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장애물

아빠와 함께 2020. 12. 19. 07:07

안양20201210a슥4장1절(장애물)-이 근호 목사

스가랴4장1절,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스가랴2장3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그렇게 되어있지요. 천사가 자기를 스가랴를 또 깨웁니다. 스가랴를 깨울 때에 천사의 하는 일이 일관성이 있습니다.

천사의 일이 일관성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하는 일은 일관성이 제대로 하나님께 인정받겠느냐,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모든 그림이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의 그림은 우리 인간이 있어서는 이게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다 몰라요. 모르고 누가 아느냐, 그 많은 도면을 그 설계도는 하나님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기 스가랴를 깨운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나의 일의 철회, 내 계획의 철회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일의 철회.

내 일의 철회가 되는 이유는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철회하는 거예요. 힘이 없어서도 철회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계획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철회되는 겁니다. 여기 스가랴4장 6절에 보게 되면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내가 내 힘으로 되지 않으니까 이게 무능하지요.

이 무능하다는 말은 이걸 아주 쉽게 말해서 내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쓸 능력이 없으면 그건 있으나 마나에요. 그건 죽은 거예요. 자기가 안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자기 능력이 어디에 쓸 데 있다고 자꾸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어야 되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과연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보니까 인간은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보통 교회 나와서 복음을 알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쓸데없다.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하지요. 겸손해서 그런 얘기를 누가 못하겠어요. 미리 아부하는 식으로 그냥 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냥 겸손 떨면서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 말고 자기가 낮춰보려고 자기가 애써서 하지 말고, 성경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됩니다. 성경적으로.

“나는 못난 자입니다.” 라고 할 때, “어디에 근거해서 못 났습니까?” 를 제시해야 돼요. 흔히 엄마가 자식들 훈계할 때, “그래, 이 어미가 못 났다.” 하잖아요. 그 때는 자식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어머님! 성경 어느 대목에서 어머님이 못 났다는 근거를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님의 겸손으로 우리를 협박하지 말고, 나는 못났다는 이야기가 자꾸 들리기를 봉투에 돈 더 내라 하는 이야기로 자꾸 들리는데. 나는 못났으니까 혼자 못사니까 돈이나 보내 달라는 이런 소리로 자꾸 들리는데. 친정 엄마가 하면 들 섭섭하지만, 시어머니가 그리 나오면 많이 섭섭하지요. 니 아들보고 달라하세요. 뭐 이런 식으로. 그리 나오는데.

아휴, 주님이여,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낮춰지고 못났습니다. 그럼 주님이 좋아하지 않아요. 니가 어디에 근거해서 니가 못났는지를 봐라 이 말이죠. 스스로 자기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리 낮추면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면 주께서 뭐 봐주겠지. 하지 말고 주님의 관심은 내가 얼마나 낮아지느냐가 아니라 말씀이 말씀의 현실화, 실제화를 거기에 니가 동참하느냐를 보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착하냐가 아니라 말씀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도덕, 윤리를 걷어내야 되잖아요. 윤리, 도덕을 걷어내야 돼요.

이제 십자가를 알고 이제 윤리, 도덕에서 벗어났습니다. 라고 말들을 하지만 십자가 알고, 윤리, 도덕을 걷어내고 난 뒤에 윤리, 도덕을 대체한 그건 뭐냐, 어머니한테 물으세요. 그동안 니 윤리, 도덕적으로 살았는데 그러면 그걸 걷어낸다고 그럼 좋다. 걷어냈다. 걷어내고 그동안 살아왔던 그 원리원칙 제시해봐라. 없지요. 그냥 못났습니다. 그 못났다는 게 윤리도덕이에요. 윤리도덕을 뜯어냈는데 또 윤리도덕이 들어가 있어요.

나는 나의 의를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새로운 겸손의 탈을 쓴 새로운 자기의가 되잖아요. 이게 되어버린다고요. 그럼 그거 뜯어내야지요. 그거 뜯어내면 또 생기는데요. 이게 전부 다 발생 원인이 뭐냐, 자아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자아가. 그렇다면 이 천사가 스가랴를 이렇게 찾아와서 깨울 때에 외부적 요소지요. 천사가 깨울 때에 천사가 가지고 온 것은 하늘나라의 스케줄이지요. 스케줄에 대해서 여기 내가 무능하다가 됩니다. 내가 무능하다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논리가 돼요.

천사의 개입으로 계속 반복해서 나의 무능함이 나오게 된다. 계속 나의 무능함이 나오게 되겠지요. 그러면 천사의 개입으로 내가 계속 무능하게 되려면 천사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의 유능함, 무능함의 반대는 유능함이지요. 유능함이라 하는 것은 이건 윤리와 도덕을 또 장착해요. 윤리와 도덕을 장착해서 아까 이야기한 윤리 도덕은 뭐로 이어집니까. 자기 의로움. 내가 안 죽을 이유 같은 거. 이것을 근거를 윤리도덕으로 또 채우잖아요.

채우게 되면 또 천사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개입이 되려면 나의 유능함에 대해서 중간에 계속 차고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결과는 나의 무능함을 생산물로 내놓습니다. 무능함의 생산물. 무능하니까 나는 빠지고 천사 혼자 다하세요. 가 아니라, 그러면 천사 혼자 다하지 우리를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를 찾아와야 될 이유는 우리의 무능함이라는 생산물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하고 같이 계속 관여를 하는 거예요. 천사가. 관여할 때 우리는 이제 어떻게 나는 유능하다고 여기는 유능함이 천사의 개입으로 뭐가 됐습니까? 무능함이 되었지요. 무능함.

그러면 여기에 뭐가 개입되었느냐 하면 바로 스가랴 3장에 나오는 옷 바꿔 입히기. 주님께서 죄 사함입니다. 옷 바꿔 입히기, 주님의 공로가 여기에 개입되는 거예요. 이리되면 나의 무능함을 유능함으로 살짝 바꿀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이건 내가 유능해서 내가 무능으로 바꿀 수 있는 재주는 없었다. 이것은 주님이 개입했기에 나는 무능함을 자랑하고 즐거워한다. 이리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거저주심을 자랑하는 거예요. 이것이 반복해서 계속 나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기니까 이걸 한 번 이렇게 줄여보겠습니다.

‘기호의 충격으로부터 시작입니다.’ 기호의 충격으로부터. 여기 기호라 하는 것은 어떤 사물이 이 땅에 있는 이 땅의 사물이 아닌 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럼 이 땅에서의 천사의 내왕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건 힘으로 오는 겁니다. 힘으로 오는 겁니다. 힘이 느껴지는 겁니다. 이 스가랴에게.

여기에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할 때,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날 때 뭐라고 합니까? 내가 깼습니까, 아니면 깨어남이 나한테 도달한 거예요? 깨어남이 도달한 거죠. 만약에 6시에 일어난 사람은 5시58분 나는 2분만 자고 깬다. 깬다. 이렇게 하면 마치 자기가 내가 6시에 깨어날 걸 조정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은 벌써 5시58분에 깨어났어. 벌써.

깨어난 거예요. 깨어난 거니까 6시에 깨어날 것을 의식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왜 5시57분도 아니고 5시56분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58분에 깨어나 가지고 6시에 깨어날 거라는 말을 왜 합니까? 라고 하면 본인은 모르지요. 그건 5시55분에 5시58분에 깨어있어야지. 라고 했다면 그럼 5시 55분에는 당신은 어떤 식으로 왜 깨어났느냐. 그럼 4시26분. 그럼 4시26분은 왜 깨어났느냐. 이렇게 되게 되면 처음부터 그 사람은 어제 밤 9시부터 한잠도 안 잔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렇잖아요. 잔다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깨어나면 그건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겠지요. 잠잔다는 것은 죽음에 일단 넘기운 거예요. 자기의 모든 능력은 능력의 공간에서 벌써 자기는 일단은 은퇴한 겁니다.

그 다음에 처분에 맡기는 겁니다. 4시에 일어날 때, 3시에 일어날 때, 처분에 맡기는 거예요. 여성분들이 갱년기에 걸려가지고 맨날 자다 깨다 잠도 못 이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처분에 맡긴 겁니다.

이렇게 깨어나 보니까 내가 깨어났다. 내가 깨임을 받았다. 이게 오늘 성경 말씀인데. 내가 깨우임을 받았다. 이게 어렵다 참. 성경에는 4장1절에 보면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깨우임, 깨어났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실상은요, 이건 뭐냐 하면 내가 깨우임을 받았다는 말은 같은 말이 뭐냐 하면 천사의 작업장에 내가 초대된 거예요. 초대된 것. 천사의 작업장에. 구경꾼이 아닙니다.

