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아빠와 함께 2020. 4. 2. 18:58


2020-04-01 14:14:23조회 : 24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4 - 참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4 - 참

20,03,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만약에 성경을 보게 된다면?

오늘은 교재 1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데,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나오시고 예수님도 나오시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과 예수님이 너무나 자신이 있게 말씀을 하시는데, 뭐라고 하십니까?

물론 성경이 있어도 보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 성경을 펼쳐서 보게 되면, 그 성경이 너무나 확신 가운데서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무시해도 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가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옛날 이야기로만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죠.

* 그런데 성경에는 불구덩이의 지옥이 있어 !!

그런데 이 성경을 보게 되면, 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우리 인간에게 와닿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옥이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지옥이 놀이동산이라고 하면 괜찮은데, 그런데 그곳이 불구덩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첫 번째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곳에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이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서 갇혀있는 상태라는 말이죠.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가 나오는데,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고 반면에 부자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즉 "부자야, 네가 이 땅에서는 호사스럽게 살았지? 하지만 이제 욕을 좀 봐라. 죽어서는 지옥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지옥은 불구덩이 속에서의 영원한 고통이라는 말이죠. 지옥은 고통의 바다라는 것인데, 거기서 도무지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거기서 자기가 사라지게 되면 모르겠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희망이라고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데, 거기서 소금을 치듯이 된다고 하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고통이 주어지는데,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라는 말이죠. 불구덩이의 고통이 고통답게 되기 위해서, 고통이 영원한 것처럼 그 고통을 받는 존재도 영원하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지옥이라는 겁니다.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누가 지옥에 가는가?

그렇다고 하면 그 지옥을 누가 만들었는고 하니, 당연히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계시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뭔가 일을 추진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지옥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지옥을 만들었으면, 먼저 그 지옥에 가는 기준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같은 말이지만 두 번째는 누가 지옥에 가는지가 궁금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지옥에 갑니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넓은 문으로 들어간 자들, 즉 넓은 길로 가는 자가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반면에 천국은 좁은 길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구약에서는 남은 자들이 간다고 하는데, 로마서 9장에 보면 그게 나온다는 말이죠. 남았다고 하는 것은, 뭔가 전체가 있는데 거기서 깎아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깎아내고 깎아내어서 모두가 다 깎아내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로 그런 깎임의 자리에서 보호를 받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을 '남은 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누가복음 22장을 보겠는데, 30절에서 32절입니다.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사단과 베드로 !!

여기에 보면 사단이 나오고 베드로가 나오는데, 베드로가 자기의 기도나 노력으로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전혀 없는데, 무엇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의 기도가 베드로를 보호해서, 베드로가 사단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도록 해주시는데, 그런 자들만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이것은 결국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결심에 맡기지 않았다는 것이죠. 자기가 알아서 절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서 구원을 받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악령과 퇴마사 !!

지옥에 가면 악마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공포영화에서는 이것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데, 즉 '악령'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실감이 나는데, 갑자기 창문이 열린다든지, 혹은 까마귀가 떼로 날아와서는 피를 흘리고 죽는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우리 인간의 신체와 가족관계, 그리고 모든 활동을 공포스럽게 방해하게 될 때, 그것을 악령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이 땅에서는 이러한 악령을 쫓는 전문가들이 있는데, 그들을 '퇴마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악령과 퇴마사가 한 세트가 되어서 공포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과거 영화에는 스님들이 퇴마사 역할을 했는데, 요즘은 천주교 신부들이 나와서 성수를 뿌리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적인 방법은 마늘과 십자가인데, 아이는 모가지가 돌아가고 말이죠. 그게 '오멘' 이란 영화인데, 우리 같으면 그냥 모가지를 원위치로 돌리겠는데, 그 영화를 보면 벽에 성경으로 도배를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말씀으로 퇴치를 하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십자가를 아이의 이마에 들이대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악마가 붉은 색을 싫어한다고 해서 팥을 가지고 했는데, 그래서 동지에는 팥을 먹었다는 겁니다. 집안에 액운이 끼지 말라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 지성이면 감천이다 !!

이렇게 악령과 퇴마사가 서로 등장하는 알 수 없는 공포,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인간의 대처방법은 무엇입니까? 인간들 속에 있는 지혜를 끄집어내어서 악마를 쫓아내려고 하는데, 그래서 교회에 가도 제일 앞자리에 앉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도 자기의 각오를 보여주기 위해서 굶으면서 한다는 말이죠.

자기의 절박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렇게 자기의 정성을 다 바친다는 겁니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닌데, 고대역사를 보더라도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왕이 자기 아들을 제단에 바치곤 했다는 겁니다.

* 신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신전은 어떤 곳인가? 1번, 신이 사는 곳이다. 2번, 명상을 하는 곳이다" 라는 것인데, 이중에서 몇 번입니까? 신전을 명상을 하는 곳이라면, 그러면 주인공이 누가 됩니까? 인간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이 실제로 살아있으면, 그 신전의 주인공은 신이라는 겁니다.

원래 신전의 개념은 2번이 아니고 1번인데, 그런데 문명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전의 주인공이 그만 신에서 '나'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죠. 자기가 은혜를 받겠다는 것인데, 신으로부터 말이죠. 그러니 주인공이 신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 소크라테스의 순교 !!

이러한 변천과정은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부터 조짐이 있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과학과 철학은 그리스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뀔 때, 즉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그러한 논리를 주장했는고 하니, 그때는 다신이었는데, "이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지겹다. 그만하자. 그동안 신에게 많이 바쳤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소크라테스가 순교를 당했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신이 없다고 가르치다가 그만 독배를 들고 죽었다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지,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신을 의식하고 의지하지 말자" 라고 했다는 것이죠. 물론 오해인데,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다신을 인정하던 그 시대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모함을 받아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죠. 요즘 신천지에서 신이 없다고 하면 쫓겨나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니 점차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신이 어떤 집에 실제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는 곳으로 된다는 겁니다.

* 예배당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 !!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가 150년이 되어가는데, 처음에는 예배당을 신이 사는 곳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점차 명상을 하는 곳으로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대구의 어느 교회에서는, 예배당을 지어놓고 준공식을 하면 하나님이 들어와서 사는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죠.

