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0 - 어디 갔지?
20,06,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나는 최종적이다 !!
오늘은 교재 3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확고한 나의 존재를 등장시키는 의도로 보게 된다" 라고 되어있는데, 지금 교재의 소제목이 '2강, 창조의 반복성' 인데 말이죠. 그러면 '확고한 존재'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최종적으로 간주한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 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간주하고, 그 다음에 성경을 펼치고 본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미 자기 자신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봐도 자기에게 있어서 이미 정답은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는 태도가 어떠하다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이미 최종적으로 간주한 상태에서는,자기가 최종적이니, 자기의 최종성을 어떻게 하면 더 확실하게 굳힐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는 말이죠. 물론 누가 자기를 최종적으로 간주했는지는 모르고, 일단 자기가 확고한 존재라고 간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흔히 말하는, 성공, 실패, 좌절, 기쁨, 이런 것들은 어디에 기준해서 그런 감정이 나온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를 최종적으로 간주했을 때 나오는 기분들이라는 말이죠. '너'가 아니고 '우리'도 아닌데, 인간은 궁극적으로 '나'를 최종적으로 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로 여긴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슬픔과 기쁨이 다 나온다는 말이죠. 이렇게 자기 자신이 정해졌는데, 그런데 누가 정했는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인데, 자기는 최종적이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그런데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본다고 하면, 지금 우리가 보는 교재가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인데 말이죠. 아무튼 그런 상태에서 창세기를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보니까, "선악을 아는 나무를 먹으면 죽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죽는다' 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한 많이 하기도 하는데, 그리고 실제로 주변에서 많이 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슬픈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자기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하면 슬프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기가 아직 살아있다고 여기는 이상은 궁극적으로 슬픈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죽는다' 라고 했을 때, 자기가 그 성경말씀을 읽어보면서 그것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본다는 겁니까? 성경에 나오는 '죽는다' 라는 말을 참고로 해서, "나는 얼마나 확고한 존재가 되고 싶은가?" 라는 것을 확정짓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의 '죽는다' 라는 말이 확고한 자기 존재와 만나게 되면, 여기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고 싶어합니까? "내가 죽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지?" 라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죽는다' 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라는 것이죠.
성경에서 죽는다고 하면 자기도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노립니까? 이미 자기가 확고한 존재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음을 피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을 얻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래야 최종적인 존재로서 굳히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딴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고발하는 책이란 말이죠. 인간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 요구사항을 늘어놓는 것을, 즉 인간은 일방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까밝히는 책이 성경이란 겁니다. "노리기는 무엇을 노려?" 라는 식이라는 것이죠.
* 두 개의 '나' !!
그러면 성경 바깥의 '나'와, 성경 안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분이 자기를 고발한다는 말이죠. 그 어떤 분이 등장해서, 그런데 그분이 또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 안에서의 '나'가 있고, 또한 성경 바깥에서 성경을 보는 '나'가 또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두 개의 '나'는 서로 친하게 지내겠습니까? 아니면 서로 앙숙이겠습니까? 도저히 친하게 지낼 수가 없는데, 그렇겠지요? 그야말로 만만치 않은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너 죽고 나 죽자"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복음 5장에서 "성경은 나에 대해서 증거한다" 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이 '나'는 예수님인데, 그러니 여기에서 하나님은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런데 인간들은 '나' 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는고 하니, 앞에서 존재를 이야기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한다" 라고, 혹은 "하나님은 계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하나님은 존재한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존재한다" 라는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계신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성경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계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계신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 라는 것을 찾아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도 존재한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가 확고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내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그 나를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히 하나님이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라는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 라고 하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즉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 지우고 다시 정리하면, '나' 라고 하는 것이 하나, 둘, 셋,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여기에 있다고 하는, 그것을 도저히 부정하지를 못하겠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거울을 보면 분명히 자기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이 1이 되고, 그렇게 자기가 여기에 있으면 그 다음에는, "누가 나를 만들었지? 하나님이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여기에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2번이 되고, 우리 인간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누가 있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계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이 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마감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코끼리가 있고 코스모스가 있고, 그리고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것, 그것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다 집어넣고자 한다는 겁니다.
