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무한루프

아빠와 함께 2020. 5. 13. 19:08
2020-04-30 19:09:23조회 : 50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6 - 무한루프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6 - 무한루프

20,04,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자들 !!

오늘은 교재 17페이지를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성경 안'과 '성경 밖'을 구분하고 있다는 말이죠. 성경 안에 있는 자들로는 선지자들, 사도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들이란 하나님의 천상회의를 보고 온 자들이고,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직접 만난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을 의식해서 사람을 보고 일하고 움직이는 자들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특히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에 충만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들과 오늘날 성도들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없는데, 왜냐하면 성도도 역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분명히 차이점이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사람과 상대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사람과 상대를 하게 되면 어떻다는 겁니까? 사람과 상대를 했을 때 가장 표준적인 관계를 묘사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용서를 구한 것이란 말이죠. 즉 "너, 나에게 잘못을 했지? 그러니 사과해라" 라는 것인데, 그것을 반대로 하자면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니 용서를 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관계'인가? '직분'인가?

이 세상의 인간관계의 끝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해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서 여기에 어떤 희망과 같은 것을 가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남들에게 용서를 받고 사과를 받게 되면 기분이 좋습니까? 과연 선지자나 사도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 남들에게 용서를 받고 사과를 받기 위해서 살아갑니까?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결국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인데,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면서 살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런 인간관계라는 것은 처음부터 성립이 되지 않고, 진짜 관계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은 받은 자라는 말이죠.

여기서 '직분' 이라는 것이, 그게 첫째로 인간관계라면 사람이 인정을 해주어서, 즉 "당신이 선지자를 해라. 당신이 왕을 해라" 라고 하겠지만, 그런데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을 해주어서, 그래서 부여하는 직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부여해주기 이전까지는 직분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없는데,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직분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사명을 주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것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닌데, 그래서 사도의 편지를 보면 항상 되풀이되는 것이 있는데, 즉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 인정을 받음으로서 자기 존재 가치를 !!

그렇게 "사람에게서 오지 않았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보통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에서는 누가 주는고 하니,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으로서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정지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나쁜 짓을 했는데, 그런데 자기에게 사과를 하지 않아서 억울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는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지금이라도 왔으니 괜찮아" 라고 하면서 자기가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인간사회에 있어서 마지막 희망사항인데, 즉 "나는 그동안 그 사람과 원수지간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화목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란 말이죠.

* 하나님에게도 억지를 부리는 인간들 !!

그런데 이것을 시작점으로 해서 키워서 누구에게도 나아갑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억지를 부리면서 해석을 가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는데, 이런 상태에선 하나님과 그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그래서 내가 먼저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너무나도 너그러운 분이기에 화해의 손을 내미실 것이야"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평소에 그러한 관계를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인데,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되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존대를 받는 분이 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그래서 인정을 받는 새로운 사람이 된다" 라고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능해집니까? 자기 위상과 자기 팔자는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즉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아이디어, 이게 이끌고 가는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습니까? 현실적이 아니라 너무나 비현실적인데, 완전히 장난을 치고 있다는 말이죠.

* 여기에 치고 들어오는 자들이 있었으니 !!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아는 것이 이것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형국인데, 그런데 여기에 선자자들과 사도들이 치고 들어온다는 말이죠. 또한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즉 성령을 받은 자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한계를 아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집안에 복음을 전하면 거부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현상적으로 그냥 '거부한다' 라고 하지말고, 왜 거부를 하는지, 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를 파악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관계'로 형성되어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거부하는 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말이죠.

* 누가 소경인가?

물론 우리도 이런 세계에 살고 있었었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 즉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소경이 나오는데, 거기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소경이 눈을 떴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고 비로소 눈을 떠서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과 주님의 세상이 비슷하다는 겁니까? 전혀 다르다는 겁니까? 그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죠.

* 단절된 천국 !!

그렇게 다른 세계가 바로 천국인데, 그러니 이 세상에서 하는 것과 유사한 내용은 천국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단절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말로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즉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과 주님이 생각하는 천국이 끊어져있다는 것이죠.

십자가에서 그런 능력이 나오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만 외쳤습니까? 오직 십자가만을 외쳤다는 겁니다. 그게 복음이고 핵심이라는 말이죠. 물론 천국에 가기 싫은 사람은 없는데, 하지만 그게 끊어져있기에 전혀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짜 천국을 만들어서 지향하면서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자기가 이 땅에서 생각하는 것과 통한다고 여기는 천국인데, 즉 가짜 천국이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 그렇게 통하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를 받는 인간관계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훈훈한 결말을 맞이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하는데, 즉 회개하고 반성하면 하나님과 그런 훈훈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러한 신의 세계, 혹은 천국에 대해서 사람들은 연결점이 있다고 보는데, 그래서 그 가짜 천국으로 지금도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죠.

이런 사실을 통해서 '관계' 라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데, 그게 교재 17페이지에서 20페이지까지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먼저 교재 19페이지를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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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아담의 논리를 보면, 하나님을 의식해서 오히려 따먹지 않는 것이 인간의 절대존재 가치를 훼손하는 조치가 아닐까요? 절대존재에서 필히 나오는 절대자유를 마음껏 발휘하지 않는 게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자유를 발휘하게 하신 존재의 가치를 써먹지 못하게 하는 짓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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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자유의지' !!

