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2 - 주님의 기억
21,02,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8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신약성경인 로마서 4장 2절에서 5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하나님과 연결된 아브라함 !!
여기에 누가 나옵니까? 아브라함이 나오는데,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언급했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란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 당시에 아브라함 외에는 하나님과 연결된 자가 없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전할 때 특정인물을 선택해서 하셨는데, 그것을 '기능'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외모는 보통 사람들과 동일한데,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기능이 선택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구별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분류' 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분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해석이라는 겁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성경해석이 아니라는 것이죠.
* 나를 위한 신앙은 없다 !!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한 신앙은 없다" 라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예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구원도 그러하고 말이죠. 애당초 하늘나라나 이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고 구원이고 결정이고 선택이고,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나'를 위한 신앙은 되지 않는고 하니, 그 '나'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왜 인공지능이 똑똑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인공지능에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힌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만든 분에게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창조주가 있다는 것이죠.
* 주인님, 저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세요 !!
예를 들어서, 여기에 로봇 청소기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이 로봇 청소기는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로봇 청소기가 청소를 하고 나서, "주인님, 오늘은 청소를 열심히 했으니 저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세요"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주인은 기가 막히지 싶은데, 그렇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 로봇 청소기는 주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로봇 청소기인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당연히 청소를 한 것도 주인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했다는 겁니다.
* 예수님을 질투한 천사 !!
그런데 아주 나쁜 로봇이 등장해서, 이 로봇이 주인과 인간의 관계를 끊어놓는다는 말이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다 돌리지 말고 너도 한 영광을 해라" 라고 부추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부추기는 존재를 성경에서는 '악마' 라고 하는데, 이 악마는 천사이고 피조물인데, 그런데 그 피조물이 하늘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자기 아들인 예수님에게 몰아주기로 했는데, 그런데 천사가 그것을 보고 시기질투가 나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주가 되는 것이 대해서, 그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인간을 부추겼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만든 신화나 전설이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그것 참 재미있게 만들었네" 라고 하면서 웃어넘길 수가 있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실제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면, 그러면 그게 자기 인생과 관련된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라, 만사를 제쳐놓고 먼저 생각해야할 문제라는 겁니다.
어떤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를 본 사람들 중에서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내 인생의 모든 걱정근심은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 나는 더 살아도 되고 살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죠.
여기서 누가복음 2장을 보겠는데, 26절에서 32절입니다.
(눅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 성령이 오면 분류가 !!
여기에 '시므온' 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뭐라고 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려면 왕이 있어야 하는데, 드디어 그 왕이 태어났구나"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까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 외형이나 외모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아기 예수가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대단히 아기스럽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아이를 보고 시므이가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오니까 분류가 된다는 겁니다. 성경해석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분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 아기 예수는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일반 아기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구원자다. 그분은 왕이시고 이방세계에 대한 심판자다" 라고, 그렇게 보았다는 겁니다.
성경을 다음과 같이 보면 확 뚫리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구원이 되고 나머지 민족은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인데, 이것만 알면 50퍼센트는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죠. 즉 선택된 이스라엘만 천국백성이 되고, 그 나머지는 지옥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고, 그리고 이방민족의 대표자는 에서라는 말이죠.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에게 창세 전부터 사랑을 받기로 되어있고, 반면에 에서는 하나님에게 사랑이 아닌 미움을 받기로, 그렇게 작정이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다시 강조를 하는데, 성경을 볼 때 분류를 하라는 것이죠. 사랑을 받는 쪽과, 그리고 미움을 받는 쪽인데, 미움을 받는 쪽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만 이야기하면 안 되고, 어느 쪽이 미움을 받는지, 그것을 반드시 분류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몸이 아프고 사업이 잘 되지 않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문제라는 겁니다. 분류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런 자기 문제가 아니고 분류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자기를 위한 구원은 없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주님이 분류를 어떻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이렇게 헌금하시고 봉사를 하시면, 그러면 여러분의 일이 잘 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무당의 소리라는 겁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무당집이라는 말이죠.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끝!",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나는요?" 라고 하면서, 자기를 갖다대지 말라는 것이죠.