물론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예배당를 지으면서도 그 표현을 '성전건축'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특히 예배당에서 강대상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는데, 까운을 입은 목사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는 목사라고 해도 강대상 아래에 작은 강대상을 놓고 설교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구의 성일교회에서 계명대학교 앞에 예배당을 지으면서 어떻게 했는고 하니, 2층에는 본당을 지으면서 1층에는 그만 상가를 지어서 분양을 했다는 말이죠. 이게 대구에서는 최초였는데, 그래서 다른 교회에서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는데, 어떻게 감히 신이 사는 곳을 지으면서 아래층에 상가를 만들어서 분양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 당시 성일교회에서는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건축비가 모자라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이 성일교회 측이 주장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배당은 신이 사는 곳이 아닌 인간들의 모임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의 경우에는, 예배당의 그 경건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게 되는데,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강대상, 그러니 마치 신과 합일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교회에 30년 이상을 다닌 장로나, 또한 그 교회를 설립한 목사의 되바라진 아들이라고 하면 과연 예배당을 신이 임한 곳으로 보겠느냐는 겁니다. 그냥 부동산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 악령에 대한 막연한 공포 !!

그러면 요즘과 같은 과학시대에 있어서 영화에 나오는 악령이나 퇴마사는 무엇인고 하니, 현대인들은 평소에는 악마가 없다고 여기지만 막상 자기에게 어떤 불길한 일이 생겼을 경우엔 어떻게 나옵니까? 자기에게 악마가 찾아왔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과학시대라는 것인데, 즉 자기 몸 하나만 챙기면 된다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원래 지옥은 악마가 있는 곳인데, 그런데 인간은 성경을 보지 않으니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을 덮어도 인간의 몸은 공포를 느끼는데, 자기 몸에 악령이 들어올까 싶어서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 관계없이 이 세상의 지혜로서 악령을 소개하는 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악령은 원래 조상의 주변에 살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한을 품고 죽어서 그만 악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원한으로 인해서 자손들에게 해코지를 한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성경을 보지 않아도 악령, 악귀, 마귀, 그런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 도를 아십니까?

길을 가다가보면 순진하고 착하게 생긴 아주머니들에게 달라붙는 인간들이 있는데, "도를 아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일단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게 되면 2인조로 바짝 들어붙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게 어떤 내용인고 하니, 아마 여러분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그들은 접근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소위 '천도제'를 지내자고 한다는 말이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종교를 돈을 빼먹는 것인데, 성경을 이용하던 무엇을 이용하던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천도제를 지내야 된다고 하면서, 결국은 돈을 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몸이 아프든지 사업이 안 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원한을 품고 있는 원혼이 주위에 있기 때문인데, 그들이 자꾸만 소식을 전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 와서 집적거리면서 "내 한을 좀 풀어다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한을 풀어주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계속해서 생긴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당신은 행복해지기를 원하지요? 출세하기를 원하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되지 않지요? 그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에게 이런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몰랐을 겁니다. 그것은 당신 주위에 있는 악귀를 쫓아내지 않아서 그러한데, 그러니 천도제를 지내서 그들의 한을 풀어주면 일이 술술 다 풀립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도를 아십니까?" 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 "교회에 나오세요" 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게 점쟁이들이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엄청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접근하면서, "당신의 모든 어려운 점을 우리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생각을 너무 좁게 해서 그러한데, 우리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퇴마사의 역할이고 종교라는 말이죠.

* 지옥은 만족함이 없어 !!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성경을 보지 않았을 경우이고, 그러면 성경을 펼치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지옥에서는 불 속의 영원한 고통이 있는데, 거기서 전혀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무리 군대생활이 힘들어도 제대날짜가 있으니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 군대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하지만 강제로 끌려와서 집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끔찍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옥은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잠언서에서는 이 지옥에 대해서, 그것을 음부라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고 하니, "만족함이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지옥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지옥은 인간에게 당연히 불행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죠.

(잠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 그러면 왜 지옥에 가는가?

성경을 펼치게 되면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왜 지옥에 가느냐는 겁니다.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면, 구약 때는 왜 지옥에 갑니까? 구약 때는 언약을 위반하면 저주가 주어져서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신약에서는 새언약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가복음 22장을 빠트리는 셈이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결심을 해서 "나는 새언약을 받아들일 거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을 거야"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지옥에 가야하는 악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 아무리 천국에 가겠다고 결심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결심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결심을 주님께서는 인정해주시는고 하니, "너는 빠져나오지 못해.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왔지?" 라고 했을 때, "저는 악마 때문에 꼼짝도 못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해주셔서 이렇게 빠져나왔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런 자만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 라고 했을 때, "천국에 가고 싶어요" 라는 이야기는 누구든지 다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

그 기준에 있어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선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물이 없는 자는 그 어떤 짓을 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게 되는데,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음은 선물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해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이고 소망이고 희망사항이라는 말이죠.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는, 그러한 희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지옥에 그렇게 무서운 곳이라면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죠.

심지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면 어떻게 나옵니까? 전부가 천국에 가려고 하지 지옥에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 악마는 지옥의 길라잡이 !!

그런데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지옥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점에서 고마운고 하니까, 사람이 죽기 이전에 악마가 활동을 함으로서 미리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고맙다는 겁니다. 악령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인데, 물론 주님의 뜻에 의해서 말이죠.

처음에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듣고 좋아했는데, 그런데 나중에는 나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결심한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게 아닌데, 인간의 능력으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상당히 안타깝기도 한데, 어떤 점에서는 고맙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악마의 세상이라는 것이죠. 지옥에 먼저 가야하는 악마의 세계, 그런 세계에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태어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생을 통해서 악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확인하게 느끼게 만드신다는 말이죠. 악마의 능력 앞에서 우리의 결심과 각오가, 심지어 우리의 순교마저도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해도, 그 어떤 것도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가 없다는 말이죠.

* 구원의 기준은 ?

그렇다고 하면 구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즉 '주의 이름' 인데, 그것은 다른 말로 구약적으로는 '능력'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 무엇인고 하니, 그 자체가 곧 주님의 능력의 산물이고 그 결과물이란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지금 여기에 선인장이 있는데 꽃이 예쁘게 피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돌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한데, 선인장이 자기가 알아서 컸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를 그냥 놔두게 되면, 이 세상은 지옥을 보여는 곳이 때문에, 즉 지옥의 예고편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저주로 가득하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어떤 가수는 자기 신세를 두고, "나는 시들 수밖에 없지만, 누군가가 물을 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물을 주어도 안 된다" 라고 했는지 헷갈리는데,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지금은 나이 50이 넘어서 활짝 만개를 했는데 말이죠.

* 이 땅에 오신 하나님 !!

그러니 누군가가 계속해서 성령으로 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분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계속해서 은혜를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악마를 이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선택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옥에 있기 때문에 알아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마저 이 세계에 그냥 와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이지만 너무나도 비참하게 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죽었는데, 악마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말이죠. 그냥 하늘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죽고 나서 부활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도 죽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오죽하겠느냐는 것이죠. 인간은 자기의 죄값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 복음이 곧 기준 !!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3일만에 살려내는, 그게 기준이 된다는 말이죠. 이 기준을 두 글자로 '복음'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권한이 아니고, 창세 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제공되는 혜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직 주님의 권한이란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무엇을 느끼게 되는고 하니까, 제발 어디에만 가지 않으면 감사해야 합니까?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가지 않게 되었다면, 그러면 우리는 땡 잡았다는 겁니다. 신종 코로나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지옥에 가지 않으면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게 성경의 가르침인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이 하셨다는 말이죠. 더 이상 우리가 주님에게 요구할 것이 전혀 없는데,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를 받을 인간을 축복을 받을 인간으로 바꾸어주었으면, 그러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사도들의 경우에, 그들이 나중에 재벌이 된 것이 아닌데, 그리고 마누라를 10명이나 거느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게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도들은 너무나도 좋아서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아낌없이 바쳤다는 말이죠.

