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9 - 새로운 관계
20,06,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
오늘은 교재 29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그냥 창조한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창조된 피조물 자체가 창조주를 알 수 있도록 창조한 것인지, 그것을 한 번 생각해보다는 말이죠.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창조된 그 자체로서 피조물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끊어지지 않고 창조물 속에 과연 창조의 중심이 들어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그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 독립적인가? 구심점이 있는가?
첫 번째는 창조된 세계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이냐는 것인데, 즉 해는 해대로, 달은 달대로, 그러하냐는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는 그게 아니고, 창조세계가 구심점을 두고 그 주변에 창조물들이 배치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둘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옳으냐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창조세계에 중심이 있고, 그 주위에 피조물들이 배치가 되어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 창조된 것이 중심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그 관계가 끊어졌다고 하면 1번이 될 것이고, 그러면 자체적으로 독립적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악마가 아주 설치고 마구 돌아다니는데, 그리고 이 악마는 자기 주장이 아주 강렬해서 "지옥에 가도 할 수 없지" 라고 할 정도로 배짱이 그야말로 대단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악마가 과연 독립적입니까? 악마가 독립적인가요?
인간이 있고 악마가 있어서 서로 관여할 수 없다고 하면, 그러면 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악마도 하나님이 만드신 천사인데, 그렇다면 그런 천사가 과연 독립적으로 마구 돌아다니도록 하나님께서 방치를 했겠느냐는 겁니다.
이것도 같은 질문인데,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예를 들어서, 'A' 라는 사람과 'B' 라는 사람이 있는데, A가 B를 보고 "내 일에 당신은 간섭하지 말라. 내가 돈을 벌어서 공중에 뿌리던지 휴지로 사용하던지, 그게 네 돈이 아니면 간섭하지 말라. 왜냐하면 나는 독립적이니까" 라고 한다면, 그 말이 과연 현실에 맞느냐는 겁니다. A는 A대로 독립적이고, B는 B대로 독립적이고, 과연 그러하냐는 것이죠
부모의 자식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릴 때는 말을 듣는 척을 했지만 조금만 나이가 들게 되면, 엄마 인생이 따로 있고 자기 인생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 입장에서는 섭섭한데, 말도 듣지 않고 말이죠. 하지만 자식이 뭐라고 합니까?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까? 엄마도 어릴 때 그러했잖아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창조된 것과 그 중심점의 관계가 끊어지면 1번이 되고 마는데, 그런데 창조의 원리가 중심점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니고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악마가 독립적으로 나대고 설치는 것 같지만, 중심점이 되는 예수님과 악마의 관계가 어떠한고 하니, 아무리 지옥에 갈 악마지만, 주님이 악마를 쥐었다가 폈다가 하신다는 겁니다.
* 영적관계와 육적관계 !!
그렇게 예수님이 악마를 다루고 있다면, 그러면 이 관계가, 이게 흔히 말하는 영적세계의 관계인데, 이 관계에 인간세계가 종속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왜 종속이 됩니까? 인간과 예수님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관계가 성립되는 줄 알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생각하는 예수님과의 관계는 이미 다 끊어졌다는 말이죠. 따라서 예수님과 인간 관계의 진실을 알려고 하면, 먼저 예수님과 악마의 영적인 관계가 어떠한지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 관계에 종속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적이기 때문에 말이죠.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육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더 우위에 있는데, 그리고 더 포괄적이라는 겁니다. 즉 범위가 더 넓다는 말이죠. 이런 영적인 세계가 전체라고 하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국가관계나 가족간계와 같은 것은 전부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라는 것이죠.
그러니 주님이 제자들이나 성도에게 찾아오실 때 그냥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악마와의 관계를 가지고 오시는데, 그래서 우리를 그 관계에 동원을 시킨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기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좋은 관계가 된다고 여기는데, 주님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어도 인간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는데, 인간은 그 악마와 한 통속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약속에 의한 예수님의 희생의 피가 있어주어야, 그 관계가 이어진다는 말이죠. 우리는 이웃에게 떡을 돌리면서 성의를 표시하면 그것으로 좋은 관계가 이어진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과 악마의 영적인 관계를 누락시킨 경우라는 겁니다.
* 악마는, 주님의 원수 !!
예수님은 악마를 두고 주님의 원수, 혹은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셨는데,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이죠. 그런 원수관계가 성립이 되어주어야, 왜 인간의 행함으로, 그러한 진실함으로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진심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구심점이 되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보이는 육적인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우선이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과 악마의 관계가 어떠한지, 그것을 아는 쪽으로 자기 백성을 여기에 집어넣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해 나가신다는 겁니다.
* 새로운 관계 !!
