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껍질

아빠와 함께 2021. 2. 15. 08:21

대전-65강 사무엘상21장7-15절(껍질)20201228-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21장 7절부터 “그 날에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이 도엑이라는 사람은 지금 기존의 정권 잡은 사람편입니다. 친 여與죠. 친 여당. 도엑이라는 사람이. 이 사람이 고자질해가지고 아히멜렉이 죽습니다. 8절에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이래 되어 있죠. 지금 여기 온천지가 누가 권세를 갖고 있느냐 하면은 사울의 권력장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궁하고 쫓아내죠.

그러니까 사울의 권력장 속에서 다윗은 여기 A에 있다가 그 다음에 B에 있다가 C에 있다가 D에 있다가 계속 장소를 변경하는 겁니다. 첫째는 뭐냐 장소변경. 둘째는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변모. 이게 뭐냐 하면은 사무엘상 21장 그 뒤에 보게 되면 10절,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니” 그 다음 13절에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척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이렇게 하니까, 14절에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절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네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게 다윗은 두 가지의 전략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어느 한 순간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은 자기 자신이 그동안 사울의 권력장에서다윗은 영웅이다. 다 영웅이죠. 다 영웅 임영웅이 아니고. 다윗은 영웅이다, 이것을 스스로 자기가 변모시키는 거예요. 여기서 다윗은 자진해서 미치광이가 되는 겁니다. 나 영웅 아니야. 첫째는 장소변경 둘째는 자기변경. 이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사울의 권력장에서 이렇게 되도록 사울의 권력이 다윗으로 하여금 독촉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이러한 모습이 성경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거든요. 사울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권력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이해되는 이스라엘과 다윗에게서 시작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따로 떼 내기, 분리시키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하게 되면, 성도라고 할 때 교회에서 말하는 성도와 주님이 말하는 성도하고 떼어내기, 떼어내기를 실시하는 거예요. 신자, 성도, 백성, 이것을 교회에서 규정하는 신자와 주님이 바라는 신자를 이렇게 자꾸 떼 내는 거예요. 떼 낼 때, 오늘날 본문이 하는 의미는 뭐냐 하면은 떼 낼 때, 혼자 깊은 산에 가서 나 신자다, 나 성도다, 이래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이 땅에서 니가 추궁을 당하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사울의 권력장에서 이미, 요즘 같으면 이미 성도는 이것이 무엇이며 이래야 성도고 이래야 교인이고 이래야 하나님 백성이고 이래야 천국 간다는 것이 이미 사울의 권력장에서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확정이 되어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누가 여기서 강제로 떼 내는가 하면은, 본인이 떨어지고 싶어서, 지 잘났다 하고 싶어서 떼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강제로 이러한 규정에서 떨어지게 만들어요. 이러한 규정에서. 여기 지금 성도, 교인,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어머니다운 어머니, 아버지다운 아버지, 자식다운 자식, 이런 모든 개념이 어디서 나왔는가, 사울의, 기존의 권력장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 여기서 떼어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잘 들으셔야 돼요. 제가 지금 잠 안 올 때 바짝 하는 겁니다. 떼어내는 것, 떼어내는 것을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구원인데, 구원은 떼어내는 거예요. 이게 뭐냐, 원형이 뭐냐 하면은 애굽에서의 떼어냄이에요. 애굽에서 떼어냄. 그러니까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요. 다만 하나님 편에서 온 모세가 하나님이 지시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나가자! 이래 된 겁니다. 사울의 권력장은 우리가 터 잡고 사는 거예요. 나그네, 방랑자를 누가 좋아합니까? 그냥 자기는 하나의 터 잡고 이 땅에서 뿌리박고 살면 이게 편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본래의  자기작업을 위해서 자기백성을 강제로 떼 내는 겁니다. 백성들은 떠나기 싫은데. 주님께서 강제로 떼 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떼 내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구원이 되는 거예요.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겼습니다. 다윗이 평소에 골리앗에게 “니 골리앗 한번 죽어봐라!” 이래 가지고 벼른 것이 아니에요. 그냥 우연이에요. 우연히. 우연히 만났고 우연히 이겼고. 골리앗이 죽었으니까 망정이지 다시 살아났으면 “다윗아! 한판 붙자. 삼세판이다.” 이러면 다윗은 보나마나 져요. 특히 골리앗이 다시 살아나서 이마 부분에 철판 20장을 깔아가지고 더욱더 완벽하게 빈틈이 없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그때 그 순간뿐이에요. 요행이죠. 요행. 골리앗은 죽었어야 했고 소년 다윗은 거기에 등장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느냐, 다윗은 만만이고 사울은 천천이고. 이래 된 거예요. 다윗이 사울의 나와바리, 영역을 건드린 거죠. 다윗이 건드렸으니까 사울은 다윗에게 뭘 요청하느냐, 탄핵을 요청하는 거예요.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나왔는데.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권력으로 삼았던 이 사울입장에서 다윗은 자기 권력에 도전장을 낸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장군이 된 것은 누구의 결정에 의해서 된 겁니까? 사울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다윗을 뽑은 거예요. 이상하게 이게 의도적으로 맞아 들어가서 미안해요. 그런데 이거는 세상적으로, 정치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지만, 배후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을 한번 간단히 이렇게 정리해봅시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이 나와 줘야 한다. 그러면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에, 여러분 진짜 어려운 것을 합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에, 이 이스라엘은 외피가 되고, 껍질이 되고. 현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은 내장이 되는 거예요. 내장. 간, 창자, 콩팥..., 내장이 되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느냐, 이 이스라엘이 나올 때는 하나의 권력장이죠. 아직 권력장이죠. 힘이죠. 이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은 그냥 소년 다윗이에요. 하나의 개인이라 이 말이죠. 집단에서 개인, 누가 이기겠어요? 당연히 집단이 이기죠. 모든 힘은 이쪽 사울 쪽에 있으니까. 그러나 구원의 시작은 그 권력에 쫓겨 다니는 불쌍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이렇게 쉬운 이야기를 왜 어렵다고 하느냐, 어려운 이유가 창세기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있잖아요. 여자의 후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권력장에서 여자의 후손인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나와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온통 어느 권력장이 되어요? 뱀의 권력장이 되는 것이 주님의 구원을 성사시키는 필수과정으로, 여기서 필히 스타트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가인이 누굴 죽입니까? 아벨을 죽여줘야 돼요. 가인이 아벨을 죽여야 되고, 가인은 왜 아벨을 죽이느냐, 본인의 뜻이 아니에요. 가인에게 뭐가 오느냐 하면은 죄가 갑자기 인격화 됐어요. 죄가 너를 소원한다. 다시 말해서 이걸 하게 되면, 창세기 3장에서 뱀의 후손이니까, 뱀. 악마가 무엇을 시도하게 되느냐 하면은 악마의 인격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한 거예요. 인간의 몸이 필요한 거예요. 인간의 몸이.

