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64강 사무엘상21장3-6절(이동된 거룩)20201130-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21장 1절에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라고 되어 있죠. 다윗이 거기서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만나서 배고프니까 떡을 달라고 했고, 나만 먹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있는 소년들도 있으니까 떡 좀 달라고 했고, 거기에 대해서 4절에 보면,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늘 먹는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하나님의 성소에 진열되어 있는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 하였으면 주리라” 5절에서 다윗이 우리가 삼 일 동안 부녀를 가까이하지 못했다. 쫓겨 다닌다고 그렇게 한 거예요. 6절에,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성소에 진열되어 있었던 떡)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낼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그렇게 되어 있죠.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와의 만남인가, 왕과 제사장이 만났다는 겁니다. 만나서 왕이 그 제사장의 영향력 아래 침투하는 겁니다. 침투가 돼요. 쫓겨난 이 왕은 다윗인데, 사울왕으로부터 쫓겨난 다윗이 제사장 영역에 침투해서 이것을 접수해버립니다. 그러면 왕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에 왕이 있을 필요가 없죠. 하나님이 왕이기 때문에. 그럼 하나님이 이렇게 옆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왕이 하늘에 있죠. 그러면 왕이 있으면 지상에는 왕이 필요가 없습니다. 지상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은 제사장이 있어요. 수직적으로 보이지 않는 왕이 계시고 제사장이 있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 이스라엘을 설립한 취지에 부합되는 조직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 왕이신 하나님이 백성들을 통치한다. 통치하고, 제사장은 백성들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중개역할을 하죠. 중보자 역할을 한다 이 말이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은 보이지 않는 왕에게 종속되어 있는 겁니다. 근데 이 왕이 수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옆으로 같이 있다고 봅시다. 하나님이 인정한, 제사장을 기름 부은 것이 아니고 왕을 기름 부었잖아요. 그럼 기름 부은 자가 제사장도 되고 왕도 되니까 두 부류가 생기죠. 왕 계열과 제사장 계열. 두 부류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왕이 접수를 해야 돼요. 침투해서 접수하는 그 시점에 와있는 겁니다. 그 과도기적 상황에 와있어요.
그림 보면 아시다시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지상에 왕으로 왔을 때에 사람들은 그 왕을 어떻게 알아챌 수 있느냐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왕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 이 쫓겨난 왕은 어떤 왕이냐 하면은 배고픈 왕입니다. 배고픈 왕. 배고픈 왕인데, 지금 기존의 왕한테 쫓겨났으니까 처지가 딱한 왕. 권력이 전혀 없는, 박탈된 그런 왕이 된 거예요. 매우 궁핍한 왕이죠. 자, 이 궁핍한 왕에 대해서 사람들이, 왕이 도리어 이 제사장이라는 영역, 지상의 모든 정신적인 이념을 다 쥐고 있는 그런 제사장이거든요. 이스라엘에게서는 제사장이 정신적인 통치를 하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통치하는 거예요. 군사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군사적으로는 사울 왕이 했고. 정신적으로 통치하는 이걸 가지고, 제가 얼마 전에 썼던 글에 나오죠.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는 우리말로 하면 이념인데, 통치관념이라고 하는데,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도 이데올로기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북한의 이데올로기는 뭡니까? 공산주의. 남한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그렇게 되죠. 나는 이데올로기 그런 것은 싫다고 할 수가 없어요. 날 때부터 통치이념이 우리 온 몸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공산주의가 오기 전에는 무슨 이데올로기였냐 하면은 바로 유교이데올로기죠. 유교이념입니다.
유교이념의 특징은 가정중심이에요. 가정중심이고 더 나아가서는 가부장중심이죠. 아버지중심이에요. 아버지중심이고, 여자는,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되는. 아들한테 복종하고 아버지한테 복종하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큰일은 남자가 다하고 작은 일, 사소한 일은 여자가 맡되, 여자가 하는 일은 바깥의 일보다 사소하다는 것. 이런 유교이데올로기에서 여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대체로 무식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여자가 똑똑하면 남자한테 자꾸 공격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를 여기서 키울 수 있는 것은 개가 학교교육을 안 받았기 때문에. 학교교육을 안 받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사육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교육받은 남자가 여자를 사육하는 거죠. 남자는 무슨 혜택을 입었느냐 하면은 교육혜택을 입었습니다. 엘리트, 문자해독이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유교에서 여자들이 교육을 받아버리니까 유교이데올로기 이게 어떻게 됩니까? 무너지죠. 무너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돈 이데올로기, 돈을 다른 말로 하면 자본이데올로기, 자본이념에 가는 거예요. 돈이 있는 자가 큰소리치는, 가정이든 국가든 사회든 어디든 돈이 있어야 사람구실을 하는 이데올로기에 속해져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은 이유가,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안 다니거든요. 종교 같은 것을 그냥 오락으로 생각한다 이 말이죠. 오락으로 생각하거든요. 자, 그럼 지금까지 강의한 바에 의하면 사람이 교회나 종교나 불교를 오락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이 돈의 통치이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아니죠. 교회는 벗어나도 돈에서는 못 벗어나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종교인인 거예요. 돈을 숭배하는 종교인. 이미 종교가 있기 때문에 교회나 절이나 성당을 시시하게 보는 거예요. 이미 종교가 있어요. 믿습니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반드시 있다고요. 오창에다가 클래식 하나 하는 것 그게 기도제목이라고 했잖아요. 여기서 통성기도 한번 할까요?