* 이방민족에서 이스라엘로 !!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고, 분류가 나왔으니 여기에 대해서 좀 더 해보겠습니다. 분류만 알면 50퍼센트는 먹고 들어간다고 했는데 말이죠.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고, 그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방민족인데, 그들이 섬기는 신은 모두가 다 우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 대표자가 에서인데, 그 에서는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외형적으로 어디에 속합니까? 기능이 아니고 외형적으로 우리는 당연히 이방민족인데, 자랑스러운 단군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외형적으로 분명히 이방민족이라는 말이죠.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방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시므온은 누가복음 2장에서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방민족인데 이스라엘에게 속한 것, 그것을 두고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먼저 분류가 되어야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 구원만 챙기려고 하지말고, 어디서 어디로 옮겨졌는지,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실컷 구원을 외치다가, "당신은 어디로 어디로 갑니까?" 라고 하니, "그것은 몰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냥 "지옥에서 천국에 간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러면 굳이 성경이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성경은 그게 아니라, "이방민족에서 이스라엘로 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창세 전부터 이미 사랑을 받기로 한 대상으로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 먼저 왕이 등장해서 !!
그렇다면 오늘날 이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지금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다는 것이죠. 사랑을 받기로 한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은 왕이 먼저 등장하고, 그 왕이 자기 백성을 모집한다는 겁니다. 지금 성경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죠.
아까 시므이는 어떻게 그 왕을 알아보았습니까? 그게 성령을 감동으로 된 것인데, 그러니 왕이 성령을 주어서 자기 백성을 모집한다는 겁니다.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인데, 즉 예수님의 영이라는 말이죠. 그게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영이니까 마음인데, 그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을 주게 되면 외형적으로 이방인인 우리에게 성령이 오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자가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로마서 4장 2절에서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 부정되는 아브라함의 행위 !!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자기 행위를 동원해서 자기를 의롭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아브라함이 자기를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그런데 행위로 자랑한 것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브라함의 행위 자체가 부정이 된다는 겁니다.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까, 지금 이방민족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것에 있어서 무엇이 부정되는고 하니, "내가 했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라는 것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만약 자기가 믿고 자기가 노력해서 구원된다고 하면, 로마서 4장 2절에서 "내게 자기 자랑을 할 것이 있으려니와" 라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일체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4장 2절에서 믿음을 설명하면서, 먼저 행위부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그 행위 앞에 무엇이 붙는고 하니, 그 행위가 자기 행위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거부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 내용이 된다는 말이죠. 지금 그것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믿음이 내용이 된다는 말이죠. 여기 로마서 4장 2절에 보면, 분명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없다'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 땅콩강정 '없다' !!
이렇게 '없다' 라고 하니 생각이 나는데, 설이 되면 우리 할머니가 제사를 지내려고 비싼 문어와 땅콩강정을 준비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땅콩강정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설이 지나고 나면 저의 라이벌인 다른 손자들이 할머니에게 와서는 "할머니, 땅콩강정을 좀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까, 시간이 이렇게 지나도 아직도 제 귀에 쟁쟁거리는데, 그게 바로 '없다' 라는 겁니다(ㅋㅋ). 그런데 할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다락에 올라가보면 그게 놓여있는데,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다락에 숨겨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눈앞에 반짝이는 그 보물과 같은 땅콩강정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의 자랑거리를 없는 것으로 여기는데, 즉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없다' 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너는 어떻게 왕이 되었어? - 제가 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 그러면 이리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오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의 자랑거리가 없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희생과 공로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희생과 공로가 아닌, 다른 것이 남으면 그야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4장 24절을 보겠는데, 참 어려운 구절이지만 한 번 살펴보자는 말이죠.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그럴 이유가 없어요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 우리가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시 일어나는데 있어서, 우리가 어디 옆에서 부축이라고 했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우리는 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데 있어서 우리가 한 것이 전혀 없는데, 바로 그 없음을 우리가 믿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는 겁니다.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고, 없다는 것을 향해서 사랑은 온전해진다는 말이죠. 즉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강도가 천국에 가는 이유가, 자기는 천국에 갈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자식을 제대로 잘 키운 적도 없고, 그리고 교회에 충성한 적도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 25절에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그 어떤 짓을 하기 이전에 이미 범죄한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왜 우리가 자랑거리가 없어야 하는고 하니, 우리는 무조건 범죄한 자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범죄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옷을 입은 인간 !!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을 때는 옷이 없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입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이 범죄한 증거인데, 즉 뭔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구석이 있다는 말이죠. 