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1 - 대제사장
20,07,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참 신기하죠?
오늘은 교재 4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거기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와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죠. 아비멜렉이라는 그 지역의 추장 집에 방문을 했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지역에 들어섬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이 저주처럼 느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지역의 모든 여자들이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창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창 20: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창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
(창 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창 20: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그것을 여기 교재 43페이지 중간에 보면, "참 신기하죠?" 라고 묻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기를 낳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주니 임신이 된다는 겁니다. 참 신기하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이나 아비멜렉이나 같은 인간이고 같은 아담의 족속인데, 그러니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 언약의 효과 !!
그게 바로 '언약의 효과'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을 경우에는, 언약이 없는 사람은 언약이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 뿐만 아니라 언약이 있는 사람도, 자기 속에 있는 언약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자기 소유가 아닌데, 오히려 소유를 당한 것이지 자기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아브라함은 언약의 입장에서 신비로운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어 버리면 안 되고, 언약이 있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약이 없는 사람도 역시 신비롭다는 사실이 들추어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신비롭다' 라는 것은, 언약이 없는 쪽에서는 신비로운 영적인 존재, 즉 악마인데, 그런 악마의 힘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언약의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면 모르는데, 하지만 언약의 사람이 등장하게 되니 어떻게 됩니까? 임신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 내 죄는 내가 처벌하고 싶다 !!
예를 들어서, 가롯유다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가 자살한 것은 모두들 알지 싶은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사탄이 그 안에 들어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악마가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고 하니, 다음의 한 마디로 분명해지는데, 즉 "내 죄는 내가 처벌하고 싶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사탄이 들어간 인간, 사탄에 눌려서 사는 인간, 즉 사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인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내 죄는 내가 처벌하고 싶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은 '정화(淨化)' 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 윤리와 도덕인데, 여기서 대인관계를 윤리라고 하고,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것을 도덕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자기 죄는 자기가 처벌하고 싶어하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를 정화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롯유다가 사탄이 들어가고 난 뒤에 분명하고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가롯유다는 자기 죄를 자기가 처벌하는 차원에서 자살을 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는 정화가 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롯유다는 사탄이 들어간 인간의 모델로서, 또한 대변자로서 우리 앞에 등장한다는 것이죠.
* 내 죄를 처벌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 !!
그것이 사탄이 지배하는 인간의 세계인데, 그렇다면 복음이 지배하는 언약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그것은 바로 이 사탄의 세계를 뒤집어 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내 죄를 내가 처벌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 죄를 처벌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벌을 받는 것은 맞는데, 그런데 그 처벌을 같은 인간이 아니라 신성하신 그분이 대신해서 그 처벌을 담당하신다는 말이죠.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들이 "내 죄를 내가 처벌한다" 라고 할 때는, 그 죄라는 것은 자기가 그 죄를 안다는 겁니까? 모른다는 겁니까? 안다는 것인데, 그래서 가롯유다는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그 정도면 자기 죄가 충분히 처벌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도에 있어서 주님이 대신해서 당당해주시는 처벌이라는 것은, 성도는 이 죄에 대해서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자기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이죠. 만약에 안다고 하면 자기 죄를 자기가 처벌한다고 나설 수도 있는데, 성도라고 해도 육신은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신비로운 악마에 의해서 조종을 받기 때문에, 그래서 "내 죄는 내가 처벌한다" 라고 하면서 덤벼든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자기 죄를 자기가 처벌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언약적으로 말이죠. 그렇게 자기 죄를 자기가 처벌하지 못하게 되면,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대제사장' 이라는 겁니다.
* 대제사장 아브라함 !!
이게 오늘강의의 제목인데, 그렇다면 이 대제사장이 누구라는 겁니까? 여기 교재에도 나오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 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서 멜기세덱을 만나는데, 그것은 창세기 14장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고, 히브리서 7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거기에 멜기세덱이 나오고, 십일조 이야기와 더불어서 아브라함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제가 강의처음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이 추장으로 있는 동네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그만 그 동네의 여자들이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아브라함이 기도를 했더니만 임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제사장 기능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언약 안에 제사장 기능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2010년 개혁주의협회 모임으로 !!
진도를 나가기 이전에 이것을 좀 살펴보겠는데, 한국교회의 경우에, 한국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제가 2010년도에 했던 강의를 십자가마을에 올려놓았는데, 그 음성파일을 들어보면 마지막 부분에 오용익 목사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 당시 분위기를 잠시 설명해드리면, 그곳에 모여있던 99퍼센트는 전부가 저의 적인데, 오 목사님은 앞자리에 앉아있었고, 저를 초대하신 분이 그 옆에 앉아있었다는 말이죠. 오 목사님의 질문으로 인해서 분위기가 싸늘해졌는데, 그러자 그분이 얼른 점심을 먹으러 가지고 하면서 분위기를 수습했다는 겁니다. 저도 오 목사님의 질문에 대해서 중립을 지키면서 답변을 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과연 99퍼센트가 반대를 할만한지 제가 처음부터 강의를 다시 들어보았는데, 그런데 저는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화를 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 짧은 시간에 서론부분을 거의 다 했는데, 즉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책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화가 났지 싶다는 겁니다.