그러니까 이 악마의 세계에서 예수님까지 가게 되면, 악마의 권력장이니까 힘이죠. 이 힘의 장이 어디냐 하면은, 마지막 어디까지 가느냐, 마지막이 유대교까지 가요. 유대사회. 유대나라. 유대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나라까지 간다고요. 왜냐하면 그것이 끝이에요. 왜 그러느냐, 거기서 마감이 되니까. 십자가 사건이 불꽃놀이 하듯이 터져버리니까. 그걸 물리학에서 임계점이라고 해요. 처음에 건드릴 때는 안 터져요. 나중에 건드려도 안 터져요. 그러나 어떤 임계점이 딱 되면 상전이相轉移, 고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상전이할 때 갑자기 한순간에 팍 터져버려요. 한순간에.

생물학에도 그런 것이 있거든요. 반딧불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한 해양식물도 있고 해양 미생물도 있거든요. 그들이 하나 있을 때는 불을 안 켜요. 둘이 있을 때도 불을 안 켜요. 그러나 어느 숫자가 되게 되면 한꺼번에 불이 안 켜진 채로 같이 앉아 있던 그쪽에서 한꺼번에 확 켜져 버려요.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그렇게 터지는 겁니다. 노래 부를 때, 회식하러 가서 노래 부르라고 하면 뺍니다. 다 빼다가 어느 한 사람이 “에이, 모르겠다. 한번 부르자.” 개똥벌레 부르면 한꺼번에 노래가 다 나와요. 그걸 한계점, 그걸 변곡점, 그걸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은 재료가 있지만 재료를 모은다고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어떻게 딱, 그걸 성경에서는 “때가 차매” 전도서에서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는 거예요.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시계사주고 온갖 것 해줘도 사랑이 안 생겨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선물 줬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잭팟 터지듯이 팍 터져서 사랑이 생겨나거든요. 세상의 모든 일이 이처럼 연속성이 아니고 불연속성으로 되는 겁니다. 