처음 하나님이 만들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집에 키우는 개에게 옷을 입힙니까? 물론 요즘은 입히기도 하는데, 그것을 개가 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개는 옷을 입지 않는데, 왜냐하면 부끄러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개가 도리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데, 개는 옷을 입고 있지 않는데 인간은 입고 있으니, 그러면 과연 어느 쪽이 잘못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인간 쪽이 원래 창조의 틀에서 위반이 되었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옷까지 입혀주지는 않는데,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 가죽옷은 인간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즉 "너희는 정상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물론 우리는 죄를 지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네가 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너는 나 하나님이 보기에 죄인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저는 생각한 것이 없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너는 생각도 하지를 말고 가만히 있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죽었다고 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 그 자체로도 범죄를 한 것이고, 그리고 그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어서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그러니 기가 차는 이론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가 없고, 그래서 성령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말기 암에 걸려서 곧 돌아가시는데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 제가 지금 암에 걸렸습니다. 제발 낫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문제를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분류를 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암에 걸린 것도 무엇이 되는고 하니, 자기가 남들보다 더 악해서 암에 걸린 것이 아닌데, 암에 걸리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암에 걸리지 않는 인간도 범죄한 인간이고, 그리고 암에 걸린 인간도 역시 범죄한 인간인데,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십자가를 통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범죄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그게 곧 천국백성이란 겁니다. 그러니 이미 분류가 된 것인데, 자기가 이익을 챙겼다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성경해석은 분류인데, 그것을 어려운 말로 '범주화'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범위를 정한다는 겁니다. '예수 안'과 '예수 밖'으로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로마서 4장에 의하면 "가만히 있어라. 내가 아들을 보내서 너는 졸지에 네가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 아들이 부활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너는 '아하, 예수님은 내가 의인이 되도록 해주기 위해서 죄인인 것을 알려주려고 오셨구나' 라는 하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너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지만 죄인이야" 라고 하신 것은, 그 뒤에 보면 "너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천국에 갈만한 의인이 되었어" 라는 것인데, 그것을 통고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혼자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죠. 그것을 우리와는 전혀 의논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두 분이 알아서 의논해서 처리하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전혀 일한 것이 없다는 것이죠.
여기 로마서 4장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아 !!
사람이 내일 죽더라도 알고 죽는 것이 복인데, 말기 암에 걸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도 역시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숨을 쉬지 못하면 그냥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언제 죽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아" 라고 할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일을 한 것이 없어도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인데, 이런 기쁜 소식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이죠. 이 세상의 철학과 신학과 과학, 그러한 학문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좀 늦게 와도 괜찮은데, 이 진리를 알고 있으면 말이죠(ㅋㅋ).
그러니 이 세상의 시시한 고민거리나 상담거리, 그런 것들은 그야말로 고민거리나 상담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꾸만 개인 문제를 가지고 힘들어하지 말고, 그냥 분류만 해주면 된다는 말이죠.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자랑할 것이 없음을 자랑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식 자랑을 실컷 해도 괜찮은데,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것도 죄야" 라고 하면서 토를 달면 된다는 것이죠. 그것도 웃으면서 말이죠. 자식자랑이 죄라는 것을 안 기쁨, 그것이 성도의 기쁨이라는 겁니다. 성경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있다는 말이죠.
* 선악을 아는 자, 생명을 아는 자 !!
여기서 진도를 더 나가보면, 분류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분류를 하느냐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것, 생명을 아는 것, 분류니까 이렇게 해본다는 말이죠. 그러면 선악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선악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나쁜 자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분류가 되는데, 이것을 1번이라고 하자는 말이죠. 그러면 2번은 생명을 아는 자인데, 그렇게 생명을 아는 자는 뭐라고 합니까? "선악을 알았기에 나는 본질상 저주를 받은 자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해석은 분류라는 말이죠.
"나는 선악을 아는 귀한 자이기에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나는 살아야 한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이 선악을 아는 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생명을 아는 자는 "선악을 아는 자는 본성상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선악을 아는 것이 곧 죄구나 !!
그렇게 하나님이 언질을 주셨는데, 그러면 생명을 아는 자의 경우에는 그것이 누구의 안목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인데, 그것을 자기가 확보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인고 하니, 선악을 아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 생명을 아는 자는 이미 그러한 관점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반면에 생명이 없는 자는 어떻게 그 티를 내는고 하니까, "선악을 알았으니, 즉 윤리도덕을 알았으니 나는 절대로 망하면 안 된다. 나는 천국에 가야만 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류가 되는 것이 바로 지옥에 가는 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이라는 자가 아기 예수를 보고, "나는 이제 마음이 너무나도 편안합니다.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됩니다" 라고 하면서 기뻐했던 것은 무엇이 개입해서 그렇다고 했습니까? 아까 했는데, 그게 바로 성령의 감동이라는 겁니다. 성령,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인데 말이죠.
* 1번에서 2번으로 옮겨가는 자 !!
