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66강 사무엘상22장10절(대역의 자리)20210222-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22장 1절,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그렇게 돼있지요.
사무엘상이 본격적으로 다윗이란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기존의 이스라엘 파기시키고 왕부터 새로 시작해요. 기존의 이스라엘을 왜 파기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왕 됨을 거부하는 왕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했던 집단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왕이란 것을 알려주는 새로운 왕을 태동했다, 등장시켰다는 말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에 보면 너희들이 왕 구하는 자체가 나를 버림이라고 돼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논리를 따라 가줘야 돼요. 사람이 왕을 찾는 것과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연결돼있다는 것.
만약에 연결고리를 못 찾으면 우리가, 내가 하는 그것이 하나님께 욕 된다는 사실도 역시 모르게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고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데 이 하는 일이 곶감 먹는 일이 하나님께 욕 되게 하는지 어떻게 판단하느냐 말이죠. 사과 먹는 이 일을. 이 모든 일이 성경 공부하는 일이 하나님을 욕 되게 하느냐, 아니냐고 결정할 근거가 뭐냐 하는 겁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여기 왕을 등장시키시는 겁니다. 왕을 등장시킴으로서 하나님이 제시한 왕을 따르겠느냐, 아니면 기존에 네 살던 식으로 그냥 살겠느냐를 묻고 있어요. 이 말은 왕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제거하는, 왕 자신도 포함한 귀한 나를 제거해 버리는 왕입니다.
<기생충>이란 영화포스터에 보면 나와 있어요. 송강호, 조여정 얼굴이 나오는데 얼굴이 전부 다 검은 테이프로 가려져있어요. 가로로 좍 그어져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의 본성이 하나님의 왕 되는 것을 때려죽여도 정말 싫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이제는 너희가 들통 났잖아. 저는 하나님이 왕 됨을 원합니다, 라고 백날 해도 그 말은 듣기 싫고 내가 지정한 왕을 보낼 테니 이 왕에 대해서 기존의 이스라엘을 고집할 것이냐, 아니면 왕을 찾아 나설 거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생각은 기존의 것도 고수하고 왕도 고수하면 될 것 아니냐고 나오겠지요. 문제는 이 왕 자체가 기존의 이스라엘과 자진해서 거부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 집도 잘 챙기고 우리 집에다 예수님도 모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집에 화평이 온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자기 집 부수려고 교회 다니는 사람 별로 없어요.
“주님이여 우리 집에 오소서.” 임마누엘 그런 것 동원해서 내 집은 내 집대로 챙기고 내 집이 복 받기를 원합니다. 에돔의 집에 언약궤가 있어서, 뭐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혈과 육인 나는 결함이 안 돼요. 그래서 왕 자체가 이스라엘 쪽에 결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더라도 왕초가 있어요.
왕초가 뭐라고 협박, 공갈을 치느냐 하면 나를 따를래, 다윗을 따를래? 왕초 자체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거부하고 있어요. 이 세상 자체가 민주주의제도 자체가 예수님을 왕으로 못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교육과 중등교육 과정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그런 교육과정이 들어있습니까?
심지어 기독교학교에서 성경은 가르치되 골라서 가르치라는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런 것 가르쳐야지 이 세상 나라는 짐승이고 악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이것은 그렇게 가르치면 그 교사 잘릴 걸요? 학원에서도 무심코 복음 이야기하다가 잘린 강사가 한둘이 아닌데요.
좋다고 그냥 평화롭게 잘 지내면 된다는 이 세상이 실은 무서운 세상이에요. 우릴 붙들고 같이 지옥 가자고 독촉하는 세상입니다. 그럼 이런 세상 있음이 백성들에게 좋게 작용할까요, 나쁘게 작용할까요? 질문하는 게 아닌데 또 예의에 어긋났다^^
불신자의 남편과 사는 것, 정말 신앙에 참 도움 돼요. 나를 시시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거든요. 환경이란 말이죠. 대단한 거죠. 만약에 같이 신자면 안일에 빠져요. 주의해야 돼요. 두 분. 복음 이야기하자 하면, “복음은 됐고. 우리 집은 기본이 복음이야. 돈이나 벌어오라.” 복음은 다 아는 거고, 그건 당연한 거고. 이렇게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튕겨져 나갔거든요. 이 튕김의 코스가 만들어지고 그 코스를 따라올 때 우리는 우리의 임금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터널 속으로. 원래 터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주 완고한 산 같은 것, 길이 없어요. 길은 옆으로 꼬불꼬불 올라가지요. 그러나 터널은 꼬불꼬불하려고 하는 것 아니잖아요. 그것 치우고 바로 산을 뚫고 지나가잖아요.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없는 길이에요.
