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26강 마태복음27장 33절-44절(시간중지)20201130-이 근호 목사
자, 마태복음 27장 33절부터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가 쭉 나와 있어요.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보고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고, 거기에 도착지점이 있어요. 골고다 즉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렀고, 거기서 34절에 보면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했고, 예수님은 그걸 거절했고, 그 다음에 35절에 보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서 나누었고, 그 다음에 37절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사칭했다는 그러한 조롱의 취지로서 죄패를 붙였고, 그 다음에 혼자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흉악한 강도 둘을 같이 세트로 묶어서 처형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후대의 사람들에게, 흔히 표현하자면 정치적으로 저지를 했고요.
그 다음에 39절에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모욕했고, 그 다음에 40절에 보면 성전을 사흘 만에 부수고 다시 짓는다고 했던 당신이 한 게 뭐가 있느냐, 결국 이거는 초라한 말로만 보여줬잖아. 맨날 보여준다고 해놓고 보여주지도 않고, 이주일도 아니고 말이죠. 맨날 보여준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보여주지도 않고 그냥 허무하게 십자가에 죽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기대했던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점에 대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분노를 유발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사건이라고요? 십자가사건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분노를 갖고 있어요. 제대로 십자가를 지나면 이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 다음에 42절에 보면 더욱더 노골적이죠.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이거는 놀리는 겁니다. 자기는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라고 하면서 니 몸 하나 추스르지도 못하면서도 남까지 추스른다고 그렇게 허풍을 떠느냐. 니가 한 짓대로 동일한 결과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 누구 원망하지 마라. 이렇게 했고, 42절 끝에 가면 당장이라도 기적을 베풀어 내려오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어줄게. 그다음 43절에 중요한 것이 나와요.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어떤 조치가 있는가 한번 보자. 근데 그런 조치가 없으니까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신뢰가 깨어졌다. 이렇게 거기 현지에 있던 사람들이 저런 평가를 내리는 대목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습니다.
이 대목들을 보면서 뭘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은, 하나만 생각하면 모든 문제는 해석이 다돼요. 주님이 시간을 끊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드라마에 어떤 드라마가 있었는가 하면은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 어디 양평인가 스위스마을인가에서 촬영했다고 한 그게 있어요. 거기에 보면 주인공만 딱 있고 나머지기는 다 스톱이 되어 있어요. 전지현하고 김수현하고 이야기하는 그 대목만 딱 있고 나머지기는 전부 다 정지가 되어 있어요. 시간이 어떻게 되어 있어요? 시간이 스톱이 되어 있죠.
시간을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스톱을 시키는가 하면은, 왜 주님께서 인간의 시간을 절단 내고 끊어버리는가 하면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간이 계속 무한대로 흘러가니까 조금씩 내일되면 더 질적으로 나아진다는 희망을 인간들이 갖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조금 부족해도 너무 탓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지금 내가 뭐가 문제고 뭐가 실수고 뭐가 어설픈지를 개선해가지고 점점 더 낫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성급하게 끊지 마시고, 이게 너의 전부야, 너의 한계야, 라고 끊지 마시고 조금만 시간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실망시키지 않도록 더 개선된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라고 인간들은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보다 더 점진적으로 모든 도덕적이나 질적으로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들에게 내재되어 있다. 잠복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걸 끊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니가 아무리 시간을 끌어봤자 니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짓는 겁니다. 치즈핫도그인가, 안에 치즈 들어있는 거 있잖아요. 치즈핫도그를 처음에 자르나 중간에 자르나 본질은 뭡니까? 치즈가 나오죠. 본질은 나오죠. 인간들은 이 본질이 좀 더 개선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주님은 십자가가 종말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었다는 이 말은 이 세상은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본질 부분이 드러나도록, 칼로서 자를 때에 치즈 있는 부분까지 도달할 때 딱 끊어버리면 이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진척이 있을 필요가 없죠. 내일 모레가 되나 뭐 그 본질은 달라질 게 없기 때문에. 딱 끊었을 때에, 전지현이하고 김수현이하고 그 둘만 이야기하고 나머지기는 뭡니까? 전부 다 스톱이 되는 거예요. 그 더러운 본질의 스톱.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욕했던 사람 있잖아요. 욕한 사람이, 예수님 조롱한 사람이 자기 집에 개보고 조롱하겠습니까? 그러지는 않잖아요. 예수님은 조롱할만해서 조롱했잖아요. 시도때도 없이 누구나 만나면 조롱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귀한 것 알고 무엇이 예의가 된다는 것 알고 무엇을 조심해야 된다는 것을 다 아는 사람들이라 이 말이죠.
