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하나님의 진지함

아빠와 함께 2020. 11. 30. 11:48

대전-125강 마태복음27장 27절-32절(하나님의 진지함)20201027-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7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과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절,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절,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하며” 이렇게 되어 있죠. 유다 나라에, 나라니까 왕이 있어야 되고 그 왕은 하나님의 의해서 선택된 자가 유다 나라의 왕이 되어야 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이거에요. 왕의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멀쩡한 예수님을 자꾸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재해석. 이래 보면 돼요. 예수님 자체가. 인간이 알고 있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도대체 왜 죽느냐에 대해서 하나님의 해석을 예수님에게 담았다고 보시면 돼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재해석인데, 뒤에 기니까 그냥 없애버리면 예수님=죽는 존재. 더 간단하게 해서 예수님=죽음. 인간은 죽어도 모르는 일찍 찾아온 죽음. 일찍 찾아온 죽음이다. 이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 속에 섞임으로 말미암아 이 인간세계에 하나님이 보시는 죽음이 보편화된 거예요. 전부 다 깔아버리는 겁니다. 인테리어를 예수님이 죽은 죽음으로 바닥을 다 깔아버리는 거예요. 토대를, 그라운드를 예수님의 죽음에다 다 깔아버리죠. 깔아버리면, 구약에서 그렇게 예언했던 이 죽음은 구약적으로 보면 되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진멸이 되는 겁니다. 젖먹이부터 늙은이까지, 남자여자 관계없이, 주를 모르는 자는 완전히 밀어버려야 돼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나라를 할 때에 주를 모른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얼마나 그 사람이 성품이 좋은가, 이웃사랑을 많이 했는가, 점잖은 양반인가, 그거 필요 없어요. 그냥 불도저로 밀듯이 다 싹 다 죽여 버려야 돼요. 

그게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여호와께서 벌이시는 전쟁, 여호와 전쟁입니다. 여호와 전쟁은 진멸시키는 전쟁. 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겁나겠습니까? 가해자 입장에 서면서도 겁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전쟁이다. 붙여주셔서, 하나님 내가 붙여준 것은 모조리 다 죽는 거예요. 죽이는 거예요. 모기나 파리 잡을 때 요 근래에 나온 것이, 옛날에는 파리채로 때려잡는데, 가만히 있어도 전기가 통해서 붙어서 죽는 것이 있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냥 전기파리채를 잡고 눈감고 있다가 눈떠보니까 다 붙어있어요. 알아서 달려들어 전기파리채 모눈종이 하나에 다 진멸 당했어요.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어린애든 노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관계없이, 인간이면 다 진멸대상이에요.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진멸되어도, 망해도 그거는 원점이다. 니가 진멸당해도,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도 니는 손해 본 거 하나도 없다. 왜? 원래 자리기 때문에. 원래 죽음의 자리기 때문에. 근데 사람들은 죽음을 하나님의 해석된 죽음으로 보지 않고 내가 목숨 붙어 있다가 나중에 요양병원에 가가지고 헉헉거리다가 꼴까닥하고 죽는 거. 그 죽음만 생각하니까, 죽을 때만 죽음이고 아직은 안 죽었다고 버티는 거예요. 안 죽었다.

제가 어느 설교에서, 수요설교에서 그런 말씀드렸는데, 술하고 담배하고 하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라는 이유가, 술하고 담배 하는 남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허세에요. 허세덩어리에요. 허풍덩어리. 그게 뭐냐 하면은 나 안 죽었다는 거예요. 나 안 죽었다. 끝까지 나이가 많아도 나이야가라, 나이야가라~ 나이야 가라는 거예요. 나이아가라 폭포 가보지 않았는데. 나이야가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아모르파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는. 결혼은 선택 연애는 필수. 또 어떤 노래에는 이 나이가 어때서~ 내 나이가 백세든, 구십세든, 팔십세든, 전부 다 그게 다 뭐냐 하면은 나 안 죽었다, 에요. 나 안 죽었다.

