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수습하지 말라

아빠와 함께 2021. 3. 16. 07:41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3 - 수습하지 말라

21,03,1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8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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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들풀을 키우시고 참새를 먹이듯이,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성도를 지키십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지키고 키우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자신을 위한 소설과 시나리오를 쓰게 만들고서는 그 내용대로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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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 너희가 아니라 !!

여기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문장의 구조가 어떠한고 하니, "무엇이 아니고 무엇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 앞에 나오는 "무엇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생략해버리면 곤란한데, 그게 바로 "너희는 아니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이것은 "분명히 내가 말을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달리 누가 있다는 것인데, 즉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 말씀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게 맞다는 말이죠. 말하는 이는 '나', 즉 자아가 아니고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것인데, 그렇게 성령이 말씀하시려면, 그냥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다" 라는 것을 성령이 품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나를 품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아니다' 라는 것도 언급하고, 또한 '성령이 말씀하신다' 라는 것도 역시 언급하신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될 때 성경말씀은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대로 시행을 할 때는 성령이 오신다는 말이죠.

여기서 누가복음 11장을 보겠는데, 11절에서 13절입니다.

(눅 11: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나를 강탈하시는 하나님 !!

11절과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자식을 둔 아버지라면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악한 이 세상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무엇을 주시는고 하니, 성령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방금 이야기를 했지만 '나'를 포함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나를 빼앗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나를 강탈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서 점을 찍어놓은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빼앗기지 않으면 구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주님에게 빼앗기지 않으면 단독적으로 자기 구원이 성립되는데, 그러면 말하는 이가 성령이 아니고 누가 되는고 하니까, "내가 제대로 이야기한 덕분에 내가 천국에 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 스케줄대로 되는 것이란 말이죠.

하지만 그런 구원은 없는데, 자기를 빼앗기지 않으면 구원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기도하면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좋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모든 것이 빼앗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제대로 된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기도한 내용대로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기도하는 자기 자신을 몽땅 다 빼앗아 가버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기도응답이라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고 아버지라는 말이죠.

그게 교재 82페이지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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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을 갖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원의 능력을 소유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기 존재를 잊을 때는 구원의 능력의 증인이 될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우리가 자기 식으로 계속해서 구원을 유지시키려고 하면, 구원의 증인보다 죄인의 증인, 자존심의 증인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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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라는 존재를 잊을 때 !!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구원의 능력을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자기가 구원을 능력을 가지고 그 능력을 발휘해서 구원이 되는 것을 성령께서 용납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자기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보고 설교를 듣고 할 때, 과연 빼앗기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그게 아니면 더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우리는 더 얻기 위해서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압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모를 때는 빼앗기는 것이 최고라는 말이죠.

* 잊어버리고 있을 때 !!

그래서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고 하니까, 자기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할 때, 그때 은혜가 은혜답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하시고 주실 때는 항상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그렇게 잊어버리고 있을 때, 그 잊어버린 일을 주시면서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우리가 미리 예상한 것을 주게 되면, 그것은 주님과 협상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인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마귀가 찾아오는데, 주님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버려두니까 병이 나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자아는 주님의 관할 아래에서 주님이 관리하는 것이지, 자기가 관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자기 관할 아래에 있지 않도록 하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모든 것을, 즉 우리 자신의 기대와 예상을 다 빼앗는 식으로, 그렇게 강탈하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 그저 주신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주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무섭다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저 주신다" 라는 것인데, 그게 무섭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저 주신다는 것을 도로 회수하겠다는 것인데, 그게 욥기에 나오는데, 하나님은 욥에게 그저 주시고 그것을 도로 다 가지고 가신다는 말이죠.

욥은 처음에 받을 때 하나님이 왜 주시는지 몰랐는데, 그냥 자기가 착해서 주시는 줄로만 알았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복을 받은 줄로 알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것을 다 강탈해 가신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데,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했는데, 단독자로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데, 자아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방치되고 있다는 겁니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어린 자식을 그냥 방치했다고 요즘 난리인데, 5살 아이가 편의점에 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을 때,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분을 샀다는 말이죠. 부모가 자식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정작 하나님이 자시 자식을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꾸만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평소의 우리 사고방식이 혼자 사는 것이 일상화가 되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 파편화가 된 인간의식 !!

여러분, 지금까지는 별로 어려운 것이 없었지요? 이 말은 앞으로 어려운 것이 나온다는 것인데(ㅋㅋ), "갓난아이의 의식은 모든 것이 파편화가 되어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조각 조각으로 깨어져있다는 말이죠. 하나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갓난아이가 엄마의 품속에 있으면, 그러면 그 아이는 엄마의 전체를 모른다는 말이죠. 그냥 자기가 먹을 젖과 엄마의 따뜻한 손길만 아는데, 그렇게 파편화가 되어있다는 것이죠. 즉 자기에게 필요한 일부만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비단 갓난아이뿐만이 아니라 지능이 떨어지는 경우에도 그러한데, 자기가 관심이 있는 일부만 쳐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어른이라고 해도 담배를 피울 때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 피우고, 또한 그냥 길에 버린다는 것이죠.

