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주님의 흔적

아빠와 함께 2020. 4. 18. 12:47
2020-04-13 15:07:26조회 : 39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5 - 주님의 흔적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5 - 주님의 흔적

20,04,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창조, 그것은 '흔적' !!

성경에 보면 이 세상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우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한번 창조가 되었으면 당연히 오래가야 한다" 라고 하는 인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를 오해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 그것은 오래간다고 하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그것은 그냥 흔적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창조의 흔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흔적으로만 존재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흔적에서는 창조주를 알 수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그것으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흔적된 것에서 어떻게 창조주를 알 수 있는고 하니, 이 흔적이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라지게 되면 내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창조의 원리라는 말이죠. 그러니 흔적조차도 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릴 때, 그때 비로소 창조의 원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 이 세상을 다녀가신 예수님 !!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도 역시 사라졌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인간들 속에 오셨다가 가셨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잠시 오셨다가 다녀가셨는데, 즉 사라지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라짐으로서 창조주의 창조원리가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요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셨다가 사라졌다고 하면, 우리의 삶의 목적도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 그게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이 땅에서 버티려고 하는데, 즉 사라지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라진다고 하면 허무감을 느끼기 때문에 말이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자기는 어디까지나 창조주의 흔적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흔적이 창조주 역할을 하려고 하다가보니, 즉 신이 되려고 하다가보니, 사라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사라지셨는데 말이죠. 사라져야만 진리가 나오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 소멸과 버팀 !!

사라지지 않는 것을 버틴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소멸되는 것과 버티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버티게 되면 자기가 곧 진리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는 진리다" 라고 하게 되면, 여기서 질문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질문하는 그 방향이 어디인고 하니, 자기가 진리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데, 그러면 자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 목사님, 천국에 가면 나는 어떤 생활을 합니까?

예를 들어서, "목사님, 천국에 가면 나는 어떤 생활을 하게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슨 의도냐는 겁니다. 이 질문 속에 과연 사라짐이나 소멸과 같은 취지가 들어있습니까? 그런 것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라지셨는데,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을 때,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창조했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오해라는 말이죠. 창조를 한 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창조의 이유인데,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에게로 가셨는데, 그렇게 오셔서 가심으로서 이 세상은 그만 바람이 빠진 풍선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풍선에 바람이 들어있으면 빵빵한데, 그런데 바람이 없으면 쭈글쭈글하다는 말이죠. 그냥 껍데기만 남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이 오셨다가 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 이 세상은 주저앉게 된다는 말이죠.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유난을 떨 필요가 없는데, 당연하다는 겁니다. 지진이 발생하고 또 가뭄이 생기고, 그래서 못살겠다고 하는데, 원래 인간은 이 땅에서 그렇게 살기가 힘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주님이 다녀간 다음부터 이 땅은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못살겠다" 라는 것은 "나는 버티겠다" 라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인데, 즉 영원히 버티고 싶다는 것이 마음 속에 내장되어있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을 하겠는데, 하나님은 이제 창조를 했으니 손을 떼라" 라는 겁니다. 자기가 신이 되어서 영원히 살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 모든 피조물들은 사라지기 위한 흔적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 아니고, 피조물은 창조의 흔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워버리면 그냥 지워진다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뭔가 있는 것은, 흔적 자체를 위해서 흔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 흔적을 남긴 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누가 우리를 이렇게 창조하셨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대변해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 오셔서 사라지심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피조물들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기 위한 흔적이었음을 알려주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흔적이 사라지면서 내뿜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즉 흔적이 분해가 되면서 진리를 내뿜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바이러스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조금씩 와해가 되고 소멸이 되면서, 그 내부적인 성질이 바깥으로 내뿜어지면서 발현하고 표현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피조물이라는 말이죠.

해와 달과 별도 역시 그러한데,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것이 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었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빛을 발산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빛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시커멓게 되는 것이고 곧 사라진다는 의미인데, 그것들은 빛을 잃으면서 창조주가 하신 일을 드러내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그 살았다고 하는 인간이 죽어가면서 창조주의 마음과 뜻과 계획과 속성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 피조물로서 창조된 이유라는 것이죠.

* 죄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보여주는 조건 !!

그러면 인간은 왜 죽습니까? 로마서 6장에 보면, 인간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만약에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죄를 이긴 사람이 되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서 죽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죄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보여주는 조건이 된다는 겁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창조의 모델은 예수님 !!

