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0218A슥4장6절(이스라엘 쪼개기)-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스가랴4장6절 제가 읽습니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룹바벨, 이스라엘의 대표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대표자가 스룹바벨입니다. 실제적 인물이지요. 실제적 인물. 실제적으로 그런 인물이 있다는 뜻이에요. 실제적 인물.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있는 것처럼 스룹바벨이 실제로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할 때에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이야기한 것이 이스라엘 전체한테 이야기하는 겁니다. 스룹바벨은 이스라엘 속성을 대변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면 이스라엘 속성은 오늘 이 스가랴4장6절의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영의 요소와 또 하나는 육의 요소지요. 그렇지요.
이건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여기는 신이라 했지요. 다른 번역에 보면 영으로 되어있고 신은 괜찮아요.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신으로 되어있다. 육은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힘으로 묘사되어있고, 능력 또는 능으로 묘사되어있지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겁니다. 두 가지 요소가. 그런데 이 결합됐다. 말은 쉬운데 이게 난해한 게 아니오, 아니오라 했다 말이죠. 힘 아니요, 능력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인간의 힘 빼고, 능력 빼고 하나님의 신으로 밀어붙이면 되는데 이스라엘이.
왜 아니오, 라고 하면서 영과 육이 서로 대치가 되고 반대가 되면서 어떻게 그게 결합이 가능 하느냐 하는 겁니다. 한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어떻게 그게 결합이 가능 하느냐 말이에요. 요즘 신약으로 답변하면 이렇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면 영에 속한 사람 맞지요. 고린도전서2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영을 받으면 영에 속한 사람인데. 영의 속함인데. 왜 육적인 요소가 결합이 가능 하느냐 이 말이에요. 똑같은 질문이에요.
이게 같이 사이좋으면 결합이 되는데 사이좋은 게 아니고 아니요, 라고 했다고요. 힘 아니요, 능력 아니요, 이 말은 뭐냐 대립관계에요. 대치관계란 말이지요. 이걸 더 알기 쉽게 말씀해 볼까요. 남편 복음 모르고 아내 복음 아는데 어떻게 부부가 됩니까. 어떻게 한 가정이 됩니까. 복음 모르는 남편 한 번 답변해 보세요. 어떻게 가능하지. 그 가능한 것은 간단해요. 경제적 이해관계로 엮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경제적 이해관계. 딱이지 뭐. 인간은 태어나면서 전부 다 재물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어차피 한 평생 같이 살다가 죽으면 따로 갈 길이 달랐다. 서로 갈 길이 다른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영과 육이 된 것은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영원히 영은 영의 세계, 천국이지요. 영의 세계. 육은 영원한 저주의 나라. 지옥으로 갈음하는 그걸 갈라내는 분류하는, 분류가 되는 원천적 바탕나라에요. 원천적 바탕나라.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진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로 쪼개기 전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래서 이쪽은 천국이고, 이래서 이쪽은 지옥이라는 구체적인 본질을 유일하게 알려주는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에요. 여기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창세기1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에 우리 같으면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선택했다. 니 복 받았다. 그 이야기로 끝내면 되는데 창세기12장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인정하는 쪽은 복을 받되,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는 쪽은 어떻게 됩니까? 저주 받는다. 저주 받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주께서 하십니다.
여기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그 다음에 그것으로 멈추면 얼마나 분위기 좋아요. “아브라함아?” “예” “내가 너 선택했다.” “감사합니다.” “니 복 받았다.” “예,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로 그걸로 끝내면 좋겠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뭐한다? 저주를 내린다. 이 말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왜 이 세상이 인간들이 저주 받아야 될 본격적인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겁니다.