목숨 붙어있으니까 그걸 살았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산 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진멸을 하려면 진멸의 재료가 필요해요. 진멸당할 시료가 필요하다고요. 실험실 할 때 필요한 재료. 그 재료로 인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내 진멸의 맛을 한번 보게 하기 위해서. 레위기에 보면 제물을 태울 때 몽땅 다 태우잖아요. 번제. 그때 하나님께서 흐음~! 맛있다. 그 다 태운, 진멸된 냄새를 흠향하시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사 복을 내리시리니. 그래서 사람은, 우리나라에 박씨가 있고 김씨가 있고, 최씨가 있지만, 박씨, 김씨, 최씨, 이씨, 남씨고 장씨고 다 치우고요. 이름을 따로 지으세요. 이 숯 덩어리. 우리는 다 태워져서 이 숯 덩어리. 박 숯 덩어리. 숯 덩어리예요. 상견례 할 때 두 숯 덩어리 만난 거예요. 하나씩 앞에 두 숯 덩어리 만난 거예요. 숯 덩어리 네 명, 아들 딸, 여섯 숯 덩어리가 앉아가지고 결혼식 날짜 잡고 있고. 숯 덩어리 이번에 수석 합격해서 취직됐다고 좋아하고. 숯 덩어리인데.

진멸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에 가는데 그냥 비어있는 땅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딪침을 봐요. 부딪침을. 부딪침을 볼 때에 그들은 어린양 피로 인하여 살아남은 자들이잖아요. 신났죠. 신난 거예요. 어린양의 피 때문에. 알기는 잘 알죠. 체험했으니까.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그래서 살아난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다고 좋다고 했는데, 홍해를 딱 건넜잖아요. 홍해를 건너는데, 홍해 앞에 딱 오니까, 그 뒤에 뒤늦게 쫓아왔던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바다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홍해바다에 뭐가 떠있습니까? 시체들, 말, 창, 칼, 수레들이 있죠. 어떤 느낌일까요? 이 세상에서 표현할, 형언할  단어가 없어요. 그 충격이라는 것이. 

살았다, 신났다, 하면 안 돼요. 아! 하나님의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애굽 군사의 죽음을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건널 수 없는 것을 화들짝 건너 온 거예요. 이거는 충격입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무서워도 너무 무서워요. 왜? 얼마 전까지 애굽에서 같이 살던 군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홍해 바다에서 저쪽은 시체가 되어서 떠내려 오고 있고 우리는 그 시체를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시체는 진즉에 누가 시체가 되어야 해요? 내가 시체가 되어야 해요. 왜? 우리 힘으로 건너왔으니까. 홍해. 건너올 수 없는 곳을 건넜고 올 수 없는 자리에 온 거예요. 올 수 없는 자리에. 누가 그렇게 했던가요?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바친 거예요. 어린양. 어린양의 목숨. 하나님이 일을 할 때 그냥 말로 일한 게 아니고 자기 목숨을 걸고 일한 거예요. 나는 내 목숨 걸었다. 니는 뭐 내놓을래? 이 말이에요.

뭐 찬송 몇 가지한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 목숨 걸었는데, 자 니는 니 목숨 걸어서 건너왔잖아. 함 니 꼬라지를 봐라. 니 따라온 저 많은 군사들 꼬라지를 봐라. 시체 됐잖아. 니도 시체였어. 니도 시체였다고. 뭐 다를 줄 알았지. 아니야. 시체인 자와 시체 안 되고 멀쩡히 살아서 찬미하는 너의 차이점은 뭐냐, 그건 하나님의 자기 목숨 버리심, 하나님의 열성,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진지함’ 저는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은데요. 이걸 하나님한테는 자기 목숨 걸고, 하나님 자기 이름을 걸고 영원토록 시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거 뭐 삼성에서 하는 프로젝트, 택지 개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에요. 집사님 프로젝트 많이 참여했잖아요. 그런 프로젝트 아니에요. 단기로 끝나는 그런 프로젝트 아니에요.

우주의 모든 팔자와 운명을 걸고 한 프로젝트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목숨을 걸었다면 이미 우리의 미래는 규정된 거예요. 확정된 겁니다. 근데 인간들은, 술하고 담배하는 인간들은 술집에서, 저는 그런 데 안 가봤습니다만, 동그란 철판테이블에 연탄불 피워놓고, 퇴근해서 밤새도록, 아내 전화는 끊어놓고, 술 마시면서 나 안 끝났어! 이렇게 하거든요. 옆에 만약에 복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끝났어! 그래야죠. 니 인생은 뭐 어떻게 승진을 하고 이사가 되고 사장이 되고 이건희처럼 회장이 되도 니 인생은 끝났어. 봤지? 이건희 봐라. 원불교 따라가다 지옥 가는 거 봤지? 원불교 장례 치렀어요. 봤지? 이건희 라는 이름의 애굽의 시체를 보고 있잖아요. 우리가.

