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나와 죄(창세기속의 그리스도)

아빠와 함께 2020. 6. 7. 12:06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8 - 나와 죄

20,05,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잃어버린 상태, 죽은 상태, 그런데 !!

오늘은 교재 25페이지를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 본문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뜻을 찾을 수 있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3가지를 뽑아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잃어버린 상태' 라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죽은 상태' 라는 겁니다. 이 시간에 제가 이 본문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과연 이것을 인정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현재 자기 자신이 잃어버린 상태이고, 또한 죽은 상태라는 것인데, 과연 이것에 대해서 동의를 과연 하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할 수 있는 안목이 우리에게 장착이 되어있느냐는 것이죠. 즉 자기가 잃어버린 상태이고, 또한 죽은 상태임을 인정할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는 말이죠.

* 나는 안 되고, 예수님만 되고 !!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세 번째인데, 우리는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잃어버린 상태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고, 죽은 상태를 죽지 않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잃어버리지 않게, 또한 죽지 않게 하는데 있어서, 여기에 우리의 능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자리에 누가 들어갑니까? 예수님이 들어가시는데, 그러면 "나는 안 되고" 라는 것인데,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반드시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안 되고" 라는 것인데, 그런 안목이 과연 우리에게 지금 현재 있느냐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인데, 현재 자기를 죽은 상태로 보는 것 자체가 참으로 특이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지금 자기가 이렇게 숨을 쉬고 걸어다니고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죽은 자로 보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도, 물론 납치를 당했다든지 하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고향에서 태어나서 가족을 이루고 일가친척끼리 모여서 살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잃어버린 상태냐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나' 라고 하는 것, 즉 자아인데, 그 자아의 시작점이 잃어버린 상태로부터 구성되고, 또한 죽은 상태에서 이 자아가 형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1번과 2번도 중요한데, 그것이 전제이고 환경이니 말이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3번인데, 즉 "나는 안 되고 예수님만 된다" 라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을 그 말씀을 주실 때 제자들도 몰랐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 뒤돌아보면서, 비로소 "아하, 그렇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없이는 이런 안목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승천과 성령 !!

그러면 성령이 미리 오셔서 가르쳐주시면 되는데, 그런데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왜 그런 절차를 겪고 난 다음에 비로소 성령이 오시느냐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 즉 십자가를 지시고, 그래서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으면 성령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이전에도 "성령을 받아라" 라고 하실 수 있는데, 그런데 왜 승천을 하고 난 다음에 성령이 오시는고 하니, 이 승천이 바로 주의 자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의 자리에 앉아야 비로소 나올 수 있는 성령, 진행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곧 자리의 이동인데, 즉 하늘에 있는 자리가 확대가 되어서 그 자리에 자기 백성을 포함시켜주는 것, 그것이 곧 성령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자리가 형성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십자가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은 것인데, 즉 사람의 자리에서 배척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람의 자리에서 배척을 받았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성령을 받은 사람은 기존의 자기 자리에서 이미 어느 자리로 옮기게 됩니까? 그것은 에베소서 2장 6절의 말씀처럼,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그렇게 하늘에 앉히게 된다는 겁니다.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렇게 하늘에 앉힌 바가 된 상태에서 다시 자기 자리를 보니까, "아하, 나는 잃어버린 상태였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자기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였음을 알게 되는데, 과거에 그러했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면 지금 현재는 어떻다는 겁니까?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다는 말이죠.

* 아하, 나는 죽은 상태였구나 !!

다시 말해서, "나는 잃어버린 상태였구나. 죽은 상태였구나. 내가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었구나.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손을 들고 나간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었구나. 50년 동안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그런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까?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 되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를 가던 기도를 하던 그 어떤 현상이 있던지 간에, 그러한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현상을 통해서 주님 스스로 우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이죠. 이것을 두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셨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의 과정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말이죠.

* 몸, 그 다음이 '나' !!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을 이야기해보면, 인간은 '나' 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나'가 있기 이전에 먼저 있는 것이 몸인데, 즉 신체가 있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에는 '나' 라는 것이 없는데, 몇 개월이 지나면 생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체가 먼저 있고, 갓난아이의 '나' 라는 것은 엄마가 대신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힘든다는 말이죠. 곧 엄마가 없으면 자기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의 몸에서 나와도 처음 몇 개월, 아니 몇 년 동안은 정신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고 결합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점점 자라면서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러면서 엄마 몸과 자기 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가 시장에 가고 없으면 우는데, 그 이유는 자기 몸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6개월에서 18개월이 지나고 나면 자기 몸과 엄마 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 자아가 형성된다는 겁니다. 즉 정신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 이전까지는 동물의 단계인데, 이것을 본능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본능의 단계에서는 무엇이 크게 작용하는고 하는고 하니, 그것이 '쾌(快)' 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유괘나 상쾌도 있지만 불쾌도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이는 배가 고프면 젖을 달라고 본능적으로 운다는 겁니다. 오줌을 싸서 찜찜하면 역시 우는데, 즉 바깥을 향해서 몸의 자극을 표현한다는 말이죠.

* 너, 잘못했지 !!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는 선악의식이 없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의식이 있어야지 선악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엄마가 "너, 잘못했지" 라고 꾸중을 한다면, 그것은 '너' 라고 하는 먼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기에게 엄마가 말을 건넨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이죠.