우리보다 말씀을 먼저 받았던 유대인들이 바로 이렇게 생각했는데, 즉 "우리 이스라엘이 이렇게 있고,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고, 그 중간에 모든 피조물들이 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갑자기 끼어들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만 이 가운데 끼어들었는데, 그래서 1번, 2번, 3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이 자리에 예수님 자신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즉 '나(3)'가 이 자리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해보겠는데, '나(2)'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고 '나(3)'가 있고, 그 사이에 코끼리와 코스모스와 대자연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무엇인고 하니, 그 사이에 율법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말이죠. 그렇게 '나(1)'와 '나(2)' 사이에 율법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율법을 결국 하나의 다리로 본다는 겁니다. 즉 "내가 율법에 순종하면 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라고, 혹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또는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율법을 지키려면 그 선행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자기가 여기에 있어야하고, 그 다음에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여기에 있어야하고, 그 다음에는 율법이 있어서, 그래서 자기가 그 율법을 지키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인데, 바로 그게 유대인들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 예수님이 계신다 !!
이게 그들의 전부였는데, 물론 이방인들도 여기에서 율법은 빼고 신이 있다는 것은 동일하게 인정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것으로 끝이면 조용하겠는데, 여기에 '나(3)'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다" 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예수님이 율법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여기에 다른 다리를 놓으셨다는 말이죠,
여기에 '나(3)'가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과 말씀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나(1)'을 어디로 데라고 갑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나에게로 오지 않으면 하나님에게로 갈 수 없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나(2)'는 지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것이 지워지면 율법도 역시 지워지는데, 그들은 "율법이 있다" 라는 것으로 하나님에게로 갈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율법이 따로 있고, 예수님이 행한 이적과 기사와 설교가 따로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이 경쟁을 하겠습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한다는 겁니다. 경쟁이 되는데,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면서, "율법에 근거하면, 당신은 율법을 위반한 자다" 라고 했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모세가 율법을 주었다고 하면, 그 모세가 너희들을 고발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율법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말씀과 설교가 더 우선이라는 말이죠.
(요 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 나는 죽어있다 !!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율법을 준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고 합니까?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엉터리라고 한다는 겁니다. 율법은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드디어 오늘 주제에 들어가는데, "나는 죽어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말이죠. 물론 있기는 있지만, 그게 죽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서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렇게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너희는 죽어있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베풀어주시는 그 모든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죽은 자가 살 것인가?" 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살아있다는 겁니까? 죽어있다는 겁니까? 당연히 죽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살아있다. 그렇게 살아있지만 죄가 섞여있어. 그런데 살아있는 내가 율법의 덕분으로 악한 존재에서 점점 더 선하고 의로운 존재로 변화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이 존재하시니 그 하나님이 나를 선한 존재로 인정해주실 것이다" 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는데, 달리 말하면 그것이 오늘날 모든 인간들의 마음가짐이라는 말이죠. 즉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불완전한 나를 완전케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로 만들어주실 것이다" 라는 생각을 사람들은 다 하게 된다는 겁니다.
* 다시 시작하면 !!
그렇다면 지금 그림은 다 지우고 처음에 그린 그림을 다시 그려보겠는데, 처음의 그림은 먼저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인데, 그 다음에 성경을 펼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여기에 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인공은 누구인고 하니, '나' 라는 것이 주인공인데,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성경을 펼쳐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최종적 존재이기에 말이죠. 이것은 맞고 틀리고 하는 문제가 아닌데, 무조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왜 있는지는 모르는데, 중요한 것은 "왜 있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말씀을 보니, 거기에는 율법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여기에 있다고 하는 그 최종적 존재, 그것도 중요한 최종적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게 제일 중요한 최종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자기가 더 살기 위해서, 큰소리를 치면서 살기 위해서, 그러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참고로 한다는 겁니까? 그게 성경이라는 말이죠. 그런 방법 중의 하나가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해보면, 이게 중세철학에 나온다는 겁니다.
*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하나님 증명' !!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라고 하게 되는데, 여기서 공통점은 '존재' 라는 것인데,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동일하게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라고 하는 것을 존재론적 하나님 증명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안셀무스가 주장했는데 말이죠.
모든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누가 나를 있게 했는가?" 라고 하게 되는데, 즉 "내가 여기에 있다고 하면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분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여기에 있다" 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인간들의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반박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는데, 물론 제가 보기에는 미신이고 엉터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라고 보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무려 2,000년의 교회역사가 흘러왔다는 것이죠.
* 예수님이 활동하신다 !!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활동하신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거기에 왜 "내가 있다" 라는 것이 중간에 끼어드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할 줄 알지만,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것이 "내가 있다" 라는 것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내가 있다" 라는 것이 엉터리라면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것도 역시 엉터리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이 상상한 하나님인데,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말이죠.