유능한 내가 뭐로 바뀐다고 했어요? 무능함으로 바뀌어야 주의 일이 돼요. 그래서 그 주의 일에 초청된 겁니다. 천사의 작업에 대상이 된 겁니다. 그렇게 작업에 대상이 되어버리면, 천사와 비교해 봅시다. 나는 어떤 거점을 갖고 있어요. 어떤 지점. 그걸 제가 설교시간에 stock이라고. 어떤 거점을 갖고 있다고요. 모든 관계를 할 때, 관계의 중심점을 나라고 일단 잡고 대인관계나 모든 하나님의 관계나 그렇게 거점이 있는데. 초청을 받은 천사한테는 천사에게는 거점이 없어요. 왜냐하면 지시받고 있기 때문에.

거점은 누구냐 하면 하늘에 있는 주님이 거점입니다. 따라서 거점이 없으니까 천사한테 오는 것은 거점의 반대말이 흐름이에요. 흐름인데 무슨 흐름이냐, 힘의 흐름입니다. 힘의 흐름. 거점이 없는 피조물인 천사가 활동하는 것과 이미 거점이 확보되어있다고 보는 인간이 활동하는 것과 활동의 양상은 정 반대가 돼요. 어떤 일을 해도 성과를 내가 측정하고 수시로 측정하는 거예요. 수시로.

잘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 수시로 측정하는데. 천사는 그런 게 없어요. 인정사정도 없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주군이 시키는 대로, 주군, 일본의 자기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죽여! 하면 죽이는 것이고, 처단하라 하면 처단하는 거예요. 그 사무라이처럼 잘 나타난 게 유월절 그날 밤이잖아요. 그날 밤~ 그날 밤, 죽음이 가득한 그날 밤. 정막감의 그날 밤. 죽여! 죽여! 다 죽여! 하는 그날 밤. 유월절 그날 밤같이 그날 밤이 뭐냐, 바로 천사의 사냥터입니다.

인간은 무능해야 돼요. 무능하다는 말은 곧 인간은 죽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에 뭐가 어떤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인간은 죽은 자이어야 한다. 살아있어서는 안 돼!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면 천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천사는 뭡니까. 유월절 그날 밤처럼 사람마다 다 족치는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거기에 스가랴가 그 작업에 초청받은 겁니다.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거점을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걸 4자성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장 깨기’라고 하는 겁니다. 도장 깨기. 도장 깨기 아십니까? 도장 만드는 집에 가가지고 도장 파가지고 전부 다 돌로 깨는 게 도장 깨기가 아니고 중국영화에 나오는 소위 무림의 고수들이 서로 지가 잘났다고 하니까 대장이 너무 많아요. 그렇다면 깊은 산속에서 무술을 연마한 사람이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그 동네 무림의 고수들 도장들 다 찾아가지고 여기 최고 고수 나와! 박살내서 일단은 그 도장 깨지고, 간판 내려! 그 다음에 또 내려놔! 도장 깨기입니다. 이게 천사가 하는 일이에요.

사냥터라 하고, 다른 말로 쉬운 말로 하면 땅의 폐업. 이 세상의 인간의 모든 땅은 폐업된 겁니다. 내가 오다가 버스 타려고 집에서 나와서 동대구 가려고 보니까 아주 색다른 간판이 있었어요. 가게 이름이 ‘폐업가게’에요. 이게 가게이름이에요. 폐업가게. 밑에 유리판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천원, 삼천원, 오천원 이리 써있어요. 그 제일 밑에 12월1일까지 영업합니다. 이리 되어있어요. 보니까 오늘이 몇일인가, 12월 10일이라. 폐업가게라는 이름으로 지금 영업하고 있어요. 아~ 이거 아이러니하지요. 폐업가게 라는 이름으로 영업하고 있다고요. 꼭 성도를 닮았어요. 성도는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지금 살아있어요. 물론 이천원짜리, 삼천원짜리 있지만.

천사가 이 땅에 관여한다는 말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테스트해봤다는 겁니다. 실험해봤다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이 스가랴에서의 메시지가 뭐냐 하면 성전 세워라, 에요. 하나님 내가 없애버린 성전을 다시 세워라. 그 대지 위에. 그 땅 있잖아요. 성전 땅 예루살렘. 거기에 다시 세워라. 그 메시지가 그 지시가 스가랴의 지시거든요. 그러나 그 지시 같으면 굳이 천사가 올 필요 없어요. 사람들과 하나님과 직접 지시 받고 스가랴가 직접 지시 받고, 스가랴하고 하나님하고 직접 통하면 된다고요. 중간에 천사가 개입할 이유는 없는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하나님” 백성들보고 성전 세우라고 할게요. “예, 스가랴 선지자가 학개 선지자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이러면 될 문제지, 스가랴는 완전히 천사 이야기잖아요. 천사가 굳이 왜 개입해야 되는가. 그건 성전을 세우는 방식에 있어서 인간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성전이어야 하나님이 원하는 성전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무능함을. 인간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성전이라면 그럼 인간은 뭐가 되겠어요? 장애물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에 인간은 장애물이 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7시에 일어나가지고 앞에 제가 산책 겸 운동 겸 나가는데. 6차선 도로거든요. 차가 깜박이를 켜놓고는 차가 있는 거예요. 차가 횡단보도 앞에 턱하니 있는 거예요. 보니까 고장 났어요. 아침 되어가지고 신호위반하는 차들이 속도내서 빨간불 꺼지면 통과하려고 시속 막 달려오거든요. 걱정이 살짝 되는 거예요. 이 차는 고장 났지요. 남자, 여자는 핸드폰 들고 밖에 나와 가지고 고장신고하려고 나오고 있어요. 나는 산으로 가는데 건넜어요. 건너려고 하는데 걱정되는 거예요. 야, 이거 방해물 된다. 라고 하면서 언뜻 생각한 것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내가 주님의 방해물이다.’ 내가 주님의 장애물이라는 사실.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냥 오실 필요도 없고 그냥 하늘에서 복주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는 방법은 “너희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장애물이라는 것을 인정 안하지. 그러나 그건 니가 니를 몰라서 그렇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앞에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뜻이 장애물과 결합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걸림돌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귀 들렸기 때문에 주님도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우리의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거든요. 로마서8장3절에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과연 인간들은 장애물이라. 완전히 보고도 못 보는 소경들이라. 완전히 장애인이라서. 십자가 지고 가는 망가지고 처참하게 망가진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로마서8장3절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장3절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미끄럼틀을 타고 이 땅에 내려오는데 그게 어떻게 내려오느냐, 망가지는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기피하는, 어떤 인간도 나는 저렇게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어떤 인간도 그 주님을 본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절로 들지 않게 만드는 그 모습으로 오셨다고요. 이게 니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이게 네 모습이야. 그런데 우리는 피해버립니다. 나와 상관없다고. 근사하게 오셔서 나로 하여금 예수 믿는 보람을 제공해달라는 겁니다. 예수 믿는 보람을.

모르지요. 뭐. 오늘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근사하고 싶어서 참석 안한 게 아니고. 주께서의 천사의 초청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요일날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르는 이유는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는 이유는 지적하고 책망하는 법이 없어서 그런데 그 법을 줘도 치워버리는 이유가 기본적으로 자기는 그다지 잘못이 없고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밥 먹고 사는 그만한 권한과 자격은 이건 기본적으로 나한테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나는 이런 수준으로 그냥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럼 이런 사람은 유능한 자에요? 무능한 자입니까? 유능하게 되지요.

자기 유능함을 못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다 튕겨져 나오는 거예요. 그 장애물에. 하나님이 오셔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뭐 제자들뿐만 아니고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전부다 예수님을 튕겨 내버린 거예요. 튕겨내니까 예수님께서는 튕겨서 십자가 죽으신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저희는 조치를 잘했다고 봤거든요. 죽었는데 완전 죽었어요. 숨을 거뒀어요. 완전히 뻗어버렸다 말이죠. 십자가에서.

