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4 - 새로 시작
21,03,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누구든지'와 '주의 이름' !!
오늘은 교재 8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 제목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어있는데, 그러면서 로마서 10장 13절을 본문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이 '누구든지' 라는 것은 '주의 이름'에 포함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누구든지' 라는 것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주의 이름'은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요청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인간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는 결과적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이게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제가 여기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길게 적어놓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 '누구든지'를 빼고 다 지워보자는 말이죠. 그러면 "누구든지 내가 하는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조금 전까지 여기에 적혀있던 모든 이야기가 다 날아가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하는 싶은 대로 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누구든지' 라는 것 안에 포함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지웠던 것을 다시 적어보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주의 이름이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만들게 되는데, 그러면 그때 그런 자들에게만 구원이 주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구원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구든지' 라는 것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겠다" 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결정권이 있다고, 즉 "내가 나답게 되는 권한이 있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의 이름은 그 이름대로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둘이 겹쳐지려고 하면, 주의 이름에 의해서 부르심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부르심이 되면 앞에 있는 이것들은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유지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 믿음과 행함 !!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행함'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이 행함을 포기한 것,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는 이미 자기 믿음이 있다는 겁니다. 즉 자기를 향한 믿음, 자기가 잘되기 위한 믿음이 여기 '누구든지' 라는 것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로마서에서 행함에서 믿음으로 옮길 때, 여기 로마서 4장의 경우에는, 행함이 한계를 드러내는 절차, 그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 행함의 끝은 파멸, 혹은 없음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인데 말이죠.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아내인 사라의 태가 죽어서 자식이 없는데, 그렇게 자식이 없으면 아브라함이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자식을 낳고 싶어도 아무리 자기의 행함을 동원해도 자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즉 주의 이름이 분명히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아무리 행해도 너는 자식이 없어. 여기에 동의해지?" 라는 것인데, 주의 이름이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행함의 끝, 행함의 막다름을 분명히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이가 100살이 되었으면,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행함을 가위표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는데, 그리고 난 다음에 주의 이름이 태가 끊어진 사라의 몸을 통해서 자식을 낳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행함과는 관계가 없는데, 그러한 행함이 끊어져있다는 것은 자기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주의 이름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 주의 이름 !!
오늘 강의할 내용이 좀 많기 때문에 초반부터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말이죠. 하나님의 형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나타났고, 그런데 인간이 감히 자기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인간자체의 절망과 파멸과 막다름인데, 그런 것을 인정하도록 주의 이름이 조치를 취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 이렇게 자기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지 않으면, 인간은 어느 누구라도 자기에게 미련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희망을 접지 않고 계속해서 품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 이름을 지탱하고자 하는데, 그러면 행함을 접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버티기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주의 이름은 부를 수가 없고, 그러면 구원이 없다는 말이죠.
* 구원은 주님의 일이다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구원은 주님의 일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예상하거나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예상하는 것도 역시 자기 믿음에 근거한 행함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 30살에 자식을 낳는다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기대가 되는데, 그리고 40살에도 기대가 되고, 그리고 60살이 되어도 어떻습니까? 그 나이에도 아이를 낳는 경우를 우리가 과거에는 가끔씩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경우에는 이미 완전히 태가 죽었는데, 즉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자기의 역량은 없어졌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이를 낳는다는 것, 그것은 자기 모습을 볼 때, 즉 자기 행함과 자기 믿음을 볼 때, 그렇게 아무리 자기를 믿어왔지만 자기 행함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확정적이라는 것이죠. 불가능성인데, 그래서 달리 이야기하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고맙소 !!