지옥 가되, 지옥 가야될 설명을 택한 자. 택한 민족. 택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설명을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지옥가도 그냥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지옥갈만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복음 모르는 남편이 지옥 가는 것은 그 남편은 모르지만, 믿는 사람입장에서는 믿는 사람이 이스라엘이니까, 영적인 사람이니까, 영적인 사람에 비출 때 아, 저 양반은 지옥갈만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갈만해서. 그러면 이건 뭐냐 복음을 아는 내가 당신을 미워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내가 누굴 미워한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주님이 미워하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그냥 이유도 모르겠어요. 그냥 내 나라로 오래. 그걸 뭐냐, 그냥 불러주심. 불러내심. 불러주심보다 불러내심이 더 좋아요. 불러주심이 되면 이건 보이스, 말의 응답이 있어야 되잖아요. 불러내심은 완전 죽은 자를 깨운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조치가 가미되어있습니다. 일어나! 일어나! 그냥 쳐들어오는 거죠. 사도바울에게 그냥 쳐들어오듯이. 그냥 쳐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영적인 나라다. 맞는 말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영적인 요소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신의 요소가 있으니까. 영적인 나라다. 그 말은 맞고, 내용은 뭐냐 하면 영적인 나라가 영적인 나라를 위하여, 영의 영의됨을 위하여 주님의 약속의 나라 됨을 위하여 필히 필수적으로 지옥 갈 요소도 같이 겸비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의 자체적인 힘이나 능력으로 그들이 구원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게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로 제대로 이스라엘이 거기서 또 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는 겁니다.
인간적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로 쪼개지기 이전에 구약에서는 하나의 이스라엘 되고, 그 다음에 신약에 오고 예수님 오시게 되면 진짜 참 이스라엘과 거짓 이스라엘로 구분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제자 보낼 때 숫자가 몇 명입니까? 열둘이지요. 12라 하는 것은 누구의 아들 숫자냐 하면 야곱의 아들 숫자에요. 야곱의 이름이 나중에 무슨 이름으로 바뀌느냐, 이스라엘 이름으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열두 명이라 하는 것은 야곱적 요소가 완성된 야곱적 요소가 오게 되면 자식을 창조하듯이 생산하듯이 바로 나 예수가 새로운 이스라엘 창조하겠다. 새로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스라엘은 우리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고 이스라엘은 새로 만들어지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만들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나를 만들면 나는 복제가 되기 때문에 그 만드는 주도권이 나한테 있기 때문에 그건 제대로 만들어진 게 아니지요.
진공청소기를 만들 때 만든 사람이 회사에서 만들게 아닙니까. 그럼 진공청소기는 어디서 나왔는가. 만든 사람이 있겠지요. 내가 만약 구원받았다. 그럼 누가 구원했어?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기도해서 구원받았다. 그럼 내가 나를 만든 셈이 되지요. 바로 그 일을 누가 했는가. 이스라엘에서 이미 일어났었어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서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을 만들겠다고 이스라엘을 본인들이 그토록 노력하고 애쓰고 사고방식이 그런 사고방식으로 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아까 스가랴4장6절 보니까 뭡니까.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럼 아까 처음에 강의 다시 시작해봅시다. 되지도 않는 걸 왜 붙여놨느냐. 그럼 아예 잘라내지 되지도 않는 걸 왜 붙여놨는가. 구원받는 것이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안 되기 때문에 붙여놓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이스라엘 소속된 사람이 본인들이 아무리 열망하고 아무리 기대하고 구원을 희망해도 내가 구원받는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천국가고 싶어서 어떤 시도를 해도 이게 인간의 힘에 속하고 시도가. 인간의 능에 속하기 때문에 어떤 시도도 이건 불가능하다. 실패로 끝난다.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이스라엘은 천국 가는 이스라엘은 누가 가는가. 이게 스가랴에서는 앞에 누가 붙어요? 스룹바벨이 있지요. 스가랴4장10절 읽어보겠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잖아요. 다림줄이.
어제 수요일날 다림줄 했지요. 제목은 다림줄 한 게 아니고 건축학개론 했지만. 납득이 나오는. 그 다림줄을 아모스 7장7절에서는 누가 쥐고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다림줄을 잡았는데, 여기는 보다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스룹바벨.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서서히 이 땅에 실제적인 어떤 특정인물로 실제적 인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지. 그냥 하나님이 계시면 되는데. 실제로 온다는 거예요. 실제로.