그런데 사흘 뒤에 일어나버렸다 말이지요. 사흘 뒤에. 이거 뭐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말이죠. 귀신입니까? 아니에요? 천사의 기능을 발휘하신 거예요. 천사가 했던 전에 구약 때 스가랴 때 천사가 한 기능을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천사는 죽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그리고 피조세계에 있는 것이지, 천사는 죽음이 없거든요. 왜냐, 천사는 거점이 아니고 실체가 아니고 흐름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천사는 흐름이기 때문에. 주님을 죽일 수가 없어요. 하늘에 있는 실체가 땅에서는 흐름으로, 성령이란 이름의 흐름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건드리는 것은 주님의 실체 그 자체를 건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실체의 역할은 누가 하느냐, 바로 스가랴가 해야지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작업장에 초청받은 거예요. 흐름은 누가 하느냐, 천사가 하는 거예요. 힘이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까지 이렇게 한 것을 다시 연장해서 하게 되면 이 땅은 인간들의 세계지요. 인간들의 세계. 앞에 뭐 하나 붙이면 더 낫겠지요. 유능하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의 세계지요. 각자 유능하고 착한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에스라5장1절~3절,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 그 때에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가 다 나아와 저희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이렇게 되어있지요.

분명히 성전 건축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이방민족인 바사 페르사 나라를 성전 건축을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시작한 일이잖아요. 그럼 수월하게 아무 장애물 없이 이루어지리라고 인간들은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여기 방해자가 등장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자기 백성이스라엘 선택받은 자기의 언약적 백성을 건져라. 그것만 있다면 예, 건지겠습니다. 하고 건지고 가면 되거든요. “너, 일어나. 오늘 집에 가자.” 이러면 되는데 말로 해도 되는데 왜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되고 왜 십자가에 죽어야 됩니까?

하나님의 모든 하나님의 일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반드시 장애요소를 경유해야 되고 경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것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능한 인간들은 스가랴에 의하면 천국에 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능하다는 것은 자아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자아가 살아있는 인간은 두 번 다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 왜, 그 자아는 선악과로 무장되어있기 때문에.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성전 부서지고 다시 성전 짓는 그 작업 과정 속에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이 총독이 그냥 동네 애들이 반대하는 게 아니고 총독이 반대하니까 공사가 보류되지요. 보류되니까 그 당시에 지시받은 그 돌아온 유다백성들이 “뭐 안 되는데 안하지 뭐!” 안된다는데 못하지 뭐~ 하고 포기한 거예요.

그런데 학개, 스가랴가 뭐합니까? 빨리 성전 재건하라고 수리하라고 독촉을 하지요. 그런데 백성들은 “하지 말라는 데요.” 이러고 있다 말이죠. 마치 오늘날 십자가 피를 받아들이고 천국오세요. 이렇게 하니까 “우리 남편이 반대해서 교회가지 말라하는데요.” 그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베드로야, 니가 나를 따라오겠느냐.” “따라가겠습니다.” 해놓고는 잘 따라가면 되는데 그 소녀 하나가 “아저씨, 내가 아는데 체포된 예수하고 한패잖아요.” 하니까 겁이 나가지고 경상도 말로 “아이다. 뭐라카노.” 이리 된 거예요. “야봐라, 사람잡겠데이. 내가 언제 저 사람하고 한패였나. 나 저 사람하고 모른다카이.” 이리 된 거예요. 경상도말로 하면.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얼마나 원망했겠어요. 주님 체포해가지고 내 자존심 다 상했습니다. 이렇게 원망할 게 아니냐 말이죠. 곱게 데리고 몰래 우리끼리 기도원을 통하던지 그냥 가면 되는데 왜 십자가 달려가지고 내 입장 난처하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니가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니가 인식하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그 장애물이 우리 안에 있는 이유가 우리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마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마귀는 천국에 갈 수 없잖아요.

천국은요, 마귀하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신 쫓아낼 때, 귀신이 알아보고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당신하고 우리하고 상관없잖아요. 이미 일 다 끝났잖아요.” 라고 하는 거예요. “당신과 나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왜 우리에게 찾아왔습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전화소리로 강의 다시 해야 됩니다.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왜냐, 중요한 못 들은 부분이 있어가지고. 못들은 부분 다시 해야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 안 졌으면 베드로 입장이 난처하지 않아요. 그냥 누가 봐도 수제자다워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데 까지 본인이 그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베드로의 위신과 체면 다 날아갔습니다. 베드로의 자아가 날아간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면, 베드로의 과거의 인식. 지금까지 나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받들어오던 그 과거의 인식이 있잖아요. 인식이 얼마나 주님 앞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그걸 알면서도 자력으로 그 장애를 돌파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돌파 못하지요. 못했지요.

이건 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자아를 버린다? 못 버린다? 못 버리지요. 내가 내 힘으로 전화 온 걸 어떻게 중간에 끊습니까. 못 끊는 거예요. 주께서 내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잖아요. 이리 되는 겁니다. 주께서. 그러면 주님께서 하실 일이 뭡니까. “베드로야, 너는 거점을 갖고 있다. 실체를 갖고 있다.” 너는 뭐냐, 실체를 파괴하고, 폐쇄시켜 버리고 뭐로 바꿔야 돼요? 베드로를 흐름으로 바꿔야 되지요.

흐름으로 바꾸기 위해서 누가 오느냐 하면 성령이 오는 겁니다. 성령. 성령이 오는 거예요. 내가 보관했던 자아가 깨어질 때 본인이 굉장히 아프지요. 굉장히 아플 거 아닙니까. 지금의 나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요. 눈치코치 보면서 소리 듣고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내가 이만큼 됐잖아요. 이게 깨어질 때 아프고 슬프겠어요. 그 슬픔을 성령이 보상해 주는 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니가 지금 나와 함께 두렵다는 것은 깨어지는 것이 겁나서 그런 거예요. 겁나서. 깨어지는 게 겁나서. 깨어지니 겁났다는 말은 그동안 깨어지면 안 돼! 라는 목표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자기 관리해온 거예요. 조심스럽게. 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것은 피해버린 거예요. 복음이고, 예수고, 십자가고 간에 나한테 손해는 다 피해버린 거예요. 주께서 강제로 데리고 왔으니까 온 것이지. 전부 다 통밥 굴리면서 이익일까, 손해일까. 복음 듣는 것과 내일하는 게 어느 것이 이익일까, 손해일까를 우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계산합니다.

저는 그것을 좀 비꼬는 말로 이야기합니다. 그걸 나는 기도라고 해요. 왜냐, 기도고 호흡이니까. 기도는 어떤 호흡이 나오느냐 하면 죄가 나오는 호흡이지요. 평소에 하는 짓거리가 기도라는 형식으로 형식만 바꿨을 뿐이지 기도할 때마다 무슨 소리가 나느냐 하면 마귀의 호흡이 괴물이 숨 쉬는 호흡이 막 나와요. 내 입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입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교회의 교인들이나 여러분들이나 아예 기도를 안 하잖아요. 입 냄새 날까봐서. 더러운 입 냄새, 괴물의 썩은 내 입 냄새 날까봐서 입을 다물어요. 음~~
에스라5장1절에서 5절에 보면 그 에스라 5장 그 다음에 방해해가지고 하니까 6절에 보면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서 이렇게 되어있지요. 조서를 내려서 다시 후원해 줍니다. 그러니 이게 방해하는 총독의 방해 없이 순하게 세상만사가 왜 자꾸 매듭이 있어요. 왜, 순하게 죽죽 안 내려갑니까. 복음을 안다. 앞으로 만사형통. 얼마나 간단한 공식입니까. 왜 그렇게 안 해요? 왜 덜커덕 들리게 매듭도 촘촘이라, 걸리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바로 복음의 장애요소라 하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겁니다.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주의 일에 방해해요. 내가 주의 원수가 되고. 마귀로부터 사주 받는 마귀의 졸다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지가 마귀에서 벗어나서 구원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에 무능하게 만들지요. 자, 무능한 자는 곧 뭐라고요? 죽은 자지요. 죽은 자에요.

죽은 자라 하는 것은 거점이 깨진 거예요. 거점이 깨진 자는 연락 거점 중심이 없지요. 그럼 전화해도 안 받는 거예요. 일종의 흐름이니까. 복음은 흐름이니까. 이게 바로 지금 스가랴가 천사한테 깨움을 당할 때 그 작업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무슨 세상이냐, 누구 세계냐, 인간의 세계지요. 이 인간의 세계를 이렇게 하면 인간의 평면이다.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인간의 평면. 인간의 평면이니까 인간들은 평면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도로 표시하지요. 지도.

지도해가지고 자기 지점들을 나는 여기 있고, 너는 여기 있고 하지요. 지난 강남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브라함이 이쪽에서 이쪽으로 가잖아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터키를 떠나서 헤브론 다시 말해서 베들레헴 보다 남쪽이에요. 예루살렘 남쪽이에요. 사해 근처 남쪽에 왔다 말이죠. 그러면 그건 이동경로가 나오지요. 수사관한테 하면 가는 길 CCTV 다 깝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가는 경로가 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 어디 갔습니까? 가는 경로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부터 해가지고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건 나그네 길이라 했고, 정착지가 이 땅에는 있다? 없다? 정착지가 없는 거예요. 이 땅 같으면 내비게이션 해가지고 갈 수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는데 어디를 갔습니까. 하늘에 있는 본향에 갔다 했지요. 히브리서11장에 본향에 갔지요.

