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7 - 갉아먹힘
20,05,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
오늘은 교재 20페이지를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에스겔서 16장 62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나' 라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그리고 '너' 라는 분은 에스겔이라는 겁니다.
(겔 16: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그렇게 에스겔인데, 그런데 동시에 신약에 오면, 모든 예언은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에스겔 속에 예수님이 미리 가있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굉장히 간단하다는 말이죠. 오늘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처럼, 우리 이전의 구약시대에서도 성신을 받은 에스겔 선지자에게는 예수님이 미리 가있다는 겁니다.
문장에 매우 간단한데, "'내'가 '네'게"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무엇을 세웁니까? "내 언약을 세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에 여기 에스겔에게 들어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치는 무엇입니까?
'너' 라는 에스겔의 의도나 노력은 일체 반영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목적이 이미 정해져있기 때문인데, 즉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에스겔을 뽑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에스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기대나 희망은 일체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에스겔은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의 계통인데, 에스겔은 어디까지나 육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아담의 계통에서 부르짖는 그 어떤 소망도 하나님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언약을 세우신다는 겁니다. 에스겔을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뽑았기 때문에, 아담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욕망과 같은 것은 하나님에게 수용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 예수님의 상처, 그리고 우리의 상처 !!
그렇다면 이 원리를 그대로 십자가에게 적용을 시켜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 라는 것이 첫 번째 과정이라면, 그러면 두 번째 과정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에게 예수님의 상처가 주어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러니 그것은 예수님의 상처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상처를 입었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상처가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예수님의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죄 때문에 받으신 예수님의 상처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십자가로 이어졌다" 라고 하는 것은, 같은 말로서 "언약으로 이어졌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의 상처와 우리의 상처가 연결될 경우에만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잘 생겼다, 참 멋있다" 라고 하는 것도 다 좋은데,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분이 우리 죄로 인해서 상처를 받으신 분이냐는 것이죠. 그분만이 진짜 예수님이고, 그리고 그 상처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는 이 상처가 예수님의 상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입이 열 개라도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게 "이것저것 주세요" 라는 것 때문에 생겨난 상처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마치 미륵보살인 갓바위에게 빌 듯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다 !!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이해한 십자가라고 하면 제대로 이해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있어서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신 것", 그것은 무엇을 이루기 위함인고 하니,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다" 라는 겁니다. "언약을 세운다" 라고 하는 것은, 없는 언약인데 우리를 불러내면서 언약을 세우셨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이 구조를 예수님께서 그대로 자기 삶으로 가지고 오셔서 '너' 라는 자리에 본인을 집어넣으시는데, 그러면 '나' 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무엇을 세우기 위함입니까?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란 말이죠. 그러니 이 언약에는 아담의 욕구나 욕망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공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데, 성령을 받으면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해가 되면 이게 하나의 이론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즉 "내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안다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 정말로 진지하게 나에게 제일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라고 말이죠.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더라도, 교회에 가는 것말고 또 다른 할 일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주부라고 한다면 가정살림을 꾸려야 하는데, 특히 아이가 있다면 돌봐야만 한다는 말이죠. 특히 요즘 같이 코로나19로 인해서 아이를 학교에도 보내지 못하고 있으면 집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겁니다.
* 혁명가는 직업을 초월한다 !!
이전에 광주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 기억이 나는데, 즉 "혁명가는 직업을 초월한다" 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직업이 없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직업이라는 것, 즉 전문직이라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방해한다는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부의 경우에는 집에서 아이를 열심히 잘 키우고, 그리고 그 주부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에는 다른 직업이 또 있는데, 그리고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나간다고 말이죠. 만약에 그 주부의 직업이 약사라고 한다면, 약국에 출근해서는 약사이고, 또한 집에서는 주부이고, 그리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는 집사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한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한 이 구조를 자기가 이론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되는데, 일종의 지식으로 말이죠. 왜냐하면 따지고 보면 이것말고도 할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광주강의에서 "혁명가는 직업을 초월한다" 라고 한 것은, 이것은 직업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사실 혁명가도 얼마든지 교사가 될 수도 있고 또 목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직업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혁명가는 자기가 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자기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혁명가는 기존의 체제를 엎어버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그런 것에 자기 목표가 따로 정해져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금 자기가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간에,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란 말이죠. 아이를 키우고 약사로 일하는 것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약국을 혁명하기 위해서 혁명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 이근호 목사님을 청와대로 !!
국회의원들도 자기 직업을 있을 수 있는데, 변호사도 있고 부동산이나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죠. 그들은 국회의원으로 나올 때는 직업이 없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잡아보겠다고 하는, 일종의 혁명가 정신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만약에 대통령이 된다고 하면, 국회의원들에게는 월급을 하나도 주지 않을 것이란 말이죠(ㅋㅋ). 완전히 명예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국회의원이라는 것이 돈벌이 수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그만큼 남의 것을 빼앗았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래서 교사의 경우에, 교사가 월급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학부모가 내는 공납금보다도 플러스 알파의 것이 더 있다는 것이고, 그 여분의 것을 교사가 가지고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비단 교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는 말이죠.