* 영원한 단절 !!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경의 내용은 '나(1)'과 '나(3)'는 십자가의 대충돌로 인해서 끊어져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도 끊어져있는데, 영원한 단절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과 예수님 사이가 끊어져있으니,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 대신에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법이 있으니, 그 법을 믿고 지키면 천국에 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그렇게 자부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영원한 단절인데,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 나는 죽어있다 !!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자기 천국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이 단절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하, 끊어졌구나. 미처 몰랐네" 라고 하게 됩니까? 어떻게 됩니까? 아까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여기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어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죽어있다' 라고 하게 되면, '있다' 라는 것이 강합니까? '죽었다' 라는 것이 강합니까? '죽었다' 라는 것이 강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어있다' 라는 것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지금 숨을 쉬고 있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것은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본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끼리의 생각이지,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의미와는 그 의미가 괴리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죽어있는 인간을 살리기 위함인데, 그렇게 살리려고 하면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먼저 죽어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몸이 아프고 사업이 잘 풀리지 않고 가정에 우환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슬프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죽어있는 상태에서 그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미 죽은 해골인데, 그게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냐는 말이죠. 그러니 "지금 내 나이는 얼마고, 나는 교회에 몇 년을 다녔다" 라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 누가 살렸는가?
죽은 자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누가 살렸는가?" 라는 것인데,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그래서 그런 자의 입에서는 예수님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죽어있었다" 라는 것인데, "나는 교회목사다. 장로다. 집사다" 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즉 "죽어있는 상태였는데, 살렸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 그때는 "내가 살았다"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누가 살렸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의 경우에 순교가 무엇인고 하니, 평소의 자기 삶이 곧 순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는 늘 죽어있다는 것인데, 그게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자기가 있는 것이지, 자기의 삶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 오직 그리스도만 !!
예수님을 믿어도, 그 목적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믿는다고 하면 곤란한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그 표적이 예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겁니다. 즉 "내가 살고 싶은데, 예수님을 믿어서 그 목적을 드디어 달성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가 최종적인 존재임을 부각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주 예수를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높여라" 라고 하는 뜻이지,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더 잘살고, 또한 천국에 가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죠. 오직 그리스도만, 오직 예수님만이 존귀하게 되면 된다는 겁니다.
이 정도로 해놓으면 우리가 교재를 볼 수 있는 바탕이 형성되었지 싶은데, 여기서 교재 39페이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조금 긴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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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강 창조의 반복성
첫째 시간에서 하나의 테마로 시작된 것이 뭐냐 하면, 성경책 자체가 사건화 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성경 보면서 존재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할 때, 나라는 존재가 선악과나무 열매라는 존재를 내 것으로 따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뭐가 문제냐? 라고 하게 되면, 자기를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따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는 지식이 확보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따먹는 순간 우리가 생각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치밀하게 요한계시록이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함축된 사건덩어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할 때, 저들은 백설공주처럼 숨을 못 쉬게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유황불까지, 지옥 불에까지 계속해서 확산되는 것입니다. "네가 진짜 죽음이라는 것을 맛을 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본인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존재를 타고 넘어서서, 자기에게 따먹으라고 지시한 사탄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유황불에 들어갑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10절)고 했는데, 결국은 선악과라는 것이, 단지 인간을 상대로 한 나무가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보면, 마리아가 아기를 임신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리아라는 존재가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임신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보게 되면, 여기서는 마귀가 그 아기를 삼키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집니다. 그러므로 해서 마리가 임신한 것이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낫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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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결국 선악과는 단지 인간을 상대로 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밑에 나온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 4절을 보면, 악마가 아기를 삼키려고 대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1절과 2절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는 말이죠.
(계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계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계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계 12: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그런데 여기에 보면 "마리아가 잉태한 곳은 산부인과가 아니라, 온 우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관련되어있다'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건'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온 우주가 하나가 움직일 때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벌을 키우는 양봉업자들을 보면, 그들이 벌통을 움직이면 벌들이 따라서 다 움직이는데, 그렇게 뭔가 중심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의 해와 달과 별은 누구와 관련이 있는고 하니, 예수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죠.
* 중심부와 주변부 !!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하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전혀 아닌데, 그런 대자연의 움직임이 우리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데, 그러니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 중심부는 오직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중심부의 반대말이 주변부인데, 예수님이 중심이고 우리는 그 바깥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즉 구름이 끼고 비가 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은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까? 주님인데, 그렇지요? 어제 대구에 비가 제법 많이 왔는데, 그러면 비가 왜 왔을까요? 그런데 이 질문은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욥기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질문이란 겁니다.