자기가 잃어버린 상태, 그리고 죽은 상태인 것을 모르고, 그야말로 망나니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매일같이 모여서 술과 여자 파티에 마약이나 하면서 말이죠. 물론 영화에는 종종 나오지만 실제로는 드문데, 아닌가요? 아무튼 재벌3세가 그렇게 한다고 가정을 해보자는 겁니다.

천하에 위아래도 없고 그냥 자기 욕망에만 사로잡혀서 마구 살아가는 20대의 재벌3세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을 걸어온다고 하면, 즉 성령이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재벌3세는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이 '나' 라는 것이 단독적인 '나'가 아니고, '나' 이전에 '나'가 있게 하신 어떤 다른 분이 있다는 말이죠.

* 나는 주님의 그것(IT)이 된다 !!

그러면 '나' 라는 것은 '나'가 아닌 '그분'이 '나' 라고 할 수 있고, '나'는 '그분' 앞에서 'IT', 즉 '그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주님의 그것이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상실하게 되는 겁니까? 그동안 꾸준히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 그것이 주님이 말을 건네올 때 상실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창세기 3장인데, 즉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때 그들이 하나님이 찾아오기를 고대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말을 걸어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어떻게 됩니까? 끊어진 관계가 연결이 된다는 겁니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는 것을 제가 지금 구약적으로 미리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이런 것을 영과 육과 혼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영과 육과 혼은 '나' 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온 철학적인 개념에 불과한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즉 '나'의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 나의 스토리, 그런데 !!

여기서 상식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잘 모르고 있는 상식이지 싶은데 말이죠. '나' 라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서 '나의 스토리'가 생긴다는 겁니다. 즉 '나의 이야기', '나의 역사'가 생긴다는 말이죠. 이것이 '나' 라는 주체의 확장인데, '나' 라는 것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와 이야기를 할 때는, 반드시 '나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을 흔히 수다라고 하는데(ㅋㅋ), 그런데 여기서 주님을 말을 건넸다고 한다면, 즉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신다면, 그러면 '나의 스토리'에 무엇이 침투하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주님이 '나'가 되는데, 즉 주님이 '나의 스토리'에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 아줌마, 이미 보상금을 다 주었잖아요 !!

예를 들어서, 어떤 마을이 철거에 들어갔는데, 그래서 토지보상금도 다 받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포크레인이 와서 집을 부수려고 하는데,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이 집은 안 돼. 내가 이 집을 짓는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그리고 내가 이 집을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몰라. 나의 땀방울이 여기에 다 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아주머니도 보상금을 받았는데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철거반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줌마, 이미 보상금을 다 주었잖아요" 라고 하는데, 즉 값을 치렀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아줌마, 당신 스토리에 대한 대가를 이미 치렀잖아요" 라는 것인데, 즉 "당신이 이 집을 얼마나 공들여서 가꾸었고, 그리고 아이를 낳아서 키웠고,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 그 값을 이미 다 치렀잖아요"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이미 값을 주고 샀다는 말이죠. 누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러면 성도의 입에서는 누구의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까?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게 주님 이야기가 나오면 자기 이야기는 그만 빠집니까? 그게 아니고, 조금 전에 이야기한 1번과 2번과 3번이 같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 이야기는 말씀 이야기, 즉 하나님의 계시인데, 그러면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포함이 된다는 겁니까?

* 예수의 증인 !!

"나는 잘났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동안 몰랐는데, 사실 나는 잃어버린 상태였고,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나는 죽은 상태였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바로 그게 '예수님 스토리'에 담겨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힘으로는 말씀을 도저히 이룰 수 없었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가능하게 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통해서 나오게 되는데, 물론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어서 말이죠.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의 증인'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정말로 쉬운 이야기 !!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전혀 어렵지 않은데, 정말로 쉬운 이야기라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서, '나' 라는 것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말씀이,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6장 39절의 그 말씀이 주인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고 하면, 자기가 주인공이었던 자리인데, 그런데 이제는 누가 값을 주고 그 자리를 독차지하게 되었는고 하니, "예수님이 피를 흘려서 우리를 살렸다" 라고 하는, 그러니 말씀 자체가 주인공이 된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나의 스토리'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아까 말한 불쾌와 유쾌를 다시 해보겠는데, 아이의 경우에 이렇게 몸이 있는데 그때는 본능밖에 없다는 것이죠. 마치 철없는 재벌3세처럼 말이죠. 물론 실제로는 재발3세는 유학도 가고 공부도 엄청 많이 하는데, 드라마니까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 변호사를 보고 반말을 하는 놈도 있기는 있는데, 얼마 전에 뉴스에도 나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재벌3세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을 건넸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하면, "목사님, 우리는 그런 재벌3세가 아닙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우리도 역시 그런 재벌이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 유쾌, 상쾌, 불쾌 !!

그러면 그런 재벌3세가 우리와 차이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보고 "이제 재벌3세가 되어라" 라고 한다면, "아버지, 제발 그런 저주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라고 하면서 기분이 나빠할까요? 그게 아니면 "아버지가 드디어 나를 인정해주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좋아할까요?