옛날에는 직업이 하나로 통일이 되었는데, 농사를 짓는다든지, 고기를 잡는다든지, 그러했다는 겁니다. 그때는 물물교환인데, 그것은 화폐가 없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래서 강원도의 묵호 항에서 나오는 고등어와 경상북도 안동에서 나오는 삼베와 바꿀 때는, 서로가 비슷한 양으로 맞교환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소금과 같은 것을 가지고 교환을 하든지 말이죠. 그 뒤에 금이 나오고 동전이 나오고 했다는 겁니다.
* 자본주의 - '돈을 위해서' !!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까, 그때는 서로 교환을 한다고 해서 추가적으로 빼앗아 가는 것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만 화폐가 발달해서 화폐가 주인노릇을 하게 되면, 이것을 '자본'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자본주의에서 화폐는 무엇인고 하니, 돈의 가치보다 더 쳐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노리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두고 '자본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방직공장을 운영하면, 물론 겉으로 드러난 명분은 천을 짜서 원단을 만드는 것인데, 사실 속으로는 무엇인고 하니,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원단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방직공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벌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돈을 벌면 안 되는데, 돈은 소모해야 한다는 말이죠. 물건을 교환하려고 할 때 편리하기 위해서 있는, 즉 일종의 주머니와도 같은 역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본주의가 되면서 어떻게 됩니까? 그 주머니를 얻기 위해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죠. 교환자체를 위해서 말이죠.
사람들은 처음에 돈이란 것은 교환을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는데, 돈 자체를 위해서 돈을 번다는 것은 생각하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여기에 이렇게 고등어 3마리가 있다고 하면, 이것을 안동의 삼베와 바꾼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는 화폐에는 관심이 없고, 물건이 더 중요했다는 겁니다.
* 누구야?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그런데 돈이 돈을 번다고 하는 자본주의에 눈을 떤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돈의 축적으로 인해서 100원을 하던 고등어 값이 80원으로 내려가고, 또한 삼베 값이 70으로 내려가더라는 말이죠. 그렇게 100원짜리가 80원이 되고 70원이 될 때, "누구야?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내가 힘들게 노동해서 얻은 것인데, 누가 이렇게 값을 떨어뜨렸어?"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도중에 돈을 취득한 있는 자들이 구조적으로 20원을 빼가고 30원을 빼갔다는 말이죠. 그렇게 빼내어 가는 구조가 본의 아니게 그만 형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보다 더 맛있는 고등어에 욕심을 내고, 또한 명품 안동 삼베에 욕심을 내었는데,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게 아니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부터는 물건이 아니라 돈에 더욱 더 욕심을 내게 되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런 물건들은 가져봐야 단가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건이 아닌 돈에다가 투자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즉 목적이 물건이 아니라 돈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혁명가의 경우에, 혁명의 명분이 무엇인고 하니, 그야말로 '좋은 나라 만들기' 인데, 그 목적은 인간자체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행복한 나라가 곧 좋은 나라인데, 그것도 더불어 같이 행복하자는 말이죠. 이것을 공동체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게 목적이라는 겁니다.
* 혁명가 '아돌프 히틀러' !!
그런데 혁명가가 자기 직업을 초월하지 못하고 가지고 되면, 이 사람은 혁명을 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무엇을 노리게 됩니까?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보다도 더 많은 돈을 축적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에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사회에 있어서 국회의원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때는 정당이 30개가 있었는데, 이 정당을 하나로 바꾼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혁명가 '아돌프 히틀러' 라는 말이죠. 80퍼센트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나찌당을 제1당으로 되고, 나머지는 다 박살이 났다는 겁니다. 그때 히틀러가 독일국민들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여러분의 돈을 불려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좋은 나라, 즉 인간 행복이 무엇으로 드러나는고 하니, 자본의 증가로 가시화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행복이란 것은, "우리 집에 돈이 많다" 라는 것으로, 그렇게 행복을 측정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즉 순서를 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공부를 한다고 이렇게 앉아있지만, 만약에 정부에서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만 재해기금을 신청하면 줍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여기에 앉아있겠습니까? 당장에 주민센터에 줄서러 간다는 말이죠. 좋은 대통령이란 곧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는 대통령인데, 그것은 자기가 살기에 넉넉한 돈을 주면 된다는 겁니다.
* 악랄한 '좌파' !!