* 욥아,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는지 아느냐?
욥은 자기 몸이 아프니 그 관심사가 온통 어디에 있었는고 하니, 자기에게 있는데, 즉 자기가 중심부라는 말이죠. 그래서 모든 생각을 자기에게 몰두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욥아,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는지 아느냐?" 라고 하시면서 그만 쑤시고 들어오신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황무지나 욥이나 같은 입장이라는 것인데, 즉 욥이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이여, 제가 왜 아픕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따지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욥이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이유와 목적은 예수님인데, 여기에 하나님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말이죠.
* 인간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살해하게 되어있어 !!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만 살해를 당했는데, 예수님은 기존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간주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았다면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런데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들의 아비는 악마이기 때문에, 그 악마가 조작해낸 하나님을 너희들이 믿기 때문에, 그 악마가 시키는 대로 너희들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래서 나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 쏠리고 있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자기 중심이 되는 이상 그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인간이 편하게 산다는 것이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인데, 왜냐하면 온통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종 코로나의 경우에도, 분명히 주님이 터지게 하셨는데,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라고, 그렇게 최종적으로 자기가 살아남는 것이 자기 관심사라는 말이죠. 마스크를 쓰고 소독제를 손에 비비고 난리도 아닌데,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 A : 왜 마스크를 씁니까?
* B : 살려고 그렇게 합니다.
* A : 왜 살려고 합니까?
* B : 나니까 당연히 살아야 합니다.
* A : 그러면 그게 중심부입니까? 주변부입니까?
* B : ???
자기가 지금 여기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중심부가 아닌데, 자기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다는 말이죠. '죽어있다' 라는 것도,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 중요한데, 그래서 이것을 바꿔 말하면, "죽음이 나에게서 살아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더 줄이면 "죽음만이 살아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선악과는 나 안에서 살아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선악과가 살아있다는 것은 선악과의 위반사례가 살아있다는 것인데,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는 그 말씀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말씀이 말이죠.
주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신 그 말씀은, "너희들이 선악과를 따먹더라도 내가 계속해서 유효하게 실제로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겠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생명나무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있음'은 누구를 위한 있음인고 하니, 예수님의 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인데, 그래서 선악과도 있고 생명나무도 있다는 것이죠.
* 인간은 죽음의 운반체 !!
지금까지 한 것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게 되면, 자기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음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죽음의 운반체' 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죽음을 실어 나르는 바이러스라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이 현상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고 하니까, 죽음 뒤에 감추어진 것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예를 들어서, "밥을 먹자", "영화를 보자", "놀러 가자", "운동을 하자", "잠을 자자" 등등, 그런 것들인데, 이런 것들이 죽음의 현상들이라는 겁니다. 물론 자식을 보고 "공부를 잘해라" 라는 것도 그러하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이 내뱉고 있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모두가 다 죽음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씀과 행동들은 무엇인고 하니,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다는 말이죠. 그게 예수님의 입에서 침방울이 튀듯이 나온다는 겁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의 바이러스가 말이죠.
* 말씀의 실효성 !!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과 그 행동이 과연 실효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실효성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실패로 끝나는 법이 없다는 것, 그것은 어떤 경우인고 하니, 예수님만이 최종적으로 존재한다는, 그 단순해 보이는 사실이 실감이 나면서 다가올 때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는 "내가 여기 존재한다" 라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만 푹 꺼지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은 예수님의 재료가 되는 죽음의 운반체일 뿐이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거기에는 낄 자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물론 낄 필요도 없고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살아있음에 대해서, 건방지게 그 앞에서 "나도 살아있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았는데, 그래서 마치 침방울이 튀듯이 자신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죽음에까지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이 존재합니까? 죽음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죽음이 존재한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좀 이상하다는 말이죠. 학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게 낯설다는 말이죠.
* 악마가 존재한다 !!
왜냐하면 존재라는 것은 고형제, 즉 눈에 보이는 실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죽음이 존재한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상당히 납득하기가 힘든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죽음이 존재한다" 라는 것을 "악마가 존재한다" 라는 것으로 바꾸면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 배후에 인간을 죽게 만든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현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무엇이 작동했는고 하니, 눈에 보이는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뱀이었다는 겁니다. 뱀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서 "내가 있다" 라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가 있으면 자기처럼 생긴 어떤 덩어리, 그렇게 되면 뱀의 존재가 인정된다는 말이죠(??).