아들은 당연히 좋아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욕을 하면도 따라간다는 겁니다. 재벌3세를 욕하면서도 자기는 은근히 그러한 재벌3세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인데, 주님께서 말을 건네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동물과도 다를 바가 없는데, 유쾌, 상쾌, 불쾌, 그것만을 따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는 겁니다. 소망하고 추구한다는 것이 그렇다는 말이죠.

*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서받고 !!

사람들이 성령이 없는 세계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맞는 말인지 여러분이 측정해보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세계는 용서를 해야하고, 그리고 용서를 받을 만하면 용서를 받아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까지는 기억이 나지요? 그러면 이게 성경 안에서 맞는 말입니까? 물론 틀렸다는 말이죠.

그 어느 인간도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인간도 역시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기껏 용서하고 용서를 받겠다는 것, 그게 최종적으로 노리고 있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정당하다. 나는 의롭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주님이 말을 건네지 않는 인간세계에서는, 전부가 다 자기가 신이 되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는 말이죠.

이게 인간세계의 한계인데, 용서받고 용서하고, 그렇다는 겁니다. 518도 역시 그러한데, 사과하라는 것인데, 그러면 용서해주겠다는 말이죠. 그것이 맞고 틀리고 문제가 아니고,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세계에 갇혀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고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잃어버린 자이고,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왜 잃어버린 자이고 죽은 자인지, 그 이유를 안다고 하면 어떻게 나와야 합니까? 누군가가 자기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하면, 우리는 사양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저는 당신에게 용서받을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주님에게 한 짓거리가 있는데, 그러니 저에게 용서라는 말은 아예 하지 마세요"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주님의 스토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 넘겨온 사람의 경우에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업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신 것이란 말이죠.

* 주께서 주에게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은 누구를 부르는고 하니,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찾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만 찾는데, 우리 이름은 찾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집어넣어서, 그 이름을 본인 스스로 부르신다는 겁니다. 즉 주께서 주를 부른다는 것이죠. 그것이 로마서 1장 36절에 나오는데, 즉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 라는 겁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니 주님은 우리를 그만 제쳐버리는데, 우리는 거기에 끼들면 안 된다는 말이죠. 다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올 때는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옵니까?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자리가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즉 성령이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어떻게 됩니까? 자기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우리가, 자기 잘남, 자기 우수함, 그것밖에는 말할 줄 모르던 우리가, 이제는 요한복음 6장 39절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이야기가, 즉 말씀 자체가 주님에 의해서 바깥으로 방출된다는 겁니다.

* 과연 남 탓을 할 수 있는가?

사람이 얼마나 철이 없는지 모르는데, 다들 누구 탓을 하는고 하니, 남의 탓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남 속에 누가 포함되는고 하니, 주님이 포함된다는 말이죠. 물론 잘 되면 자기 탓인데, 잘못되면 무조건 남의 탓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당연히 잘되어야하기 때문에, 잘 되는 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잘 되도 감사가 없고, 잘못 되도 감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을 보니, 이게 과연 남의 탓이 될 수 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악마 탓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자체완결' 인데, 혹은 자체종결, 자체완성,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이게 곧 기쁨인데, 자기가 자기 몸에 손을 대지 않아도, 주님이 먼저 찾아와서 말을 건넴으로서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을 자기 안에 완성시켰다는 사실,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과 감사를 주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일을 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악마가 설친다고 해서 미완성이나 미완료가 되는 것이 전혀 아닌데, 우리는 다만 자리만 내어주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 제발 김 영감 집을 박살내주세요 !!

철거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보상이 다 끝난 재개발 구역에 포크레인이 와서 집들을 때리고 부수고 그야말로 마구 마구 박살을 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철거반장을 찾아와서는 봉투에 10만원을 찔러서 넣어주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반장님, 이 이층집을 먼저 완전히 박살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작업반장이 그 이유를 묻자, "제가 여기 이층 집에 세를 들어서 살았는데, 이 집의 주인이던 김 영감이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좀 떠든다고 심심하면 찾아와서 윽박지르고, 하루도 편안히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감은 작년에 죽고 이 집만 덜렁 남았는데, 얼른 박살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작업반장은 봉투를 슬쩍 챙기면서 "예, 제가 완결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이미 값을 치렀다고 한다면, 그 나머지는 누구에게 맡기면 됩니까? 주님에게 맡기면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의하면, 주님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고 했는데, 즉 실패나 오류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지연이나 지체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죠. 주님은 일을 아주 깔끔하게 처리를 하시는데, 김 영감의 흔적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린다는 겁니다.

* 피가 아니면 나가주세요 !!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값이 무엇입니까? 아까 본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라고 하는데, 그 값이 바로 '피 값'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하는 것은, "피를 낼 수 없는 위인이라고 하면, 그런 너는 저쪽에 그만 나가 있어라. 좀 꺼져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인데, 그런 살과 피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하면 그만 빠지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 나대지 말라는 것이죠. 여기에는 돈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피를 낼 수 없다고 하면 빠져있으라는 겁니다.

* 포스코의 용광로, 그리고 작업 인부들 !!