그러나 유독 십자가에 대해서만 조롱할 수밖에 없는 본성이 나왔잖아요. 그 십자가 앞에서 조롱할 수 있는 본성이, 이게 진짜 니 모습이라고 주께서는 그걸 고정화시켜버리는 겁니다. 확정짓게 해버리는 겁니다. “니가 십자가에 와서 니가 한 짓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게 니가 다른 데에 가서 아무리 인품이 우수하고 배려심이 있고 남을 많이 도와줘도 진짜 니 본질은 내가 죽는 이 현장에서 니는 들통 다 났어. 니는” 끊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의미예요.
그러면 시간을 끊어버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와 반대되는 것은, 한번 정리해봅시다. 시간절단은 어디서 이루어진다? 십자가 현장이죠. 십자가현장이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이 있는 곳. 이래 되죠. 현장이라는 공간을 넘어서서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그 장소가 스톱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진척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진척해봐도 소용이 없어요. 흔히 시험 칠 때 끝나서 시험지 걷고 있는데, “쌤요! 이거만 쓸게요.” 하는 애 있잖아요. 그러면 선생님이 뭐라고 합니까? “니는 100시간 더 줘봐야 소용이 없어. 빨리 내!” 이러잖아요. 그걸 십자가가, 하나님이 하신다니까요.
여기에 반대하는 반대세력의 제안이 뭐냐 하면은 인간개조프로그램이 있어요. 이걸 가동시키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개조프로그램이 되려면 이거는 무슨 요소가 필수적이냐 하면은 시간요소가 필수적이에요. 차츰 나아진다. 조금씩 나아질 기미기 보인다 하면 그 사람한테는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가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개조. 그럼 인간개조 할 때 니는 이정도 하면 됐다는 최종목표가 있겠죠. 그게 뭐냐 하면은 악마의 마음에 흡족해야 돼요. 악마의 마음에.
악마의 마음이 뭐냐, 악마의 마음은 독립 선언한 거거든요. 이 천사가. 하나님 필요 없고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겠다가 아닙니까? 독립 선언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 자체로 충족적이다 이 말입니다. 나 자체로,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 이 말입니다. 인간개조. 거기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이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사는 현실은 이 인간개조프로그램을 가지고 모든 일의 설명이 다 가능해요.
어떻게 가능하냐 하면은 여기에 스타트지점이라고 해봅시다. 여기 A하는 사람, B, C, D가 있다 이 말이죠. 쭉 있는데, 제가 전에 예를 든 게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데, 촌에서 되게 가난한 자기 밭도 아니고 남의 밭 대리해서 농사짓는 가난한 집안의 외동아들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자기 엄마아빠가 고생하는 걸 보고 자기는 고생 안 하겠다고 열심히 공부를 해가지고 9급 공무원에 합격했어요. 옛날이야기니까 한 5급 공무원이었지만 지금은 9급이죠. 합격했다 이 말이죠. 동사무소 서기가 된 거예요. 동서기가. 그럼 이 사람은 뭡니까? 그 자체가, 이거는 자체적으로 너무 영광스러운 거예요. 자기 소원이 달성됐잖아요.
이걸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이걸 가지고 짧은 목적이죠. 짧은 목적. 나는 뭘 생각했다? 무엇을 나의 이상으로 봤다? 공무원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본 거예요. 그게 자기의 종결점이에요. 공무원 9급만 된다면 더는 나는 소원이 없다. 이게 종결점인 겁니다. 저 여자만 내게 허락한다면 내가 어떤 벌을 받더라도 저 여자만 내게 주신다면 더는 소원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목적입니까? 짧은 목적. 사실은 짧은 목적이라는 말은 잘못됐고요. 짧은 목표예요. 짦은 목표. 목적과 목표의 차이점은 강남강의에 보면 나오거든요. 짧은 목표가 된 겁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얼마나 하면 30살이에요. 30살 때 자기 인생 소원의 목적을 한 25년 동안, 다섯 살부터 불우한 자기집안을 보면서 했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진 거예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만약에 나이 60, 퇴직할 때까지 9급 공무원으로 계속 있다. 같이 9급 땄는데 다른 사람은 9급에서 7급, 7급에서 5급으로 막 승진하고 있고. 다른 친구는 어떤 대기업에 들어가서 했을 때에, 이 사람은 9급 공무원으로 나이 60까지, 9급 공무원을 무려 30년 동안, 그럴 일이 없지만, 이 정도면 잘려나가야 해요. 예를 들면 30년 동안 9급 공무원으로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얼마나 측은해할까요? 아이고, 좀 당신 목표를 길게 가지라고 하겠죠. 그렇죠.