여기서 해답을 미리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를 하실 때는 누구를 모형으로 하셨는고 하니, 그게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모형으로 하셨는데, 즉 예수님의 주되심이란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는데, 바로 그분을 창조의 모형으로, 즉 모델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창조는 누구를 중심으로 하는고 하니,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몰려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모든 창조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을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보좌가 나오는데, 이렇게 보좌가 있으면 여기에는 24장로들이 있다는 겁니다. 24장로들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주변에는 천사들이 있는데, 그들도 역시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성전에 천사가 나오는데, 그들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각자 날개가 6개가 있는데, 그 날개로서 날기도 하지만 자기를 가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를 낮추는 것인데, 모든 피조물들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사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그러니 "천국에 가면 나는 어떤 생활을 합니까?" 라는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오직 주님으로 인해서 영원히 살고 주님을 영원히 찬송한다는 겁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데, 물론 성도는 죽기 이전에 성령을 통해서 미리 주님을 찬송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데, 자기가 살아가는 힘, 그리고 자기가 죽는 힘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즉 창조주가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흔적이라는 말이죠. 흔적이란 말은 영원한 실상이 아니라는 것인데, 소실이 되고 소멸이 된다는 겁니다.

* 인간은, 사라지는 눈사람 !!

어제 낮 시간에 '울라프(?)' 이야기를 했는데, 만화영화 '겨울왕국'에 나오는 눈사람인데 말이죠. 눈사람의 특징이 사라진다는 것인데,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 완고함으로 버티고 지키려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눈사람이라는 말이죠.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는 다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은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하는데,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녀갔다는 말이죠. 그분이 멀쩡하게 오셨다가 멀쩡하게 간 것이 아닌데, 이 땅에서 그만 소멸이 되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것이죠.

인간들이 없어지라고 예수님을 죽였는데, 멀쩡하라고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라지라고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사흘만에 죽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죠. 눈사람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개인 이야기라고 해버리면 안 되는데, 항상 그 기준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 질문은 창조주만이, 인간은 그 해답 !!

만약에 개인의 의견으로 마감이 되면 그것은 개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고 십자가와 연관되면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의견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에 가면 나는 어떤 생활을 합니까?" 라는 질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식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한 질문은 정말로 곤란하다는 것이죠.

인간은 소멸되기 싫어서 버티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보니 자기가 진리역할을 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질문을 한다는 말이죠. 질문이란 것은 자기가 하면 안 되는데, 창조주만이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피조물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피조물 자체가 해답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5페이지를 보겠는데, 성당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해놓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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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성당을 보면, 건축물을 지을 때 반원형의 구덩이에 동굴처럼 파서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안치해놓고(앱스, APSE), 거기에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으로 여러 개의 기둥을 줄줄이 세워놓았습니다. 그것을 회랑이라고 하는데, 벽은 없고 기둥만 있습니다. 그런 건물 안에 이런 장치를 만든 것은, 성당이 있을 동안에는 유지가 되지만 무너지면 없어지고 맙니다. … 해답으로 존재한다면 그 자체가 영원해야 하는데, 이 영원함이 망상의 세계에서는 사라짐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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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짐 자체가 곧 해답 !!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해답이기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겁니다. 즉 사라짐 자체가 해답이 된다는 말이죠. 여기 교재에도 나오지만,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데,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앞서서 예수님께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 라고 하셨는데, 즉 "나의 사라짐을 이해하는 자는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을 한다는 말이죠. 즉 질문을 자기가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조금 전에 질문을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곧 진리라고 우기기 때문에 자기가 질문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자신을 사라지는 대상이 아니라 영원하다고 본다는 말이죠. 본디오 빌라도의 경우에도, 자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요 18: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요 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예수님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 해석을 할 때, 물론 해석이 어려운 것은 맞지만, 하지만 발상을 바꾸어 보자는 말이죠. "나는 주님 앞에서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저의 강의에 대해서 "톤이 높아서 듣기가 곤란합니다" 라고 하는데(ㅋㅋ), 그것을 테너보이스라고 합니까? 그런데 이게 톤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가 죽지 않고 살려고 하기 때문인데, 즉 코로나19가 덮여도 자기는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으면 자기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냐는 말이죠. 영국여왕이 "우리가 이 역경을 이겨내면 우리 후손들이 우리를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격려를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국민들은 용기를 얻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과는 반대의 길인데, 즉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살아남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자기는 죽어가면서도 진리를 내뿜어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기능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존재 자체가 해답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여기에 대해서 "그래도 죽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을 보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이 자연세계의 모든 것은 죽음 안에 녹아져있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악마가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연세계는 이런 죽음의 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즉 아담이 죽음으로서 모든 만물이 죽어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담이 산다고 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피조물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롭게 살아나는데,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피조세계는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금 고대하고 있고, 또한 대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만들 때, 그 모든 것의 운명은 하나님의 형상에 달려있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의 형상이 죽는다고 하면, 피조세계도 다같이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이 부활로 다시 살아난다면, 그러면 피조세계도 다시 살아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코끼리가 살아나는가? 뱀이 살아나는가?" 라고 하는 문제가 전혀 아닌데, 코끼리도 뱀도 모두가 다 사라져야 하는데, 심지어 우리 인간도 같이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쉬운데, 즉 "창세기 1장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결코 어렵지가 않다는 겁니다. 즉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 두 가지 경우가 같은 의미입니까? 다른 의미입니까? 전혀 다른 의미인데, 2번은 엉터리라는 말이죠. 2번의 경우에는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만들어진 것은 소멸되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즉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만들어놓고 왜 죽이십니까?"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엄마? - 왜? - 남편이 이번에 사업을 하는데, 돈을 좀 빌려주세요? - 안 된다. - 그럴려면 나를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고(ㅋㅋ),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런데 1번처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죽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또 뜻이 있으면 다시 만들면 된다는 것이죠.

