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친구와 이웃

아빠와 함께 2020. 10. 7. 08:44

327강-YouTube강의(친구와 이웃 요한복음 15:13)20201006-이 근호 목사


제327강, 제목은 ‘친구와 이웃의 차이’. 이웃이라는 것은 넓은 범위이고 그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친구. 우리가 보통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이웃이라고 다 친구가 아니고 그중에 특심 있게 특별한 마음, 관심을 가질 때 친구가 된다. 이렇게 하는데 그럼 친구와 이웃이 굳이 차이가 있을 수 있느냐.

이웃은 이미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없는데 새로 생겨난 사람이 친구가 되는 겁니다, 없는데. 어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다 친구입니까? 아니죠. 이웃이죠. 그런데 그 중에서 유난히 정이 가는 사람,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 단짝을 만났다면 그건 친구가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이웃은 많이 있는 거고 친구는 없는데 살다보면 새로 생기는 것이 친구죠. 그런데 친구와 이웃을 굳이 구분하는 이유가 뭐냐.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뭐라고 소개하느냐가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15장 13절, 14절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웃 아닙니다. 친구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 없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을 베풀 때 그냥 아무에게나 사람이라고 사랑을 베푸는 게 아니고 꼭 집어서 그 사람을 특별히 규정을 해요. 뭐라고 규정하느냐 하면 친구라 여기고 규정을 합니다. 그러면 그 친구란 말로만 친구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친구 사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증명을 하느냐 하면 목숨을 버리는 거예요.

참, 세상 살면서 날 위해서 목숨 바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굉장히 황송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담되는 일이기도 해요. 저쪽에서는 목숨까지 내놨는데 난 그럼 뭘로 보답해야 되는가. 꼭 보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무심코 길을 가는데 차 오는 것도 몰랐는데 친구가 와가지고 친구가 차 오는 것을 대신 막아가지고 나는 아무 다친 데 없고 친구는 6주 진단. 6주 진단 좀 그러면 직장 짤림. 그러면서 치료비는 나한테 한 푼도 안 받아요. 자기가 어디 보험 넣어놨다고 그 보험으로 다 된다는 거예요. 보험 이야기하니까 누구 생각납니다만. 어떤 사람은 보험 받아서 집 산 사람도 있어요. 본인이 그걸 다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보고 한 푼도,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차라리 뭐 때리기라도 하고 나한테 돈을 요구한다면 덜 미안한데 보답조차도 못하게 말리니까, 적극적으로. 우리가 그런 사람 만나면 할 말이 없죠. 아니 왜 그래.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간단한 말이에요. 친구 아이가! 이렇게 하거든요.

아, 친구가 그 정도 되어야 친구였었어? 아, 친구란 말을 그렇게 사용하는구나. 친구라는 것은 대충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아 챙기는 게 친구가 아니고 내 목숨을 바칠 대상을 가지고 나의 친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friend, 친구라고 이야기하는구나. 라고 주님께서 가르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친구가 좋은 단어가 아니고 무서운 단어에요. 이럴 거 같으면요, 친구 사귈 마음 안생기고 진짜 성가시죠. 그렇게 험악한 친구를 만나게 되면 완전히 자아라는 것은 찾을 길이 없고 그 친구라는 타인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는, 강탈당한 느낌 들지 않습니까. 그럼 나는 뭐냐. 이렇게 되겠죠.

15절에 보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철저하게 이용합니다. 나쁜 의미의 이용이 아닙니다. 주께서 친히 그 제자들을 사용하신다.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알게 된 것, 받은 지시와 명령이 있을 거예요. 내가 받은 명령과 지시의 내용이 어떠한가를 지상에 와서 그대로 펼쳐야 될 사명을 주님이 받은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자기 아버지께 받은 것을 꿍하고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활짝 펼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동원되는 사람, 그 사람이 예수님의 열두제자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을 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갔죠. 이제부터 고기 잡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하고 일방적으로 선택해버립니다. 열두제자 다 그렇죠. 특히 그게 아버지의 뜻인데 아버지의 뜻 중에서 가장 제일 핵심 되는 뜻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 신으로부터, 이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일이에요.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친구로 또 뽑아 세운 사람이 있었으니 누구냐 하면 바로 가룟 유다에요. 그런데 가룟 유다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친구 되기 위해서 친구라는 명목으로 가입된 사탄의 종이죠, 악마의 종입니다. 더 이상 친구로 보지 않고 사탄의 종으로 보죠. 사탄아, 네 할 일 해야지. 악마야, 네 할 일 해야지. 라고 보내죠.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이 아셔야 될 것은 예수님이 친구라고 할 때 제자들은, ‘야, 하나님께서 우릴 위해서 참 제일 귀한 생명까지 주시는구나.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것은 아직 친구를 모르는 거예요. 친구라 하는 것은 주님이 버림받을 때 친구 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관여되어 있고 엮여져 있는가를 봐야 돼요.

예수님 죽을 때 제자들은 어디 갔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에서 사살당할 때 대통령 어디 있었냐고 묻는 플랭카드를 제가 본 적이 있거든요. 그러면 반대로, 나라를 구할 때 왕이 구하지 않고 논개라든지 이순신 장군이 구했다고 어느 사람이 또 이야기했죠, 나훈아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대신 죽을 때 그 혜택 입을 사람 어디 갔습니까? 도망갔죠. 도망가고 부인하고. 베드로는 부인하고 모른다하고 저주하고 이랬죠. 그게 과연 친구 사이가 될까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누구도 친구가 성립된다, 안된다? 우리 입장에서는 친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을 나 좋으라고 친구라는 말을 하면서 이용할 생각이 앞서 나오기 마련이에요. 이용가치 떨어지면 그대로 뒤돌아서서 안보죠, 이용가치 떨어지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병 고치고 예수님이 천국 준다고 하니까 제자들은 좋아라 하면서 하늘나라 가면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은 자리 차지하겠는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 거예요. 그게 제자들 생각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 생각이라고 보세요. 예수님 좋아? 좋아. 예수님에 대해서 목숨 바칠래? 아니요. 뭐 그런 거. 그게 우리 형편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마음이 우리 자력으로서는 나올 수가 없음을 인정해줘야 이게 친구관계에요. 우리 쪽에서 친구라는 개념 자체를 주께서 십자가로서 없애버렸어요. 네가 생각하는 친구라 하는 것은 나는 안 받는다. 네가 지금 친구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친구라 하면 다 친하게 지내는 줄 알지? 아니야. 내가 일방적으로 너를 친구 해줄게. 친구가 아닌데 친구 해줄게.

친구라 설정해놓고 그 다음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그 친구 아닌 것을 친구 되게 하는 데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그것을 받아들일 때 친구입니다, 그걸 받아들일 때. 그걸 받아들일 때 받아들이는 마음이 어떻겠어요? 내가 친구 될 자격도, 그러한 인간도,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겠죠.

그게 바로 주님의 친구입니다. 나는 나밖에 몰라요. 예수님마저 이용하려고 했던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위해 목숨을 주시다니. 그저 황공할 뿐이고 이제부터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하는 그러한 마음이 절로 들겠죠.

'유튜브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자  (0) 2020.10.21
속죄  (0) 2020.10.21
중지와 정지  (0) 2020.10.07
무능력  (0) 2020.09.23
철저함에 철저함  (0) 2020.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