그것은 지능이 파편화가 되어서 그러한데, 즉 모든 것이 다 깨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파편화가 되었다는 것은 자아 형성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그렇게 인간은 처음부터 부분 부분에 치중하는 것이지, 그것을 하나로 만들 능력은 없다는 말이죠.

* 자기 정체성과 악마 !!

그런데 1년에서 1년 6개월이 지나면 아이가 거울을 보게 되는데, 그러면 파편이 아닌 전체적인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전체를 '나'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거울 속의 자기 모습, 그것을 이미지라고 하는데 말이죠. 이때 무엇인고 하니, 파편화가 된 것이 하나로 뭉쳐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로 된 것을 '나', 혹은 '자아'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정체성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깨어진 파면을 하나로 뭉치는 일을 누가 하는고 하니, 그것을 악마가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의 절대적인 자아로 형성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신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로 만들어지게 되면 닫힌 영역을 형성하게 되는데, 출구가 없는 폐쇄된 영역을 말이죠.

'라이프니치' 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모나드(Monad, 단자)' 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것은 창문이 없다는 겁니다. 즉 창문이 없는 영역에 자기가 갇혀있다는 것이죠. 광주강의에서 제가 이것을 '두뇌의 세계' 라고 했는데, 인간 두뇌의 세계는 자기 육체에 갇혀서, 그 안에서 현실을 재구성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두뇌라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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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나드는 창(窓)을 갖고 있지 않다 - 모나드는 각각 내적 법칙에 따라 자기 발전하는 것으로 서로는 어떠한 작용도 미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모나드는 창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모나드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우주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따라서 모나드 간에는 서로 대응 관계가 있으며 연락과 조화가 있다. - 철학사전(중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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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힌 구조, '모나드' !!

그래서 인간은 비가 오던 눈이 오던 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 '나'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그것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닫힌 영역인데, 그렇게 파편화가 된 것이 하나가 될 때, 이것은 결국 '자기 지키기'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생물학에서는 유기체의 본능이라고 하는데, 인간을 비롯해서 동물이든 식물이든 간에 바깥에 있는 자연의 현상이 오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한, 그렇게 조직화를 하는 식으로 본능이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최고의 물질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생물학에서 'DNA' 라고 한다는 말이죠.

유전자 속에는 유전인자가 들어있어서, 그 유전자가 바깥의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생성해내고 있다는 겁니다. 즉 DNA가 자기 정보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단백질을 필요로 했고, 거기에 메신저인 RNA가 들어가서 그 RNA가 리보솜이라는 공장에서 단백질을 세포 내에서 만들어 낸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단백질은 'DNA' 라는 '나'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몰두하는데, 그래서 복제를 하고 확장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DNA의 대표적인 것이 요즘 유행하는 'COVID-19' 라는 바이러스라는 겁니다. 바이러스는 두 종류가 있는데, DNA와 RNA가 있다는 말이죠. 이번 코로나는 RNA 쪽인데, 대부분은 DNA 계열이라는 겁니다.

가장 작은 미생물을 두고 바이러스라고 하는데, 이 바이러스는 상대가 인간이든 돼지든 박쥐든 간에 무조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는, 자기 증식을 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무조건인데, 아직까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겁니다.

* 그것은 비정상 !!

방금 제가 닫힌 구조, 즉 폐쇄 구조라고 했는데, 생물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자기가 갇혀있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보게 되면 지극히 정상적인데,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정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누구와 교제를 하게 되어있는고 하니, 하나님과 교제를 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폐쇄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나'를 위한 '나',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정의한 적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 !!

저를 보고 "당신이 모든 인간을 다 조사를 해봤어요?" 라고 하신다면, 인간의 중의 인간이 무엇인고 하니,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폐쇄적 존재입니까? 아버지와 교제를 하는 존재입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와 교제를 하실 때는 언약으로 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 참된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까, 중간에 약속을 넣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인간' 이라고 하시는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뜻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유기체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고 규정을 하셨다는 말이죠.

이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규정하신 것인데, 즉 "이렇게 하면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의 태어나기 이전에, 마지막 아담이 최초의 인간인데, 그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 속에 있으면서 그 형상은 아버지와 닫힌 관계가 아니라 열려있는, 즉 소통이 되는 관계성, 그것이 곧 인간이라는 말이죠. 유기체나 DNA와 같이 생물학적으로 접근해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겁니다.

* 화성 탐사선은 왜 발사하는가?