본향 갈 때 어떻게 갔지요? 이게 관건이에요. 본향 갈 때 어떻게 갔느냐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알려드려요? 궁금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늘이 내려앉은 거예요. 하늘이 드리워진 거예요. 이 땅에다가. 아브라함이 팔짝 팔짝 뛰어서 하늘나라 간 게 아니고 하늘나라가 드리워진 겁니다. 하늘나라가 드리워지니까 아브라함 가는 길에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가 서로 충돌되니까 이것이 아브라함 자체를 장애물로 여기면서 장애물로 제시하고 장애물을 주고 그 장애물이 극복되는데 있어서의 어떤 낯선 힘이 개입되는데 그 낯선 힘이 오늘 본문 스가랴에서는 뭐냐 천사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천사2명이 아브라함 만나러 온 거예요.

니 노선은 땅의 노선이 아니고, 육의 노선이 아니고 약속의 노선에 해당된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스가랴에 있어서의 천사와 만난 스가랴에 있어서는 뭐냐 이 땅은 인간의 평면 대신에 뭐냐 하면 천사의 평면. 천사의 작업장이 되는 겁니다. 천사가 이 땅에서 어떤 힘으로 흐름들을 유발시키고 야기 시키는가 그걸 추적해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식. 방식들이 다 나오지요.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이 천사가 개입된 성경 해석은 그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놓고는 뭐였지? 어떻게 해석한다고? 뭐 어떻게요. 준비 안됐는데 확 들어왔지요. 이게 뭐냐 하면 장애물로 들통 내게 하고 장애물로 하여금 장애물이 스스로 장애를 통과 없는 무능한 자로 만들고 그 무능함을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같이 통과했는가, 희생이지요. 통과해서 기어이 천사의 일에 납득이 되도록 아! 천사의 노력으로 우리가 성전 짓는가, 이건 사람의 뜻이 아니고 인간의 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이 된다는 의미를 간파가 되는 겁니다. 그런 눈이 열리는 거예요. 천사가 보는 안목으로 땅의 평면을 바라보게 돼요.

그럼 소속은 뭐냐, 천사가 속한 하늘나라의 소속이면서도 내가 하는 모든 밥 먹고 집에 지내고 살림하고 일하고 모든 것은 이건 내가 실체가 되고, 거점이 되어서 스톡이 Stock 되어서 하는 일이 아니고 이것은 이제는 천사가 아니지요. 신약이니까. 성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우리가 흐름이 되는 겁니다. 마치 천사와 같이. 천사가 찾아와서 사바 사바~ 천사와 같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강남강의 때 어려운 이야기했잖아요. 물질과 물질. 명사를 보지 마시고 물질과 물질 사이 새로운 의미를 주는 동사를 보라고요. 그래서 제가 언급한 재미난 노래가 꼬마인형이었지요. 꼬마인형 보면 나라는 여자 있고, 떠나버린 남자있고. 두 물질입니다. 명사에요. 그 사이에 빗방울 떨어지는 거 있었고, 헤아렸고, 그 다음에 명사가 아닌 걸 주지요. 남자가. 다시 올게. 라는 약속을 줬고. 그 약속을 기다리면서 어떤 약속에 의해서 동작을 보여주는데, 동작이 뭐냐 꼬마인형을 안고 마치 그 남자가 여기 현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꼬마인형을 안고 또 다른 짓을 하고 그 다른 짓이 뭐냐 하면 모래성을 쌓고 또 쌓고.

쌓고 또 쌓는 행동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나 잘났다. 나 유능하다가 아니고 나의 모든 아픔을 보상하는 그 약속 속에 있는 사랑으로서 그게 극복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랑에 반응을 나타내는 행동들을 그 여성이 보여주는 겁니다. 첫 째 시간 마치고 숙제 낼 거예요. 숙제가 뭐냐 하면 장 보윤이라는 여자가 불렀던 꼬마인형. 요거 듣기. 그게 가사가 나와 있어요. 가사를 가만히 보세요. 딴 거 보지 말고 동사, 명사 그것만 구분해서 보면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있어버리면 명사가 되거든요. 나라 하는 지시 대명사가 되거든요. 명사가 된다고요. 명사 말고. 동사로 해체되어야 돼요.

힘은 나로 하여금 명사를 동사로 해체하는 흐름으로 해체하는 힘이 우리에게 느껴질 때 이미 그 사람은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이 땅이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이게 천사의 평면이라면 아까 목사님 말씀은 그 실체, 거점은 예수님에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이 천사의 평면이라면, 천사의 평면이 인간의 평면을 지금 누르고 심판하고 있지만. 이 세상 전부 다 장애물이니까. 마귀의 세계니까.

그럼 여기의 거점은 뭐냐, 거점이 그게 스가랴4장에 나옵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스가랴는 이걸 봤지만, 스가랴 말고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은 순금 등대를 봅니까? 못 봅니까? 못 보지요. 왜, 스가랴는 천사의 평면에, 천사의 작업장에 와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이 사울에서 사도바울 될 때에 예수님 만났지요. 옆에 있던 사람은 예수님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못 보지요. 못 보는 거예요. 소리만 들었지요. 예수님은 본 사람은 사도바울 본인밖에 없어요. 실체로서 보는 게 아닙니다. 실체로서 본 것은 사울이 나중에 장님 되었어요. 니가 실체로서 본 것은 이건 취소해라. 왜, 내가 보게 되면 이건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장애물을 제거한 상태는 주님을 보는 게 아니라 주님의 힘을 느끼지요. 예수님을 보는 게 아니고. 힘을 느끼는 거예요. 장애물이 성령 안에서 제거된 상태에서 주님을 느끼는 겁니다. 듣는 것을 느끼고, 보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맡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 실체가 있다고 했지요. 그 실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에 보면 순금 등대. 순금 등대가 실체에요. 순금 등대.

순금 등대는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여기에 가지가 일곱 개. 일곱 개가 이렇게 되어있어요. 감람나무가 있는데. 감람나무 가지에서 여기 중간에 기름을 저장하는 곳이에요. 기름을 저장하는 곳이 있고, 저장해서 여기 잔 하나마다 전부 다 연결 관이 있어가지고 영원토록 기름이 끊어지지 않고 감람나무니까 기름 빠지는 나무거든요. 거기서 기름이 와가지고 잔에서 불꽃이 계속 피워지는 그 일곱 등대를 이게 거점으로서 실체로서 스가랴에게 보였습니다. 10분 쉽시다. 숙제하세요.

안양20201210b슥4장1절(장애물)-이 근호 목사

천사의 평면이 땅의 평면을 덮었을 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 그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변화산에 있을 때에 예수님이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같이 나타났잖아요. 그 때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같이 모시겠습니다. 해서 인간 쪽에서 하늘나라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베드로가 오해한 거예요. 그런데 잠시 보여주고 날아가 버릴 때에 그 때 제자들은 뭘 쳐다봤느냐 하면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말이에요. 하늘의 음성이 들리니까. 똑같은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을 올라가니까 천사가 있다가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말이에요. 스가랴에 보면 이미 천사가 이 땅을 접수했잖아요. 이 땅은 누구의 작업장이다? 천사의 작업장이에요.