그래서 저는 소위 '좌파' 라는 작자들을 악랄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돈밖에 모르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좌파는 무엇인고 하니, 돈이 없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인들인데,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죠. 인간은 돈에 죽고 돈에 사는데, 이것을 분명히 하는 쪽이 우파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능력이 없는 자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서 기회마저 부여되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대를 이어서 지저분하고 처절하게 산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의 재산은 가만히 있으면 단가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남들이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자를 할 때, 자기는 그런 것이 귀찮아서 성경공부만 하고 있다면, 그러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자기의 삶의 질도 떨어진다는 말이죠. 지금은 그렇지 않은 척을 해도, 나중에 국민연금문제에 부딪치면 광화문 광장에 나가서 "연금을 올려달라" 라고 하면서 데모를 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인간자체는 돈밖에 모르는데, 이게 유일한 현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좌파는 무엇인고 하니, 가짜 현실을 집어넣는데, "인간은 균등하게 살 수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구라도 이런 구라는 없다는 말이죠. 이런 세상은 오지 않는데, 그러니 결국은 좌파가 노리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혁명가라고 자체를 하면서도 돈을 노리고 있다는 겁니다.
* 개판이면 계속해서 개판으로 !!
그러니 좌파는 악랄한데,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돈이 좋은데, 그런데 우회를 해서 뭐라고 합니까? "저는 돈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라고, 그렇게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서 돈을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즉 우파는 노골적이고 좌파는 음흉하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혁명을 하고 해도 이 세상에는 천국이 없는데, 그런 천국은 그야말로 개판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개판이면 개판으로 나가면 된다는 겁니다. 혁명을 하니 무엇을 하니 하면서, 이 세상을 뜯어고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게 얼마나 위선적인 행동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사람이 환상을 가지면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러면 자기가 그만 위선자가 된다는 말이죠. 환상, 멋진 세계, 다 좋은데,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를 감추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자기는 돈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에게 널리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그렇게 좌파는 자기를 속이게 만든다는 것이죠.
"권력을 가진 놈들은 민중들을 착취해서 가진 것이니, 이제 그만 내놔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아보지를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도 앉게 되면 그렇게 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좌파도 알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가 출세하고 싶고 권력을 잡고 싶어서,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망상에 힘을 실어준다는 겁니다.
* 진화론은 종교 !!
소위 '진화론'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사실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고 종교인데 말이죠. 생물학에서 만든 종교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진화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진화론에 의하면,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제거가 되어야 진화를 한다는 것인데, 즉 발달을 하고 발전을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생물학만이 아니라 사회 생물학적으로 온 세상을 왕창 다 들쑤시게 되면, 이게 맞다는 겁니다.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빠진다는 말이죠. 공부를 잘하면 거기에 맞는 직업이 있고, 또한 공부를 못하면 거기에 맞는 직업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월급의 차이는 당연히 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최저생계비가 5,000원이 아니라 2,000원이 되어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좌파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나라는 그러면 안 돼" 라고 하는데, 그러면 다른 나라는 어떻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어도 괜찮다는 말이죠, 즉 베트남, 캄보디아, 스리랑카, 그런 나라들은 괜찮다는 겁니다. 물론 이 중에서 베트남은 요즘 제법 잘 나간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데, 그래서 최저생계비를 올려놓고는, 거기에 감당을 하지 못하는 공장들은 최저생계비가 낮은 나라로 보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의 개성공단을 잊지 못해서 난리라는 것이죠. 그곳이 인력은 우수하고 최저생계비는 제일 낮은데, 그야말로 가성비가 최고라는 말이죠.
* 좋은 정치란 없어 !!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좋은 정치란 없다" 라는 것인데, 이 세상은 완전히 개판이라는 겁니다. 개에게는 좀 미안한데(ㅋㅋ), 아무튼 그렇게 개판인 것을 개판으로 알고 가는 게 바로 '마음 낮춤' 이라는 말이죠. 그래야 남의 탓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자들이 자기 돈을 빼앗았다고 하는, 그런 소리는 제발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야말로 괴물인 인간을, 그런 인간을 제도와 법으로 개조할 수 없는데, 인간은 이미 괴물인데, 돈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벌 사람은 계속해서 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래야 돈 없이 사는 나라인 천국에 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하늘나라가 이 세상과 왜 다른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자기 손에는 흙이 묻지 않아도, 그런 곳에서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은 도를 닦는 나라가 아니고 !!
이게 성경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들려도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사람들이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 성경공부라는 것이 하나의 지식이 되어서, 지식은 도를 닦는 것이란 말이죠. 제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항상 강조한 게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은 도를 닦는 나라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입니까?" 라는 것인데, 어느 쪽입니까? 이스라엘은 도를 닦는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다루신 나라인데, 그들은 도를 닦은 것이 아니라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 다루시니 이스라엘은 멸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다루신다는 것을 믿으면, 그러면 도를 닦아서 될 것이 아니라 멸망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망한다면 그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인간이 아무리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해도, 결국 인간은 돈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게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데 돈밖에 모르면서도 뭐라고 합니까?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이것은 제가 보기에 도를 닦는 짓이라는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 제가 돈을 번다고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죄를 알기 때문에 이웃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비오니, 저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에게 얻어맞을까 싶어서 미리 자기 단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에게 미리 빌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돈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사람답게 이 땅에서 더욱 잘살아갈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죠. 그렇게 요령을 피운다는 것이죠.