오늘 강의제목은 '새로운 관계'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나중에 그만 잊어버리니 모두들 기억을 해놓으세요(ㅋㅋ). 그런데 이 새로운 관계를 인간 쪽에서는 맺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주님과 악마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 관계에 뛰어들어야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대상에게 잘해주려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 너무 사랑합니다. 제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마귀는 빼버리고 말이죠. 하나님에게 원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우리끼리 좋은 관계를 맺읍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독립적인 부자청년 !!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청년이 나오는데, 그가 예수님에게 하는 태도를 보라는 말이죠. 예수님을 아주 존경하고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잘 지키면, 그러면 하나님과 괜찮은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려보내는데, 왜냐하면 서류가 미비하다는 말이죠.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청년의 경우에 서류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고 하니까, 자기가 독립적이라고 여겼던 것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 독립적일 수가 없는데, 자기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부자청년이 있던 자리, 그야말로 찐득찐득한 자리가 있다는 말이죠,
* 인간의 자리와 머드축제 !!
왜 여름이 되면 서해안의 보령에서 하는 머드축제가 있지요? 온 몸에 진흙을 바르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진흙자리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설쳐도, 그리고 제 아무리 목욕을 해도 그런 인간이 진흙과 별개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결코 없다는 것이죠.
이미 그 자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깔아놓은 자리인데, 그런 자리에 놓여있는 것이 인간인데, 즉 인간은 죄로부터 태어났다는 겁니다. 태어나서 죄를 짓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 태어난 자리를 문제삼는다는 말이죠. 즉 인간이 "나는 독립적이다" 라고 하는 의식자체가 심히 수상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독립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악마의 마음에서 유발된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부자청년이 "나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라고 하는 게 왜 문제가 있는고 하니,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독립적' 이라는 겁니다.
* 강의를 다시 하면 !!
강의를 다시 해보겠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고 하면, 우리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까, "각각 따로 창조했기 때문에 따로 굴러가면 되겠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런 발상은 무엇이 없습니까? 구심점을 빼놓고 하는 발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면 이 자연세계는 인간에게 종속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인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말이죠. 즉 "다스리고 번성하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전달하고 전달하게 된다는 말이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달하기 위한 숙주 !!
그러니 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전달하기 위해서 기생충의 숙주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식으로 인간이 번식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 이유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고, 땅에 충만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는, 여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기능은 그대로인데, 무엇이 바뀌었는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이 악마의 형상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악마가 인간을 자기 정체를 감추는 숙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악마의 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숙주로서 이 땅에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끝은 죽음이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고 하니까, 만약에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고 하면, 그러면 아담의 4대 손이던 5대 손이던 간에 이 땅에는 죽음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생명나무가 있다면 더 이상 죽음은 없는데, 그게 곧 천국이라는 겁니다. 천국에는 선악과는 없고 생명나무만 있다는 말이죠. 죽음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징후라고 할 수 있는 아픈 것도 역시 없는데, 그리고 슬프고 괴로운 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에서는 더 이상 이가 아파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고 싶을 것인데, 그렇지요? 아닌 듯한 표정들인데(ㅋㅋ), 그렇다고 하면 자신의 죽음에서 부활해야 하는데, 즉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 부활의 능력 !!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교회를 만드시는데, 그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음부의 권세, 즉 죽음의 권세에서 더 이상 발목을 잡힐 일이 없는 자들의 집합이라는 겁니다. 그게 곧 교회인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죠.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은 죽음의 권세에서 뛰쳐나온 능력인데, 그러면 우리는 그 죽음의 권세가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꽉 잡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 죽음의 권세는 인간의 죽음을 지연시키는 권세인데, 그래서 병원을 짓고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인간의 목숨을 계속해서 이어가는데, 그것을 '연명'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목숨을 근근히 이어간다는 것은 시간을 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역사' 라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는 곧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부활능력의 특징은, 이 지상 시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인데,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도 이렇게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의의 시작과 끝을 알려준다는 말이죠.
그런데 부활의 능력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즉 시작과 끝을 벗어났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영원함인데, 즉 시간의 무한성이라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째지는데, 그야말로 산뜻하다는 말이죠. 계절도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있고, 그 사이에 잠시 동안의 봄과 가을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반복이 되는데, 반복이 된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입니까? 시간이 작동한다는 말이죠. 바로 그 시간에서 발을 뺀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가셨다가 다시 오셨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죠. 왜 다시 오셨습니까? 시간이 있는 역사에서 빠져나와서, 성령을 통해서 자기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는데, 뽑아내어 주시려고 그렇게 오셨다는 말이죠.
* 너희들은 안 돼 !!
베드로는 자기 몸을 가지고서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려고 시도했는데, 하지만 주님께서는 올 수 없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이 제 아무리 열심을 다해도, 지금의 이 몸 상태로서는 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몸이 문제인데, 살아있다고 여기는 이 몸을 가지고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세계에 들어갑니까?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처럼 어떻게 들어갑니까?" 라고 하는, 그런 절박한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그런 절박한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주님은 너무나 차갑게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내가 선택한 자만 들어올 수 있다" 라고 말이죠.
