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27강 마태복음27장 45절-48절(십자가관점)20201228-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5절,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46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절에 “거기 섰던 자 중에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라도 되어 있죠.
제일 먼저 우리가 성경구절을 한번 찾아봅시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 성령이 임해서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기름부음 받았는데, 기름만 받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기름부음에서 도출된 무슨 일들이 나타나는데, 그 일들이 뭐냐 하면 여기에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쳤다고 하죠. 마귀에게 눌렸다.
여기에서 이제 풀어나가 봅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 버려졌죠. 버려졌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보면 누구한테 눌렸다고 했죠. 마귀한테 눌린 자를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이 일과 마귀가 꽉 누르고 있는 자를 더 이상 못 누르고 에이, 하고 그냥 놓쳐버렸다.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버림받은 이거는 개인적인 일이잖아요. 개인일이죠. 여러 사람이 막 의논하고 한 일이 아니고 개인적인 일이죠. 개인적인 일인데, 마귀한테 눌려버린 우리가 고침 받았다.
왜 본인에게 일어난 일이 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이 말입니다. 여기에 그 과정에 어떠한 이야기가 딱딱 체계 있게 연결 지어져야 하느냐, 이걸 우리가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시작을 예수님이 하나님과 합세했다. 이게 아니에요. 버림받은 거예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꺼이 “자, 이제는 네가 예의를 지켜라.” “예, 나가서 일하겠습니다.” 이래서 귀신한테 눌린 자를 고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그 일, 다시 말해서 버림받은 그 일이 없으면 우리가 마귀한테 해방되는 일도 없다는 논리가, 도대체 어떤 논리에 의해서 이게 연결될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힘 있는 주님이 마귀보다 더 힘세서 우리를 건졌다. 이렇게 되면 뭐가 누락된 거예요? 빠진 거예요? 십자가가 빠진 거죠. 그렇죠. 어떤 사람에게 성경이 있으니까 나는 성경을 직접 풀겠다, 이래 나온 거예요. 뭐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 빠지고 성경 해석하겠다는 겁니다. 십자가 빠지고. 이 사람은 이렇게 해석하는 본인 자신이 버림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죠. 꿈에도 생각 못해요.
마귀에게 눌렸을 때에 우리는 뭐냐, 나는 뭐냐, 나가 없는데 마귀에게 눌려있으니까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약간 뭐가 풀리기 시작하죠. 내가 없는데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마귀에게 어떻게 해방되었지? 라는 질문이 성립된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버려졌거든요. 예수님이 버려졌으면 나라는 것도 마땅히 어떻게 돼요? 나라는 것도 이게 없어야 되죠. 이 문제, 이 논리를 푸는 방법은 여러 번 제가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대표입자에서 인간은 빠지고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대표입자에서 없는 존재. 대표입자는 우리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귀신에 눌린 자, 마귀에 눌린 자는 신을 상정하고, 신을 상상하고, 내가 신에게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예요. 모든 기독교, 천주교가 바로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그냥 계시지 않죠. 성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은 다 여기에다가 쏟아 붓는 거예요. 삼위일체부터 해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 언약적 하나님, 예수님은 십자가 지셨다, 그것까지, 성령 주셨다, 이걸 전부 다 신이라는 그릇을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전부 다 집어넣어요. 혹시나 빠져버리면 신이 노할까 싶어서, 내가 다른 신을 믿을까 싶어서 염려가 돼가지고 우리가 성경보고, 내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는 성경책 그걸 다 집어넣은 그 신이 있고, 그 신 앞에 누굴 세웁니까? 나를 세우는 거예요.
이런 신을 놓고 나를 세우는 이 구조가, 그것이 뭐냐 하면은 뭐가 빠질 가능성이 있어요? 십자가사건을 무효화 시켜요. 십자가사건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끄집어낸 아이디어예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마저 이 그릇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집어넣는 겁니다. 다 집어넣었으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질 줄 알았다고 우기는 거예요. 진짜 이거는 마귀 들린 거예요. 하나님이 하신 모든 사건은 어떤 인간도 한명도 못 알아보는 사건을 유발한 겁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가로 간다는 그 사실마저 모세가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몰랐죠.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모르는 일을 하느냐, 우리하고 상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상대할 필요가 없어요. 로마서 9장에 있는 말씀이 하도 유명하니까 안 찾아보겠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라고 했어요. 야곱과 에서. 야곱이 나라고 하는 나, 나 야곱이야, 라고 하는 인간이 있기도 전에, 나는 에서야, 라고 하는 인간이 있기도 전에, 야곱과 에서가 상종도 하기 전에, 뭐가 있어야 하죠. 없으니까 상종도 하지 않고 주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거예요.