그런 하나님의 뜻이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1번에서 2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말이죠. 1번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다 가지고 있는데, 1번은 "나는 건드리면 모두 죽이겠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선악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면 안 되고, 지옥에 가면 안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본성상 그렇게 나오는데, 자기는 선악을 알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이죠. 반면에 생명을 아는 자는 무엇인고 하니, 선악을 아는 것은 본질상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는데, 1번에서 2번으로 옮겨간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음의 보기 중에서, 즉 "(1)선악을 아는 자, (2)생명을 아는 자, (3)1번에서 2번으로 옮겨가는 자", 이 중에서 누구를 구원하겠습니까? 정답은 3번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생명을 안다고 해서 구원해주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가 알아서 생명을 알 수는 없지만 말이죠.
생명을 알게 하신 분이 성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주님의 것만 인정해주시고 다른 것은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님의 것이 생명을 주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자는 주님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조건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생명을 눈치채었다는 그 성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죠.
*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 !!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사도바울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왔다고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 집에 누군가가 허락도 받지 않고 그냥 '쑥' 들어왔다는 것인데, 즉 자기 마음 속에 어떤 영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냐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사도바울 안에 주님이 들어왔을 때, 사도바울은 그 다음부터는 아프지도 않고, 또한 자기가 계획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했습니까? 그렇게 되었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라고 하는데, 주님의 영이 들어오게 되면, 굳이 출세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 마음을 주님이 장악하고 있으면, 그 기능이 중요한 것이지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 내가 망해야하는 이유를 찾아서 !!
그러니 2번, 즉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미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망해야하는 이유를 찾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망하는 이유를 느긋하게 찾아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의 공로만 나타나고 자기 자랑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 사람은 자기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를 평생동안 찾아다니는데, 이게 얼마나 가볍고 즐거운 여행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여행을 하려면 이런 여행을 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선악을 아는 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정반대라는 겁니다. 자기가 망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찾으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이죠. 이것을 4글자로 '스트레스' 라고 하는데, 이런 것이 암의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가면서 왜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는 남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망신을 당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는 말이죠. 자기 잘 되는 것에 집중에 집중을 거듭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무엇입니까? 굳이 지옥에 가지 않아도 이미 지옥이 시작되었다는 말이죠.
* 계속 1등을 하는 나쁜 짓을 해라 !!
예를 들어서, 아이가 평소에는 1등을 하는데, 이번 중간고사에서 6등을 했다고 하면, 그러면 부모는 미친다는 겁니다. 교회에 나와서는 "주여,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제 아이가 왜 6등을 했습니까?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스트레스라는 겁니다.
하지만 생명을 아는 자는 뭐라고 합니까? 자식이 "제가 이번에 1등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 "이놈아, 죄를 지었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펜트하우스' 라는 드라마를 보면, 아이들이 서로 1등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지 모르는데, 물론 부모들은 더하고 말이죠.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식이 1등을 한다면, 자식을 보고 "그런 1등을 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그것을 다음에도 계속해서 해라" 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해서 서울의대에 합격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은 피해를 본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나쁜 짓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게 자기가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즐거운 일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망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이래서 죽어야 마땅하다" 라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모든 짓이 나쁜 짓인 동시에, 그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되고 감사한 일이 된다는 겁니다.
* 거꾸로 된 삶 !!
지금 이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저는 이런 비현실적인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조금 오래 전에 동대구 역에서 기차를 타고 강릉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가면 제천에서 강릉을 가게 되는데, 특별히 그 노선을 '태백선'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거기에 가면 오르막길이 나오는데, 그때 보니 기관차가 뒤에 와서 밀어주고 있다는 겁니다. 보통은 앞에서 끌고 가는데, 거기에서는 뒤에서 하나가 더 붙어서 밀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보고 제가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아하 성도는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뒤에서 밀어주시는구나" 라는 것인데, 성도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거꾸로 된 삶'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주도권을 쥐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살자" 라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반대로 산다고 하면 그 주도권이 여전히 자기에게 있는데, 즉 자기가 알아서 반대로 산다는 겁니다. 하지만 거꾸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가 밀어주는 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자기가 알아서 반대로 살게 되면, 그것도 역시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과 반대되는 것을 자가가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해서 밀어 부치는 것이니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일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절에서 하는 짓거리와 전혀 다름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전혀 성령의 일이 아닌데, 마음을 낮추고 낮추어도 그것은 전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몽골 선교사가 쓴 그런 내용의 책이 있는데, 전혀 성경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 신앙생활은, 자기 자랑거리가 없어야 !!