* 악마의 방어책은, '종교' !!

그러면 예수님의 이런 활동에 대해서 가만히 있을 악마가 아닌데, 악마를 종교를 가지고 대체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행함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그게 종교라는 말이죠. 여호와 증인이나 몰몬교가 그 대표적인데, 오직 행함이라는 겁니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도 그러한데,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챙기겠다는 것인데,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보존해서 말이죠. 그것이 곧 악마가 복음을 대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일종의 방어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게 "너의 실력을 주목하라" 라고, 그렇게 인간의 행함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악마가 이렇게 나올 때, 그래서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사단이 베드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내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자기의 결심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익히 악마의 술책을 잘 아시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그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죠.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성도는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에게서 나온 능력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배당에 꽃꽂이를 해도, "이것은 주님이 시켜서 한 것이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물론 성령을 받지 않아도 인상을 찡그리면서 흉내를 내기도 하데, 그것을 두고 저는 '성대묘사' 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죠(ㅋㅋ). 그런 사람의 특징음 무엇인고 하니까, 정작 자기는 전혀 기쁜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억지로 하는데, 그야말로 연기를 한다는 말이죠.

* 어떻게 인간과 악마(뱀)가 한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아직 오늘강의의 본론은 나오지 않았는데, 서론만 했다는 겁니다. 본론은 창세기 3장으로, 그게 교재 12페이지에서 13페이지에 나온다는 것이죠. 교재를 읽어가면서 창세기 3장을 하겠는데, 먼저 문제를 제시하겠는데, 즉 "어떻게 인간과 악마(뱀)가 한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만약 이게 성경이 아니라 공자의 논어라고 하면, "인간이 뱀과 이야기했다" 라는 것이 나오겠습니까? 전혀 나오지를 않는데,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뱀과 대화를 하고, 또한 그 뱀의 꼬임에 넘어가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 뱀 안에는 악마가 들어있는데, 그게 '옛 뱀' 이라는 겁니다.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우리는 이 창세기 3장을 얼른 읽고 지나가는데,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을 보자는 말이죠. 성경이 진리이고 참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정작 우리는 뱀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악마와 대화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악마라는 존재자체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닌데, 모호하다는 겁니다.

* 참 말을 하면, 두려움이 없어 !!

사람에게 왜 두려움이 생기는고 하니, 그것은 진지를 이야기하지 않아서, 참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는데, 자기가 바른 말을 하면, 그러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저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재벌3세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그만 할머니를 치고 도망치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경찰서에 가서 본 대로 진술을 했는데, 그런데 아버지가 와서는 회유를 한다는 겁니다.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배당을 크게 지어줄 테니 보지 않은 것으로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죠. 물론 드라마 속의 이야기인데 말이죠(ㅋㅋ).

그래서 재판을 하면서 검사가 묻기를 "그 현장을 보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만 주저주저한다는 겁니다. 아니 본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무엇이 주저할 것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조금이 아니라 전부를 다 안 것인데, 지옥을 알면 전부를 다 알았고, 천국을 알면 전부를 다 알았다는 겁니다. 중간과정은 몰라도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참새가 몇 마리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주님의 최종목표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천국은 어떻게 가고 지옥은 어떻게 가는지,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저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다는 말이죠. 자기 신세에 대해서 누가 욕을 하고 비난을 해도, 참 말을 아는 사람은 그런 비난을 뚫고서 주저하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진짜로 참 말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인생이 겁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남들이 아무리 "저 집구석은 왜 저래? 아이가 죽고, 또한 사업은 부도가 나고, 왜 그래?" 라고 해도, 참 말을 한다면 전혀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주저하고 무서워합니까? 그것은 아직까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자기 마음에 와닿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해놓고,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그렇게 교회에 와서 헌금을 했으면 부자가 되게 해주지? 그리고 복음을 전해도 돌아오는 것은 욕밖에 없고, 도대체 이게 뭐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죽고 싶어라 !!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는데, "너 이상한 곳에 다닌다면서?" 라고 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느냐는 말이죠(ㅋㅋ).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짜증을 낼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알고 싶어서 안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을 보니 그게 나온다는 말이죠. 누가복음 22장에 보니, 베드로로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믿어진다고 하면, 물론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는 써야 하겠지만, 그 발걸음만은 가볍다는 말이죠. 초대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구동성으로 죽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고 말이죠. 물론 요즘도 "죽고 싶어라" 라는 것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짜증을 내는 의미와는 다르다는 겁니다(ㅋㅋ).

그것은 바로, 빨리 죽어서 진짜로 참 말이 되는 그 현실에 뛰어들고 싶다는 것인데, 물론 사도바울은 이미 삼층천을 보고 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에게 겁날 것이 없는데, 제 아무리 강도와 도둑이 와서 위협을 하고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물론 문제는 그런 사람이 지극히 드물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가 걱정할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가 하시는 일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빼먹고 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말이죠. 주님의 일은 언제나 완벽하다는 것이죠.

* 다시, 아담은 왜 뱀의 말을 들었는가?

그런데 입장에서 인간과 뱀이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한 것을 살펴보겠는데, 즉 "아담은 왜 뱀의 말을 들었는가?"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교재 1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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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단 유일한 현실의 중심체로 보고 작심했던 모든 현실, 그것은 착각이었고 환상이었고 반짝이는 작은 조각이었고 망상이었습니다. 심지어 거실에서 뛰노는 자식들의 웃음소리도 말씀보다 더 현실이 아닙니다. 그 웃음소리는 잠시 후에 사라지고, 그리고 난 뒤에 생기는 적막한 공간마저도 말씀의 생기로 다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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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교재 12페이지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과연 무엇이 실선이고 무엇이 점선인가?" 라는 것인데, 즉 과연 참된 현실이 어떤 것이냐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교재 13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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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인생이 반성을 하고 개선을 해도 망상은 부풀어오릅니다. 회개하고 또 회개해도 망상은 다른 조각으로 대체가 됩니다. 그리고 미래란 과거의 표절입니다. 오래된 과거가 미래라는 이름으로 다시 그려지고, 우리를 혼미케 할 뿐입니다. 산다는 것을 실선으로 여겼는데 그것은 점선으로 변하고, 그렇게 어설픈 점선으로 연결된 것은 조각이 되어서 깨어져서 어디론가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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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직 말씀 안의 세계만이 진실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즉 "어떻게 인간이 뱀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현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동물원의 노련한 조련사라고 해도, 그게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이 허상이기 때문이란 겁니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담이 뱀과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뱀 안에 악마가 들어있다는 것을 겁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그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그것은 악마가 우리를 허상 덩어리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악마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악마는 보이지 않고, 그냥 인간들만 보인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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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체가 해답이듯이 거기에 포함된 성도도 해답인데, 새삼스럽게 우리가 해답을 알기도 전에 우리는 바깥으로 이끌려서 해답으로 나오게 됩니다. 성도가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해답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해답으로 안목으로 볼 때, ( … ) 이런 허상적 존재를 자아로 붙들게 되면 이는 말씀의 자기 전개장으로서 안개상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물리학에서 입자의 존재를 확인하게 위해서 안개상자가 동원되듯이, 말씀활동의 생동감을 위해서 자아라는 가상체는 필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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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는 안개상자 !!