이걸 지난 낮 설교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과 미움 그 뒤에 뭘 붙였습니까? 광기. 사랑의 광기. 설교 시간이기 때문에 다 이야기를 못하고 사랑의 광기만 이야기를 했는데, 제 아내가 설교 시간에 유행가를 네 개나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제일먼저 등장한 것이 사랑의 재개발부터 해가지고 왁스의 여정, 조정석이 불렀던 그거는 모르겠고, 임재범이 먼저 부른 것을 알리가 불렀는데 그대는 어디에, 그걸 집어넣었는데, 그거는 뭐냐 하면은 이 세상 사람들이 힘으로 살잖아요. 힘으로 사는데 힘을 빼는 그런 현상들을 보이더라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은 그대만 있으면 나는 없어도 괜찮다. 돈 있고 공직에 있고 자기의 여생도 있고 많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이 남자한테 미쳐가지고 그냥 그리워하는 것 있잖아요. 나이도 뭐 9살 연하인데 영국 유학까지 가서 배웠다는 여자가 남자가 9살 연하고 변변치도 않은데 빠져가지고 할 때에 집안에서 시누이가 얼마나 말렸겠습니까? 시누이가. 시누이가 지 친구 불러가지고 어떻게 니가 장래성도 보장되지 않은 단역배우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마구 미워했다가, 그래 가지고 결혼해서 애 낳으니까, 이제는 잘해보라고 시누이가 와서 화해한다고 해서 동치미에 나오고. 동치미 뜻은 뭐냐, 시원하게 마시면 다 해결난다는 것이 동치미예요.
이 광기가 있더라 이 말이죠. 어떤 광기? 힘을 쏙 빼는 광기가 있더라 이 말이죠. 사랑 그리고 뭡니까? 그리움 같은 거. 그리워하라고 총 들고 한다고 해서 그리워집니까? 이게. 나는 안 그리워할 거야, 나는 당신을 안 그리워하고 푹 잘 거야. 잠이 오던가요? 뭐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지만. 그리우면 잠도 안 와요. 보고 싶은 것은 광기예요. 미치도록 사랑하고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이 말이 아닙니까?
이것만 광기가 아닙니다. 미움. 미움에 광기기 있는데 미움의 광기는 뭐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해요.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되게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무조건 미워해요. 예수님의 십자가이야기하면 무조건 미워합니다. 그거 광기예요. 광기라는 것은 내 인생, 나라는 존재를 내 마음대로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나를 넘어서 초과적인, 그야말로 초과적인 다른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들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실은 매일같이 그렇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리듬이라고 하고 리듬은 쉽게 말해서 이걸 감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쉬운 말로 감정. 어려운 말로 정동,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냥 감정. 철학적인 용어로 정동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그냥 감정입니다. 리듬은 감정이고, 미운 감정 좋아하는 감정은 조건보고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이에요. 그래서 리듬을 설명할 때는 이것을 의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 차려라!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백날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것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무의식에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어가지고 미워하는 거예요.
시누이가 자기 남동생 결혼할 사람이 왔을 때에, 딱 첫눈에 ‘니는 내 타입이 아니야.’ 말은 못하고 하는 것은 아마 그 올케의 모습이 옛날에 지가 중학교에 다닐 때 지를 왕따 시킨 그 애의 얼굴과 오버랩이 될 수가 있어요. 인간은 본인이 자아를 구성할 때, 뭘 빼느냐 하면은 자기에게 해롭다고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전부 다 이걸 덮으려고 해요. 덮으려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러한 감정 앞에, 리듬 앞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옷을 벗어라! 에요.
다시 말해서 너를, 자아라는 옷을 벗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껴입고, 지금 26도인데 떠죽으려고, 계속해서 옷을 입어요. 안 들키려고. 이 자아라는 옷을 고상하고 거룩하고 내가 봐도 괜찮은 자아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두 겹, 세 겹, 옷을 계속 껴입는 거예요. 옷을 계속.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옷을 자꾸 벗어요. 옷을 벗으니까 주어지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어떤 식으로 주어졌습니까?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가 나에게 버림받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버림받는 대상.