안 보입니까? 아니, 세상에 나가면 안 보여요? 애굽 군사들이 시체가 되어서 국회에서 국감하면서 떠들고 뉴스에 나오는 시체들 안 보입니까? 전부 다 시체들이에요. 잘 한다고요? 잘 한 거 없어요. 끝났어요. 우리도 끝났고 니도 끝났고. 우린 이제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어떤 자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그 끝남에 대한 근거, 그거는 예수님의 자기 목숨 바침이에요. 십자가, 예수님 자신의 생명 바침, 죽으심의 최종 토대를 두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백날해도 지옥 갑니다. 지옥 가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파멸되기로 확정되었어요. 뭐 시점이 문제입니까? 나이야 가라, 나이야 가라가 문제가 아니에요. 90에 파멸되나 70에 파멸되나 마찬가지에요. 이건희는 78세 죽었죠. 78에 죽으나 송해처럼 90세 더 오래 사나, 이미 끝났어요. 끝난 거예요. 

복음전해서 튕겨나가면 지옥이에요. 복음전해서 쑥 들어오면 그거는 천국가기로 끝난 거예요. 마태복음 22장 14절을 한번 봅시다. 우리 성도의 사명이 이정도로 굉장히 중차대한 겁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이. 노닥거리면서 교회에 가서 월급이나 받겠다고 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보세요. 청함을 받은 자는 왜 그리 많은지. 천이백만이니, 천주교까지 합쳐서 천오백만이니, 왜 그리 많은데. 택함을 받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적지요. 무엇과 비교해서? 많음과 비교해서. 자꾸 많음에 비교하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많아 보이지? 적어. 적다니까요. 적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드물다. 그래도 생기면 으잉?! 있기는 있네. 웬 기적! 이정도예요. 이정도. 

오늘 읽었던 본문은 지금 지옥가기로 확정된 자가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목숨 바쳤다는 말도 모자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기다 다 걸어버린 그분을 왕이라고 코스프레 한 거예요. 이 코스프레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니가 왕이라며? 내가 왕답게 치장해줄게. 이렇게 해서 코스프레 한 거예요. 갈대로 지팡이도 하고 머리에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고 하는데, 이거 코스프레 한 거예요. 조작하는 거. 이 조작하는 것은 평소에 인간이 그 짓하는 거예요. 평생을, 태어나면서 조작 외에는, 왜곡, 자기를 감추는 것 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이 수 밖에는 없어요. 이거 타고 났어요.

제가 지난 주일에 설교하면서 옷을 이야기했거든요. 옷이 뭐냐, 옷이 왜 필요합니까? 에덴동산에는 옷이 필요 없어요. 쫓겨나갈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옷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는 어디에 살다가 강제조치 당했다는 뜻이에요. 이게. 옷을 입는다는 게 이 표시라니까요. 옷을 입는 게 이 자체가, 이 존재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겁니다. 원래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옷을 입은 게. 그러니까 인간이 옷을 입었다는 말은 지금 연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옷은 연출용이고, 스타일이 연출하는 거예요. 옷은 연출용이에요. 연출이 뭡니까? 조작이고 위장이고 위장술이고 감추는 거예요. 이거는 타고났어요. 타고났어.

옷을 입는 행동이나 밥을 먹는 것까지 다 포함이 돼요. 옷을 입으나 밥을 먹으나 그 행동이 그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데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똑같죠. 밥을 먹어도 없는 게 있는 척하고. 밥만 그런가요. 말하는 것도 그래요. 없는 게 있는 체하고. 그게 좀 평소에는 참다가 술하고 담배 들어가면 이게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허세, 허풍덩어리. 라떼는 말이야~ 내가 왕년에 말이야~ 내 때는 이렇다고. 고구마라떼 하나 시켜놓고. 거기다 허풍을 담고. 라떼는~~ 그래서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추억과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의 극대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추억과 기억의 환상이 만들어낸 거예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추억과 기억이 매일 만들어내요.