안개상자 속에 입자를 발생시키면 흔적이 남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 자신은 실상이 아니고 그야말로 허상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이 되신 주님이 지나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악마도 함께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 악마가 있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안개상자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또 다시, 어떻게 아담이 악마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해놓고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와서, 그러면 제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이제는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어떻게 아담이 악마와 이야기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 창세기 3장이 옛날 동화책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자체가 진실임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하는데, 성경말씀을 믿지 않는 과학자나 철학자가 이것을 이야기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뱀이 무슨 말을 하는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자기를 실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악마가 '있음'을 감추기 위한 해답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즉 악마가 과학자나 철학자의 마음에 "그것은 헛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곧 지옥인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있으니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이죠.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만, 지옥의 불구덩이는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넓은 길로 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악마의 회유를 받아서 조작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곧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지면서도, 그들은 지옥에 없다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죠. 좀 솔직한 사람들은 모르겠다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 안 되고, 그것이 참이라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확실한 것이란 말이죠. "가봐야 알지" 라고 하면 안 되는데,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허상인데,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만 나는 예수님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땅에 그 정답으로 태어났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무엇이 실상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이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라는 강의는 2014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에서 한 것인데, 첫째 시간에 제가 한 강의가 무엇인고 하니, "무엇이 실상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라는 것인데, 그러나 우리의 인식부터 먼저 바꾸는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창세기 강의를 모두 들어도, "옛날 사람들이라도 아이디어가 참 좋구나" 라고 하면서 끝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목청을 높여서 강의를 해도 창세기가 오늘날의 참된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실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인간은 안개이고 허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실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과 악마의 싸움, 그것이 곧 참된 것이라는 겁니다.

* 주님과 악마의 싸움 !!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어떠한고 하니까, 여기서 디모데전서 1장을 보겠는데, 18절에서 20절입니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20절에 보면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단이, 즉 악마가 항상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주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노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래, 알았다. 네가 찾는 것을 가지고 가라" 라고 하면서 내어주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 매여 가는 것이 전혀 자연스럽다는 말이죠. 그러니 악마, 즉 악령에게 따라가지 않는 것이 놀라운 것인데,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오, 놀라워라"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 배고픈 사자 !!

여기서 '내어주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악마가 청구했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악마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배고픈 사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먹잇감을 찾아서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닌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본다면, 그게 바로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여기 8절과 9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라고 하는데, 그리고 9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참을 알기 때문에, 즉 진리를 알기 때문에 친구나 일가친척에게 고난을 당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그러하다는 말이죠. 전혀 겁날 것이 없는데,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지 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 겁을 내면서 떤다는 말이죠.

*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어떤 세계관이?

여기서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어떤 세계관이 나오겠는가?"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느냐는 말이죠.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과거와 미래로 퍼지게 되는데, 자기 중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종 코로나가 있다고 하면 피하면 되는데, 자기 환경에 신종 코로나가 터지면 도망을 치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자기 중심인데, 그러니 여기서 '펑' 하고 터지면 저기로 도망을 가면 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살다가 미국이 싫어서 유럽으로 간 사람들이, 이번에 신종 코로나가 터지니까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고 난리인데, 그게 바로 자기 중심이라는 겁니다.

자기 중심이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평생을 두렵고 무서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뭔가 안정된 것이 전혀 없는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자기 몸 하나를 추스르면 그만이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사람은 결국 늙어서 죽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모르겠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으니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가르쳐준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알려주었지만 마귀가 차단을 시켰다는 겁니다. 즉 "끝까지 자기 중심으로 살아라" 라는 것인데, 그렇게 마귀에 의해서 차단된 상태에서 살아가니까, 두렵고 떨리는 것은 평생을 간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 재산이 100억이 된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이 자기의 욕망에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위에는 자기 돈을 뜯어가려고 아부하는 사람들만 많다는 것이죠. 물론 가난할 때는 돈이 전부처럼 보이지만, 막상 돈이 많아지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 나는 신이다 !!

심리학에서 자아실현의 욕구가 가장 강렬한데, 결코 소유가 만족의 최종점이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신이다" 라고 할 때까지, 즉 모든 사람이 자기 말을 들을 때까지, 그렇게 되어야 인간은 비로소 만족을 한다는 겁니다. 신이 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최종 종착점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살게 되고, 늘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문제를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면" 라고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두렵고 떨린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믿지 않으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마귀가 계속해서 막고 있다는 것이죠.

이제 복습을 해보겠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성령을 통해서 말씀 안의 세상이 실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데 그게 말씀에 의하면 마귀에 의해서 막혀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그렇게 막힌 것을 뚫어서 남은 자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러니 그들은 진리를, 즉 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계획을 말이죠.

* 성도는, 주님을 증거하는 허상 !!

그러면 자기는 실상이 아니고 잠시 이 세상에 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즉 허상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허구가 그냥 허구라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 이 허구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이 허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음을, 즉 그분만이 실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답으로서의 허구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정답은 무엇과 연결이 되는고 하니, 우리는 질문을 던진 예수님의 정답으로서 살기 때문에, 비록 우리는 허상이지만 죽어서는 실상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데, 즉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언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 !!

그런데 디모데전서 1장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나오는데, 이 두 사람은 사도바울을 알았던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이 알렉산더의 직업이 나오는데, 그는 구리 세공업자라는 겁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에 있어서 가롯유다와 같은 역할을 한 자라는 말이죠. 즉 해를 끼치는 자라는 겁니다.