여러분, 여러분 자녀들이 만약에 결혼을 한다. 집사님은 어떤 가수한테 축가를 듣고 싶어요? 권투 잘하는 알리. 하여튼 유명한 가수. 어떤 축가가 듣고 싶으냐. 예를 들어서 김범수라는 가수의 축가를 듣고 싶다. 그러면 김범수의 노래를 틀면 되지요. 그런데 실제로 김범수가 온다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놀라는 동시에 얼마면 돼? 저 가수 부르는데 얼마를 줘야 돼? 이러지요. 그 다음부터는 돈 걱정이 들어오지요. 그렇지요.
내가 열심히 해서 율법 지키고 말씀 지켜가지고 하나님 보고 싶다. 하늘나라 가야지. 이럴 때는 우리한테 별 심적인 부담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가기 전에 먼저 그 하나님이 직접 우리 코앞에 눈앞에 등장한다면 얼마나 심적으로 큰 부담이 되겠습니까? 심지어 베드로도 못 알아봤지요. 그렇게 따라다녔지만. 왜냐 하면 베드로가 여전히 힘과 능력의 기대를 걸고 한 거예요. 기대 건 것을 이걸 가지고 두 자로 ‘예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상.
인간은 늘 예상해요. 예상을 같은 뜻으로 상상한다. 인간은 늘 상상한다. 뭘 상상하느냐 하면 신을 상상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망한 이유가 뭐냐 그들의 신이 그들이 생각하는 여호와가 우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망한 겁니다. 실제로 나타나보면 아무도 안 믿을 하나님인데 나타나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맘껏 고상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모든 아름다운 것과 고상한 것은 전부 다 높은 하나님께 다 집중시켜 놓고 나에게서 나오는 그 아름다운 양심의 아름다운 것과 고상한 것들을 집대성시켜서 그것을 그 신을 섬긴다면 결국은 신과 나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형성된다고 자기가 자부하는 거예요. 이건 자아의 확장이지요.
여러분들이 시편에 보면 얼마나 많은 고상한 가사들이 나옵니까. 그 시편을 이스라엘은 지금도 어릴 때부터 달달 외워요. 그 시편을. 이스라엘에 가면 그 통곡의 벽에 가게 되면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리에다가 납작한 모자를 쓰는 이유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하나님의 아래에 있고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뜻을 모자에 담아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어떤 기독교의 신자가 하는 말이 우리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내가 예상하고 내가 상상하는 하나님께 내가 정성과 지성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접근해 가는 이 자체가 뭐라고요? 이게 바로 육이에요. 이게 인간이 나올 수 있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에요. 교회가 이런 시스템을 가동시켜서 교회를 부지하고 경영하고 있는 겁니다. 관리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신에 대한 상상력을 밑천으로 해서. 당신들 하나님 알잖아. 하나님은 당신들보다 월등하게 순수하지요. 당신은 죄인이고 못났고. 죄인이고 못났지만 순수한 신을 향하는 그 마음을 집대성해서 하나님께 칭찬받고 사랑받는 교회됩시다. 촛대 옮기지 않는 교회. 촛대를 옮기지 않는 교회가 됩시다. 그게 목사들의 공략, 전략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전부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스가랴4장6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힘으로 안 되고 능력으로 안 되잖아. 안 된다는 말은 인간의 예상과 상상 그 바깥에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과 상상력 바깥에 있다는 거예요. 자,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영과 육의 요소 두 가지 요소로 결합이 되어있어요. 결합이 된 이유는 결국은 이게 갈라서게 되어있고 쪼개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쪼개지게 되어있어요. 하나의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거예요. 두 개로 쪼개질 때 사이좋게 쪼개지지 않아요. 육이 영을 공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공격하는 영의 세계를 이스라엘 자체는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택한 민족은 다른 민족에 없는 영적인 요소가 있어서 영적인 요소와 내 속의 영적인 요소와 하나님이 잘 조화되고 결합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의 다른 나라를 제치고 그 나라 많은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지점이 바로 이스라엘 안에 오신 거예요. 왔을 때, 서로 사이좋게 하나님과 결속이 잘 됐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적대적 관계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가 존대하거나 섬길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이 아니구나! 우리가.’ 내가 만들어낸 신은 우리가 마음껏 섬기되 내 착함을 긍정해 주는 신은 마음껏 섬기되 근원적으로 나를 모독하는 신은 내가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나를 모독하는. 나를 부정하는 신은 우리가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극단적인 말을 했어요. “니는 악마의 자식이다.”