터널은 첫 번째, a없었던 길이다. 두 번째 터널의 특징은 뭐냐? b어둡다. 왜 어둡냐? 예측을 못하니까. 세 번째, 이걸 현실화시키면 무슨 길이냐 하면 사는 길이 아니고 c자진해서 죽음의 길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어두우니까 예측이 안 되니까. 인간 세상은 예측이 되니까 밝다고 생각하잖아요. 터널은 어두운 거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에 천국 가는 길이 첫 번째, 없었다는 거죠. 천국 가는 길은 없어요. 천국 가는 길이 없는 이유가, 인간의 인식 자체가 이 세상에 갇혀있기 때문에 천국 넘어 가는 길은 악마가 완전히 차단시켜놨습니다. 없습니다. 없으니까 가상천국은 네 안에서 만들라는 거예요. 가게 되면 잔디밭이 푸르고 분수가 있고 천국에는 예수님이 기다리고.
그걸 네가 이 땅에서 살면서 이랬으면 좋겠네, 이렇게 살면 여한이 없겠다는 조건들을 다 구비해서 교회라는 것은 만들어서 그 안에서 천국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거예요. 이사야 같이 양이 늑대와 함께 하고 그런 모든 이미지를,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신랑, 신부가 찬란한 드레스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그런 모든 이미지를 다 끌어 모아서 이 지상에서 천국을 만드는 겁니다. 상상의 천국이죠. 전혀 사실과 다른 왜곡된 천국입니다. 그 자체에서 미지의 불안감을 종교로 미리 위로받는 겁니다. 마르크스가 그걸 아편작용과 같다. 아픈 데도 불구하고 안 아픈 것처럼 은혜 받으면 안 아픈 것처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다윗의 행동을 보면 다윗은 지금 쫓기고 있습니다. 쫓기고 있는 다윗이 천국을 상상하고 그런 것 없어요. 아까 처음에 뭐라 그랬습니까? 다윗 인물에 초점이 있다. 다윗 인물은 가만있습니까? 쫓기고 있지요. 다윗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입니다. 미지의 메시아지요. 미래의 메시아입니다. 메시아가 어디에 쫓긴다? 이 세상에서 쫓기는 거예요.
참 타협안이 전혀 제시되지 않습니다. 타협이란 게 없어요. 세상은 다윗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습니다. 배척할 자세지 받아주진 않아요. 좋게, 좋게 지낸다는 그런 것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야 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다윗은 진리와 접합돼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있다면 진리와 접합돼있는 이것이 제일 중차대한 일이에요. 접합이란 이어져있는 겁니다. 떨어져있는 게 아니다. 그냥 자기 환상에 망상에 은혜 받는 게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가셨던 껄끄러운 그 노선과 침이라 할까, 침이란 옛날 레코드판에 놓는 바늘, 그 바늘에 레코드판에 접합돼야지 소리가 나잖아요.
내 속에 성령이 계셔서 성령은 항상 어디와 접합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신 좁은 길과 접합돼있어요. 사실과. 부풀려서 칭찬받고 대우받고 그런 것 아무 의미 없어요. 중차대한 게 아니고 진리와 접합돼있는데 다윗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하나님의 왕 되심과 접합돼있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쫓겨 다니고, 열여섯 번이나 쫓겨 다녔는데 쫓겨 다니면서 한 모든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진리는 이 땅에서 배척받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것을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배척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지금까지는 굉장히 쉽습니다. 이제부터 골치 아프고 어려운데.....
다윗이 가는 곳마다 죄가 살아난다. 다윗이 일부러 죄 지으려는 게 아니에요. 다윗이 어느 현장에 떴다 싶으면 거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배척당해야 될 이유 같은 것들이 막 살아나는 겁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들의 명절이나 다 모여 있을 때에 말 안 하고 곶감이나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종교 이야기 나오고 하면 좋은 관계가, 고스톱 치면서 좋았던 관계가 다 깨지고 정종 사온 것 다 소용없고 사과 한 궤짝 사온 것 소용없고.