이미 이데올로기 속에 말려들고 있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이데올로기라는 말도 안 해요. 우리말로 하면 딱 한자예요. 육. 앞에 뭐 하나 붙이면 확실하죠. 혈육. 인간은 혈육, 이걸 창세기로 보면 아담 안. 아담 안에서는 혈육 이외는 아무것도 더 소중한 것은 없어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가 무슨 이데올로기라도 다, 교회면 교회가고 절이면 절에 가되, 제발 내 자식만큼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혈육이데올로기.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오셨다는 말은 뭘 끊느냐 하면은, 이 혈육을 끊는 거예요. 혈육을.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나님 아버지의 말을 듣는 자가 내 모친이고 형제니라(막3:33-35).
혈육 자체를 뭘 하느냐 하면은 교체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이데올로기의 교체죠. 종교의 교체죠. 절대 통치이념의 교체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자기 삶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탈출하지 못한다. 이겁니다.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 빈공간이 아니고 꽉차있는 정신적인 프레스가 있어요. 억눌린 것이 있고, 그게 인간 속에 들어온 겁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바로 현실인식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인간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인식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이데올로기는 뭐라고 했습니까? 바로 제사장이데올로기라고 했죠. 이거는 여러분들이 아시니까 제가 그냥 쉽게 가겠습니다. 제사장이데올로기는 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제사장으로부터 뭘 받는다? 죄사함을 받아야 나갈 수 있다. 이게 제사장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럼 죄사함을 받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이방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누가 보장하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승리를 보장한다. 승리를 보장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대가는 뭐냐,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다. 이거에요. 이거. 약속의 땅에서.
그러면 여러분이 보기에는 구약이 좋습니까? 신약이 좋습니까? 현재 이스라엘 땅에 그냥 살고 싶겠어요? 이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도 위에 자기 이름을 쓴다. 지도 위에. 그럼 실제로 그 사람이, 내가 대전에 있는데 지도책 펴놓고 서울에다가 내 이름을 쓰면 내 거주지가 갑자기 서울로 바뀝니까? 아니죠. 그럼 지도라고 하는 것은 그냥 종이쪼가리에 지나지 않습니까? 바로 이 지도가, 이게 뭐냐 하면은 구약에 있는 가나안 땅이 얄팍한 종이로 된 가상, 또는 히브리서로 말하면 모형에 지나지 않는, 어떤 진짜 현실을 가로막는 막 같은 겁니다. 얇은 막 같은, 두께가 없는 막. 페인팅 된 그림이라고 볼 수 있죠. 신라시대에 유명한 화가 솔거가 소나무를 벽에다가 그려놨더니만 참새가 진짜 소나무인줄 알고 와서 부딪쳤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많이 했죠.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참새는 교육을 안 받았기 때문에 뭐가 뭔지 잘 모르니까.
자, 그런데 어느 집에 커튼이 있는데, 커튼에 산수화를 그려놨다고 칩시다. 그럼 그것은 누가 봐도 커튼이라는 얇은 천에다가 산수화를 그려놨기 때문에 진짜 강과 들은 아니겠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그 산수화 속에 머리 들이밀고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겠죠. 이상한 나라. 그게 신약이에요. 이게 신약이라고요. 신약은요, 구약은 오늘날 구약의 연장선이 대전이고 서울이고 대구고 그래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예요. 그냥 혈육이 전부고, 이런 얇은 모든 가나안 땅, 내가 살던 땅에서 그냥 행복하게, 아까 혈육으로 살다가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이런 현실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신약에서 말하는 성령의 나라는 없습니다. 존재할 수가 없어요.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은 커튼에 그림이 페인팅 되어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은, 이것은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상이거든요. 그 발상을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뭐냐 하면은 인간 세상에서 하늘나라는 없는 데에요. 없는 분이 오셔가지고 인간세계 속에서 하늘나라를 만들어버렸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은 왕이 제사장 제도 속에 침투하는, 경과, 경유, 과정을 지금 다윗이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다윗이 보여주는가, 다윗이 떡을 먹다가 아니고 떡 속에 다윗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 떡은 어떤 떡이냐 하면은 바로 성전과 관련된 떡이에요. 성전과 관련된 떡.