그런데 성도의 경우에는, 이렇게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 기쁨과 환희와 감사가 넘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고맙소!" 라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과 믿음에서는 좌절이 되고 슬픔이 되는데, 그런데 성도의 경우에는 기쁨과 환희와 감사가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존재의 가벼움'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이것은 몸무게와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ㅋㅋ). 질량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무게인데, 너무나 가볍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웬 떡입니까?" 라고, 아니 "웬 은혜입니까?"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구원은 주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해보면, 주님은 보이지 않으니 없는데, 그런데 주님의 일이 자기에게 닿게 될 때 주님은 살아계신다는 말이죠. 보통 우리 인간들의 경우에는, 자기가 있고 자기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있음이 자기가 살아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의 결과물로서 자기가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의 살아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몸이 아니라, 아프든 건강하든 그게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말이죠. 즉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는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니 주님의 것에 안에는 환희와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이 있는데, 그런 것으로 가득한 주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일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구원은 주님의 일이다" 라는 것인데, 즉 "구원은 나의 일이 아니라"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 모든 것을 '새로 시작'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어떤 것을 새로 시작합니까? 그렇게 새로 시작하는 성경에 나오는 개념들을 나열해보면, 먼저 "죄를 새로 시작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죽음을 새로 시작하고, 구원을 새로 시작하고, 천국을 새로 시작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새로 시작하고, 영생도 새로 시작하고, 의도 새로 시작한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 죽음, 의, 천국, 성전 등등, 그 모든 것을 다 새롭게 시작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새로운 개념, 새로운 관점으로 시작한다는 말이죠.
누가 그렇게 합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왜냐하면 구원은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죄와 죽음과 삶을, 그 이전에는 인간들이 판단했는데, 즉 "이것은 죽은 것이다", 혹은 "이것은 지옥에 가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을 받은 것이다" 라고, 인간들이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옥이 있으니 우리는 예수를 믿고 그것을 피해야한다" 라고 나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인데, 그것은 전혀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천국이든 지옥이든 심판이든, 그 모든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시작한다는 겁니다.
* 이삭의 등장 !!
그렇게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데,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인고 하니,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라는 말이죠. 이미 엄마인 사라의 태가 죽었는데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없는 것에서 있게 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 두 개를 합쳐서 보여주는 인물이 이삭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믿음이 좋으냐는 차원이 아니고, 도대체 그 가정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여기에 신앙도 포함시켜야 하는데, 신앙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믿음과 소망도 사랑도 새로 시작해야 하고 말이죠.
* 없음을 전제로 새롭게 !!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 안에는 도대체 어떤 요소들과 어떤 장치들이 들어있는지, 그것을 새로 보게 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새로 꾸민다는 것이죠. 죄, 죽음, 천국 등등, 그런 개념들을 새롭게 하신다는 말이죠.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도 그러한데, 그리고 이런 것들은 없음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될 때,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남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일단 이렇게 해놓고, 교재 84페이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이 된다고 하는 것이 신약인데,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애굽에서 고난을 받는 상황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까?
---------------------------------------
* 반드시 구약을 경유해야 주의 이름이 !!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했는데, 심지어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 멈추기까지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들었을 때, 땅이 갈라지고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에는 왜 싹이 나고 살구꽃이 피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왜 그렇게 복잡하냐는 것인데, 신약에서처럼 간단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면 왜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인간이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구약전체를 경유해야 한다는 겁니다. 구약전체의 그 요란스러움, 그런 우당당탕한 사건들이 얼마나 않은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것을 경유해야 비로소 주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 싹 쓸어버리시는 하나님 !!
그러면 구약에서 주의 이름,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요즘 '펜트하우스' 라는 드라마가 인기가 있는데, 여자 주인공이 아주 악독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드라마에서 되풀이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여자는 뭔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테이블을 그만 다 쓸어 엎어버린다는 겁니다.
제가 그 장면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더라는 말이죠. 창세기 6장 7절을 보면,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라고 하는데, 완전히 펜트하우스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으니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창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왜 쓸어버립니까?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면 되는데, 왜 구약에서 그렇게 성질을 내시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 시작하는 것인데,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를 때도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싹 쓸어버리는 그분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싹 쓸어버리는 것과 주의 이름을 결합시키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나를 싹 쓸어버리는 것이 곧 새로 시작하는 것이 된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설명하려고 제가 이런 이벤트를 벌렸는데, 덕분에 좀 지저분하게 되었는데 말이죠(ㅋㅋ).
그렇게 싹 쓸어버리면 그야말로 시원한데, "내가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살지?" 라고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착함, 의로움, 이런 것들은 다 싹쓸이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주의 이름으로, 무엇이 착하고, 무엇이 정의롭고, 무엇이 죄고, 무엇이 지옥이고, 무엇이 천국인지, 그것을 새로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싹 쓸어버림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주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하는 그 행위도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싹 쓸어버림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것이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보면 그야말로 복잡하고 난리라는 겁니다. 주님은 싹 쓸어버리려고 하고, 인간들은 "주님, 이것만은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안 놓나? - 안 됩니다. - 놔라. - 안 됩니다" 라고, 그렇게 해서 결국은 다 싹쓸이를 당한다는 것이죠.