* 선택의 냉혹함 !!
그것이 곧 선택의 냉혹함인데, 바로 이 대목에서 교회에 50년을 다니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순종을 다했던 사람들이 그만 힘이 다 빠지고 만다는 겁니다. 자기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발휘했는데, 교회에 충성을 다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선택 앞에서 그 모든 기대와 의지가 다 무너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이 몸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몸은 자기가 자기를 선택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선택하게 되면, 여기에 주님이 있고 또한 자기가 있다면, 그러면 자기 선택을 통해서 주님에게 나아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징검다리, 혹은 사닥다리,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주님에게로 가는 노선을 자기가 계속해서 만들어 가는데, 마치 부자청년처럼 말이죠. 십계명을 지키고 또 무엇을 지키면서 그렇게 간다는 겁니다.
* 새로운 관계 !!
그런데 오늘의 강의제목이 무엇인고 하니까, '새로운 관계' 라는 말이죠. 그런데 부자청년의 경우에는, 자기가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계는 어디서 나옵니까? 결코 독립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무엇입니까? 이미 인간 전체를 악마가 장악하고 있고, 그런 하나님의 원수와 예수님의 관계가 출발점이 되어서, 여기에 대한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오직 주님만이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러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새로운 관계에 말이죠.
자기가 주님을 선택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거기에 주님이 호응해서 "네가 구원을 받으려고 손을 들었구나. 내가 특별히 너를 선택을 해주겠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선택에 있어서, 자기의 선택이 어떤 보탬이 되는, 그래서 효과를 더 증강시키는, 그렇게 부연하는 힘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주님은 그것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너의 선택' 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립적이고 독립적인데, 여기에서 독립적이라는 것은 의사결정의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인데, 즉 자율권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고 선택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다 없애느냐는 말이죠. 그것을 없애버리면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히 피동적이고 수동적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다" 라고 하는 말의 근거가 완전히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 주의 자리 !!
창조세계는 구심점이 있는데, 그 구심점에서 새로운 관계가 나온다는 말이죠. 악마는 인간을 정신적으로 장악해서, 인간을 숙주로 해서 그 배후에 비겁하게 숨어있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자기 아들을 보내서 그 원수를 쳐부수게 함으로서 주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시편 110편에 나오는 '주의 자리' 라는 말이죠.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렇게 주의 자리에 앉을 때 어떤 권한이 주어지는고 하니까,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 본인이 원하는 것을 본인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고유권한인데, 말은 맞지만 듣는 자립적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맥이 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가 한 모든 수고가 다 헛것이 되었으니 말이죠.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악마의 음성 !!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렇게 맥이 빠지면서, 그 배후에 있는 악마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인간이 대신해서 해주게 되는데, 그래서 반발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우리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평소에 인간 배후에 숨어있었던 악마의 외침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몰랐는데, 우리는 자체적으로 독립적이고 자립적이기에 말이죠.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한다. 악마고 뭐고 필요가 없다. 구원문제도 내가 결심해서 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우리의 선택이 전혀 반영이 되지 않고, 서류미비로 그만 반려가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우리는 자기 걱정을 하는데, "그러면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걱정이 늘어지게 되는데, 보통 걱정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이 90이 되어도 이 걱정이 전혀 사라지지가 않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90이 넘어서 아무리 정정해도, 아직도 전국노래자랑의 사회를 보고 있는 송해의 경우에 어떻습니까? 그 나이에도 그야말로 청춘이라는 겁니다. 술도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제 아무리 정정해도 자기의 모든 선택은 차단이 되어있고 막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러면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게 비록 악마의 자립성이라고 해도, 이 자립성을 그대로 천국에 합류시켜주세요" 라고 하는 악마의 요청, 그것을 우리가 대신해서 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구심점은 하나님의 형상 !!
하지만 이 창조세계는 자립적입니까? 구심점이 있습니까? 구심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데, 모든 만물은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은 처음부터, 즉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구심점으로 되어있다는 말이죠.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이상 인간은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하지만, 만약에 그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누락이 되면, 즉 악마의 형상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부터 인간은 악마와 더불어서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구심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 창조세계와 약속 !!
그렇다면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그냥 포기하십니까?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세계 안에 구심점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약속' 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약속은 두 종류라는 겁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구심점이 어떤 식으로 체계화가 되고 조직화가 되어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게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인데, 거기에 하나님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약속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고, 그 두 사이는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 갈등과 투쟁이 평정되고 마감이 될 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성이 된다는 말이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나'의 자리는 없어 !!
