄 사러가면 그건 안 수상해요. 소주 한 병 들고 번개탄 사러오면 반드시 신고해야 돼요. 소주 한 병 들고 번개탄 사러오면 이건 수상한 겁니다. 자살할 사람 하나 살릴 수가 있어요. 술은 왜 먹는지 몰라, 하여튼.
자, 이미 우리는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하늘에 앉았죠. 하늘에 앉았으면 술 먹을 이유가,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뭐가 신세 답답하다고 한탄한다고 술을 먹어요? “주여, 빨리 안 죽이십니까?” 주께서 “아직 안 갔어? 다른 사람 다 갔는데?”, “주여, 저를 안 불러주십니까? 제 존재의 무게가 너무 무겁더이다.” “아직 안 갔어, 너? 벌써 다른 사람 다 갔어. 너 왜 밍기적거리고 남아있어? 너는 껍데기야. 사건이야, 그냥.”
참, 악마가 끈질기게 인간으로 하여금 나를 존재로 부각시킵니다. 네가 이래 살아놓고 산다고 할 수 있느냐고 계속해서 윽박질러요. 다른 존재들 한번 봐라. 너무 잘 살잖아. 너는 평생 동안 한 게 뭐가 있어? 라고 윽박을 지른다니까요, 악마가. 어떤 기준으로? 너 얼마 있어? 네 재산 얼마야? 너 사랑을 얻었어?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 거야? 조인성처럼. 얼마면 사랑 살 수 있어? 전부다 돈이고 크기고 재산이고 그런 걸로. 지금 이야기하니까 얼굴 표정들이 굉장히 밝아요. 가진 게 있어야지, 뭐.
그런 식으로 억압을 가하는데 왜 악마가 어느 논리에서 그렇게 했는가. 그걸 이제부터 여러분들 골치 아프지만 아, 저런 논리도 있구나 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지우더라도 잊지 마세요. 오늘 강의의 핵심은 이겁니다. 한쪽은 서 있고 한쪽은 누워있는 이거에요.
(∀a)(∃b)[(a∈b)→∼(b∈a)] 이게 악마의 논리 전부입니다. 고대문자, 동굴 속 상형문자 아닙니다. 현대 집합론에 나오는 집합 수학의 양화사(量化詞, Quantifier), 양을 숫자로 표현하는 거예요. A를 거꾸로 했거든요(∀). 해석할 때는 All, 모두. 그러니까 모든 a에 대하여 (∀a), ∃는 존재한다. E자를 거꾸로 쓴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if) 적어도 하나의 b가 있다면 (∃b).
모든 a에 대해서 하나의 b가 있다면. 벌써 수상하죠. a라는 존재가 따로 있고 b라는 존재가 따로 있죠.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존재가 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자체가 없어요. 그러나 존재가 없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는, 땅에서는, 악마의 세계에서는 무슨 말인지 몰라요. 주님의 얼룩덜룩한 다양한 그림자라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 안 하거든요.
이 세상에서는 항상 악마가 시키는 대로, 악마는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잖아요. 그럼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나 여기 있는데 이 땅에서 어떤 의미를 생산할 것인가. 이것이 모든 학문의 시작점입니다.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에요. 열심히 지금 초등학교에서 잘 가르치고 있죠. 이거 지금 못 배우면 나중에 너 거렁뱅이된다. 이런 압박감을 주면서.
모든 a가운데 적어도 하나의 b가 있는데 만약 a가 b에 ‘귀속’된다면. 야, 이게 참 사회라는 게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국가 이뤄지고 마르크스는 계급, 막스 베버는 계층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회를. 계급은 없고 계층은 있다고. 그 말이 그 말이에요, 뭐. 노예시대가 지나간 게 아니에요. 지금도 양(量)으로 노예시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난민들 보세요.