* 천국이면 천국, 지옥이면 지옥 !!

제가 답답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무게중심이 하나님에게 가있어야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없애면 없애는 것이고 다시 만들면 만드는 것이라고, 그렇게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즉 지옥에 보내면 지옥에 가는 것이고, 천국에 보내면 천국에 가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율권을 행사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박수만 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여, 나를 지옥에 보내면 안 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해서 대항하는 겁니까?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나를 지옥에 보낼 것 같으면 왜 나를 만들었습니까? 일단 만들었으면 적어도 지옥에 보내지 말아야지요. 그게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살려고 버티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창조의 원리는 성경에는 없다는 말이죠.

그런 창조의 원리도 모르고, "왜 나를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면서 대드는 곳이 곧 지옥이란 겁니다. "코로나19로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라고, 그렇게 반항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그 바이러스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피조물인 우리가 시비를 걸면 안 된다는 겁니다.

* 뚫고 나옴 !!

인간은 존재에서 무존재로 가는데, 즉 죽음으로 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음으로 가면서 내뿜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즉 사라지면서 진리가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죽게 되면 드디어 대자연의 세계를 뚫고 나오게 되는데, 오늘의 강의제목을 '뚫고 나옴'으로 하고 싶은데 말이죠.

우리가 벌벌 떨던 이 대자연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도가 무엇인고 하니, 원래 성도란 없는데 하나님께서 새로 만드셨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성도라는 말이죠. 따라서 성도는 있음이 아닌데, 오직 하나님의 있음이라는 겁니다.

* 주님이 만든 마음 !!

그러니 씨는 말씀이고 복음이고, 씨를 뿌리는 자는 주님이고, 그리고 밭은 마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내 마음' 이라고 하면 안 되고, 주님이 천국에 갈 마음을 새롭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기존의 우리 마음에 씨를 뿌려서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주님이 만든 마음이 있다는 말이죠.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여기에는 4가지의 마음이 있는데, 그런데 현재 가지고 있는 자기의 마음에 씨를 뿌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소멸되기 싫고 버티고 싶다는 의지가 매우 강렬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은 뭐하시지? 나 같은 것을 사랑해주어야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가 주인이 되고 마는데, 만들어진 것이 주인 행세를 하고 진리 행세를 한다는 겁니다. 사라지고 부서져야 진리인데, 그런데 버티는 것을 진리라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그런 가짜도 주님이 의도적으로 하신 것인데, 아무튼 뚫고 나온다는 겁니다.

* 무조건, 무조건 !!

제가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두루두루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그 바닥에 어떤 것이 깔려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말이죠. 그러면 "나는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을 바닥에 깔고 이야기를 하고 대화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원리에 위배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무조건 죽어야 한다" 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게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신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죽어서 주님을 만나는 것,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신이 났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그것보다 더 신나는 것은 없었는데, 성도는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바울의 말은 오직 동일한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이죠.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라는 것은 합동관계인데, 즉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인데, 그것이 곧 전도이고 선교라는 말이죠.