(딤후 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그러니 알렉산더는 하지 말아야 하는 짓을 했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이 뛰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도바울은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을 건드린 것은 곧 주님을 건드린 것이 되는데, 그것은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성도를 건드린 것은 주님을 건드린 것인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0절에 보면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건드리면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정도까지 나가는데, 주의 백성들에게는 그 정도의 권세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어떤 직분을 통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나를 건드리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주장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이만희가 하는 짓이고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서 허구임을 인정하는, 즉 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이 하신 참과 진리가 허접한 자기 인생을 통해서도 전달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이냐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 되는 것은, 그게 결코 자기가 믿음이 좋다든지 하는 자기 실력이 전혀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다루어 주셔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그게 바로 복을 받은 성도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 비트겐쉬타인 - '이 세상은 게임이다' !!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자기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 인간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세계관을 만들어서 퍼트린다는 것이죠. '비트겐쉬타인' 이라는 20세기 초의 철학자는 말하기를, 이 사람을 철학자의 신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말이죠.

그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이 세상은 게임이다" 라고 했는데, 정말 탁월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말이죠. 아주 조그마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러한데, 그래서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 정당, 거기에 대해서 누가 시비를 걸면 버럭 화를 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지기를 싫어하는데, 그렇게 이 세상을 게임판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자존감'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래서 남녀간에 사귀다가 헤어지더라도, 누가 먼저 차고 차였는지, 그게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 어머니, 그만 오세요 !!

예를 들어서, 할머니가 손자를 하루종일 돌보고 있었는데, 마침 며느리가 올 때 그만 울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하루종일 손자를 봐준 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 손자가 울게 되었는지, 그게 중요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할머니가 잘못해서 울게 되었다고 하면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게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해주었어도, 그래서 "어머니, 정말로 고마워요" 라고 하다가, 한번 삐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인데, 그래서 "어머니, 이제는 오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동안 아무리 분위기가 좋았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비트겐쉬타인이 심사숙고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은 게임판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기 중심이라는 말이죠.

* 날마다 와장창 !!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자기가 여기에 있으면 다들 자기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인간은 신이기 때문에 그래야 만족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것을 멈추지 않는데, 신이 될 때까지 말이죠. 그런데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만약에 부부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물론 자식과 부모의 관계도 그러한데, 왜냐하면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절대자라고 하는 본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리 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왜 사도바울에게 그렇게나 해를 입혔을까요? 그냥 남남이라고 하면 "그래, 당신이 최고다. 잘났다" 해버리고 떠나면 그만인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인정하고 추종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야기하고 오늘 강의는 마치겠는데, 여기서 민수기 16장을 보겠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것이 이미 구약에 다 있다는 말이죠. 1절에서 3절입니다.

(민 16: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민 16: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민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 고라 자손의 반란 !!

그러면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고 여기고, 지금 우리는 광야를 통과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모세에게 반발하는 고라자손이 어느 지파인고 하니, 다른 지파가 아닌 레위지파의 자손인데, 모세나 아론과 같은 레위지파라는 말이죠. 그러니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높은 간부급에서 그만 반란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반란이라고 하지만, 제3자인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누구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까, "물론 모세와 아론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이 알아서 각자를 하시는데, 그런데 그들이 무슨 돗대도 아니고 그들만이 왜 우리의 지도자가 되었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럽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종의 게임판이 되고 만 것인데,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라고 하면, 고라 자손들의 이성적인 반발에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말이죠. 고라 자손과 거기에 동조하는 백성들을 책망하겠습니까? 인정해주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고라 편이 아니고 모세 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 편이 되는 근거를 우리가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이죠.

고라 자손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땅에 입을 벌려서 그들을 삼켰다는 겁니다. 마그마의 그 불구덩이에 빠져서 죽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잔인하게 죽여버렸는데, 마치 조폭들이 살아있는 사람을 땅을 파고 묻어서 죽이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죽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거기에 동조해서 염병에 죽은 백성들이 무려 14,700명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일로 인해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다같이 은혜를 받았으면 모두 같은 백성인데, 그런데 왜 너희만 지도자 노릇을 하지?" 라고,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고라 자손을 포함해서 무려 14,700명이 죽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고라 자손은 그 현장에서 250명이 죽었다는 겁니다.

(민 16:35)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민 16: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실상이 아니고 쓰레기가 되어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이 죽어도 안타까워 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허상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들이 왜 죽었습니까?

* 모세의 겸손 !!

오늘 강의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허상인데, 그런데 무엇으로 여겼다는 겁니까? 자기를 실상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모세가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편을 들면서 "모세는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모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두렵고 떨림으로 살았다는 것이죠.

(히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왜 그렇습니까? 자기는 허상이고 하나님만이 실상이기 때문에, 그 실상, 즉 참을 보여주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자기 안에 참이신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말이죠. 사람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진리를 알고 있었기에 전혀 주저할 게 없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모세의 겸손인데, 그것을 고라 자손들이 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저 인간 대 인간, 그러한 게임판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을 죽여버렸는데,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은 천국에 가봐야 태극기를 들고 시위할 자들이라는 겁니다.

*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와서 !!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인간이 뱀과 이야기를 하는데, 즉 사단이 뱀에게 들어왔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실상인데,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직 말씀만이 실상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과연 뱀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그런 것을 사람들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증명이 될 수도 없고,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성경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인데, 지옥에 가려고 환장을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조종하고 있다는 말이죠.

* 차이성 !!

그렇게 뱀과 이야기를 해보니, 
2020-04-01 14:14:23조회 : 24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4 - 참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4 - 참

20,03,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만약에 성경을 보게 된다면?

오늘은 교재 1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데,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나오시고 예수님도 나오시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과 예수님이 너무나 자신이 있게 말씀을 하시는데, 뭐라고 하십니까?

물론 성경이 있어도 보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 성경을 펼쳐서 보게 되면, 그 성경이 너무나 확신 가운데서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무시해도 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가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옛날 이야기로만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죠.

* 그런데 성경에는 불구덩이의 지옥이 있어 !!

그런데 이 성경을 보게 되면, 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우리 인간에게 와닿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옥이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지옥이 놀이동산이라고 하면 괜찮은데, 그런데 그곳이 불구덩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첫 번째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곳에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이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서 갇혀있는 상태라는 말이죠.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가 나오는데,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고 반면에 부자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즉 "부자야, 네가 이 땅에서는 호사스럽게 살았지? 하지만 이제 욕을 좀 봐라. 죽어서는 지옥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지옥은 불구덩이 속에서의 영원한 고통이라는 말이죠. 지옥은 고통의 바다라는 것인데, 거기서 도무지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거기서 자기가 사라지게 되면 모르겠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희망이라고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데, 거기서 소금을 치듯이 된다고 하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고통이 주어지는데,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라는 말이죠. 불구덩이의 고통이 고통답게 되기 위해서, 고통이 영원한 것처럼 그 고통을 받는 존재도 영원하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지옥이라는 겁니다.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누가 지옥에 가는가?