만약 a가 b에 귀속(∈)된다면(→), 그 다음에 ~는 아니요, b는 a에 귀속되지 않는다. [(a∈b)→∼(b∈a)] 이거에요. 이러한 집합론의 출발점이 뭡니까? 모든 a가 그다음에 ‘있’죠. 모든 게 있다. 있는데 왜 있는 세상이 고요하지 않고 이렇게 요란스럽습니까? 요란스러운 이유는 여기 뭡니까? 귀속이죠. belong이라고 하는데 속한 거예요. 완전히 노예처럼 그 안에 속한 겁니다.
자식은 아버지 집에 속했죠. 모든 존재는 단독으로 뚝뚝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고 관계가 있는데 그 관계는 ‘내가 너를 잡아먹을 것이냐, 아니면 내가 너에게 잡아먹힐 것이냐’ 하는 귀속관계에요. 인간세계는 내가 너한테 잡혔다면 그 현상은 ‘나는 너를 참을 수가 없네요’ 라고 고백해야 되고 자백해야 될 세상이에요. 힘의 세계입니다. 아무리 민주주의를 외치고 부정해도 소용없어요.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세상의 권력적으로나 태어난 자체가 만약에 평민으로 태어났다면 만약 군인집안이 아니라면 미얀마에서는 걔는 지금 곧 죽을 판이라. 군인의 세계거든요. 군인이 독재하는 나라에 지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태어난 거예요. 존재한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본의 아니게 이미 belong(귀속)이 된 거예요, belong이 된 겁니다. 누구에게 소속이 된 거예요. 난 아버지에게 소속되어 있고 엄마에게 소속이 되어 있다.
그러면 난 이제부터 사춘기야. 사춘기, 오춘기, 막 팔춘기가 되어가지고 난 이제 아빠, 엄마로부터 독립하겠어. 독립하는 존재는 없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것은 이 세상 원칙에 어긋나요. 이 공리에 어긋난다고요. 아버지에게 속하지 않으면, 귀속되지 않으면 그럼 넌 어디에 귀속되는데? 결국 따지기 마련이죠.
이런 식으로 연구를 많이 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belong, 귀속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나는 나에게 귀속된다. 이걸 발견합니다. 아까 ‘나’가 몇 개라고 했습니까? 존재한다는 것은 바깥에 나 있고 안쪽에 나 있어가지고 바깥의 나가 항상 나를 감시하는 거예요. 나는 나에게 귀속된다.
여기서 더 발전되어 나갑니다. 나는 없음에 귀속된다. 없음, 공백, 빈 자리. 나는 없음에 귀속되어 있다. 지금 여기까지 나간 거예요. 없음에 난 귀속되었다. 그러면 ‘나’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있음은 없음에 귀속되었다. 할 때 왜 그래야 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천하의 철학자도 이건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모든 물리학이고 과학이고 동원해도 몰라요.
쉽게 말해서 나는 왜 내가 없음에 시달려야 하는가. 이유를 몰라요. 그러나 성경은 나왔죠. 인간의 지혜, 인간의 무지개는 이게 끝이에요. 인간 자체가 물질이죠. 아까 배웠으니까 물질이란 것은 무엇의 흔적입니까? 사건의 흔적이죠. 예수님의 새 언약의 사건의 흔적이죠. 그러나 예수님 빼버리고 악마 빼니까 인간은 나와 나 사이에 결합되지 않는, 계속 갈라지는 분열되는 것만 남았죠. 그 분열된 것을 재료로 해서 나를 찾아가는 거예요. 내가 진정 누구인지.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연구하고 연구해보니까 나는 없음에 시달리고 있는 존재에요. 자, 없다고 하니까 제가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사라지는 거죠. 사라지는 것을 세상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죽음이죠. 나는 죽음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죽어라, 왜.