이번 코로나 사태가 지나고 난 뒤에 "드디어 우리는 살아남았다" 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살게 해주신 것인데, 고생을 더욱 더 하라고 말이죠. 다음 번에는 코로나19보다도 더 센 것이 와서 우리는 호들갑을 떨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소멸되는 것 속에서, 물론 소멸되는 자기가 진리가 아니고, 그렇게 소멸되는 과정 속에서 따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즉 "왜 우리는 사라져야 하고, 부서지고 무너져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뚫고 나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자연세계를 뚫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 대자연이 그만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음의 세계가 되고 말았는데, 그런 죽음의 세계를 뚫고 나온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작업이라는 겁니다.

* 소멸된 에녹 !!

그런 자들이 구약에 보면 몇 사람이 나오는데, 창세기 5장에 '에녹' 이라는 인물이 나온다는 말이죠. 에녹은 시체가 없는데, 그러니 에녹을 살았다고 하지말고 소멸되었다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이제 소멸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지요? 이 땅은 에녹이 사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연세계를 뚫고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3)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의 시대에는 이 땅에서 선배들이 900년을 살았는데, 마치 마천루와 같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을 경쟁하는 울창한 숲 속에서 에녹은 겨우 356년을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 별 것 아닌데, 하지만 에녹은 아예 소멸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죠. 이 땅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 엘리사의 시체 !!

그리고 선지자 엘리야도 소멸이 되었는데, 그의 시체를 제자들이 찾았지만 찾지를 못했다는 말이죠. 물론 엘리사는 아는데, 그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땅에는 그의 시체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보면서 엘리사는 엘리야가 참으로 부러웠는데, 그리고 자기는 죽어서 이 땅에 시체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엘리사 시체에 다른 시체가 접촉을 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은 것 같은데(ㅋㅋ), 엘리사의 시체는 그대로인데 접촉한 시체가 살아났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은 자를 살려내는 시체인데, 자기는 죽은 시체의 상태로 그대로 있으면서 다른 시체를 살려낸다는 겁니다.

*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살려냄으로서 !!

이것이 곧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으로서, 따라서 우리가 믿는 자는 이 땅에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를 믿음으로서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살아있는 형국인데, 즉 살아있음은 죽음이고 그 죽음은 살아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좋다는 목사나 장로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은 분을 믿는데,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죠. 죽은 자가 우리의 시체를 살려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려낼 때, 그것을 "죽었던 내가 살아난다" 라고 여기지 말고, "창조주의 작업이 나를 성도로 만드는구나" 라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창조주의 작업이라는 것이 없는 것에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을 받은 믿음, 소망, 사랑, 그것이 다 누구의 작품인고 하니, 우리가 열심히 손질해서 만든 자기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없는 것을 만들어서 주셨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믿음, 없는 소망, 없는 사랑인데, 그런데 주님이 선물로 주셨다는 말이죠.

* 창조주께서 만들어주신다 !!

여기 교재를 보면,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라고 하신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애를 쓰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주님이 친히 만들어서 주신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창조주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친히 만들어주신다는 말이죠.

(요 18: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기존의 있는 것을 어떻게 근사해서 손질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없는 것을 친히 만들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소멸이 되어야 하는데, 즉 자기는 부정이 되면서 그것을 통해서 성도는 새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모든 공로는 당연히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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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했지만, 예수님에게서 어떤 답변도 들을 수 없었는데, 그러니 차라리 빌라도와 그 제국의 무너짐 자체가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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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짐 자체가 곧 진리 !!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무너져야 하는 것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 진리라는 말이죠. 죽어야 하는 것을 죽게 하는 것이 바로 진리인데, 그래서 성도는 죽어가면서도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처럼 말이죠. "아하, 주님이 손을 대시는구나. 정말로 고맙습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주님의 요구에 호응해서 같이 무너지는 것이 해답이란 말이죠. 그냥 자기가 알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죽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주님이 죽었으니 그 주님의 죽음에 동참해서 죽는 것이 정답이라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6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을 모르면 창세기 1장을 아무리 열심히 살펴봐도 창조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것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믿지를 못하는데, 현재 있는 자기를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려고 하면서 창세기 1장을 보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죠.

* 주님과 공동 운명체 !!