결국 인간개조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작은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야망을 가지라고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겁니다. 프로그램이. 인간개조.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갈급한 심령이 되겠죠. 늘 목마른. 먹어도, 먹어도 갈증을 일으키는 욕망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바로 중독이라고 합니다. 중독. 인생살이에 중독된 거예요. 인생살이에. 중독된 사람들 이 사람들 빼놓고 나머지기 다입니다. 11층 이 사람들 빼놓고. 모든 대전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인생살이에 중독된 사람들이에요.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몰라요. 그냥 중독된 거예요. 자기 욕망에 끝도 없고 한도 없어요. 대충 자족하고 만족하고 싶어도 옆에서 가만두지를 않아요. 아침에 산책해도 옆 사람이 가만두지를 않고 허리척추교정하려고 하는 그 모임에서도 가만두지를 않아요. 너그 남편 뭐하시노? 이래되면 그 다음부터 또 생각이 바뀌어요. 내가 너무 짧았구나. 내가 너무 짧은 목표였어. 좀 길게 갈걸. 이걸 잘 아는 곳이 어디냐 하면 교회입니다. 교회기도제목이 자꾸 이렇게 짧은데서 넓어져요. 대전에 있다가.. 계속해서 자꾸 길어져요. 길어져. 완전히 음주측정하는 것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더더더더더....,
“인간개조프로그램을 하게 되면 당신의 욕망은 당신의 기대 이상으로 당신은 성공한 사람이 될 겁니다.”라고 해서 중독에 빠지게 하죠. 대표적인 중독은 이 세상에서 딱 두 가지죠. 하나는 알코올중독과 도박중독. 이것이 아주 대표적인 겁니다. 이 사람들한테 돈 한 푼 줘서는 안 되겠죠. 술 먹고 담배피우는 사람들은 이런 가망성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하고 인생을 논하고 인생을 같이할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것이 좋아요. 알코올중독과 도박중독. 또 어떤 사람은 차 바꾸는 중독, 또 여러 가지 중독도 있고. 취미생활로 등산가는 중독도 있고 낚시하는 중독도 있고.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런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요. 골프 중독이라든지. 한계가 있어요.
어떤 한계냐 하면은 아무리 해봐야 메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미 고참들이 있어가지고 자 포자기 하는 경우가 있지만, 도박중독과 알코올중독은 그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한계로 끝이 없어요. 끝이. 지금 9살, 5살 아들을 뭘 시키느냐 하면은 부모들이 트로트 시킨다고요. 트로트. 임영웅이처럼 트로트 가수하라고. 그런데 임영웅이부터 해서 일곱 명이 다 차지해버렸는데요. 김호중이 50만장 팔리고, 다 차지해버렸는데요. 뭐. 어지간히 해서는 안 되거든요. 이거는 어떤 한계가 있잖아요. 한계가. 1부 리그 2부 리그가 있다고요. 손흥민이 아무나 손흥민이 됩니까? 동네축구에서 공이나 차면 그만이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 도박중독자 이거는 한계가 없어요. 왜냐하면 먹은 만큼 그만큼 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에. 체질화된 거예요. 체질화. 자 그렇다면 이 인간개조프로그램이 없는 세계는 없죠. 없는 시대도 없었고. 그 프로그램의 끝장을 오늘 본문이 보여줘요. 끝장을. 그들이 끝이 없다고 본 거예요. 인간은 개조될 수 있다. 계속 희망을, 희망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우리는 계속 희망을 갖자. 지구에서 못 살면 화성으로 이사 가면 되지. 계속해서 희망을 품는데, 그 희망, 희망을 내가 미리 와서 보여줄게. 그게 바로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그 방향이, 그냥 텅텅 비어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방향으로 가는 그 길에,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매 맞겠다고 나서버린 거예요. 날 죽이고 지나가라. 의도적으로 죽으려고 나타난 거예요. 차가 지나가는데 역주행해서 지나가버린 겁니다. 무슨 욕을 쓰면서? “유대인의 왕”이라든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내가 하나님께로 왔으니”라든지. 그들이 목적으로 하는 그 용어와 단어와 개념을 주님께서는 자기 몸에다 다 실어가지고 마중을 나와서 그거 하려거든 나를 박고, 나한테 돌진하고 지나가라. 나 죽이고 지나가라. 이래 된 거예요.