주님께서는 네가 장렬히 죽으면 구원하겠다는 게 아니라 네가 어떻게 구원되는가가 목적이 아니고 네가 누구의 사건을 위한 증인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나는 주님의 무기가 되어야 돼요. 주님이 악마와 싸우는 그 무기 있잖아요. 에베소서 6장에 보면 10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무엇에 관한 것이 아니고?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내세울 무기가 혈과 육밖에 없어요. 뭐 신학 좀 안다, 복음 안다 이거 혈과 육이거든요, 전부 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의 무기는 내가 이미 죽어버린 거예요. 그럼 내가 죽어버린 자에게는 의미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의미는 하늘에서 공급하는 거예요. 땅에서 죽은 거예요. 땅에서 죽으니까 하늘에 앉히심이 보이는 겁니다. 땅에서 내가 비리비리 되지도 않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하늘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 우리가 확인되고 인지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이 없어버리면 갑자기 내 인생은 내가 방어해야 되고 내 가치와 의미는 내가 지켜줘야 돼요. 누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여러분! 하잖아요. 누가 나를 기쁘게 해줄까요? 이 말은 내가 나를 기쁘게 하는데 실패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못해주는 거, 누가 마저 결핍을 채워줘야 된다? 여러분. 여러분이 채워줘야 돼요. 여러분, 너 중심으로 성경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위로해 달라 이 말이거든요. 왜 위로해줘야 되는데, 왜? 왜 위로해줘야 돼.
그냥 찐~하고 깊은 저주의 맛을 봤기 때문에 그야말로 찐한 꼬냑 마시고 벌써 태어날 때부터 악마에 취해서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 자기에게 불만족스럽고. 내 꼬락서니 보니까 짜증나고. 해결책 없고. 장래가 암담하고.
그러나 주님의 뜻은 뭡니까?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밤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 반짝이는 별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밤이 깊을수록. 땅만 보니까 밤에는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어요. 밤에 성도처럼 별들이 빛날 줄 몰랐어요. 중국 귀신들 아닙니다. 지금 하늘에 앉아있는 별 중에 내가 하나 이미 하늘에 도달해 있는 거거든요.
에베소서 2장 6절의 말씀을 믿으신다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중 하나가 그게 나였다 이 말이죠. 갑자기 확 승진됐죠. 그걸 어떻게 계단으로 갑니까?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확 올라가야죠. 계단 말고 엘리베이러! 지금 예수님 하시는 모든 복음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도약적이에요. 비약적이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존재에 대해 아무리 철학을 공부해도 이것은 납득이 안돼요. 정말 광기도 그런 광기가 없어요.
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아까 누구한테 belong, 귀속되죠. 누구한테 속했다는 것을 인간은 발악을 해서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include로 바꿔요. 이게 뭐냐 하면 포함되는 거예요, 포함되는 것. 포함될 때는 의도가 있어요. 어떤 의도? 전복(顚覆). 뒤집어버릴까. 이 회사 내가 와서 뒤집어버린다. 이 교회 와서 내가 뒤집어버린다. 이걸 정치적으로 이야기하면 혁명이에요. 인간은 나름대로 다 꿈이 있어요. 혁명가에요, 혁명가.
귀속(belong) 대신에 포함(include)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남자가 되었으면 세상에 나가서 뭐라도 되어야 될 게 아닌가. include에요. 포함되는 겁니다. belong(귀속)이 되면 이것은 셈의 대상이 돼요. 우리 교회 몇 명? 번호 하나, 둘, 셋, 셈이 돼요, 셈이. 우리 식구는 애가 둘, 하나, 둘. 그럼 수를 헤아린다는 말은 뭡니까? 헤아리는 자에게 귀속, 소속이 되죠. 그 범주를 못 벗어나요.
쉽게 하겠습니다. 사과가 바구니에 담길 때 사과는 그 바구니에 귀속됩니다. belong 되어요. 그런데 그 바구니가 더 큰 바구니에 담겨버리면 그 바구니는 include, 포함이 돼요. 문제는 더 큰 바구니는 셈하는 대상에서 탈락이 돼요. 셈의 대상이 안 됩니다. 셈의 대상이 안 되면 그건 허구에요, 허구. 포함이 된다는 말은 이상적인 상황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내가 거기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내가 몸부림치는 거예요.