여기서 질문을 하고 있는데, 문장이 참으로 어려운데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고 '따먹지 말라' 라고 하신 것은, 그것은 일단 인간에게 선택권을 준 것을 맞지 않는가?" 라고 하는 생각을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자유의지' 라고 하는데, 그러한 자유의지나 자유 선택권을 하나님께서 주셔놓고는 제한시키는 셈이 되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즉 "선택을 하라" 라고 해놓고 왜 "따먹지 말라" 라는 말씀을 하시느냐는 것이죠.

그러니 인간의 자율권에 제대로 된 자율권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제한을 받는다고 하면, 그게 진정한 자율권다운 것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에게 항의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처음부터 인간에게 자율권이 없으면 무엇부터 없어야 한다는 겁니까?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 라고 하는 이야기조차도 하나님 쪽에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라고 하신 것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하나님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무엇을 하기 위해서 인고 하니, 테스트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하나님, 우리가 하는 말이 맞지요? 하나님, 그렇지요?" 라고 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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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런 점에서 선악과의 존재는, 존재로서 출발하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차라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이 조치를 취해주셔야 납득이 되는데, 그토록 인간에게 해로운 나무라고 한다면, "첫째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나무를 치워버리든지, 둘째로 아예 그 나무를 처음부터 심지를 말든지, 셋째로 나무열매를 모양새를 보기만 해도 전혀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도록 하든지, 넷째로 철조망을 만들고 고압전류가 흐르게 하든지, 다섯째로 뱀의 입을 봉해서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셔야 한다" 라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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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음'은 '없음'에서 출발해야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은 이렇게 되어야만 "따먹지 말라" 라고 하시는 하나님 본인의 취지와 부합이 되는 조치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교재 18페이지에 보면, 이런 인간들의 생각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즉 "항상 그런 주장을 할 때는, 아담은 '여기에 있다' 라고 여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없다' 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있다' 라고 할 때는 반드시 '있음'에서 '있음'이 나오면 안 되고, "내가 없어야 하는데 왜 있지?" 라는 식으로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없음에서 출발을 해주어야 있음의 의미가 있는데, 그런데 없음을 생각하지 않으니, "있는 솜씨나 발휘나 해보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게 인간들의 근본적인 잘못인데, 즉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선택권이 있다" 라는 것에서 출발을 하다가보니, '선택권 있음'이 무엇으로 되돌아가는고 하니, "내가 여기 있잖아" 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 설교시간에 왜 잠을 자는가?

그러니 설교시간에 잔다는 것은, "내가 여기 없어야 하는데 왜 있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ㅋㅋ). 지금 특정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즉 "나는 없어야 하는데, 지금 이 자리에 왜 있지? 이것은 기적이야" 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으니 저기에 있으나, 있는 것은 마찬가지야" 라는 생각을 하니, 그게 아무 의미도 없이 다가온다는 말이죠.

제가 아까 질문을 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선택권이 있다고 여기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아담의 경우에 자기 앞에 있는 그 선악과나무에 대해서, 그것을 생각할 때 꼭 자기 수준만큼만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나는 있다" 라고 하면서, 그런데 저기에 보니 선악나무가 있다고 하면, "선악나무도 있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나옵니까? "저 선악과나무의 과실을 따먹을까? 말까?" 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것이죠.

* 생명나무와 선악과 !!

그런데 여기 교재 20페이지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선악과는 아담처럼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을 아담은 전혀 몰랐는데, 선악과나무는 생명나무와 연계가 되어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후속조치로 인해서 밝혀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내가 있다" 라고 하면, 자기가 있는 것인데, 그냥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가 독자적으로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선악과가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누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 관련이 있습니까?

선악과나무는 생명나무와 관련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그만 따먹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가 하나의 세트가 되고 짝이 되는데, 그것을 인간은 전혀 몰랐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아담은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그 '있음'을 "하나님의 계심'과 연계를 시켜야 하는데, 그런데 악마가 하나님의 그 관계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아담은 독자적으로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하기 이전에 '없다' 라는 것으로 가야하는데, 그런데 그 없음은 누구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인고 하니, 구약에서는 약속의 하나님이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분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그런 관계로서 연계되었다고 하는 의미에서 '없음'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없어지는데, 즉 흙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

그러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내가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있음보다도 먼저 있다는 말이죠. 즉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없는데 있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엮어져서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 끊어지고 말았는데, 그런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즉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몸이 있으니 느낌이 오게 되고, 그렇게 해서 느껴진 것을 두고 '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그런 어떤 느낌을 되돌아보면, 그게 '나'가 된다는 말이죠.

* 느껴지는 '나' !!