우리의 이성과 감정은 자꾸 옷을 껴입어요. 제가 좀 성경 강의했습니다. 제가 복음 압니다. 자꾸 복음 아는 옷을 껴입어요. 그러면 성령은 입은 옷을 자꾸 벗겨버려요. 벗겨서 뭐가 나올 때까지? 너는 나의 언약적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너를 상대로 너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 너를 버려야할 존재라는 사실이 나올 때까지. 계속 벗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제 오후설교 때 그걸 뭐냐, 아이스께끼라고 했죠. 아이스께끼. 안에 작대기가 있고 이렇게 쭉 생겼는데, 친구 안 주고 아껴 먹으려고 하다가 나중에 보니까 다 녹았어요. 남는 것은 벌거벗은 작대기만 튀어나오죠.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으키는 모든 사건은 “가리지 마라. 너는 이미 십자가에서 규정되었다.” “저는 십자가에 올라간 적이 없는데요?”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너를 대표해서 올라갔잖아.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니도 들었잖아.” 예수님이 “나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대상입니다.”라는 고백을 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이 이 고백을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마땅히 해야죠. 그래야 예수님 안에 예수님의 운명과 함께 있다는 것이 티가 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것은 십자가를 드러내는 거예요.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지지시고 이루었던 그 영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니 안에 십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니는 십자가 운반체고. 그 십자가 있는데 우리 아담의 육신은 자꾸 십자가 자체를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고 그걸 자꾸 가리는 것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2장에 보니까 십자가의 특징을 이렇게 했어요. 십자가의 특징은 어리석다. 또는 같은 말인데 미련스럽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십자가예요.
그러면 미련하다 어리석다는 평가는 어디서 오느냐, 바로 이 세상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게 만드는 그 인간들. 인간들은 아까 강의할 때 놓치면 안 돼요. 인간들은 앞에 뭘 만들어낸다고 했습니까? 신이죠. 그 신이라는 것에다가, 개념에다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을 거기다가 다 쏟아 넣죠. 요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뿐만 아니고 힌두교에 나오는 개념, 이슬람에 나오는 개념까지, 철학적 개념까지 전부 다 집어넣어가지고, 행여나 내가 예수님만 믿다가, 그게 신이 다가 아닌데, 하면 아하, 내가 너무 편애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내가 예수님 믿는 것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거고 다른 민족에게서는 알라신도 신일 수도 있다.
그러면 알라신도 집어넣는 거예요. 그때를 대비해서.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내가 나한테 내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을 거냐 말거냐에 대해서 하나님을 일단 믿어놓는 것이 유리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으면 그만이고, 있으면 있는데도 안 믿었으면 이거는 작살나는 거잖아요. 낭패가 아닙니까? 낭패를 사전에 예비하기 위해서는 보험 들어 놓듯이 없지만 있다고 생각하고 믿어놓게 되면 설사 있는 경우나 없는 경우가 오더라도 나는 아무 다치지 않는다. 이게 파스칼의 팡세라는 책에 나옵니다. 그 책을 제가 봤어요. 참 복음을 가리는 마귀 짓도 여러 가지라. 여러 가지.
여러분 신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신은 이미 태어날 때 같이 있어요. 신에 대한 생각은 이미 태어나면서 다 같이 있다고요. 트럼프가 아무리 산타클로스가 없다고 해도 애들은 다 신 에 기도하고 있어요. 전부 다. 중들이 기도할 때 누구보고 기도하겠어요? 부처보고 기도하겠습니까? 아이고, 하나님보고 기도하죠. 중들이. 모른다고 하지 말고 로마서 1장에 아시잖아요. 로마서 1장 21절, 모든 사람은 누굴 알되? 하나님을 알되. 모든 사람에게는 다 하나님이 있어요. 다 하나님이 있다 이 말이죠. 신이 있다 이 말이죠.
뭘 안다는 말은 신을 내가 안다는 뜻이거든요. 신을 내가 알아버리면 신이라는 이 존재가 중요할까요? 신을 알고 있는 내가 중요할까요? 내가 중요해요. 왜냐 하면 내가 알아줬으니까. 신도 나에게 섭섭하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교회 50년, 60년 다니고, 평생 다녀놓고, 나중에 이거 잘라내고 저거 잘라내고 먼지 털듯이 탈탈 털어내면, 뭐 기도하는 법도 잊어버리고 성경 읽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 털어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신을 알았다는 것. 나만, 최후로 나만 남는다고요.