그처럼 뱀의 장을 형성해야 예수님이 후손이 나온다면, 이미 구원이라는 시조, 원천은 뭐냐 하면은 이미 인간 구원이전에 누구 구원이 우선입니까? 여자의 후손이 우선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어디에 있느냐, 뱀의 후손자에, 여기에 잠재되어 있다. 여기에 이미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뱀의 후손에서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 이 과정을, 세상에서는 이 과정을 모르지만, 우리는 세상적인 표현을 하게 되면 이게 뭐냐 하면은 인류의 역사로 봅니다. 인류의 역사. 되어가는 모든 일이. 역사는 일어난 사실에서 뭘 주면 역사가 되느냐 하면은, 일어나는 일에 해석을 가미하면 역사가 돼요.

그러니까 역사치고 진실된 역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그 해석은 그 다음 차례가 되면 해석은 바뀌어버리니까. 그렇죠. 이건 국가해석, 자기 자리의 정당성을 위해서 그렇게도 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일곱 살 때 봤던 세상, 그리고 열두 살 때 봤던 세상이 있다면, 일곱 살 때 이게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열두 살 되가지고는, “그게 아니야. 이 어리석은 자야.”라고 하지만, 열아홉 살 먹은 형이 또 뒤통수 때리죠. “니가 뭐 안다고?”가 되죠. 하나의 개인도 마찬가지에요. 사십 대에 알았던 것이 다인 줄 알았다가 육십 되니까 사십 대가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지. 사십 대 썼던 글을 보면 이것도 글인가, 아이고, 부끄러워서 못 볼 정도죠. 

다섯 살 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다녀간 거예요. 근데 칠십을 넘은 트럼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애들한테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칠십 넘은 트럼프 대통령이 “산타클로스는 없다. 니 아버지가 왔다 갔다.” 그런데 백날 그 칠십 먹은 그 노인네가 하든 말든 다섯 살 애한테는 그거는 트럼프 할아버지가 세상물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 거예요. 왜냐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빠가 다녀가도 해석은 누가 해요. 다섯 살 본인이 해석을 하는 거예요. 본인이.

집에 세 식구가 있잖아요. 세 식구가 왜 충돌이 되느냐, 해석이 달라서 그래요. 환갑이라는 동일한 사태를 두고 해석이 다 다른 거예요. 어머니가 나한테 해줄 때만 해줄 것이다. 이건 자식해석이에요. 나는 마땅히 자식이 해줄 줄 알았다. 이건 엄마해석이고. 동생은 나는 거저먹자. 꼽사리끼자. 그러니까 이 모든 해석에서는 그 해석이 주님의 결정적 십자가가 있기 전에는 그 해석을 해석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이 뭘 먹었습니까? 제사장이 먹는 진설병을 먹었잖아요. 제사장+, 오늘 본문에서는 뭘 달라고 하느냐 하면은, 아히멜렉에게 칼을 달라. 우리에게 다른 칼은 없고 보니까 에봇 뒤에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은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서 있다. 이래 된 거예요. 여기 제사장+칼이니까, 칼은 왕이 차잖아요. 그러니까 제사장+왕, 제사장직과 왕직이 다윗에게 합세가 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데 여기서 합세가 될 때, 이 제사장직과 왕직이 어디서 합세가 되는가, 다윗에게 합세되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경험했던 사건이 있어요.

그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골리앗과 맞짱 뜨는 사건. 다윗이 대표로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골리앗과 싸웠던 그 사건이 있죠. 그 사건을 다윗이 다시 만난 거예요. 재회한 거예요. 그 사건을 만난 거예요. 오늘날 십자가사건을 매일같이 만나듯이. 내가 제사장이고 내가 왕이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성도다, 이 공식이 성립이 안 돼요. 나는 성도가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도 성도되게 하시는 거예요. 나를 성도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되게 하는 데에 나를 동원시킨 겁니다. 나의 구원은 애초부터 없어요.

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나는 하나의 장례 관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외피가 되는 거예요. 껍데기. 외피. 꼭 귤을 껍데기, 외피로 보여줘야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걸 까야 뭐가 들어있는 것이죠. 성도의 임무는 나는 성도다, 이게 임무가 아니고 까라는 거예요. 까서, 주님이 들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사건을 내가 둘러싸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사건이니까 바깥에 있는 외피는 사건을 따라서 날마다 변모가 되고 날마다 이동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동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것을, 한 아파트에 살면서, 금호아파트에 살면서 매일같이 보여주는 거예요. “강아지야! 니 고만 나와 같이 죽자.”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코로나로 니도 고생 많지? 나도 고생한다. 우리 같이 죽자.” 이처럼 떠날 생각. 늘 이렇게 떠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 그 사건을 둘러 싼 육체적인 모양을 갖고 있는 외피가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날마다 만나는 사건을 이야기해야 되지, 나는 누구다, 나는 성도 맞다, 믿는 사람 맞다, 본인을 내세우면 안 돼요.