* 여자는 남자의 일부 !!
강의가 어려울 때는 더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데(ㅋㅋ), 제가 물어보겠는데 "여자가 존재한다" 라고 하면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렸는데, 왜냐하면 여자가 아닌 남자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여자는 남자의 일부인데, 즉 갈비뼈로서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여자는 그 출발점이 아담의 갈비뼈인데, 그러니 남자가 존재하는 것이지 여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가 없으면 여자도 없는데,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남자가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존재에서 존재가 아닌 것으로 빠져버렸다는 말이죠. 즉 남자인 아담이 흙이 되어서 그만 소멸이 되었다는 겁니다.
남자가 그렇게 흙이 되어버리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존재하지 않던 여자가 부각되고, 그리고 존재하지 않던 뱀이 부각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실 때 누구와 하셨는고 하니까,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과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은 무엇인고 하니, '잉태치 못한 자' 라는 말이죠. 그런데 보통 이 땅에서 존재라는 것은 어떠한고 하니, 잉태, 즉 번식을 통해서 계속해서 존재가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이 아담을 낳고, 또한 아담이 낳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남자가 있을 경우인데,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자는 죽음의 운반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과 죽음이 계속해서 이어져 간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일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끄집어내는 것인데, 그것은 약속에 준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약속은 일단 모든 존재를 다 까버린다는 겁니다.
*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까,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번식이 일어나게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여자에게서 존재가 나오게 하는 방식인데, 그게 바로 '여자의 후손', 그리고 '뱀의 후손' 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됩니까? 그것이 뱀 새끼를 말하는 겁니까? 그게 아닌데, 존재에서 존재로 나올 때 뱀 새끼라는 겁니다. 어미 뱀에서 새기 뺌으로 말이죠. 그런데 뱀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혹은 진짜 존재를 가리우는 것이 뱀이라고 하면, 진짜 존재는 뱀이 아니고 그 위에 있는 악마라는 겁니다.
과연 여자가 홀로 자식을 낳을 수 있습니까? 낳지 못하는데, 그래서 성경에서 생명의 노선이 시작할 때는, "남자가 없이 여자 홀로 자식을 낳는다" 라고, 그렇게 시작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이해를 하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을 자기 잘 되려고 보겠다고 하는 의도자체가 너무나 엉터리이고 악마적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성경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난 자기가 더 잘난 자기가 되기 위해서, 즉 천국에 가기 위해서 보는데, 하지만 그렇게 성경을 보는 것 자체가 성경을 모독하는 짓이라는 말이죠. 성경에서 하나님이 있다고 하니, 그래서 그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잘 보여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 사라지는 것이 곧 인간 !!
그게 대단히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오히려 그것은 자기가 뱀이라는 것을 감추는 하나의 수법에 지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존재로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는데, 그냥 죽음이 시키는 대로, 태어나서 늙어서 죽는, 그렇게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죠.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등, 그런 위대한 인물들이 지금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 주위에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물론 동상은 있지만 말이죠. 그게 인간의 허무한 모습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물론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있지만, 아무라 백세를 산다고 해도 우리가 50년이 지나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없는 것이 정상인데, 자기가 있는 게 정상이라고 우기지 말라는 것이죠. 자기가 있다고 여기니까 행복을 요구하고 기쁨을 요구하는데, 하지만 기쁘고 슬프고 간에 인간은 그냥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괜히 살아서 주님의 일을 가리우지 말고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죠. 인간은 행복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죠.
어떤 교단에서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 혹은 너무 일찍 죽은 아이들을 위해서 교리를 만들었는데, 즉 "죄를 지을 시간도 없이 죽은 사람은 천국에 가는 것으로 해주자"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주교인데, 그와 비슷한 것이 재세례파이고 또한 침례교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 평소에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아도 그것이 다 누구를 위한 것이라는 겁니까? "살아있는 나를 좀 봐주세요" 라는 것인데, 그런데 왜 봐주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없는데, 무조건 봐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인간인데, 봐주기는 무엇을 봐주느냐는 겁니다.
*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
그래서 성경에서는 말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란 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즉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만 영생을 얻는데, 그런데 모든 인간은 어떻습니까? 여자가 없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남자에게서 태어났는데, 즉 죽음의 운반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남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고, 죽고, 죽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5장에 보면 나오는데,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
(창 5: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 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6)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 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8)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인간이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왜 긴급생계자금을 주었습니까? 그것으로 한우를 사먹고 죽으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살라는 것이 아니고 죽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남자에게서 태어났으니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는 것은 남자의 노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16절입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 1: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마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 여성 4인방, 그리고 '에게서' !!