그것이 '개혁주의협회' 라는 모임이었는데, 그게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내 죄는 내가 알아서 처벌하겠다. 그러면 정화가 된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귀신이 들렸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가롯유다가 했던 짓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개혁주의협회에서는 고객들이 왔을 때, 거기에 속한 목사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합니까? 그들이 사탄에 물든 교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죄를 성경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서, 그 죄에 대해서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헌금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해서, 그것도 모자란다고 하면 자기 자식을 신학교에 보내든지 해서, 그렇게 해서 자기 죄를 자기가 알아서 처벌하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 무엇이 된다는 겁니까? 자기 정화가 되고, 그래야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 그들은 왜 분노했는가?
그들은 그런 주장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저는 서론 부분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성경말씀은 바로 인간이 자기를 처벌하려고 하면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있다. 그게 성경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의에 아주 어긋나는 짓을 했는데, 강사가 강의를 할 때는 중간에 방해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 목사님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궁금하지요? 어떤 분이 강의를 마치고 나서 "이근호 목사의 이야기는 주관적이고 사변적이다" 라고 반발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오 목사님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의 주장이 주관적이고 사변적이라고 하려면 성경을 가지고 그 사람의 주장이 그러하다는 것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면 당신의 주장이 주관적이고 사변적이 아니라는 근거를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댈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의 논문이 무가치하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좋게 답변하기를, "그냥 무가치하다고 하지를 말고 그 반대가 되는 논문을 내놓으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논문이 나오게 되면, 무가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서로 비교하면 공론의 장이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저를 초빙하신 분도 분위기를 수습을 하기 위해서, "이 정도면 오늘 발표하신 목사님도 많이 깨달은 것이 있을 겁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ㅋㅋ).
* 신비성인가? 합리성인가?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아브라함만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신비로운 존재인데, 그런데 악마는 자꾸만 그 신비성을 빼버리고 어떻게 나옵니까? 합리적이고도 경험적인 것을 가지고, 그렇게 해서 "네 인생은 네가 꾸려나가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바로 그게 악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악마를 인정하지 않는데, 그래서 그 결과만을 가지고 "내 잘못은 내가 알아서 처벌하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즉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내가 나를 지켜주지 아니하면 누가 나를 지켜주겠는가?" 라고 하는,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죠.
* 하나님, 도와주세요 !!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도와주어야 합니까? 우리가 뭐라고 하나님이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말이죠. 물론 "목사님, 나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라고 할 수는 있는데, 그러면 목사는 "왜 당신을 도와주어야 합니까?"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는 "하나님이 도와준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타인이 도와준다" 라는 것이고, 그것도 안 되면 세 번째는 "내가 나를 도와준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나' 라는 것은 무조건 무엇인고 하니,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 목사님,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 !!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믿음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믿음이 없다고만 하지말고, 믿음이 없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왜 믿음이 없는고 하니, 사람은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만 미쳐버린다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인 자기마저도 자기를 도와줄 수 없게 되면, 그만 실성해버린다는 말이죠.
이게 정답인데, 인간은 처음부터 미쳐있다는 겁니다. 마땅히 실성해야하는데, 그런데 멀쩡한 인간인 것처럼 흉내를 내면서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실성을 함으로서 인간이라는 지위가 영원한 자기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금요일 저녁에 재활용 쓰레기를 주민센터에서 나누어주는 망에 담아놓으면 그 다음날 아침에 쓰레기차가 와서 가지고 가는데, 장로님 댁에도 그렇습니까? 참 아파트지요? 아파트는 계약을 해서 일괄적으로 가지고 가는 곳이 따로 있지만, 일반주택에서는 보통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 인간은 자기를 예쁘게 꾸며서 내놓는데, 왜냐하면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든지, 그분이 오시든지 해서 구원해준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쁘게 꾸미고 앉아있으면, 그러면 주님은 망을 뒤집어 씌어서 쓰레기차에 실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죠.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물론 악마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이죠. 인간은 늘 실성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무엇인고 하니, 제발 자기를 그만 좀 놓아달라는 말이죠. 물론 하나님은 손을 놓는데, 하지만 자기는 손을 놓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 라고 해도, 인간은 믿음이 있는데, 자기는 손을 놓지 않겠다고 하는 믿음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자기에 대한 믿음인데,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잘못은 자기가 알아서 벌을 주고 하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정화하겠다는 것인데, 그러한 자기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른 믿음은 다 퉁겨나간다는 겁니다.
* 쉬지 않는 인간 !!
인간은 쉬지 않고 무엇을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적으로 보면 마귀가 시켜서 하는 것이란 말이죠. 즉 "너는 네가 책임을 져야지 다른 그 누구도 안 된다. 그러니 너는 너를 믿어야 한다. 너만이 너를 지킬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마귀를 그런 믿음을 계속해서 강화를 시키면서 점검을 해왔다는 말이죠.
돌도 미처 지나지 않는 아이가 일어서려고 자기 스스로 훈련을 하는데, 그래서 의자를 붙잡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 아이들도 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무엇인가를 쉬지 않고 계속해서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는 앉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겁니다. 붙잡고 있던 손만 놓으면 되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이는 마구 울면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러면 엄마가 와서는 잡고 있던 의자에서 손을 떼어주는데, 그러면 아이는 바닥에 앉는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집 외손자 이야기인데(ㅋㅋ), 그렇게 아이도 뭔가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결정한 게 아니고, 몸이 스스로 그 일을 하게 한다는 겁니다.