이 말은 그들이 쓰는 하나님개념, 이스라엘개념, 천국개념, 율법개념은, 이 모든 것은 실제 하나님이 주신 뜻에 의하면 그게 악마적이라는 것을 들통 내는 방법이에요. 이점에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면 우리 자신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결국 무엇에 부딪침입니까? 어디에 부딪침입니까? 십자가에 부딪침이에요. 어떤 산이 있는데, 문경에 가면 산에 채석장이 있어요. 채석장. 산에 나무가 이래 있지만 하얀 바위의 속살이 드러내겠죠. 바위에다가 천주교에서 십자가상을 부각해서 딱 조각해놨어요. 그러면 이거 구경하려고 주차장이 마련되었으니까 차들이 와가지고 여기에 차들이 스톱해야 되겠죠. 저 십자가 뒤가 어디에 있는지 해서 돌진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차 다 부서지죠.
이 말은 십자가 바깥으로, 십자가 충돌에서는 나라는 이름으로는 더 이상 뚫고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에서는 내가 부서질 장소죠. 내가 해체장소입니다. 내가. 내가 해체될 장소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어떤 인간도 여기서 받아들이지 않고 다 돌려보낸다면 결국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은 핍절한 세계에요. 바짝 말라있는 세계, 어떤 풍요로움도 없는 세계에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 풍선 불어서 하늘에 띄우면 아름답죠. 근데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이 초라할 때가 언제냐 하면은, 하늘로 올라가다가 터져서 땅에 떨어진 쓰레기풍선을 보세요. 침 묻어있고 그렇죠. 쭈글쭈글 들러붙어있죠. 바짝 마른 풍선 있잖아요. 날지도 못하고 삐쩍 마른 풍선. 그 몰골이 바로 인간세계 몰골이다 이 말이죠. 니가 아무리 인품적으로 훌륭하다고 해도 십자가 앞에 딱 세우면 핍절한 모습. 메마른 해골의 집합소. 아무 살점도, 의미 있는 살점도 붙어있지 않는, 악독만 가득하다. 악독만.
이걸 좀 실감나게 보기 위해서 로마서 3장을 봅시다. 10절에서 19절까지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도 없도다. 이래 되어 있죠. 여기 선을 행하는 자, 그냥 너무 추상적이니까 여기다가 누구 특정인물을 집어넣어봅시다. 질병본부장 정은경을 집어넣어봅시다. 딱 집어넣고 모델을 삼아서 한번 보세요. 하나님을 찾는 정은경도 없고 다 한가지로 무익하고. 전혀 유익하지 않고 무익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고 하나도 없고.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저희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뭐가 있고? 독사의 독이 있고. 입술에 독이 있으니까 본인이 독사라는 뜻이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에는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저희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음과 같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욕을 해도 세상에서 못 될 수밖에 없는 지경을 한 곳에다가 다 집어넣어놓고, 이걸 십자가 앞에, 아까 채석장에 바위에 새겨진 십자가 보러 온 주차장에 있는 차들한테, 여기다가 다 퍼붓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자꾸 인간개조프로그램을 염두에 둬가지고, “내일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어요. 하나님. 기도 열심히 하면 내가 더 훌륭하게 됩니다.” 자꾸 시간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기대를 갖는데, 십자가는 모든 시간에 대한 기대를 아주 절단을 내버려요. 절단을. 절단내버리는 거예요. 두 다리로 걷는 두 발모가지를 아주 절단시켜버려요.
그러면 시간이 정지되었으니까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멈춤이 되겠죠. 멈춤. 십자가 안에 계신 예수님은 멈춤이 되는데, 바깥에 있는 사람은 지나가면서 조롱하고 있어요. 본인은 지금 안 멈추어있죠. 십자가 있는데 십자가 전방 26미터에서 걷습니다. 그다음에 십자가를 지나가게 되면, 15미터 지나갔다고 칩시다. 이 사이에 뭐가 흘렀습니까? 시간이 흘렀죠. 왔다 갔다 합니까? 자기 집에 가야죠. 뭘 왔다 갔다 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십자가가 꽂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라인이 중요한 게 아니고, 십자가의 시간정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멈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지금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열심히 지금 애쓰고 있는 중이라는 자기 미래상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 미래상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모든 인간들이.