포항에 있는 포항제철소에 가면, 초대형 용광로에서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철광석을 녹여서, 거기에서 철을 뽑아낸다는 말이죠. 그 온도가 무려 1500도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때 작업 인부들이 용광로 안에 있습니까? 바깥에 있습니까? 바깥에 나와서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관람이고 관찰인데, 물론 그곳도 너무 뜨거워서 일반인들은 들어가지도 못하지만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나' 대신에 그 자리에 주님이 들어가고, '너'는 하나님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일임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철을 만드는 일은 두 분이 하시는데, 우리는 여기 바깥에 빠져있는데, 그렇게 지켜보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주님에게 하시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자를 쓰고 작업복을 입고 지켜보는 작업을 하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야, 이번 주말에 낚시를 가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는 지금 바쁘다" 라고 하는데, 무엇을 쳐다본다고 바쁘다는 겁니까? 주께서 주에게 일을 하시는데, 즉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일을 하시는데, 그런데 자기는 무엇인고 하니, 성령에 의해서 관심사가 여기에 꽂히게 되니, 졸지에 그게 바쁜 일이 된다는 겁니다.

* 사도에게서는 예수님 이야기만 !!

그러면 낚시와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인데, 바로 이 역할을 누가 합니까? 사도들이 하고 있다는 말이죠. 사도는 성령을 받은 자들인데, 그래서 마귀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같은 성령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또 사도를 구경하면 됩니까? 그게 아니고, 같은 성령을 받았으니 그 사도의 자리에 우리가 같이 합세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사도의 자리, 즉 거기에 있는 사도에게 마이크를 대면 자기 이야기가 나옵니까? 예수님 이야기가 나옵니까? 사도에게서는 자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예수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가 하는 이야기를 또 따로 구경하게 된다면, 그 일에 가담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냥 구경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으로 한 마음이 되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게 된다는 말이죠. 사도의 관심사에 우리도 같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사도는 거기에 관심을 가져라. 나는 지금 내 가게를 운영해야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취미가 되고 마는데, 자기의 관심사는 따로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주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제가 사도가 관람한다고 했는데, 물론 그 말이 맞는데, 그런데 실제로 관찰하고 관람하는 일이 포스코에서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사도에게 삶의 인생길을 친히 인도하시고, 그 환경을 조성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어디로 갑니까? 로마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 성령께서 침범하는 인생 !!

그러니 단순히 구경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사도의 인생을 침범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의 하시는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도의 인생을 조성하시는데, 성령을 받은 자는 모두가 다 그러하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말이죠.

따라서 우리가 "나는 사도처럼 성경의 전문가가 아니야.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어" 라고 하게 된다면, 그러면 남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사도들의 삶의 환경을 조성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삶의 환경을 사도와 똑같이 만드신다는 말이죠. 그게 성도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농사를 짓는다든지 결혼해서 주부가 되든지 간에, 그리고 텃밭을 가꾸는 것도 누가 조성한 겁니까? 주님이 하셨다는 말이죠. 사도가 그렇게 주님이 조성한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일을 그때그때 생중계를 하듯이 파악한 것처럼, 성령을 받은 우리나 사도나 그 입장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 목욕탕에 가더라도 !!

요즘 코로나 때문에 목욕탕에 가는 것도 겁이 나는데, 그러면 목욕탕에 가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까? 자기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인데, 몸에서 때가 나오게 해서 목욕탕에 밀어 넣는다는 말이죠. 즉 아버지가 아들에게 시킨 일이라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우나실에 가서 5분 정도 탕에 들어앉아 있으면 덥고 짜증이 나는데, 그러면 우리는 5분이 지나면 문을 열고 시원한 바깥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옥은 어떻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닫으면 열 자가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재벌3세도 안 되는데, 아무리 돈을 써도 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모가 빌고 아내가 사정을 해도 안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미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들어갈 필요가 없는데, 이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로서 지옥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 지옥에 갇힌 인간들 !!

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자들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서 문이 열리지 않는 사우나, 즉 지옥에 갇혔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유쾌와 불쾌에 따라서, 때로는 골프를 치면서, 때로는 맛집에 가서 음식을 먹으면서 자기를 달래고 하는데, 하지만 그 영원히 뜨거운 사우나실에서 나오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것이 복이 아닐 수가 없는데,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주시는 것,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겁니다. 즉 "너는 잃어버린 자다. 너는 죽은 자다" 라고, 말씀이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에게 건너오는 것, 그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인생이 좀 꼬였다고 해서 짜증내지 말라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를 목욕탕에 보내면서 예수 자신이 생각나도록 만드는데,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생각나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모든 일이 주님과 무관한 것이 전혀 아닌데,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이 의도한 것이라는 겁니다.

* 벌써 시작된 천국생활 !!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마다 당부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천국생활을 벌써 시작합시다" 라는 것인데,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벌써 시작하자는 말이죠. 물론 이미도 좋지만, 벌써 시작하자는 겁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6장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이미 벌써 하늘에 앉혔다는 말이죠.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니 죽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요령을 부릴 생각을 하지말고, 벌써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 가더라도 어떻다는 겁니까? 교회가 곧 지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교회가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교회에 묶여서 그게 천국인 줄로 알고 있다는 말이죠. 빠져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집단이라는 것이죠. 물론 그것도 주님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그러한데 말이죠.