지금까지 별로 어려운 것이 없지요? 어려운 것은 없는데,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낄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 귀한 '나'가 여기 이 구조 안에는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과연 '나' 라는 것이 주의 일에 끼어들어야 합니까?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런 발상에 대해서, 그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 의심을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그게 예수님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자기 구원이 좋은 것이지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좋은 것인데,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선택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게 기분이 좋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기쁜 겁니까? 주님의 선택이 기쁜 겁니까? 과연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 쪽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무엇을 포기한 것인고 하니, 자기가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이 섭섭하지 않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더 큰 기쁨이 있는데, 그러니 그런 소소한 기쁨은 신경을 쓸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그 큰 기쁨이 바로 새로운 관계, 혹은 새로운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다는 말이죠. 성경은 그것을 두고 '언약관계'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언약관계에 돌입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나'를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통해서 언약이 더 큰 기쁨이고, 반면에 '나의 구원' 이라는 것은 그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즉 아주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 언약관계에서 피 값이 주어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이사야서 52장 3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사 5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 인간은 값없이 팔린 상태 !!
여기에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악마의 위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팔렸으니 그러한데, 그런데 그게 값없이 팔렸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은 운명적으로 악마의 숙주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에게 닦달을 낼 수가 없는데, 인간이 무엇을 해도 그것은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이죠. 마치 미꾸라지에게 소금을 치면 미꾸라지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 인간은 그러한 상태인데, 즉 이미 인간은 악마의 소금이 뿌려진 상태라는 겁니다.
그게 값없이 팔린 상태인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고 끄집어낼 때, 인간을 새삼스럽게 단독자로 간주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네가 이렇게 하면 구원해주겠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값없이 팔렸기 때문인데, 그래서 구원할 때도 값없이 구원해주신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그냥 당겨버린다는 겁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내가 무엇을 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일체 하면 안 되는데, 입이 있어도 그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말이죠. 구심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안다고 하면 말이죠.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였습니까? 왜 몸이 이렇게 아픕니까?" 라고 하는, 그런 것들로 인해서 입이 튀어나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이러한 시도가, 즉 예수님은 값없이 구원하시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절차가 있는데,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3장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 주님은 율법을 집어넣어서 !!
이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주님은 '값없이' 라는 것을 드러내는 환경조성을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인간은 악마와 결속이 되어있어서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렇게 벗어나지 못하는 힘이 바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까, 이 갈라디아서 3장의 절차에 의하면, 주님은 여기에 율법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율법이 오게 되면, 인간은 악마의 숙주이기 때문에, 악마가 인간들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꽉 잡고 있던 그 원리원칙이 율법과 만나면서 유감 없이 노출된다는 말이죠.
율법은 알다시피 법인데, 이 법은 두 가지의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모세언약인데, 즉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죠. 그런 형편에 인간이 놓여있는데, 그러면 인간은 저주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악착같이 저주가 아니라 복을 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 인간이 악마와 한 통속이라는 관계성이 곧 죄 !!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로마서 3장에 의하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더욱 더 확대시키기 위함인데, 여기서 죄라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마와 한 통속이라는 관계성을 드러내는 것, 그게 바로 죄라는 말이죠.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인간은 결코 홀로 있지 않아 !!
인간은 자기가 자립적이고 독립적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결코 인간은 홀로 있지를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많이 노력을 했을 것인데, 그런데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 사람이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 뒤에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평소에는 너무나도 좋은 친구인데, 그런데 막상 여행이라도 같이 가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여행을 같이 가는 것은 참 좋은데, 제발 복음은 이야기하지 말아다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복음을 이야기를 하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보령의 머드축제에서처럼 죄라는 진흙을 온 몸에 뒤집어쓰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것이 곧 인간의 대부역할을 하고 있는 악마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 나는 의롭다 !!
그들이 반응이 여러 가지인데, 그게 무엇으로 통합이 되는고 하니, 만약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면, "네가 하는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한 일이 나의 구원에 기여가 되는 식으로 나는 인생을 살아왔다" 라는 것을 노출시키는 것이란 말이죠.
또 하나의 반응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역사와 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겁니다. 즉 "너 같이 믿으면, 그러면 한국교회는 모두 신자가 아니란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즉 전체의 의견인 대세가 진리라고 여기는데, 거기에 자기 몸 하나를 기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그만 이단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다수인지 소수인지,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건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욱 골치 아픈 것은 아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인데, 대대로 가부장적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주로 가부장적 남자들인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은 "나는 의롭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왜 죄인이야? 나를 보고 왜 죄인이라고 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많은 교회가 주장하는 것이 "법적으로 옳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우리 집안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옳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말이 옳지만, 거기에 나의 선한 행함을 보태야 더욱 확실하게 옳은 것이 되지 않는가?" 라는 모든 것이, "나의 자리는 영원히 저주받을 자리다" 라는 것을 굳히는 게 아니고, "나는 항상 복된 자리에 들어갈 자격자다" 라는 것을 계속 주장하는 모양새라는 겁니다.