* 성도는, 싹쓸이를 당하는 체험이 있어야 !!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가 약속의 땅인데, 그래서 "하나님, 이 땅만은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붙들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어 버린다는 겁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이 교회만은 안 됩니다" 라고 하니, 주님께서는 교회를 그만 폭파시켜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인생을 싹쓸이를 당하는 체험, 그것이 바로 성도의 기쁨이고 고마움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이란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인데, 즉 "구원은 나의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 고마움인지 절망적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데 말이죠(ㅋㅋ). 이것이 굉장히 고마운 일인데, 자기에 대한 존재의 가벼움, 즉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라는 겁니다.
새로 시작, 혹은 싹 쓸어버림인데, 그것이 창세기 6장 7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인간들은 싹쓸이를 당해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가는 도중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인간들은 자기가 천국에 가는 줄로 알지만,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는데, 그렇게 쓸어버릴 때는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의 과거 성경지식도 모두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시행하시는 물 심판과 불 심판의 특징은,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린다는 것에 있다는 겁니다.
* 너희는 지옥으로 가고 있어 !!
그래서 여기 교재 85페이지에 보면, "이것은 구원받는 길이 아니고 지옥에 가는 길이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것을 충분히 이야기를 하셨는데, 즉 "이스라엘아, 너희를 지킨다고 여기는 그 여호와가 오히려 너희를 멸망을 시킬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잘못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잘못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잘못인데, 하나님은 한결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오해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란 개념도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 메시야도, 율법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노아의 물 심판도 싹 쓸어버리는 것인데, 그게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출애굽기 12장 22절을 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출 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
이게 유월절 이야기인데, 여기 마지막에 보면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한 사람, 즉 숫자 '1' 인데, 이렇게 한 사람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두 사람은 당연히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숫자 '1'로서 표기가 되면, 그 사람의 인품이나 과거나 가치, 그런 것은 숫자 '1'에 다 묻히고 만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인간성이 좋아서 그날 밤에 골목길에 좀 돌아다녀도 괜찮아" 라는 것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인간의 품성, 인격, 믿음,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과거에 얼마나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했는지, 그런 것들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싹 쓸어버리고 새로 시작할 때는 숫자로 보신다는 겁니다.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그 골목에는 나서면 안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설치는 그 장소에 인간이 있을 곳은 없는데, 그러면 죽임을 당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의 내용은 간단한데, 즉 "나대지 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출애굽기 14장 14절을 보겠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어떤 싸움 !!
여기에 이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결과가 생기기 이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고 하니, 사람은 도저히 나설 수 없는 어떤 싸움이 있었다는 말이죠.
이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해서 무엇으로 진행이 되고 전개가 되었는지 여러분도 감을 잡았지 싶은데, 구약 이스라엘 자체가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싸움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 나대지 말라 !!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는 골목길에 한 사람도 나오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야 일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나대면 안 되는데, 갑자기 존재가 가벼워진다는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신약시대이고, 그 이전에 뭔가 싸움이 있었다는 말이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개념들을 마구 끌어 모았던 우리들, 그러한 우리를 천국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을 우리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의 이해로, 그렇게 모든 것을 싹 갈아엎어서 새로 시작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옛날에 알고 있던 개념을 포기할 테니, 새로 시작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싸움이란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나대면 안 된다는 말이죠.
*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싸움 !!
그러면 원칙적으로는 주의 이름과 악마의 이름이 싸우게 되는데, 그런데 악마는 비겁하게 뒤로 빠지고 누구를 앞장세우는고 하니, 우리 인간들을 앞장세운다는 겁니다. 그게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앞장세우고 뒤로 빠지시는데, 그래서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싸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체가 옛 사람들이니 나대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싸움이 굉장히 복잡해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는 하나님 편이다" 라고 주장하는데, 그런데 막상 전쟁에 돌입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편이 아니고 그만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서 마구 설치고 다닌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전쟁의 양상이 도대체 어떻게 진행이 될까요? 여러분의 정신이 혼미해지기 전에 성경을 좀 찾아보겠는데, 먼저 신명기 9장 5절을 보겠습니다.