*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
처음부터 강의를 다시 하면,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상처가 있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래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살려고 했다면 상처가 필요치 않는데, 예수님은 쫓겨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받은 상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상처가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과 같은 언약의 방주 안에 있다는 말이죠. 노아의 방주가 곧 언약인데, 그렇게 같이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동일한 상처가 같이 작용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상처가 있는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떤 기대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떠날 생각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떠날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저를 때리지 마시고, 이 세상에 더 머물게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도를 닦으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상처를 자기도 알게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죠. 같은 언약 속에 들어있다면 말이죠. 이 땅이 왜 지긋지긋한 곳인지, 그 이유가 실감나게 해달라고, 즉 모든 것에 실망하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식을 믿다가 실망을 하고, 부모에게 실망을 하고, 그리고 교회에도 실망을 하고,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실망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더 실망스러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에게 기대를 하다가 자기에게 그만 실망하게 될 때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상처가 있는 것이 곧 주님의 사랑인데, 남의 탓을 하지 말라는 것이죠. 재벌들이 프로포필을 맞던지 말던지, 우리도 그 자리에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유명한 김앤장의 변호사를 선임해서 감옥에서 풀려났다고 해도, 이 세상 자체가 감옥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이 살았으면 무엇을 하고 죽었으면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차피 우리는 모두가 다 죽을 인간인데, "너 죽고 내 살자" 라는 것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파도 제대로 해야만 하는데, 즉 "너나 나나 다 멸망의 대상이다" 라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는데, 태극기를 흔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것도 뒤엎자고 하는 일종의 혁명인데, 역시 사기극이라는 겁니다. 돈을 벌려고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말이죠.
* 십자가의 죽음이 곧 현실 !!
이게 도를 닦는 이론이 아니고 실제인데, 즉 이스라엘의 멸망이 실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확실한 실제는 무엇인고 하니, 어떤 분이 죽었는데, 삼일만에 부활했다는 말이죠. 이것이 최종현실이라는 것인데, 이것보다 더 확실한 현실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좌파든 우파든 간에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세우셨는데, 즉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 이게 새 언약이라는 말이죠. 옛 언약이 아닌 새 언약이라는 겁니다.
* 아이를 키워도 !!
이것을 그대로 적용을 시켜보겠는데, 어떤 주부가 갓난아이를 키운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이를 키우는 것 따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것 따로, 그런 게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데, 이것을 이스라엘 역사에 집어넣어 보자는 말이죠.
분명히 이스라엘의 부모들도 아이를 키웠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멸망으로 끝났다는 겁니다. 자기 자식을 아끼면서 그야말로 열심히 키웠는데, 그렇게 해서 나라의 일군이 되기를 원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관여하니까 그만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요즘은 아이에게 그만 기가 눌려서 부모가 어떻게 하지를 못하는데, 해줄 것은 다 해주고, 나중에 좋은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말이죠. 여러분도 그렇게 했습니까? 그때는 그래도 부모의 영이 섰는데, 요즘은 영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부모가 아니라 그야말로 아이의 노예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아이에게 짓눌리게 되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이 하나의 이론이 되고 지식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성경은 가끔 들여다보면서 도를 닦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실제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 괴리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이것을 이론이나 지식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멸망의 증거이고 이유라는 겁니다. 진짜 실제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왜 아이에게 거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해도 나중에 좋은 소리를 듣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왜 있는고 하니, 오늘날 우리의 삶을 대표하고 있다는 말이죠.
* 갉아먹는 하나님 !!
이것을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어서 적어보면, 하나님이 계시고 이렇게 인간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이 같다는 겁니다. 이게 1번이고, 2번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달라지는데 말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아가면서 인간을 갉아먹는데, 그러면 인간은 무엇이 됩니까? 여기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3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 갉아먹은 죄를 자신의 일부로 가지고 오시는데, 마지막 4번째는 그 갉아먹은 죄를 하나님의 열매로 전환을 시킨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주님의 하신 일의 열매라는 말이죠.
* 천국은 아들의 나라 !!
그러니까 주님이 일하지 않으시면 천국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겁니다. 천국은 아들의 나라인데, 구약에서의 하나님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들의 나라는 반드시 예수님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오셔서 인간의 것을 갉아먹는데, 그리고 인간은 갉아먹힐 만한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런 소리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을 사과라고 보면, 하나님께서 사과를 갉아먹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입에는 사과가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부로 가지고 오신다는 것이죠. 인간의 죄를 말이죠.
그러니 이전에 인간에게 있었던 그 부분이 하나님의 일부가 되었는데, 즉 죄가 하나님에게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은 십자가로, 즉 자기 희생으로 의로 바꾼다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의'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의의 열매가 되고 천국을 이루게 된다는 겁니다. 즉 천국은 죄인을 재료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굉장히 이상하다는 겁니다.