이 나를, 어떤 나냐 하는 것은 몰랐죠. 진짜 신에게 버림받는 나기 때문에 나는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던 거예요. 내가 신을 믿는 이유는 내가 마귀에 속해가지고 주께 버림받은 증거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가 외치고 있는 거예요. 버림받았으니까 신을 믿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니까 교회에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다니는 것이 완전히 개판이죠. 남자들이 교회에 안 나오다가 갑자기 12월이 되면 막 나와요. 왜? 연말정산이 있기 때문에. 세금 혜택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저 재정부에 눈도장 찍어놔야 돼요. 늦게 하게 되면 우리교회 헌금 다 끝났다고 하면 혜택 못 볼 수가 있어요.
어제 오후 설교 때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언급했습니다. 성경에 이래 되어 있어요. 출발을 성령이라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했죠.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건데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리가 없어요. 이런 일은 없거든요. 근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진짠 성령 같으면 육체로 마치는 이런 요소는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육체가 있다는 말은 육체가 율법에 의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육체는 뭐냐 하면은 율법과 육체는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그 육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이 사람은 전혀 율법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 이 말이죠. 율법은 누구하고 상대해야 하느냐 하면 성령하고 상대해야 돼요. 율법의 완성이 성령이라 이 말이죠. 율법의 완성인 성령이 왔다면 더 이상 육체는 율법과 관련지어집니까, 안 지어집니까? 지어질 수가 없어요. 육체라는 말은 뭐냐 육이거든요. 육은 무엇과 자꾸 연결되느냐 하면은 육은 육적인 내용하고만 연결된다고 제가 오후 설교 때 이야기했습니다.
그 한 예가 뭐냐 하면은 노래를 잘하면 음반 내라고 하잖아요. 음반내라. 음반 냈으면 가수다. 이 가수, 음반, 노래 그리고 그들이 난리 난 임영웅이. 백억 벌었다는 임영웅이. 송가인. 송가인은 홍자와 안 싸웠어요. 송가인, 임영웅이, 이게 뭐냐 하면은, 이걸 기대한다는 것은 노래하는 이 육적인 요소와 마지막 끝은 뭐냐, 육으로 끝나는 거예요. 송가인, 임영웅이로 끝나는 거예요. 육은 육과의 만남이에요. 육은 육과의 만남이라고요. 노래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뭐냐, 육과 영은 만난다, 안 만난다? 만날 수가 없어요. 이 만날 수가 없다는 뜻이 뭐냐 하면은 육은 버려져야 하는 것이 고유기능이에요. 육은 버려져야 돼요.
그걸 보여주는 것이 뭐냐, 십자가예요. 십자가를 빼버리면 이거는 이단입니다. 십자가를 집어넣으라는 말이 아니고 십자가부터 시작하라는 거예요.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그거는 뭐냐, 십자가의 취지로부터 시작했으면 어디로 나옵니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지만 영으로 난 것은 뭐다? 영이 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성령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우리 자신을 뭐로 보느냐, 이미 버린 자식으로 봐요. 버림받은 존재로 보는 거예요. 버림받는 존재로.
이 버림받은 존재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고린도전서 1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55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됐습니다. 사망아 니가 쏘는 것이 어디 있으며 사망아 니가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고 했죠. 자, 우리가 하나의 연극을 해봅시다. 내가 사망이라고 봅시다. 내가 사망입니다. 사망이 양궁 국가대표선발대회를 하고 있는 거예요. 활을 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사망을 인격화시킵니다. 사망이라는 어떤 인물이 있는 거예요. 사망이 하는 일은 사람을 새삼스럽게 죽이는 일을 하는 거예요. 사망이. 그래야 사망다우니까.
뭘 가지고 쏘느냐 하면은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어요. 사망이 율법을 딱 쥐고 잡아당겨서 에라, 죽으라고 쏘는 거예요. 마치 스가랴 3장에 보면 여호와 앞에서, 욥기 1장에 보면 여호와 앞에서, 사탄이 지상에 있는 욥을 죽으라고 무기를 들고, 또 스가랴에 보면 사탄이 여호와 앞에 있는 여호수아라는 제사장에게 지적질을 하죠. 또 로마서 8장에 보면 사탄이 맨날 성도에게 지적질 하는 거예요. 법에 준해서, 성경말씀에 준해가지고. 우리보고 죄라고 합시다. 죄는 율법을 못 지켰으니까 하나님이여 법대로 지옥 보내소서, 라는 이러한 고소를, 사탄이 검찰총장이거든요. 고소를 계속 해대는 거예요.