예를 들어서, 길을 걸을 때는 나를 생각하지 않는데, 집에 와서는 "아, 다리가 아프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누구의 다리가 아픈 겁니까? '나'의 다리가 아프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는 어떤 식의 '나'가 되기 위해서 많은 경험을 쌓고 또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즉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는 것을 남들에게 이론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느낌이 오면 그것이 '나'가 되고, 그것을 태어나서 6개월에서 18개월로 보는데, 즉 갓난아이의 경우에는 몸이 있으니 감각만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배가 고파서 울고, 오줌이 마려워서 누고, 그렇다는 말이죠. 그때는 자기는 느끼지 못하고 엄마가 자기를 대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엄마의 몸이 자기 몸인데, 아직까지 분화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비록 엄마 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런 상태라는 겁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엄마가 보이면 웃고, 보이지 않으면 운다는 말이죠. 엄마를 요청하는데, 분화가 되지를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나'가 되는데, 그래서 엄마가 "시장에 갔다올게" 라고 하면, "잘 갔다오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엄마와 갈라지게 된다는 것이죠.

* 나는 아빠가 좋아 !!

그 다음에는 유치원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나는 어떻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면, 즉 "너는 몇 살이야?", 혹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말이죠. 그러면 그 아이는 질문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나는 누가 좋아" 라고 답변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엄마가 미리 답변을 만들어주지만 말이죠.

이 이론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되는데, 그것이 "나는 나이 70에도 색소폰을 분다", 혹은 "나는 나이 80이 넘어서 에베레스트에 도전한다"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무엇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되고 싶은 것이 참 많은데, 그것이 이론으로 끝나면 안 되고 실천에 옮기에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것이 실제로 확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것에 실패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금 이론부터 시작해서 수정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자기가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을 과연 '나' 라고 할 수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혹시나 '나'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이론을 도입한 것은 아닌지를 살펴서, 그렇게 해서 고친다는 말이죠.

여기에는 주변의 온갖 환경들, 즉 TV 드라마나 음악과 같은 것들이 동원되는데, 그렇게 해서 실천에도 옮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남을 용서하라" 라고 하는데도 용서가 되지 않을 때는, 다시 자기를 살펴서 그렇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나는 이제 남을 용서해줄 수 있는 착한 인간이 되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무한루프(Endless Loop) !!

그것이 감각에서 오고 하는데, 그것을 '무한루프' 라고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계속해서 뺑뺑이를 돈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무한순환이라는 말이죠. 그게 평생을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제가 이제 질문을 던지겠는데,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 즉 "이 전체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라는 겁니다.

이게 저의 질문인데, 아까 정답이 나왔다는 말이죠. 지금 다들 무엇을 놓치고 있는고 하니, '없음'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있음'에서 출발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무한 루프 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나' 라는 것이 형성되기 이전에 먼저 무엇이 있었는고 하니, 몸이 있었다는 것이죠.

* 몸의 현상학, 그리고 공리주의 !!

가스통 바슐라르가 주장한, 참 그분이 아니고, (메를로 퐁티?) 아무튼 '몸의 현상학' 이란 것이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이성이나 사상이 아니라 몸이 우선이다" 라는 겁니다. 니체도 그러한 주장을 했는데, 즉 인간의 '나' 라는 가치는,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살 것인가?" 라고 하기 이전에, "내 몸의 컨디션에 이익인가? 손실인가?" 라고 하는 것을 먼저 따진다는 말이죠.

이것을 '공리주의' 라고 하는데, 즉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선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무엇이 된다는 겁니까? 물론 악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공리주의에서 도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몸을 편하게 해주면 선하고 좋은 것이고, 불편하게 하면 그것은 악한 것이라는 겁니다.

제가 '공리주의' 라고 어려운 말을 했는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인간이 제 아무리 고상한 신학을 하고 철학을 한다고 해도, 몸이 아프면 짜증이 난다는 말이죠.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듯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 등등, 아무리 그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나오더라도, 자기 몸이 불편하면 모두가 귀찮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 이전에 무엇부터 있는고 하니, 감각부터 있는데, 그런 감각의 쪼가리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아직도 건강하다는 것인데,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몸이 불편하면 만사가 귀찮은데, 이게 바로 들뢰즈의 철학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의식을 한다는 것은, 즉 의식을 하면서 판단한다는 것은 이미 '나' 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니 '나'가 우선이 아니고 그 이전에, 그렇게 의식하기 이전의 무의식 상태에 있었던 모든 감각들, 즉 '나'가 있기 이전에 밑에 있던 다른 지층에서 이미 그런 것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런 의식들이 있어왔다는 말이죠.

* 도덕, 종교, 진리는 모두가 짝퉁 !!

그러니 인간의 '나' 중심의 도덕, 종교, 진리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가 다 엉터리이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인간의 동물과도 같은 본성, 그것이 가장 진솔하고 솔직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니체의 철학인데 말이죠.

예를 들어서, 친구끼리 친하다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면 됩니까? 처음에는 예의상 받아주는데, 나중에는 화가 난다는 겁니다. 지금 직장생활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전화까지 받으려고 하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긴장도를 부수어 버려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전화를 무시할 수도 없고 말이죠. 그러니 추가적으로 더 신경을 써야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식도 마찬가지인데, 자식은 자기가 키웠으니 언제든지 아파트의 현관문 벨을 눌려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김치를 바리바리 싸들고 간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때 며느리가 샤워를 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느냐는 겁니다.