그러면 천지창조를 누구를 위해서 한 것인고 하니, 천문학에서는 해는 해대로 화성은 화성대로 따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화성이 왜 있습니까? 그들은 전혀 모르는데, 화성이 거기에 있으니 가는 것이고, 이번에 '퍼서비어런스'가 무사히 화성에 도착해서 미국 나사에서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흙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고상돈이나 엄홍길과 같은 유명 산악인들에게 "왜 산에 가십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이 한결같이 뭐라고 합니까? "산이 거기에 있으니 갑니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산에 누가 갑니까? 그것은 "내가 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이 파편으로 조각난 것을 하나로 만드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열려있어야 하는데, 즉 뭔가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자체적으로 닫혀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

그런데 악마가 아담을 찾아와서 무슨 짓을 하는고 하니까, 그 놓쳐버린 것, 즉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바깥에 있는 지식으로 자기 안으로 집어넣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넣고서 문을 그만 닫아버리게 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는 관계 속에서 아담과 하나님은 계속해서 유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만 그것을 닫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선악과를 먹고 나서 여자는 여자대로 따로 놓고 남자는 남자대로 따로 논다는 말이죠. 즉 남자는 여자 핑계를 대고, 여자는 악마 핑계를 댄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한 편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단독자, 즉 닫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인간이 아무를 DNA를 관찰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분자 집합체인데, 그런 분자 집합체를 조사하면 원자 집합체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원자 집합체를 조사해보면 핵과 전자구름이 확률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태라는 말이죠. 궤도에 전자들이 확률적으로 놓여있다는 겁니다.

* 닫힌 영역의 자아가 지어준 이름 !!

그리고 이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와 중간자로 되어있는데, 이것을 다시 거대한 원형 가속기를 가지고 억지로 쪼개보니, 거기에는 '쿼크'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런 이름은 도대체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름을 지어준 적이 없는데, 닫혀있는 영역의 자아가 지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닫힌 영역에서 이름을 짓게 되면, 그게 DNA가 되던 분자가 되던 쿼크가 되던 간에 그 안에는 자아가 지은 자아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자아는 항상 무엇만 쳐다봅니까? 자아는 자기 노력과 공로가 들어있는 것들만 쳐다보면서 폐쇄적인 영역을 구축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인데, 인간이 범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말이죠.

* 낯선 악마의 등장 !!

제가 어렵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여러분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딱 한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악마의 등장이라는 말이죠. 자아를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악마가 결합된다는 것이 낯설다는 겁니다. 기존의 학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기존 학문에서도 인간이 파편적이라는 것은 아는데, 유아 심리학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거울단계에서는 자아, 혹은 자아의식을 확보한다는 말이죠. 그 다음 단계는 유명한 삐아제의 심리학에 의해서, 이 자아가 어떻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지, 그런 스스로의 능력을 확보할 것인지, 그렇게 해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자녀교육 !!

그래서 자녀교육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자식이 부모를 떠나서 자립할 수 있는지, 그것을 키워주는 것이라는 말이죠. 물론 요즘 현실과는 좀 괴리가 있는데, 다들 자식들을 독립을 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손주를 돌봐준다고 난리라는 겁니다(ㅋㅋ).

한 번 자아가 형성되면 그 다음에는 어디에 꽂히는고 하니, 이 자아가 절대적 자아가 되도록 주위에서 도와주는, 그게 사회나 가정의 역할이라고 여기고 우리는 살아왔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여기에 악마가 들어올 틈이 없는데, 이 세상의 교육학에서는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악마가 그렇게 했다고 보는데 말이죠.

* 생각의 의자에 앉혀라 !

어떤 사람이 "둘째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유명한 상담가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생각의 의자에 앉히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의 의자에 앉았다고 하면, 이것이 사자박사(?)가 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러면 생각의 의자에 앉아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 외손녀도 이 생각의 의자에 앉았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생각의 의자에 앉아 있으면 부모가 하는 것은 하나뿐인데, 진정할 때까지 부모가 기다려주는 것인데,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컴 다운(기다려)!" 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아이를 진정시켜주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생각의 의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나무 의자가 좋은지 알루미늄 의자가 좋은지 묻고 하는데, 새로운 율법이 등장한다는 겁니다(ㅋㅋ). 이런 생각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자아 굳히기' 라는 말이죠. 자기 밖에 모르는 자기를 더욱 더 자기 밖에 모르는 존재로, 그렇게 긍정해주고 정당화를 시켜준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자체가 떨어져나가고 남는 것은 '나의 형상' 인데, 즉 자기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지, 그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나의 형상, 나의 영광성, 나의 가치, 나의 의미, 그런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절대적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온 세상의 학문이 다 여기에 결집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 천문학자가 된 '나' !!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에게 "너는 앞으로 커서 무엇이 될래?" 라고 물었을 때, 그 아이가 "예, 저는 앞으로 천문학자가 되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천문학자가 무엇과 같습니까? 바로 그것은 "천문학자 = 나" 라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문학자가 된 '나'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천문학자라는 것은 자기의 영광과 형상을 더 높이기 위한 직업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 천문학으로 인해서 자기가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자기 변신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겁니다.