그러면 사탄으로 하여금, 마귀로 하여금 율법을 가지고, 사탄은 선악지식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선악지식을 안 사탄이 우리 양심에다가 계속 지적질을 하도록 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셔요. 그래야 십자가 의미가 드러나니까. 그리고 그 지적질을 우리가 받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을 하셔요. 허락을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육체로 있다면 뭐 벌벌 떨어야 돼요. 야,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저주를 받는구나. 개한테 내가 욕했기 때문에 미안하다 해가지고, 개한테 욕을 해서 오늘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모든 매사에 조심조심, 차분하게차분하게, 꺼진 불도 다시 보고. 다시 본 불도 또 다시 보고. 완벽에 완벽. 용서도 한번 하면 안 돼요. 베드로처럼 몇 번? 일곱 번 용서. 용서 받는 사람 귀찮아죽어요. 죽는다고요. 나는 당신을 용서했어요, 용서했어요, 용서했어요..., 일곱 번. 당신을 일곱 번씩 찾아가 용서했다. 나는 당신의 기억조차 없습니다. 계속해서 자기 관리하고, 가만있어보자, 계산해보자, 지금 나의 경건은 레벨이 몇 단계냐, 계속 그렇게 하게 해요. 왜? 우리의 아담의 육신이 있으니까.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은 육신을 그런 식으로 악마에게 휘둘리더라도 끝나기를 뭐로 끝난다? 성령으로 와서 성령으로 끝나는 거예요. 십자가의 성령으로 끝나는 거예요. 노선변경이 일어나는 거예요. 육신은 나거든요. 내가 육신 아닙니까? 아직 육체가 있으니까. 육신으로 시작했다가 노선변경이 매 회마다 노선변경이 일어나가지고, 참, 나는 이미 죽었잖아. 인민군이 내 시체를 보고 총을 쏴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제 낮 설교 마지막에 했어요. 보물을 어디에 쌓아두라고 했습니까?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죠.
그러면 우리는 뭐해야 될까요? 하늘에 쌓아둘까요? 땅에 쌓아둘까요? 땅에 쌓아둬야죠. 왜? 우리는 즐기는 거예요. 돈도 별로 없잖아요. 우리는 내가 망한다는 그걸 즐기는 겁니다. 협박받는 것을 즐기는 거예요. 코로나 협박을 즐기는 겁니다. 정세균 국무총리한테 3단계로 가든 5단계로 가든 15단계로 가든 니 맘대로 하세요. 왜? 우리는 그걸 즐기니까. 나의 죽음을 내가 즐기는 거예요. 아이고, 오랜만에 좋은 소리했는데 기억하세요. 나의 죽음을 내가 즐기는 겁니다. 나의 장례식에 내가 축하화환을 보내는 거예요. 컬럼비아에 어떤 이상한 마누라처럼 죽은 남편 관 위에 올라가 춤을 추는 거예요. 좋다고. 이제 남편 없이 살게 되었다고. 나의 죽음을 즐기는 거예요. 나의 죽음을.
그렇게 사는 사람의 그 지점이 뭐냐, 자기의 선교지에요. 파키스탄이 아니고. 성도는 모두가 선교지를 갖고 있어요. 안 죽으면 선교 안 한 거고. 내 죽음에 협박을 당하면 선교 안 한 거고. 내 죽음에 대해서 내가 축하 꽃을 보낸다면, 내 장례식에다가 장미꽃을 꽂고 그동안 수고했다고 하면 그게 선교예요. 그래서 제가 누구의 글에 댓글을 올렸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몇 살로 보낸다고? 101살로 보낸다고. 100살을 넘었어요. 101살. 송해도 아직 멀었어요. 송해도 94세가 돼요. 101살 할머니들을 보세요. 내세울 것도 없죠. 뭐 인물이 됩니까? 가진 것도 없죠. 기대할 것도 없죠. 예상할 것도 아무것도 없죠. 그냥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죠. 그게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상태잖아요.