그러니 "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라고 하니, 그것이 미끼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를 더욱 죄가 되게 하는 것인데, 그런데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의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라고 하는 죄와 의의 관계성, 그것 자체가 무슨 태도입니까?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관계가 법으로 이어져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모세율법에 준해서 말이죠.
*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극단적 충돌 !!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충돌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모세율법을 위반했다고 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보고 위반했다고 했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심판할 것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어떻게 조정기간이 있어도 결합이 되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법의 완성자로 등장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주장하는 모세율법의 원리와, 그리고 사람들이 대하는 율법이 이처럼 서로 달랐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한 분이고, 사람들은 악령이 임한 정도가 아니라 덮쳤다는 말이죠. 그러니 악령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다고 하는 것은, 죄를 그야말로 임계치까지 끌어올리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법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활동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들이 복을 받겠다고 시도하는 그 의도자체가 결국 하나님마저 살해하는 악마적인 본성, 그 임계치까지 도달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반대로 해서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다시 이 세상에 뿌려버린다는 것이죠. 십자가를 말이죠.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는 유대인들은 회개할 것이고, 그렇지 않는 자들은 더욱 더 반발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고 함으로서, 인간의 모든 행함의 의미는 십자가 앞에서 그만 거절을 당했다는 말이죠.
*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율법을 더한 것은 인간을 죄 아래에 두게 함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그렇게 율법을 두어서 죄 아래에 가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기 위함인데, 즉 주님이 일부러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악마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알려주시기 위해서 말이죠.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 나는 죄인입니다 !!
이제 교재 3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여기에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대로 외우고 고백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예수님이 그대로 가지고 가서 이루는 노선은 십자가로 드러나는데, 즉 천지창조가 십자가로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그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서 고백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결코 제대로 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에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하지만 독립적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성경말씀을 보아도 그런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자기가 창세기 1장 1절을 외워서 자기 마음에 담았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그 말씀을 지킨 것입니까? 물론 자기는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악마를 배제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창세기 전체도 모세율법인데, 그 율법을 자기가 마중으로 나가는데, 물론 단독적으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주님이 주신 그 귀한 말씀을 자기가 지키게 되면, 자기는 저주가 아니라 복을 받는 자리에 들어섰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배후에 숨겨져 있는 악마의 모습인데, 그렇게 인간은 철저히 악마의 숙주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 1장 1절을 보고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고, 또한 창세기 1장 2절을 보고도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하면, 그리고 성경 그 어디를 보더라도 역시 동일한 고백이 나온다고 하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도대체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는 겁니다.
* 십자가로 시작하는 새로운 관계 !!
그 고백은 어디서 시작하는 새로운 관계인고 하니,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거꾸로 다시 창세기를 보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이죠. 그때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슬픈 얼굴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감격해서, 아주 신이 나서 고백을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아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 1절 안에 십자가라는 구심점이 들어있군요" 라고. 그렇게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천지가 창조되었음을 안 상태에서, 그렇게 자기가 범죄한 상태인 죄인이라는 것을 안 상태에서 성경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스스로 말씀에 다가간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자기에게 와닿았을 때는, 원래 말씀의 의도대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그게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함께 흘러나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결코 자기가 어떻게 하려고 해서 하는 고백이 아닌데, 그게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 구원은, 원인이 아닌 결과물 !!
이제 그 다음의 질문을 보겠는데, 어떤 사람이 창세기 1장 1절을 보고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보고 옆에 있던 사람이 흉내를 내어서 그렇게 같이 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또 흉내를 내고 말이죠. 그 사람이 성도처럼 보이니 흉내를 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죠.
다들 침묵수행을 하고 계시는데(ㅋㅋ),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서 나온 그 어떤 원인도 구원의 동기가 결코 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구원은 주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어떤 고백이 나온다고 하면 결과로 나오는 것이지, 원인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전도라는 것은,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이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혹시 주님이 원인이 되신 분이 여기에 계십니까?" 라고, 그렇게 구별해내기 위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전도는 어디까지나 판별이라는 말이죠.
물론 그렇게 전도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당사자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책임에서 빠지면서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자가 깜짝 놀라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즉 "어떤 분이 움직이면 창조의 완성상태가 새롭게 동반해서 일어난다" 라고 말이죠. 그 어떤 분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움직이면 어떻게 됩니까? 기존의 폐기가 되어야하는 창조현실, 이것은 허구인데, 그런 허구적인 것이 같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는데, 이 충돌은 십자가의 충돌을 반복하기 때문에, 결국 이 충돌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계속해서 퍼져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특정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시공간도 함께 발생하고, 그것은 내가 움직여서 발생하는 시공간과 경쟁한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움직이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 결과에 만족해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 중심의 새로운 현실이 "야야, 그것은 모두가 다 허구야" 라고 지적하면서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 보험사기와 하늘나라 !!