그래서 내가 차를 타고 오랜만에 경치 좋은 데 갔다 오고 안 그러면 자기 어릴 때 고향에 갔다 오면 다시 어릴 때 자아로 돌아가요. 회사 회장이 되어서 근엄하게 부하들에게 지시하다가, 지휘하고 위엄을 갖추다가, 막 표준말 써가면서 하다가 부산에 가서 친구 만나면 한 오분도 안 돼서 사투리 다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한테 잘해줬던 엄마 만나면 엄마~! 다시 과거로 돌아가요. 인간은 자기 위장하는 층이 너무 두꺼우면 스트레스 받아요. 위암부터 해서 모든 암의 원인이 되고, 대장암, 췌장암, 속여도 너무 속였어. 속이는 것이 체해서 스트레스 받아서 암 걸리는 거예요. 물론 암에 걸리는 것이 DNA가 다른 사람하고 달라서 걸리겠지만. 환경적으로 봐서는 뭐냐 하면은 이미 끝났는데, 자꾸 악마가 집어넣어준 자아가, “니 할 수 있어! 니 안 끝났어! 일곱 번 자빠져도 일곱 번 일어서면 돼!” 자꾸 허풍을 집어넣는 거예요. 악마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어디로 내려갔습니까? 저 낮은 곳에 바닥까지 내려갔잖아요. 바닥까지.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에 사람이 없을 것 같죠? 가보세요. 도사들이 미리 진치고 있어요. 도사들이. 그림 그리면 그림 그리는 도사. 골프 치면 골프 치는 도사. 꽃꽂이 하면 꽃꽂이 도사는 왜 그리 많은지. 그리고 종이접기하면 종이접기 하는 도사들도 또 있어요. 몇 년 했어요? 30년. 도사. 공부해도 도사. 심지어는 계단청소 하는 것도 도사. 아르바이트 하는 데도 벌써 거기 노털들, 도사들이 다 있고요. 시킨 대로 해야 되고.

인간은, 학교에만 졸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6년하고 졸업하고, 뭐 다 있죠. 그러나 인생도 졸업해요. 졸업해서 뭐 배우겠습니까? 민수기 16장 잠깐 보겠습니다. 16장 31절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말이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32절,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33절,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이걸 아까 제가 강의 중에서 이스라엘이 모델하우스라고 했죠. 이들이 망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원래 망했어요. 처음부터 망했어요. 처음부터. 

독일동화에 이게 있어요. 개구리와 왕자라는 동화가 있는데, 공주가 금덩어리를 가지고 놀다가 궁에 있는 우물에 그걸 빠트렸어요. 귀한 금을 빠트렸는데, 우물이 너무 깊고 해서 못 내려가고 있는데, 고민하고 있을 때에 그 우물 밑에서 개구리가 나타나서, 내가 금덩어리를 찾아서 다시 올려 보낼 테니까 나하고 이야기상대를 해주겠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공주는 다급하니까 그렇게 하고 금덩어리를 얻었어요. 그리고 난 뒤에 개구리를 무시했습니다. 근데 기어이 개구리가 공주한테 찾아왔어요. 침대까지 찾아왔어요. 그 열심에 놀라서 결국 나중에 공주하고 개구리하고 뽀뽀를 했더니만, 그게 사실은 개구리가 아니고 왕자였다는 거예요.

인간은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고 개구리였던 거예요. 처음부터 개구리였어요. 사람인척 한 거예요. 악마인데 악마가 사람의 탈을 썼다고 봅니다. 이게 바로 진멸이라는 겁니다. 진멸. 갓난아기도 죽여요.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요. 심지어 이 땅에 속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죽이되 죽이고, 죽이고 다 죽여 버려요. 심지어 자기 아들 예수님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이 땅이라는, 죽음이라는 해석이에요. 이 땅이라는 해석은 예수님 십자가로, 죽음으로 의미가 다 확정되었어요. 끝났어요. 그냥 죽는 겁니다. 안 끝났다고 고집부리면 안 돼요. 죽는 것이 확정되었어요. 