사적인 영역에 함부로 침투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데,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사전에 미리 연락을 하고 찾아와야 한다는 말이죠. 제일 좋은 것은 경비실에 맡겨놓고 그냥 돌아가 주는 것인데, 그래야 예의가 바른 부모가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은 이 무한루프에 다 들어있는데, 자기가 선택해서 실천에 옮긴다고 하는 것은 옛날 이론이고, 그러면 지금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아무리 바르고 살려고 해도 환경이 바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미셀 푸코' 라는 철학자의 이론이라는 겁니다.

* 환경에 휘둘리는 인간 !!

자기는 이제 취직을 하면 낮에는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한바탕 춤을 추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잠을 푹 자고 다음날 아침에는 가뿐하게 출근하겠다고 해도, 이제 막 시작한 기업이나 대기업에 취직을 하면 칼 퇴근이 있습니까? 야근이 기본인데, 제대로 쉬는 날이 없다는 말이죠. 나이트클럽은 고사하고 집에 가서 잠을 잘 시간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개발시간, 자기만의 취미생활,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제 아무리 하고 싶다고 해도, 그만 환경이 우세해서 "네가 적응을 할래? 말래?" 라고 한다는 겁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이 그것인데, 회사에서 요구하는 전문지식이나 창의적인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일을 맡겼는데 하루종일 더듬거리고 있다고 하면 사장은 속이 터지는데, 그래서 회사에서는 인턴제도를 둔다는 겁니다. 제대로 일을 하는지, 적성에는 맞는지, 그런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죠. 6개월 동안 일을 시켜보는데, 물론 보너스도 주지 않고 말이죠. 그때는 필요한 한 사람만 뽑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뽑아서 그 중에서 능력이 있는 자를 고른다는 겁니다.

인간은 다 자기 나름대로 포부가 있는데, 그런데 환경이 자기보다 더 세다는 말이죠. 이게 미셀 푸코의 이야기인데,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 환경 중에서 제일 큰 것이 '국가' 라는 환경인데, 그러면 국가는 무엇으로 되어있는고 하니, 계급으로 되었다는 말이죠. 이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이라는 겁니다.

* 마르크스와 그람시 !!

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제로 적용시킨 것이 촛불집회라고 할 수도 있는데, 즉 "우리 힘으로 국가를 뒤집을 수 있다" 라는 겁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생산수단을 가진 자에 의해서 계급이 생긴다" 라는 것인데, 이러한 생산수단, 즉 기계인데, 그런 기술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의해서 계급이 생긴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계급에 억눌리면 안 되고 뒤엎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배를 받던 계급에서 지배를 하는 계급으로 바뀌게 되는데, 노동자가 자본가를 엎어버린다는 말이죠. 이게 마르크스의 '계급이론' 이라는 겁니다. 노동가가 자본가에게 억눌리니, 그것을 뒤엎어버리자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마르크스는 무엇인고 하니,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환경을 내 손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더 세분화시킨 사람이 알튀세르, 쌍테무페와 같은 좌파 철학자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이 세상의 모든 정치이론을 이데올로기, 즉 허상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람시' 라는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것은 허상이 아니고 실제라고 해서, '헤게모니' 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즉 "누가 지배권을 갖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 모든 것들을 따지고 보면, '나' 라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인데, 공리주의의 경우에는 "내 몸이 편한 것이 곧 진리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 라는 것이 먼저 있다는 것인데, 그 '나'를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론들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오면서, 공산주의 입장의 인민 민주주의가 아니고, 인간의 자유를 극대화하면서도, 그런데 환경이 나쁘게 되면 자기가 사는데 불편하다는 겁니다. 즉 도둑놈이 많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적당히 주면서 자기도 적당히 행복하겠다는 이론이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롤스가 주장한 '의무감' 이라는 것인데, 즉 "약자부터 배려하는 사회가 제일 좋은 사회다" 라는 겁니다.

* 롤스의 '자유민주주의' !!

바로 이 롤스의 이론에 의해서 경제는 자유주의, 그리고 정치는 민주주의가 되는데, 그것을 합쳐서 '자유민주주의'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오늘날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롤스의 자유민주주의가 되어버리면, 대다수의 맞지 않는 의견은 강제로 밀어내야 한다는 것이죠. 국가의 법으로서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말고 각자각자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자" 라고 하는 것이 '샌들'의 주장인데,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강의로 유명한 그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는 겁니다. 그 양반이 주장한 게 일종의 공동체주의인데, 협동조합을 만들자는 것이죠.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끼리, 그렇게 모여서 살면 된다는 겁니다.

* 들뢰즈 - '감각만 있다' !!

그러니 이러한 모든 이론들이 '나'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 '나'를 부수자. 도대체 '나'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지?" 라고 해서 그 '나'를 들여다본 사람이 곧 들뢰즈라는 말이죠. 들뢰즈는 인간 속에는 감각만 있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즉 "그것은 '나' 이전의 감각이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이 감각을 침범하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감각을 침범하면 자동적으로 반발이 튀어나오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것은 '나'의 감각이 아니라, '나' 이전의 감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나' 라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보았다는 것이죠. 인간은 아무리 따져보아도 결국은 '나' 중심인데, 그러니 그것이 결국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프로이트는 그 '나'를 더 깨어보았는데, 그 안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살고자 하는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죽고자 하는 충동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에로스'와 '타나토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서로 모순되게 같이 있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무의식 속에 말이죠.