그걸 가지고 십자가에서는 원래 너는 그렇게 버려져야 그게 니 모습이다. 아이스께끼 작대기가 그게 101살짜리를 그렇게 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임무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죽어야 될 임무예요. 그런데 왜 죽어야 하느냐 하면은 바로 우리 조상 아담 때문에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체를 준 거예요. 육신을 준 겁니다. 육신 자체가 뭐냐 하면은 이게 징조고요. 육신 자체를 징조로 여기는 이 사람이 바로 성도예요. 내 육신이 이거는 십자가에서 버림받듯이 버려져야 될 육신을 가지고 사는구나.
따라서 우리가 육신에 대해서 소홀이 해야 됩니까? 지극정성을 다해야 돼요? 지극정성을 다해야 하죠. 육신에 지극정성을 다해줘야 돼요. 왜? 우리의 남은 사명이 이거거든요. 버릴 때는 그냥 버리지 말고 버리는 이유나 알고 버리면 돼요. 이유나 알고. 안 죽은 사람, 지옥 가는 사람도 버려지는데 문제는 그들이 뭘 모릅니까? 이유를 모르죠. 이유를 이야기한다고요. 십자가 때문이다. 십자가사건이다.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야!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인간은 죽게 되어 있고, 죽을 때는 그냥 곱게 죽으면 안 돼요. 지극정성해도 이걸 살려낼 수 없다는 그 시그널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돼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렇게 내 육신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것이, 애써서 될 일이 아니고 이게 자연스럽다는 게, 이게 우리에게 부담이 없어요. 눈만 뜨면 오늘 아침에는 뭐 해먹지? 이게 근성이에요. 자동으로 나와요. 자동으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죽을 인간이 안 죽으려고 아등바등 대는 그 모양새를 주께서는 계속 유발시켜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사도행전 10장 38절과 한번 겹쳐봅시다. 뭐라고 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봅시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마귀에게 눌린 자, 못 벗어난다 이 말이죠. 안 벗어나면 되죠. 안 벗어나면 되잖아요. 어차피 못 벗어나는 걸 우리는 옷 벗듯이, 나중에 101살 먹어서 102살에 죽으면 가뿐하게 빠이빠이하면 돼요. 올드랜사인Auld Lang Syne, 딴따다다~~다다다다~~ 벌써 12월 31일이 다 됐잖아요. 안녕! 하고 보내는 거예요. 누구를? 나를 보내는 거예요. 무엇에 찢어진, 악마한테 눌러졌던 우리 육신을 시원하게 배설하듯이 여기서 분리작업이 일어나는 겁니다. 분리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겁니다. 옛것은 없어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아까 이야기한 노선변경이 일어나야겠죠. 노선변경. 노선변경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9장,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말은 옛 술은 옛 부대에 담겨있다. 그래서 옛날 전자제품은 새 전자제품과 전혀 맞지를 않죠.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운 새 술에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방법이 뭐냐, 징조로, 징후로서 뭘 우리가 고수해야 됩니까? 옛사람, 옛 품성을, 이미 새 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충성을 다해야 돼요? 육신의 일에 충성을 다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이 둘 사이에서 뭐가 나옵니까?