지나가면서 곱게 지나가지 않고 자기 형편과 비교하면서 예수님보고 뭐하고 합니까? “아이고 안됐다. 불쌍하다. 측은하다. 좀 대충하지 너무 심했잖아.” 이런 식으로 껄껄거리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는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식으로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겁니다. 자, 이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가 이런 사람과 달리 성도라면,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 왔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시간정지를 내 몸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내가 여기서 또 지나가고 저녁을 해먹던 말든 이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 시간, 갇혀있는 시간, 오늘 제목이 ‘갇혀있는 시간’, 갇혀있는 시간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나의 모든 활동을.
갇혀있는 시간, 이걸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는데 ‘인생은 농담이다. 인생은 개소리다.’라고. ‘다 헛짓이다.’ 왜? 갇혀있으니까. 이래나 저래나 십자가가 본질이지, 십자가 바깥에 어슬렁거리고 하는 이런 것은 전부 다 게임이고 장난이고 오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설교인가요, 직업이라고 하는 것은 머뭇거림이다. 이거 해볼까? 이거 때려치우고 딴 것 해볼까? 머뭇거림이에요. 머뭇거림. 그러다가 나중에 60넘어서 은퇴하고 나이 70은 현장일 그만하라고 잘리고. 그다음에는 그림이나 그리고. 솔거돼서 참새 두세 마리 잡고 뭐. 그 일하시렵니까? 결국 인간은 뭐냐 하면은, 뭐 남들 보기는 여보, 내가 당신을 먹여 살리니 어떠니, 자식 키운다고 겨울에 바깥에서 고생했다고 하지만, 뭐냐 하면은 내 본질은 십자가 앞에서 농담한 거예요. 장난 친 거예요. 그냥. 할 게 없어서 한 거예요. 할 게 없어서. 이런 바른 소리는 참 오랜만에 한다.
왜 그 일 하십니까? 별 할 게 없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할 게 없어서. 할 게 없어가지고. 그럼 엄마 안 하고 스케이트 선수 될까요? 모태범처럼. 이세돌처럼 바둑 둘까요? 니는 바둑 두고 니는 스케이트 하라 이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뭡니까? 전부 다 장난이에요. 전부 다 장난인 거예요. 검찰총장 하다가 나가든, 법무부장관 하던 대통령 하던 전부 다 머뭇거림이라니까. 아무 의미 없고. 그러니까 낙이 없어 집을 가졌는데, 집을 가져도 낙이 없네. 나이는 먹죠. 시간은 가죠. 머리는 희어지죠. 애는 커가죠. 그냥 놀라고 하니까 돈이 없죠. 뭐하고 시간 때울 건데요? 뭐하고. 머뭇거림이라도 뭔가 해야죠. 뭔가. 뭔가 해가지고 하는데 해봤자에요. 해봤자. 결국은 죽음이라는 그 세력에서 못 벗어나죠.
자, 이 시간의 중지가, 절단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자 시간을 이렇게 작대기로 봅시다. 몽둥이로 봅시다. 쭉 가는데, 이게 과격하게 단절시켰기 때문에 결이 찢어졌어요. 찢어졌다고요. 찢어진 부분의, 찢어진 이 시간을 가지고 하늘나라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근데 이거는 하늘나라까지 안 이어져요. 이 지상의 것은. 이어지는 시간의 노선에 교체가 일어납니다. 시간의 교체가. 교체가 일어나는 이 지점이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아까 강의한 것을 다시 하면, 시간이 중지되었다. 앞에 붙이면 나의 시간은 중지되었다. 이거는 언제 중지가 되느냐 하면은 인간이 죽었을 때 중지돼요. 죽지 아니하면 자꾸 시간이 의식돼서, 미래현재과거가 계속해서 의식성을 지배하기 때문에 죽어야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이 십자가는 뭐냐 하면은 “죽어라!” 이 말이죠. “미래고 과거고 다 잊어버리고 죽어버려라!” 죽어버리면 주님의 시간으로 받아주는 거예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 내재되어 있고 의식 속에 있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은 점선으로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다 주님의 약속구현을 위해서 예비된 주님을 위한 시간이었죠. 근데 마귀가 이걸 뭐로 바꾸었습니까? 우리 인간 너를 위한 시간이라고 이렇게 거짓으로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행동은 과격한 것이 아니고, 진즉에 이렇게 시간의 끝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진즉에 알릴 일이었어요.