그렇다고 하면 그 지옥을 누가 만들었는고 하니, 당연히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계시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뭔가 일을 추진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지옥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지옥을 만들었으면, 먼저 그 지옥에 가는 기준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같은 말이지만 두 번째는 누가 지옥에 가는지가 궁금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지옥에 갑니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넓은 문으로 들어간 자들, 즉 넓은 길로 가는 자가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반면에 천국은 좁은 길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구약에서는 남은 자들이 간다고 하는데, 로마서 9장에 보면 그게 나온다는 말이죠. 남았다고 하는 것은, 뭔가 전체가 있는데 거기서 깎아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깎아내고 깎아내어서 모두가 다 깎아내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로 그런 깎임의 자리에서 보호를 받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을 '남은 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누가복음 22장을 보겠는데, 30절에서 32절입니다.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사단과 베드로 !!

여기에 보면 사단이 나오고 베드로가 나오는데, 베드로가 자기의 기도나 노력으로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전혀 없는데, 무엇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의 기도가 베드로를 보호해서, 베드로가 사단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도록 해주시는데, 그런 자들만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이것은 결국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결심에 맡기지 않았다는 것이죠. 자기가 알아서 절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서 구원을 받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악령과 퇴마사 !!

지옥에 가면 악마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공포영화에서는 이것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데, 즉 '악령'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실감이 나는데, 갑자기 창문이 열린다든지, 혹은 까마귀가 떼로 날아와서는 피를 흘리고 죽는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우리 인간의 신체와 가족관계, 그리고 모든 활동을 공포스럽게 방해하게 될 때, 그것을 악령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이 땅에서는 이러한 악령을 쫓는 전문가들이 있는데, 그들을 '퇴마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악령과 퇴마사가 한 세트가 되어서 공포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과거 영화에는 스님들이 퇴마사 역할을 했는데, 요즘은 천주교 신부들이 나와서 성수를 뿌리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적인 방법은 마늘과 십자가인데, 아이는 모가지가 돌아가고 말이죠. 그게 '오멘' 이란 영화인데, 우리 같으면 그냥 모가지를 원위치로 돌리겠는데, 그 영화를 보면 벽에 성경으로 도배를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말씀으로 퇴치를 하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십자가를 아이의 이마에 들이대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악마가 붉은 색을 싫어한다고 해서 팥을 가지고 했는데, 그래서 동지에는 팥을 먹었다는 겁니다. 집안에 액운이 끼지 말라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 지성이면 감천이다 !!

이렇게 악령과 퇴마사가 서로 등장하는 알 수 없는 공포,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인간의 대처방법은 무엇입니까? 인간들 속에 있는 지혜를 끄집어내어서 악마를 쫓아내려고 하는데, 그래서 교회에 가도 제일 앞자리에 앉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도 자기의 각오를 보여주기 위해서 굶으면서 한다는 말이죠.

자기의 절박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렇게 자기의 정성을 다 바친다는 겁니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닌데, 고대역사를 보더라도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왕이 자기 아들을 제단에 바치곤 했다는 겁니다.

* 신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신전은 어떤 곳인가? 1번, 신이 사는 곳이다. 2번, 명상을 하는 곳이다" 라는 것인데, 이중에서 몇 번입니까? 신전을 명상을 하는 곳이라면, 그러면 주인공이 누가 됩니까? 인간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이 실제로 살아있으면, 그 신전의 주인공은 신이라는 겁니다.

원래 신전의 개념은 2번이 아니고 1번인데, 그런데 문명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전의 주인공이 그만 신에서 '나'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죠. 자기가 은혜를 받겠다는 것인데, 신으로부터 말이죠. 그러니 주인공이 신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 소크라테스의 순교 !!

이러한 변천과정은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부터 조짐이 있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과학과 철학은 그리스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뀔 때, 즉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그러한 논리를 주장했는고 하니, 그때는 다신이었는데, "이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지겹다. 그만하자. 그동안 신에게 많이 바쳤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소크라테스가 순교를 당했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신이 없다고 가르치다가 그만 독배를 들고 죽었다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지,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신을 의식하고 의지하지 말자" 라고 했다는 것이죠. 물론 오해인데,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다신을 인정하던 그 시대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모함을 받아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죠. 요즘 신천지에서 신이 없다고 하면 쫓겨나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니 점차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신이 어떤 집에 실제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는 곳으로 된다는 겁니다.

* 예배당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 !!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가 150년이 되어가는데, 처음에는 예배당을 신이 사는 곳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점차 명상을 하는 곳으로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대구의 어느 교회에서는, 예배당을 지어놓고 준공식을 하면 하나님이 들어와서 사는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죠.

물론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예배당를 지으면서도 그 표현을 '성전건축'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특히 예배당에서 강대상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는데, 까운을 입은 목사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는 목사라고 해도 강대상 아래에 작은 강대상을 놓고 설교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구의 성일교회에서 계명대학교 앞에 예배당을 지으면서 어떻게 했는고 하니, 2층에는 본당을 지으면서 1층에는 그만 상가를 지어서 분양을 했다는 말이죠. 이게 대구에서는 최초였는데, 그래서 다른 교회에서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는데, 어떻게 감히 신이 사는 곳을 지으면서 아래층에 상가를 만들어서 분양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 당시 성일교회에서는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건축비가 모자라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이 성일교회 측이 주장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배당은 신이 사는 곳이 아닌 인간들의 모임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의 경우에는, 예배당의 그 경건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게 되는데,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강대상, 그러니 마치 신과 합일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교회에 30년 이상을 다닌 장로나, 또한 그 교회를 설립한 목사의 되바라진 아들이라고 하면 과연 예배당을 신이 임한 곳으로 보겠느냐는 겁니다. 그냥 부동산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 악령에 대한 막연한 공포 !!

그러면 요즘과 같은 과학시대에 있어서 영화에 나오는 악령이나 퇴마사는 무엇인고 하니, 현대인들은 평소에는 악마가 없다고 여기지만 막상 자기에게 어떤 불길한 일이 생겼을 경우엔 어떻게 나옵니까? 자기에게 악마가 찾아왔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과학시대라는 것인데, 즉 자기 몸 하나만 챙기면 된다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원래 지옥은 악마가 있는 곳인데, 그런데 인간은 성경을 보지 않으니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을 덮어도 인간의 몸은 공포를 느끼는데, 자기 몸에 악령이 들어올까 싶어서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 관계없이 이 세상의 지혜로서 악령을 소개하는 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악령은 원래 조상의 주변에 살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한을 품고 죽어서 그만 악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원한으로 인해서 자손들에게 해코지를 한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성경을 보지 않아도 악령, 악귀, 마귀, 그런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 도를 아십니까?