죽는 것이 확정되었으면 이제 뭐가 신기합니까? 생명을 얻는 것, 다시 말해서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세상, 에덴동산의 완성,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된 겁니다. 왜? 망하는 자에게는 넘볼 수 없는 이야기거든요. 넘볼 수 없는 이야기. 근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확정되었다고 했죠. 아까 청함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고 했죠. 적다가 없다가 아니거든요. 있기는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천국과 지옥이 확정되어 있죠. 구원받은 사람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요. 확정되어 있고, 그리고 지옥 갈 사람도 완전히 다 확정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이 죽음의 세계에 예수님도 들어가 있었죠.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지시고 난 뒤에 며칠 만에 부활했습니까? 사흘만이죠. 사실은 이틀 좀 더 되는데. 그동안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고요하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무 일도.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지옥 갈 세상에 대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부활의 혜택을 입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지옥가는 대로 지옥가면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난 뒤에는 십자가에서만 나올 수 있는 내용이 이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러니까 여기에 구원받을 사람에게만 무슨 일이 일어나요. 근데 구원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심지어 교회예배 참석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장로, 목사, 신학박사가 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아휴 뭐 사람 사는 것 죽을 때까지, 맨날 죽을 때까지래. 이미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하다보면 은혜 받겠지. 지금 자기는 살았다는 이야기를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살았다는 것은 왜곡이고, 오류고, 위장이고, 감추고, 조작이죠. 조작.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거. 살아갈 때 그냥 곱게 사는 법이 없어요. 늘 조작하는 식으로 살아가요.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식으로.

그중에 옷 스타일, 차 바꾸고, 뭐 바꾸고, 가구 바꾸고... 코로나 이전에 20대 사람들이 명절이나 연휴에 주로 어디에 간다고 했던가요? 해외에 많이 나가죠. 처음에는 조심스러워서 중국가고 가까운 일본가고, 돈이 덜 드는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이정도 조심스럽게 갑니다. 필리핀도 가고. 필리핀은 좀 위험해서 잘 안가지만. 그렇게 갑니다. 근데 이제는 너도나도 어디를 가느냐, 좀 이게 배포가 세졌어요. 어딜 가느냐, 유럽에 갑니다. 북유럽. 그거 누가 먼저 했는가 하면 일본아가씨들이 먼저 한 거예요. 일본. 일본의 경제수준이 좀 따라가잖아요. 일본이 돈 되니까 20대, 30대 아가씨들이 결혼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배낭 메고 스페인에 가서 걷기하고 뭐 하다가, 이런 거 했는데, 이제 그걸 한국이 따라가는 거예요.

근데 코로나 와서 못 나가잖아요. 답답해서 미치는 거죠. 답답해 미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코로나 걸려서 죽는 게, 이게 마땅함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이 파멸이 마땅함인지를 모른다고요. 마태복음 24장 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돌 위에 돌이 이게 엮어지게 되면 다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돌 하나 옆에 돌 하나가 또 있어서 돌 위에 돌이 있는 것도 나는 무너뜨린 것으로 간주하지 않겠다. 철저하게 무너뜨리겠다. 철저하게 무너뜨리겠다. 돌 위에 돌이 있으면 이게 한 형체가 되잖아요.

일체, 인간이 자기 스타일 꾸미고 조작하고 연출하고 뭔가 내 손으로 내가 했다는 그거 있잖아요. 그걸 나는 일체 용납하지 않겠다. 이게 하나님의 이미 확정된 활동입니다. 다 파멸해버리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이 지옥 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안심 푹 놓고 이 땅을 밟아가면서, 든든하네, 든든하네,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식구들 간에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보고 뭡니까? 홍해에서 우리 흉내 내다가 빠져죽은 애굽 시체와 갑옷들만 보이죠. 한편으로서는 신나죠. 신나면서도 한편으로서는 주님이 두려운 거예요. 아, 주님이 일을 하신 프로젝트취지가 저거구나. 근데 애굽 군사들은 왜 홍해에 빠졌습니까? 건널 수 없는 데를 건너왔다 이 말이죠. 

그러면 구원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았어요? 건널 수 없는데 황당 그 자체죠. 건널 수 없는데 건너와 버린 거예요. 자기는 멋도 모르고 바다에 길났네. 바다인줄 모르고 길인 줄 알고 왔는데 보니까 이게 원래 바다였었어요. 건너서는 안 되는 거예요. 더 쉽게 말씀드릴게요. 저와 여러분이 천국 오면 안 돼요. 강의 오늘 끝내버려야겠어요. 우리는 천국 오면 안돼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면 안 된다고요. 우리가.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고 니가 천당 가려고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그러냐고 하면 우리가 가슴을 쳐야 돼요. 천국 가려고 교회 간 것이 아니고 나는 못 간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복음말씀을 들으려 가는 거예요. 이거는 나한테 어울리지 않습니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걸 세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새로움, 제목이 계속 바뀌는데, 이 제목으로 해야겠어요. 새로움. 날마다 새로움이에요. 복음의 새로움. 다른 세상 기쁨은 기쁨도 아니에요. 골프치고 뭐하고. 날마다 새로움을 주는 거예요. 어디서 나온 새로움이냐, 죽음에서 나온 새로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온 새로움. 죽음에서 나온 새로움. 이 새로움이 나오게 되면 이 새롭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세상에서 내뱉는,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모독과 모욕을 계속해서 듣게 되는 새로움이에요.