* 천국은, 인간이 자기를 포기할 때 !!
이 원리를 우리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면, "인간은 자기를 포기할 때 보상을 얻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포기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포기가 아니고 열심히 애를 쓸 때 보상이 주어지는데, 그런데 천국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의 일에 있어서는, 인간이 포기할 때 보상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도 마찬가지인데, 모세는 애굽에 가기 이전에 장인의 양을 치는 것이 자기 직업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포기하지를 않았는데, 그래서 "나는 말도 할 줄 모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결국 모세는 애굽에 가서 주님이 준비해놓은 이스라엘 나라를 보상으로 받았다는 겁니다.
노아의 경우에도, 자기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는 방주를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삶을 완전히 포기한 것인데, 그렇지요? 노아는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말이죠. 그래서 방주를 만들게 되었고, 그럴 때 구원을 보상으로 얻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포기할 때 비로소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에 인간이 있다고 하면, 이 관계는 어떠한 관계인고 하니까, 먼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셨는데, 그렇게 인간을 찾아와서 그만 갉아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으로 보면 완전히 손실이 났다는 말이죠.
* 자기 목숨을 빼앗김으로서 !!
예를 들어서, 사렙다 과부가 자기 아들과 이제 먹고 죽으려고 마지막으로 남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엘리야가 날름 인터셉트를 했다는 겁니다. 그 마지막 남은 음식을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빼앗겼는데, 밀가루와 기름이 끝도 없이 줄줄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렙다 과부와 아들은 빼앗김으로서 하늘의 것을 얻었다는 말이죠.
주님에게 그만 자기 목숨이 빼앗겼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는 자기의 전문직업으로 먹고 살려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그 소망과 희망을 그만 갉아먹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뜻과 희망은 그만 날아가 버렸는데, 손실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가져가진 그 죄가 주님의 죄가 아니라 자기의 죄였는데, 그런데 그 죄가 주님 자신의 일부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것을 주님이 와서 그만 강탈을 해가니까, 자기의 일부가 주님의 것과 섞고 말았다는 것이죠.
* 주님이 다 갉아먹었어요 !!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것으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자기의 일부가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의 일부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다음날에 주님이 또 갉아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다 갉아먹었다는 의미라는 것이죠.
그렇게 주님께서는 전부를 다 갉아먹어서 우리의 죄를 의로 변화를 시켰다는 겁니다. 그 작업을 누가 하는고 하니, 중간에서 하신 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그분이 우리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도록 갉아먹었는데,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 나는 상처가 싫어요 !!
그것을 제가 강의초반에 '상처' 라고 했는데, 이게 도를 닦는 겁니까? 그것이 아니면 실제현실입니까? 현실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보다 더 확실한 현실은 없다는 겁니다. 자기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삼성에 취직하고, 그런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말이죠.
진짜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만약에 자기 아이가 잘 되면 어디에 기대를 하게 됩니까? 포기하지 못하는데, 아이가 잘 되었는데 어떻게 포기를 합니까? 그래서 죽으면 안 되는데, 자식이 결혼하는 것도 봐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로 자기 포기가 되지 않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자기는 잘났는데, 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상처가 없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좌파든 우파든 간에 인간은 돈밖에 모른다고 했는데, 드디어 거기에 눈을 떴다는 겁니다. 노끈공장을 하는 것보다도 주식투자를 해서 한 방을 터트리면, 일년 수익을 왕창 다 얻을 수 있다는 말이죠. 아니면 상장을 해서 브랜드를 팔아먹든지, 그것도 아니면 부동산 투자를 하면 된다는 겁니다. 돈을 버는 놈이 최고라는 말이죠.
조용기 목사가 설교시간에 꿩을 잡는 것이 매라고 했는데, 교인수가 많으면 최고라는 겁니다. 그러니 방법일랑 묻지 말라는 것인데,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도하면 병이 낫습니다" 라고 했고, 그야말로 초대형교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일본의 남묘호랑게교도 그러한데, 맨날 그 주문만을 외운다는 말이죠. 이초석도 그러한데, 복음이고 뭐고 간에 없다는 겁니다. 물론 통일교도 그러하고 말이죠. 그리고 신천지는 "144,000명에 들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으로 구워삶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악마는 잘 알고 있다는 것이죠.
* 인간의 항거(抗拒) !!
이제 이 '갉아먹는다' 라는 것을 지우겠는데, 왜냐하면 인간 속에 있는 악마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하나님이 있고 이렇게 인간이 있다는 말이죠. 사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없는데,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이 있고, 인간에게는 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에게 신이 있을 때, 여기서 인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신이 아니라 인간이 먼저 신에게 다가선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인간의 항거(抗拒)인데, 즉 신에게 반항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신에게 먼저 찾아가서는 추궁을 한다는 것이죠.