여기 16절에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라고 하는데, '마리아에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에게서' 라고 하는 게 4번 나오는데, 처음이 3절의 '다말에게서' 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5절의 '룻에게서', 세 번째가 6절의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다말, 룻,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 이들은 모두가 다 여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남자의 혈통을 받은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경우에 남자들이 정통이고, 그래서 자기들이 언약을 받았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들이 보기에는 이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욱이 다말과 룻은 언약도 없는 이방인이면서 여자인데, 그러니 그야말로 두 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밧세바는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우리야의 아내인데, 그리고 마리아는 아예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라는 겁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인데, 물론 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 말이죠(ㅋㅋ).
잉태치 못할 상황이 첫째는 처녀일 경우인데, 둘째는 남편이 죽은 경우이고, 그리고 셋째와 넷째가 무엇인고 하니, 정통적인 하나님의 혈통에 속하지 못한 경우인데, 즉 언약이 없는, 율법이 없는 민족이라는 겁니다. 율법이 없기에 그 자체가 저주가 되는 민족의 여인들인데, 그들이 잉태치 못한 부류에 포함된다는 말이죠.
* 잉태치 못한 자 !!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잉태치 못한 여인을 통해서 태어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남자라는 혈통, 그리고 인간이기에 번식할 수 있는 그 번식족보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겁니다.
인간의 번식족보에 의해서 태어났을 때 그 인간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있다', 혹은 '존재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친구' 라는 영화를 보면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라고 하는데, 즉 "엄마와 아빠가 없이는 너는 있을 수 없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런데 천국에 가는 새로운 백성은 무엇인고 하니, 이 땅에 엄마와 아빠가 없다는 겁니다. 즉 아비도 어미도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잉태치 못한 여인을 통해서 태어났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4장에 보면 "잉태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사 54: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게 갈라디아서 4장에도 나오는데, 천국에서는 남편이 있는 자보다 없는 자의 자식이 많다는 겁니다. 두 개의 언약이 있는데, 하나는 이 땅의 혈육적인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속한 언약으로, 하늘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하늘을 지명으로 표시를 하는데, '예루살렘' 이라고 말이죠. 즉 "예루살렘이 우리의 어머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여기서 "잉태치 못한 자에게서 자식이 태어난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러면 기존의 자식은 어떻게 태어나는고 하니, 현재에 있는 혈통, 즉 남자를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그냥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다' 라고 간주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자살하라' 라는 말이 아니고, 새로운 평가, 새로운 해석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자기가 살을 빼려고 열심히 운동을 해도 죽은 체로 운동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폼을 잡아도 죽은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죽은 있는 체로 부르는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죽음의 운반체라는 말이죠.
* 시체가 없는 엘리야 !!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죽은 자로 본다는 겁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죽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의 시체를 찾아 돌아다녔는데, 하지만 없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엘리야의 시체가 이 땅에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그 옆에 엘리야가 있었는데, 그리고 모세도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모세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니, 그의 시체가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와 같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죽음밖에 없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뱀, 즉 악마에 의해서 현혹이 되어있는 우리 자신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주셔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어떤 말씀입니까? 우리는 죽어있다는 것을, 그것을 알려주시는 말씀을 계속해서 주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기적인데, 그게 다 죽은 것에서 다시 사는 것이란 말이죠. 가나의 혼인잔치 경우에도, 그냥 새로운 포도주를 주시면 되는데, 항아리에 물을 붓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군들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렇게 하니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 일군들도 놀랐는데, 그들이 그게 원래는 물이었음을 증명해준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포도주를 부은 것이 아니라 물을 부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나는 산부인과에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그렇게 해서 자기는 살아있다는 것을 육으로 증명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니 어떻게 됩니까? "나는 죽어있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 자체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존재로서 살아있음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 이제는 생명의 운반체로 !!
그렇게 되니 죽음의 운반체에서 주님의 운반체로, 혹은 생명의 운반체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문자로 여기고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되는데, 성경자체가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죠. 성경말씀 자체가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건강해서 죽던지 암에 걸려서 죽던지, 그런 것은 별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 성령을 받아서, 어떤 식으로 살든지 간에 주님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게 주님이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인데, 그냥 평범하게 살아도, 얼마든지 예수님이 살아있는 모습으로, 그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 악마는, 없음이 아닌 비존재 !