초월적인 것이 극히 육적인 모양새로 왔다는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는 활동의 연속 연장이에요. 제가 강의 시간에 대중가요 트로트는 클래식도 아니고 클래식은 옛날식 대중가요고요. 왜 꼬마인형이라는 그 가요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그 가요를 작곡한 사람이나 작사한 사람이나 노래 부르는 사람 전부 다 우리 인간들 기분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들 기분 좋으라고. 그럼 인간들 기분 좋으면 인간 자체가 뭐냐, 실체가 되고 거점이 되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인간 자체가 실체가 되고 거점이 되고 실체와 거점이 된다면 모든 나오는 능력이나 힘들은 어디로 도로 돌아옵니까. 나의 즐거움으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나의 즐거움으로. 물론 내 안에는 마귀가 기다리고 있고. 마귀가 그렇게 우리에게 유도하고 부리고 살았지요. 그러나 이것은 곧 뭐냐 하면 내가 능력 있다는 말은 내가 살아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내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십자가를 몰라요. 십자가라는 지식, 십자가라는 방법, 그런 건 다 알아요. 그러나 십자가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돼요. 왜, 우리 속에 마귀가 있으면 마귀가 예수님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과 나와 상관없다고 했지요. 누가복음4장에서. 당신과 나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상관있으려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산자가 되면 안 되고 어떻게 되어야 돼요? 죽은 자가 되어야 돼요. 죽은 자라 하는 것은 무능한 자가 되고, 무능하다는 말은 내가 이 세상에 거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거점은 어디서 찾는가, 어디 헤브론에서 찾을까요. 아니면 베들레헴에서 찾을까요. 그건 옛날 거리를 돌아다니는 아브라함의 나그네 때고 지금은 신약 시대는 뭐냐, 위에서 어떻게 한다? 위에서 그냥 내려오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베드로가 오해한 것처럼 여기가 좋사오니, 본인이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을 안 해서 그래요. 우리 좋은 게 좋다는 겁니다. 내가 보는 대로 보인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니가 보는 것은 전부다 장애고, 니가 듣는 것도 장애고, 니가 냄새 맡는 것도 장애고, 니가 씹고, 걷고,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도 나한테는 그 하나님의 뜻을 막아서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장애물로. 그러니까 천사가 와서 스가랴를 깨워야 되지요. 깨워야 되는 거예요. 역사에서 만드는 성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100층, 180층 짓는데 이거 뭐 성전하나 못 지을까요. 이 성전을 성전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럼 성전은 뭐냐, 순금 등대로부터 확장되는 또는 순금 등대를 모실만한 성전. 이 순금 등대가 천사의 평면, 천사의 작업장이라면 성전은 천사의 작업장 안에서 견딜 수 있는 감당될 수 있는 성전이 새로 등장해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고, 그게 오늘날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대중가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에요. 이 대중가요를 받아들일 때 전에는 우리의 즐거움이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내 즐거움 자체가 주님의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그러한 대중가요. 그러한 꼬마인형. 그 가사를 어떻게 분석하느냐, 거기서 바로 실체와 실체를 연결시키는 동사. 동사 그 흐름을 파악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본인이 본인을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당히 마귀적이지만, 그 꼬마인형 가사 초반에 보면 무슨 밤이라 했습니까?

<꼬마인형> 가사.
그 날 밤 황홀한 시간을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당신을 알고 말았죠.
말없이 흐르던 눈물을
난 감출 수가 없었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하나둘 세고 있었죠.
늦어도 그 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그날 밤 황홀한 시간, 이것은 본인의 이성과 본인의 이성을 넘어섰지요. 그러면 갑자기 그 남자 앞에서 자기는 실체로 느껴집니까? 아니면 그 남자가 내 실체를 대신하는 실체로 등장합니까? 그이만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요. 그냥 합치면 되니까. 이걸 세상에서는 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날 어떤 분을 만났는데 성경 이야기하면서 했는데 그 분이 나름대로 성경공부하면서 제일 어려운 게 아가서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예요. 아가서가. 아무리 봐도 아가서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 이해가 안 되느냐, 본인이 장애물인 것을 모르고 본인이 실체로 다가서서 아가서를 보니까 그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이 연애하는 이야기가 왜 성경에 나와야 하면 그리고 그 성경해석에서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찾을 수가 있는지를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서로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아름답다고 하는 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아는 십자가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는 말은 솔직히 말해서 은혜가 안 다는 뜻이에요. 뭘 알아야 은혜가 되지요. 그걸 보고 뭐가 은혜가 되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요. 은혜란 책망하는 것이고, 나를 질책하는 게 은혜거든요.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나를 공격하는 게 은혜에요. 내 중심의 세계는 천국이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그러면 내 중심 자체가 주님의 나라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장애물이 돼요. 장애물이.

6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차가 서있는 거예요. 뒤에서 박아버리면 그 차도 날아가지만 뒤차도 억울하게 죽는 수가 있어요. 서 있으면. 속도120을 막 달리는데 신호보고 오는데 뭐가 서있다. 브레이크 해도 소용없지요. 박아야지요. 우리가 주의 일에 고장 난 채로 박고 있으면서 우리는 주님이 나한테 박혔다는 생각을 못하고 상처받은 생각을 못하고 자기가 거기에 고정된 중심거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성경에서는 좋은 것은 다 뽑아요.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기도하면 은혜 받습니까. 좋은 건 자기에게 다 모으는 거예요. 자기에게. 그 자기를 가위표 없앨 생각을 안 해요.

내 좋아라고 예수 믿고, 내 좋아라고 성경 본다는 뜻이에요. 그래도 지금도 자기 일에 바빠. 지금 무지 무지 바빠. 엄청 바빠. 순금 등대는 보여 지는 것이 아니고 스가랴에서는 보여줬잖아요. 보여 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감각되어지는 겁니다. 감각되어진다는 것은 아까 신호가 주는 충돌이겠지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 주님의 힘이 감각으로 오게 되면 나한테 와서 부딪힘이 발생합니다. 나는 딱딱한 장애물이니까. 어제 은혜 받아도 오늘 되면 또 딱딱해져요. 딱딱한 장애물에 부딪힘이 돼요. 그 부딪힘 속에서 왜 천사가 나를 호명했고, 왜 천사가 나를 사용하는 이유를 우리는 고마운 마음으로 기꺼이 장애물로 우리는 자인하게 됩니다.

제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자인하게 되지요. 변함이 없는 것은 순금 등대에요. 그 순금 등대에 끊임없이 채워지는 것은 두 감람나무라 했지요. 자, 두 감람나무가 신약에서 어떻게 설명되는지 요한계시록11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천사의 평면입니다. 요한계시록11장에 보게 되면 11장4절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두 감람나무지요. 두 감람나무.

여기 스가랴4장에 우리가 보는 본문에서는 순금 등대가 몇 개입니까? 달랑 한 개지요. 등잔은 일곱 개있지만, 순금 등대는 하나지요. 여기는 두 감람나무와 촛대가 두 개 나와요. 이건 뭐냐 하면 스가랴에서는 천사가 보여주는 것은 순금 등대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라고 초대받은 사람은 누굽니까. 스가랴 선지자 아닙니까. 이걸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순금 등대가 되게 되면 모든 성도는 예수님을 대체하는, 예수님을 대체한다는 것보다도 참, 이런 단어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국면. 시추에이션. 정황. 그 때 그 때 바뀌는 국면. 장면들이지요. 우리의 일상이 누구의 장면이라고요? 예수님의 활동하는 장면들이라 말이지요. 우리의 활동이. 집에서나 여기서나 어디에 가더라도 시장에 가더라도 우리의 모든 움직임은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고 주께서 힘 주셔서 움직이는 장면들이에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어있지요.

이건 우리뿐만 아니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 세계가 다 그래요. 하늘의 것이 땅에 드리워졌잖아요. 천사의 평면이 지상의 평면으로 오잖아요. 그게 드리워진 거죠. 드리워지게 되면 그동안 하늘을 차지했던 별들도 어떻게 되겠어요? 같이 동반해서 별도 떨어지고, 달도 떨어지고, 해도 떨어지고,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일을 하늘을 보고 쳐다보지 말고 시시때때로 돌아가는 거 보세요. 추미애하고 윤석열 보란 말이죠. 그게 하늘의 뜻이에요. 그게 너무 거창합니까. 국가라는 것이 너무 거창하면 사적으로 아까 꼬마인형. 어떤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즐기는데 그만 헤어졌다. 그 다음에 뭘 안고. 꼬마인형을 안잖아요. 모래성 쌓으면서. 그런 경험들이 없는 모양인가.

꼬마인형이 떠난 남자의 대행이거든요. 그걸 사랑이라 한다 말이죠. 사랑. 성경에서 그 사랑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아가 해체된 거예요. 단순한 연결에서 결합해서 해체. 결합해서 해체되는 거죠. 천사와 연결되고 천사일에 결합되면서 그 천사가 나로 하여금 결국은 니는 무능하다고 되는 겁니다. 이건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 너 대신 하신 예수님이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체된 입장에서 예수님의 국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정황을 그 때 그 때 보여주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감람나무를 아까 그림을 잠시 그렸는데 등잔이 일곱 개가 있는데 여기에 기름이 필요하잖아요. 불이 붙으려면. 일곱 관이 있어가지고 스가랴4장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약간의 저장소가 있고 여기에 두 감람나무가 붓는 거예요. 그러면 부을 때 이 감람나무가 요한계시록11장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두 증인이지요. 두 선지자지요. 선지자가 붓는다는 것은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피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가 피 흘리기 위해서 자살하는 그런 거 아닙니다.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 선지자가 복음을 전하니까 여기에 12장 7절에 보면 그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있는데 그 짐승이 노림수가 있지요. 두 증인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전쟁을 벌여 저희를 이기고 두 증인을 이기고 그리고 두 증인을 죽이지요. 죽일 때 그 시체가 어디 있습니까? 큰 성 길에 있지요.