인간에겐 무의식이 있고, 이 무의식 속에서 의식이 되면서 '나' 라는 자아가 생긴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충동이라고 해서,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무의식은 쾌락으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 쾌락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바깥으로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 인정을 받는 '주체' !!

하지만 그것은 허용이 될 수 없는 욕망인데, 그래서 그것을 도덕법으로 차단을 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바깥에는 허용된 욕망만이 있게 되는데, 그것을 자아가 아니고 '주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이 자기를 인정해줄 때 비로소 인정을 받는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주체가 어려우면 '나', 즉 자아라도 해도 되는데, 그러니 허용될 수 없는 욕망은 "나오지마!"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누르고 있다는 말이죠. 오줌은 화장실에서 눠야지 길가에 누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갓난아이들에게는 이게 통하지 않는데, 도덕법과 더불어서 '나'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나'가 사회법과 더불어서 발전하는 '나'가 되려고 하면,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는 욕망만 자기가 감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감당할 수 있는 욕망이 많게 되면, 그것을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성화가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도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남들보다 더 많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잠재된 욕망과 쾌락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룩하고 고상한 사람이 되고, 반면에 그것을 감당할 수는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러면 정신병 환자가 되고 만다는 것인데, 막 되먹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행동을 함부로 하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는데, 이게 프로이트의 이론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쾌락을 잠재울 수 있는 그 능력, 그것이 '나'의 능력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환경이 좋으면 그렇게 되지만, 부도가 난다든지 이혼을 한다든지 몸이 아프든지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가 이전에 감당했던 것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허용될 수 없는 욕망이 그만 '나'를 박살내고 만다는 겁니다.

* 하지만 치매에 걸리면 !!

그 대표적인 것이 치매인데, 즉 정신적으로 해리가 된다는 말이죠. 풀어진다는 겁니다. 긴장도가 느슨해진 상태가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완전히 안면몰수인데,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없다는 말이죠. 평생을 자기가 지켜왔던 신조든 뭐든 간에 그만 공중에 날리는 부도수표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가게 주인이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지요? 그러면 제가 두 달 동안 세를 절반 빼드리겠습니다" 라고 해놓고, 나이가 많아서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얼마 뒤에는 "없던 것으로 합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도 전혀 책임을 지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식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 엄마가 그렇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전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는 아직 나이가 60대라서 감당할 수 있어서 그렇지, 자기가 나이가 80이 넘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말이죠.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요즘 바빠서 교회에 나가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지 못합니다. 나중에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시간이 있으면 그때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겁니다. 그때 무슨 정신으로 성경을 보고 공부를 하느냐는 말이죠.

* 나는 ( )이다 !!

그러니 결국에는 "나는 ( )이다" 라는 것을 자기가 기억하고, 자기가 미리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나' 자체가 있기 이전에 쾌락이 있다고 했고, 그리고 들뢰즈는 감각이 있다고 했다는 말이죠. 그냥 감각뿐인데, 그러니 추우면 춥고 더우면 덥다는 겁니다. 일종의 원형질과도 같은 것인데, 즉 형질이 구성되기 이전의 상태라는 말이죠. 모든 것이 죽처럼 허물허물해진 상태라는 겁니다.

여기서 무한루프를 다시 그려보면, 먼저 감각은 동물적인데, 이것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인데 말이죠. '나' 라는 것은 이미 의식이 된 것인데, 그렇게 의식된 '나'가, "나는 무엇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죠. 이것은 주로 청소년들인데, 그들에게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라고 하면, "나는 의사가 될래요" 라고 하는데, 즉 이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실천에 옮기게 되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실수와 실패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말이죠. 의대에 떨어질 수도 있고, 또한 걸린다고 해도 학교에 가면 교수와 선배들에게 엄청난 핀잔을 들어가면서 죽으라고 공부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겪게 되면 어느 정도 완료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없는데, 그러면 무한루프에 다시 또 들어간다는 말이죠. "내가 지금 비록 외과의사지만, 미국의 홉킨스 의대에 있는 그 의사보다는 못해. 그 사람은 논문을 너무 잘 썼는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라고 하면서, 다시 결핍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또 다시 책망하게 되고, "나는 너무 일만 했어" 라고 하면서 술을 한 잔 마시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잠자고 있는, 즉 허용되지 않는 욕망을 깨우는 것인데, 즉 '나'를 일시적으로 부순다는 겁니다. 나이트클럽에 가서 밤새도록 춤을 추는 것도 그렇고 말이죠.

* 나를 부수는 금식기도 !!