제가 하나 예를 드는데요. 이 예를 들어야 이해가 돼요. 다윗이 뭘 건드렸어요. 다윗은 지금 배고파서 온 거예요. 다윗을 이렇게 그냥 성소, 그 당시에는 성전이 없으니까 일시적인 성전이라고 합시다. 이 성전, 제사장이 있는 성전으로 다윗이 혼자서 온 것은, 자기를 따르던 400명의 소년들을 따돌리고 혼자서 온 것은 사울에게 쫓기다보니까 배가 고파서, 자기 수행원들이 배가 고파서, 자기도 배고파서 떡을 구하려고 왔는데, 다윗이 뭘 건드렸어요. 여러분들이 스릴첩보영화에 보면, 인디아나존스에 보면, 귀한 보물을 갖다 놓은 것을 훔칠 때에 자외선이 쫙 해가지고 그걸 뚫으려고 온갖 쇼를 다하면서 넘고 해가지고 그걸 기어이 훔쳐내죠.
다윗이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을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자기의 생존에 몰두하는 다윗으로 하여금 어디를 건드리게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의 요소를 건드리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있는 떡이 다윗 안에 실려서 다윗이 움직일 때마다 성전이 움직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거예요. 기름부음 받은 왕이 맹탕이라.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제사장을 만나게 한 거예요. 제사장을. 여기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게.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만난 이유가, 그 많은 제사장이 있더라도 아히멜렉 제사장을 만나게 한 이유가 아히멜렉 제사장이 나중에 그 당시에 다윗에게 떡을 줬다는 이유 때문에 사울 왕에게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 순교, 죽음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어요. 어린양을 매일같이 드리는 것보다, 그 어린양을 드린 제사장이 실제 현실 속에서 정치적 권력에 의해서 어린양처럼 목이 잘리는 그것이 다윗에게는 새로운 내용을 첨가할 수가 있는 겁니다. 새로운 내용을. 뭐 하늘에서 내 말을 잘 들어, 라고 하는 것보다 직접 오셔가지고 사람들에게 목 잘리는 것이 훨씬 더 현실감이 있죠. 실제적이다. 실제적. 현재 이데올로기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거기 이데올로기에 해당되지 않는 이질적인 현실이 거기에 침투할 때, 기존의 점잖은 이데올로기가 점잖은 줄 알았는데 강력하게 여기서 진짜 하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이, 이러한 제도권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윗을 통해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자, 이점을 보다 더 쉽게 하기 위해서 실제 있었던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나이가 현재 60대 중반인 어떤 한 아주머니가 계셔요. 그분이 동부화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습니다. 일찍 자기 남편하고 사별하고 딸 둘과 아들 하나를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동부화재에 계셨던 이분이 50대 중반의 어떤 남자를,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어요. 남녀공학이니까. 그 남자하고 서로 좋아졌다 이 말이죠. 결혼하겠다고 자식들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들은 원래 그래요. 자기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거든요. 엄마 좋을 대로 하라고 하는데, 딸 둘이 그렇게 반대를 하는 거예요. 반대하는 조건이 있어요. 엄마가 결혼 안 하면 엄마 생활비를 우리가 다 대줄게. 콜? 이렇게 된 거예요. 엄마가 딱 있다가 콜! 이러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이데올로기입니까? 돈 이데올로기죠. 돈 이데올로기예요.
자, 방금 한 이야기를 봅시다. 파마한 엄마가 있고, 여기 한 서른 쯤 되는 딸 둘이 있고, 여기 철없는 아들 하나는 몰라요. 자기만 아니까 모르는데. 이 사이에서 미지의 남자가 등장했어요. 모자 쓴 중년남자가 하나 등장했다 합시다. 이 남자하고 좋아졌다 이 말이죠. 동부화재 다니는, 동부화재 간접 광고하는데, 동부화재가 애 둘 다 키웠어요. 큰딸은 중견기업인 부잣집에 결혼했고. 둘째는 보통 집에 했는데. 여기서 보세요. 방금이야기 한 것 중에서 이 관계, A라는 주인공과 B라는 남자, C라는 딸, 또 D라는 딸, F라는 아들이 있더라도, 이 관계가 그냥 빈공간이 아니고 뭐로 연결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말이죠. 돈으로.