첫째, 우리는 마귀에 눌려있었다는 것이 맞다. 둘째, 어리석은 십자가로 구원된 것이 맞다. 성령의 십자가 영으로 이미 거기서 우리는 그걸 바라보는,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그걸 나의 버림받은, 반역하는 그 진행형, be동사+ing를 바라보는 그러한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 성령의 오심이다. 이 두 개가 여기서, 차이에서 다 도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선교지고 이게 주의 증인이에요. 주의 증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서 이런 숨겨진 진리와 사태를 보여주는 예들이 있는데, 그중에 제가 최근에 봤던 뉴스 가운데서 뽑아내겠습니다. 저 캘리포니아에 산불이 많이 일어났잖아요.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가지고 상당히 미안한데, 신선하게 다가온 건데, 산불이 일어나면 산에 나무는 다 불 타죠. 밑에는 재가 되어 있죠. 그럼 바람이 분다 하면 거기서 탄 것들이 재가 되어서 날리겠죠. 우리는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알아요. 심지어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의 그 연기가 8000킬로미터 떨어진 영국 런던까지 날아갔다는 거예요. 그거는 뭐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최근의 어떤 과학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표현을 했어요. 이 표현이 오늘 본문과 너무 잘 어울려요. 떠돌아다니는 토양. 이게 그렇게 신선했어요. 왜냐하면 토양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 떠돌아다닌다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그런데 떠돌아다니는 토양이라고 지적한 이유가, 원래 산불이 일어나고 난 뒤에 거기서 뭐가 자라는가 하면은 인간에게 해로운 미생물과 곰팡이가 여기서 번식을 한답니다. 번식을 하게 되면 8000킬로미터를 타고 날아가서 런던까지 가는데 이 토양에 있는 재가 탄소화물이 되어 있고 모든 유기체가 탄소화물이기 때문에 여기서 해로운 곰팡이들이 증식이 일어나가지고 걸린 사람이 10퍼센트, 15퍼센트가 피곤함과 여러 가지 발진들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 곰팡이 균을 조사해보니까, 곰팡이 균을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콕시디오이데스, 이미티스, 라는 그 곰팡이가 미국에서부터 런던까지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캘리포니아에 토양이 있더라도 토양의 실내용은 떠돌아다니면서 대서양 건너서 런던까지 그 토양이 가는 거예요. 우리는 토양하면 토양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이제는 산불이 빈번하게 나면 토양에 있던 증식된 미생물과 곰팡이가, 인간에게 병을 주는 그것이 이제 지구를 뺑뺑 돌면서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래서 떠돌아다니는 토양.
그러면 이 토양에다가 뭘 집어넣는가, 성도를 집어넣어요. 성도 또는 십자가를 집어넣는 거예요. 십자가를.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떠돌아다니는 토양이기 때문에 기존 토양과 어떻게 돼요? 떨어져야 되겠죠. 그래서 성도는 이 대전바닥에 평생 이렇게 고착해서 살아도 사실은 붕 떠있는 상태라고 보는 겁니다. 붕 떠있는. 지층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토양. 또 하나는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똑같은 밥을 먹으면서도 그 사람은 떠돌아다니는 토양. 떠돌아다니는 육신. 이 땅에 정착할 필요가 없는 육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이 둘 사이에 뭐가 벌어지는가, 십자가를 두고 영적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영적전쟁에서 대표입자가 뭐냐 하면은 아까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무엇에 눌린 자, 마귀에 눌린 자. 마귀가 대표입자가 돼요. 이제 아시겠죠.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못 받아요. 우리는 스스로 구원에 나설 수도 없고요. 마귀에 눌린 자를 누가 와서, 주님께서, 주님의 영, 성령께서 또는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에게 와버리면 이 둘 사이에 전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모든 인류는 이 영적 전쟁에 동원된 부대원이다. 이래 보면 돼요. 안 믿는 사람도 영적 전쟁에 동원된 전부 다 군인들이에요. 용병들이고. 성도는 물론이고요. 이거는 뭐 가만히 있는데, 뭐 떡만두만 먹었는데 군에 군사라. 복음의 군사라. 복음의 군사예요.
겉모습은 똑같아요. 왜? 둘 다 토양 출신이기 때문에. 겉모습은 똑같아요. 돈 좋아하고, 집을 짓되 모래위에 집을 짓고, 반석인지 모래인지 모르고, 비판하되 도사같이 비판하고 열심히 비판하고, 꼭 복음을 전하는데 개돼지한테 전하고. 주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다하고 하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안하고. 그렇게 하는 둘 다 토양이에요. 출신이 토양출신이기 때문에. 토양인데 한쪽은 뭡니까? 왠지 다리가 허전해. 다리가 없어. 공중에 떠있어. 런던으로 날아가고 있는 판이에요. 이게 뭐냐, 우리는 천국으로 가고 있죠. 떠돌아다니는 토양. 토양인데 떠돌아다녀요. 이게 바로 자유죠. 성령을 무슨 영이라고 하냐 하면은 고린도후서에 보면 자유의 영이라. 자유의 영. 자유케 하는 영도 되고 그냥 자유를 만끽하는 영. 그 자유의 영입니다.
자, 정리 한번 해보고 마치겠습니다. 처음에 질문이 뭐냐 하면은,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볼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관계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왜 마귀에 눌린 우리가 자유를 얻습니까? 이게 질문이었죠. 한 시간 오십 분 내내 들었습니다. 보통 다 까먹었다고 하죠. 까먹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기억하려고 하고 지식을 하려고 하니까 까먹는 거고. 저는 기억을 하고 지식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상황, 삶에 대해서 십자가로 해석해드립니다, 라는 뜻으로 드린 겁니다. 그냥 가지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우리 바깥에 벌어지는 이 상황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가 너무 육신에 얽매여서 실제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동안 잊어버린 거예요.