그거는 누가 하는 짓이냐 하면은 사울이 하는 짓입니다. 한번 왕은 영원한 왕이다. 이미 골리앗 사건에서 사울은 잘린 거예요. 사울은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억지로 나를 왕이 되게 했기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 왕이다.” 말이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게 사건이야 되죠. 나는 왕이다가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처음에 겸손하면서, 왕이 안 되려고 겸손했잖아요. 겸손해서 왕이 되지 않으려고 했던 사건을 사울은 다윗의 등장으로 그걸 잃어버린 거예요.

국회의원은 왕을 위함이 아니고 뭘 위함이에요? 국민에게 봉사하는 거예요. 왕을 지키는 보디가드가 아니라 이 말이죠. 웬 다이아가 아니에요. 보디가드가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런데 나는 국회의원이다. 이래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권력을 지키는, 나는 권력을 지켜야 돼. 이래 돼버리면 처음에 가졌던 그 겸손한 사건, 나는 국민에게 봉사합니다, 라는 그 사건은 어디서 찾습니까? 이거는 현재 누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국회의원이 되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되도.

남자들이 여자들하고 결혼할 때, 진짜 진심으로 여자를 놓치기 싫어서, 당신이 나하고 결혼하면 눈에서 눈물 안 나오게 만들고 늘 행복하게 웃음으로 활기차게 하고 진짜 당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지 않도록 해주겠다. 결혼할 때는 무슨 소리를 못하겠어요? 결혼해놓고 애 낳고 난 뒤에는, 직장생활 더러워서 못하겠다, 사업할 테니까 친정집에 가서 사업자금 대돌라고 하라고 이러죠. 니도 협조해라. 나만 고생하느냐, 니도 고생해야지, 딴소리가 나와요. 내가 고생해서 니 호강해줄게, 라고 했던 첫 사건이 어디에 가버렸어요? 그 사건이 어디에 갔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몰라요. 인간은 장담할 잽이 못됩니다. 장담할 위치에 있지 않고요. 잠언서 27장 1절을 한번 봅시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여기서 나왔잖아요. 나는 뭐다? 알 수 없다. 나는 알 수 없는 거예요. 알 수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은 사건을 멈추지 않으니까. 내가 굳이 알 필요가 없어요. 그날 알려준 사건을 나의 외피로 담아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잘났다, 못났다가 아니라 나는 오늘 이런 사건을 주님한테 선물로 받았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나는 오늘 떡만두 먹었다. 사건이거든요. 코로나 때문에 오늘 떡만두 먹었다. 이게 하나의 사건이다 이 말이죠. 떡만두 먹고 그 뒤에 사건은 내가 예상 못하죠. 내일 일을 예상 못하잖아요. 예상 못하면 여기서 나올 당연한 것은 뭡니까? 감사와 고맙소. 그래서 애들한테 불만이 있는 이유는 애들이 저렇게 나올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기 때문에 문제인 거예요. “니는 내가 알아. 내가 니를 안다고. 아이고, 니 뻔하지. 뭐.” 미리 예상하니까 애가 기분 나쁜 거예요.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난데, 엄마가 뭔데 나를 예상하느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자, 사울과 다윗에게 있어서 드디어 뭐냐, 전쟁상태에 돌입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에 의하면 전쟁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 이래 되는 겁니다. 전쟁없이는 구원이 없다. 전쟁이 없이 구원이 없는데 사울이 하는 전쟁방식,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었습니다. 사울이 하는 방식은. 어제 낮 설교에 의하면 사울이 하는 방식은 무슨 방식이냐 하면은 힘가지고 하는 전쟁이고, 힘은 무엇을 전제로 한다? 입자, 내가 여기 존재한다. 입자를 전제로 한다. 입자가 되려면 힘을 계속해서 응축이 되어야 해요. 끌어 모아야 돼요. 노후대책을 하려면 돈을 계속해서 끌어 모아서 30년, 40년 살 궁리를 해야죠. 내일 일은 모르지만. 성경에 모른다고 되어 있지만. 우리는 안다고 치고 계속 힘을 모으는 거예요.