그것을 종교적으로 보면, 자기를 부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금식기도라는 겁니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자기를 다시 정신을 차리도록 만드는데, 즉 이론을 장착한다는 말이죠. 그 이론은 목표인데, 즉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부터는 새벽기도회에도 빠지지 않는 성도가 되고 싶어" 라고 하든지, "나는 파키스탄에 가서 전도를 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표를 잡아서 실천에 옮기게 되면, 그러면 자기가 목표로 한 것과 맞아떨어집니까? 일치가 되지 않는데, 그러면 또 다시 시작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아무리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왔다고 해도, 그 밑바닥에는 도저히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이 계속해서 너에게 결핍을 남길 것이다. 그 어디를 가도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다. 네가 어떤 생활을 해도 안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트로트 음악을 좋아한다. 그래서 크면 트로트 가수가 될 거야" 라고 한다면,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막상 노래를 불러보면 만만치가 않다는 겁니다. 선배들은 위에서 눌리고, 후배들은 밑에서 치고 올라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노래연습을 하는데, 그렇게 연습을 한다는 것은 자기를 깨는 것이란 말이죠. 힘이 든다는 겁니다. 살도 찌면 안 되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다이어트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감각적으로 몸 중심으로 가는데, 하지만 이 몸도 더 쪼개보면 몸도 없고 세포의 감각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라는 것은, 그게 공산주의가 되던 자본주의가 되던 간에 모든 것이 자기 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투표를 할 때도 어떻게 합니까? 자기 몸이 편한 쪽으로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 라는 것에 나왔는데, 그러니 이 전체의 잘못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게 저의 질문인데, 그것은 바로 "나는 있다" 라는 것인데, 바로 여기서 출발하니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 무한루프와 기독교 !!

그렇다면 이 무한루프를 기독교에 적용을 시켜보면, "감각 나 이론 실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나'를 잊어버리는 것, 불교에서 그렇게 많이 한다는 겁니다. '나'를 생각하니 너무 힘들어서, '나'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힘든 노동을 한다든지 금식을 한다든지 해서, 즉 '나'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해서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말이죠.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거듭남'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냥 거듭난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 거듭났는지, 즉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 나는 ( )을 해야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 )에 들어가는 모든 정보는 어디서 얻겠습니까? 성경에서 찾는데, 그래서 구약의 율법과 사도바울의 명령 등, 모든 것을 다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 실습에 들어가는 인간들 !!

그렇게 해서 실습을 해보는데, 그것이 곧 실천이고, 바리새인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것을 어둠이고 악하다고 보셨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 제가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하면서 감당할 수 있는 쾌락과 없는 쾌락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에 도덕법이 들어갔는데, '나' 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도덕법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말이죠.

그것 때문에 제가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인간은 남이 자기에게 사과를 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느긋하게 받아주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가장 이상적이고 착하기 그지없는 사람으로, 용서를 해주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는데, 그렇게 주기도문에도 나오니 모든 것을 '나'에게 다 집중을 시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나는 성화가 되었다. 거룩한 사람이다. 천사와 같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사람이 당연하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옮긴다는 것이죠. 그렇게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서 이 세상에는 공리주의가 작동한다는 겁니다. 공리주의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자기 욕망을 만족시켜주면 그것이 곧 선이 된다는 것인데, 반면에 자기를 불편하게 하면 그것은 악이 된다는 말이죠. 즉 사탄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세계에서 자기만이 철저한 천사가 된다고 하면, 그러면 이 사회에서 어디 취직이 되겠습니까? 될 리가 없는데, 회사에서 하는 모든 것이 다 경쟁이란 말이죠. 경쟁이란 것은 용서를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기는지 한 번 해보자는 겁니다. 게임판이니 당연히 이겨야 한다는 것이죠.

* 따박따박 !!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경쟁이 싫어서 어디로 가는고 하니, 공무원 시험을 치든지 공기업에 입사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공무원이 되면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것이 있는데, 굳이 경쟁을 하지 않아도 달마다 나오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코로나19가 제 아무리 설쳐도, 교사들은 월급이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말이죠.

그래서 친구들이 대기업에 취직을 해서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자랑을 해도 참는데, 코로나와 같은 사태가 터지면 그래도 따박따박이 최고라는 말이죠. 그 잘나가던 대한항공의 조종사도 잘릴 판이지만, 그래도 교사들은 집에 있어도 월급이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 강의를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겠지만 말이죠.

그러니 모든 것이 '나' 중심인데, 즉 "나는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고 싶다" 라는 겁니다. 창세기를 보던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미 절대적인 '나' 라는 것이 여기에 박혀있다는 것이죠. 제 아무리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해도, 전부가 다 '나'를 강화시킨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전체를 '악' 이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 무한루프가 왜 악인가?

그러면 이제 질문을 하겠는데, 여러분이 강의를 잘 들었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이죠. "이것이 왜 악입니까?" 라는 겁니다. 이 전체, 즉 무한루프가 왜 악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관계' 인데, 즉 연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독자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추구합니까? 이 '나'를 있음에서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감각에서 없음으로 만들고, 그 없음에서 유일하게 있는 '나', 유일한 존재,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 예수님과 연계해서 '나'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 주님의 관계, 곧 '언약' !!