나는 이제 세상에 나가고 싶어. 내 꿈을 펼쳐보리라. 노래방에 가서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부르겠어요. 임재범의 <비상>이라는 노래 부르면서. 이제 웅크리지 않을 거야. 펼쳐보리라. 뭐 되려 하는데? 내 꿈을 위해서. 꿈이 뭔데? 허구죠 뭐, 허구. 허상이에요. belong되는 척하면서, 잠입이죠, 잠입. 아부하는 척하면서 뒤집어버릴 참이야, 이런 거.
어제 멀리 여행을 갔다 왔어요. 여행 제목은 벌교 꼬막. 꼬막 먹으러 가서 오는 길에 조정래 <태백산맥> 기념관이 있어서 돌아봤는데. 꼬막 먹으러 거기까지 갔겠어요? 왔다갔다 하면서 차 안에서 6시간 동안 이야기하는 것이 주가 되겠죠. 어떤 분 아들이 제대를 했는데 아버지한테 상담을 한 거예요. 아버지되시는 분이 저한테 상담을 의뢰해서 제가 해드렸는데요.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나 제대하고 학교 일하는데 내 할 것에 대해서 아버지가 돈 대주겠습니까?’ 이렇게 딱 나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들을 아주 거렁뱅이로 만들라고. 작심 안 했으면 돈 주지 마세요.
그럼 돈을 안 준다는 게 어떻게 하는 거냐고. 가정을 회사로 여기시고 결재를 하라고 했어요. 앞으로 이런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아버지가 결재 다시. 빠꾸해. 쉽게 말해서 네가 나한테 돈 달라 하지 말고 너는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그럼 자식이 그런 소리 듣고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구나. 너는 지금 아버지를 완전히 봉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럼 네 인생 망쳐버려.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아버지가 이렇게 해주시면 나는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는 그것이 belong, 귀속되는 이 세상에 꿈이 아닌 현실이거든요. 자꾸 애한테 허구적인 무지개를 해줘버리면 그 애는 망치는 거예요. 구체적인 안을 제시해야 돼요. 영어학원을 다니겠습니다. 그럼 영어학원 많은데 하필 이 학원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얘기해봐라. 꼬치꼬치 이야기를 다 해야 되고, 아버지쪽에서도 자료를 준비하고 하겠죠.
이 말은 이 존재의 세계에서는 계급과 계층에서 자유로울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나는 내 원대로, 희망대로 산다는 그것처럼 무지몽매한 인간이 없어요. 그런 세상은 나를 기다린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나는 나를 보면서 하나의 인간으로 보죠. 세상은 belong이 되기 때문에 귀속이기 때문에 나를 숫자로 봐요. 이걸 견뎌내야 돼요. 이걸 감당해야 돼요. 부엌에 있는 그릇보고 그릇 하나, 둘, 하니까 갑자기 그릇이 인물이 되어가지고 반항하면서 우리를 그릇으로 보다니, 이렇게 나오면 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이런 거 필요 없지. 하고 깨버리죠. 이렇게 되면 belong이 안되잖아요. 소속이 안 되잖아요.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소속이고 귀속이고 노예지, include가 아니에요. 어디서 간첩질하고 염탐하고 있어. 세상은 염탐하는 자를 원하지 않아요. 고개 숙이고 들어가야 돼요, 세상은. 그걸 이제 규정한 겁니다. 그래서 아까 그림 다시 그리겠어요. 중요하다 했죠. vertical, 수직/ horizontal, 수평입니다.
여러분 강의 들으셨으니까 이제 아시겠죠? 수평인 이 땅에서는 뭐가 살아있다고 여깁니까? 시간과 공간이죠. 아빠, 나 외국에 나갈래. 공간이죠. 아빠, 5년만 기다려주세요. 투자한 것 10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 시간이죠. 이 시간과 공간은 나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방금 이야기해보니까 나는 무엇에 불과합니까? 한낱 숫자에 불과하죠. 나를 숫자로 불러주는 곳에 들어가는 것을 가지고 취업했다는 거예요.
