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여기서 ‘그루터기’는 남아 있아 있지 아니한가? 그러면 다 잘린 것이 아니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 ‘그루터기’는 바로 이사야의 존재성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선지자를 이스라엘을 보내어 선지자도 같이 이스라엘의 멸망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래놓고서, 모든 것을 저주로 잘라내는 가운데 유일하게 남겨진 자되게 하십니다.
이 원리는 장차 메시야가 이 땅에 존재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지상에 보내시고, 아들을 포함해서 모두가 사정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 그 중에서 유일한 지점, 십자가를 통해서 긍휼을 나타내시어 예수님을 사흘 만에 살려내십니다. 이로서 예수님이 유일한 그루터기, 곧 남은자Remnant가 되십니다.
전체 동일한 질 가운데 한 부분을 남은 자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다른 질로서 남은 자되게 하시는 겁니다. 즉 전혀 남은 자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 긍휼에 영역에 들어선 사람이 바로 남은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네들 중 일부는 남고 일부는 잘린다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다 다 잘립니다.
바로 이러한 조치가 합당함을 아는 자가 예수님의 영을 받아 새로운 남은자로 포함된 자입니다. 역사적으로 인식되는 이스라엘이 그대로 신약의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이 역사적 계열은 막히게 됩니다. ‘역사적 연속성’이 아니라 ‘언약적 연속성’입니다.
언약적 연속성은 예수님에게 국한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 언약적 연속성을 위하여 사자Lion 같은 호령으로 자기 백성은 애굽이나 앗수르라는 적들 속에서도 여지없이 불러내십니다. 육적인 그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해내십니다. 그만큼 인간의 육의 한계는 십자가로 인해 그 무가치성이 드러난 겁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죽어서 이 땅에서 사라지는 그 자체가 사명입니다. 그런 사명을 통해서 성도가 증거하는 것은, ‘긍휼이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교회 수요설교 200603 "은혜로 남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