이거 뭐 복음 아는데 집 꼬라지하고는! 이런 거요. 복음을 안다는데 집 꼬라지하고는, 이게 뭐예요? 뭘 모독하는 겁니까? 이미 홍해바다를 건너온 초과적인 이 신분과 이 위치를 그들은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또 그들이 욕하죠. 니가 교회 다녀도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내가 놀리니까 기분 나쁘지? 나쁘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미 복음을 알아서 홍해를 건너온 사람한테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기분 나쁜 게 뭐예요? 내가 건너가려고 애썼으면 기분 나쁜데, 니는 니 관점에서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십일조 하면 하나님께서 착하다 해서 천국까지 넣어준다. 이렇게 하면 내가 기분 나쁠 건데, 이미 와버렸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한 것도 없이, 터무니없이, 황당하게 와버렸으면 그 다음부터는 남들이 나의 인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놀리는 게 기분 나빠요? 목사님한테 몸 아프고 비실비실하다고 하면 기분 나쁩니까? 니 망했다고 하는 게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망한 거 나도 알아. 나는 수십억 가졌어도 망했어. 멀쩡하고 건강하고 내 집안이 잘 되도 망한 거예요. 왜? 이거 못 건너면, 홍해 못 건너면 망한 거예요. 돌 위에 돌을 남기지 않는 관점이라면, 집사님 새 아파트 세워놓고 돌아서면서 다 무너졌네. 사실 안 무너져도 그 자체가 이미 무너진 거예요. 거기 새 아파트에서 복음이 나옵니까? 새 아파트에서 오후 여섯시 돼가지고, “관리실에서 말하겠습니다. 지금 십자가복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까? 안 나오죠.

이 세상은 전부 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걸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아까 그 조작이에요. 위장함. 스타일. 자기 선에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이보다 더 우수해야 내 맘에 든다는 거예요. 남에게 지기 싫다는 거예요. 주님은 자기의 목숨을 다 걸고 자기 백성을 십자가를 가지고, 그 능력에서 선택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냐 하면은 주님의 선택과 무엇과 정면 교통사고가 일어났느냐 하면은 나의 선택이 계속 충돌이 돼요. 나의 선택은요, 나의 새로움으로 내가 이 땅에서 계속해서 위로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인생의 삶이 너무 지루한 거예요. 너무 지루해서 뭐 딴 일 해볼까? 뭐 그림 하나 그려볼까? 상이나 파고 뭐 이런 거.

그러니까 개구리인지 모르고 자꾸 왕자로서, 심심한 왕자가 돼버린 거예요. 뭔가 하면 내가 개구리에서 벗어나서 왕자가 된 것 같은데, 이거는 나의 선택입니다. 나의 선택인데 주님의 선택이 어떻게 찾아오느냐 하면은, 흔들기를 해버리는 겁니다. 흔들어버려요. 흔들어보면 우리한테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의 조치가 나와요. 내가 조치를 할 때 여기서 나온 게 뭐냐, 자기 의가 나와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구원 안 받은 사람은 그게 일상이기 때문에 관심도 없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자기 의가 나오는데, 그 자기 의에 모양새하고 그 내용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조롱하는 거, 그 조롱하고 똑같아요. 내용이 똑같아요.

“주님은 나에게 내 인생을 이렇게 흔들기 했지만 내가 악바리로 해서 이만큼이라도 살림 일궈놨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지금 자기 목숨을 내놓는데, 목숨 내놓는 자리에서 우리는 지금 나의 잘남을 내놨다고요. 물론 성도한테는 그게 나와요. 흔드니까 나오는 거예요. 자기는 뭐 복음 알고 하나님께 충성한줄 알았죠. 막상 흔들어보니까 여전히 내 안에 내 의가 살아있고, 시체에 불과한데 시체 안 되려고 자기를 얼마나 조작해왔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그것이 나를 속인다고. 모든 속임수는 내가 살아있다는 그 순간부터, 그 다음부터 나는 나한테 속아 넘어가고 있어요.