* 당신은 무엇을 합니까?
그러니 가만히 있는 불신자는 없는데,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왜 합니까? 무슨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하는 겁니까? 아비멜렉의 경우에, 아브라함을 만남으로서 그 동네의 여자들이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줌으로서 다시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죠.
이 정도가 되면 여러분은 "아하, 인간은 뭔가를 하는구나" 라는 것을 눈치를 채야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무엇이 들이닥쳐야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까? 그게 바로 언약인데, 언약이 들이닥쳐야 비로소 자기가 하는 짓이 언약에 종속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좀 어렵지요?
불신자들도 뭔가를 하는데, 그리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도 무엇을 한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뒤집고, 그 다음에는 앉고, 그 다음에는 일어서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길을 가는 불신자에게 "당신은 무엇을 합니까?" 라고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답변이 없다는 겁니다.
* 언약이 와야 비로소 !!
그러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누가 와야하는데, 누가 와야한다는 겁니까? 언약이 와야 하는데, 이게 오늘강의의 핵심이라는 말이죠. 인간들은 개인적으로 무엇을 하는데, 그래서 난리를 치고 울고불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합니까?" 라고 하면, 답변이 없다는 말이죠. 그냥 결혼을 하고 싶고 아이를 낳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모른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자기가 신비로운 존재이면서도 그 신비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가 신비로운 존재인 것도 모르고, 또한 신비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죠. 그냥 합리적으로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행복해서 무엇을 할 겁니까?" 라고 하면, 답변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여자의 임신, 그것이 궁금하다 !!
물론 아브라함도 그러한데,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언약이 왔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와서 아비멜렉의 마을에 갔는데, 그런데 그 마을의 여자들이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임신이 되지 않으면 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런데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왜 답답해하느냐는 말이죠.
정작 임신을 해야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런데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난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임신이 되지 않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감을 잡았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숨어있는 신비라는 말이죠. 인간의 신비스러움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아주 쉬운 예가 무엇인고 하니, 여자는 드라마를 보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남편은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유럽의 축구를 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부부싸움이 나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는 할 수 없이 낮에 하는 재방송을 보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손흥민이 나오는 축구를 보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재미가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비인데, 즉 자기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자기는 드라마를 좋아하지, 축구는 좋아할 줄 몰랐다는 겁니다. 남편이 주말마다 낚시를 가는데, 우연히 따라가 보니 그게 살림을 사는 것보다 더 재미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말이 되면 같이 낚시를 가는데, 이게 바로 신비라는 겁니다(ㅋㅋ).
* 언약과 신비 !!
인간은 자기 외곽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자기가 무엇을 해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죠. 물론 안다고 하지만, 그 범위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최종적 해답은 모르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무엇을 몰고 왔습니까? 언약을 몰고 왔다는 말이죠. 그 이전에는 아이를 낳으면 기쁘고 그렇지 않으면 슬픈지, 그 이유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오게 되니, 불신자들은 신비로움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신비인데, 그러면 신비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냥 육인데, 그 육에 몰두하다가보니 신비를 놓쳤다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찾아오면 신비를 안다는 말이죠.
그러면 육적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그 모든 요청이, 육에서 와서 그냥 육으로 흘러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신비를 알게 되고, 그러면 육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아비멜렉이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의 마을에 가서 임신을 못하게 되었다가 다시 임신을 하게 되는 과정,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해답은 이미 나와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고 왜 도와달라고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왜 도와주지 않는지, 그 이유가 이미 다 나와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즉 해답은 언약에 있다는 것이죠.
* 대제사장의 기능 !!
그런데 그 아브라함에게 무슨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대제사장의 기능인데, 여기서 시편 50편 16절을 보겠습니다.
(시 50: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악인아, 악마야, 네가 왜 건방지게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담는가?" 라는 것인데,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시편을 언급했다는 겁니다. 그게 91편 14절인데, 분명히 사탄이 이 말씀을 거론을 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시 9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 인간들만 몰라요 !!
하지만 성경말씀을 인용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사탄은 영적인데, 즉 신비로운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 신비로운 존재의 신비의 세계에서는 말씀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는데, 그게 영적세계라는 말이죠. 그것을 악마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죠.
인간들만 모르지, 악마는 다 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영적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당장에 자기의 배고픈 문제와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언약이 접하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지키면 된다고 하는 그 바깥에 보다 더 넓은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아비멜렉 추장의 경우처럼, 자기 마을에서 평소에 임신을 잘 하던 여자들이 그만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러면 그것은 다른 요소, 즉 영적인 요소, 신비의 요소가 개입이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영적인 것, 즉 신비로운 기운이 쳐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평소에는 그것을 왜 몰랐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겠다는 믿음이 너무 강해서, 신비로움에 자기를 맡겨야 하는데, 쓰레기와 같은 자기를 계속해서 쥐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사탄에게 배워서 그러한데, 자기를 놓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 지난밤 꿈에 지뢰를 만났어요 !!