신앙생활은 자기가 내려놓고 내려놓는 게 아니라, 로마서 2장 2절의 말씀과 같이, 즉 자기 자랑거리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랑거리를 자기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뒤에서 밀어주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낮추던 높이던 간에 우리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본질상 그렇다는 것이죠. 그러니 아무리 자기가 자기에게 조치를 취하고 해도, 그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를 봐야하는고 하니,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자기를 매일매일 떠밀어주고 있는지, 그것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뒤에서 밀어주니 기차가 고개를 무사히 넘어갔는데, 그러면 뒤에서 밀어주던 기관차는 그만 떠나가고 앞에 있던 기관차가 이제 몰고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강릉까지 가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강릉에는 왜 갔는고 하니, 제가 아는 목사님이 돌아가셔서 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목사님, 그러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마음을 낮추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틀린 말은 아닌데,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자기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실천에 옮기겠다고 나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성경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류라는 겁니다. 벌써 몇 번을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자기가 한다고 하면 지옥이고, 그게 아니면 천국이라는 겁니다. 성경은 분류인데, 자기가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로마서 4장을 보겠는데, 18절과 19절입니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전혀 아브라함의 솜씨가 닿을 수 없는 곳에 !!
여기 19절에서,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미 자기 몸도 그렇고 자기 아내도 임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강의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를 공략하시는고 하니, 아브라함이 "나는 할 수 있어" 라고 하는 것에다가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그야말로 죽은 상태인데, 거기에 약속을 던지신다는 겁니다. 전혀 아브라함이 해낼 수 없는 장소에 약속을 주입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네 아내가 임신할 것이다" 라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자기들은 임신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바로 거기에 인심할 것이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 자신의 그 어떤 솜씨도 아브라함의 구원에는 전혀 추가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의 것은 그 어떤 요소도 스며들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막아놓으셨다는 겁니다. 태백선 이야기를 다시 하면, 앞에서 끌던 기관차는 결코 그 고개를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인데, 반드시 뒤에 다른 기관차가 와서 밀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앞에 있는 기관차가 아니라, 뒤에서 떠미는 기관차를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방향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떠미는 쪽에서 결정하게 되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신의 나라인 천국에 가도록 떠밀어주어야 우리는 그 나라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조차도 "내 뜻대로 마옴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 아하, 내가 이래서 망했구나 !!
그렇게 반드시 주님이 밀어주어야만 하는데, 그러면 2가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먼저 자기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그리고 그것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뜻이 부정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뜻을 여기에 병행을 시킨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뜻이 부정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망하는 이유를 찾는다는 겁니다. 즉 "내가 이래서 망했구나" 라고 하면서,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생활이 어렵지 않은데, 어려운가요? (ㅋㅋ) 자기 잘남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다 제거하는 쪽이라는 겁니다.
* 교회도 망해야 !!
코로나의 경우에도, 요즘 5명 정부에서 이상 모이지 말라고 하는데, 그러면 교회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합니까? 교회는 망해야 하는데, 자기가 억지로 망하게 하면 안 되고, 그러면 이러한 기회에 모여서 망하면 된다는 것이죠. 헌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억지로 모이려고 하면 곤란하고 말이죠.
그래서 자식이나 손자가 1등을 하면, "나쁜 짓을 또 했구나. 그래서 그 벌로 피자를 사줄게. 공부를 잘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쁜 짓을 또 하라고 사준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1등을 한 것이 어떻게 나쁜 짓이 됩니까? 그것은 자기가 해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의 자랑거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손자는 "할머니, 이상하게 제가 공부를 한 것만 나왔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러면 그렇게 1등을 한 것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니, 봐준다. 다음에 나쁜 짓을 또 해라"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랑거리가 있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은 누가 설치는고 하니, 악마가 계속해서 유혹을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무 스스로 자학할 필요는 없어. 잘했으면 잘했다고 하면 되는 것이지, 너무 복음적으로 따지지마. 공부를 잘 한 것은 잘 한 것이고, 그러니 네가 잘한 것은 자랑을 하고, 그리고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면 되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은 뒤에서 떠민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아직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9장 16절을 보겠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말이죠. 특히 여기에 '달음박질'이 나오는데, 달린다는 것은 방향이 정해져있다는 겁니다. "저쪽이 천국이야" 라고 하면서 자기가 방향을 정해서 달린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방향을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나아가는 방향이 정반대라는 말이죠. 우리는 무엇을 했다고 하면 자기 자랑만을 앞세우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뜻이 아닌 다른 뜻을 가지고 밀어주시는 분이, 즉 뒤에 자기를 밀어주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까는 '없다' 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아니요' 라는 말이죠. 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직 뒤에서 밀어주시는 그분의 일방적인 조치, 그 사랑에 의해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앞도 보고 뒤도 보게 되는데, 그 뒤를 여기 16절에서는 '긍휼'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오직 불쌍히 여겨주심,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앞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불쌍한 짓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자기가 하는 짓이 불쌍하고 가련한 짓인지, 그 이유만 적극적으로 찾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 절세미녀 사라 !!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있었는데, 굉장한 미인이었다는 말이죠. 남편만 예뻐하면 미인이 아닌데(ㅋㅋ), 세상 모든 남자가 보고는 다 예쁘다고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는 만나는 사람마다 다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는 말이죠. 심지어 눈이 높기로 유명한 애굽의 바로 왕도 탐을 낼 정도였다는 겁니다.