길을 가다가보면 순진하고 착하게 생긴 아주머니들에게 달라붙는 인간들이 있는데, "도를 아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일단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게 되면 2인조로 바짝 들어붙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게 어떤 내용인고 하니, 아마 여러분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그들은 접근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소위 '천도제'를 지내자고 한다는 말이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종교를 돈을 빼먹는 것인데, 성경을 이용하던 무엇을 이용하던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천도제를 지내야 된다고 하면서, 결국은 돈을 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몸이 아프든지 사업이 안 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원한을 품고 있는 원혼이 주위에 있기 때문인데, 그들이 자꾸만 소식을 전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 와서 집적거리면서 "내 한을 좀 풀어다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한을 풀어주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계속해서 생긴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당신은 행복해지기를 원하지요? 출세하기를 원하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되지 않지요? 그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에게 이런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몰랐을 겁니다. 그것은 당신 주위에 있는 악귀를 쫓아내지 않아서 그러한데, 그러니 천도제를 지내서 그들의 한을 풀어주면 일이 술술 다 풀립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도를 아십니까?" 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 "교회에 나오세요" 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게 점쟁이들이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엄청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접근하면서, "당신의 모든 어려운 점을 우리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생각을 너무 좁게 해서 그러한데, 우리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퇴마사의 역할이고 종교라는 말이죠.

* 지옥은 만족함이 없어 !!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성경을 보지 않았을 경우이고, 그러면 성경을 펼치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지옥에서는 불 속의 영원한 고통이 있는데, 거기서 전혀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무리 군대생활이 힘들어도 제대날짜가 있으니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 군대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하지만 강제로 끌려와서 집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끔찍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옥은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잠언서에서는 이 지옥에 대해서, 그것을 음부라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고 하니, "만족함이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지옥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지옥은 인간에게 당연히 불행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죠.

(잠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 그러면 왜 지옥에 가는가?

성경을 펼치게 되면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왜 지옥에 가느냐는 겁니다.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면, 구약 때는 왜 지옥에 갑니까? 구약 때는 언약을 위반하면 저주가 주어져서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신약에서는 새언약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가복음 22장을 빠트리는 셈이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결심을 해서 "나는 새언약을 받아들일 거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을 거야"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지옥에 가야하는 악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 아무리 천국에 가겠다고 결심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결심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결심을 주님께서는 인정해주시는고 하니, "너는 빠져나오지 못해.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왔지?" 라고 했을 때, "저는 악마 때문에 꼼짝도 못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해주셔서 이렇게 빠져나왔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런 자만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 라고 했을 때, "천국에 가고 싶어요" 라는 이야기는 누구든지 다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

그 기준에 있어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선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물이 없는 자는 그 어떤 짓을 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게 되는데,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음은 선물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해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이고 소망이고 희망사항이라는 말이죠.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는, 그러한 희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지옥에 그렇게 무서운 곳이라면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죠.

심지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면 어떻게 나옵니까? 전부가 천국에 가려고 하지 지옥에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 악마는 지옥의 길라잡이 !!

그런데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지옥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점에서 고마운고 하니까, 사람이 죽기 이전에 악마가 활동을 함으로서 미리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고맙다는 겁니다. 악령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인데, 물론 주님의 뜻에 의해서 말이죠.

처음에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듣고 좋아했는데, 그런데 나중에는 나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결심한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게 아닌데, 인간의 능력으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상당히 안타깝기도 한데, 어떤 점에서는 고맙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악마의 세상이라는 것이죠. 지옥에 먼저 가야하는 악마의 세계, 그런 세계에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태어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생을 통해서 악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확인하게 느끼게 만드신다는 말이죠. 악마의 능력 앞에서 우리의 결심과 각오가, 심지어 우리의 순교마저도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해도, 그 어떤 것도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가 없다는 말이죠.

* 구원의 기준은 ?

그렇다고 하면 구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즉 '주의 이름' 인데, 그것은 다른 말로 구약적으로는 '능력'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 무엇인고 하니, 그 자체가 곧 주님의 능력의 산물이고 그 결과물이란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지금 여기에 선인장이 있는데 꽃이 예쁘게 피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돌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한데, 선인장이 자기가 알아서 컸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를 그냥 놔두게 되면, 이 세상은 지옥을 보여는 곳이 때문에, 즉 지옥의 예고편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저주로 가득하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어떤 가수는 자기 신세를 두고, "나는 시들 수밖에 없지만, 누군가가 물을 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물을 주어도 안 된다" 라고 했는지 헷갈리는데,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지금은 나이 50이 넘어서 활짝 만개를 했는데 말이죠.

* 이 땅에 오신 하나님 !!

그러니 누군가가 계속해서 성령으로 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분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계속해서 은혜를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악마를 이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선택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옥에 있기 때문에 알아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마저 이 세계에 그냥 와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이지만 너무나도 비참하게 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죽었는데, 악마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말이죠. 그냥 하늘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죽고 나서 부활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도 죽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오죽하겠느냐는 것이죠. 인간은 자기의 죄값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 복음이 곧 기준 !!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3일만에 살려내는, 그게 기준이 된다는 말이죠. 이 기준을 두 글자로 '복음'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권한이 아니고, 창세 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제공되는 혜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직 주님의 권한이란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무엇을 느끼게 되는고 하니까, 제발 어디에만 가지 않으면 감사해야 합니까?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가지 않게 되었다면, 그러면 우리는 땡 잡았다는 겁니다. 신종 코로나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지옥에 가지 않으면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게 성경의 가르침인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이 하셨다는 말이죠. 더 이상 우리가 주님에게 요구할 것이 전혀 없는데,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를 받을 인간을 축복을 받을 인간으로 바꾸어주었으면, 그러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사도들의 경우에, 그들이 나중에 재벌이 된 것이 아닌데, 그리고 마누라를 10명이나 거느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게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도들은 너무나도 좋아서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아낌없이 바쳤다는 말이죠.

* 악마의 방어책은, '종교' !!

그러면 예수님의 이런 활동에 대해서 가만히 있을 악마가 아닌데, 악마를 종교를 가지고 대체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행함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그게 종교라는 말이죠. 여호와 증인이나 몰몬교가 그 대표적인데, 오직 행함이라는 겁니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도 그러한데,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챙기겠다는 것인데,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보존해서 말이죠. 그것이 곧 악마가 복음을 대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일종의 방어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게 "너의 실력을 주목하라" 라고, 그렇게 인간의 행함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악마가 이렇게 나올 때, 그래서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사단이 베드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내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자기의 결심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익히 악마의 술책을 잘 아시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그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죠.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성도는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에게서 나온 능력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배당에 꽃꽂이를 해도, "이것은 주님이 시켜서 한 것이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물론 성령을 받지 않아도 인상을 찡그리면서 흉내를 내기도 하데, 그것을 두고 저는 '성대묘사' 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죠(ㅋㅋ). 그런 사람의 특징음 무엇인고 하니까, 정작 자기는 전혀 기쁜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억지로 하는데, 그야말로 연기를 한다는 말이죠.