그러면 이 인격 안에 뭐가 들어오겠어요? 돈이 들어오겠죠. 돈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들어오겠죠. 제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해주는 겁니다. 그 시대가 뭘 바라보고 뭘 성공이라고 하고 뭘 실패라고 하는지, 그 기준점이 우리 인간 속에 다 들어오는 거예요. 여기 둘 다 돈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사랑 이데올로기로 나간다면, 딸들하고 관계를 끊고 여기 둘이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붙을 거죠. 사랑으로 살겠죠. 중년이 돼서 돈벌이도 시원찮지만 이 둘이 너무 지독하게 사랑한다면, 결국 이 부부가 갈 곳은 번개탄밖에 더 있겠어요. 번개탄 피워놓고 죽는 수밖에. 돈도 없는데 우리 같이 죽자. 이거밖에 더 있겠어요.
돈=힘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돈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욕망을 교환할 수 있는 매개체. 이게 돈입니다. 모든 욕망을 교환할 수 있는. 욕망, 돈, 이 세계 속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실 때에, 그들은 예수라는 분과 자기 사이에 그냥 빈공간이 아니라고 했죠. 여기 뭐가 생겨납니까? 관계가 있는데, 이 관계는 인간 쪽에서 나 살고보자는, 돈 가지고, 힘 가지고 살고보자는 그 관계, 작대기가지고 예수님한테 점검하겠죠. “예수님 우리가 원하는 걸 제공할 수 있어요?” 제공할 수 있냐고 자꾸 쑤셔보겠죠. 근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습니다.
어제 설교인가, 사도행전 3장 앉은뱅이 있죠.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섭섭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하고 하느냐 하면은, 은과 금을 달라고 하니까, 앉은뱅이의 이데올로기는 뭡니까? 돈 이데올로기죠. 그럴 때, 니가 원하는 것을 차단하고 예수이름을 줘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의 맨 껍데기는 그 인간인데 인간 자체의 내용물이 완전히 바꾸어지는 겁니다. 예수이름으로, 예수님이 하셨던 일로 이게 바꾸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죠. 바꾸어지게 되면 기존의, 이 지도상의, 흔히 말하는 네비게이션에 표현될 수 있는 땅의 땅덩어리가 아니고, 다른 땅, 예수 안이라는, 천국이라는 다른 땅을, 거기에 그 앉은뱅이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도위에 자기 이름을 쓰는 것은, 지도와 그 땅과 함께 등기 등본된 내 이름과 함께 다 지워져버리는 겁니다. 언제? 그 순간, 예수님 이름을 믿을 때. 내 이름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예를 든 것은 인간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아니고, 걸쳐져 있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있는 관계망을 타고 서로 의사소통을,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의사소통을. 어떤 것도 다 그렇습니다. 교회 다니면 성경을 많이 읽어야지, 라고 하잖아요. 아까 했잖아요. 성경을 많이 읽어야지, 라는 이 밑바닥에는 뭐가 있습니까? 성경 많이 읽으면 뭐가 생긴다? 돈 준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게 해주겠다. 돈 준다. 돈이 없는데 성경을 읽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 좀 되니까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내뱉는 모든 말 속에는 지금 좀 살만하다는 이 뜻이에요. 연금 넣어놓은 거 있고 나라에서 이렇게 복지차원으로 이십 만원 주고. 이게 있는 거예요. 이게 있다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그게 하나도 없어요. 쫓기고 있는 입장이니까. 현찰이 없는 거예요. 현찰이. 카드도 다 끊기고 현찰이 없고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어디를 덤벼드느냐 하면은 바로 거룩한 성소에 있는 떡을 공격하게 된 겁니다. 이게 건드린 거예요. 이게. 본인의 의사가 아니고 건드린 거예요. 모세 때 이게 성막인데, 지성소, 성소가 있는데, 성소에 테이블이 있어요. 테이블. 동쪽에 테이블이 있고 서쪽에는 일곱 촛대가 있어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일곱 촛대가 나오죠. 앞에 일곱 촛대가 어디를 비춥니까? 일곱 촛대가 비추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일곱 교회가 비추는 거예요. 일곱 촛대, 그래서 일곱 교회잖아요. 일곱 촛대에서 비추는 성도들이 떡을 보는 거예요. 떡을 본다 이 말이죠.
하다하다가 다윗이 먹을 것이 없어가지고 이 떡을, 이 떡을 지키는 사명자가 누구냐 하면은 제사장입니다. 그 지역의. 쉽게 말해서 사명자에게 떡을 달라고 온 겁니다. 떡 달라고 왔을 때에, 일주일마다 한 번씩 떡을 교체를 해요. 일주일마다 떡을 교체하고 그 남은 떡은 제사장 가족들이 먹게 되어 있어요. 그 떡까지 다윗은 양보 없이 그걸 넘볼 수밖에 없어요. 제사장이 하는 말이 “늘 우리가 먹는 떡, 항용 떡은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지난주에 내었던 떡이 있는데 그거라도 괜찮겠습니까?” 할 때에, 오케이 한 거예요. 지금 굶어죽을 판에 뭔들 못 먹어요. 문제는 이 떡이 바로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하면은 율법의 조항과 연결되어 있는 떡이라는 거예요. 율법의 조항과.