이 세상 자체가 진멸의 대상입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 전쟁이야기, 여자사사 드보라이야기 있잖아요. 싸우는 거. 우리가 보면 신났죠. 기드온이 뭐 하고. 우리는 갑자기 이스라엘 편이 되가지고, 이방인 민족이면서 같이 으쌰으쌰하면서 신났잖아요. 그게 홍해 건너왔을 때, 홍해바다에 애굽 군사들 갑옷이 떠있는 그게 마냥 신날 이야기에요? 오히려 화들짝 놀랄 이야기죠. 주님의 진지함에. 하나님의 자기 아들 죽으심만 기억합니다. 그 죽음이 니한테 있는가 보자, 라고 우리 속을 탐색하면서 보는 거예요. 흔들면서 하게 되면 갑자기 우리 속에서 자기의가 막 나오고, 십자가에서 욕했던 그 이야기가 마구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성도냐, 성도 아니냐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지금 가을입니다. 가을풍경을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은 차 안에서 가을풍경을 보는 것하고 차 바깥에 나가서 가을풍경을 보는 것하고. 가을풍경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종말로, 종말풍경으로 봅시다. 차안에서, 비겁하게 교회 안에 숨어가지고 세상보지 마시고. 주께서는 예수님과 똑같아요. 내가 이 세상에서 직접 밥벌이하고 먹고 살고 부대끼고 식구들한테 당하고 사람들한테 욕 얻어먹었듯이, 너도 차안에서 나오너라. 코로나 무서워서 차안에서 바깥풍경보지 말고 나오너라. 그 지는 세상의 단풍, 낙엽, 저 져버린 꽃잎 밟아라. 그리고 너도 가을풍경의 일부가 되어라. 그 가을의 쓸쓸함에 니가 참여하라. 니 자신을 쓸쓸하게 봐라. 미련두지 말고. 낭만을 위하여. 

그냥 나도 한때 철딱서니가 어떻게나 없었던지. 내가 예수님 믿고 천당 가려고 했던 그 철딱서니 없었던 것도 같이 이 종말과 함께 쓰레기가 되어가지고 주께서는 없애버리는 일을 하신 거예요. 이미 너는 확정했다는 거예요. 뭘 확정했느냐, 니는 진멸의 대상이었다. 니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걸 믿냐? 내가 선택한 것을, 내가 믿을만한 선택을 한 것을 믿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십자가 안에만 들어있는 상황을 새로움으로 주면서, 그 새로움을 니가 믿느냐? 이 말이죠. 십자가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은 세상은 이미 끝났어! 세상은 진멸되어야 돼! 믿냐? 그 종말을. 그 끝났음을. 믿는다면 니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 확실하지? 네,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니가 구원된 것이다.

도저히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천국에 가요. 왕자가 아닌데. 개구리는 개구리다워야죠. 그런 성령은요, 십자가이후에 옵니다. 여기 제자들 다 도망가 버리죠. 아이고, 제자들이 철봉 하다가 힘 빠져서 다 내려오는 거예요. 자, 그다음에 봅시다. 마태복음 27장 33절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2절, “희롱을 다한 후” 이런 말씀들을 우리가 차 안에서 보지 말고, 바들바들 떨면서 ‘나 이러면 안 돼. 나 천당 가야돼.’ 이러지 말고. 아예 십자가현장 바로 옆에 붙어서 보자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27장 54절에 나오잖아요.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죠. 그 현장에 있던 이방인 중대장이 이미 죽어서 정육점의 고기처럼, “간다. 간다. 갔어. 큰소리치더니만 별 것도 없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하나님의 자기 죽음으로 본 거예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던지신 것으로 본 거예요. 이 백부장이. 우리도 성령 받으면 이런 눈이 있어요.