우리가 지식을 확보하라는 것이 아니고 회상하라는 뜻이죠. 결국 우리 몸이 갖고 있는 몸의 정보를 다시 한 번 확인해라. 내가 왜 있는지, 내가 왜 이런 길로 살아가는지, 새삼스럽게 뭘 가지고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의 입장에서 해석을 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라 이 말이죠. 자, 그렇게 할 때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자체가 버림받은 이 세상에 일원이기 때문에 버림받은 거예요.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이 자체가 버려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여기에서는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누구든지 이 세상 자체를 버림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만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십자가에서 하신 고백으로서 이걸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을 십자가만이 제공하는 거예요. 십자가만이. 그럼 성령이 왔다는 것은, 십자가의 영이 왔다는 것은 우리가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해석을 십자가 안목에서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우리 자신에게 성령께서 부어주신 거예요. 뭘 합니까? 배고픈데 밥 먹어야지. 밥 안 먹고 뭐 기도할까요? 왜 밥 먹나? 악착같이 살아야죠. 왜 사느냐, 버리려고 산다.
왜 사느냐, 버림받기 위해서 산다고 할 때, 이 세상은 버림받는다는 것과 그리고 산다와 이게 매끄럽게 연결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새로운 관점이, 이래야 우리 육신의 존재 이유가, 의미가 생각나는 거예요. 버림받기 위해서. 돈은 왜 버는가, 열심히 일해서 왜 돈 버는가, 돈 벌어서 망하기 위해서. 돈 벌어서, 망하기 위해서,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돈을 왜 이렇게 모아두는가, 얼마나 썩어 문드러지는지 구경하려고.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세상은 연결이 안 되지만, 연결될 때는 그 중간에 뭐가 개입이 되어서? 십자가의 효과, 위력, 이것이 개입된 거예요. 그래서 돈을 왜 버는가, 돈이 어떻게 썩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할 때 이것이 하나의 복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가 걸었죠. 걷고 난 뒤에 앉은뱅이는 비로소 자기가 앉은뱅이가 나답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새로운 관점이기 때문에. 십자가 관점에서. 나는 앉은뱅이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지금 멀쩡하지만 다시 앉은뱅이를 하더라도 나는 주님 앞에 반항할 어떤 건덕지는 없다.
주께서 나를 망하게 한다 할지라도 망하는 자에게 망하게 하는 것이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정당성과 그 의로움에 대해서 자기는 찬미하겠다는 겁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바로 이 사건의 반복이, 육신이 있어줘야, 육신이 육신다울 때, 그 사건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되풀이 되는, 이 희한한 일이 성도에게만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끝으로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을 때는 우리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마귀한테 눌렸다는 이러한 상태 자체가 없었어요. 마귀한테 눌린 게 아니라 씨름선수 강호동한테 눌린 거예요. 아무도 우리를 누를 사람이 없어었요. 눌리지를 않습니다. 나는 나예요. 내가 최종적이에요. 최종적. 최종적에다가 누르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시어머니 돌아가셨잖아요. 안 눌리죠. 있어도 누가 누르는지 분간도 안 되지만.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누르는 것이 없죠. 눌러봤자 뭐 가끔 바람 쐬면 풀릴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아예 밥을 먹든 뭘 하든 간에 눌린 상태로 지낸다는 그 관점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이 시간 많고 돈 많아서 할 일이 없어서 골프치고 여행 다니고 지 맘대로 사는 것, 내가 어디에 눌렸어? 어디에 눌렸어? 이러거든요. 그런데 골프 치면서 늙어가고 있고, 바싹 늙어가고 있고, 돈 쓰면서 늙어가고 있고, 이건희는 제 때에 죽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결국은 죽고, 죽어서 원불교 장례하고. 이 모든 짓거리 이 자체가 오직 하나의 관점밖에 아는 것이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결국은 마귀와 더불어서 지옥 간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을 보면서, 이제는 여유 있게 그걸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능력과 효과가 우리 인생을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생한 것을 두고 볼 때에 아직도 버려지기에는 너무나 먼 모습 같고 여유 만만한 것 같지만,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우리 몸을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