본문 사무엘상 21장 4절에 보면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거룩한 떡과 지금 다윗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거룩한 떡을 먹게 되게 되면 다윗은 무엇을 흡수하게 되느냐 하면은 왕의 입장에서 제사장을 자기 수하에 흡수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사울 왕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울 왕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은 하나님이라는 왕이 따로 있는데, 하늘에 왕이 있기 때문에 제사장은 하늘의 왕의 말을 듣기 때문에, 군사의 일을 해야 할 왕이 건방지게 제사장의 떡을 먹을 수가 없어요.
여기 성소는 누가 있는 곳이냐 하면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이에요. 그럼 이 떡은 누구 떡이냐, 하나님이 먹을 떡이 되는 거예요. 군사적으로 해야 될 왕이라고 해서 이 떡을 침범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 같은 경우에는 침범하려고 해서 침범한 게 아니고 지금 건드려버린 거예요. 왜? 기존의 군사적인 왕, 엉터리 왕한테 쫓기다보니까 진짜 왕이 무엇과 결합을 했느냐 하면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먹게 된 이런 사단이 난 겁니다. 이것은 바로 왕이 무엇을 흡수통합 해버렸다? 제사장직을 흡수통합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흡수통합 해버리면, 제사장들은 형식적으로, 매뉴얼대로 딱 제사 드리는 것 있잖아요. 그게 이스라엘을 살리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게 돼버렸어요. 왜냐하면 매뉴얼은 이미 다윗이 당하고 있는 사태, 그 사태 속에서, 사울 왕과 싸우고 블레셋과 싸우는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매뉴얼이 돼버린 거예요. 어떤 매뉴얼? 거룩한 매뉴얼. 거룩은 형식적으로 커튼에 산수화 그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커튼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성전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성전이어야 하는데, 다윗이 와서 거룩한 떡을 먹는 순간 다윗은 움직이는 성전이 돼버렸어요. 산수화 속에 진짜 들어가 버린 거예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요. 풍경 속에 들어간 거예요. 풍경 속에.
여러분 다윗의 이러한 위상이, 그 당시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현실상에서는 낯설죠. 그게 낯선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낯설어요. 예수님이 그걸 온전히 다 이루신 분이시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로 오셔가지고 그냥 목수의 일만 하시지,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는 내가 아는 세계에 못 들어오잖아. 그치.” 이런 뜻이라고요. “너는 내 밖에 있잖아.” 그런 뜻이에요. 사람들은 예수 안의 세계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세계가 있기 때문에. 제사장도 멋도 모르고 준 거예요. 멋도 모르고. 자기 딴에 율법이 제안하는 그 규칙들을 다 동원해서,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당신을 도울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아히멜렉 제사장이 도와줬거든요.
근데 다윗을 생각해보세요. 아히멜렉 제사장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조건을 거쳐서 누굴 도와줬습니까? 다윗을 도와줬는데,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이 아히멜렉이라는 이 제사장이 사울 왕에 의해서 이 사람이 살해당하잖아요. 살해당한다면, 살해당하기 전에 아히멜렉의 제사장은, 내가 도와준 그 다윗은, 내가 생각한 다윗은 그 이상의 위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몰랐죠. 죽어야 다윗과 함께 된다는 그 생각을 처음에 다윗이 왔을 때는 몰랐던 겁니다. 다윗을 도와줬는데 결국 내 목숨은 달아나더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와! 도와줬겠습니까? 안 도와줬겠죠.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이잖아요. 예수님 따라다니면 천국 간다. 이거는 뭐 우리가 커튼에 그려진 산수화를 관람객 시선으로 얼마든지 상상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예수 따라갔더니만 전부 다 뭐가 됐다? 순교자가 되었다. 사도바울도 결국 처참하게 죽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순교자가 된다면 애초부터 안 따라갔죠. 애초부터 안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본인의 결심과 자발적인 결단에 의해서 성도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다윗처럼 쫓겨 와야죠. 다윗처럼 쫓기다, 쫓기다, 니도 밥 먹고 살고 나도 밥 먹고 살고, 열심히 살다보니까 먹을 것이 떨어졌어. 뭘 건드린 거예요. 생명선을 건드린 거예요. 이게 땡잡은 겁니다.
교회 가서 성경 읽고 성경연구하고 구원받으려고 시도했다가 뭔가 잘못 건드린 거예요. 그런 식이 아니에요. 그 라인이 아니에요. 다른 라인을 건드리게 된 거예요. 주께서 일부러 몰아세운 겁니다. 건드린 거예요. 아, 예수 믿는 것이 이 땅에서는 죽었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살아있는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그러한 새로운 체험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이미 죽은 자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러한 해괴망측한 고백이 나온다는 것, 이거는 바로 뭘 의미하느냐, 아까 예를 든 동부화재 아줌마의 세계하고 다르다 이 말이죠. 동부화재 아줌마하고 완전히 다른 거예요.