* '엄마로서 나는 실패자다', '나는 실패자로서 엄마 노릇을 한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여기서 두 문장을 적겠는데 그 차이점을 살펴보라는 말이죠. 첫 문장은 "엄마로서 나는 실패자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 문장은 "나는 실패자로서 엄마 노릇을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두 개의 문장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첫 문장인 "엄마로서 나는 실패자다" 라는 문장 속에는 어떤 뉘앙스가 들어있는고 하니, "나는 사회에서는 직장생활도 잘하는 능력이 있는 캐리어우먼인데, 그런데 가정에 가면 엄마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엄마노릇 외에는 다 잘한다는 것인데, 자아 형상의 절대적인 태도라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잘 한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자기에게 짜증이 나게 되고, 그래서 "나는 가정에서 엄마로서 조금은 부족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나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아주 뛰어난 사람이다. 결코 실패자가 아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두 번째 문장은 "나는 실패자로서 엄마 노릇을 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직장이고 가정이고 간에 모든 면에서 실패자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엄마 노릇까지 하려고 하니, 나는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바로 이 두 번째가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일은 그 목표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절대성' 이라는 것이죠. 즉 자기 안에서 스스로 자기 가치를 지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DNA를 지키려고 하고, 또한 자기 형상을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처음 문장의 경우에는 당연히 인간이 하는 일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하시는고 하니, 우리 인간이 그 어떤 것을 생각하더라도 생각이 나지 않는, 즉 인간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 주님에게 강탈을 당한 자아 !!

인간이 하루종일 생각하는 것은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두 번째 문장의 경우에는 "나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고 실패자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두 번째가 주님의 일이 되고 첫 번째는 악마의 일이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나는 실패자가 되기 싫다" 라는 원초적인 자아는 주님에게 강탈을 당했기 때문에 말이죠.

우리가 강의 처음에 마태복음 10장을 보았는데, 9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의 성령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일을 하실 때는 우리를 그냥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를 그만 빼앗아 버린다는 말이죠.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왜 강탈하십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은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빼앗아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을 해도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것이 곧 성령의 일, 즉 주님의 일이 된다는 것이죠.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절대적인 자아성을 구축하고 있는데, 즉 자기 안의 폐쇄적인 구조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인간은 폐쇄적인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령께서 오신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주십니까? 성령을 주시는데, 그러면 성령을 주시는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과 소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체적으로 갇혀있지 않도록, 그런 자폐증을 깨트리신다는 말이죠. 자기 자기에게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이 시점에서 오늘 강의제목을 하나 정하면 "허급지급 수습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수습을 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 방향성과 의도가 있다는 말이죠. 잘나가던 자기 모습을 다시 구축하고 싶다는 것인데, 반드시 그런 노림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벽기도회나 금요철야 기도회와 같은 것은 자기를 수습하는 행위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의 일은 모르고 하는 것인데, 인간이 알고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수습이란 겁니다. 주님께서는 모르는 식으로 일을 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 결혼은 모르고 하는 것 !!

노인네들에게 "어떻게 결혼을 했습니까?" 라고 하면,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했어" 라고 하는데, 그래야 결혼이란 것이 성사된다는 겁니다. 자아가 이것저것 따질 수가 없고, 그냥 욕망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 인간이 이성적으로 따질 수 없는, 즉 자아가 손댈 수 없는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서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보통은 그런 것이 20대에 일어나는데, 그런데 요즘은 너무 수습을 많이 해서, 서로가 자꾸 따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연령이 30대로 넘어가는데,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수를 읽기에 정신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물어보살'에게 와서는 묻는데, 서장훈이 선녀로 나오고 이수근이 동자로 나온다는 말이죠. 깃발을 하나 꽂게 해서, 의미도 없는 것을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따지는 것도 많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렇게도 많으냐는 것이죠. 반면에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제발 너를 잊어버리고 살아라" 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에 손을 대지 않아도 누가 손을 댄다는 겁니까? 성령께서 손을 댄다는 겁니다.

* 악마는, 영적세계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멈춘 적이 없어 !!

너무 어렵게 한 것 같아서 조금 쉽게 해보면,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수습하지 말자" 라는 것인데, 그것도 허급지급 말이죠. 과거처럼 돌아가려고 정리정돈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아를 하나로 형성하도록 계속해서 부추기는 악마는 무엇을 강변하는고 하니, 성도로 살든지 아니든 간에 말이죠.

그것은 바로 영적세계에 대한 비난과 조롱인데, 악마는 그것을 멈춘 적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때 무슨 일을 당했습니까?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그리고 옷을 벗기면서, "누가 당신의 옷을 가지고 갔는지 맞춰봐라. 그러면 선지자로 인정해줄게" 라는 식으로 나왔다는 말이죠.

(마 27: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마 27: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마 27: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마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 로마군인들의 조롱 !!