* 천국생활은 지옥생활은 아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물어보겠는데, 천국생활을 벌써 시작했다고 하면, 그러면 천국은 무엇은 아니란 겁니까? 천국을 "이것이 천국이다" 라고 해도 되지만, "무엇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천국내용이 확 다가오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천국생활은 지옥생활은 아니란 말이죠.

듣고 보니 정답이 좀 허망합니까? 그렇게 되면 "지옥생활을 벌써 시작하지 말고 벌써 청산하자"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천국생활을 벌써 시작합시다" 라는 게 1번이고, 2번은 "천국생활은 지옥생활이 아니다" 라는 것이고, 그러면 3번은 무엇인고 하니, 지옥생활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옥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 지옥생활을 누구 때문에 하고 있다는 겁니까? 조금 전에 집사님이 제가 묻기도 전에 이미 답변을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지옥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하고,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옥생활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을까봐 겁이 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요한복음 6장 39절에는 그런 것이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자기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누가 자기를 험담할까 싶고, 그런 게 짜증이 난다는 겁니다. 자기만 없으면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지탱하려고 하니 문제라는 말이죠. 자기는 자기를 지키고 싶은데, 그게 곧 우상인데, 그러나 남들이 호응을 해주지 않으니, 천국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갑자기 그게 지옥생활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제가 할 말이 많은데, 그것을 이 교재가 대신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천국생활을 하고 싶지만 그것이 그만 지옥생활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 원인은 바로 '나' 때문인데, 그러면 그렇게 '나' 때문이라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실제로 한 번 찾아보자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2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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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음부의 권세는 교회를 이기지를 못합니다.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교회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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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교회에서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

그러면 우리가 교회의 주차장에 가봅시다. 과연 지옥권세를 이긴 분의 힘이 몰려옵니까? 그게 아닌데, 그러면 본당 현관문을 열어봅시다. 그러면 몰려옵니까? 그러면 그 중요하다는 성만찬을 하면 몰려옵니까? 역시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마지막으로 강단으로 가봅시다. 거기에 가면 몰려옵니까?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건물로서의 교회당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규정을 했는데,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고 말이죠.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나와야 교회인데, 하지만 아무리 교회당을 많이 지어도, 거기서 그런 힘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 !!

이제 교제 28페이지에 사도행전 5장 말씀이 나오는데, 교인들은 이 본문만 보면 기가 죽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여기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오는데, 그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다는 겁니다. 헌금의 반을 감췄다가 걸려서, "네가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임이구나" 라고 해서 그만 죽었다는 말이죠.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 아하, 성령이 계시는구나 !!

그러니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땅을 팔지 않던지, 또한 팔더라도 헌금을 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괜히 헌금을 한다고 죽었으니, 어떻게 보면 오지랖을 떨다가 죽었다는 말이죠. 표현이 좀 지나칩니까?

그러면 성령께서 죽이실 때 심장부터 멈추게 했습니까? 그게 아니면 두뇌부터 멈추게 했습니까?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냥 '죽였다' 라는 사건에 같이 말리면 되는 것일 뿐인데, 성령께서 '탁' 치니까 그때 바로 숨을 거두었는지, 치고 난 다음에 2.5초 뒤에 숨을 거뒀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우리가 알 필요도 다는 말이죠.

그렇게 부부가 죽는 것보다도,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아하, 성령이 계시는구나. 성령이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죽이시는구나" 라고 하는, 그것만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죽어 나가봐야 아는 것, 그게 교회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천국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곧 '나' 때문이다" 라고 했을 때, 하지만 사람들이 이게 무슨 말인지, 그게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 천국에 가면 좋은데, 그런데 왜 나 때문에 지옥생활을 한다고 우기는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나 여기 있음'과 '성령님 여기 있음'의 충돌 !!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을 자기가 의식하는 순간 천국생활은 그만 날아가 버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 '나'의 자리에 성령님이 계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무엇과 무엇의 충돌인고 하니, '나 여기 있음'과 '성령님 여기 있음'의 충돌이라는 겁니다. 그게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하는 그 의식자체가, 그게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인생을 불행하기 만들고 슬프게 만들고, 그리고 항상 불안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게 아니면, "성령님이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성령님이 여기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아까 성령님은 처소라고 했는데, 즉 예수님과 아버지가 함께 계시는 자리로서 성령님이 제공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봐야 합니까?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고, 그게 예수님 스토리인데, 그리고 아버지가 여기에 계시고, 물론 자기도 여기에 있기는 있지만, 하지만 자기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런 정도로 그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여기에 계신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포스코의 경우에, 철광석이 여기에 있고 용광로가 여기에 있고, 바로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야 주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 죄란, 죄라고 인식하는 순간 등장한다 !!

이제부터 오늘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하겠는데, 일단 문장을 하나 쓰겠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르는데, 즉 "죄란 것은 죄라고 인식하면서 등장한다" 라는 겁니다. 역시 어렵지요? 이와 같은 의미로서 "망한다는 것은, 망한다는 의식이 발생될 때 이미 망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서 누가 이것을 한 번 설명해보세요.

* 답변 - 도적이 도적질을 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그런데 그렇게 도적질을 하는 순간 "아하, 이것이 잘못이구나" 라는 것을 아는,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거의 정답인데, 제가 물개박수를 쳐드리겠습니다(짝짝짝). 즉 자기가 도적을 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그런데 "도적질이 나쁜 짓이다" 라고 느끼는 순간, 드디어 자기 코앞에 죄가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이 거짓말인고 하니, "죄이기 때문에 하지 않아야지"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이죠.