이래보시면 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지시고 죽으셨지만, 안 죽었다 치고, 죽는 척하고 이렇게 내려다보는 거예요. 지나간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안 보는 척하면서 실눈 뜨고 다 보는 거예요. 내가 죽을 때 막달라 마리아 왔는지 안 왔는지. 베드로부터 해서 이런 것들을 다 실눈 뜨고 보고 계시는 겁니다. 왜? 그들은 시간 속에 움직이는, 아무 의미 없이, 무의미하게 세월만 보내는 작자들의 그 피폐함, 그 핍절함을 예수님 나에 대한 분노로서 여러 가지 행동들과 말들을 끄집어내놓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십자가사건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행동을 우리 주님한테는 보이지 않으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잖아요. 십자가사건이 재현된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그때 그 모습들, 양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런 양상들이 반복해서 모아져야 돼요. 그런 일들이 유발되어야 해요. 그래야 그 한가운데 십자가사건이 있음을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으심에 대해서 불쾌와 불만을 갖고 있는 그 현장들이 계속해서 모두어져요. 모아져야 된다고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피리 부는 소년이야기 알죠. 독일의 전설에. 마을에 쥐들이 많으니까 골칫거리잖아요. 그런데 어떤 피리 부는 소년이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마을 한가운데서 일단 피리를 불어요. 불면서 숲으로 가버리면 그 피리 소리를 듣고 환장한 쥐들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피리 부는 소리를 따라서 숲속으로 가다보니까 자연적으로 어떻습니까? 도시가 깨끗해지는 겁니다. 쥐들이 한곳으로 다 몰리기 때문에. 십자가가 왜 성도에게 기쁜 소식이 되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없으면 전부 다 지 잘났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믿는 성도가 피리를 부는 거예요. 삐리리~~ 피리를 불게 되면, 그렇게 좌파냐 우파냐 했던 모든 인간들이, 니 정치성향을 드러내라고 하는 모든 인간들이 결국은 복음 앞에서 좌파우파 없이 전부 다 마귀자식이 되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 실체를 십자가 복음을 전파해야 십자가 앞에 다 드러나는 겁니다. 다 드러나요. 예를 들면 성경모임에 모여가지고 친목 하는데 성경이야기, 기독교이야기가 나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두 편이 있다고 합시다. 성경을 열심히 봐야 한다. 성경을 안 봐도 구원받는다. 이 두 가지 싸움에다가 삐리리~~ 십자가만 들이대면 둘 다가 십자가 원수가 되는 겁니다. 모자 하나 쓰시고요, 이제부터 피리 부는 소년으로 나가셔야 돼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성경을 봐야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성경 보는 나가 등장하고, 성경 안 봐도 되는 나가 있거든요. 나. 이 나는 시간을 의식하는 나예요.
앞으로 인간개조프로그램에 의해서 앞으로 개선할, 발전할 나를 나의 희망으로 삼고 그걸 삶의 보람으로 느끼면서,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요. 근데 삐리리~~ 삐리리 부니까 이거 더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이게 다 뭐냐 피폐한 모습이에요. 이런 짓거리가 바짝 말라 비틀어져서 이제 불어도 바람이 들어가지도 않는 풍선, 낙엽처럼 땅에 떨어진 풍선모습으로, 날지 못하는 풍선. 땅에만 기대가지고 잘난 체하고. 내 풍선 두껍다. 길다. 어떤 풍선은 길어요. 길면 뭐합니까? 뜨지를 못하는데. 아휴 나는 풍선이 짧아요. 짧은 목적, 긴 목적 백날해도 이게 하늘나라까지 뜨지를 못하니까. 이 피리 부는 소년처럼 우리가 피리를 불어버리면 그 성도 안에서 십자가 사건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아까 보셨죠? 뭐 이러니저러니 하고 조롱하죠. 그 조롱사건은 그 일로 일회성이 아닙니다. 그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십자가를 일부러 전하지 마시고요. 주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십자가현장이 되도록, 현장의 중심이 되도록 그렇게 자꾸 유도해요. 자, 유도하는 가운데서 어떤 식으로 십자가를 비난하느냐, 지금 그걸 봐야 되겠죠.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걸 구분해야 돼요. 예수님 비난과 십자가 비난을 좀 구분해야 주세요. 예수님 비난은 모든 기독교, 성당에서도 다 싫어해요.
그러나 십자가 비난은 교회부터도 이걸 비난해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기독교나 예수님 비난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은 기독교나 예수님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기독교도 성당도 예수님 존재함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거는 자꾸 시간에 대해서 희망을 갖게 된다니까요. 우리 교회가 커졌으면, 우리 모임이 커졌으면, 예수님께서 미래에 다시 재림하실 거야. 자꾸 예수님 존재를 생각해버리면 재림이고 뭐고. 천국이 올 거야, 계속해서 시간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만, 십자가는 이미 시간이 중지되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오시는 것도 이미 중지된 십자가 안에서만 예수님이 재림하시거든요.