여기서 로마서 6장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하는데, 세례가 무엇인고 하니, 합치는 것, 그것이 곧 세례라는 겁니다. 연합, 즉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죠.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다시 말해서, 주님과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을 세례라고 하는데, 그러니 물세례는 물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십자가 세례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고, 또한 성령세례는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공동 운명체인데, 그게 바로 진리라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 운명에 대해서 자기가 손을 놔야하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손을 대고 있는데 자기가 손을 댄다는 것은, 그것은 "내 주위에는 나밖에 없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주님과 공동 운명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둘이 결혼을 했으면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되는데, 그래서 서로 의논을 해서 일을 하면 그것은 각자의 뜻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이 다 포함된 하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결혼이 아니라 동거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한 집에서 살기는 하지만, 각자 따로 따로 산다는 말이죠.

그것은 전혀 성령 안에서의 연합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와 연합이 되었으면, 주님은 고맙게도 우리를 죽여주시는데, 소멸되게 해주신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셨던 그 길을 가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그것은 우리 자체가 해답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창조라는 것은 만들어졌다고 해서 계속해서 영원하다는 의미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그것은 범죄한 인간이 오해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조라는 것은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라지듯이 우리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 주님이 자연을 뚫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면, 거기에 우리도 합세하게 되는데, 거기서 우리는 진리가 되신 주님만 영원히 바라보면서 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하면 곤란한데,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복음이란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 자기 인생의 경험을 모으고 편집해서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겠어"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전제가 무엇입니까? "나는 절대로 죽으면 안 돼. 나는 버티고 싶어. 천국에 갈 거야"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영원함으로 기본으로 해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 지난밤에 죽어도 괜찮은데, 그런데 !!

이미 출발자체가 "나는 망하기 싫어. 나는 버틸 거야" 라는 것인데, 그런 것을 깔고 있는 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난밤에 죽어도 괜찮은데, 그런데 아직까지 이렇게 숨쉬고 있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이게 당연하다고 여겨집니까?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야말로 주님의 혜택인데, 이것이 곧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흔적이라는 겁니다. 어제 새벽 2시 45분에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왜 그때 죽지를 않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떤 놀라운 능력자가 우리 인생에 개입을 하셨다는 것이죠. 물론 90이 넘어서도 그런 고집을 부리면 곤란하지만 말이죠(ㅋㅋ).

만약에 그런 연로하신 아버님을 따로 모시고 있다고 하면 계속해서 가서 살펴보게 되는데, 주무시는 것인지 돌아가신 것인지 염려가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것을 게을리 하다가 두 달 뒤에 가서 알게 된다면, 주위 친척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90이 넘은 아버님에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그렇게 살펴보자는 겁니다. "이상하다. 오늘 또 살았네? 왜 죽지 않았지?" 라고 하면서, 죽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있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자는 말이죠. 그래야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마태복음 6장의 말씀과도 맞다는 겁니다. 그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죠.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 이 집사님, 잘 계십니까?

제가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가끔 전화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수집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닌데, 우리가 자기 실력으로 살아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이 은혜와 기적과 진리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각자가 받은 것을 수집하는데, "아하, 주님이 또 저렇게 작용을 하시는구나. 비록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저분은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미처 자기에게는 없는 다른 분들이 받은 은혜를 모으게 되면, 그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끼리 만나서 안부를 묻고 하는 이유라는 말이죠. 즉 "주님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셨습니까?"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게 바로 수집이라는 겁니다.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기가 살려고 하는 짓이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자기가 받은 생명연장의 은혜를 그분도 같이 받았으니, 그러면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분이 생각하는 것이 더 깊을 수 있고, 그러면 그것이 더욱 큰 기쁨으로 자기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무심코 "오늘도 사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했는데, 그분은 "목사님, 오늘도 제가 살아있습니다. 숨쉬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분에게 한 수를, 아니 몇 수를 다 배우게 된다는 말이죠.

* 성도는 검출기 !!

그래서 성도는 '검출기'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물리학에서 우주선이 우주에서 어떤 입자를 가지고 오게 되면, 그것을 구름상자와 같은 것을 통해서 검출하게 되는데, 그렇게 입자를 물분자와 만나게 해서 천지창조의 흔적을 찾아내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노벨상을 받은 분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옛날 방식이고 요즘은 거대한 가속기를 가지고 하는데, 즉 양성자를 중성자로 때려서 여기서 나오는 입자를 분석해서 우주의 기본입자를 찾는다는 말이죠. 그것을 '소립자(素粒子)' 라고 하는데, 작다고 해서 소립자가 아니고 기본입자라는 의미에서 소립자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검출기인데, 성도자체가 이런 검출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가만히 있어도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나서서 전도지를 돌리고 하지 않아도, 그런 것이 전도가 아니고, "나는 어제 죽지 않고 왜 이렇게 살아있지?"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님의 살아있음의 증거인데, 즉 주님이 작업을 하신다는 증거라는 말이죠.