* 쩝쩝거리지 말고 먹어라 !!

예를 들어서, 밥을 먹을 때 옆에서 "쩝쩝거리지 말고 먹어라"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기는 배가 너무 고파서 밥을 허겁지겁 먹었는데, 그렇게 밥을 먹는데 있어서는 전혀 죄의식이 생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가 불러서 밥을 먹는데, 그때는 배가 고플 때만큼의 쾌감은 없다는 말이죠.

그래도 끼니때가 되어서 먹었는데, 그런데 그때 아내가 "김치를 너무 뒤적거리지 말고 드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뒤적거림이 있어야지 무엇이 발생된다는 겁니까? "뒤적거리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나는 괜찮은 인간이야 !!

그런데 인간은 뭐라고 우기는고 하니,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니고, 칼을 가지고 사람을 찔러야 죄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자기는 찔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죄를 예방할 정도로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티낼 때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평소에 라면을 먹을 때, 직각으로 먹든지 비스듬하게 먹든지, 그런 것은 죄가 아니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라면을 먹을 때 흘리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이렇게 직각으로 먹어야 흘리지 않겠구나" 라고 여기는 순간, 그동안 라면을 그렇게 직각으로 먹지 않고 대충 먹었던 것이 무엇으로 등장합니까? 죄로 등장한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완벽하지 못한 것이 죄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김칫국물을 흘린 것, 음식을 먹으면서 쩝쩝 소리를 내는 것, 그런 것이 죄라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아이가 이제 나이 80이 되었는데도, 주위에서 그 누구도 음식을 먹을 때 흘리거나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하면, 자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타인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밥을 먹는데 있어서 소리는 내는데, 드디어 다른 사람이 "나이 80이 되어서 아직도 소리는 내나?"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순간 그 부분에 대해서 최초로 죄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즉 밥을 먹을 때 쩝쩝거리는 것이 죄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죠.

* 나는 왜 지옥행인가?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잃어버린 자이고 또한 죽은 자인데, 그런데 자기가 느끼기에는 어떻다는 겁니까? 누가 말을 건네주기 전까지는 자기는 죄를 모르는데, 아니 그 정도가 아니고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란 것을 의식하기 이전까지는 죄가 아닌데, 지금 제가 "나는 왜 지옥행인가?"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망했다고 하는 순간 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다들 같은 의미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주식을 한다면 대박이 났을 때와 쪽박이 났을 때를 같이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미리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대박이 나도 지옥행인데, 왜냐하면 대박이 나도 쪽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미 그 쪽박에 접선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면서 "저 사람이 나를 도와줄까? 망하게 할까?" 라고 했을 때, "도와줄까? 그저 그럴까?" 라는 것은 없는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나를 도와줄까?" 라는 선과 "나를 망하게 할까?" 라는 악이 반드시 결부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즉 "저 사람이 나를 도와줄까? 망하게 할까?" 라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망했다는 겁니다.

* 선악구조에서 생명나무로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를 선악구조에서 생명나무로 빼내주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분명히 '살리시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 현재의 선악구조에 있는 상태는 산 상태가 아니고 죽은 상태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시편에 보면 "주님이 우리를 살리시리라" 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이 '살린다' 라는 것이 참으로 좋은 말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좋은 말이 좋은 말이 되려고 하면, 지금 우리는 자기가 죽은 상태라는 것을 깊숙이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온 몸으로 말이죠.

(시 85:6)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쉽게 말해서, 먼저 지옥생활이 되어야 천국생활에 대해서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선악구조에서 생명나무로 빼주는 것을 두고 '살린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그 선악구조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면 그야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 나는 선악구조를 모릅니다 !!

이게 너무 어려워서 적어보겠는데, 일단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나는 선악구조를 모릅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선악구조를 벗어난 것입니까? 아닙니까?" 라는 것인데, 결코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앞에 '나' 라는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무엇을 이용하시는고 하니, 먼저 우리가 무엇으로 엮어져 있다는 겁니까? 우리는 이미 선악구조에 엮어져 있는데, 그것을 주님은 충분히 활용하신다는 것이죠.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선악구조를 말이죠.

그래서 "나는 이제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알고, 이미 구원을 받았고 하늘에 앉혔어" 라고 하더라도, 그 실상은 "마음은 그렇게 안 돼. 이것은 죄야" 라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합격이 되고 난 뒤에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주님의 합격이 좋은지, 그것을 연습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다가보니 거기에 누가 끼어 들었는고 하니, 벌써 천국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런데 남들 때문에 불안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남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미 선악구조에 엮여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지, 그런데 !!

선과 악은 '나' 라는 의식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이 여기에 있다고 여기면, "그러면 내가 잘 해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한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내가 이런 짓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아"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선악구조이기 때문에 "내가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라고 하는 것만 아니라, 그게 선이라고 하면, 악은 "내가 바르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아" 라고 것인데, 그것까지 같이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없던 죄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죄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기에게서 나왔는데, 그러니 자기는 죄인이 된다는 말이죠. 천국생활을 하려고 하다가 또 다시 죄에 갇힌 모습이 되고 마는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게 하나의 연습이라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연습을 계속해서 한다는 말이죠.