종교 이야기해서 너 죽인다, 두 번 다시 안 본다 하면서 죄가 다 살아나는 거예요. 뭐 별 말도 안 했어요. 별 말도 안 했는데 죄가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뭘 긁은 모양이라. 그 사람 마음속에 고이고이 감춰놓은 것을 긁은 모양이라. 이게 바로 다윗의 기능이고, 다윗은 성신을 받았으니까.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은 기능을 주께서 이렇게 사용하십니다. 소극적으로 그냥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어떤 의미에서는 적극적으로 주께서 활용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죄가 산다, 같은 말로 사는 게 내가 아니다. 오늘 첫 번째 나오는 아주 중요한 문장이에요. 자꾸 내가 산다 하는데 내가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살아 있으니까 죄가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나 보고 뭐 볼 게 있다고 달려드는 게 아니고 의가 살아나니까 죄가 자기 본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빨을 드러내고 공격성향을 세퍼트처럼 물려고 달려드는 거예요.
하루하루 사는 게 내가 아니다. 내가 허리 아픈 게 아니란 말이죠. 다윗이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은 본인이 사는 건 아니고 성신이 있을 경우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있는 거예요. 꼭 아브라함 같이.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고.
여기서 이 논리를 더 나가면 사는 게 내가 아니기 때문에 더 나가버리면 나는 없음을 계속 인정해줘야 돼요. 내가 없고 내가 있는 현장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 있다, 또는 약속이 있다, 또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기름부음이 내게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내가 없음을 기본으로 해야 돼요.
내가 없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가 없으니까 내가 죽는 일은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죽이는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고 저쪽에는 지옥 보내는 주님이 살아 있고 둘 다 살아 있는데 주님의 의가 살아 있는 쪽은 천국이고 주님의 저주가 살아 있는 쪽은 지옥이고. 어떤 쪽도 그 현장에는 의가 살아 있느냐, 죄가 살아 있느냐, 이것으로 분류가 되는 겁니다.
어떤 강의에서 그랬죠. 해석이란 분류하는 것이다. 분류하는 게 왜 좋냐 하면 구조적이기 때문에 분류하게 되면 따로 나는요, 하는 질문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네 식구라면 둘로 쪼개든지. 하여튼 분류되도록 성도로 하여금 분류되는 그 경계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안목을 주시는 겁니다. 저는 잘났지요, 하지 말고 분류시키게 하는 거예요. 너는 어느 쪽에 속한다, 어느 영역에 속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한 말에 성경적 근거가 있어야 되겠지요. 사는 게 내가 아니다. 죄가 살아난다고 했을 때 그걸 여기 22장 7절에 보면 사울 왕이 객기를 부립니다. 6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라고 묻지요.
사울이 이런 객기를 부릴 때 아주 쉬운 방법은 사울을 김정은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시대가 얼마나 성경을 이해하기 좋게 배치가 돼있는지. 김정은이 하는 말이, “내가 너희에게 월급 줬잖아.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다윗이 월급 줬냐?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지금 누구 편에 섰는지 분명히 정체를 밝혀라!”
8절에 보면,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전부 다 지어낸 이야기거든요. 고발할 가치도 없는데.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9, 10절) 이렇게 돼있어요.
마치 도엑, 마치 난중일기에서 우리 온 국민이 제일 싫어하는 이순신 장군 배신한 원균이란 작자가 여기 등장한 거예요. 그 이름이 도엑이란 사람, 이름도 도엑, 이상해. 엑하고 토할 것 같아. 도엑이란 자가 등장해서 고자질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구 죽느냐 하면 그 뒤에 아히멜렉 및 제사장이 다 죽어요. 같은 제사장들을 다 죽인다고.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죽었는데 다윗은 죽었습니까, 안 죽었습니까? 다윗은 안 죽었지요. 왜냐하면 이런 게 어려운데, 다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현장에 없어요. 현장에 없는 인물 때문에 그 현장에 있는 인물이 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핍박받는 흔적과 증거를 죄로 인하여 죽게 된, 다윗을 도와줬다고 죽게 된 아히멜렉과 많은 제사장들이 죽거든요. 처음에는 군사들이 제사장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해서 안 죽이려고 했는데 결국은 다 죽여요. 안 죽이면 내가 죽인다고 도엑이 나서서 죽여 버렸어요. 그 뒤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다시 봅시다. 다윗은 그 현장에 없었는데 다윗 때문에 현장에서 죽는 사람이 등장하지요. 그러면 이들의 죽음은 이걸 뭐라고 하느냐? 카게무샤, 또 어떤 데는 가케무샤라는 일본말인데 무슨 말이냐 하면 왕을 살리기 위해서 왕 복장을 하고 전쟁터에서 오인을 유발해서 대신 죽는 사람, 대역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신한 자들의 죽음이에요. 이들의 죽음이.