힘으로서 누굴 지킨다? 나를 지키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나라는 게 없다는 겁니다. 나라는 게. 뱀의 영역과 예수님의 영역, 예수님 안이죠. 이 두 영역밖에 없어요. 이 영역이 뭐냐 하면은 이게 역사거든요. 역사. 그럼 여기서 입자가, 입자는 뭐냐 하면은 해체되어야 해요. 날마다 해체된다고요. 예수님이 이걸 보여주는 거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나됨을 유지하는 모든 것들은 다시 아버지의 사건으로 일임하게 하옵시고 나는 거기에 맡기게 하옵소서. 사건이 나한테 있어줄 때, 그 사건을 담는 그릇이 될 때 그게 바로 그날 한 번의 ‘나’가 되는 겁니다. ‘임시적 나’가. 사건을 부여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입자가 되게 되면 출발점이 뭐냐 하면은 사건은 날아가 버리고 존재가 계속해서 존재이고 싶어 하는, 이게 억지가 발생되고 무리수가 발생되는 겁니다. 비켜라! 내가 간다. 이 말 아닙니까? 비켜라! 내가 간다. 비켜라! 나라는 입자가, 내가 간다. 이 해체 과정 중에서 하나의 예가 이런 겁니다. 하나의 해체 과정 중에서 하나의 쉬운 예가, 70년 동안 직장생활하면서 가정을 먹여 살렸다. 그것도 60년도 아니고 +10 보태가지고 70년 동안 가정을 먹여 살렸어요. 돈을 벌여줬다 이 말이죠. 그래서 자식이나 그 아내가 굉장히 존경스러워 해요. 근데 12월 말로 백수가 됐어요. 갑자가 자아가 해체가 됐어요.

왜냐하면 입자가, 나는 나다울 때 존경을 받았는데 이제는 존경거리가 날아가 버렸어요. 이제는 돈을 갖고 오는 사건이 없어졌어요. 돈을 갖고 오는 사건. 그전까지는 하루 세끼 밥 먹어도 밥 먹을 만했다고 주장했거든요. 이제는 자기가 알아서 밥 차려야 돼요. 이제는 삼식이에서 벗어나는 걸 적응해야 돼요.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어떻게 하면 나를 없앨 수 있느냐, 나라는 입자를 없앨 수 있느냐,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입자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고 싶어서, 혹시 칼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봤고. 8절에 봅시다.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라고 물었죠. 다윗은 여전히 자기가 자기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이걸 여러분들이 다윗은 왜 자꾸 그런 나쁜 생각을 하냐고 하는데, 인간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긴 그림자가 있어요. 망토처럼. 긴 그림자가 있다고요. 긴 그림자. 여기서 하나의 의식하는 순간, 긴 그림자, 과거의 의식들이 여기서 뭉쳐지는 거예요. 뭉쳐져서 입자처럼 행동하게 되면 이게 바로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럼 다윗은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체험한 내용은 뭐냐 하면은, 장군이니까, 군인이니까, 군인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합니까? 칼이나 창이 있어야 나를 보호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이죠. 요즘 같으면 돈이 있어야 산다. 산다는 이러한 상태 앞에 뭐가 있어야 해요? 산다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뭡니까? 돈이 있어야 산다는 것은 줄곧 우리의 과거에서 그렇게 알고 왔던 거거든요. 이게 뭐 큰 문제가 될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겁니다. 하나의 사울의 장에서 이리저리 막 쫓겨 다니면서도, 다윗은 자기의 존재 위주의 그것을 계속 고수하면서 살 궁리를 찾는 거예요. 살 궁리를 찾는데, 살 궁리를 다윗이 찾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살 궁리를 옳은 걸로 인정해줬습니까? 인정 안 해줬습니까? 인정해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 골리앗 사건을 반복시키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요새 말로 십자가사건을 반복시키는. 골리앗 사건을 반복시키는 거예요. 왜? 그게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뽑아내고자 하는 원래 하나님의 자기 목적이기 때문에. 다윗은 거기에 다루어지는 하나의 도구에, 수단에 지나지 않거든요.