라고. 네 애비는 악마라고. 극단적인 말을 했다고요. 그 극단적인 말을 우리가 감내하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스가랴4장6절에서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된다는 이 말은 너희들이 행하지도 못할 존재라는 거예요. 행하지도 못할 존재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죽은 자가 뭘 행하느냐. 죽은 자가.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못한다가 나오는 게 아니고 죽음이 행하지요. 이거 어려운 말이에요. 죄가 행하고, 죽음이 행하는 거예요. 우리를 갖고 노는 겁니다. 죄와 죽음과 악마가. 내게서 나오는 것은 죄만 행해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을 닦달 내는 게 아니고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악마를 닦달 내는 겁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우리 뜻이 아니고 우리 속을 장악하고 있는 안티십자가. 십자가의 반성향을 갖고 있는 그 괴물이 그동안 이스라엘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바로 아까 나왔던 다림줄. 다림줄은 신약에 오면 두 자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다림줄은 신약에 오면 율법입니다. 마태복음5장에서 예수님께서 일점일획이라도 이 다림줄은 양보가 없다. 봐주기도 없어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지 아니하면 내가 값을 너희에게 찾겠다. 이리 나오거든요. 마태복음5장에. 형제간에 서로 거래관계가 있을 때 하나라도 다 갚지 못하면 옥에 집어넣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5장에서 기억나지요.
5장에 보면 만약에 길에 갔다가 만약에 송사하는 관계가 되어버리면 만약에 화해하지 않으면 옥에 가두어버린다. 호리라도 다 남김없이 갚기 전에는 결단코 나오지 못하리라. 25절, 26절. 율법을 항상 늘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지 아니하면 어디 아래에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어디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까? 저주아래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항상 지켜서 저주아래 있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율법대로 살아라, 그런 뜻이 아니고. 로마서3장에 보면 율법을 준 것은 안 되는 것을 안 되는 거 맞지! 라고 확인 작업에서 율법을 준 거예요.
다시 내 능과 내 힘과 내 상상력과 예상으로서는 천국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율법 앞에서 니가 그걸 자인하라 이 말이지요.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것을 자인하는 그 순간이 용서가 주도권을 갖고 우리를 장악하는 순간이에요. 내가 용서를 확보하는 게 아니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못난 인간을 확보해서 용서가 용서답게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는 거예요. 용서의 위력을 발휘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용서 안에는 용서를 이루게 한 그 값과 용서의 무게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같은 무게로 들어가거든요.
내가 용서를 부정하고 싶어도 예수님 십자가 피 흘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내 용서는 내 용서가 부정해도 소용없어요. 용서는 그대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용서를 부정하지 말고 십자가를 부정하려하면 부정하라 말이지요. 십자가 부정 안 되면 그 값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치매 걸려서 나 용서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그런 거 자기 기분, 느낌, 그런 느낌 같은 느낌 신경 쓰지 마세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면 그걸로 끝이지 그게 용서했던 값이에요. 인생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십자가가 있다면 그 어려움조차도 용서가 용서답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나한테 벌어진 사건입니다.
육이 영을 장악할 때, 그 이스라엘이 망한 이스라엘이지만, 영이 신이 육을 지배할 때, 그 이스라엘은 천국 가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육과 영이 함께 있는 걸 이제 아시겠지요. 아시겠지요, 하고 돌아서면 뭐? 뭔데? 그동안 뭐 들은 거 있어? 이리 되지요.
함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우리의 뜻이 아님을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서 ‘아! 우리의 육은 가짜 이스라엘을 양산하는구나!’ 라는 것을 그걸 통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사심과 주임의 구원하심이 은혜로만 다가오고 이게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구나. 내가 사는 것도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드러내는 겁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이제 함께 있는 걸 아시겠지요.