그러니까 죽음이란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름 부은 자를 죽이려 해도 결국 죽는 사람은 누가 죽느냐 하면 원래 사람은 안 죽고 대역한 자들이 죽는 거예요. 원래 다윗은 안 죽고 있어요. 어떤 드라마에 보면 노래 불러야 되는데 성대가 갔어요. 공연 날짜는 다가오고 성대가 갔으니까 어디 시골에 있는 삼십대 중반 하나 뽑아서 유진 대신 뒤에서 대역 가수가 부르잖아요. 나중엔 그게 유진이 아니고 진짜 라이벌이 나타났는데, <펜트하우스2>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대역으로 죽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면 안 돼요, 사실은. 왜냐? 우리가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그냥 살다 늙어죽어도 대역이에요. 이미 확정된 운명이에요. 이 땅에서 우리 삶이. 복음은 알고 지리산에서 조용히 살다가 나중에 늙어죽었다. 대역이에요. 주님의 대역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감사할 것은 안 죽는 게 감사할 게 아니고 죽어도 대역으로 죽기 때문에 진정한 나의 죽음이 아니란 사실이 감사가 되지요. 진정한 나의 죽음이 아닌 거예요. 지밖에 모르는 인간은 발 뺄게요, 해서 아이고 잘못 됐어요. 다신 예수 안 믿을게요. 이런 사람도 있겠지만.
아히멜렉 같은 다윗을 도와준 사람에 있어서 사도 바울도 순교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본인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란 말은 본인이 살아도 이미 대역이기 때문에 이건 죽은 목숨인 것을 알고 살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죽음의 공갈과 협박과 위협에 대해서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에요, 그게. 가케무샤라 하는 게 이미 그런 각오가 돼있어요.
모든 하나님의 원칙에서 존재는 그냥 존재하는 법이 없고 두 가지가 있어요. 의를 담은 존재냐, 죄를 담은 존재냐? 인간의 존재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는 누가 독차지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독차지한 거예요. 오늘 본문엔 다윗이 독차지했지요. 다윗이 있어줘야 아까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새로 생기거든요.
왕부터 먼저 만들어놓고 이스라엘을 새로 생긴다. 그럼 왕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끊어질 수 없는 연결이 돼있어야 돼요. 이걸 진리와 접합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이 사람들은 자기가 이스라엘인 줄 모르잖아요. 그런데 난리 통에 다윗 때문에 죽는 자가 등장한다면 이 자들이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난 이스라엘 될래, 손들고 되는 게 아니고, 손 내려, 가만있어.
가만있으면 다윗 때문에 오늘날 같으면 예수님 때문에 자기 운명이 결정되었어요. 뭐로? 가케무샤로, 예수님의 대역자로. 대역자가 할 일은 뭐냐 하면 자기가 죽는다 할지라도 산다 할지라도 이게 자기 문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문제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조건 하에 내가 대역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역이라 하는 것은 나를 대신할 쪽이 없으면 대역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렇지요? 내 인생 나 혼자 살면 무슨 대역이 있어요. 내가 제일 중요한데. 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있고 나는 그 중요한 인물을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면 우리는 나는 죽으나 사나 그거는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여기서 주의 하나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이 땅에 죽고 예수님이 살았기 때문에 나는 산다. 이렇게 돼버리면 안 돼요. 그렇게 되면 대역이 안 돼요. 대역이란 말 여러 번 나오는데 성경적 용어론 뭐냐 하면 대신하심이에요. 또는 대속.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나도 이 땅에서 죽지만 예수님 살아나시면 우리가 살아난다. 이것 괜찮은 거래다. 괜찮은 장사네. 이렇게 되면 대역이 아니에요. 대역이란 의미가 빠져버린다고요.