그렇게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인간은 항상 그 모든 것을 자기 잘남과 자기 절대성 굳히기, 즉 "나는 나다와야 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모독하는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웃고 모멸감을 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 일인지, 그것을 로마군인들도 평소에 잘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에게 퍼붓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당했을 때 자장 고통스러웠던 것, 바로 그것을 예수님에게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롱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달릴 때 팻말이 있었는데, 거기에 '유대인의 왕' 이라고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앞에 '자칭' 이라는 말을 붙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붙이지 않아도 다 안다고 하면서 그렇게 써서 붙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 퍼 붓은 것을 자기에게 퍼붓게 되면 자기는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당연히 드는데, 그렇지요?

* 나를 건드리면 용서할 수 없어 !!

그렇다고 하면 이런 비난과 조롱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비난과 조롱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기에 그렇게 싫어하는 상황이 되느냐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자아, 즉 자기의 절대성인데, '나의 나다움'에 대해서 누군가가 건드리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너 까짓 것이 무엇인데?"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날이 있다는 말이죠. 일년에 두 번인데, 그것이 바로 가족들이 다 모이는 구정과 추석이라는 겁니다. 갈 때는 분위기도 좋게 아버지에게 드리기 위해서 청주까지 들고 가는데,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만 칼부림까지도 난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절대로 하지 말하는, 즉 "네가 아버지에게 무엇을 해주었노?" 라고 하게 되면, 형제가 그런 말을 하든 아버지가 하든 간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되면 부모고 형제고 없다는 겁니다. 서로 술이 벌겋게 취한 상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럴 때는 끝이 뾰족한 것들을 치워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 말을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에게 그대로 했다는 말이죠. 예수님에게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공격한 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너 까짓 것이 무엇인데?" 라고 하는 말에 모욕감을 느꼈기 때문에, 바로 그 말을 그대로 예수님에게 그대로 퍼붓는다는 말이죠. 즉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모욕감은 무엇이 형성이 되어있을 때 효과가 나는 겁니까? 그것은 자아의 절대성이 형성되어있을 경우인데, 그래서 젖먹이에게는 아무리 그런 말을 하더라도 "엄마, 찌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 성령께서 '나'를 회수해감으로서 !!

여러분, 도대체 '나' 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나' 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누가 갖는 것인고 하니, 마태복음 10장 19절과 20절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께서 이미 악마에 물든 '나'를 회수해 가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기가 말을 해도,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성령께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런 지저분한 '나'를 이미 강탈하셨는데, 바로 그분이 기존의 '나'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자아를 이미 빼앗아 가버렸다는 겁니다. 주님이 말이죠.

주님의 자아는 아버지와 연결되어서 소통이 되는데, 그러니 주님의 자아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자아라는 겁니다. 우리처럼 자기 형상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자아가 아니라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악마는 영적세계에 대한 비난을 멈춘 적이 없다는 겁니다.

* 내가 예수를 믿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남들이 영적세계에 대해서 비난과 조롱을 나에게 하겠는가?" 라는 것인데, 예수를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자기를 보고 말이죠. 당연히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예수를 믿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에게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즉 "영적이라고? 웃기지 마라. 나는 돈이 최고야" 라고 말이죠.

부자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데, 돈 때문에 무엇이 다 탈락하는고 하니, 복음이E든 십자가든 간에 뒤로 다 밀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복음이 라면수프보다 못하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수프는 라면을 끓일 때만 생각이 나는데, 그와 같이 복음은 교회에 올 때만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는, 그런 절대적 자아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모으는고 하니, 복음이 아니라 돈을 모은다는 말이죠. 돈이 있어야 '나다움'이 되는데, 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할 수 없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그런 모든 잔소리,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폐쇄적인 '나' 라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속에 있는 악마가 계속해서 '나'를 비웃는다는 말이죠. 즉 "때려치워라. 네 까짓 것이 무슨 영적인 것을 알 수 있어? 영적인 것은 애초부터 없어. 현실을 직시해. 영적인 것을 알아서 무엇을 할 건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양심이 계속해서 자기를 흔들고 현혹을 시킨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내가 엄마 노릇은 못하지만 다른 것은 잘한다" 라는 것이 그런 경우인데, 그것은 "나는 괜찮은 지금의 자아를 계속해서 견지하겠다" 라는 겁니다. 도저히 놓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 경우에는, "이미 모든 일에 실패자가 엄마 노릇을 또 하고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 자체의 아이디어에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이것은 "나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죠.

* 계속해서 유지되는 어둠의 상황 !!

그러므로 "영적인 것에 대해서 비난과 조롱을 멈출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체험, 즉 주님이 그렇게 당했을 때 주위에 둘러쳐지는 것이 있는데, 그게 일종의 '상황'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게 대해서 조롱과 비난을 퍼붓던 그 어두운 상황, 그것이 지금 사라졌습니까? 그게 아니면 그대로 깔려져 있습니까?

그대로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데, 그런데 이게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이 어둡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십자가의 체험을 하게 해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상황을 계속해서 유지를 시키는데, 그런 상황을 철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자기 자신도 이런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데, 왜냐하면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 유기체를 보호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영적세계는 자꾸만 잊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영적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말이죠.