제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평소에 꿈 이야기는 잘 하지를 않는데 그 내용이 너무 재미가 있어서 말이죠. 제가 지뢰를 밟았는데, 그러자 두 가지가 생각났는데, 첫째로 "이 지뢰는 고장이 난 것이다" 라는 것과, 그리고 둘째는 "이 지뢰는 고장이 나지 않았다" 라는, 이 두 가지만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꿈속에서 말이죠.
여기서 지뢰가 고장나지 않았으면, 지뢰를 밟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불러서 제거를 해달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요청을 하게 되면 상대방을 귀찮게 하는 것이 되고, 다음에는 자기도 그 사람에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짜증이 나는데, 물론 자존심도 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지뢰는 고장이 났다", 혹은 "고장이 나지 않았다" 라고 결정을 하게 되는데, 제가 꿈속에서 어떻게 결정을 했을까요? 고장이 난 것으로 하고 발을 떼었는데, 그러면서 꿈에서 깨어났다는 말이죠(ㅋㅋ). 지뢰가 터진 것이 아니라 그냥 꿈에서 깼다는 겁니다. 아마 지뢰가 들었으면 기분이 나빴지 싶은데, 자기는 멀쩡한데 일방적으로 고장이 났다고 여겼으니 말이죠.
*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고장난 사탄 !!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지뢰가 바로 사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밟은 것은 누구인고 하니, 물론 제가 아니고 주님이란 말이죠. 사탄이 왜 기분이 나쁜고 하니, 주님에 의해서 사탄은 일방적으로 고장이 났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악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말씀을 입에 담고 해도, 너는 하지마. 너는 말씀을 전하지마. 설교를 하지마"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무조건 악하다는 것인데, 즉 악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그렇게 악한 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시편 104편 35절에 의하면, 악한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저주라는 말이죠.
(시 104:35)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 나는 너와 함께 하지 않겠다 !!
다시 말해서, "나는 너와 함께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이런 소리를 누가 합니까? 교회에 다니다가 낙심한 자들이나 아예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인데,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이제 하나님을 믿지 않을래. 예수는 싫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실 줄은 미처 몰랐다는 말이죠. "나는 너희가 나에게 오더라도 거부하겠어" 라고 나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곳인데, 즉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이죠.
시편 84편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하는데, 악인의 장막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문지기로서, 그렇게 보초를 서는 것이 더 좋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은 받은 자라는 말이죠.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성도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무엇을 아는고 하니, 여기에서 제가 퀴즈를 내겠습니다. "1번, 나는 나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 "2번, 나는 나를 버리고 주님과 함께 있겠다" 라는 것 중에 성도라고 하면 어느 쪽입니까? 2번인데, 이렇게 2번이 되려면 그 전제가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자기와 함께 있겠다는 것이 강렬하게 작용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고는 1번에서 2번으로 올 수가 없는데, 그런데 2번으로 오게 되면 주님이 주인공이고 자기는 종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돕든지, 이웃이 돕든지, 혹은 하나님이 돕든지 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2번에서는 그런 도움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죠.
* 다시 하면 !!
다시 하겠는데, 시편 50편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말씀을 네 입에 담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내 말씀을 갖지 말라" 라는 것인데, 이것이 1번인 "나는 나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 라는 것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말이죠.
(시 50: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말씀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인데, 그런 사람은 2번, 즉 "나는 나를 버리고 주님과 함께 하겠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1번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전도를 한 것은 1번과 2번을 구별하기 위함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이든 간에 자기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게 되면 그것을 악취로 여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뭔가 자기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노렸는데, 그런데 자기를 포기하라고 하니, 그것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 다음인 시편 104편 3절의 경우에는 "나는 너와 함께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제가 해석을 한 것이고, 실제로 보면 무엇이라고 되어있습니까?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악인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게 악인라는 겁니다.
(시 104:35)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 천 년이 차매 !!
여기서 요한계시록 20장 7절을 보겠는데, 여기에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라고 한다는 말이죠. 모든 시간은 천 년을 넘어갈 수가 없는데, 그러니 천 년이 찼다는 것은 시간이 완성되었다는 겁니다. 시간의 완성이란, 시간이 더 이상 진척이 될 이유가 없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계 20:7)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계 20: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시간의 완성, 그게 바로 십자가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서, 그 다음에는 사탄이 나오는데, 저는 이것을 사탄의 부활로 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사탄은 옥에 갇혀있었다는 말이죠. 사탄, 즉 악마가 부활할 때는, 악마는 신비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영적인 존재는 말씀이 서로 교통을 한다는 겁니다.
* 사탄의 부활 !!
다시 말해서, 사탄이 활용되는 말씀의 부활인데, 그러니 사탄의 부활은 말씀의 부활로 이어진다는 말이죠. 좀 어렵습니까? 악인이 악인이 되려고 하면 언약과 맞아떨어지면서 그 언약에 의해서 악인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러면 악인이 언약에 준해서 책망을 받는다는 겁니다. 즉 "네가 왜 건방지게 율례와 언약을 입에 두는가?"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영적인 존재인 악인은 말씀을 가지고 그동안 인간들을 다스리면서, 그렇게 미혹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악인이 말씀을 가지고 인간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악마는 반드시 말씀을 앞장세워서 활동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아시는 '적그리스도' 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적(敵)+그리스도' 이라는 것인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악마는 그리스도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리스도를 모방해야만 악마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있음으로 자극을 받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탄이 부활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의 효과가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계속해서 있으려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까? 십자가의 효과는 고난이고 희생인데, 악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는 것, 그게 성도의 본질이고 모습이라는 겁니다.