그러니까 선지자, 성도가 죽는 시체까지라도 주님께서는 딸딸 끌어서 다 활용을 하는 거예요. 왜, 사나 죽으나 어차피 예수님의 국면이니까. 예수님이 일하시는 증거들이니까 그래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는 완전히 빠지는 거예요. 내 주체가 있어버리면 십자가는 보이지를 않아요. 내가 해체되지 않으면 십자가가 내 앞에 등장하지 않는다니까요. 십자가 없어요.

그냥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믿는 십자가만 뇌리에 지식으로만 있을 뿐이지요. 그 지식이 있어봤자 그건 소용없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3년 따라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천사가 성령께서 이렇게 다루신다고 보시면 제일 쉬워요.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남자학교에 가면 교무실에 꼭 말썽꾸러기 쉬는 시간에 담배피우고 점심시간에 담배 피워서 걸린 애들 있잖아요. 피우지 말라 했는데 한 번 경고해도 안 되고 계속 피우는 애들 그 학생과장이 빨리 점심 먹고 학생과장이 하는 게 화장실 돌아다니고 담배피우는 애들 적발하는 일을 하잖아요. 작대기 이만한 거 들고 죽 하면 몇 놈씩 걸려온다. 그러면 교무실에 꿇어앉아 있을 때에 그 때 학생과장은 애들 나무란다고 힘들어가지고 팔뚝을 걷어요. 토시 이리 하고. 선생님들 토시 한다고요. 분필 묻지 말라고. 팔뚝 걷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일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자기 일에. 꿇어앉아 있으면 다른 선생님들이 어떻게 봅니까. 그 학생선생님한테.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이러지요.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니 또 끌려왔어!” 나무라면서 “아이고, 선생님 수고 많으십니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우리가 말썽꾸러기에요. “손 들고 있어!” 이게 천사의 국면, 천사의 세계에요. 천사가 작업하는 작업장이에요. 우리는 맨날 내 능력을 자랑합니다. 내 지식을 자랑하고, 성경공부를 자랑하지요. 그거 담배피운 거예요. 맨날 말썽부리는 거예요. 무능한데, 무능하기가 싫은 거예요. 유능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설교를 들어서 위로 받고 싶고. 또 어떤 남자 선생님은 가다가 쥐어박아요. “또 왔어! 내가 피우지 말라 했지.” 또 쥐어박잖아요.

이 두 감람나무라서 스가랴는 신약에 와서 온전히 완성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거든요. 창세기28장12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하늘에 닿았지요. 드디어 하늘과 땅이 연결이 되는 지점입니다. 연결되는 지점에 땅에 지점은 거점은 야곱이 되고요, 야곱의 돌베개가 되고 그 위의 지점에는 사닥다리의 끝 지점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 위에 누가 그렇게 분주해요?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지요. 그럼 야곱은 뭐예요? 야곱은 무능하지요. 무능한데 야곱의 복 받은 것은 바로 그 언약의 작업에 천사와 성령의 작업에 주님의 작업에 연계되어 있다는 게 행운이지요.

제가 어제 수요설교에서 책망 받을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이라 했습니다. 책망을 받아들일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이에요. 이게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벼락을 맞아야 돼요. 벼락을. 벼락을 맞아야 내 속이 시커멓다는 것이 벼락을 맞아 옷이고 뭐고 다 타들어가야 돼요. 내장도 이빨이고 뭐 다 시커머야 돼요. 내가 시커먼스. 시커멓게 되어야 돼요. 그래야 뭐 또 해드릴까요. 이런 소리 안하지요. 시커먼 게 뭘 해드려요. 시커먼 게. 연탄재가, 말썽꾸러기가.

그래서 성령께서 천사가 하는 일을 그대로 하기 때문에. 천사는 율법대로 했고, 성령은 율법의 완성을 하기 때문에. 맨날 하는 게 뭐냐 채굴이에요. 발굴입니다. 후비고 발굴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너 편익을 위해서 살거냐고. 계속 발굴하는 거예요. 니 편익. 너가 너 자아를 언제까지 방어할래. 언제까지 방어할래.

다시 한 번 복습합시다. 그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에서 밀려온 거고 그 과거에 누적된 것은 자기의 가치지요. 유능함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제가 쓸모없다는 게 제일 싫어하는데. 그걸 또 복음에서 쓸모없다고 하니까 또 쓸모없을 본인을 또 만들어내요. 나는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본인이 부족하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별이 떨어지듯이 별이 떨어져야 돼요. 이게. 떨어져서 박살나야 돼요. 박살나야 돼. 이 땅에서.

그래서 요한계시록11장 그 감람나무 두 사람. 우리 보기에는 얼마나 성령 받은 선지자 아닙니까. 그러나 이 땅에서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어떤 예수님의 국면을 남긴다고요? 십자가의 국면을 시추에이션을 남기지요. 죽었다 이 말이지요. 누가 이겼어요? 적들이 이겼어요. 적은 어디서 올라온 적입니까? 무저갱에서 갇혀 있는 적들을 하나님께서 잠시 풀어준 거예요. 풀어줘서 무저갱에 갇혀있는 옥에서 풀어 나와서 뭐를 뭅니까? 그 세파트가. 도사견이 누굴 물어요? 복음 전하는 사람을 물잖아요. 물 때 그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지요.

성도가 이긴 게 아니에요. 누가 이겼어요? 마귀가 이긴 거예요. 그럼 성도는 진겁니까. 아니지요. 이게 요한계시록11장에 보니까 이게 11장 10절에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그러고 난 뒤에 저희가 구름을 타고 어디에 올라갔습니까? 하늘 위에 올라갔지요. 영혼이 올라갔다. 육체는 남았는데 영혼이 올라갔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돼요. 자아가 없는 이상은 영혼도 육체도 의미 없어요.

원래 본인이 있던 자리로 간 거예요. 원래. 땅에서는 죽었고 주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원래 주 안으로, 주 안에 있는 자가 주 안에 있는 자로 티를 낸 겁니다. 그래서 땅의 입장에서 볼 때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걸로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지요. 원래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잖아요. 구름 타고 올라갈 때 그 당시 제자들 입장에서는 올라간 게 되지만, 천사들 입장에서는 왜 쳐다보느냐, 주께서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다는데 왜 자꾸 예수님이 우리 버리고 딴 데 갔다고 왜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느냐를 지금 천사가 사도행전1장에서 제자들을 꾸짖는 거예요.

함께 있어. 기도해봐. 약속 주어질 거야. 약속이 오게 되면 떠난 적이 없고 비로소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게 바로 오순절 성령이 오심입니다.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한 패밀리인데 떠나길 어딜 떠납니까. 아버지가 이 방에 있다가 저 방에 가면 떠나는 겁니까. 아버지! 가시면 안 되옵나이다. 이렇게 합니까. “야, 야, 나 좀 오줌 좀 누자.” “아니 되옵니다. 내 눈에 보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봐서는 안 되고 주님을 눈으로 보려하지 말고, 이렇게 힘을 느끼는 거예요. 화장실 가도 그 힘을 느끼는 거예요.

물 내리는 소리 직~~, 아! 계시는구나. 느끼는 겁니다. 기침하면, 계시는구나! 늘 우리는 주님의 기침소리를 늘 듣는 거예요. 꼬마인형을 통해서도. 제가 광주강의 할 때, 김정수가 불렀던 <당신>이라는 노래 가사를 했다고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그 가사를 쓰고 중간에 어떻게 했습니까. 볼펜으로 구멍 뚫어버렸지요. 그 가사 내용이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구구절절이 남편이 아내를 보는데 너무 야위었던 거예요. 그래서 잠자는 아내의 그 야윈 모습을 보면서 너무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가사를 써내려갑니다.