반면에 자아를 빼앗긴 자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비교하는고 하니, 먼저 "나는 살아있다" 라는 것과,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셔서 살아있다" 라는 것,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깊이가 있는지, 그것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것과 주님이 살아있는 것,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이냐는 말이죠. 어느 것이 앞서고, 어느 것이 더 깊이가 있느냐는 겁니다.

* 부활의 세계는 자율성의 세계 !!

주님은 부활하셨는데, 그렇게 부활하셨다는 것은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하신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이것을 광주강의에서 "부활의 세계는 자율성의 세계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율성이 있다는 것은 누구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인데, 살아있는 자기가 더 살기 위해서 주님에게 부탁을 해도, 그런 부탁이 주님의 자율성을 흔들지 못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주님의 경우에는 "네가 살아있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내가 부활해서 내가 하는 일이 우선이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이 우선인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 잠시동안 이 세상에 더 살아갈 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살아있는 것은,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서 모양성을,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의 살아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살아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주님의 살아있음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는데, 자기가 살아있어도 자기가 아니라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고, 그리고 죽는다고 해도 그것도 역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인데, 그래서 죽음도 주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주의 일이 없는 순간은 없는데,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고 주님의 자율성이라는 말이죠.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여기서 요한복음 6장을 보겠는데, 28절과 29절입니다.

(요 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하나님이 보내신 분만이 !!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라고 물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일을 누가 한다는 겁니까?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아버지의 일을 한다는 것을 우리가 결과적으로 인정을 할 때,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일에 이미 결속이 된 상태라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밥을 먹은 것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게 하신 것인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일인데, 모든 일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것을 모독하고 조롱하는데, "신앙이 있는 척을 하지말고, 솔직히 말해라. 네가 했잖아"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밤에 몰래 라면을 끓이려고 하다가 물을 쏟고 한 것을 다 아는데, 그런데 그것을 왜 성령이 했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자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 "아니 홍시를 보고 홍시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보고 왜 아니라고 강요를 하지?" 라는 식으로 말이죠.

왜냐하면 라면을 끓이려고 하면 냄비에 물을 붓고 들고 해야하니까, 손모가지가 멀쩡하고 해야하는데, 그런 건강을 주님이 주셨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알고리즘이라고 하는데, 즉 모든 일의 순서와 절차가 그러하다는 말이죠. 즉 주님이 힘을 주셔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라면을 끓이면 동생이 일어나서 "형님아, 나도 하나 끓여줘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놈아, 너는 안 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동생을 보고 야단을 치는 것도 주님이 하게 하셔서 했다는 말이죠. 모든 것은 주님이 힘을 주셔서 한다는 겁니다.

* 인간은 어차피 실패자이기 때문에 !!

왜냐하면 어차피 실패자이기 때문인데, 실패자라는 것은 "자체적으로 선과 악을 논하지 말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원칙에 우리가 강제로 말려들었다는 말이죠. 즉 "네가 악이다. 선이다" 라는 것을 함부로 언급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통합적인 자율체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적이 없다는 말이죠.

주님만이 자율인데, 인간은 나름대로 선해도 주님이 보시기에 주님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착하고 선하고 해도, 매일같이 고아원을 방문하고 해도, 이미 그것을 자기가 했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 주님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밤에 진라면이 아니라 안성탕면을 먹었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신과 신의 싸움, 그리고 인간 이스라엘 !!

그러니 자기가 원해서 해놓고도, 돌아서서는 "이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한 것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 바로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싸우는 민족으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이죠. 구약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은 싸운다는 것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싸우는 주체는 누구이고 또한 적은 누구입니까? 싸우는 주인공의 이름은 '주의 이름' 인데, 즉 '여호와' 라는 말이죠 그리고 싸우는 대상은 이방민족이 믿는 신인데,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십계명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데,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들은 싸워야할 대상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신과 신인데, 둘 다 영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란 민족, 그들은 인간인데, 그들은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 들러리를 한 꼴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아담은 악마의 미끼도 되고 하나님의 미끼도 되는데, 악마가 아담을 덥석 물게 됨으로서 악마는 덫에 빠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아담에게 다가와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어라" 라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그 다음 조치는 무엇인고 하니까, 율법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율법이 주어지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모든 행동별로 그만 파편화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소를 잡으면 여러 가지 부위로 나뉘어지는데, 등심, 안심, 설도, 양지 등등으로 말이죠. 그처럼 율법의 조항들은 인간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것이 아니고 파편으로 보는데, 그렇게 조각들로 보고, 그런 조각들 하나하나에 일일이 다 저주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 자아의 통일성이 아닌, 율법의 통일성 !!

그러면 우리 인간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하는고 하니, "제가 율법 99개를 지켰으니 하나를 어긴 것은 좀 봐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즉 인간은 자아의 통일성을 가지고 비율적으로 많은 것을 들먹이면서, 어떻게 좀 봐달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자아의 통일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반면에 율법의 통일성을 주장하시는데, 그래서 "율법의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것을 다 어긴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통일체는 네가 아니고 율법 자체가 통일체다" 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과수원이 있는데 그 주변에 도둑을 막기 위해서 방울을 달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도둑놈이 들어오다가 방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만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과수원 전체에 다 방울소리가 울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통일체라는 말이죠.