우리가 뉴스를 보면 '보험사기' 라는 것이 종종 등장하는데, 사기꾼이 일단 보험을 들어놓고, 그 보험금을 어떻게 빼먹을 것인지에 관심을 둔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피로서 용서를 받는다고 하니, 단독적이고 자립적인 인간들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가 보험을 들어놓은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보험을 들었기에 보험사기가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차에 부딪쳐서 다치면 돈을 주는 보험에 들어놓았다고 하면, 그러면 차가 다가오면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부딪친 것으로 해서 넘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마치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여기는 순간 회개를 함으로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심보와 똑같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한 강의에 비추어보게 되면, 보험사기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행동을 원인으로 해서 그 보험금을 빼먹게 되면 기쁨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보험사기라는 말이죠. 아내명의로 10억짜리 생명보험에 들었다고 하면,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미필적 고의처럼 꾸며서 죽여버리면, 그러면 10억은 자기 것이 된다는 겁니다. 보험금 때문에 아내를 죽였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와서 그것을 적발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험회사에서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물론 적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하지만 하늘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런 보험사기를 가만히 두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니 십자가의 복음이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까? 예수님 쪽에서 움직여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움직이든지, 자기 머리로서 십자가 복음을 알려고 하게 되면, 그것은 백발백중 보험사기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 막 사세요 !!
그래서 "이렇게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시겠지. 그래, 막 살자. 막 살아도 어느 목사는 다 용서해준다고 했는데, 그러니 이제 막 살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제가 왜 "막 사세요" 라고 했는고 하니, 그것은 보험사기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막 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역시 보험사기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움직이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움직이지 않는데, 자기가 답답해서 움직인다는 것이죠. 일부러 죄를 짓고 "주여, 용서해주세요" 라고, 사죄의 기쁨을 맛보려고 하는데, 보험사기와 동일한 짓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가치는 누가 움직여서 우리에게 주는고 하니, 그것이 너무나 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주님이 홀로 움직이신다는 말이죠. 기쁨이 원천이 보험사기를 기획한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의 행동과 그 결정이 아니고, 주님이 움직여서 사죄를 기쁨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공로가 주님에게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와서 주님에게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것을 철저하게 주님이 단속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보험사기라는 것은 하늘에서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노아방주와 심판 !!
그게 교재 34페이지에 나오는데, 진도가 아주 잘 나가는데 말이죠. 여기에 "방주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노아심판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방주를 만드는 것은 노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하나님 쪽에서 먼저 움직였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노아의 일가친척들이나 이웃들은 그 원인을 자꾸만 누구에게 묻습니까? 노아에게 묻는데, 즉 "당신은 왜 방주를 만듭니까? 구원을 받으려고 만듭니까?" 라고 말이죠. 그렇게 노아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방주를 만드는 것으로 여기고 시비를 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에 자기들의 삶과 사고방식이 어떻다는 겁니까? 장래에 파국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쪽에서 움직이고 준비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노아나 자기나 똑같다고 여기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위에 복음을 전하게 되면 무엇이 들통나는고 하니, "나는 평소에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라고 하는, 그것이 복음을 전하면 그대로 노출이 된다는 말이죠. "나는 지옥을 대비해서 이런 식으로 산다" 라고 하는, 그것이 상대방의 반응으로 인해서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들이 "그러면 내 쪽에 무엇을 하면 되는가?" 라고 다시 묻는다는 것은, 그들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다는 겁니까? "미리 사태를 내가 알아서, 그 대비도 내가 하겠다" 라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그들은 살아왔다는 말이죠. 지금 분위기가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ㅋㅋ)
그러니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고 해서 심판이 터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심판은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노아가 먼저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먼저 움직였다는 말이죠. 그게 새로운 관계인데, 이 새로운 관계는 그냥 가만히 있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부지런히 찾아오시는데, 즉 주님은 새로운 관계에 있는 자에게 계속해서 지시를 하신다는 겁니다.
*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인간들 !!
사람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두려움에 떨고 또한 무서워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예를 들어서, 가게에 손님이 전혀 없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월세도 내야하고 먹고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손님이 없으면 겁이 난다는 말이죠. 특히 요즘은 신종 코로나 때문에 그런 가게가 실제로 많다는 겁니다.