(신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 의로움도 아니요, 정직함도 아니요 !!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는 하는 것은 그들의 의로움이나 정직함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가 또 다시 묻는데,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데 땅은 왜 차지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왜 그렇게 복잡하냐는 말이죠. 그것은 그 전쟁에 우리의 옛 사람을 집어넣고 개무시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 전쟁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으면, 그러면 우리의 본성이 마구 나오는데, 즉 "내가 착해서,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천국에 가는구나" 라고, 그런 악마적인 본성이 유감 없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도록 전쟁에 집어넣고, 그리고 나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천국에 가는 것은 너의 정직함도 의로움도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 굉장히 간단해 보이는데, 그런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존심의 싸움이 발각되는 현장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부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사전이 이미 조치를 취하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름, 즉 우리의 행함과 믿음을 싹 쓸어버리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불러주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천국에 가게 되었음을 알게 되고,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새로 시작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와중에 우리가 품고 있는 악마적인 본성은 그대로 드러나는데, 즉 "나는 착하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라는 게 노출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복잡하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에 한 사람도 바깥에 나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오면 죽는다는 말이죠.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을 한다고 하면 바깥이 나오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품이나 인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출애굽기 14장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라고 하는데, 즉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나대면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오히려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구원이란 것은 싸워야만 하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 싸움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어떻습니까? 자기 장래가 걱정이 되어서 하지 말라고 해도 관여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관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옛 것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는지, 그게 들통이 나게 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자기 집착인데, 즉 우리는 자아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하, 나는 새로 시작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구나. 나는 나의 것, 옛 것에 대한 집착이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강력하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우리는 싸워도 안 돼 !!
그러니 자기가 싸움을 벌려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싸워도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싸우면 싸울수록 새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옛날의 자기 잘남을 지탱하려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인간이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를 보면 어떻습니까?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종교적인 것, 그런 것을 표어로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죠. "늘 충성하고, 늘 바치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가 사진을 찍어놓았는데 말이죠. 그런 모든 것의 방향은 '교회 지키기' 라는 것인데, 그러니 '새로 시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싹 쓸어버린다는 말이죠.
* 아빠, 질문이 있습니다 !!
여기서 교재 9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여기에 제 딸이 등장하는데, 딸이 저에게 뭐라고 질문을 하는고 하니,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아빠가 말하는 성경해석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기 전에도 이런 해석이 합당한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딸이 이제는 결혼을 해서 또 딸을 낳았는데 말이죠.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싸움이 개입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싸운다는 것은 협상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까? 대척관계이고 충돌관계라는 말이죠. 화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는데, 적이 아니면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무슨 발상입니까?
다시 하겠는데, 이 질문 내용이 조금 어려운데, 즉 "죄를 짓기 전에도 이런 해석이 옳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저의 답변은 '새로 시작' 이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죄를 짓기 이전과 이후의 새로 시작이 서로 통하느냐고 했을 때, 여기서 무엇을 이야기해주어야 하는고 하니, 새로 시작하려고 하면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말이죠. 싸움이라는 것은 적과 적의 관계인데, 반드시 하나를 배척해야 한다는 겁니다. 서로 잘 지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질문에서 '죄를 짓기 이전' 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이미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생겨난 개념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이미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를 짓이 이전' 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 딸아, 소급한단다 !!
그래서 제가 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는고 하니, '소급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질문보다 대답이 더 어려운 것 같은데 말이죠. 새로 시작할 때는 "죄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 포함되는데, 그런데 죄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면 싸움을 벌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어떤 싸움인고 하니, 죄라는 것은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죄인이 죄라고 하는 것과 주님이 죄라고 하는 것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타협이 없다는 겁니다. 공통점이 없는데, 왜냐하면 적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서로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아는 죄의 개념은 죄인이 아는 죄의 개념을 필히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죠.
* 죄가 인간을 만든다 !!