주님 이용해서 주님처럼 나도 한번 부활해보자는 이런 노림수를 갖고 있잖아요. 속셈을 드러내거든요. 그러나 다윗에 있어서 지금 아히멜렉이 다윗이 진짜 기름 부은 왕인 줄 알고 도와줬는데 여기에 사울이 등장했습니다. 그럼 아히멜렉이 다윗 따라가려고 제발 날 좀 죽여줘, 라고 아주 사정사정을 했습니까? 사울 왕에게. 도엑아 너 전에 있었잖아. 빨리 고발해, 고발해. 도엑을 부추겨서 날 고발하라고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가만있는데 고맙게도 알아서 나를 죽여줘.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죄가 살아 있고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인간은 빠져라. 죄와 의의 투쟁이다. 이 이야기에요. 인간은 빠지고 죄와 의의 만남, 그거에요. 그래서 다윗은 존재한다는 말을 붙인다면 아히멜렉과 다른 대역자들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말을 붙이면 안 돼요. 그냥 기능으로 일한다.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역은 앞에 대역이 아닌 실체가 살아 있다면 대역은 살아 있다는 말을 안 해야 되고 굳이 하려면 나는 주님의 살아 계신 기능을 담기 위해서 대역으로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죽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죽는다고 그것조차도 내가 죽는다는 그 현상과 살아 있다는 현상이 주님의 의가 살아 있음에 하등 변동을 주지 않습니다. 영향을 주지 않아요.
이렇게 죽은들 내가 더 산들 하나님의 의가 살아 있으면 그걸로 오케이지, 주님 좋겠다, 나는 고생하는데. 이런 식으로 대역이 대역답지 않게 자기주장을 뻗히고 그러면 안 돼요. 그동안 참 성경해석하면서 예수님 덕분에 나도 같이 삽시다, 하는 그런 속셈을 감추지 못하고 성경해석을 신약 보면서 그런 식으로 많이 해석했거든요.
주께선 우릴 살려주신다, 기다려라. 이렇게 하는데 안 살려줘도 되는데 내가 뭐 살려 달라 했습니까? 살려 달라 하는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에요. 뭘 얻겠다고 예수를 믿었느냐, 무슨 목적이 있는 것 같아. 예수 믿는 목적 있어요?
다시 할게요. 아히멜렉이 다윗 따라 순교하겠다고 설치지도 않았고 사울에게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고 문제는 내 운명은 이미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의가 살아 있고 죄가 살아 있지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요. 나는 숨 쉬는 것과 안 쉬는 것과 별 차이 없어요. 숨 쉬어도 그만이고 오늘 가는 밤에 숨을 안 쉬고 죽어도 아무, 그 일에 내가 상관할 문제 아니에요. 이게 바로 사무엘상 22장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부모는 어떻게 되는가? 다윗은 메시아가 아니니까 다윗이 이 정도까지 생각한다, 안 한다 우리는 생각 못하고 다윗이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왜? 다윗도 기름 부은 것과 실제상황과 현실이 얼마나 조화되는지 자기기 실제로 체험해야 될 그런 시간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22장 3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 부모를 부탁해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니까 부모가 자식 걱정해서 얼굴 보려고 다윗 있는 곳으로 왔어요. 그게 굴입니다. 아둘람 굴로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그에게로 왔지요. 역시 국가라는 이념보다도 내 새끼 내 자식이 최고에요. “세상 모두가 너를 비난해도 나는 너를 비난하지 않으마.” 이게 부모의 내리 사랑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해도 사회적 지탄을 받는 지가 양자들인 아들 죽이고 음란 동영상 해서 징역 20~30년 살아도 부모는 구치소 가서, “밥은 먹고 사나. 몸은 건강해야 돼. 다른 사람 코로나 걸려도 넌 코로나 걸리면 안 돼.” 이게 부모 사랑이에요. 혈육이 사랑입니다.
다윗은 그 부모를 그냥 두다가는 사울 왕에게 당한다 싶으니까 누구한테 부탁했느냐 하면 미스바로 가서 모압 왕에게 부탁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부모를 잘 지켜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청했지요. 그래서 4절에 보면,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참 이런 건 어버이주일에 해야 되는데 이런 본문이 있는 줄 모르고.
다윗의 인간적인 면이 여전히 살아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과도기기 때문에 전환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시편에 보게 되면 자꾸 다윗은 왜 세상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아까 한 걸 다시 해봅시다.
다윗을 피했습니다. 다윗은 살아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사울과 그리고 도엑 이 사람들은 아히멜렉을 죽였지요.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다 봐야 되지만 시간관계상 17절만 보면,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얼싸 하고 에돔 사람 도엑이, 그냥 도엑이 아니에요. 에돔 사람. 필리핀 사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네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했지요.