아무것도 없는 나만 믿고 시집와가지고 내 니 고생만 시켰구나! 내가 맹세하리라. 이제 맹세 나와요. 맹세하리라. 나 니한테 잘해줄게. 나는 니한테 그렇게 고생시켰는데 니는 이 세월동안 원망하지 않았는데 이제 맹세하리라. 남은여생을 너를 위해서 살래. 라고 할 때, 그 가사를 구멍을 뚫었지요. 찢어버린 거죠. 왜냐하면 그게 뭐냐 거점이에요. 이 땅이에요. 인간들의 세계가 그게 한계입니다. 예수 믿고 나 잘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런 자기 자신에게 구멍을 뚫어야 돼요. 잠 잘 때 남편이 그런 이야기를 자기 후회하고 못해준 거 후회하면서 앞으로 잘해줄게. 라는 것을 아내가 자는 척하면서 다 들었다 칩시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여보, 이제 당신 정신 차렸군요. 이렇게 하니까 남편이 “내가 그럴 줄 알았지롱” 이리 나온다면 “미쳤냐! 내가 널 위해서 살아? 기대하지 마!” 이리 나온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꾸 동정하고 불쌍히 여겨버리면 내가 하나의 실체가 되고 거점이 돼서 모든 그 복음적 의미가 나에게 쏠리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11장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도 예수님처럼 순교하게 되면 구원받아야지.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고요. 이게 말이 돼요? 요한계시록11장 보고 나도 이 땅에서 복음 강하게 외치다가 불교신자가 와가지고 나쁜 놈이 와가지고 나를 잡아가면 나는 기꺼이 잡히고 순교 당하겠다. 주여! 파키스탄 가겠습니다. 아프카니스탄, 스탄, 스탄, 길기스탄, 이슬람교에 가겠습니다. 가가지고 거기서 순교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이스라엘 나라 자살테러 있잖아요. IS테러 그거하고 다를 게 없잖아요. 똑같아요. 그게 뭡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실체가 있어버리면 눈으로 보고, 듣고, 이거에 대해서 굉장히 지저분해요. 우리는 보고 듣는 것, 전부 다 이건 장애물이에요. 내가 보는 것 때문에 주님이 안 보인다니까요. 듣는 것 때문에 주님이 안 들리고. 보는 주체, 듣는 주체, 걷는 주체, 말하는 주체, 전부 다 내가 주체가 되어버리면 주님은 그 자리에 안 보여요. 주께서 우리를 천사로 할 때는 우리의 해체입니다. 왜, 해체할 때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원래부터 무능한 자니까요.

자, 이제 어려운 거 해봅시다. 지금도 조금 어렵습니다마는 해봅시다. 에스겔1장10절,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얼굴들, 천사들의 모습입니다. 하늘의 보좌지요. 하늘의 보좌는 그 보좌 자체가 정지되어있습니다. 일단은. 정지되어있어요. 왜냐, 거점이니까.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 유일한 실체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정지되어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모양은 뭡니까? 그들의 모양은 넷은 사람의 얼굴이고, 넷은 사자의 얼굴이고, 넷은 소의 얼굴이고, 넷은 독수리의 얼굴이지요. 그 뒤에 죽 읽어보면 이들이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지상에 활동할 때는 뭐냐, 움직여요.

흐름이 된다고요. 고정에서 파견 받은 움직임이에요. 그런데 이 에스겔1장이 어떤 시점에 섰느냐 하면 지상의 성전이 파괴됐을 때 나온 계시거든요. 불타버렸을 때. 지상의 성전이. 지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공부한 대로 지상의 인간들이 땅에 거점이 있었던 거예요. 성전이란 거점. 거점에 대해서 인간들이 관리를 못해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아까 그 채굴한다는 것.

왜 하나님이 주신 성전을 솔로몬 성전을 왜 관리 못했을까, 하나님의 신이 와서 채굴해보니까, 발굴해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원수, 언약의 원수, 그 우상들이 있었던 겁니다. 우상들. 오늘 강의는 다 잊어버려도 이거는 잊지 마세요. ‘책망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신은 우상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책망으로 다가와요. 십자가라는 책망으로. 니가 나의 원수고, 니가 나의 장애물이야. 왔을 때, 그 한 가운데로 예스, 긍정하면서 그걸 통과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장애물이 완전히 깨 부셔 가지고 살 떨리듯이 살점으로 성령에 의해서 조각 조각나야지요. 해체돼야지요. 해체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분명히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였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어린양 덕분에 헤헤거리면서 촐랑대면서 그들은 세상 것을 낙을 누리는 거예요. 어린양의 죽음과 그들의 실생활이 연계가 안돼요. 연계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은 어떻게 됩니까? 성전이 확대되어야 되겠지요. 그 성전 확대, 그 성전 건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냈는데, 천사의 모습이 사자 같고, 인간 같고, 소 같고, 독수리 같은 그런 걸 보냅니다. 그게 뭐냐, 땅의 일로 나타난 천사의 작업이지요. 땅의 일로 나타난 천사의 작업입니다.

이게 각자 다른 일을 하지만 그 국면은 오직 하늘에 떠있는 유일한 고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는 다양체가 됩니다. 다양체. 다양체라 하면 저는 안 가봤습니다만, 나이트클럽에 빙빙 도는 조명구가 있답니다. 반짝 반짝 돌면. 거기에 보면 색깔별로 색유리가 다른 색깔로 붙여 있잖아요. 모든 성도는 전부 다 다양해요.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국면이 되는 거예요.

남의 신앙을 흉내 낼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종합하게 되면 두 감람나무가 됩니다. 두 감람나무가. 자, 스가랴로 다시 와봅시다. 4장에 오게 되면, 여기에 두 감람나무가 나오지요. 두 감람나무가 땅에 있는 인물들이죠. 아까 봤지요. 요한계시록11장에. 땅에 있는 인물입니다. 땅에 있는 인물이 천사가 왔을 때는 도리어 나는 누구다. 하면 안돼요. 나는 누굽니다. 하지 말고 나는 감람나무 역할, 기능을 맡은 거예요. 왜, 천사처럼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의미가 없어야 돼요. 이미 지시에 따라 움직이니까.

감람나무 기능을 맡은 거예요. 천사는 천사의 기능을 맡듯이 우리는 우리 기능이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 기능은 뭡니까? 그냥 사세요. 바나나 먹고 그냥 사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냥 사세요. 노래 하나라도 무슨 의미를 찾고, 이 땅과 하늘의 격차를 차이를 발견하는 거예요. 땅의 사랑과 하늘의 사랑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사랑이에요.

그렇게 되면 어떤 노래도 뭐가 돼요? 찬송가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논리가 너무 억지 아니냐, 하면 억지 같기도 합니다마는, 그럼 교회에서 찬송가 다 찢어버리고 그럼 ①번 임영웅 노래, 꼬마인형, 당신, 그런 유행가책으로 찬송을 하던 교회 와서 찬송가 부르고 집에서 유행가 부르던 마찬가지거든요. 사실은 마찬가지인데. 찬송가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지요.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직접적이고 세상에 나가면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가슴에 오실 주님을 기다릴래요. 뭐 이리 되는 겁니다.

두 감람나무가 뭐냐 하면 바로 스가랴3장에 나오는 한 쪽은 왕이 되고, 한 쪽은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함축해서 여러분들이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둘 다 왕과 제사장의 공통점은 기름 발린 자. 기름 발린 자니까 이걸 가지고 용어로 뭐냐, 메시아라고 합니다. 기름 발린 자를 메시아. 또는 헬라어로 하면 그리스도라 하지요. 예수 그 다음에 그리스도지요. 예수님, 기름 발린 자 예수님이에요.

그럼 기름 발린 자라는 것은 비록 땅에서 사셨지만 하늘에 천사들이 활동하는 하늘의 일에 기능자가 되는 겁니다. 그 기능자의 완성이 되겠지요. 이 세상의 기능자는 둘이 되는 겁니다. 왕과 플러스 제사장. 왕+제사장. 이게 하나가 아니고 땅에서는 두 기능이 있고 두 기능이 서로 결합되면서 여기서 희생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냥 제사장처럼 희생이 되어버리면 그 본질이 이 세상을 통치할 왕. 왕은 심판주를 말하거든요. 왕이라는 것이 안 드러나잖아요. 그냥 왕이 되어버리면 대단한 힘센 왕이기 때문에 설마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설마 흠집 하나 안 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말이죠. 그러나 하늘과 땅에서 땅이 이미 하늘에서 쫓겨 난 입장에서 이건 하나님의 일에 장애물이 되는 겁니다. 이 장애물을 하늘에서는 왕이 어떻게 통과하느냐, 제사장직을 가지고 통과하는 거예요.