그렇다면 새로 시작할 때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주님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인간이 죄를 짓는다" 라는 것인데, 즉 "여러분은 죄를 지었으니 회개하시오" 라는 개념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새로 시작할 때는 "죄가 인간을 만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시편 51편 5절의 말씀인데, 즉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죄"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인간의 행함, 인간의 믿음, 이런 것들이 다 죄가 된다는 말이죠. 이게 새로 시작하는 것인데, 즉 "죄가 인간을 만든다" 라는 겁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렇게 죄가 인간을 만들게 되면,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의를 만든다는 것이죠. 그래서 죄와 의, 그런 것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겁니다. 죄가 인간을 만드는데, 물론 하나님이 악마에게 허락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따먹어라' 라는 긍정이 아니고 '말라' 라고 하는 부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미 부정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죠. 즉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의 입장, 즉 "인간이 죄를 짓는다" 라고 하게 되면, 인간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열어놓으셨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고 하나님의 책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을 만든다" 라고 하게 되면, 죄가 죄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필히 '떠먹지 말라' 라고 하는 부정적 명령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 주님은요?
그러니 "나는 어떻게 됩니까?" 라는 것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왜냐하면 '나' 라는 게 죄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나이가 백살이고 자식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주님은요?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삭의 의미가 '웃음' 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내 나이가 백살이 되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가능합니다" 라는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 나이게 무슨 아이입니까?" 라는 것인데, 즉 '없음'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아이가 생긴다고 하니 웃었다는 것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천국에 가면 감사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 같은 어설픈 인간이 천국에 간다구요?"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운을 받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자기가 기여한 바를 어떻게 추스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평소에 로또에는 관심도 전혀 없는 사람이 우연히 경품으로 로또 복권을 하나 받아서 그냥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게 그만 1등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실실 웃음이 나오는데, 그게 천국에 가는 자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그게 말이 안 되는데, 자기가 천국에 가는데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로또에 당첨이 되려고 백장을 사서 매일 긁고 하지만 다 꽝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상을 했다는 것인데, 새로 시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새로 시작하기 이전에 자기가 예상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자기가 구원받기 이전에 알았던 죄는 전혀 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의도 아닌데, 죄와 의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죠.
* 새로 시작할 때, 나(자아)도 새로 지음을 받는다 !!
여기서 더 충격적인 무엇인고 하니, "새로 시작할 때 나(자아)도 새로 지음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물론 껍데기인 육체는 옛날의 구닥다리인데, 그런데 그 안에 새로 지음을 받은 '나'가 여기에 들어온다는 말이죠. 물론 그 '나'는 주의 이름에 예속된 '나'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을 부른다" 라는 것은, 육신 속에 이미 주의 이름이 들어온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인데, 마치 자기가 자기 이름을 부르듯이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주의 이름을 부른 것이 되도록 주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과 자기 이름의 전쟁에서, 자기 이름이 패배자고 주의 이름이 승리자라는 말이죠. 싸운다고 했는데, 거기서 우리는 악마의 앞잡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늘 승리자가 전리품인 패배자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는 말이죠. 그게 구약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신약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구약에서는 굉장히 복잡하다는 말이죠. 여기에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전쟁을 하기 위해서 벌어진 일들이고, 전쟁에는 반드시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이름을 고수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적이 된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내가 싸운다. 그러니 너는 가만히 있어라" 라고 했는데,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꾸만 자기가 나대고 설치려고 한다는 겁니다. "주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제 인생을 조집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여기서 잠언서 30장을 보겠는데, 24절에서 28절입니다.
(잠 30:24)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잠 30:25)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잠 30:26)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잠 30:27)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잠 30:28)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 대장이 없어 !!
여기에 작고도 지혜로운 것 4종류가 나오는데, 개미, 사반(토끼), 메뚜기, 도마뱀이란 겁니다. 그러면 개미의 대장이 누구입니까? 여왕개미가 아니고, 그것은 새끼만 낳는다는 말이죠. 27절에 보면 임군, 즉 대장이 없다고 하는데, 이게 하나님의 지혜라는 겁니다.
흔히 '자율'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싸움이 없다는 말이죠. 지금 최종상태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개미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면 잠언서에서 말하는 지혜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의로움과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것, 그게 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알아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이 지혜가 될 수 없는데, 그것은 결과인데, 누군가가 하셨기에 그대로 움직인다는 말이죠. 육신 속에 주의 이름이 있으면, 그러면 자기가 주의 이름과 의논을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주의 이름이 다 했다고 하면, 그러면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이 자기 인생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이죠.
* 주님의 없음이 나의 있음을 움직인다 !!