그럼 이거는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구조는 왕이 없습니다. 왕이 없고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중간지점에 중재자에 제사장들이 있지요. 그 제사장들을 죽여 버렸다는 말은 현재 상태의 이스라엘이 이건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 아닌 거예요. 이건 사울 왕 권한 하에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럼 이것이 오늘날 우리한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이게 본능적으로 이스라엘은 왕 체제가 되면 왕 자체가 눈에 보이는 왕이잖아요. 눈에 보이고 인간들이 선호하는 힘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 중심으로 나라가 만들었으면 이건 백 프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어떤 나라든 간에. 미국이든 한국이든 관계없어요.
힘에 의해서 구축된 나라는 이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적입니다. 그래서 성도나 교회가 이 나라에 협조하거나 도와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지요. 그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이기 때문에 협조하거나 도와주면 안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이들이 자기의 정체를 오롯이 드러냄으로서 죽은 아히멜렉 이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이 사람이 그냥 산 것이 아니고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던 죄가 살아났다는 것을 사울 왕과 도엑이 증명해준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점이에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강의를 들었으면 아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하는 이유는 인간이 살아 있느냐, 누가 살아 있느냐 그건 관심 없고 오늘날 죄는 어떻게 살아 있느냐, 오늘날 의는 어떻게 살아 있는가? 죄가 살아 있고 의가 살아 있는 그 현장으로 주님께선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배치하시고 인도해나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규정입니다. 언약에 의한 장치이죠. 거기서 인간이란 죽든 살든 의미 없어요.
도엑이 죽였기 때문에 아히멜렉은 죽었지만 도엑은 살았다. 이건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죄가 살아 있고 아히멜렉은 의가 살아 있는 거예요. 죽고 사는 이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길에서 누굴 만나거든 아는 사람 만나거든 오랜만에 동창생을 30년 만에 만나거든 저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의가 살아 있는지 죄가 살아 있는지 둘 다 살아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 살아 있더라도 죄가 살아 있는지 의가 살아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죄가 살아 있지, 보나마나.
그럼 그걸 어떻게 압니까? 본인이 겁내고 있고 굴복하는 힘을 있을 거예요. 그 최종 힘이 뭐냐? 국가라는 힘. 국가라는 힘에 쪽도 못 쓰고 있으면 그건 죄가 살아 있는 거고 국가의 힘보다 주님이 살아 있음을 느낄 때는 의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 사이에 또 요령꾼들이 있어요. 뭐냐 하면 “국가, 지가 대통령 뭔데? 나는 성도다. 나는 주의 말씀 듣는다.” 하면서 자기 집구석만 챙기는 사람 있어요. 그거는 집구석이 살아 있는 거지 의가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다급할 때 자기 집안 챙기지 주님을 챙기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나만 살자는 식이지요.
그렇게 의가 살고 죄가 살아 있으면 그 다음 문장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다른 말로 나는 또는 우리들은 이미 결정된 것을 추구한다. 이것을 다윗이 보여주고 있어요. 이 다윗에게 기름부음이 있지요. 기름부음이 있는데 기름부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모르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아무도 몰라요. 모르는데 다윗을 움직이는 거예요. 다윗을 움직여나간다고요.
아까 아히멜렉은 누구의 대역이라 했습니까? 다윗의 대역이지요. 다윗은 누구의 대역이겠어요? 바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보여주는 대역인 거예요. 하나님께선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면서 이 세상에 보이는 대역자들을 보내셔서 그 대역자들은 계속 죄와 의의 투쟁, 갈등 속에서 움직이도록 하는 거예요.
움직이는 이유는 죄가 죄대로 드러나고 의가 의대로 드러나는데 꼭 필요한 움직임들, 부질없는 움직임이 아닙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죄가 살아 나오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 편이잖아, 하나님나라잖아, 라고 생각하니까 다윗이 쫓기게 되니까 사람들은 이걸 해석을 어떻게 할지 난감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님 편 아니었었어?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이었잖아. 하지만 그 사람들의 잘못 생각한 게 뭐냐? 이미 이스라엘은 날아갔고 누가 등장했다? 다윗 왕이 등장했잖아요. 가름부음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게 딱딱하면 그 기름부음 안에 장래에 이스라엘 될 사람들이 전부 다 응축해서 압축되어서 동그랗게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오늘 본문 22장 2절에 봅시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다 모인 숫자가 몇 명이냐? 고작 400명. 환난당한 자, 빚진 자, 그 다음에 자기 마음이 원통한 자 그들이 다윗을 제대로 알까요, 모를까요? 제대로 알 수가 없지요. 다윗도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그리고 다윗도 본인이 누군지 알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대역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확정한 일이 자기한테 일으켜지는 그 범위 내에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갈 뿐이에요.