* 교회는 핍박을 받아야 !!
그렇게 되려면 악마가 설쳐되어야 하는데,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교회는 언제 등장하는고 하니, 교회가 핍박을 받아야 교회가 된다는 말이죠. 간판을 세운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닌데, 교회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에게 의해서 공격을 받을 때 비로소 교회다움이 된다는 겁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앞장세운, 즉 주님이 찾아온 자들의 집합인데, 그게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그렇게 핍박이란 것을 매개로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하는 모든 짓이 주님을 아프게 했고, 주님에게 수모를 가하는 것임을 깨닫는 방식으로 성도가 된다는 겁니다.
* 인간은 결코 자기를 포기할 수 없어 !!
다시 설명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자기 위주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웃이 도와주던 하나님이 도와주던 간에, 그것도 아니면 자기가 자기를 도와야 한다는 것인데, 결코 자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게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또한 예수님을 찾을 때,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 그것을 전제로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라고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결코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믿은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인데,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 바리새인이라는 말이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은 것이 아닌데, 봐도 너무나 충분히 보았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메시야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는지 모르는데, 공부를 해도 최고로 많이 했다는 말이죠.
그들의 머리가 보통이 아닌데, 오용익 목사님의 말씀대로 주관적이고 사변적으로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 좋아라고 합니까? 자기 좋아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를 좋게 해줄 이유가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그들은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물론 개혁주협회에 소속된 목사들도 답변이 전혀 없는데, 무조건 자기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모르는데, "나니까 도와주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말씀이 자기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야말로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사탄이 잠시 옥에서 풀려나서 !!
사탄이 말씀을 가지고 활동을 함으로서 이미 다 이루어졌는데, 그런데 십자가의 효과를 반복하기 위해서, 여기서 핍박이란 현상이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고 하니, 사탄이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과 교회에서 참된 성도를 핍박하는 일들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탄이 마지막 때까지 잠시 놓여있는 것인데, 그래서 주님이 악마를 옥에서 잠시 풀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금 이 시대는 악마의 시대라는 겁니다. 악마를 제한된 시간만큼 활동을 하도록 허락을 하셨다는 것이죠. 사탄이 옥에 갇혔다가 빠져나왔으니 일종의 부활인데, 그래서 마구 설쳐댄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스케줄에 의한 한계가 있는데, 무작정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제 아무리 우는 사자와 같이 택한 백성을 삼키기 위해서 덤벼들어도, 즉 말씀을 앞장세워서 그렇게 하더라도, 그들의 일관된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네 죄를 네가 알아서 처리하면 네 죄를 정화될 수 있다" 라는,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 정화와 피 !!
방금 제가 '정화' 라는 말을 했는데, 혹은 그것을 '정결', '거룩'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러한 단어를 보니 구약의 어디가 생각납니까? 레위기에 보면 이런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렇지요? 그렇다면 레위기에서는 이런 정화, 정결, 거룩을 무엇으로 표현하는고 하니, 그것을 '피'로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탄의 세계에서는 정화, 정결, 거룩에 피가 전혀 필요치 않은데, 왜냐하면 피가 들어갈 자리를 굳이 자기가 만들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신이시여, 나를 도와주세요" 라고 했을 때, 과연 어느 자리에 피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전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기도하면 주님은 그 기도에 응답을 하시고, 그것만 있을 뿐이지, 피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피가 적용될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그렇다는 말이죠. 주님의 피, 즉 주님의 목숨 바침에 자기에게 들어오려고 하면, 자기가 스스로 정화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없어야 한다는 겁니까?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 피가 들어옴으로서 !!
다시 말해서, 자기가 새로운 인간이 될 가능성이 전무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천국에 갈 가능성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다고 하면, 자기 기도나 자기 목적, 혹은 자기 기대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자기가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죽은 목숨을 대체해서 살아있는 목숨, 즉 예수님의 피가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피가 자기에게 들어온다는 것은, 자기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자기는 사람이 아닌데, 그야말로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될 때 그것만이 피, 즉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기에서의 정화와 정결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대제사장의 할 일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님께서 피를 앞장세울 때는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어이 자기가 자기를 인간으로 취급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서로 얼마나 싸우는지 모르는데, 그야말로 배틀을 벌리고 있다는 겁니다.
김수희가 불렀던 노래 중에서 '너무합니다' 라는 것인데, 여러분도 다 아시죠? 왜 사람들이 그 노래를 좋아합니까? 불신자들의 마음 속에는 그것이 계속해서 펄펄 끓고 있다는 말이죠. 제가 지금 "우리는 왜 믿음이 없는가?" 라는 것을 설명해드리고 있다는 겁니다.