분명히 다윗은 제사장 맞고, 맞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왕이 돼요. 다윗이 제사장이 맞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다윗이 왕이 되어서 사독제사장을 임명하기 때문에, 제사장직은 왕 안에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다윗이 누굴 임명한다고 했습니까? 제사장을 임명하죠. 임명한다고요. 옛날 제사장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론계통에서 나왔다고요. 아론계통 이게 작살이 나버리고, 다윗이 제사장을 임명하는 임명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임명한다는 그 말은, 다윗이 갖고 있는 그 지위 자리에 새로운 노선의 제사장이 잠복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이스라엘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나왔던 이스라엘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또 이스라엘이 나오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 속에서 뭐가 나와요? 또 이스라엘이 나와요. 꼭 러시아인형처럼 큰 인형에서 작은 인형이 나오고 그 작은 인형에서 또 작은 인형이 나오고..., 그 이스라엘의 이름을 가진 분이 나타납니다. 마지막에.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인 거예요. 마지막 예수님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잠복되어 있습니다. 잠복되어 있는 예수님이 나타나가지고 거꾸로, 다 이루시고 난 뒤에 자기 노선에다가 그 노선을 흡수통합 시켜버리면 이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엘리야나 모세처럼.

이것이 구약사람들은 이렇게 되어 있고, 신약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구약 사람들이 받는 이 과정이 있죠. 우리는 바로 못 가고요. 우리는 이들의 경로를 밟아야 돼요. 아브라함 이삭 엘리야..., 이 경로를 밟을 때 누가 도와주는가, 성령이 와버리면 옛날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이 나왔던 그 경과를 우리의 짧은 인생 속에서 그걸 재현시켜주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책이 아니고 구약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냐 하면은 다 우리 이야기인 겁니다. 사울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에요? 바로 내가 사울이에요. 바리새인이 바로 내가 되는 겁니다. 나라는 권력을 그 소년 하나가 훼방질 할 때는 우리는 가만히 있겠습니까? 쫓아내야죠.

뭐, 우리는 권력도 없습니다마는, 모든 게 권력이잖아요. 내가 여기 입자로 있으면 그자체로 그게 하나의 권력이 되니까. 나를 힘들게 할 때는 그냥 밀어내는 거죠. 어제 오후 설교처럼, 왜 빌닷이 욥에게 악담을 퍼붓고 세상에 있는 저주라는 저주는 한꺼번에 다 모아서 왜 쏘아대는가, 욥에게. 그거는 뭐냐 그 저주를 평소에 누가 무서워했는가 하면은, 그 저주가 행여 빌닷 나에게 올까 싶어서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욥은 그런 저주를 다 받고 있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그런 저주가 왔거든요. 욥에게.

그러나 빌닷은 욥에게 온 저주가 행여 불똥 튀어서 나한테 올까 싶어서, 욥을 밀어냄으로서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를. 본능적으로. 밀면서, 너는 악하고 죄가 많아서 그런 저주를 받았고 나는 착하기 때문에 니한테 주어지는 그런 처참한 말로는 나한테 안 돌아오고 싶어. 이래 되어야 되는데, 자꾸 반복하니까, 안 돌아올 걸, 암 안 돌아오고말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믿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잖아요. 모든 문제는 공포라고. 뭔가 무서움이 있어요. 무서움. 자꾸 무서운 거예요. 누가 너를 무섭게 하더냐? 몰라요.

정답을 알려드릴게요. 내가 나를 무섭게 하는 겁니다. 여기 내가, 나의 존재가 무섭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무서움을 벗어나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사건을 주셔가지고 내가 해체되면 돼요. 해체되는 이걸 가지고 사자성어로 뭐냐 하면은 영구 없다. 영구~ 없다~ 영구 있는데 본인이 없대. 영구~ 없다~. 영구 없다는 김밥의 원리거든요. 제가 아는 상식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요리를 하시지만 저는 요리를 할 줄 모르니까. 김밥 안에 시금치 들어가고 게맛살 들어가고 단무지 들어가고 햄 들어가고, 참치는 특수로 해서 따로 들어갈 수 있고, 그 다음에 잔멸치 들어갈 수도 있는 문제고, 그건 빼도 괜찮고요. 그렇게 들어갈 때에, 오뎅도 들어가고요.

근데 그걸 뭐로 둘러싸버립니까? 마지막 최종 김으로 둘러쌀 때 그걸 김~밥~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지막 보이는 모습이 김밥 모습이거든요. 내 안에 내가 아닌 해체된 조각조각이 들어있지만 그걸 둘둘 말아서 그걸 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라고 행세하면 안 되고, 나는 나의 내장을 보여야 되는데 그 내장이 뭐냐 하면 주님의 사건, 여자의 후손이냐 아니면 뱀의 후손의 사건이냐를 보여야 됩니다. 지금 다윗은 김밥이에요. 사울이라는 김밥에게 안 지려고 나라는 김밥을 지키려고 이렇게 도망치고 미친척하고 하는데, 다윗의 앞에 남아있는 그 모든 시간들은 결국 뭡니까? 그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이 김밥이 이제는 해리되는 거예요. 찢어지는 거예요. 찢어지면서, 그 내부가 나오면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다윗이 밧세바 또는 그 남편을 죽이잖아요. 그때 다윗은 안 거예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내 내장을 원하지 외피를 원하지 않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 잘 드리는 내가 아니라 상한심령, 김밥이 맛이 갔어. 맛이 가가지고 상한심령을 드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골리앗을 이긴 것은 다윗의 우수함이나 훌륭함이나 신앙 좋음이 아니고, 장차 해체, 해리될 수 있는 인간으로, 사건을 사건답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으로서 일찌감치 골리앗을 이긴 겁니다.