이제 진도를 나가보겠는데, 그러면 여기서 악마는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죠. 악마에 대해서 해보겠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죽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존재하게 되면 악마는 비존재가 되는데, 죽은 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죽었다고 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에 하는 이야기이고, 그런데 악마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는 존재, 즉 있음의 반대이니 없음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으니 악마에 대해서 구태여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살다보면 힘든 일이 생기는데, 그러면 사주팔자에 온갖 것을 다 본다는 말이죠. 자기 존재가 구부러진다든지, 즉 자기 인생이 꼬였을 때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자기 인생이 하트모양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만 이렇게 찌글어 들었다는 말이죠. 월급이 200만에서 100만으로 준다든지 해서 말이죠.
그러면 이 찌글어든 부분은 누가 공격해서 그렇다는 겁니까? 악마가 공격해서 자기를 갉아먹었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악마를 물리치려고 기도하고 헌금도 하는데, 교회충성도 더욱 열심히 하고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왜 악마를 물리치려고 합니까? 회복, 즉 원상복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배가 부를 때는 나오지 않는데, 그런데 갑자기 새벽기도를 나오고 한다면, 그것은 회복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회복이란 것은 자기를 없애겠다는 겁니까? 예전처럼 키우겠다는 겁니까?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로 키우겠다는 말이죠.
그러면 악마라는 존재는 인간에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을 두고 악마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소멸되고 구겨진, 그런 자기의 비존재를 메우기 위해서, 그래서 악마라는 단어를 쓰면서 핑계를 댄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문제가 없는데, 이것은 악마 탓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악마를 쫓아내게 되면 자기는 과거처럼 회복될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악마의 생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이 생각, 즉 "내가 힘들게 되는 것은 악마 때문이다" 라는 생각 자체를 누가 심어주었다는 겁니까?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것인데,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가 어려울 때 무엇을 찾습니까? 신을 찾는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게 압제를 받으니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이죠.
* 종교는 악마가 만들어낸 것 !!
그렇게 신을 찾든지, 혹은 "내가 신이다" 하든지, 이 모든 것을 종교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종교는 누가 만든 겁니까? 악마가 만들었는데, 악마가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악마가 원하는 것은, 자기가 존재라는 것을 인간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존재인 악마가 존재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누가 알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알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악마의 졸개인 귀신들을 상대했는데,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말이죠. 그렇게 하다가 예수님의 모든 사역들이 결국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향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정말로 악마가 자리를 잡은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겁니다. 악마의 자식들, 그 대표자가 있었다는 말이죠.
이들은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병을 고칠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닌데,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킬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의 지점까지 가시는데, 그게 바로 악마가 원했던 지점이라는 말이죠.
악마가 자리를 잡은 것은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그동안 가르쳤던 그 모든 신학은 악마가 자기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 퍼트린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신학이든 윤리든 도덕이든 간에,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즉 인간의 행함으로 가능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먼저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는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의 존재를 더 우수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 기어이 죽음의 자리까지 !!
그러니 이 모든 체계가 악마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여기 중간에서 중단될 수 없다는 겁니다. 산상설교를 하시고, 오병이어를 일으키시고 끝나는 것이 아닌데,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어이 죽는 자리까지 가야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 감추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는 존재라는 것인데, 그것을 숨기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떠는데, 심지어 12제자도 떨었다는 말이죠. 진짜 존재하는 것은 죽음인데,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악마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악마와 최후의 결전을 벌리기 위해서 죽음의 장소로 올라가셨는데, 그래서 "죽여라" 라고 하니, "오냐, 죽여줄게"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악마의 앞잡이인 빌라도와 로마군병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악마라는 것을 일체 모르는데, 왜냐하면 악마는 비존재라는 겁니다.
자기들은 악마가 아니라, 신의 존재와 직결되는 줄 알았다는 말이죠. 그것이 성경해석의 역사적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예수 너를 여호와 이름으로 처단한다" 라고 나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신의 이름으로 이 땅에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죽이도록, 그렇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강권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기도했는데, 자기 뜻은 접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말이죠. 그렇게 아버지는 악마가 자기 아들을 처단하도록 했는데, 악마의 세계, 아니 인간의 세계, 존재의 세계에서는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다 해결이 되었다는 겁니다. "요란스럽게 굴더니만 이제 끝났어"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도 혹시 몰라서 군사 둘을 붙여서 무덤을 지키게 했는데, 그런데 무덤을 지키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스스로 다시 살아나면 몰라도,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죽일 때, 확실하게 죽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시체를 훔쳐갈 까봐서 지키게 했는데, 그리고 돌로서 무덤을 막아놓았는데, 그러니 인간의 할 도리는 다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이 죽은 분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면, 지금까지 인류가 구축해놓은 그 모든 이성적인 진리는, 윤리와 도덕은 아무런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밝혀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히 봉인했는데, 그리고 모든 인간이 거기에 동의했다는 말이죠. 물론 제자들은 도망을 쳤는데, 제자들도 존재로서 자기 손해볼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 어디 갔지?