*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
이제 히브리서 7장을 보겠는데, 여기 1절에 보면 '멜기세덱' 이라는 분이 나온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언약이 찾아왔는데, 그러면 그 당시 언약의 실체가 무엇인고 하니까, 여기 히브리서 7장에 보니 멜기세덱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전투를 해서 이기고, 그리고 자기 조카인 롯을 구해서 돌아오는데, 사실은 아브라함은 자기도 그렇게 이길 줄을 몰랐는데, 그래서 놀랐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때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멜기세덱을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창 14: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런데 만약에 언약의 내용이라는 것이, 그냥 "하나님이 네 죄를 용서한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고,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 그리고 그 사이에 "네 죄를 사한다" 라고, 그렇게 말씀만 주어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말씀의 실체화가 이 지상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네 죄를 사한다" 라고 하면, 마치 꿈속에서 지뢰를 밟은 것처럼 너무나 관념적이고 허황되다는 말이죠. "내가 성경말씀을 많이 보다가보니 착각한 것은 아닌가? 내가 너무나도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닌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 라는 것은 간증집회를 보면 많이 등장하는데, "너는 아마존으로 가거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과거에 부흥사들은 6.25 전쟁 때의 이야기를 많이 써먹었는데, 기적적으로 자기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자기 착각일 수도 있고 망상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말이죠.
* 특정인물이 등장함으로서 !!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어떠한고 하니, 이번 전쟁은 자기가 도저히 이길 전쟁이 아닌데, 318명으로 무려 다섯 왕을 쳐부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것인데,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주셨는지는 모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특정인물이 등장하는데, 즉 우리와 같은 인간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같은 인간이 등장하게 되니 어떻게 됩니까?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거기에 그 사람이 있다" 라는 것도 부정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의 있음을 인정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있음도 역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믿지 않으려고 해도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는데,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있다는 것을 믿듯이, 자기를 용서하시는 분이 거기에 있다는 것, 그것이 역시 허황되고 구름과 같은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증거로서 있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요구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주님이 증거로서 주셨다는 말이죠.
그분이 바로 멜기세덱인데, 그에게는 직업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살렘이라는 지역에서 제사장 일을 하던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데, 즉 영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면 영적 존재로서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에서 조용히 사시면 되는데, 고만고만한 인간들끼리 살아가고 있는, 코도 있고 눈도 있고, 그리고 몸무게와 키도 측정이 가능한 이 세상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즉 영적 존재가 그만 와버렸다는 것이죠.
* 죄를 의로 바꾸는, 제사장 기능 !!
이게 바로 언약의 실제내용인데, 즉 멜기세덱이라고 하는 기능을 가지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 소속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고, 그 기능은 땅에서는 제사장 기능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제사장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를 의로 바꾸는 기능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의 등장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하늘에서 알고 있는 죄가 지상에서 확대되고 적용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죠. 즉 하늘에서 하나님만이 아시는, 물론 인간들은 모르는 그 죄가 멜기세덱의 기능을 통해서 이 세상에 주어져서 심겨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첫째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죄, 둘째로 인간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죄, 이 둘이 서로 싸우게 되는데, 이것이 일치를 하겠습니까? 불일치를 하겠습니까? 불일치를 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신비로운 존재, 즉 영적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는 말이죠.
* 영적 존재가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
그런데 초월적 존재, 즉 영적 존재가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곧 그분이 신령하고 영적인 존재로서 우리 인간 앞에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들 자신도 자기가 그것을 미처 몰랐을 뿐이지, 이미 인간도 영적인 존재와 결합이 되어있음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역사 속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역사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식적이고 빈번한 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그것을 "저것은 마귀가 했어" 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미숙이나 전방주시태만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합리적인데, 영적이거나 신비가 아니라는 말이죠. 반면에 합리적이란 것은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인데, 즉 원인과 결과가 서로 연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이런 과학적 사고방식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미신인데, 예를 들어서, 무당이 "돼지를 바치면 병이 낫는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믿고는 싶지만 과학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미신인데, 즉 결과는 있는데 그것을 도출한 원인이 과학적이고 아니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이죠.
* 역사를 붙들고 있는 한심한 인간들아 !!
오용익 목사님이 그 모임에서 저의 편을 들어주면서 반론을 펴기를, 그게 거의 마지막 타임이었는데 말이죠. 사회자가 저지를 하는데도 했다는 겁니다(ㅋㅋ). "당신들은 역사적인 것을 고수하는데,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보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는데, 그것은 좀 설명해보세요" 라고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오 목사님이 요한복음 8장을 언급했는데, 즉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설명해보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역사를 붙들고 있는 이 한심한 인간들아, 제발 정신을 좀 차려라" 라는 것인데, 물론 오 목사님은 그런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죠(ㅋㅋ).
아브라함과 예수님 사이는 그 시간이 천 년도 아니고 무려 이천 년인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저를 초빙하신 분이 판이 더 커지지 전에 말렸는데, 거기서 끝을 내자고 나왔다는 겁니다.
왜 성경말씀을 보면서 자기 구미에 맞는 것만 찾습니까? 역사적이고 합리적인 것만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가 신비한 존재가 되기 싫다는 것인데, 즉 합리적으로 살고 싶다는 겁니다. 미신을 믿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이죠.
* 인간들이 올 수 없는 죄의 자리 !!