왜 반대되는 게 있어야 되느냐, 그것은 우리의 구원보다 주님의 심판이 우리의 존재보다 앞서기 때문에 그래요. 심판은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부터 계획한 거고, 그 계획을 계획답게 실행하기 위해서 재료로서 우리가 이 땅에 나중에 태어난 거죠. 창세기1장이 나중이 되어버린 거죠. 우리가 나중에 태어난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던 저렇게 생각하던 하여튼 하나님의 일에는 차질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아셨으니까 이제부터 하는 말 잘 아시겠지요.
육은 뭐냐, 육은 복음이 안 나오는 게 육입니다. 복음이 안 나오는 것. 십자가가 안 나오는 것. 스룹바벨의 다림줄이 안 나오는 것. 하나님의 요소가 나오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육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요소가 안 나오고, 대립된 요소가 안 나오고, 뭔가 신에 대해서 나온다는 것은 그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자신을 상상한 겁니다. 예상한 겁니다.
그래서 이 육의 요소를 이제부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한 번 적어볼게요.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를 두 가지로 하겠습니다. 하나는 세속적 모습으로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그 다음에 종교적인 모습으로. 또는 경건한 모습으로. 영적 모습으로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영적 모습으로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어떻게 영적인데 복음이 안 나오지. 이게 가능해요. 아까 왜 가능하냐 하면 인간의 상상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하여튼 다른 민족 생각하지 말고 이스라엘 그들이 여호와를 섬겼지만, 그들이 섬긴 여호와에서 매 맞지요. 그들은 나름대로 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전혀 영적이 아니고 세속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영적이 되려면 어떻게 되느냐, 저희들이 망하고 난 뒤에 나온 결과를 봐야 돼요. 망하고 난 뒤에 나온 결과. 미리 알 수가 없어요. 성도가 안 죽고 복음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어요. 일단 맞을 건 맞고, 얻어터질 건 얻어터지고, 죽을 건 죽고 난 뒤에 다시 보게 되면 ‘아! 내가 죽는 것이 이게 복음의 절차 속에 주님이 죽음 됨을 드러내는 절차 속에 필수였구나!’ 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그냥해서는 영적인지는 몰라요. 그냥 영적인 것으로 예상하지만, 항상 그건 파토 나는 겁니다. 이 어려운 말을 쉽게 해서 첫 번째는 이걸 한 번 봅시다. 소위 종교적, 영적 경건의 모습으로 복음이 아닌 경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복음 성가 가사 하나를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세상에서 방황할 때> 세상에서 방황할 때, 가사를 보면.
세상에서 방황 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 받을 수 있나요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 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의지 할 것 없는 이 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자욱 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 죄인이 다시 눈물 흘립니다
오 내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 없습니다
내 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 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드립니다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내 맘대로 고집하여 온갖 죄를 다 저질렀네, 하거든요. 저질렀네, 이리돼요. 여기서 말하는 죄는 무슨 죄죠? 그러니까 이게 무슨 죄냐 이 말이지요. 한 번 보세요.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그러니까 이 가사를 보세요.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를 섭섭히 여기지 말고 좀 진작 알 걸. 이러면 안돼요. 방황이라는 말을 쓸 때는 진짜 복음을 알고 난 뒤에 무엇이 방황인가를 뒤늦게 아는 거예요. 술집에 왔다, 갔다하고 그게 방황입니까? 교회 다니는 건 방황 아니었었어요? 그러니 가사 내용을 보게 되면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다. 이 가사를 할 때 상상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는 교회도 안 다니고 우리 아버지, 엄마는 장로님, 권사님인데 교회에 가서는 장로, 권사지 집에서 맨날 싸우는데 그게 꼴 보기 싫어서 나는 반항기로 해가지고 나는 교회 안다녔다. 그걸 자기 임의대로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방황이라 보는 거예요. 아버지, 엄마 일부러 약 올리기 위해서 나쁜 친구 술 마시고 담배 피웠다. 그걸 방황이라 본 거예요. 지 맘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게 방황이라는 거예요. 그게. 지 맘대로. 신학교가라고 막 서원기도 했는데 일부러 삐져가지고 태권도 원서내고. 싸움질하고. 집에서는 경건한 큰 일하는 목사 되라고 니 어릴 때부터 기도 했다하는데 자기는 실용음악가가지고 트로트대회에 나오고. 이런 거. 그걸 방황이라고 보는 거예요. 방황. 그래가지고 길거리에서 고구마 팔고 하다가 나중에 우승해서 잘되어서 40억 벌고 이런 거. 히어로 영웅이라.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이리 됐거든요. 가사가.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다 저질렀네. 그 다음에 노골적으로 육적이 나와요.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무슨 염치가 이런 염치가 다 있어요. 점점 더 주님을 이용하겠다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지금 뭡니까? 자기를 개선하려하는 거예요. 옛날에 부모 말 안 듣고 교회 안 다녔던 그 질이 뚝 떨어진 수준 낮은 나를 만회하려는 겁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용서받고 이제 정신 차리고 마음잡고 바르게 살면 주님 저 천국에 넣어주실 거죠? 이게 상상이에요. 이게 예상이에요. 이게.