그냥 살아있다고 해서 증거가 아니고, "나는 진작에 죽어야 하는데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증거라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했는데,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죽고 싶은데, 그런데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에 살아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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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나는 남자일까?' 라는 질문을 던져봅시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누가 나를 남자가 되게 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라고 하는 것이 해답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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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자기는 질문을 하기 이전에 해답으로서 질문을 한 셈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 뜻이 남자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 좋아라고 남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창조주라는 것을 드러내는 흔적으로서 남자가 되게 해주셨다는 말이죠. 즉 "너는 남자로서 나의 창조주가 됨을 증거하라" 라는 것인데, 그래서 남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 왜 나는 남자일까?

그러면 그것을 달리 말해서 "나는 왜 키가 작을까?" 라고 한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설령 자기가 희귀병에 걸렸다고 해도,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검출기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 질문을 확대해서 "나는 왜 저 남자와 결혼했을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행복 때문에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그만 18명이나 죽었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닌데, 예수님이 그들을 죽이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니 멀쩡한 그들을 왜 죽이십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은 전혀 멀쩡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진작에 죽어야하는 자들인데, 망대가 무너지는 그 타이밍을 맞추어서 모이게 해서 죽이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금 여러분에게서 기쁨이 마구 피어올라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의 표정은 그게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ㅋㅋ). 제가 잘못 보았습니까? 아무튼 '나' 라는 것은 흔적에 불과하고, 그라니 지워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모습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가 벌써 14년이나 되었는데, 14년 전에는 분명하게 살아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게 저희 아버지만의 일입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60년 이후로 가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성경공부를 한 것은 이미 날아가고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창조주의 흔적과 관련이 되어서만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없어져도 괜찮고, 주님은 영원하다는 말이죠. 그 영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잠시 잠깐 동안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게 시편 90편에 나오는데, 즉 신속히 날아간다는 말이죠.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죽여주옵소서, 열심히 살아야지 !!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치고 창세기 1장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그런데 창세기 1장을 보면서 다들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열심히 창조하셨구나. 그러니 열심히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이야기가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여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죽고 주님만 드러내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달리 말하면 "나는 소멸이 되어도, 주님은 내 안에서 영원하다" 라는 것인데, 그 영원함이 영원함을 내용으로 해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즉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도가 된 우리 자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성도는, 해답인 체로 질문을 !!

이제 교재 16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따라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은, 성경에 의해서 해답인 체로 질문한 바가 됩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해답으로서, 즉 "주님이 저를 만드셨기에 주님이 알아서, 오직 주님의 증거가 되게 해주옵소서" 라는 식으로만 질문이 되고 다른 질문, 즉 "살려주세요" 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살려달라고 한 히스기야 왕 !!

그러니 구약의 히스기야 왕이 살려달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기도해서 15년을 더 살았는데, 그 증거로서 해시계의 그림자가 앞으로 가다가 그만 반대로 해서 뒤로 10도를 물러났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보고 히스기야는 무엇을 알아야 됩니까?

(왕하 20:10)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 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 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왕하 20: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그림자가 뒤로 간 것은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진 것인데, 즉 주님이 해를 뒤로 가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히스기야는 자기와 해를 동일시해야 하는데, 그런데 히스기야나 신학자들은 무엇인고 하니, "히스기야는 멀쩡하고, 해는 하나님이 다루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연장한 것이 됩니까? 히스기야를 위한 것이 되는데, 그러면 주님이 아니라 히스기야가 증거된다는 말이죠. 즉 "나는 살고 싶다" 라는 것이 정당화가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 정당화에 주님이 응답한 것이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기도응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기도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히스기야는 참 좋겠다. 15년을 더 살아서 정말로 좋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태도라는 겁니다. 주님이 인간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것은 전혀 생각하지를 않고, 자기 소원을 주님이 들어주셨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출발점 자체가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엉터리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악마적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해놓고 창세기 1장을 보았다고 하는데, 아무리 밤을 지새워 성경을 보면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곧 바로 자기 중심으로 돌아선다는 말이죠.