어떤 분에게 그런 답변을 했는데, 신앙의 근본은 간단하게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우리가 컴퓨터에서 글을 올리고 할 때, 그런데 손목이 아프면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손목이 아프지 않도록 하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가 예상하는 임금이 아닌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주님의 없음이 나의 있음을 움직인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지혜이고 믿음이라는 말이죠. 없음이 있음을 있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즉 자기가 움직이고 설쳐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혜가 아닌데, 그래서 새로 시작한다는 겁니다.
* 달란트 비유 !!
그렇게 새로 시작하면, 그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유명한 달란트 비유라는 말이죠. 사장이 외국에 잠시 출타를 하는데, 그러면 그 공장에는 주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평소에 주인이 있든 없든 간에 열심히 일한 사람과, 주인이 없으면 주인행세를 하는 자들을 분류를 시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한 쪽으로 지옥에 보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29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네가 주인공이 되었을 때 주인이 원하는 것을 내나봐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종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지옥에 가는 이유인데, 즉 내놓을 것이 없다는 말이죠.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 새로 시작하는 자아 !!
그런데 있는 자는 무엇입니까? 애초부터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주인공인데, 당연히 이 썩은 육체의 주인공도 주님이라는 말이죠. 그런 관계에서 등장하는 것이 새로 시작하는 자아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자아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자아면서도 자아가 아닌데, 즉 자기의 진정한 자아는 자기가 아니고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과 자기 이름이 마치 샌드위치처럼 중첩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거기서 주의 이름이 승리자고, 자기는 패배자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서로가 좋은 사이가 아니라, 싸움이 있었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몇 번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는데, 신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간단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제가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되었지요?"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구약은 왜 그렇게 복잡하냐는 겁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은 새로 시작한 게 아니고, 악마에 속한, 즉 죄로 만든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 제가 무엇을 하면 구원이 됩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됩니까? 그러면 얼마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새로 시작하지 않는 믿음이고, 그런 자들이 가는 곳은 어디라는 겁니까? 그런 자들은 지옥밖에 달리 갈 곳이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싹쓸이를 해서 바꾸어야 하는데, 그래서 구약 때 벌어진 그 일이 신약 때도 그대로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충성된 자' 라고 하는 것은, 자기 신체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고, 그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라는 겁니다.
* 주의 이름의 관점으로 !!
조금 더 진도를 나가보면, "죄가 인간을 만든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인간은 죽더라도 죄는 살아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새로 시작하게 된 안목이고 관점라는 겁니다. 즉 주의 이름이라는 관점이란 말이죠.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자기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자기 안에 들어오면 그런 관점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의를 행한다고 해서 죄에 갇힌 인간을 구출할 수 있습니까? 안 되는데, 그래서 죄를 죄로 규정하신 분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분이 의로운 분이고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죄로 인간을 만들게 하신 분이 새로 시작하신다면, 그러면 어떤 인간을 만드는고 하니, 자기 의로 인간을 새로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분이 오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인간이 의롭습니까? 의가 인간을 만드는 겁니까? 의가 인간을 만드는데, 그렇게 주님의 의로 새로 만들어진 인간이 누구인고 하니, 그게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죄도 죄가 짓게 하고, 의로운 것도 의가 만들고, 그러니 우리는 자기 이름을 부를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이 모든 일을 누가 했는고 하니, 구원은 주의 이름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아있는 것보다도 누가 살아있는 것이 우선인고 하니, 주님이 살아있어서 이 일을 하신다는 것이 성도의 관심사가 된다는 말이죠. 찌질한 자기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두기 싫다는 겁니다.
* 성도는 싸움꾼 !!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될까요? 구약을 보면 싸우는데, 물론 처음에는 이방민족들과 집단 이스라엘이 싸웠는데,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즉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들과 싸웠다는 것이죠. 오늘날의 성도들이 바로 선지자인데, 그런 선지자는 성령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안목을 장착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할 일은 무엇인고 하니, 매일 싸운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무엇과의 싸움입니까? 주의 이름의 최우선임을, 즉 주의 이름으로 교회와 싸우고 가정과 싸우고 국가와 싸운다는 겁니다.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의 이름이 이미 구원했다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자체가 싸운다는 것인데, 즉 '싸움꾼' 이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성도는 자기의 과거생각과 싸운다는 겁니다. 우리의 육신이란 것은 철저하게 이 세상의 원리에 따른 육신인데, 그러니 육신의 생각이 나옴으로서 싸움이 계속해서 어떻게 됩니까? 싸움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 된다는 말이죠.