거래도 무슨 저런 거래가 있어요. 지금 뭐가 빠졌어요? 본인이 본인을 모독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저 마음 낮추고 겸손한체하고 눈 까라 하면 눈 다 깔고. 이렇게 하면 보내 줄 겁니까? 이보다 더 낮게 가라하면 더 낮게 가겠습니다. 아프카니스탄 가가지고 죽으라 하면 죽겠습니다. 이게 객기고 오기에요. 이건. 이건 신앙도 아닙니다.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실을 모르잖아요. 차라리 방황할 때가 더 낫지. 인간들이.
안티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발작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거부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인간의 육적이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근원적으로 나를 모독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낮추면 낮추고, 복음이라면 복음대로 다 믿을 테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자체마저도 제발 모독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젠가도 말했지만, 그걸 스냅사진 찍어야 돼요. 그게 악마에요.
악마란 근원적인 자기 의가 악마가 떠날 때는 뭐냐 근원적인 내가 떠날 때가 악마가 떠날 때에요. 나의 의가 떠날 때입니다. 종교적 힘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방금 한 것은 영적으로 보이는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내부에 이런 파들이 굉장히 많은 파가 있어요. 경건파. 쿰란공동체 경건파. 에센파라 하거든요. 세속과 다르면 천국 갈 줄 알고. 세상에서는 돈 좋아하지만, 우리는 돈 거부해. 하여튼 반대로 살게 되면 된다는 겁니다. 거꾸로 살면 된다는 거죠. 거꾸로 살아도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습니까? 내가 나를 거꾸로 뒤집는데 그게 거꾸로 입니까. 하나의 요령이지요.
그 다음에 세속적으로 복음을 모르는 경우는 여기서 육은 뭐냐 하면, 영으로는 “나를 모독하지 말라.”라면 육은 뭐냐 하면 “나를 위로해 주세요.” 에요. 나를 위로해 달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가서 목사한테 위로 받는다고 하지만, 교회 안가도요, 세상 적으로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굉장히 위로 받을 데가 많아요. 음악으로. 흘러간 팝송으로 위로받고. 꼭 종교적 아니라도 같은 또래의 같은 역경을 겪어온 사람들. 역전의 용사들 모이면 서로 위로가 돼요. 과거 이야기해가면서.
그 위로 받는 하나의 경우 역시 노래 하나 나옵니다. 남들은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이게 얼마나 아름답거든요. 살아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노래 한 마디 그 문학적인 표현 하나 하나가 공감을 자아냅니다. 텅 빈 하늘 밑 불빛은 켜져 가고 옛사랑 그 이름을 아껴 불러보네. 너무 소중했던 기억이기 때문에 그냥 함부로 안 부르고 애써 아끼면서 불러보는 거예요.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난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가. 이 문세가 불렀던 옛사랑이란 가사에요.
이제는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마음에 둘 거야. 억지로 그리움을 안 그리웠다. 이렇게 억지로 하기는 힘들어.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내 마음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내버려 두듯이.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다. 늘 한 번 뜨거울 때만 있는 게 아니고 가끔 쉬어가는 테마도 대목도 있잖아요. 내 마음 고독이 너무 흘러 넘쳐. 봄에 푸른 잎이 푸른 잎처럼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이거 위로 안돼요?