뭐 백내장 수술 안 해도 이런 눈이 있어요. 이게 보입니다. 현장에 있다면. 우리가 만약에 지금 와서 그 현장에 있다면.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우리도 그 십자가현장에 가고 싶습니다.” 이 대전이, 우리 일상이 십자가에요. 일상이 십자가라고요. 식사 받으면서 이 식사는 내가 먹을 자격이 못 돼. 이런 식으로 보는 이것이 ‘주여! 진멸인데, 아직도 왜 진멸하지 않으십니까?’ 이런 마음. ‘주께서 곧 오신다. 아이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든 걸 하게 되면 진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먹는 거 입는 것으로.

자, 더 진도 나가봅시다. 여기 시몬 구레네 사람을 만나죠. 언젠가 마가복음 할 때 했는데, 구레네 사람 시몬 할 때,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라고 했어요? 32절에.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 다음에 뭡니까? “억지로”죠. 억지로. 이게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에요. 십자가에서 나오면 새롭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걸 다른 말로 고칠게요. 억지로.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국 가게 만들어요. 억지로. 꼭 시몬 같은 입장이에요. 눈 떠보니까 이미 홍해바다 건너왔어요. 그냥 보니까 같은 동료의 시체가 홍해바다에 떠있어요. 뭐 이런 시추에이션이 다 있어요. 시추에이션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주님은 생명을 바쳤는데, 그렇게 진지한데, 제목 다시 합시다. 주님의 진지함으로 바꿉시다. 그만큼 주님은 진지한데, 왜 우리는 복음이나 십자가나 주님에 대해서 왜 그렇게 안 진지한지요. 그게 내 것이 있어서 그래요. 내 것이 너무 단단해서 그래요. ‘굳이 주님이 아니라도 내 것 가지고 밥 먹고 살만한데. 나는 뭐 취미생활이나 하고 이러면 되지. 뭐 그거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세상이 이제 가을이고 겨울입니다. 종말이에요. 이 모든 게 종말입니다. 종말에 “억지로”라는 말을 왜 했느냐 하면은 알아서 구원될 사람은 저부터 해서 여러분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우리는 조작하고 연출하는 거, 이거는 잘해요. 이게 타고난 본능이 그래요. 진멸의 대상입니다. 저주의 대상이고. 왜? 내가 성질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태어난 그 자체가, 예수님마저 저주받았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저주받는 거예요. 그냥. 저주받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구원받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분명히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고요한데,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 우리를 깨웠어요. 이 죽음에서. 그것도 억지로 깨웠어요. 억지로. “니 생명책에 기록됐단다.”하고서. 명단, 호명 부르면서 그냥 깨운 거예요. 깨고 보니까 우리 이름을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고. 몰랐죠. 우리는. 아니, 몰랐죠. 갑자기 제목을 몰랐죠, 라고 하고 싶네요. 정말 몰랐죠.

교회가보니까 뭘 해야 구원받는 줄 알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배웠죠. 몰랐죠. 그거 해도, 예수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몰랐죠. 우리는. 우리 인간은 하라고 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유대인들이 얼마나 철저합니까? 철저하게 성경연구해서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확증된 진리체제를 갖고 있었어요.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새로움으로 해버려요. 기적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오직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는 그 자체가, 어린양의 피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에 나의 죽음은 그 앞에 걸치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살았다, 그거 걸치지 마세요.

예수님의 죽음만 우리 안에 살아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만.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맨날 진흙 바닥에 떨어진 닭발이에요. 쓸데없는 것이 묻어도 너무 묻었어요. 드라마 연속극 보고 울고불고 하면서, “아이고 불쌍한 니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아이고, 내 인생 왜 이러카노.” 이런 식으로. 또 자기연민. 자기위로. “주여, 저를 위로해주옵소서” 뭘 위로해? 망했는데 뭘 위로해? 우리는 안 끝났다고 하지 마시고요. 끝났어요. 끝났는데,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새로움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채워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 기쁜가 하면은,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에게만 기쁨으로 와요. “주여, 이제 이 코스프레 하는 거 지겹습니다. 내가 이 몸 가지고 코스프레 하는 거 지겨우니까, 저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요.” 하는 그 순간은 주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너는 이미 내 것이라는 기쁨과 함께 동반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되게 진지한데 우리는 장난이고 농담처럼 여기지 않았습니까? 내 것에만 진지하지 않았습니까? 내 자존심가지고만 진지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죽어도 상관없는 자유를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 중지  (0) 2020.12.28
이동된 거룩  (0) 2020.12.28
자존감과 사명감  (0) 2020.11.30
자아  (0) 2020.11.06
언약방출  (0) 2020.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