이왕 미인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미에 대한 기준에 세월에 따라서 다 달라지는데, 어릴 때의 미인의 기준이 다르고 커서 다르고, 그렇게 다 다르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릴 때는 시골교회에서 오르간을 반주하는 누나도 어떻습니까? 자기 눈에는 그야말로 예쁘고 미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의성 시내에만 나와도 어떻게 됩니까? 그 누나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의성에 있다가 대구에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의성은 완전히 시골 아가씨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 대구 아가씨도 서울에 오면 졸지에 시골 아가씨가 되고 말이죠. 그러니 시간,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그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데, 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미인이고, 또한 장소가 달라도 역시 미인이었다는 말이죠. 그 당시 중동지역의 왕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미인이었다는 겁니다.
에스더도 역시 그러한데, 그 이름의 뜻이 '별' 이라는 말이죠. 별의 특징은 움직이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는 것인데, 10키로를 달려가도 그 자리라는 겁니다. 즉 독보적인 아름다움의 존재라는 것이죠. 남성의 모든 권력을 뛰어넘는 것이 여자의 아름다움인데, 즉 아름다운 자체가 권력이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에스더가 보여준다는 겁니다.
* 아내의 미모를 이용하는 아브라함 !!
아무튼 아브라함의 아내는 미인이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의 행동이 어떠했는고 하니, 물론 하나님에게 의롭다함을 얻었지만 그는 아내의 덕을 보려고 했다는 말이죠. 이제는 이해가 되지요? 자기가 왜 죄인인지, 왜 자기 방식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없는지,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자꾸만 어디에 가면 자기 신상에 이익을 얻기 위해서 아내를 이용한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 다른 타지역에 가서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짓이었는데, 요즘 우리나라에 온 필리핀이나 네팔 등지의 사람들을 보라는 겁니다. 물론 조선족은 너무 많아서 그렇지만 말이죠.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오죽했겠느냐는 겁니다.
심하게 말하면 "중동=이슬람=테러집단=코로나 환자"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어디를 가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죠. 거기에 식구들까지 많으면, 그게 부담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그네로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어디로 가도 위험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예쁘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러면 다 통한다는 겁니다. "중동=이슬람=테러집단=코로나 환자" 라는, 이런 조건을 다 넘어선다는 겁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이용하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의 뜻대로 되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아비멜렉이라는 추장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넘보려고 하다가 온 집안이 그만 망할 뻔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고 하니까, 아브라함에게 있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거짓말을 했으니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브라함인데, 그게 신앙인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살려고 하다가 그만 화가 임했는데, 하나님은 세팅된 그 무대를 가지고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신앙인의 표상이다. 모델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성경의 기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쓸 이유가 없는데, 나쁘게 살라는 게 아니고, 바르게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짓은, "내가 했다" 라는 것 때문에 모두 더럽다는 말이죠. 자기가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던 간에, 그것은 자기가 했기 때문에 더럽다는 겁니다.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도 더러운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여기서 잠시 정리를 하면,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문제의 해결이 아니고, 분류라는 겁니다. 분류, 이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이 분류라는 것은, 자기 시간과 자기 공간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인데, 태백선을 넘어가는 기관차를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뒤에서 떠민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떠미는 길을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닌데, 그 길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인데, 그러면 항상 무슨 원칙만 적용이 됩니까? 한 번 떠밀 때만 긍휼이 아니라 계속해서 긍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떠밀 때마다 긍휼이고 긍휼이고, 반면에 우리에게는 자기 자랑, 자기 자랑,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철이 없고, 그리고 내일도 보나마나 철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달리 말하면, 오늘도 긍휼이고 내일도 긍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과 철없는 자기 모습이 계속해서 만나면서, "나는 자랑할 게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하나님의 구원방법인데, 그게 아브라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의 미모를 팔아서 밥 먹고 살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철이 없는지 모르는데,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고, 또한 오늘날 우리라는 말이죠.