* 부실한 기드온 !!

이제 교재 17페이지를 보겠는데, 기드온은 신학자가 아니고 농사꾼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 자체로 그의 존재와 인생은 해답이 된다는 말이죠. 해답이라는 것은, 해답 자체는 의미가 없고 그것을 해답으로 해주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기드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부실한 기드온을 데리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기드온처럼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드온을 위대하다고 하면 오늘날 우리 자신이 위대하다는 말이 되고, 그렇게 자기가 위대하다고 우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더 오래 살고 싶고 버티고 싶은, 소멸하기 싫은 자기 본능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이 위대한 것이지 우리가 위대한 것이 아닌데, 우리는 지난밤에 죽어도 그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도 이렇게 살아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겁니다.

* 예수 안, 예수 밖 !!

그러니 지금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성경 밖에서와 성경 안에서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안과 밖의 차이점인데, 즉 성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을 사도바울은 '예수 안'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 안' 이라고 하니 예수님에게 폭 쌓이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반대는 무엇입니까? '예수 밖'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저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그러면 예수 밖에는 예수님이 작용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일하심이 없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데, 그것은 신학의 부스러기를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신학이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일단 버티고 보자. 그런데 그렇게 버티려면 어떤 진지를 습득하면 되지?" 라고 하는 인식 때문에, 신학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무조건 잘 되어야 하고, 그렇게 잘 되기 위해서 어떤 정보들이 필요하지?" 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장착하고, 또한 소지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학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다. 그러면 예수 안에만 예수님이 있고, 예수 밖에는 예수님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다는 공식에 위배되지 않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 그러면 예수 밖에는 예수님이 일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이런 질문을 하면서 치고 들어오는 자들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바깥에서 경험하게 될 일들에 대해서 미리 예상문제를 추려서 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분명히 이런 일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의 혜택을 !!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하면 되는데,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예수 안'은 신약인데, 그것을 구약에서는 '언약 안'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언약 안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인데, 그러면 언약 바깥은 무엇입니까? 물론 바깥에도 하나님이 작용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작용을 하시는고 하니, 버리는 식으로 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종이가 있는데, 여기에 '예수님의 몸' 이라고 쓰겠는데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까, 여기 이 동그라미가 '예수 안' 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예수 안의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러면 그 바깥은 이렇게 찢어버리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받는 자는 버리시고, 이 남아있는 부문만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버리시는 일을 예수 바깥에서 주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이 동그만 것을 남기기 위해서 다른 것을 다 찢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바쁜데, 자기 백성을 남기기 위해서 버리시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 신학은 버티기의 일종 !!

그런데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버티겠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이제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보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건지시고, 예수 바깥에 있는 사람은 버리십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뭐라고 나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님인데, 그러면 예수 안에서 일하고 바깥에서는 일하지 않는가? 그러면 이 원리에 어긋나는데, 이 원리에 맞추어서 주님은 예수 바깥에서도 일을 하시니, 주님은 모든 인간은 다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맞지 않는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칼 라너 '익명적 그리스도인' !!

이것이 바로 오늘날 최고의 카톨릭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칼 라너'의 주장인데, 그가 '익명적 그리스도인' 이라는 책을 썼는데 말이죠. 천주교에서는 한스 킹과 칼 라너가 대표적인 신학자인데, 그 중에서도 칼 라너의 주장이 천주교 신학의 기본이라는 겁니다.

'익명적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복음을 몰라도 그 마음 속에 선한 성품이 있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그것이 오늘날 천주교의 신학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평소에 천주교를 불교라고 했다는 겁니다. 결코 기독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부처라고 하는데,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중을 만나면 중을 죽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부처이니 말이죠. 천주교나 불교가 무슨 생각인고 하니, "신이 있다면 사랑의 신인데, 그러니 신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냅니까? 그것은 자기가 버티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신이 우리를 창조했으면 버리지 말라달라는 것인데, 신이 창조했으면 그 창조물이 계속해서 영원히 가주어야, 그렇게 되어야 그게 신다운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자체가 잘못되어있다는 말이죠. 성경을 보기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사고방식이 완전히 악마적이라는 겁니다.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 자식과 집안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성경을 본다는 말이죠.

* 아, 우리는 살았다 !!