그러면 '나'가 중요합니까? 이 연계성이 중요합니까? 연계성, 즉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이죠. 주님과 '나'의 관계가 중요한데, 그 관계를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성도가 없는 것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앞에서 선지자, 사도,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을 언급했는데, 특히 여기서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을 받은 자로서, 모든 성도의 대표가 된다는 겁니다. 사도는 아닌데, 집사지만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분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자기를 증거했습니까? "나는 ( )이다" 라고, 그것을 설교하다가 돌에 맞았느냐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주님은 ( )이다" 라는 것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나'에게서 주님으로, 그런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누구의 몫인고 하니, 사도행전 7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성령의 충만인데, 그렇게 성령을 받게 되면, '나'에게서 주님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하루하루 자기를 주님께서 살려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성도의 삶이란?

그러면 '산다' 라는 것, 즉 '있음'은 기적이 되는데, 그러면 성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기는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를 계속해서 여기에서 발산하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는 죽어도 되는데 계속해서 더 살게 되는 그 이유, 그 의미, 그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이란 말이죠.

그런 성도에게는 성령에 의해서 항상 관계성이 투입되기 때문에, 그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나'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누구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여기서 살아가는 모든 경험, 즉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그 모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손을 대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주신 분이 이루는데, 그것은 문제의 출제자가 그 해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그 이유를 모르는데, 하지만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그것을 안다는 겁니다.

경상도에서 '올케놀이(?)' 라는 것이 있는데, 납작한 돌맹이를 먼저 던져놓고 한 발로 뛰어가고 하는 놀이가 있다는 말이죠. 혹시 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먼저 던져놓고는, 그 던지신 분이 가서 언약을 집어서 완수하고 돌아오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1번을 통과하면 2번으로 가고, 그리고 3번으로, 4번으로 계속해서 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던져놓고 본인이 회수를 하시는데, 그 언약의 주인공이 곧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현실이라는 것이 어렵지가 않은데, 매우 쉽다는 말이죠.

*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

* 질문 - 다른 목사님들의 강의를 듣다가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 전혀 핀트가 맞지를 않은데, 그분들은 주로 '지정의'를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목사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답변 - 그것을 제가 숫자 '3'의 놀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형상은 지정의(知情意)로 되어있는데, 여기서 지(知)라는 것은 믿음에 대해서 지식으로 진리를 알아야하고, 그리고 의지가 있어야 하고, 또한 실천을 해야한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논리를 신학교에서 얼마나 많이 강조하는지 모르는데, 그것은 '오리겐' 이라는 고대 신학자가 주장했다는 말이죠.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는 안디옥의 신학자인데, 이게 우파와 좌파로 나누어지면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

이게 무엇인고 하니, "인간 이성의 힘으로 어떻게 천국에 가는가? 거기에 아이디어가 있는데, 그것은 죄 많은 죄인이 성화가 되어서 의인이 되면 된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게 바로 주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데,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죄라는 개념도 언약에 준해서 새롭게 정립이 되어야하는데, 의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바로 언약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그만 '나'를 집어넣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그만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나는 죽어야 하는데 오늘도 왜 이렇게 살아있지?" 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나를 천국에 집어넣겠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는 놀면 안 된다는 것인데, 천국에 가려면 무엇이라도 해야한다는 것인데, 부지런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심히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 )이다" 라고 하는 그 ( )안에 온갖 좋은 것들은 다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습해서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돌아와서 더욱 더 이론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이제는 실천이 가능한 이론으로 재무장을 해서 또 다시 실습에 나서는데, 그렇게 해서 안 되면 또 다시 돌아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나'를 더욱 더 괜찮은 '나'로 조작해낸다는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 7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 화기애애(和氣靄靄) !!

이게 바로 언약인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은 죽이기로 작정을 해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에, 결혼식장이 아니라 장례식장에 가서 우리 인간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제목을 처음에는 '장례식장에서의 화기애애' 라고 잡았는데, 그것을 신약으로 바꾸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의 화기애애'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존재이고 사건이니, 모든 성도의 모임이라는 것은, 자기 머리 위에 다 십자가를 지고 만나는 화기애애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죽은 자가 오늘도 활동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만나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되는 화기애애라는 말이죠.

그러니 어떤 꼼수나 노림수가 없는데, "오늘 성경공부를 해서 내 인생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하겠다" 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나는 진작에 죽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직도 살아있게 하셨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따라서 성도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의 살아계심을 대외적으로 발산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는 겁니다. 자기의 살아있음이 아니고, 주님이라는 말이죠. "이래도 주님이 없다는 말인가?" 라고 할 정도로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주님은 이 세상에 없는 분인데, 즉 없는 분을 증거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없는 신이 살아있는데, 이 없는 신이 있는 신을 박살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게 이 세상의 있는 신이라는 겁니다.

* 다시 '무한루프'를 !!