이 육신은 육이기에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사고방식과 다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옛 생각인데, 자기 옛날의 육신의 생각이 기존의 세상을 너무나도 빼닮았다는 것이죠. 자기가 소유가 없으면 허전하고 몸이 아프면 짜증이 나고, 그리고 자기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으면 닦달을 낸다는 겁니다. 그게 자기 육신을 통해서 계속해서 외부에서 유입이 된다는 말이죠.
* 세상이란 욕조 안에 담겨있는 육신 !!
그러니 항상 흔들리는데, 좋았다가 슬펐다가 한다는 겁니다. 조울증 환자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유입되는 장소가 바로 이 세상이란 것이죠. 그러니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이란 욕조 안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면 세상에서 쏟아지는 모든 것이 자기 육신을 통해서 타고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위에서 주어지는 것은 주의 안목인데,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그것과 아직까지 미흡하다고 여기는 자기 욕망과 싸운다는 겁니다. 그런 싸움을 우리가 계속 치르고 있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싸움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라고 했는데, 즉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정말로 성령을 받아서 이러한 구조로 산다고 하면, 그런 사람의 소원이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적인 자기의 생각이 이기겠습니까? 이미 다 이루신 주님의 생각이 이기겠습니까? 당연히 주님의 생각이 이기는데, 그리고 육신은 더 살고 싶어하겠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하겠습니까? 더 빨리 벗어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성경에 분명히 나오는데,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24절입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사도바울과 연명호스 !!
21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주의 이름이 자기 몸에서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는데, 그는 성령을 받았기에 주의 이름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곧 개미인데, 즉 개미집단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자율권인데, 주님의 자율성에 사도바울은 같이 동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하는데, 자아는 장소만 제공했을 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살고 죽는 문제가 더 이상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왜 육신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는지, 그런 것은 자기가 알 바가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는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살아있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런 것은 자기에게 묻지를 말라는 겁니다. 이것을 '연명호스', 그 한 마디로 끝낼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이 연명호수가 꼽혀있는데, 이것을 자기 손으로 뽑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즉 요양병원에서 하루치만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23절에 보면, 사도바울의 소망은 자기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인데,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24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참 중요한데, 사도바울의 소원이 자기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자기는 주님과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님께 "아직까지 형제와 함께 있어라" 라고 해서, 자기는 아직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는 아직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옛날에 자기가 살아왔던 그 모습, 그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는 겁니다. 이미 거쳐왔기에 말이죠. 그래서 그들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예수를 믿어도 소용이 없더라. 기도를 해도 안 되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기가 했던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말이죠.
재방송은 재미가 없는데, 그러한 재미가 없는 것들을 우리는 매일같이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줘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죽지 못하게 연명호수를 코에 꼽아놓고 있다는 겁니다.
* 성도는, 죽기 전에 이미 죽은 자 !!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죽기 전에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살려고 애를 쓰는데, 하지만 성도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코에 연명호스를 꼽아서 살려놓고 있다는 것이죠. 죽은 시체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이런 안목,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신체는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죄가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신체는 빨리 벗어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그 신체는 이 세상의 그 모든 안목과 다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죠.
요즘 제가 두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간의 기억 속에는 과거에 자기가 했던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마치 더러운 고름처럼 꽉 차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 나가면 주님의 안목이 아니라 무엇이 작동하는고 하니, 육신의 본능이 작동한다는 겁니다.
* 존재의 가벼움 !!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복음을 안다고 해놓고도 자기 인생을 성공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성도는 성공과 실패가 없어서 존재가 가벼운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존재의 가벼움보다는 무거움이 더 좋다는 겁니다. 성공하고 싶다는 것인데, 죽기 전에 자기 성공을 눈으로 목격하고 싶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제가 성공하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해줄 겁니까?" 라고, 또 과거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연명호스를 빼버리는데, 그러면 우리는 정신이 번쩍 든다는 말이죠. 이미 우리의 것은 주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죄 많은 자기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할지, 주님의 의가 어떻게 드러날지, 그것을 실습하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의 코에는 연명호스가 꼽혀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저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의 이름이 우리 자신을 장악했음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사나 죽으나 오로지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3,20 오후 6시에 마침.
언제 오느냐고 묻거든, 이미 갔다고 전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