이게 구약의 사사기를 보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그게 아닌데, 어떤 경우에만 찾았습니까? 어렵고 힘들 때인데, 그때 인간은 나름 진지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어려울 때 진지하다는 것은 평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말이죠. 먹을 것이 많은데 굳이 왜 하나님을 찾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곤궁해지면 갑자기 진지해져서 하나님을 찾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에게 추궁을 한다는 말이죠. 즉 조목조목 따진다는 겁니다. 인간이 신에게 따진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압력을 가하는 것인데, 즉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내놔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강도요, 도적이다"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에게 압력을 가하고 추궁을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소원충족' 이라고 하는데, 이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신에게 먼저 접근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 언약인가? 아닌가?
오늘 강의전체에서, 인간 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 아닌고 하니, 그것은 언약이 아니라는 겁니다. 언약은 이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만 있는데, 인간에게 신이라는 것은 자기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함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은데, 왜냐하면 자기가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신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무엇이 먼저 나섭니까? 언약이 먼저 나선다는 겁니다. 에스겔서 16장 62절을 다시 보면,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이용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먼저 움직여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겔 16: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우리는 김정은이 어떤 존재인 줄 제대로 몰랐는데, 그런데 이번에 20일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해서 숨어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전 세계의 매스컴을 가지고 놀았는데, 쉽게 말해서 다들 미쳤다는 말이죠. 그렇게 있다가 20일 만에 나타나니, 김정은에 대한 생각이 수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요청한다고 나타납니까? 나타나지 않습니까? 물론 김정은이 하나님은 아니지만(ㅋㅋ),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은 손해를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에 나타납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의 언약을 세우려고 하는 현장에서만 나타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떤 주부가 "하나님, 우리 아이 잘 크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현장에는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는데, 그러면 언제 나타나시는고 하니, 그것은 자기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신에게 압박을 가한다는 겁니다. 즉 "당신은 전능하신 신이니 내가 원하는 결과는 내봐라" 라는 것인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 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지금까지 강의한 바에 의하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를 닦는 것에 속하는데, 믿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번 해본다는 겁니다. 기도해서 응답이 되면 좋고, 되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말이죠. 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만이 유일한 현실인데, 그러면 그 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러한 전체가 바로 인간이 답답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즉 압력과 협박을 가했다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 죄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어야 이게 갉아먹을 것이 된다는 말이죠. 인간이 하나님께 따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언약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언약을 앞장세우라고 유인한 셈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 일은 없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만 일어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요한데, 즉 갉아먹을 죄인이, 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 죄를 갉아먹는 하나님 !!
제가 아까 공식에서 죄를 갉아먹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먼저 움직여서, 즉 언약을 앞장세워서 죄를 재료로 삼아서 갉아먹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무엇을 설명하지 않았는고 하니, 죄를 설명하지 않았는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 죄는 바로 인간이 쉴새 없이 주님께 항거하거나, 혹은 무관심하거나,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평소에 왜 하나님에게 무관심한고 하니, 그것이 바로 전문직인데, 즉 관심사가 따로 있다는 말이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런 꺼리가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즉 자기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관심사가 갑자기 어디로 바뀌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사사기의 내용인데 말이죠.
자기의 살아가는 삶이 곤궁하거나 힘들게 되면 신의 존재가 진지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신에게 기도하게 되는데, 즉 신에게 압력과 협박을 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갑자기 어떻게 합니까? 그동안 하지 않던 헌금을 한다든지 봉사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가 나오는데, 바로 이 죄를 유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언약이 와서 죄를 갉아먹는다는 겁니다. 갉아먹는다는 것은, 잘라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왜 갉아먹는다고 표현했는고 하니까, 인간이 자기 죄를 감추는 버릇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갉아먹는다' 라는 강제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제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라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돈밖에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노림수 !!
다시 복습을 해보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망하고 말았는데, 이게 현실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현실인데, 물론 이스라엘 자체도 그것을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속으로 언약 자체인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러자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그만 죽였다는 말이죠.
그게 현실인데,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예수님이 사흘만이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부활이 참으로 놀라운 것인데,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부활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힘없이 죽으셨느냐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부활하실 수 있는 분이 죽으셨다는 것은 뭔가 노림수가 있는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즉 가만히 있던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 죄인데, 그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말이죠.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렇게 되면 썩어질 것을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닌데,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겁니다.
* 무력함 !!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주부는 이런 것에 관심도 없는데, 들어서 알기는 알아도 말이죠. 그런데 아이가 아프면 갑자기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하신 것인데, 즉 자기 택한 백성에게 주님이 먼저 압력을 가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성도의 인생인데, 그러니 죄란 인간이 신에게 항거한 것이란 말이죠.
이런 구조에 의하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언약이 없이는 나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언약은 어느 쪽에서 제시하는고 하니, 주님 쪽에서 제시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 불가능함을 오늘의 강의제목으로 하고 싶은데, 즉 '무력함' 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모든 것에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인데, 그러니 아무리 애를 써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2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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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A' 라는 물체가 곧바로 B로 바뀔 때, 우리는 이 물체가 'B'로 바뀌었다고 하게 되는데, 여기서 뭘 놓치느냐 하면, 어떻게 바뀌는지 그 생성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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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쪼개고 또 쪼개고 !!