* 그 해결책은 바로 '사랑' !!

그러면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야 하는데, 천국생활을 하려면 지옥생활을 청산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지옥생활을 계속해서 하게 되니까, 상당히 안타깝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해결책이 무엇인고 하니, 해결책이라는 표현은 제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데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사랑' 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총각이 결혼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물론 선악구조에 매여있는데 말이죠. 뭐라고 기도하는고 하니, "하나님, 이런 이런 조건을 가진 여자와 결혼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선교단체에서 배운 대로 구체적으로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손예진 타입을 좋아하고, 돈은 많이는 필요가 없고 송혜교 정도만 있으면 되고, 그리고 우리 집안은 대대로 건강이 좋지 않은데, 그러니 튼튼하고 건강한 DNA를 가졌으면 좋겠고, 그리고 저는 자라면서 엄마아빠가 싸우는 것을 너무 많이 봤는데 남편 말을 잘 듣는 여자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요리도 잘했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

그렇게 하고 나서 선을 보러 나가는데, 그러면서 여기서 불가능성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조건을 그렇게 제법 달았는데, 그런데 여자를 보는 순간 그 모든 조건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말이죠. 그저 좋은데, 혹시 장로님은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ㅋㅋ)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빨려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조건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자아는 선과 악으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만약에 하나님께서 "요리는 못하지만 몸은 건강하다. 오케이?" 라고 하시면, "그래도 음식을 잘해야 하는데, 밥은 먹어야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 그대는 나의 여신 !!

그런데 딱 보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사랑에 빠지고 마는데, 즉 "Fall in Love" 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면 그게 해결책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가 의식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할렐루야'가 나오는데, 실제로 이런 노래가 있다는 겁니다. 팝송에 보면, "할렐루야,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지네"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할렐루야가 나오는 순간 자기 스토리, 즉 자기를 잘 되게 하는 모든 조건은 일거에 모두 다 사라지고, "그대는 나의 여신!" 이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신이라는 것은 신인데, 그렇게 신이 되어버리면 자기는 그 앞에서 기꺼이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는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10절을 연상시키는데 말이죠.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계명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를 믿어라" 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 라는 것인데, 그것은 곧 자기를 소멸시킨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인데, 그러니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즉 주님에게 반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자기 관리, 자기 챙기기, 그런 것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없으면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고 하니,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말이죠. 두려움은 곧 심판인데, 그 심판은 선과 악이라는 겁니다.

* 죽으면 죽으리라 !!

심판이라는 것은, "네가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아. 네 인생을 조졌어" 라는 것인데, 즉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에스더가 뭐라고 합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지금 이게 무엇인고 하니, "주여, 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더 4:15)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제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목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저들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소서" 라는, 그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벌써 천국생활을 시작하게 하소서" 라는 것인데, 또 다른 말로 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대해서 선악으로 자기를 관리하지 말고 맡기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누구에게 용서를 받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데, 그런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다는 겁니다. "나는 누구를 용서해주지 않아서 그게 짐이다" 라고, 그런 소리를 하지말고, "주어진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소서" 라고, 즉 주어진 상황을 자기가 채점이나 심사를 하지 않게 해달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 !!

그러니 성도의 기도제목은 하나여야 하는데,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 라고 말이죠. 그게 아니라, "취직이 되게 하소서. 돈을 잘 벌게 하소서. 몸이 건강하게 하소서"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간에, 주님에게 반한 인생이 되도록 해달라고, 그런 기도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즉 주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밥상을 들고 가다가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져도, 그것을 두고 "그래서 내가 좀 천천히 가라고 했잖아요"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ㅋㅋ). 숟가락이 떨어지면 악이고 그대로 있으면 선이라고 하는 선악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일 수도 있지만, 이게 어차피 선악생활에 대한 연습인데, 이미 우리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값을 주고 샀기에 말이죠.

선악에서 벗어난 대가가 돈이 아니라 피로서 값을 치렀기 때문에, 물론 우리는 그 피를 통과하지 못하고 주님이 피를 앞장세워서, 즉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피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5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주님이 주시는 것이 피와 살이라는 겁니다.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우리는 주님에게 다가갈 수 없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그게 바로 피와 살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주님에게 갈 수 없다는 증거가 곧 주님의 피와 살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주님이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주신다는 것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을 보겠는데, 굳이 이 구절이 아니라 그 어떤 성경구절을 해도 괜찮은데, 어차피 연습이라는 말이죠. 요한계시록 17장 3절과 4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계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 17: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 우리는 이 세상을 잘 몰라 !!

우리가 이 본문을 왜 읽었는고 하니,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서 살아갑니까? 우리는 다만 자기 삶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만 골라서 뽑아낸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대하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취직을 했다고 하면, 거기서 일을 하고 월급을 받으면 되는데,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다만 그 회사가 잘 되어서 월급이 올랐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죠. 미국의 연방화폐국이 어떻고 하는 것까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생존에 필요하고, 그리고 교회에 와서도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하는 것은 필요가 없고, 자기만 천국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생존하고, 생존한 그 목숨이 천국까지 계속해서 연장되기를 바라는데,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죠.