위로 받으려고 교회 갈 때 벌써 이 자체가 세속입니다. 위로 받기 위해서. 이 문세 노래 하나 옛사랑 이거 열 번 들으면 은혜 받아요. 왜 인간은 이렇게 세속적으로 육적으로 왜 이렇게 되느냐, 그러면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4장, 능으로 안 되고 힘으로 안 된다고 했잖아요.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도대체 힘의 한계, 인간의 한계입니다. 힘의 한계, 능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제가 열 개로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인간의 한계, 나의 한계지요. 나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서 나를 아는 것. 인간의 한계에서 나를 아는 거거든요. 그 한계를 열 가지로 적어봤습니다.
첫째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인간은 절대적인 게 없어요. 왜냐 하면 본인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본인이 절대적이에요. 다만, 절대적이라 하면 이용할 뿐이지요. 하나님은 절대적이다. 복음은 십자가는 절대적이다. 그러면 내 절대적인 것에 그것 달랑 갖고 오면 되네. 이런 생각이죠.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중에서도 최고조의 절대. 무한대 중에서 최종 무한은 역시 나에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두 번째는 중학교가가지고 읍내에 중학교에 다니니까 그 누나는 잊게 되고 교회에도 더 큰 교회에 가니까 그 자기 시골 교회의 누나는 촌스러워요. 어디 견줄 대를 견주어야지. 어딜 갔다가 견주어. 정확한 것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정확한 게 없으면 뭐냐, 세 번째로 정확하다는 말을 표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유용하다로 봐야 돼요. 인간은 유용한 거뿐이에요. 인간은 유용한 거뿐입니다.
네 번째 인간은 절대가 없고 정확한 것이 없고, 유용할 것뿐이니까 유용을 위해서 뭐하느냐 하면 연결망을 꾀한다. 연결. 남편이 집에 퇴근해가지고 주말되어가지고 직장 안가고 집에 쉬면 매일 전화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잘 있나? 잘 있나, 무슨 뜻인 줄 알아요? 혼자 술 먹기 심심하니까 같이 술 먹자는 이야기에요. 혼자는 술 맛이 안나. 같이 술 먹자고 핑계대기 위해서 연락을 취하는 거예요. 그 연락을 취하는 연락망이 그게 내가 하는 유용성 속에 어디까지나 이렇게 포함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절대적이니까. 정확한 것은 없고. 내 유용함.
이렇게 술친구 걸쳐놔야 혹시 내가 아쉬울 때나, 내가 나중에 직장 잘릴 때 혹시 나 소개해 줄 수 있는 돈독한 친구. 돈보다 친구가 낫다는 거예요. 노래에. 참. 연결만 취해요. 연결만. 연결만이니까 이게 허상이죠. 허상. 연결 취하다가 사기 당해라. 매일 보증 서다가 망했다는 거예요. 연결 때문에. 어릴 때 잘 살았는데 왜 이렇게 고생했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매일 나오는 이야기야. 우리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섰대. 보증을 잘못 선 게 아니고 같이 투자를 했지요. 왜 말을 투자를 했다고 안하고 보증을 잘못섰다고 하느냐 말이죠. 지가 은근히 욕심내가지고 연결 친 친구가 잘된다고 하니까 돈 투자한 거예요. 지만 투자했습니까. 일가친척 다 끌어 모았지요.
왜 이 유용성에서 뭐가 나오느냐, 창의성, 창조성이 나오니까. 절대적인 것은 없고 내가 절대적이니까 절대적인 나의 존재를 더욱더 절대화시키는 방법은 자꾸 연락을 취하는 거예요. 연락을. 그 연락을 다섯 번째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태적인 환경과 상호작용을 한다. 굉장히 어려운 표현이지요. 생태적인 환경. 예를 들어서 상호작용을 한다. 쉽게 말해서 늘 친구 사귄다, 그런 뜻이에요. 이게.