중첩된 현실이라고 하는데, 현실이 중첩된 거예요. 다윗이 이걸 알아서가 아닙니다. 그냥 배고파서 가다보니까 이렇게 맞닥뜨린 거예요. 자기가 제사장직까지 흡수통합 할 줄은, 그런 욕심을 낸 적도 없어요. 그런 기대를 한 적도 없어요. 제가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무의식적으로 나간 것은 무의식적으로 돌아온다. 돈을 잃으면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 아니고 돈을 잃으면 뭐가 오느냐, 내가 몰랐던 내가 돌아와요. 이거는 내가 의식한 지금의 내가 아니고, 내가 상상도 못한 다른 나라, 다른 나라가 나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이 중첩작업을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기존의 혈육 이데올로기, 돈 이데올로기 다 끊어지고. 뭐냐 하면은 복음 이데올로기 십자가 중심으로, 하나가 엮여지는 이 세계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이미 실시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현실인식은 이렇게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간 어려워요. 여러분들이 실력들이 있으니까. 자, 현실인식, 현실인식의 첫째가 뭐냐 하면은 내가 있다. 뭐가 있네. 뭐가 보이네. 이런 거요. 있다. 보인다. 내가 여기 있다. 뭔가 저기에 보이네. 또는 여기에 보이네. 보인다. 보이니까 이걸 가지고 사람들은 현실적이라고 하죠. 그럼 두 번째는 거저 주신다.
여기 있다가 현실일까요? 거저주신다가 현실일까요? 이 거저주신다가 현실이에요. 거저 주신다. 거저주신다가 되려면 거저 잃어도 상관이 없게 돼요. 이 현실감이. 내가 있어버리면, 내가 있게 되면 계속 있음을 고집하게 돼요. 계속 있음을 고집해가지고 오창에도 뭔가 하나 해야 되고, 계속 뭔가 딱 보이는데, 자꾸 뭔가 될 것 같은데, 자꾸 유지해야 되죠. 근데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것이 거저주신 자세가 되는 거예요. 지금 앉아있는 게. 칠만 원짜리 의자에 앉아있는 거예요. 이게 거저주신 게 돼버려요. 모든 게. 색깔 있는 안경부터 해가지고. 강아지부터, 모두 다 거저주신 게 돼버려요.
그럼 거저주시면, 여기에 내가 있으면 살아야가 되지만, 거저주시면 뭘 할까요? 가 돼요. 뭘 할까요? 니 동네에서 뭘 만들든지, 밴드를 하든지 하라 이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거저주신 것을 가지고 어디에 활용할까요? 써먹을까요? 가 돼버려요. 이게 기도의 응답이 아닙니까? 이게. 실패성공이 이 거저주심 때문에 성립이 안 되죠. 이 거저라는 것은 실패성공 너머에 있는 세계거든요. 거저 주신다 이 말이죠. 거저 주신다. 다윗은 있음이에요. 나는 있으니까 사울한테 쫓겨가지고, 겁먹어가지고 피할 만큼 피한 거예요. 그런데 있음이 어느 세계에 들어갔느냐 하면은 거저주심의 세계로 들어가 거예요.
이 거저주심의 자리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그 진설병, 테이블 위에 있는 떡 열두 개. 여섯 개, 여섯 개 해서 열두 개, 이 떡 속에 누가 들어간다? 내가 있음이 거저주심 안에 들어가 버린 겁니다. 껍데기만 왕이었는데 이제는 제사장 기능의 완성인 왕으로서 드디어 다윗은 시작이 되고, 이걸 인수인계한 제사장은 목 잘려 죽고. 죽어야 돼요. 왜냐하면 제사장은 이미 누구한테 넘어갑니까? 다윗한테 넘어갔기 때문에 제사장은 있을 이유가 없죠. 그러면 하나님의 왕 되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왕 되심이 다윗과 가까이 접근해갔죠. 왕이 둘 될 필요가 없거든요.