무섭고 두렵다는 것은 주님의 지시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인데, 그럴 때는 집에 있어도 무섭고, 가게에 나가도 무섭고, 돌아다녀도 역시나 무섭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의 지시가 없으면 자립적으로 누가 움직입니까? 자기가 움직이게 되는데, 그럴 때는 예상하고 예견하고 예단을 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라고 미리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무섭고 두렵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영생을 얻어놓고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주님을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를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를 생각하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자기 행동과 그 결정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것뿐이니 자기가 무엇을 해야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의 지시가 주어진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는 주님의 지시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의 지사가 낯설게 여겨진다면, 그러면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어떤 마음으로 봐야하느냐는 말이죠.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엘리사 등등,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겁니다.
* 주님의 움직임 !!
애굽에 내려가는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시려고 했는데, 이것은 모세가 미리 예상한 것입니까? 전혀 아닌데, 그야말로 생뚱맞은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죠.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은 자라고 간주했을 때,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 것, 토스트를 해서 잼을 발라서 먹는다고 하면, 그리고 자기 곁에 아내가 있다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누구의 움직임이고 누구의 솜씨라는 겁니까? 바로 주님의 움직이고 주님의 솜씨라는 겁니다.
노아가 살았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몹시 분주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말도 하지 않고 동행을 합니까? 계속해서 지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노아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노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그 시대에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게 지시를 받는 관계인데,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온다는 겁니다.
방주가 존재한다고 해서 심판이 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노아의 이웃들이 주장한 것이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방주의 있음, 즉 방주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굳이 그들에게 구치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있고 싶어서 있고,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6월 1일에 여기 있게 하셨는데, 그러면 있는 것만 주님이 하신 겁니까? 있으면 거기에 무엇이 따라옵니까? 주님의 지시가 현실을 뚫고 들어온다는 것이죠. 악마와 결속이 되어있는 그 관계를 뚫고 말이죠. 주님께서 다시 성령으로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악마와 한 통속인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시면,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동시에, 주님의 지시가 계속해서 다가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의 종의 자격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단독적인 '나'의 자격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란 겁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 우상적 존재 !!
여기 교재에 보면, "평소에 존재가 눈에 보이는 이유는 내가 나를 존재라고 인정하기 때문인데, 그러면 남는 문제는 '하나님이여, 이 존재를 어떻게 구원하실 겁니까?'"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나' 라고 하는 존재가 주님보다 선행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구원에 집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자기 존재를 구원하는 기능인처럼 여기에 되는데, 즉 "하나님은 당연히 나를 구원해야 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의 시다바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우상적 존재, 즉 우상이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우상을 뭐라고 합니까? 거기에서 규정하는 우상의 개념은 먼저 "있다" 라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나를 위해서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존재를 위해서 있는 신이 우상이고, 그러니 우상이라는 신들이 이미 있다는 말이죠.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 다른 신들 !!
그런데 주님은 그 있는 신들을 부정해버리는데, 그래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인간을 위한 신인데, 인간이 자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생각해서,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신은 '다른 신들' 이라는 집합에 다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 외에 다른 신이니, 이 신은 당연히 차별화가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 차별화가 무엇인고 하니,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나타나는 신인데, 그러니 결코 '나' 라는 존재를 구원하려고 나타나는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의 기획대로, 그 프로젝트대로 시행되기 위해서 나타난 신인데, 그러니 언약을 앞장세우신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가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게 곧 언약인데, 그러니 노아방주가 언약이 되려고 하면, 방주자체가 하나님의 지시가 되어야하고, 노아는 지시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다만 방주를 만들뿐이라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도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마치 노아가 묵묵히 방주를 만들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데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십자가의 의미를 만드는 작업을 하도록 계속해서 지시를 하신다는 겁니다.
* 여호와를 신봉하는 자들이 !!
여기 교재 34페이지에 야고보서 2장 19절 말씀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믿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 정도의 신학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마귀도 천국에 가든지, 그게 아니라면 마귀를 따라서 지옥에 가야한다는 겁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신다.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는 것을 마귀들은 아는데, 그러니 마귀의 부하들은 유대인들도 잘 안다는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는 누구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 생긴 십자가입니까?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핍박한 자들이 누구냐는 겁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인데, 여호와를 신봉하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보겠다고 시도해서 가장 가까이 접근한 자들인데, 그 대표가 바로 바리새인들인데,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말씀대로 살자" 라고 하는 것은, 귀신들도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상하고 예견하고 예단하지 못한 특이함이 주님의 지시로 나타날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
계속해서 교재를 보면, 여기에 출애굽기 4장 22절 말씀이 나오는데,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분명하게 '아들들'이 아닌데, 그런데 출애굽 당시 그들의 숫자가 몇 명입니까?
(출 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민수기 1장에 보면 약 60만명이라고 나오는데, 아이들과 여자들은 빼고 말이죠. 그런데 '아들'이 되면 몇 명입니까? 분명히 한 명이 아닌데, 그러면 남자만 그 숫자가 60만명인데, 그런데 그것이 한 명이 되려고 하면, 여기에는 인간의 계산법이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민 1:45)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그 종족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한 자가 이스라엘 중에서 다 계수함을 입었으니
(민 1:46)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 60만 명인가? 한 명인가?