그러면 그냥 그것을 미신으로 돌려버리지 말고, 그것을 제사장으로 기능으로 설명을 해보자는 겁니다. 혹은 멜기세덱의 기능,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기능,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는데, 그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 죄를 의로 바꾸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 죄의 자리에 과연 인간들이 자기 능력으로 과연 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올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들이 말하는 죄는 합리적이고 자기가 아는 죄, 그것만 죄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라고 하는데, 그것을 어느 인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기가 태어나서 무슨 나쁜 짓을 해야지 죄인이지, 태어날 때부터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갓난아이가 일어서려고 의자를 붙잡고 하는 것도 역시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누가 믿겠느냐는 말이죠. 오히려 믿는 사람이 미친 사람인데, 어떻게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태어나는 것도 죄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주님의 원수로 태어난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의 원수인데, 왜냐하면 계속해서 자기 변명이 나오는데, 즉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믿음 없음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 !!
그러면 그렇게 변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를 내가 지켜야지,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지켜줄 위인은 없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것이 곧 그것인데, 그러면 인간이 마귀로부터 육체를 장악을 당해서 나오는 성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 인생은 내가 지키고, 내 자존심도 내가 지키면 되는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호소할 이유가 없다. 결국 마지막은 나다. 물론 하나님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하나님보다 내가 더 가치가 있다" 라고 하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란 겁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또한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은 믿음이 전혀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타고난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자기 죄를 아는 것일까요? 타고났다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인데 말이죠.
* 성도에는 미래완료가 시간으로 찾아왔기에 !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즉 선택된 자들인데, 그들이 곧 성도라는 겁니다. 그들에 있어서 이미 시간이 끝났는데, 그러니 완성이고 현재로 봐서는 미래라는 말이죠. 그 미래완료가 성도에게는 시간으로 찾아온다는 겁니다. 분명히 자기는 아직 미래가 남아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언약 속의 예수님으로 찾아오시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시간적으로 종결된, 즉 확정된 존재로서 결정이 난 상태에서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즉 "언약적으로 너는 앞으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의인이다" 라는 쪽으로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피가 그것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 시간 교도소 !!
여러분이 살아가는 것이 참 힘이 많이 들지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자식이나 신랑이 말썽을 일으켜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힘이 드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시간이 변화가 없이 너무나 길다는 겁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해서 지속된다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다는 말이죠.
새로운 것도 없으면서 지루한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는데, 즉 희망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것이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색다른 것을 해보고 하는데, 취미생활도 하고 말이죠. 해외여행도 그런 것인데, 즉 시간의 마디를 주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도 몸만 피곤할 뿐이지, 계속해서 시간의 지속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마치 교도소와도 같은데, 즉 인간은 시간 속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시간이 곧 감옥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언약이 찾아온, 즉 십자가의 영인 성령인 찾아온 성도의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성도는 이미 시간을 넘어선, 그 시간이 종결된 자들이라는 말이죠.
* 성도는, 시간이 종결된 자들 !!
그러면 시간의 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시간도 주님의 일이 끝났으면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시간도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있는 환경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의 일이 끝나면 둘둘 다 말아야 하는데, 그래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겁니다. 즉 시간의 길이가 의미가 없는 시대를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다는 말이죠.
무려 2,000년의 시간간격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것은, 아브라함에게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시간이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초월적인 존재라는 말이죠. 즉 시간이 있으면서도 시간 바깥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더 이상은 어떻게 변화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종결이 되었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 최고점에 도달했다는 것이죠. 하늘나라에 도착했으니, 더 이상 시간이 진행이 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간을 거두어들인다는 말이죠.
* 성도와 죄의 자리 !!
그런데 성도에게 시간이 찾아오게 되면, 성도는 시간이 시작되는 원래의 자리에 가게 되는데, 그 원래의 자리가 곧 죄의 자리라는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게 되는데, 즉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죄인인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리고 자기가 당연히 죄인이란 것이 기쁨이 되고 감사하게 되는데, 그게 성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따지는데, "주님이여,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힘들게 삽니까?" 라고 말이죠. 따진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저에게 선한 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라는 의미인데, 하지만 그것은 완료가 아니라 계속해서 미완료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지금보다도 더 좋은 인간을 가질 수 있는데" 라고, 즉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종결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자기가 아는 죄가 있는데, 그 죄를 누가 처리하는고 하니,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는데,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벌을 내려서 자기를 정화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성경말씀을 가지고 말이죠.
* 성경말씀으로 도와주는 사탄 !!
그러면 그것을 누가 도와주는고 하니, 사탄이 부활해서 성경말씀을 가지고 도와준다는 겁니다. "네가 이 말씀을 지키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 이 말씀을 지키면 귀한 네가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성경말씀을 가지고 계속해서 악마가 우리를 설득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인데, 즉 "네가 원인자가 된다면 괜찮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라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직은 시간이 남아있다.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네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악마를 우리를 계속해서 재촉함으로서 우리의 숨을 그만 헐떡이도록 만들어버리는데, 자꾸만 끊임없이 쫓기게 만든다는 말이죠. 그게 악마의 술책이라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욱 더 노력하면 너의 살림살이가 반드시 나아질 것이다" 라는 식으로 유혹을 하면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악마가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 성령이 오시면, 그게 곧 완료상태 !!