하늘에 있는 추상적인 왕은, 관념적인 왕은 실제적인 현실 속에 인물로서 드디어 왕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도 하나의 과정이니까요. 다윗은 죽어서 시체로 무덤에 있으니까.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고 사라지는 거죠. 하지만 진짜는 그 다윗의 후손이죠. 다윗의 후손, 현실의 후손. 현실 속에 현실이 있는 그 현실의 후손으로서 누가 왔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이걸 가지고 로마서 1장에서는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복음은 기존의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이 있는데, 그 현실의 자손이 기존의 현실 속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현실 이데올로기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힘으로서 그 새로운 현실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못 가죠. 솔거의 그림 속에 어떻게, 솔거 자기도 못 들어가요. 들어가면 자기도 참새처럼 머리만 아파요. 벽에 부딪쳐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신약에서 사도들이 욕을 먹고 사도 바울이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욕을 안 얻어먹는데,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예수 안에서 떠벌려버리니까. 니는 뭐고 나는 뭐냐? 이래 돼버려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뭐 63번 가수, 45번 가수가 노래 부르고 있는데, 뭐 7번 가수가 나왔는데 그 7번 가수는 많이 봤어요. 보니까 김광석이라. 김광석 알아요? 31살 때 죽었는데, 이미 죽은 자가 그 오디션에 왜 나옵니까? 이게 말이 돼요? 드라마 보는데, 요새 신인 탈랜트 누가 있는가 보니까, 어? 주인공이 최진실이라. 이게 말이 됩니까? 이미 죽은 지가, 2008년에 죽었는데. 죽은 지 그렇게 오래 됐는데 나온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이 현실에서 이미 죽음 바깥으로 간 사람이에요. 지금 신약에서 예수님 또는 하나님이 꾸미는 쇼가 그 쇼예요. 내가 죽은 줄 알았지롱?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황당한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게 안 되니까 가짜 예수를 만들어서 믿으라고 할 수밖에 없죠. 가짜로 있다고 상상하자. 있다고 상상해서 아주 쇼를 벌여요. 쇼를. 주여, 들으시나이까? 뭐 이런 거요. 어디에 계시나요? 동굴 속에서 자기가 한 소리를 듣고 응답받았다고 하는, 쇼를 벌이는 거예요. 그게 한계니까. 이 현실 속에 한계니까. 그거 하는 사람들은 뭘 모르는가 하면은 이 거저주심, 이 거저주심을 전혀 모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제 이야기를 들으시나요, 나 여기 있잖아요. 여기 있음, 계속 나 여기 있음. 제가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겠습니다. 제발 그녀만은 허락해 달라. 나중에는 5년 안 돼서 제발 그녀만은 나가게 해 달라. 욕이 막 나오죠. 어디에 계십니까, 제 기도 안 들어주고. 막 이렇게 나올 거예요.
왜냐하면 내 있음이 내 있음이니까. 결국 사울 왕이 다윗을 공격하는 이유는 사울은 뭐냐 하면은 이 현실을 꽉 잡고 있어요. 자기가 왕이라 이 말이죠. 자기가. 자기가 왕이거든요. 자기가 법무부 장관이다 이 말이죠. 여기서 정치적 발언은 빼겠습니다. 자기가 왕이다 이 말이죠. 세상에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가 있어요? 없죠. 내가 왕이다, 라는 이데올로기를 백성들에게 강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힘없는 제사장들은 기죽어서 가만히 있죠. 힘없는 제사장들은. 자칫하면 모가지가 달아나니까. 그러니까 아히멜렉도 분명히 사울 왕이 다윗 왕을 공격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른 일이다? 잘못된 일이죠. 잘못된 일이지만, 달려들면 어떻게 됩니까? 이 제사장이, 제사장이라는 직분이고 뭐고 내가 목이 달아나 죽잖아요. 누가?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죽기 때문에 다윗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도와준 거예요. ‘난 율법만 지키면 그만이겠지. 하나님이 나를 살리겠지.’
그런데 다윗을 도와준 걸로 인하여, 율법을 안 지켰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 말이 되는데, 다윗을 도와줬는데 나중에 사울이라는 이 세상의 권세자에게 죽었다는 이 말은, 율법이 뭐로 이전되었다는 말입니까? 다윗의 움직임으로 율법의 완성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거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겠습니까? 여기 아히멜렉에게 동원되는 율법을 언급하게 되면, 레위기 15장 17절, 18절인데, 한번 천천히 나도 목 좀 쉴 겸 찾아봅시다. 17절, “무릇 정수가 묻은 옷이나 가죽은 물에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8절, “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거든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러니까 제사장 입장에서 뭐냐 하면은 거룩을 규정할 때, 율법에 위배되면 부정한 것이고 율법을 지키게 되면 거룩한 것으로 본 거예요. 오늘날 신약적 입장에서는 이게 말이 안 되죠. 남녀가 동침해서 설정함을 깨끗이 물로 씻으면 둘 다 천당 갑니까? 그건 아니죠. 이게 뭐냐 하면은 짧은 목적과 긴 목적을 구분해야 돼요. 구약은 짧은 목적이에요. 코앞에 눈앞에 있는 짧은 목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걸 헤헤하면서 행하면 거룩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진짜 시대가 바뀌어서 다윗이 헐레벌떡 자기에게 떡을 달라고 할 때에, 그 이면에 내가 지킬 수 있는 거룩성을 넘어서서, 그걸 넘어서서, 율법을 안 지켜서 죽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율법인 다윗을 도와줬기 때문에 죽어버리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거예요.