인간은 각자 각자가 단독자이기 때문에 그 숫자가 60만 명이 나왔는데, 그런데 그 60만 명이 한 명이 되려고 하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1' 이라는 단독자 앞에서 '60만' 이라는 각각의 존재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60만에 누구를 동행시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동행시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주인공이 발생하게 되고, 즉 구심점이 발생하고, 그 나머지는 무엇인고 하니,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으로서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60만이 광야에 갔을 때, 낮에는 구름기둥,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이 피어오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60만개가 아니고 오직 하나였는데, 그러면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에게 지시하고 이끄시는 분이 60만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취합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같이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까?
하나님의 이름 때문인데, 그러니 약속의 땅은 60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러한 단독적이고 자립적인 인간은 누구라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지시를 내리고 행동을 한다면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시는데, 그때는 그 관계를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주님이 되고, 자기는 똘마니라는 겁니다. 장사가 되던 말든, 신종 코로나에 걸려서 고생을 하든 말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님이 하신 일이 합당합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전도해도 친구가 믿지 않으면, 그것도 주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시작하신 분이 주님인데, 마감도 주님이 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60만이 들어가는 곳이 약속의 땅이 아닌데, 한 명, 즉 '주의 이름'이 들어가서 영원한 곳이 되는데, 그게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주의 이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땅에 오셨다가 부활해서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 계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약속의 땅에 어디입니까? 천국인데, 그래서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늘에 있는 주의 이름은 지상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데,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구원받을 때라는 말이죠. 즉 카이로스라는 겁니다. 준비작업이 필요치 않는데, 그냥 지시에 따라서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기도만 하면 됩니까? "주여, 저에게 숙제를 내어주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 주의 이름이 동행하는 자의 증상 !!
주의 이름이 동행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동행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조금 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60만이 되어도 각자 자기 모습이, 즉 자기의 독자성과 자립성이 전부 다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삭제가 되어서 날아갈 때, 그게 바로 주의 이름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사람의 증상이라는 겁니다.
제가 '증상' 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감기에 걸릴 때, "감기여 오라" 라고 기도해서 걸린 겁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어떻게 목사님은 허리가 좀 괜찮은지 모르겠는데, "주여, 허리가 아픈 지시를 주시옵소서" 라고 해서 허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왔는데,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이 왔다는 말이죠. 그게 결과적으로는 자기의 예상을 피해서 오는 것인데,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돌발적인데, 나가서 일을 해야하는데 감기에 걸려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서 일을 나가지 못한다고 하게 되는데, 주님이 아프게 하시니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인간은 미리 예상할 수밖에 없지만 !!
방금 한 것이 어려운 이야기인데, 조금만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자기 나이가 60인데, 평균적으로 해서 90까지 간다고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나이가 70이 되면 연금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을 다 계산을 한다는 말이죠. 집을 은행에 담보로 하면 연금을 얼마를 주는지, 그런 것을 알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견이고 예상이고 예단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동행, 즉 성령이 임하게 되면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첫째 "이미 죽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죠. 90까지 갈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둘째는 "이미 살아남았다" 라는 것인데, "이미 살았다" 라는 게 아니고 말이죠. 죽었는데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즉 주님이 살게 하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아직까지 성령이 임해서 사용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 주님이 선택을 하셨다는 겁니다. 주님의 그렇게 결정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살아있다고 해서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은 주께서 쓰시고자 해서 살아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 관 속에서 지시를 받는 삶 !!
이런 주님의 지시가 있으면 두려움과 무서움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가 무슨 걱정을 하고 말고 하느냐는 말이죠. 우리도 관 속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한 번 해볼까요? (ㅋㅋ) 이미 죽은 자는 어떤 기대와 희망과 같은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에게서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가라고 연락이 오면, 관에서 일어나서 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출애굽으로 말하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시켰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동창생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주님이 그렇게 스케줄을 짜주셨다는 말이죠.
그럴 때 그게 곧 기쁨인데, 왜냐하면 집에 90까지 계속해서 있으면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걱정과 근심은 두려움에서 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주님이 할 일을 주셨다는 겁니다. 자기 몸이 움직이는 것도 주님의 일인데, 심장이 뛰고 폐가 숨을 쉬는 것도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지시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돌이켜 보면 주님이 시켰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그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성령이 임해서 주님과 새로운 관계가 임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살아있는 주님께서 우리의 몸을 통해서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소멸되어도 되는데 여전히 살게 하신 것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인 줄 압니다. 그런 용도로서, 주님의 다 다루심, 바로 그 새언약의 현실성을, 허구와 같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6,09 오후 6시에 마침.
여보, 관 속에서 나와서 식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