인간은 그 과정을 모르는데, 물론 알기 위해서 미분을 하는데, 즉 쪼개서 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쪼개서 봐도 그 쪼개진 사이의 과정을 또 모른다는 말이죠. 제가 지금 무력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이 무력함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푸른 나뭇잎이 있는데, 이것이 가을이 되면 노란 나뭇잎으로 바뀐다는 말이죠. 그러면 과학자들이 그 과정을 다 압니까?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일이 다 쪼개는데, 그렇게 되면 10초 뒤에는 그게 조금 더 노랗게 되었다고 하는 결과는 알지만, 짧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2시간이 지나면 나뭇잎이 조금 더 노랗게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해서 더 노랗게 되었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세분화를 하게 되면, 그러면 그 폭이 좁아지는 하지만, 그게 10센티라고 하면 그것을 10개로 나누면 어떻게 됩니까? 1센티가 되고, 그것이 10개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또 나누고 나누면 결국은 무한개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고 마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죠. 쪼개면 쪼갤수록 그 숫자가 더욱 더 많아지는데, 그러니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그 과정은 모르는데, 그러니 무력하다는 말이죠.
* 주께서 하셨다 !!
그러면 성경은 그 과정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은 여기에 누구를 집어넣습니까? 관찰하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을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구약이고, 신약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목적성이 거기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물을 마신다면, 이것은 누가 개입한 것입니까? 구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고, "주께서 하셨다" 라는 것에 무엇을 추가하는고 하니까,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라는 것이죠. 그래서 물을 마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월호 사건, 코로나19, 이 모든 것이 다 십자가를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2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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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서, 어떤 학생이 15등을 하다가 10등이 되었을 때, 그것은 '전에 15등에서 이제는 10등을 하는 학생, 전에는 15등을 하는 존재에서 10등을 하는 존재가 되었구나. 그러니 앞으로 네가 5등까지 하는 존재, 그런 인간이 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게 해서 15등에서 10등까지 되었는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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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약의 일관성 !!
물론 그 학생의 경우에, 자기가 10등이 된 것은 열심히 공부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겠지만, 하지만 그게 엉터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밤잠을 자지 않게 누가 했습니까? 그렇게 쪼갠다는 말이죠. 그리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책을 본다고 해서 공부가 됩니까? 집중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집중력을 누가 줍니까? 박카스가 그렇게 해줍니까? (ㅋㅋ)
그때 여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든지, 프로야구를 한다든지 하면 집중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조성하신 분이 누구냐는 것이죠. 주님인데, 그런데 부모는 뭐라고 합니까? 물론 성적이 올랐을 때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적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10등에서 25등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갑자기 아이에게 닦달을 내는데, "주님은 네게 은혜를 주셨지만, 네가 게을러서 그만 25등을 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일관성이 없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무력함인데, 언약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언약은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그리고 그 바닥에서 주님의 자리까지 올라가는데, 그 과정에 있어서 언약은 일관성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기대, 답답함, 즉 인간이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기도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전혀 일관성이 없다는 겁니다. 무조건 자기 소원대로 해달라는 것인데, 바닥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즉 망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짜증을 내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 제가 주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
그래서 어제 낮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겸손이란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마음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 자세가 겸손이라는 말이죠. 주님께서 삼킬 죄가 자기에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죄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 언약의 작용이라는 겁니다. 자기에게 숨어있는 죄, 즉 모든 것이 자기 육체가 잘 되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아는 것이 겸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 겸손을 가지고 집에서 도를 닦지 말고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고 충돌하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자극을 하면 성질이 나는 것이 인간인데, 그래서 낮 시간에 미리 결론을 내린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도들끼리 만날 때는 "제발 저를 죽여주옵소서. 밟아주옵소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아주옵소서" 라고 해야한다고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게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인데, 그렇게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겸손으로 서로가 하나가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성령의 일은 곧 자기를 책망하는 것인데, 그게 언약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항거 속에는 무엇이 빠져있는고 하니, 여기 에스겔서 16장에 나오는 언약을 세운다는 것, 바로 이것을 인간들은 누락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방신이고 우상인데, 즉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제 교재 2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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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피조물들은 그냥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무의미하게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과 연계해서 모든 창조물의 변화를 해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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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약 세우기 !!