다시 정리하면, 언약이 완성되면 성령이 오시는데, 성령은 언약이 완성되지 않으면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늘나라의 보좌 우편에 계시지 않으면 성령은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게 완료된 상태인데, 그렇게 완료된 상태로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성령 자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했던 업적으로 근거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졸지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임을 알게 된 것을 성신이 임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감히 고백할 수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태어나서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아예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는 겁니다.
* 누가 나를 죄인에서 의인이 되게 하셨는가?
그렇게 성령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이미 자기가 의인이기 때문에 죄인인 것을 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자기가 죄인에서 의인이 된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게 아니라, "도대체 누가 나를 죄인에서 의인이 되게 하셨는가?" 라고 하면서, 그분을 보고, 즉 그분의 업적으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보고 기뻐하는데, 구원받은 자기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또 다시 자기가 자기를 챙기는 식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주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기뻐하는데,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주님을 대제사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죠.
* 이제 정리하면 !!
이제 오늘 강의한 것을 정리하고 마치겠는데, 아브라함이 언약과 결합되었다고 했는데, 아직은 기억지 나지요? 그런데 정작 언약과 결합된 아브라함은 그 언약의 중요성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바멜렉의 동네를 방문하면서 무슨 일어납니까?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언약의 기능을 몰랐으니, 자기 신상에 유리하게 살기 위해서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조용하게 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만 아비멜렉 마을의 여자들의 태가 다 닫히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비멜렉도 놀랐고 아브라함 자신도 역시 매우 놀랐다는 말이죠. 도대체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는 겁니다. 왜 자기가 가니까 그 마을 여자들이 임신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죠.
오히려 아비멜렉 쪽에서 영적인 것을 간파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을 보고 "당신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그는 선지자라" 라고 하는데, 신약에 오게 되면 모든 성도가 다 선지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성령, 즉 언약의 완성이 함께 하니 그렇다는 겁니다.
(창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 그는 선지자라 !!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성도라고 하면, 그러면 자기 자신이 어떤 면에서 귀한 것인지, 그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첫 번째는 "내가 나를 지킨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님이 함께 해서 나를 포기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선지자입니까? 자기를 포기하는 경우라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지키면 그것은 아비멜렉의 경우인데, 즉 언약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포기하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인데, 자기를 포기해도 기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언약의 효과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다시 기도하니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이 태가 열려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임신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번식을 의미하는데, 즉 육체의 번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의 내용은 인간의 육신에 대해서 그 위세가 육신보다는 더욱 더 강하다는 것인데, 그러니 언약에 의해서 육체가 이어질 수도 있고 또한 끊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언약의 나라인 천국에서는 육신과 관련이 없이, 즉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관계가 없이, 이방인이든 종이든 그리스도의 성령이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언약의 세계인데, 그것을 육신의 한계, 그 연약함을 가지고 설명해준다는 말이죠.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연약한 육신으로 모습으로 !!
그런데 여기서 반가운 것은, 이 영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연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 육신의 모습으로 오니 어떻게 됩니까? 아비멜렉이 보기에 자기나 아브라함이나 똑같다는 말이죠.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오셔도 자기들이나 예수님이나 똑같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하지만 똑같은 것이 아닌데, 예수님은 언약의 완성자로서, 즉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구원을 받기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은데,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으리 자신을 포기하도록 하시는데, 바로 그런 점이, 즉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점, 이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영적인 복이 된다는 말이죠.
* 왕 같은 제사장들 !!
오늘 강의제목이 '대제사장' 인데, 맞지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성도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호칭을 붙여준다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결코 제사장이 아무나 함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나약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돈만 챙기는, 그리고 믿음도 없는 우리에게 이런 호칭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제는 네가 아는 너의 방식대로 인생을 끌고 가지 않겠다" 라고 하는, 즉 "내가 너의 인생을 기어이 제사장이 되게 하겠다. 그렇게 내가 너를 다루고 사용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약속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사고는 우리가 치고, 해석은 주님이 !!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자기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종과 동침해서 약속의 자녀도 아닌 이스마엘을 낳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거기에 아브라함의 행위가 개입이 되었습니까?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한 것은 자기들 풍습에 따라서, 그들이 손님인 줄 알고 평소에 하던 대로 대접한 것이지, 천사인 줄 알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야, 천사다. 그러니 대접하자" 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는 없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일은 우리가 저질러 놓고 해석은 주님이 하시고, 그래서 천국에 가면 우리는 자기의 면류관을 주님에게 반납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머리에 면류관을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다만 우리에게는 성령을 통해서 어떤 믿음이 생기기 되는고 하니, 주님께서 우리가 제사장 기능을 하도록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자랑질이 아니고, 그런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고마움이 계속해서 흘러 넘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히 말씀을 볼 자격도 없는 저희들로 하여금 오늘도 이렇게 말씀을 보도록 허락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이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 일에 대한 결과이고 증거임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희들 안에서 제사장 기능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7,16 오후 2시에 마침.
박원순 시장님, 그렇게 한다고 정화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3 - 망하자 (0) | 2020.09.14 |
---|---|
이스라엘 만들기 (0) | 2020.08.22 |
어디 갔지? (0) | 2020.06.27 |
새로운 관계 (0) | 2020.06.17 |
나와 죄(창세기속의 그리스도) (0) | 2020.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