골리앗은 입자예요. 키가 3미터쯤 되잖아요. 골리앗은 입자에, 덩어리에, 그냥 모델케이스죠. 모델케이스. 사람들이 다 부러워해요. 힘의 형상화. 힘이라는 골리앗이잖아요. 힘이라는. 울산현대중공업에 가보세요. 그 크레인을 뭐라고 합니까? 골리앗 크레인. 다윗 크레인이 아니라 골리앗 크레인이에요. 골리앗 크레인. 힘의 대표적인 상징이 골리앗입니다. 힘을 누가 이기느냐,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다윗이 힘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에게 그러한 오해를 하고 있는 곳이 사울의 장이고 거기서 다윗은 쫓겨 다니고 있는 겁니다. 쫓겨 다니는 것은 구원이 아니에요. 사울이 완전히 망해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사울이.

그럼 사울이 망할 때 누구도 망해야 됩니까? 다윗의 입자성도 같이 망해야죠. 니는 죽고 나는 살자. 이건 안 돼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내 안에 것이 살고, 내 안에 것이 살기 위해서는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고요.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고 다 죄인이 될 때, 그런 죄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사건에 매일같이 반복해서 그 사건을 고백케 하는 그 일이 바로 성도가 되고 그것이 바로 진짜배기 다윗이죠. 사울이 무섭다고 칼을 찾고 지 살라고 미친 척 해가지고 침 질질 흘리면서 하는 행위는 그러한 몰골은, 모습은, 그거 뭐 사울이나 다윗이나 똑같죠. 나라는 개별체, 입자를 살리겠다고 설치는 거요.

이거는 뭐 굳이 다윗뿐만이 아닙니다. 1945년인가 일본이 패망했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져가지고 항복했는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미국이 대표하는 연합군이 전범재판을 열었어요. 전범재판을 열었는데, 거기에 보면 오까와 슈메이가 법정에서 광인처럼 행동했어요. 오까와 슈메이는 법정에서 앞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고 갑자기 기도하기도 하고 울고 웃고하는 장면. 결국 오까와 슈메이는 심신장애가 판정이 돼서 처벌을 면했습니다. 근데 오늘 사무엘상 보니까 다윗은 갈 데가 없어요. 왜? 모든 곳이 사울의 장.

그래서 피신한 곳이 어디로 피신을 했느냐 하면은 가드왕 아기스, 10절에 봅시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가 누구냐 하면은, 옛날에 이스라엘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적으로 싸웠던, 다윗의 직업은 군인이었으니까. 적으로 싸웠던 그 적군에게 다윗이 뛰어들은 거예요. 갈 데가 있어야죠. 이래도 적이고 저래도 적인데 갈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목사하고 싸운 뒤에 교회 나오고 나서 어디로 가느냐, 교회에 가죠. 어차피 적인데 뭐. 어차피 적이라고 별 게 없으니까. 가는 겁니다.

갔을 때에, 사울의 권력장을 떠났을 때에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가드나라가 사울 권력장과 서로 적이니까, 대적관계니까, 이 이스라엘이, 사울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이 망하기를 원하죠. 그 망하는 것을 가드 왕이, 신하들도 망하기를 원하고 있죠. 적이니까요. 적이 망할 때 자기가 승리 아닙니까? 그 망하는 모습을 누가 대신 보여주는가, 본의 아니게 다윗이 저주받아 망하는 모습을 가드 왕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때려죽여야 하는데, 때려죽일 가치가 없게 스스로 만든 거예요.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은 다윗이 누굴 쳤다? 다윗이 자신을 친 겁니다. 어떠한 관점에서? 세상적인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치는 거예요. 세상적인 관점에서.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그런 이야기를 했죠.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제가 목숨을 버리고 주를 따라가겠나이다.” 이게 세상적으로 보게 되면 굉장한 헌신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단의 헌신으로 보이죠. 주님께서 그걸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인정 안 했죠. 왜냐 하면은 그것은 너의 사건입니다. 너의 사건. 주님의 사건이 아니에요. 나의 사건은 내가 이렇게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기도 열심히 하고, 이거는 어디까지나 나의 나 됨을 위한, 나의 천국행을 위한, 노리는 나의 사건이죠. 나의 사건은 구원이 안 됩니다. 나의 사건은 구원이 안 돼요.