여기서 좀 더 어렵게 해보겠는데,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이라는 겁니다. 어제도 불쌍히 여기고, 오늘도 불쌍히 여기고, 내일도 불쌍히 여기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마지막에 도착하는 나라는 불쌍히 여김으로 인해서 가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인데, 그래서 천국에서는 자기가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 우리는 왜 철이 없어야 하는가?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왜 철이 없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시간과 자기 공간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러한데, 자기 시간과 자기 공간을 모으면, 그것을 '기억'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억이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언제 어느 장소에 이런 것을 했다" 라는 것인데, 그런 체험을 모아놓은 것이 기억이라는 겁니다. 즉 기억은 자기 체험의 저장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자아가 있다고 하면, 이 자아의 뚜껑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무엇이 소복이 들어있는고 하니, 그게 기억의 다발이라는 겁니다. 그런 기억의 뭉치만 가득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 기억의 뭉치를 가지고 분류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기억의 다발이 당연히 분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기억의 다발은 당연히 선이 되고, 정당함이 되고, 또한 의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분류를 하게 되면,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아니면 손해가 될 것인지, 그렇게 분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그야말로 철이 없는 짓이라는 말이죠.
* 선악적인 분류가 아니라 !!
이 정도가 되면 앞에 강의를 했던 것과 연결을 시켜주어야 하는데, 제가 처음에 성경을 보면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려면 안 되고 분류를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분류를 선과 악으로, 즉 선악적인 분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아는 쪽, 그리고 생명이 있는 쪽, 그렇게 분류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생명이 있는 쪽은, 이미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살아가는고 하니, "도대체 내 문제는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라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간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왜 죄인인지, 그것을 슬픈 마음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찾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선과 악으로 분류를 해버리면, 그것은 "나는 이만큼 잘났다" 라고 하는 자기 자랑거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분류를 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무조건 선하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선악적인 분류라는 말이죠. 이렇게 되어야 계속해서 강의가 연결이 된다는 겁니다.
* 사마리아 여인의 기억 !!
어제 설교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몇 명이나 있었지요?"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게 5명인데, 그러면 이 5명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기억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의 기억인데, 그런데 그게 곧 주님의 기억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그 동안 이 여인이 5명의 남자를 만나도록 뒤에서 떠밀었다는 겁니다. 마치 기관차가 객차를 밀 듯이 말이죠. 물론 사마리아 여인은 그게 자기의 기억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주님의 만나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 전부터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이 여인으로 하여금 5명의 남자를 만나게 하셨는데, 이제는 6번째 남자를 만나도록 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자기의 시공간을 가지고 뒤에서 떠밀었다는 말이죠. 이 여인은 횡재를 했는데, 한 명도 만나기 힘든데 무려 6명이나 만났다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동안 시공간을 자기가 점령해서, 그러니 그게 자기의 나와바리인데, 그래서 어떻게 나옵니까? "그리심산에서 경배할까?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에서 할까?" 라고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철이 없는 짓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이 여인을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관장하려고 했다는 말이죠.
(요 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왜냐하면 남자 5명인은 자기 기억인데, 자아는 자기 기억의 다발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기 기억으로 분류를 하는데, 선과 악으로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면 선이고, 반면에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에서 드리면 아니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그것을 묻는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쪽 시공간도 아니고 저쪽 시공간도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네가 곧 영생의 물이 나오는 우물 자체가 될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기억의 다발이 아니라, 주님이 의도적으로 몰아세운 주님 자체의 기억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나의 기억에서 주님의 기억으로 !!
오늘 강의제목은 '주님의 기억' 인데, 즉 자기의 기억에서 주님의 기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라고 말이죠.
우리가 달음박질을 치고 원한 것이 결코 아닌데, 뒤에서 떠밀어주시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2월 17일이고 18일이고 19일이고,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고 보니 2월 19일은 제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인데(ㅋㅋ), 아무튼 모든 일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아직도 우리의 목숨을 부지하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그렇게 기억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드리겠는데, 여기서 마태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6장 26절에서 32절인데, 다들 아는 말씀이니 제가 간추려서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에 새가 나오는데, 이것을 참새라고 합시다. 그러면 이 참새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물론 생물학적으로 보면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 생물학은 복음적 근거가 없는 인간의 환상인데, 그러니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들의 백합화가 나오는데, 이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지만 자라난다는 말이죠.
그리고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드디어 이방인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을 분류하라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다시 할까요? 이스라엘의 원천은 야곱이고 야곱은 창세 전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반면에 이방민족은 그 대표가 에서인데, 창세 전부터 미움을 받도록 되어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분류를 하셨다는 겁니다.
* 멈추지 않는 욕망 !!