재림은 구현인, 재림의 원뜻은 나타나심이에요. 나타나심. 커튼 뒤에 숨어 있다가 커튼 날아 가버리고 여기 있지롱! 하고 나타난 것이 재림이라니까요. 함께 계시는 분이 지금은 영광스럽게 가리어져있지만 그것이 나중에 역사가 끝나면 그 영광스러움이 그대로 노출되는 겁니다. 그 상태가 재림이잖아요. 함께 있음의 현상 중의 하나가 재림이 되는 거예요. 함께 있음이. 재림이 함께 있음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함께 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재림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구분해줘야 해요.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한 것과 십자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과 이게 차원이 달라요. 지금 마태복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십자가를 그 사람들은 모르고 비난했다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실 부처지. 예수가 아니야.” 지금 이런 식으로 공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는 예수인데 십자가가 웬 말이냐?” 이런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하고 십자가가 이게 결합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비난이에요. 왜냐하면 예수하고 십자가가 결합이 돼버리면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에, 내가 자체에서 원수가 되는 것은 내가 원치 않고 내가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님과 십자가를 결합시키기 싫은 거예요. 십자가는 한때 운빨이 나빠서 잠시 다친 거니까. 십자가는 그때 그 당시에 오해했는가, 우리는 그냥 예수를 믿자. 이런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인간이 예수님에 대해서 벌어진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지 예수님이 누구냐의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 예수님을 아니라고 했어도 여전히 예수님이었어요.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뭐가 이해가 안 됐는가 하면은 예수님은 이해가 됐는데 십자가 이게 제자들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얼마든지 십자가 그런 것은 까짓 것 하늘에서 천사가 와서 작살내면 그만인데 왜 그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일으키느냐 이 말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미래에 잘 될 것이다. 내가 미래에 천국 가서 열두 나라를 통치할 것이라는 미래가 있는 이상은 십자가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납득이 알죠. 십자가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조금만 기다리면 주께서 영광스럽게 올 건데, 왜 십자가를 일으키느냐 이 말이죠. 납득이 안 되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게 사탄의 생각이에요. 사탄의 생각은 계속 시간을, 뭔가 시간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미래에 괜찮은 시간이, 잘 될 거야! 맨날 이 소리. 잘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개코 소리, 니 본질이 죄인데 잘 될 거라는 소리는, 내가 너한테 절단 내니까, 엿가락, 엿가락 뚫어 보니까 이미 그 안의 시간이 백날 천날 지나가도 멸망의 요소가 가득 들어있는, 이미 그걸로 끝난 것을 십자가가 아니면 알 길이 없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렇게 상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탁자 두 개 연결시켜놓고 그 위에 누워서 힘센 강호동이 와서 두 동강을 내버리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예요. 내 더러운 본질이 얼마나 나오는지 누가 좀 엿가락처럼 깨가지고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물론 성령이 그렇게 하십니다. 매순간 성령이 그렇게 해요. 내가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석면 쓰레트 지붕이 태풍으로 뜯겨 날라 가듯이 우리에게 달라붙은 모든 것은 내 죄를 발각시키면서 나가요.
제가 보약 같은 친구가 준 보약을 먹었잖아요. 이게 은혜거든요. 은혜가 왔을 때 거저 왔다 이 말이죠. 거저 왔으니까 거저 나가는 것이 아니고 거저 왔을 때에, ‘아, 내일 한 번 더 줬으면 좋겠다.’ 갑자기 내일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거저 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마땅히 보약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내가 자체적으로 인간개조프로그램에 내가 놀아난 겁니다. 마귀가 시킨 대로. “니는 이 보약 말고 다른 보약 더 먹을 수 있는 자격이 돼.” 이런 식으로 나로 하여금 절대로 다쳐서는 안 되고, 잃어서는 안 되고, 뜯겨나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 악마가 주입시켜서 온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만났다는 말은 무슨 소리입니까? 그전까지는 율법에 흠이 없죠.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 만나서 칭찬 받는 일밖에 없죠. 성령이 와서, 주님께서 와서 사도바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완전히 두 동강이 내버렸어요. 완전히 작살내버렸어요. 눈이 갔어요. 이미 죽은 거예요. 뭐가 죽었으니까? 주님 만났으니까, 시간의 마지막 순간을 만났잖아요. 그러면 자기의 마지막을 캐치한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갈 곳을 이미 알아버린 겁니다. 내 마지막 갈 곳은 주께서 버림받으신 그 십자가, 내가 마땅히 저주 받을 그 자리가 나의 마지막 장소였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알게 된 겁니다.