그 새로운 시대가 뭐냐, 제사장들이 섬겼던 율법준수의 그 의미와 해석이, 이제는 다윗의 움직임을 통해서 새롭게 그 효과가 발생되는 거예요. 율법을 지켜서 나오는 거룩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서 발생되는 거룩의 시대로 접어든 거예요. 이 다윗시대가. 그건 오늘날 인간들이 행해서,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시대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시대로 접어드는 그러한 과도기적인 모습을 오늘날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출애굽기 19장 15절 봅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시내산에서 인간 대 인간, 대인관계, 혈육적인 관계, 아까 이야기했죠. 사람과 사람 관계, 그 관계 말고 제 3자 관계, 하나님의 거룩함이 개입하는 그런 관계로 구성해야 한다고 해서 지상에 이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뵈올 때는 남녀관계나 인간관계는 잠시 중지시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레위기 24장 8절,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그러니까 안식일에 교체하는 거예요. 일주일 전에 있는 떡은 있는데, 이 떡은 그냥 배고프다고 줄 수 있는 떡이 아니고, 아까 그런 조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조건, 2자 관계, 인간 대 인간의 관계 말고 하나님의 관계가 머물러 있는 사람만 먹을 수 있다고 아히멜렉은 제시했습니다. 그럼 맨날 성경보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고, 소극적으로 저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여자하고 같이 관계 안 했으면 고만 하나님하고 관계가 유지된다고 내가 쳐줄게요. 이런 식으로 그냥 넘어간 거예요.
그게 그 당시의 제사장의 한계입니다. 제사장은 그냥 매뉴얼대로 했을 뿐이거든요. 율법을 해석을 할 때, 율법의 해석이 다윗을 통해서 새롭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내가 율법의 선생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그게 율법 지키는 것이 되잖아, 라고 그걸 거룩이라고 견지하는, 그걸 생각했던 그 시대가 아히멜렉 시대예요. 그 시대가 끊어진 거예요. 그 시대가. 다윗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왕이 어떤 인격체로서, 하나님이 직접 인정하는 왕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제사장들이 하는 기능이 와해가 되는 겁니다. 이제는 그 다윗에게 종속된 제사장이 되어야 하겠죠. 종속된 제사장. 다윗왕은 자기 내부에 제사장 기능을 듬뿍 담아야 되고. 그런 변화하는 시점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레위기 7장 19절에서 21절요. 아히멜렉 때문에 지금 레위기를 많이 보고 있는 겁니다. 아히멜렉 때문에. 사람들이 제사장 이런 것은 도사니까. 19절,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그러니까 이 고기는 떡도 해당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레위기 24장 5절에서 9절요. 5절,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하여” 6절,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로 여섯씩 진설하고” 아까 여섯 개, 여섯 개해서 열두 개. 8절에 그렇게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하라고 이래 되어 있죠. 그리고 이 떡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영원한 언약이니라. 9절에,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이래 되어 있죠.
자, 이 이야기하고 첫째시간을 마쳐봅시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는데, 하나님 왕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계시고, 수직적이에요. 수평적이 아니고. 보이지 않고 모든 권한을 제사장에게 일임하고 있죠. 자, 제사장은 뭘 유지한다? 거룩을 유지한다. 어떻게? 율법대로 살면서. 이게 이스라엘의 원형이라고 했습니다. 원형이에요. 왕은 하나님이 왕이기 때문에 제사장만 있으면 돼요. 그런데 백성들이 이방민족을 닮아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왕을 달라고 했죠. 하나님이 허락했죠. 이 왕이 가짜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같은 인간,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버렸어요. 기름을 부어가지고, 이 왕은 가짜인 것을 들통 날까 싶어서 무조건, 본인도 모르죠. 자기 본성대로 세상 왕이 하는 그 짓거리,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하는 거예요. 하늘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이런 이념, 이데올로기는 없고요. 그냥 짓거리하다보니까 누구에게 피해가 가냐 하면은 다윗에게 왔잖아요.
그 다윗은 어디로 들어갑니까? 제사장 여기에 고만 이 영역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들어와서 제사장 가족만 먹을 수 있는 떡을 그냥 내놓으라고 이래 된 거예요. 그냥 내놓으라는 거죠. 그냥 떡을 먹었어요. 먹음으로서 기존의 왕제도 무너지고 제사장 제도 무너지고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신 왕이 다윗을 통해서 수직적이 아니고 수평적으로 계시를 옆에 사람들에게, 이제 옆에서 날리는 거예요. 옆에서. 이 모습은 오늘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와서 거창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