왕1에서 제사장직을 만나면 나중에 왕2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 완성되는 작업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되 자기 백성은 소극적이고 장애물로 집어넣고 거기에 천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희생을 어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어떻게 작용해서 육에 속한 죄인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그 과정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 영광 받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 이 작업을 위해서 이 지상에 있으면서 여러 민족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특수한 민족이 발생되어야 되겠지요. 그 특수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특수하다는 말은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천상의 요소, 천국의 요소가 언약이 거기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럼 언약이 들어있으면 어떻게 들어있는가, 아까 창세기28장봤지요.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뀌거든요. 개인 이름이 국가이름으로 바뀐다고요. 그러면 개인에게 일어난 체험이 국가 전체 체험으로 단일화 되어야 되겠지요. 국가 이스라엘이 있어야 될 일을 이미 어떤 일이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으로 발생시키느냐 하는 것은 야곱과 하나님의 사적으로 만난 그 일이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모세 뜻이 뭐지요? 물에서 건져냈지요. 50만 대군을 먼저 물에서 건져낸 게 아니고 먼저 모세 하나를 달랑 데려오면서 물에서 건져내듯이 그 50만 남성만 50만 되는 이스라엘을 물에서 통과해서 건져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이름은 내용끼리 통한다고요. 그 이름의 내용대로 발현되는 것이 이름을 주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분만이 유능하지 그 이름의 뜻에 따라 우리는 무능합니다. 유능하지를 못해요. 일방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긍휼을 입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은혜를 입는다는 말은 우리를 우리의 실존, 실상을 까발린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레위기21장10절요, 자기 형제 중 환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이리 되어있지요. 요 말은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사무엘상10장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이리 되어있지요. 다윗이 사울 왕이 아무리 밉지만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 부었다는 그 기름 부음이 먼저 존중해주는 거예요. 인간성보고 기름 부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기름 부었다는 거죠.

그러면 사울 기름 부었지요. 그 다음에 사무엘상 그 뒷부분에 16장에 보면 이새 아들 다윗이 기름을 받지요. 그러면 동시에 한 이스라엘 나라에 기름 부음이 두 개 되지요. 요번에 겨울수련회 제목이 ‘두 개의 구원’이에요. 어떻게 구원이 두 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다리는 하나인데. 예수님이 구원자라 하는 것은 가짜 예수님을 필히 발생시키는 겁니다. 장애물 되는 가짜 예수님을 발생시킴으로서 비로소 진짜 예수님은 그걸 침으로서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걸 부정함으로서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럼 가짜 예수님은 누가 좋아해요? 내가 좋아하지요. 우리가 좋아하지요. 왜? 나의 실체와 나의 거점과 나의 자아를 격려해주니까. 위로해주니까. 이 복 받은 인간아! 자꾸 격려해주니까 그런 거예요. 누가복음2장에 크리스마스 때 여러분이 잘 아는 기도나오지요. 목자가 들에서 양을 칠 때 그 때 뭐가 나타났느냐 이게 나타났어요. 크로마키스크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수요일날 설교 다 나왔지요. 사람이 앉아있는데 녹색 천으로 해가지고 뒤에 가려버리고 녹색 천에 해놓고 녹색 천에 새로운 이미지를 갖다 붙여버리면 이건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요.

바로 천사가 거기에 임하는 거예요. 그러면 졸지에 목자는 땅에 존재하면서 무슨 체험을 했습니까. 천사의 세계를 체험했지요. 그게 힘이에요. 그게 낯선 힘이에요. 그 낯선 힘일 때 목자는 버들버들 무서워 떨었다 말이죠. 무서워 떨게 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오늘 월급날 안됐나, 이런 자기 생각, 평소의 과거가 끊어져버려요. 과거의 내 인생관이 다 끊어진다고요. 과거의 인생관이.

과거의 인생관이라 하는 것은 항상 내 중심으로 퍼져있는 물결의 파동 같은 거예요. 3살 때 기억은 동네 골목은 굉장히 길다는 느낌이에요. 7살 때 되게 되면 학교 말고 딴 데 가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2살 되어서 수학여행 가게 되면 제주도가 세상 끝인 줄 알고 있어요. 드디어 고등학교 가가지고 요새는 시건방져가지고 좋은 데로 가면 우리 같으면 옛날에 경주나 갈 걸가지고 요새는 해외여행 간다고요. 특히 돈 있는 사립 같으면. 돈 있는 사람이 유럽에 왜 갑니까? 오백만원 주고. 이스라엘 같으면 몰라요. 오백만원 주고 왜 가요. 점점 더 견문이 넓혀지잖아요. 그러면 자기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겠지요. 이게 바로 나의 과거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거예요.

전혀 무섭고 떨리지 않습니다. 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니까. 신났지요. 그러나 여기에 천국이라는 크로마키 어떤 새로운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이지요. 진짜 현실이 들이닥쳐 버리면 이건 내가 알던 자아가 꿍치고 있던 그 현실과는 너무나 괴리가 되어가지고 자기의 선입관, 인생관, 사고방식이 아무 소용없고 무능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무능해서 구원받습니다. 내가 들었던 십자가가지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찾아오심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십자가는 덮치는 것이지 알아가는 게 아닙니다. 덮쳐지는 거예요. 니가 바로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나의 걸림돌이었다. OK. 콜. 맞습니다.

내가 고장 난 차처럼 딱딱하게 내가 굳어져있었습니다. 주여! 구멍 뚫어주시옵소서. 내가 터널이 되게 하옵소서. 내 안에 주님이 지나가는 빈자리, 십자가의 공터가 있게 하옵소서. 십자가가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는 그냥 뚫고 가는 거예요. 십자가는 달랑 달랑 차고 다니는 게 아니고 나의 제일 중요한 자아 부분을 빵구 내버려요. 그걸 유명한 4자성어로 영구 없다! 하는 거예요. 본인이 분명히 영구인데 영구 없는 거예요. 난데 내가 없어요. 내가 너무나 많은 게 아니고 내가 없어요. 전부 다 거저 주는 겁니다. 거저주신 거예요.

그게 왕과 제사장은 두 기름부음이 있는 겁니다. 기름부음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번 성전의 프로젝트는 스가랴의 프로젝트는 스룹바벨이라는 왕과 여호수아라는 대제사장이 이렇게 천사의 작업에 끌려올라 가는데 그 두 작업에 결합체가 스가랴입니다. 그 가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따로 왕따로 하면서 두 개가 어떻게 어디서 겹치는가를 보게 하는 거예요.

그 겹치는 장면이 뭐냐,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겹쳐져요. 그 성전은 어디 있다가 아니라 사건이 돼요. 사건이. 그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그래서 46년 동안 지었던 이걸 헐어버려라. 내가 몇 일 만에 짓겠다고요? 요한복음2장에 나오지요. 이 성전 46년 동안 지었습니다. 하니까 3일 만에 내가 짓겠다. 하잖아요. 예수님이 사흘만에 짓겠다.

그 당시에 땅의 평면에 속한 사람들은 그걸 이해합니까? 이해 못합니까? 이해 못했지요. 왜 이해 못합니까? 자기가 땅에서 과거에 왔던 그 선입관에서는 실체와 실체, 명사와 명사들의 세계거든요. 그러니까 그 흐름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실체되면 건물을 이렇게 지으면 건물이 있을 거 아닙니까. 건물이 보이잖아요. 보니까 소경인 거예요.

부활된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부활된 주님을 보게 되면 그건 주님이 아니에요. 그건 악마가 예수님으로 변형한 거예요. 주님이 아니에요. 성모 마리아 목각 상에서 피눈물 흘렀다 말이죠. 먹어보니까 짜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나주에서. 짜겠지요. 그래서 뭐? 목각 상에서 성모 마리아 피 흘렸다 어때서? 천사한테 잡혀가지고 교무실에서 손들고 있어야 돼요.

그걸 보는 자체가 보는 내가 유능한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니 못 봤지? 나는 봤어. 유능한 사람이 된다고요. 주께서 오시게 되면 기름부음이 덮칩니다. 기름이 덮여버리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십자가 이벤트에 놀아나게 돼요. 이벤트에 놀아나게 되면 이미 우리는 내가 죽었다,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면서 유월절을 반복하게 되지요.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이스라엘이 하루씩 하루씩 생산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다시 태어난 나는 이스라엘로 되고. 그 이스라엘이 다시 나의 이름으로 밤에 잠자고 다시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이스라엘 되고. 주님의 이스라엘. 주님의 천사의 작업에 참여된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성된 이스라엘. 두 감람나무.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죽고 나면 또 다른 감람나무를 보내가지고 끊임없이 이 세상에 유일한 거점은 뭡니까?

순금 등대. 그 순금 등대로부터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확대되는, 확산되는 그러한 시점, 유일한 실체, 그걸 천사가 스가랴에게 보여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만 분주한 줄 알았는데 천사도 참으로 분주하게 활동해서 주의 일을 마무리하고 또 성령께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줄 이제 알았습니다. 저희들이 성령의 일에 참여한바 되었사오니 주님께서는 우리로 감람나무로 세워주셔서 우리가 실체가 아니라 주님이 여기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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