내가 누구 게? 내가 누군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내가 나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니까요. 우리는 주님만 알면 되지 내가 누군지 굳이 알 필요 없어요. 사람이 자기를 알려고 어떤 재료 같은 것, 내게 필요한 걸 끌어 모으면 우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옥 갈 사람은 죄가 드러나는 곳에 주께서 움직이고 천국 갈 사람은 의가 드러날 일에 움직이기 때문에 늘 움직이다보면 이게 어지러워. 내가 누구냐고 규정짓다가 규정이 순간순간 다 깨져버려요. 목사님 설교 듣고 주일 설교 듣고 내가 누군지 확정해야지. 확정한 것 그 다음 수요일 설교에 다 부셔지는데 뭐. 난 이런 인간이야.
이런 인간이 수요일 되면 그게 처음부터 완전히 뒤집어져 씨름판에서 풍차 돌리기 해서 거꾸로 박아버리죠. 내가 누구냐 필요 없습니다. 확정된 결정된 게 무엇인지 그때그때 받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어떤 고민과 걱정이 있더라도 복음을 복음으로 제대로 듣게 되면 그게 눈 덮인 산처럼 다 덮어져요.
옛날에 아버지가 늦게 오시면 엄마가 아버지 기다린다고 앞치마 예쁘게 하고 그 다음에 뭘 했느냐 하면 식탁보를 덮어놓는다고요. 그러면 학교 갔다 온 애가 궁금해 죽어. 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복음은 내 걱정, 내 걱정, 네 문제 해결하려고 있는데 복음이 와서 덮어버려요. 이미 결정 난 것이 덮어버려요.
결정 난 것이 덮어버리면 내 문제를 내가 해야 될 건더기가 없다니까요. 그것 해결해서 뭐 할 건데. 해결해봐야 엎어치기 한 방에 다 쏟아버리는데. 소용없어요. 내 문제를 해결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이미 다 결정된 문제거든요. 내 기능은 어디에 박히더라도 미국 가나 어디에 살더라도 주님의 의와 죄를 들춰내는 대역, 오늘 첫째 시간 제목은 카게무샤다, 하나의 주님의 대역자로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역이란 것을 중간을 통해서 우리가 여기 있고 주님이 안 보이시니까 여기 계시다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서 대역을 했거든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역자입니다.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의 대역이 되셨잖아요. 그래서 얻어진 것이 생명이고 의입니다. 생명, 영생, 의 이런 것을 마련했단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 자리에 오셔서 대신했다는 점에서 이 대역이란 자리, 대신의 자리는 우리가 만든 겁니까, 우리가 요청한 거예요, 주님이 친히 만든 겁니까? 주님이 친히 만들었지요. 이게 놀라운 기쁜 소식이에요. 주님 대역하면 천국 넣어줄 거죠. 우리가 요청 안 해도 된다니까요. 주께서 강제로 대역의 자리에 밀어 넣어버렸어요.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내가 의인으로서 죄 없는 자로 섰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대역하셔서 주님의 의가 되신 이 모든 나와바리 구역을 누가 독점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독점했잖아요. 예수님이 차지했단 말이죠. 그러면 굳이 내 영역을 따로 만들 이유가 전혀 없다는 이게 기뻐요.
내가 따로 챙겨서 주님 제 솜씨 어때요? 내 재롱 어때요? 갖다 바칠 건더기가 없어요. 아마 접시 담아서 주님 내 솜씨입니다, 하면 주님께서 발로 차버릴 거예요. 내가 다 했는데 니가 왜 거기다 숟갈을 얹느냐 말이죠. 니가 왜 거기다 끼어드느냐 말이죠.
대역하는 것, 내가 살아가는 것 전부 다 복음으로 다 덮여버렸기 때문에 주님이 내 자리에 와서 대역하는 모든 것이 이미 내 자리가 확보되었다는 소식을 통보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쑥 들어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확정된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가 따로 추구할 게 없어요.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 나는 대역자란 인식이 새롭게 되면 그 사람이 주님과 소통되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