그럼 취업하면 이 회사에서 통용되는 시간과 공간은 나를 위한 게 아니고 뭐를 위한 시공간입니까? 이 회사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죠. 그러면 이 회사는 어디에 또 소속되어 있습니까? 어디에 귀속되어 있어요? 대재벌의 하청업자죠. 대재벌은 어디에 소속됩니까? 국가에 소속되어 있죠. 국가는 범세계적인 정치적 변화와 질병이라든지 이런 변화, 국제 정세에 또 소속되어 있죠? 그렇잖아요. 미얀마 군인이 만약에 자기 백성 다 죽여버린다. 그러면 어느 나라에서 그 새로 세운 정권의 대사를 인정하겠습니까? 그 나라를 인정하지 않겠죠. 적당히 살려줘야 인정하지, 다 죽여버린 나라를 누가 인정하겠어요? 무역투자 다 끊어버리고 나라 망하죠.
그러니까 이 세상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귀속과 귀속의 연쇄고리사슬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모습이 참담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 참담함을 능히 억누르고 그걸 아름답게 미화할 수 있는 방안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힘을 합쳐 꿈을 이루자’. 큰 일을 위하여 작은 일은 그냥 덮어라.
너 크게 되고 싶어, 작게 되고 싶어? 먼저 묻죠. 크게 될 겁니다. 너 승진하고 싶어, 안 그러면 이렇게 있다가 나가고 싶어? 승진하고 싶어요. 그러면 너는 철저하게 이 회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네가 종속되어야 된다. 그걸 요구하는 겁니다. 더러워서 내 사업체 한다. 더러워서 사업체하게 되면 혼자 사업이 되겠어요? 판로 있고 판매, 생산, 원료 조달 다 해야 되겠죠? 국내에서 조달 안 되면 해외에서 해야 되겠죠. 이거 하려고 하면 경리사원 들여야 되겠죠. 골치 아파요. 혼자서 일하다가 여러 사람들 끼어들면 그 쪽에 암투나 경쟁이 있겠죠. 돈 좀 준다고 우리 회사 비밀 다른 회사에 다 팔아먹고 거기서 월급 20만원 더 준다고 사표내고 나가는 사람들 생기겠죠. 꼬셔서 우리 교회 교인 만들어놨는데 이상한 유튜브 하나 듣더니만 다른 데 가버리고. 그것도 십일조 내는 교인 가버리고 그럼 골치 아프겠죠.
나는 누구를 헤아리지만 그 헤아리는 나는 또 누구의 숫자가 되는 거예요, 누구의 숫자. 자, 왜 자꾸 인간을 숫자라고 하느냐. 숫자가 되어야 이것이 무한과 관련되어 있어요. 숫자가 무한하다고 할 때 이게 끊어지면 안 되겠죠? 꿈이 끊어지면 안 되겠죠, 연결되어야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ordinal(서수, 序數)이라 하죠. 첫째, 둘째, 셋째. 첫째 단계, 둘째 단계, 셋째 단계, 단계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 있는 대기업은 나를 cardinal(기수, 基數), 하나의 기수로 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기수라 하는 것은 대체 가능한 숫자에요. 너 빼고. 숫자에는 그 자리가 있으니까 굳이 너일 필요는 없는 거예요. 선생님 퇴직하세요. 지금 다른 사람들 줄 서서 대기하고 있으니까. 빼고 다른 사람 집어넣으면 되니까. 대체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어느 회사든 어느 직장이든 정말 세상이 나를 하나의 존재로 보고 숫자로 안 보려면 어느 정도 실력을 키워야 되느냐 하면 대체 불가한 자로 만들어야 돼요, 대체 불가한 자. 그 대체 불가한 것, 코로나 터져버리면서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악마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농락하고 있다는 걸 여러분 아시겠죠?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아시겠죠? 이 원인은 뭐냐. 아직도 땅이, 나를 위한 시간과 나를 위한 공간이 아직도 여전하다고 악마가 계속해서 나한테 내 존재감을 키우면서 계속 그것을 일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땅은 왜 그런가? 지금 창세기 4장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4장에 라멕과 가인의 후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가 있으면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주님이 안 보이죠. 주님이 안 보이면 인간은 자연만 보이죠. 자연이라 하는 것은 무질서+정렬, 이게 자연입니다. 자연을 무질서에다가 숫자로 원칙을 세워 정렬해버리면 인간을 위한 자연이라고 인간들은 지금껏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이 시도를 해온 거예요.