그러니 죽음이 죽음답게 제대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그 이외에 다른 의견은 일체 이 땅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만 그 무덤이 사흘 뒤에 가보니 빈 무덤이었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이 여기서 나오는데, 즉 "어디 갔지?" 라고,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로 가고 없다는 말이죠.
이게 매우 중요한 질문인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라고 하면,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 갔지?" 라는 질문의 제대로 된 답변은 "함께 있다" 라는 것인데, 마태복음의 제일 마지막인 28장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너희와 함께 있다 !!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과 "예수님이 함께 있다" 라고 하는 그 '있다' 라는 것이 연결이 됩니까? 전혀 안 된다는 말이죠. 거기에는 단절, 즉 죽음이 있는데, 그것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있음이 서로 같은 성질의 있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뒤의 것이 진짜이고 앞의 것은 엉터리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이 어디 가셨지? - 너희와 함께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죽고 난 뒤의 있음만이 진짜 있음인데,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있음은 있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냥 죽어있다는 겁니다. 즉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 오실 때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을 앞장세워서 오시는데, 그러니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이미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얼마나 살았는지, 기도를 얼마나 하고 헌금을 얼마나 했는지,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아프고 건강하고 하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는데,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의 운반체로서, 그렇게 태어났다는 말이죠. 얼마나 더 살지, 그런 것은 자기가 기대할 필요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만 해도 주님의 함께 하셔서 베풀어주시는 혜택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이 곧 중심 !!
결국 이렇게 예수님이 다시 사심으로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그 중심부가 밝혀지는데, 예수님이 중심이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만이 영원한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그래서 주의 이름만이 영원히 찬양을 받고 그런 자격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중간에 소멸되는 이름을 찬양하면 안 되는데, 사람을 찬양하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중심부에는 주의 이름만 있고, 그 나머지 이름은 주의 이름에 섞여있는 이름이 없는 이름으로서, 즉 익명적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주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 이름을 찬양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 자기 명예, 자존심, 그런 것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다 죽음의 다른 표현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존심이 있다는 것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면 됩니까? 남들이 보기에 마음놓고 살아가고, 편하게 살아가고, 주저 없이 살아가면 되는데, 즉 율법에 매이지 않는 체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홀로 그렇게 살아갑니까? 주님이 시키는 겁니까? 성령이 함께 있느니, 그것은 주님이 시킨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바울인데,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다른 존재가 보기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하지만 사도바울은 항상 이야기하기를 "주께서 함께 하셔서 이 일을 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사도바울은 무슨 일을 해도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말이죠.
*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 !!
고린도서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어리석고 불쌍한 자인데, 그런데 그 배후에는 악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나옵니까?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는데, "십자가를 믿는 너희들이 어리석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자기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우쭐거리는 것이 곧 교만이 된다는 겁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러니 제 아무리 태생적으로 성격이 좋고 해도, 십자가가 없다고 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누구의 노리개감이 되는고 하니, 십자가를 공격하기 위한 악마의 전위병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좋은 인품과 착함, 심지어 자기의 겸손까지 자랑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는데, "어디 갔지?" 라고 하는, 이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거기에는 관심이 없는데, 그냥 자기가 여기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 잠시 외출한 하늘나라 !!
하지만 성도는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의 계심으로 인해서 자기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사업이 부도가 나고, 가정에 우환이 생기고, 자기가 아프고, 그렇게 모든 것이 주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남의 인생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즉 남의 청춘, 남의 성격, 남의 재산, 그런 것을 탐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의 죽어있는 표식이고 사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주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천국을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지난 낮 시간에 그런 표현을 했는데, "하늘나라가 잠시 외출했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다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도저히 이 땅에 붙잡아둘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이 땅에 잠시 외출했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생각하도록 허락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을 자기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는 주변부에 있다는 것을 항상 깨달으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6,25 오후 4시에 마침.
주여, 외출시간이 너무 길게 않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