왜냐 하면은 성령은 인간의 마지막, 예수님의 마지막 그 체험을 우리의 체험으로 덤터기를 씌우는 것이 성령이기 때문에. 인생을 다 안 살아봐도, 100살, 80살, 안 살아봐도 내 마지막을 미리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성령이기 때문에. 그 성령은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체험을 이제는 우리 체험으로 돌려주신 거예요. 주님의 체험인데, 그 주님만의 체험을 나의 체험으로 돌려줄 때, 내 속에는 이중적인 모습이 있죠. 하나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옛사람의 내 모습과 내 육신의 모습과 또 하나는 이미 죽었음을 통보해가지고 그 자체가 나와 같이 묶여있는 세트가 하나님의 의의 관계라는 것. 첫째 시간에 했죠. 관계. 의의 관계라는 것을 알려주는, 죄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 두 가지의 결과를 성령께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의 하나는 뭡니까? 저주받을 죄. 의와 죄 이 사이를 강둑물의 흐름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방향이 왔다 갔다 하는,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의 일. 날마다 나는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날마다 나는 주께서 새로 시작하게 하신다. 날마다. 왜? 거저 줬으니까. 날마다 거저 준 거 뭐할까요? 귤이나 까먹어라. 알겠습니다. 까먹고. 날마다 주신 것을 가지고 활용하게 하시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마지막을 미리 알았다는 그러한 행운을 잡은 거예요.
여러분들 주식투자하는 사람들이 제일 궁금한 게 뭡니까? 내일 주식 값이 어떻게 되느냐? 그거죠. 만약에 그걸 미리 안다면, 내일 주식 값이 오른다고 한다면, 오늘 왕창 사서 내일 되팔면 우리는 큰 이윤을 남기잖아요. 그렇죠. 그러나 이것은 인간개조프로그램이 이런 상상을 준다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내일을 아는 정도가 아니고 마지막을, 긴 목적, 주님이 설정한 인간의 최후의 목적까지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거예요. 니가 백날 살아봤자 그거는 오락이고 농담이다. 니가 지금 나이가 98, 99살, 더 많은가 모르겠습니다마는. 102살. 그렇게 살아서 소파에 앉았다 칩시다. 뭐 할 건데요? 102살 되어서 뭐하실 겁니까? “아이고, 허리아파.” 부르시지는 않고, 계속 죽지는 않고 살아있고. 뭐 할 건데요? 그래도 뭘 해야 돼요. 왜? 아직 안 죽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 귤을 까먹든지, 뭐 하든지, 보약을 먹든지, 뭐 하게 하셨다는 이 사실. 그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죠. 관계거든요. 믿음관계. 십자가에서 욕을 얻어먹으세요. 십자가이야기해가지고 마음껏 다 들으세요. 우리는 팔짱끼고 물끄러미 그런 사람들을 쳐다보면 돼요. 정신적으로 바짝 마른 인간들, 아무 것도 미래도 모르고 자기 장래도 모르고 지옥 갈 것도 모르고, 순간적으로 조금 잘 됐다고 막 복덩어리 얼굴을 해가지고, 온 세상에 행복한 얼굴은 다 해가지고 지금 어디로 가는 줄도 몰라요. 넓은 길로 간다고요. 끝을 이미 우리는 알았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귤을 까먹을 수 있다 이 말이에요. 그것도 어떤 마음으로 이미 터치하고, 마지막 종착점을 터치하고, 그 마지막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데, 아는 이상 귤을 못 까먹겠어요? 귤에 혹시 독약이 있지 않을까? 이것도 혹시 아내가 나를 죽이려고 독을 팍팍 넣어놓지 않았을까?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는 모든 일을 거침없이 하이킥. 거침없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할 수 있습니다.
뭐 가정의 우환 그런 것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거 신경 쓰는 것도 인생의 사치예요. 우리 주제보다 오버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욕을 얻어먹어도, 예수님이 얻어먹은 거 있죠. 그보다 심한 욕을 얻어먹더라도 우리는 끝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이 편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니가 그런 나쁜 짓을 하다니!” “농담 같은 소리 하지 마?” “니가 그렇게 착하다니! 니가 나를 알아? 니가 나를 아냐고? 착하다고 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사도바울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주께서 무슨 뜻이 있어서 거저주신 목숨가지고 활용하고 있사오니 나의 일을 하지 말고 내 안에서 주의 일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