무한에다가 셈을 해버리면 이 무한조차도 나의 셈하기, 카운트에 의해서 내게 적절하게 필요한 유한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꿈은 무한이잖아요. 이 무한을 내가 카운트해버리면 나를 위한 현실이 된다는 그 희망, 희망을 악마가 우리한테 심어준 겁니다.
아까 요상한 것 있죠? A를 거꾸로 쓴 그것, 이게 뭐 장난치나 할 수 있는데 그 표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크기와 많은 양, 이 모든 것이 아주 차가운 숫자일 뿐이다. 인간은 그냥 숫자일 뿐이다. 이것을 인간 스스로가 결국은 자인한 겁니다. 숫자가 되어야 무한과 연속성을 이루고 차근차근 밟아나가면 언젠가 내가 그리던 꿈에 대해서 손이 닿는 그 선까지 터치할 수 있는 겁니다.
어린 소녀가 머리에 무슨 핀 했던가요? 공주핀을 하고 있죠. 그게 자기가 공주가 되고 싶은 거예요. 꿈. 무지개. 세상에 나가면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세상은 뭘 기다립니까? 나라는 존재의 존재감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고 어이, 몇 번. 어이, 거시기. 이거 해내. 다시 말해서 무한을 정렬해 내. 무한을 정렬하라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질(質)이 다 탈락돼요. 질이 다 탈락되고 숫자로 모든 걸 정렬하는 겁니다. 판매량 얼마, 이건 개수가 얼마. 이번에 매출 얼마. 전부다 뭡니까? 숫자죠. 숫자가 숫자를 다루는 시대에요.
그 숫자의 끝이 0과 1, 디지털입니다. 인공지능. 인간이 추구하는 꿈은 인공지능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기계를 만들지만 어느새 인간이 되고 싶은 게 바로 그 기계에요. 인공지능의 특징은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나요.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나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공지능을 만들어가지고 어디다가 그걸 장착하는 겁니까? 머릿속에 칩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게 쓰겠어요, ‘자기 언급’. 내가 나에게 창조자가 되고 내가 나에게 피조물이 되고. 이것이 악마죠. 그래서 인간은 악마의 self, 자아에요. 주께서는 이 인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여 버립니다. 죽인다면 그럼 성도는 누가 자기의 적인 것을 간파했죠. 누가 나의 적입니까? 나의 존재가 적이 된다는 사실을 알죠. 이미 주님께서 죽였을 때에 더 이상 자기 존재에 대해서 구애받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구애받을 게 없죠.
그럼 이 세상에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다루는 방법은 간단하죠. 쓰레기. 오 쓰레기, 이 쓰레기, 박 쓰레기. 자기를 쓰레기로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나의 인간 승리가 아니고 주님의 승리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기꺼이 쓰레기가 될 수 있는 사람. 이것은 나의 승리가 아니고 악마에 대한 주님의 승리죠.
악마가 여기에 대해서 달려드는 무기는 뭡니까? 너는 너다워야 돼. 위대한 너다워야 돼. 너는 대단한 존재야. 너의 가치를 잊지 말라. 이게 이제 악마가 마지막 내민 우호적인 카드입니다. 비록 네가 지금 회사 사장한테 꿇어앉아 있지만 언젠가 네가 사장이 될 수 있다. 더 큰 데로 나아가야지. 더 큰 데로 나가봤자 뭐 쓰레기더미인데.
시간과 공간은 이미 누구한테 빼앗겼습니까? 주님을 위한 시간과 주님을 위한 공간만 있지, 날 위한 시간과 날 위한 공간은 지금 이 마가복음 끝난 시점에서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유롭게 마음껏 흩어져서 전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영께서 이미 다 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늘에 안전하게 안착시켜 주시고 이 지상에서 악마와 마주치고 악마의 졸개들과 섞이게 하신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마음껏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