오늘 강의에서 네 번째로 강조하는데, 이 코로나19가 물러나게 되면 "아, 우리는 살았다" 라고 하면서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기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평소 우리의 마음가짐인데, 자기만 살면 된다는 말이죠. 교회는 그냥 취미 삼아서 다닌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살아남는 것이 전부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기어이 인간을 죽이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경로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죽으셨는데, 그러면 우리도 죽은 게 창조원리에 맞다는 것이죠. 우리를 소멸시키는 게 주님의 일이란 겁니다. 그러니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죽더라도 주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해야하는데, 그런 사도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과거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나서 "목사님과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나면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성경공부를 하던 기도를 하던 다 내가 살려고 했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인데, 그런 티를 팍팍 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티를 내는 분들이 거의 없는데 말이죠(ㅋㅋ).

이것은 마치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태도인데, 그가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 것은 자기가 진리를 얻고자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말이죠. 여기서 제가 뭐라고 했지요? 본디오 빌라도와 그의 제국이 무너지는 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즉 주님과 동반해서 사라지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죠.

*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

이제 교재 17페이지를 보겠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그대로 존재와 인생이 해답으로 환원이 되었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별 볼일이 없던 기드온이 졸지에 하나님의 구원자로서 작용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왜 '하나님의 신'을 언급했는고 하니, 그게 창세기 1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창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 가운데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분이 따로 계셨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신인데, 그 하나님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했다는 말이죠.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니 하나님의 신은 철저하게 누구의 지시를 따르는고 하니, 당연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 즉 성령이 임한 사람은 누구의 지시를 따르도록 되어있습니까? 당연히 주님의 지시를 따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령의 지시를 따른다고 하면 곤란한데, 주님의 지시를 따른다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에 충만했는데,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은 자기의 죽음과 소멸을 현장에서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즉 복음을 전하고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한 소멸과 죽음의 지시를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영혼이 떠나가니 예수님이 마중을 나오셨다는 것이죠.

* 스데반과 베드로 !!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를 비교해보겠는데, 먼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서 죽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예수님의 품에 안겼다는 말이죠. 이제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나오는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같이 갔는데, 그런데 없었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합세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3대3으로 짝이 맞다는 것이죠. 한 쪽은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의 대표, 그리고 다른 쪽은 이미 십자가를 아는 성도의 대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했다는 말이죠.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7장의 상황과 스데반 집사님이 죽었던 상황, 그게 같은 상황입니까? 다른 상황입니까? 질문이 조금 이상합니까? 이것이 같은 상황이라는 겁니다. 몸이 죽든 말든, 주님과 함께 있는 상황이 같다는 말이죠. 주님과 같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그러했고 말이죠.

* 오직 성령이 임하면 !!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를 하게 되는데, 반면에 베드로는 산에서 내러와서는 나중에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데, 즉 "나는 저 사람은 모릅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성령을 받은 스데반 집사님이 대자연을, 즉 이 세상을 뚫고 빠져나오는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평소에 아무리 어깨에 힘을 주면서 예수님과 같이 다니고 기적을 행하고 했어도, 오순절의 그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결코 스데반 집사님처럼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만큼 성령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야말로 방앗간만 운영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던 기드온, 하지만 성신이 임하게 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135,000명의 엄청난 미디안 군사를 불과 300명으로 물리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그들이 용맹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해내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쓸모가 있다" 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버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무능하고 쓸모가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쓸모가 없어도 전혀 괜찮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의 일을 넉넉히 하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나는 이제 늙어서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괜히 핑계를 대면 곤란한데, 원래 인간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늙으면 당연히 죽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스데반 집사님도 죽었는데, 그렇게 죽은 자가 더욱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배신을 때린다는 말이죠.

제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어떤 특별한 환경이 있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간에, 혹은 사나 죽으나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쉬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만 버티려고 하니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 다시, '인생은 검출기'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생은 검출기인데, 즉 주님의 은혜가 오게 되면 반응을 드러내는 검출기라는 겁니다. 자기가 버티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면 안 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버티는 게 아니라, 죽어가면서 그 검출된 진리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 흔적으로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신 이유인데, 창조하신 창조주를 드러내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창조주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그분을 증거하라고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면서 살아있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뜻으로 우리가 이렇게 오늘도 살아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즐겁고 가볍게 여기게 해주시고, 이 순간 주님이 함께 계셔서, 그 모든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흔적으로서 살아감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4,13 오후 2시에 마침.

검출기가 아니라 환등기 인생이라도 감사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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