무한루프를 다시 해보겠는데, 강의제목으로 이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말이죠. 인간은 직감을 하는데,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면 다 그렇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자아를 의식하는데, 그래서 "과연 나는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그것을 이론적으로 공부를 하고, 이것은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가 아니고 사회의 경험과 체험인데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해놓고, 그것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은 그러한데 실제로 그러한지, 실제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실습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면 행복할 것인가?" 라는 것은 이론인데, 그래서 실제로 시집을 갔다는 말이죠. 어떤 여배우는 재벌에게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그만 이혼을 했는데,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에게 시집을 간 고현정이 그렇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어떤 상상한 세계에 실제로 실천에 옮겨보니 어떻습니까? 자기가 이 집안의 며느리로 버틸 것인지, 아니면 이혼을 해서 탈출을 할 것인지 자기가 결정하게 되는데, 그렇게 결정하게 되면 "그것이 나였어"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초기에는 행복한데, 그런데 시간에 시달리게 되면 그 행복이 얼마나 가겠느냐는 겁니다.

아주 넓은 집을 구입했다고 하면 처음에는 좋은데, 그래서 "여기는 아빠방, 여기는 엄마방, 또 여기는 오빠방, 그리고 여기는 내방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대판 싸우고 나면 모두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처음에 들어갈 때는 그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여기고 들어갔는데, 그렇게 같이 살아보니, "역시 혼자 사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죠.

* 측량기사는 어떻게 무한루프가 되는가?

이게 무한루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는데,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측량기사는 어떻게 무한루프가 되는가?" 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측량기사' 라는 특정한 직업을 왜 언급했는고 하니, 보통 직업은 주로 사람은 만나는데 그런데 측량기사는 무엇을 합니까? 측량기계를 들고 들판에 가게 되는데, 그러니 사람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측량기사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만족해할까요? 측량기사는 주로 20대나 30대의 젊은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죠. 그래도 하루종일 나가서 측량을 하게 되면 다리가 아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기다릴까요? 그들도 역시 월급날을 기다리고, 또한 회사에서 승진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물론 회사에 자기 혼자라면 느긋하겠지만, 그런데 신입사원이 들어와서는 상사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자기가 인정을 받는다는 것에 손실이 주어지는데, 즉 자기만 인정을 받다가 누가 들어오면 그게 깨진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시집을 갈 때는 혼자였는데, 그런데 동서가 생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더 사랑을 받는 며느리가 될 것인지, 여기에 대해서 경쟁이 생긴다는 겁니다. 동서가 "형님, 형님!" 라고 하면서 약이란 약은 다 올리고, 거기에 시부모가 동서를 편애한다는 생각까지 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인간의 자아보다도 욕망과 쾌락이 더욱 강해 !!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측량기사라는 전문직이 인간의 자아가 내뿜는 욕망,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쾌락, 그것을 다 덮을 수가 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의 자아보다도 욕망과 쾌락이 더욱 세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 어떤 전문직도 소용이 없는데, 그게 목사가 되던, 장로가 되던, 집사가 되던 간에 말이죠.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자기 몸의 충동을 이겨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라고 해도, 그게 며칠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죠.

"주님, 더 이상은 소원이 없습니다" 라고 해도, 그게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저 여자와 결혼만 한다면, 내 목숨을 내놓아도 괜찮습니다" 라고 해도, 그게 몇 년, 아니 몇 달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무엇이 빠졌는고 하니, 언약이 빠졌다는 겁니다. 즉 주님과 연계성, 그것이 없다는 것이죠.

* 참된 관계는, 오직 아버지와 아들에게만 !!

그렇다고 하면 이제 끝으로 제대로 된 연계, 즉 관계인데, 그것을 지난 낮 시간에 이야기를 했는데, 즉 "제대로 된 관계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아버지와 아들에만 관계가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맺어져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게 언약이 완성되면 그게 처소가 되는데, 그렇게 처소가 마련되면, 그 처소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고, 아들과 성도가 하나가 되고, 또한 아버지와 성도가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말이죠. 그러니 성령 자체가 처소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데, 23절에 보면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우리가 성도라고 해도 사실상 성도는 없는데, 인간의 몸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완성된 언약을 가지고 오시게 되면, 즉 아버지와 아들의 그 관계를 가지고 오시게 되면, 즉 처소를 가지고 우리를 덮치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발생하는고 하니, 언약에 준해서 성도가 생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인지 아닌지는 무엇으로 결정이 됩니까? 언약의 완성상태인지 아닌지, 그것으로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언약의 완성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인데,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마련된 처소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 '우리'의 천국 !!

그래서 '나'의 천국이 아니고 '우리'의 천국인데, 즉 주님의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언약에서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약이 자기를 새로운 공간으로, 그렇게 구성을 시켜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도에게서 나올 것은 무엇밖에 없습니까? 그것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인데,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 라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서 죽었다는 겁니다. 물론 사도바울도 그러하고 말이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그게 로마서 14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즉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그렇데 된다는 말이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언약적으로 백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없는 백성인데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는 말이죠.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주님의 증인으로서 !!

그러니 성도의 바깥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죽어 마땅한데 주님의 살아계심, 그것 때문에 아직도 나는 살아있다" 라는 겁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성령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모든 것이 나 중심이 아닌 주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살아계심이 더욱 더 중요한, 그런 인생을 저희들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4,30 오후 7시에 마침.

더 이상 빨 손가락조차 없어도, 오직 주님만 증거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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