상대가 있음에 내 존재감을 느끼는 거예요. 상대가 없으면 나는 자폐증에 빠져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의 두뇌의 시냅스 세포는 새로운 창의성을 위해서 새로운 자극을 요청하게 되어있거든요. 자극이 오게 되게 되면 이 신경세포가 새로운 기억을 창출하기 위해서 기존에 새로운 것만 받아들이고 기존의 것은 밀어내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생태적 환경은 뭐냐 하면 오브젝트 대상, 대상을 자꾸 구애, 사랑을 구하듯이 찾아다니는 거예요.
여섯 번째 이렇게 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용성이니까 나를 위한 실제 구성에 나가지요. 나를 위한 현실구성. 나를 위한 현실구성이니까 너를 위한 현실구성은 아니지요. 남편이 사회생활 많이 하게 되면 이건 아내의 현실을 구축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현실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고요, 아내는 니는 내 옆에 붙어있으면 된다. 시다발이처럼 늘 붙어있으면 된다. 이리 보는 거예요.
아내의 현실은 내 현실을 추구하는 순간 아내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는 나한테 복속되면 그만이야. 내 니 먹여살려줄게. 다만 내가 하는 짓에 대해서는 일절 입 다물고 있어라. 내가 구성한 현실 속에 너를 넣어줄게. 그리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일곱 번째가 자기를 행위 주체자로 강조한다. 이렇게 생태 상호작용의 관계를 통해서 자연적인 결론을 자기를 행위 주체자라는 거예요. 아까 스가랴4장6절,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밀어내는 거예요. 행위 주체 자니까.
여덟 번째, 그러다보니까 자꾸 자기가 행위의 주인공이 되어야 되니까 자꾸 평생을 통해서 뭐하느냐 평생 하는 게 리허설이에요. 자꾸 리허설만 한다. 저거 쑤셔보고, 이거 해보고, 저거 해보다가 리허설하면서 그 다음에 아홉 번째 자연에 없는 것을 인공적이지요. 나 중심의 현실을 창의한다. 창조한다. 자연에 없는 건데 내가 힘과 능으로 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그 안에서 나는 사는 재미와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 거예요.
식구가 네 식구 같으면 네 식구 전부 다 캡슐이 네 개에요. 7살 먹은 애는 7살 나름대로의 7년 동안 살아온다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자기 환상 속에 잠겨있는 거예요. 열 살 때 인생고비 있지요. 스무 살 인생고비. 고비일 때마다, 아홉 번째 자연에 없는 거, 타인에게도 없고, 나만의 고유의 것. 나만의 고유의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성이라 하지요.
나만의 개성 있는 현실 속에 잡히는 사로잡혀있는 망상 속에 있는 자아도취의 세계. 자아도취에 빠지지요. 자아도취에 빠져야 이게 바로 자기만의 천국 아닙니까. 두뇌의 도파민이 그런 거 도와준다, 이야기하고 있어요.
열 번째 되게 도면 마지막에 뭐냐 하면 나는 그 안에서 자기 세계 안에서 나는 없고, 기하학을 만드는 구조적인 세계만 있는 거예요. 나의 세계만 있고 자기가 만든 세계에 자기가 거기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살아지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만든 환상이죠. 그 세계를 위해서 자기가 만든 세계에 의해서 자기가 스스로 종이 되고 노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벌 예상한 사람이 돈을 잃어버리면 그 돈 벌었던 과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은 대책은 뭐냐 자살이지요. 인기 좋았던 인기인이 옛날 인기 없어질 때 마지막 남은 카드는 뭐냐 그 인기 있는 현실을 위하여 과감하게 자결합니다. 명예스럽게. 그렇게 하는 말이 후회 없다. 이리 하거든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머리 깎고 중 된다든지. 이게 전부 다 나를 버리고 내가 하고 선택한 세계만을 남길 때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지요. 그럼 인간은 뭐냐 그 한계를 통해서 뭐냐 나라는 것은 내가 곧 신이고 내가 절대자라 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에서 다른 나라에서 되는데 어디에는 용납이 안돼요? 스룹바벨한테 걸린다든지, 이스라엘 속에 걸렸다 하면 이것이 바로 너의 한계, 너의 힘과 능력이 왜 하나님께서 안 받는지를 그들은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들은 멸망이란 사태를 통해서 그게 드러나야 되지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