그러니 반드시 십자가 사건과 연관이 있어야 하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의인이 되었을 때, 그러면 죄인의 역할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에 의해서 의인이 되었음을 해석하는 것, 그것이 성도라는 말이죠. 성도는 그렇게 해석해서 대외적으로 소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를 이렇게 의인으로 바꾸어주셨다는 것을 소개하는 것인데, 언약의 개입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죠. 이것이 바로 '언약 세우기' 라는 것인데, 즉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이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으로 죽고 의인으로 부활하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죽고 의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 첫 번째 모델이 되는데, 그 다음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모델은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 결과들이라는 겁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아까 이야기한 공식에 의하면, 네 번째인 '의의 열매'가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천국이란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갉아먹고 그 죄를 자기 것으로 삼아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백성이 되게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루신 그것이 우리에게 십자가로 인해서 효과를 보이게 되면, 우리는 자기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임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죄라는 것은 주님에게 대들고 항거하는 것으로, 그런 존재로서, 그런 재료로서 채택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 속에 주님의 상처가 있는 사람은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 때문에 죽으신 주님의 상처가 자기와 같이 연결되어있음을, 그것을 항상 인정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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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면 인간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그냥 흙이고 먼지입니다. 인생의 의미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로 회의한다고 밝혀질 사항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지도 않는 인간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부활의 혜택을 입지도 못한 자들이 연구한다고 해서 창조의 비밀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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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총정리를 하면 !!
이제 총정리에 들어가겠는데, 시편 88편으로 해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모델인데, 예수님은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이죠. 그게 도를 닦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죽음에 갔다가, 그 다음에 부활하시고, 그리고 주의 자리까지 올라가셨다는 겁니다. 이게 진짜 현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살이에 그만 바쁘다가 보면, 그 세상살이가 현실처럼 여겨질 때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신종 코로나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게 실제 현실을 가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언약을 세우는 것이 진짜 현실인데, 그 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제가 왜 여기서 시편 88편을 언급했는고 하니, 이게 고라 자손의 찬송시인데, 즉 신앙인들의 찬양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현실을 부여받았는고 하니,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간다는 말이죠. 여기 3절에 보면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 라고 하는데, 이게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겁니다.
(시 88:1)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르안놋레 맞춘 노래]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시 88:2)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시 88:3)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
그런데 현실이라는 것은 그 과정에 누가 개입하시는고 하니, 시편이 구약이니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언약이 말이죠. 언약이 없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언약대로 하니, 일단의 무리들이 어디까지 나아가는고 하니, 거의 초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모르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돈이 없다고 하면서 떼를 쓰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다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이를 15등에서 10등으로 만들었다면, 그런데 이들은 초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해와 달과 별을 주관하시는 것처럼 말이죠.
* 뽀드득, 뽀드득 !!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움직임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것을 지금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눈이 내린 곳을 밟는 사람은 땅을 밟는 것이 아니라 눈을 먼저 밟는 것이라고 것이죠. "뽀드득, 뽀드득", 그렇게 소리를 내면서 말이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온 몸으로 만끽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 가스가 떨어져서 조금 전에 도착을 했는데, 그것도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만약에 가스통을 실고 오다가 사고가 나서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고맙습니다" 라는 것을 입에 달고 있어도 모자란다는 겁니다.
심지어 죽어도 고마운데, 왜냐하면 그것이 언약이니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고라 자손들을 장차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완전히 초죽음 상태로 만들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음부, 즉 죽음상태에 이르게 해서 무엇을 뽑아내려고 하십니까? 이들을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해서 구원을 가르치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고라 자손들을 표준모델로 삼아서 죽음에 가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이 시편 88편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시편 88편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시 88:10)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시 88: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셨다고 여기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야할 이유가 바로 이 시편 88편에 나와있다는 말이죠. 음부에서는 주님을 찬송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음부에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겁니다.
그냥 찬송을 한다고 해서 찬송이 아니라, 어디를 경유해야하는고 하니, "나는 십자가에 죽어서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경유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실함과 포기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에게 대한 찬미가 그만큼 더 많이 생산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감사와 찬미가 더욱 생생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력함과 불가능함은 무엇을 기대하지 못하게 만듭니까? 은근히 자기 욕심을 기대하는 것, 그것을 아예 원천적으로 차단을 시켜버린다는 것이죠.
* 지금쯤이면 가스가 와야하는데 !!
"지금쯤이면 가스가 와야하는데?" 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다 있는데,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어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가스가 무사히 배달이 되는 것, 거기에도 감사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도 찬미의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가스통이 폭발해서 교회당이 다 날아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라는 말이죠.
그러니 한꺼번에 몰아서 감사할 생각일랑 하지말고, 주님께서는 매 순간순간 감사하면서 살아가라고 우리의 인생에 개입을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 감사를 얼마나 많이 놓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는데, 입이 마구 툭 튀어나오면서 말이죠.
주님께서는 언약을 세우시고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기대에 미치지를 못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불평을 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의 개입을 모독하는 것인데, 물론 그렇게 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겸손하니 말이죠. 그래서 사후적으로 자기가 주님의 일을 방해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게 주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미천하기 짝이 없는 저희들에게 일을 벌리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대들고 따지고 반발하기를 좋아하기를 모릅니다. 그러니 이제는 감사만이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5,14 오후 7시에 마침.
코로나가 아닌 십자가만이 현실인 것에 항상 감사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