* 율법에 없는 짓을 해도, '죄' !!

아무튼 인간은 통일체도 아니면서 하나의 통일체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하나 하나를 모두 다 율법이 지적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에 없는 짓을 해도 죄가 되는데,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이죠. 법에 없는 이야기를 해도 저주가 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법에 없는 행동을 하게 되면 주님이 새로운 법을 거기에 추가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법과 법 사이의 빈자리를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재주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소낙비를 맞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사이를 빠져나가면 되는데, 하지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런데 비가 오는 것을 한 장의 스냅사진으로 고정을 시키면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되어서 참 아름다운데, 그러면 그 사이로 빠져나가면 된다는 겁니다. 마치 담양의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듯이 말이죠.

그런데 비가 소나기가 되어서 마구 쏟아지면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고정이 되어있다고 하면 그게 가능한데, 시간을 계속해서 퍼부어 버리면 그 어떤 순간에도 비를 맞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와 같이 율법은 인간은 겨냥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은 그만 파편화를 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파편화가 되면 인간배후에 있는 통일성이 나오는데, 그게 악마라는 것이죠. 그러니 주님께서는 악마를 잡기 위해서 인간을 미끼로 던졌다는 겁니다. 악마를 율법으로 영원토록 저주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악마는 물지 말아야할 미끼를 그만 물고 말았다는 것이죠.

* 가인과 아벨의 제사 !!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러면 그런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는데, 인간이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받아야 된다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가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이 화를 낼 권한이 있습니까? 역시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아벨을 그만 죽이고 말았는데, 그러니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는 법에 위반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정황에 대해서 법적인 조치를 이미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가인은 지옥으로 아벨은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율성인데, 즉 하나님이 천국에 보내고 싶으면 천국에 보내는 것이고, 또한 지옥에 보내고 싶으면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죠.

* 인간이 가진 악마의 형상과 주님이 가진 하나님 형상의 싸움 !!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율성 그 전체가 저주를 받은 자율성임을 규정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곧 율법인데, 즉 "네가 하는 모든 생각은, 네가 잘 되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은 율법 앞에서 전부가 다 저주거리가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마의 형상과 주님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형상의 싸움인데, 거기에 대해서 악마 쪽은 계속해서 이 영적인 것에 대해서 조롱하고 비난하고 무시한다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의 과학이기도 한데, 영적인 것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오늘날이 바로 그러한 시대라는 겁니다.

여기서 성경을 두 군데 보겠는데, 먼저 히브리서 10장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

여기 17절에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인데, 그분은 우리의 자아를 강탈하신다는 말이죠. 수습은 인간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아는 스스로 수습하면 안 되는데, 빼앗겨야 한다는 말이죠.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라 성령이다" 라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영적인 것에 대해서 조롱하면 안 되는데, "영적인 것을 내가 알기는 무엇을 알아? 그냥 이 세상은 내 힘으로 산다" 라는 식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이죠.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활해서 살아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이런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부활을 믿으면, 주님이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일하시면서 살아계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일이 아니고 자기를 강탈하는 일을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의 입장은 "네 일보다도 내 일이 우선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자아는 '기억의 다발' !!

그렇게 성령께서 우리의 자아를 강탈할 때, 그 자아는 '기억의 다발' 인데, 즉 과거의 자기 체험들을 모아놓은 것이 자아라는 말이죠. 인간들마다 자아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과거의 체험들이 각자가 다 다르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기억의 다발인 자아를 성령께서 가지고 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17절에서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라고 하는데, 우리의 자아는 늘 기억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아가 주님에게 가버리면, 주님은 어떻게 수습을 하시는고 하니, 우리 자신을 자아가 아니라 죄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에 말이죠.

* 동일한 '나' !!

이 고리를 놓치면 오늘강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데, 아까는 엄마 이야기를 했는데, 달리 말해보면, 여기에 '에이스' 과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과자를 먹으면 누가 먹습니까? 자기가 먹는 것인데, 주스를 마셔도 자기가 마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아빠노릇을 하면, 그것은 누가 하는 겁니까? 자기가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동일한 '나' 라는 것이 과자를 먹기도 하고 주스를 마시기도 하고 아빠노릇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길을 걷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는데, 그렇게 무엇을 해도 하나의 '센터'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 센터에서 행함이 나오는데, 그게 자아라는 겁니다. 밥을 먹는 '나', 잠을 자는 '나', 그것이 동일한 '나' 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나' 라는 것은 폐쇄구조가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예비된 한 몸 !!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5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7절에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그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오시는데, 그게 16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들어오셔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다시는 너희가 가지고 있던 죄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여긴다면, 과연 자기 과거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까? 있지 않습니까?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죄라고 여깁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까? 자꾸만 영적인 것을 무시하고 없애버리려고 한다는 겁니다. "과거에 내가 이만큼 고생해서 이렇게 이루었다" 라고 하는 기억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죠.