헌신 중에 헌신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바로 선교사예요. 그 선교사도 미국 말고 영국 말고 어느 선교사. 아프가니스탄. 아마존도 괜찮아요. 사람 안 죽여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나라라는 것. 아마존이나 뭐, 저도 못 갑니다만, 40도 기온에다가 습도 90퍼센트에 말라리아 모기약 바르고, 발라도 안 되고 그냥 견디기만 하지만. 그런데 여기는 죽이라고 덤비는 거예요. 아프가니스탄 이거는 죽이라고 덤비는 거예요. 이거는. 그리고 남수단 톤즈를 만나는 거예요. 울지마 톤즈. 의사이면서도 대장암 걸려 그 신부 죽었잖아요. 영화로도 나오고. 이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이거는 구원 사건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해서 구원이 안 되니까 하는 짓거리에요. 구원이 안 되니까. 선교사들한테 이 이야기를 한다고 선교사들이 정신 차리는 것은 아니지만.

김밥은 스스로 파괴되지 않아요. 왜냐 하면은 김을 지키기 위해서 그 내부구조를 자기가 집어넣기 때문에 김밥은 옆구리 터지지 않아요. 김을 찢으려면, 김 자체를 찢는 그 사건은 주님이 채워져야 돼요. 주님이 채워줘야 돼요.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에 재산 바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다윗이 미친 척 해가지고 아기스 왕에게 가는 모습은 이거는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다윗이 우리를 대표해서 체험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악마와의 전쟁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이건 니 방식이야. 니 방식.

그렇게 해서 결국 다윗이 뭘 외치겠습니까? 나는 살아남았다. 고생 꽤 해서. 잘났다. 그건 지 잘난 것 밖에 더 돼요. 지 잘난 것밖에 더 됩니까? 다윗이 그걸 알아야 돼요. 왕직+제사장직은, 이걸 누가 줬느냐 하면은, 이 지위를 합쳐서 기름부음이라고 합니다. 이 기름부음의 이 직은 주님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점점 더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윤곽이. 인간은 어떤 장이 닫혀버리면 자꾸 예상하게 됩니다. 예상을 하게 되면, 아까 잠언서 27장 1절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니는 뭘 모른다? 내일 일을 모른다.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내일 일을 몰라야지’가 우리의 할 일이 아니고. 달력 보면 ‘내일 뭐 할 건지 내일 일을 내가 다 아는데.’ 이래 되잖아요. 그것을 쭉 밀어붙이라 이 말이죠. ‘그래, 내일 일을 나 몰라. 내가 열두 시에 누굴 만나야 되는지 나 몰라.’ 이게 말이 돼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내일 열두 시에 누구 만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몰라, 몰라, 알 수가 없어.’ 이건 자기가 조작하는 거죠. 자기 김밥을 자기가 오뎅 넣고 단무지 넣고 지가 둘둘 싸는 거예요. 김밥이 이래 있는데, 나는 아침 아홉시에 운동하는 것을 나는 몰라. 나는 열두 시에 누굴 만나는지 몰라. 네 시에 택배가 오는 것을 나는 몰라.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이거 자기가 조작하면 안 돼요. 

내일을 모른다는 것은 주님의 사건화 되어서 쳐들어와야 될 문제이지, 내가 “예, 시키는 대로 모르겠습니다.” 이런다고 모르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사건이 쳐들어올 때, 나라는 입자가 사건이 마주칠 때 뭡니까? 주님 주시는 구원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사건이 나를 통해서 계속 반복될 때,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성령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기름부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게 어려우십니까? 어렵지 않죠.

그러니까 그냥 살면서 내가 사는 이 모든 짓거리는 잠언서 27장 1절, 내일 일을 모른다는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로서 뱀의 장속에서 나는 태어났고, 이제는 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는 일은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라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역의 자리  (0) 2021.03.22
십자가 관점  (0) 2021.02.15
시간 중지  (0) 2020.12.28
이동된 거룩  (0) 2020.12.28
하나님의 진지함  (0) 202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