* 참람된 이름들 !!

그런데 여기 3절에 보면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라고 하는데, 참람한 이름들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모독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모욕하면 그게 그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취직을 해서 돈 벌기에 바빴는데, 하지만 이 세상 전체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에 대한 모독인데, 아주 짓밟아버린다는 말이죠. 이것이 이 세상에서 왕왕 울리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존과 구원만 챙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와서 예수만 믿으면 되고, 취직을 해서 월급을 받으면 되고, 그리고 아이를 잘 키우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밖에 모르는데, 이 세상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그런데 제가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사랑이 오게 되면 그 관심사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누구에게 있게 된다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그 관심이 간다는 겁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까? 무관심하게 됩니까? 자꾸만 전화를 하고 편지를 보내면서, 알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아침에는 무엇을 먹었습니까? 잠을 잘 잤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궁금해진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데, 그 이전에는 자기가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해서 월급을 받고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었지만 말이죠.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주님이 얼마나 크게 일을 벌리셨는지, 그게 궁금해진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나이가 이제 모두들 들었기 때문에 말씀에 관심이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모인 것이 아닙니까? 아닌가요? 젊어서는 자기의 삶이고 또한 자기 가족인데, 그러니 취직해서 먹고 살아가기에 바쁘다는 말이죠. 그리고 주부가 되면 아이를 키우는데 그야말로 정신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기 이전에는 교회에 다녀도, 그때는 자기가 천국에 가면 그만이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하지만 사랑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주님의 세계가 남의 세계가 아니라 융합의 세계가 되는데, 즉 주님의 세계가 곧 자기 세계가 된다는 겁니다.

* 소망이 없는 교회 !!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이미 소망은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소망은 필요치가 않다는 말이죠. 남아있는 것은 주님의 소망인데,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이름을 '소망이 없는 교회' 라고 지어도 괜찮은데(ㅋㅋ), 자기 소망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주님께서 어떻게 키웠는지 보니, 즉 일단 자기에게는 관심이 없고, 주님의 입장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을 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어떻게 했는지 보니, 이 세상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그 지향성이, 즉 그 성깔이 어떻다는 겁니까?

TV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주님을 모독한다는 말이죠. 비록 그들이 신을 말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탓하고 원망하고,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게 바로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예레미야서 5장 12절과 13절을 보겠는데, 이번에는 권사님이 읽어보세요.

(렘 5:12)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렘 5:13)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

그러니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 12절에 보니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라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자기들이 증명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것인데, 그렇게 이 세상은 한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신종 코로나는 무엇인고 하니, 단지 백신을 만들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빼고 이야기하자는 것이죠.

그러니까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교육과정에서 무엇을 빼버리자는 겁니까?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그런 것은 모두 다 제외하고 가자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말하는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오기 이전에는 어떠했다는 겁니까? 그렇게 하든지 말든지 간에 무엇만 챙기면 되는고 하니,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잘 벌고, 자기 자식을 잘 키우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천국에 가면 그만이라고 여겼다는 것이죠.

* 너도 한 번 당해봐라 !!

하지만 그렇게 천국만 챙기면 된다고 하면 요한계시록 17장이 왜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생을 연습하면서, 어디서 연습을 하는고 하니, 주님이 수모를 당했던 그 영역, 그게 곧 세상인데, 거기서 우리도 같이 당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즉 주님께서 "이제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게 되면,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TV 드라마를 보면서, 그리고 뉴스를 보면서, 그 모든 영역에서 무엇을 뽑아내는고 하니, 예레미야서 5장 12절에 나오는, 즉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이 세상이 그런 세상임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 우리 손으로 지상천국을 만들자 !!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들의 힘으로 지상천국을 만들자는 것인데, 그래서 제가 유독 좌파를 싫어하는데, 물론 보수도 전혀 아니지만 말이죠. 보수보다는 좌파가 더욱 더 노골적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사회주의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의 손으로 이 땅에 천국을 만들자는 것인데, 사는 게 너무 힘이 들 때는 국가에서 돈도 나누어주면서 말이죠. 여성인권을 언급하고, 성소수자를 옹호하면서, 이게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지상천국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것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란 말이죠.

주님의 사랑이 오기 전에는 돈만 벌어서 자기 가족만 잘 살면 된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부부생활'과 같은 드라마도 보시라는 겁니다. 이미 열심히 보고 있습니까?

거기서 악마가 어떤 목소리로 왕왕거리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뉴스나 다큐도 열심히 봐야하는데, 모두가 한 음성으로 낸다는 겁니다. 한결같이 똑같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연습을 해야하는데, 그래서 "아하, 십자가를 싫어하는구나" 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끝으로 고린도후서 4장 4절을 보겠습니다.

(고후 4:4)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여기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확 다가오죠? 그러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천국에만 보내준다고 하면, 그게 어디 교회입니까? 물론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갈 수도 없지만 말이죠.

그러니 교회 자체를 넓혀야하는데, 교회든 세상이든 간에 자기가 있는 이상, 그것은 천국생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만 챙기려는 선악에 매인 지옥생활인데, 그런데 우리가 연습하면서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데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챙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걸어가셨고 주님이 체험한 것,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동참하는 저희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5,29 오후 4시에 마침.

신종 코로나도 연습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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