물론 겉으로는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나는 너보다 더 뛰어난 존재야" 라고 하면서 배틀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어디 내 자식을 건드려? 내가 얼마나 공을 들인 자식인데"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말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저놈은 내 자식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주님 쪽에서는 기억하지 않는데, 그런데 우리는 기억을 한다는 말이죠. 성경에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 라고 했으면, 우리도 같이 거기에 동조해서 "맞습니다. 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라고 해주어야 하는데,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는 겁니다. 심지어 나이가 들면 장기 기억에 들어가는데,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말이죠.

* 성령을 한량없이 !!

그런데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요한복음 3장 34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성령을 주시는데, 한량없이 주신다는 말이죠. 주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령을 주신다는 겁니다.

(요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주님의 실존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계속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령을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잊지 않으면 또 주님은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돌아서서 또 기억을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내가 또 잊어버렸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은 성령을 계속해서 주시는 분인데, 이것을 바로 주님은 악마를 공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한 때만 주시게 되면, 그러면 이게 비축용이 된다는 겁니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만나는 비축용이 아니라 소비용이라는 말이죠. 없애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주시기 때문에 말이죠.

*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리고 !!

그러면 면에서 우리교회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데, 왜냐하면 돌아서기만 하면 다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다들 무슨 밑이 깨진 항아리를 몸에 품고 있는지 몰라도, 그야말로 줄줄 다 빠져나간다는 말이죠. 설사도 그런 강력한 설사가 없는데, 먹기만 하면 곧 바로 싸버린다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좀 견딜만한 젊었을 때는 돈을 벌어야지, 성경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 성경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그러면 그게 들어오는 것도 싶지 않지만, 그나마 들어온 것도 바로 빠져나가 버린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 바로 괜찮은 자아를 만들기 위함인데, 그 자아는 자기의 과거기억이라는 말이죠. "과거에는 성경말씀을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라고 하는 그 자아, 그것을 악마가 또 수습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스카치 테이프를 가지고 그 깨진 파편조각을 또 일일이 붙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것이 나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 강탈해 가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라 네 속에 있는 성령이다. 너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살아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네가 살아있는 것보다도 주님이 살아있는 것이 더 세다. 너와 이 세상은 영적인 것을 무시해도,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너의 숨쉬는 것도 다 너의 일이 아니고, 한량없이 주시는 성령의 일이고, 주님의 일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것을 계속해서 강탈해 가시는 주님의 일, 그러니 한 때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역사는 없다 !!

그러면 이제는 주님께서 악마를 공격하시는데, 무엇을 공격하시는고 하니, "역사는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인생인데, 그러니 역사는 없다는 것이죠.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런데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옷을 벗기고 했을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나는 로마군인이다" 라는 자아를 생각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어릴 때는 이렇게 했고, 이렇게 이렇게 살아왔다" 라고 하는 자기 역사를 주장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역사, 즉 자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기 역사를 다른 사람이 모독하면 싫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싫어하는 것을 예수님에게 퍼붓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당하면 참을 수 없는 그 모욕감을 예수님에게 퍼붓는데,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렇게 조롱하고 비웃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비단 로마군인들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나 주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또 돌아서서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역사라는 것은 마귀가 조작한 것이기 때문인데, 역사는 없다는 말이죠. 자기의 긴 그림자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누구의 역사밖에 없다는 겁니까? 주님의 역사, 주님의 일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남기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자체의 역사가 아니라 함께 계시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계시였다는 말이죠.

이제는 진짜 마지막으로 성경말씀을 한 구절만 더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사사기 2장 10절을 누가 크게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삿 2: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 알지 못하였더라 !!

여기에 보면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 그 자식들은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을 다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잊어버립니까? 마귀가 자아를 구축하면 무엇이 모독을 받는고 하니, 영적인 세계, 즉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그게 현재 자식들에게는 왕창 다 잘려버린다는 말이죠. 즉 "내 인생을 내가 살지, 누가 도와준단 말인가?"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영적인 것을 모독하고 멸시한다는 말이죠.

멀리 갈 것도 없는데, 여러분의 자녀들을 한 번 보라는 겁니다. 그들이 지금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들이 모세를 생각합니까? 돈도 안 되는데, 그러니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자식을 잘 키웠다고 하고 싶은데, 그러니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죄와 허물을 기억치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한량없이 성령을 주심으로서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는데, 반면에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 존재에는 엄청난 압박이란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아하,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잠깐 살려주시는 것이구나" 라는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적세계를 없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이 세상풍조에 우리도 같이 휘말렸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복음을 무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오로지 내가 살아있는 것만을 지독하고 절실하게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죄를 기억치 아니하시는 성령을 한량없는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그래서 주님의 그 은혜에 언제나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3,06 오후 8시에 마침.

건질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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