그러면 이 이방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고 하면서 염려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아까 강의한 것과 연결을 시켜보면, 즉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가 왜 망해야 되고, 왜 죄인이고, 왜 철이 없는지, 그리고 자기 자랑은 왜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지,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방향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를 받은 이방민족들이 하는 사고방식인데, 그들은 하루종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한다는 말이죠. 재산이 400억, 4000억, 4조원이 있어도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겁니다. 사업을 해본 분들은 다 알지 싶은데, 만족함이 없다는 말이죠.
인간의 욕망은 결핍을 매우는 식이기 때문에, 결코 멈추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 욕망이 멈추지 않는고 하니, 악마가 계속해서 미끼를 던진다는 말이죠. 도박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도 그러한데, 악마의 미끼 때문이라는 겁니다. 악마가 뭐라고 합니까? "드디어 만회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을 포기해? 이 바보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악마가 얼마나 지독한데, 이 악마에 들린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나를 명령한다" 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앞의 '나'는 악마와 한 통속이 된 '나' 라는 것인데, 즉 욕망의 화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욕망의 화신이 순진한 자기를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해서 욕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말이죠. "그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부는 아들을 낳고 싶어서 딸을 여섯이나 낳았는데, 그러면 악마가 그 집을 찾아가서는 뭐라고 합니까? "일곱 번째는 아들이야"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딸을 여섯이나 낳았다는 겁니다. 들리는 말로는 일곱 번째는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ㅋㅋ), 그러면 그 아들을 낳기 위해서 1번부터 6번까지의 딸은 시다바리였다는 말이죠.
그러니 욕망이라는 것은 악마가 명령하는 것인데, 우리는 처음부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에, 즉 우리는 악마에게 속해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끊임없이 욕망을 가지고 우리를 자극하는데, 마치 음주운전을 측정하듯이 "더,더,더!"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성도는 더욱 더 깊이 파헤치는 삶을 !!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두르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을 잊어야 합니까? 그것이 아니면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합니까? 과연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체험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자기 자신을 너무 좋게 보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고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 육신의 본성은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고, 더 건강하고 싶고, 자기 자식은 남들보다 잘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승부욕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는 말이죠.
그게 본성이니 고칠 생각일랑 하지말고, 그러면 자기가 객차를 끌고 가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여러분, 선지자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삽시다" 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것이죠. 돈만 주면 입이 벌어지는 인간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 성경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분류'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말씀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분류라는 말이죠. 분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 말씀을 지켜서 천국에 가겠다" 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악적인 요소라는 말이죠. 그것은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생명은 받은 사람은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까,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나는 왜 이렇게 입는 것, 먹는 것에 집착을 하는가? 왜 그런 욕망이 나를 이렇게 부추기는가?" 라고 하면서, 그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데, 이것은 오직 성도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남았는데, 이것만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방민족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을 염려하는데, 그런 자들은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어느 정도 먹고 산다고 싶으면 "하나님,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참새수준이고 들풀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그 뒤에 뭐라고 하십니까? 이방인들은 그러하지만, 생명을 받은 자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긍휼의 나라라는 겁니다. 그 나라가 바로 자기 자랑이 없는 나라라는 말이죠.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하심으로, 우리는 일한 것도 없는데 의롭게 된, 바로 그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의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디에 집착을 해야하는 것인고 하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에 더욱 더 몰입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목사님, 저는 그런 것을 초월했습니다"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에 먹을 것이 있고 옷이 있고 잠을 잘 곳이 있으니 답답하지 않아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데, 그런데 전쟁이 나서 집이 무너지고 먹을 것이 모두 떨어져 보라는 말이죠. 지금 코로나 때문에 난리인데, 만약에 이것이 더 창궐해서 그야말로 좀비의 세계가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주님, 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군요 !!
그러면 그 나라와 그 의가 구해지느냐는 겁니다. "주님, 일단 살고 봐야 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바로 그때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의 본성이 지옥에 가는 이방민족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그리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하면서 자랑질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은 먹을 것도 있고 잠을 잘 곳도 있고, 그렇게 숨쉴 만한 공간이 있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데, "나는 지옥에 갈 자와 똑같습니다. 같은 아담 출신입니다. 범죄자 출신입니다. 내가 하는 짓은 항상 나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더러운 짓입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평생 고쳐지지 않는 우리의 철없는 인생살이,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그렇게 밀어 부쳤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기억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과 의로움만 바라보면 되는데, 그것이 곧 주님의 증인이고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동안 착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된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더 우리 자신의 실상을 발각을 당하고 노출을 당하면서, 더욱 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기쁨, 그것을 주님의 기억으로 여기고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1,2,23 오전 11시에 마침.
삶은 계란 3개, 사이다 1병, 그리고 태백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