* 어떻게 인간과 악마(뱀)가 한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아직 오늘강의의 본론은 나오지 않았는데, 서론만 했다는 겁니다. 본론은 창세기 3장으로, 그게 교재 12페이지에서 13페이지에 나온다는 것이죠. 교재를 읽어가면서 창세기 3장을 하겠는데, 먼저 문제를 제시하겠는데, 즉 "어떻게 인간과 악마(뱀)가 한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만약 이게 성경이 아니라 공자의 논어라고 하면, "인간이 뱀과 이야기했다" 라는 것이 나오겠습니까? 전혀 나오지를 않는데,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뱀과 대화를 하고, 또한 그 뱀의 꼬임에 넘어가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 뱀 안에는 악마가 들어있는데, 그게 '옛 뱀' 이라는 겁니다.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우리는 이 창세기 3장을 얼른 읽고 지나가는데,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을 보자는 말이죠. 성경이 진리이고 참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정작 우리는 뱀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악마와 대화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악마라는 존재자체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닌데, 모호하다는 겁니다.

* 참 말을 하면, 두려움이 없어 !!

사람에게 왜 두려움이 생기는고 하니, 그것은 진지를 이야기하지 않아서, 참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는데, 자기가 바른 말을 하면, 그러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저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재벌3세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그만 할머니를 치고 도망치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경찰서에 가서 본 대로 진술을 했는데, 그런데 아버지가 와서는 회유를 한다는 겁니다.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배당을 크게 지어줄 테니 보지 않은 것으로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죠. 물론 드라마 속의 이야기인데 말이죠(ㅋㅋ).

그래서 재판을 하면서 검사가 묻기를 "그 현장을 보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만 주저주저한다는 겁니다. 아니 본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무엇이 주저할 것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조금이 아니라 전부를 다 안 것인데, 지옥을 알면 전부를 다 알았고, 천국을 알면 전부를 다 알았다는 겁니다. 중간과정은 몰라도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참새가 몇 마리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주님의 최종목표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천국은 어떻게 가고 지옥은 어떻게 가는지,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저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다는 말이죠. 자기 신세에 대해서 누가 욕을 하고 비난을 해도, 참 말을 아는 사람은 그런 비난을 뚫고서 주저하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진짜로 참 말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인생이 겁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남들이 아무리 "저 집구석은 왜 저래? 아이가 죽고, 또한 사업은 부도가 나고, 왜 그래?" 라고 해도, 참 말을 한다면 전혀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주저하고 무서워합니까? 그것은 아직까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자기 마음에 와닿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해놓고,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그렇게 교회에 와서 헌금을 했으면 부자가 되게 해주지? 그리고 복음을 전해도 돌아오는 것은 욕밖에 없고, 도대체 이게 뭐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죽고 싶어라 !!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는데, "너 이상한 곳에 다닌다면서?" 라고 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느냐는 말이죠(ㅋㅋ).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짜증을 낼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알고 싶어서 안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을 보니 그게 나온다는 말이죠. 누가복음 22장에 보니, 베드로로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믿어진다고 하면, 물론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는 써야 하겠지만, 그 발걸음만은 가볍다는 말이죠. 초대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구동성으로 죽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고 말이죠. 물론 요즘도 "죽고 싶어라" 라는 것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짜증을 내는 의미와는 다르다는 겁니다(ㅋㅋ).

그것은 바로, 빨리 죽어서 진짜로 참 말이 되는 그 현실에 뛰어들고 싶다는 것인데, 물론 사도바울은 이미 삼층천을 보고 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에게 겁날 것이 없는데, 제 아무리 강도와 도둑이 와서 위협을 하고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물론 문제는 그런 사람이 지극히 드물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가 걱정할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가 하시는 일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빼먹고 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말이죠. 주님의 일은 언제나 완벽하다는 것이죠.

* 다시, 아담은 왜 뱀의 말을 들었는가?

그런데 입장에서 인간과 뱀이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한 것을 살펴보겠는데, 즉 "아담은 왜 뱀의 말을 들었는가?"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교재 1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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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단 유일한 현실의 중심체로 보고 작심했던 모든 현실, 그것은 착각이었고 환상이었고 반짝이는 작은 조각이었고 망상이었습니다. 심지어 거실에서 뛰노는 자식들의 웃음소리도 말씀보다 더 현실이 아닙니다. 그 웃음소리는 잠시 후에 사라지고, 그리고 난 뒤에 생기는 적막한 공간마저도 말씀의 생기로 다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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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교재 12페이지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과연 무엇이 실선이고 무엇이 점선인가?" 라는 것인데, 즉 과연 참된 현실이 어떤 것이냐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교재 13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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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인생이 반성을 하고 개선을 해도 망상은 부풀어오릅니다. 회개하고 또 회개해도 망상은 다른 조각으로 대체가 됩니다. 그리고 미래란 과거의 표절입니다. 오래된 과거가 미래라는 이름으로 다시 그려지고, 우리를 혼미케 할 뿐입니다. 산다는 것을 실선으로 여겼는데 그것은 점선으로 변하고, 그렇게 어설픈 점선으로 연결된 것은 조각이 되어서 깨어져서 어디론가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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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직 말씀 안의 세계만이 진실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즉 "어떻게 인간이 뱀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현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동물원의 노련한 조련사라고 해도, 그게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이 허상이기 때문이란 겁니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담이 뱀과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뱀 안에 악마가 들어있다는 것을 겁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그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그것은 악마가 우리를 허상 덩어리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악마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악마는 보이지 않고, 그냥 인간들만 보인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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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체가 해답이듯이 거기에 포함된 성도도 해답인데, 새삼스럽게 우리가 해답을 알기도 전에 우리는 바깥으로 이끌려서 해답으로 나오게 됩니다. 성도가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해답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해답으로 안목으로 볼 때, ( … ) 이런 허상적 존재를 자아로 붙들게 되면 이는 말씀의 자기 전개장으로서 안개상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물리학에서 입자의 존재를 확인하게 위해서 안개상자가 동원되듯이, 말씀활동의 생동감을 위해서 자아라는 가상체는 필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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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는 안개상자 !!

안개상자 속에 입자를 발생시키면 흔적이 남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 자신은 실상이 아니고 그야말로 허상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이 되신 주님이 지나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악마도 함께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 악마가 있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안개상자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또 다시, 어떻게 아담이 악마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해놓고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와서, 그러면 제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이제는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어떻게 아담이 악마와 이야기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 창세기 3장이 옛날 동화책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자체가 진실임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하는데, 성경말씀을 믿지 않는 과학자나 철학자가 이것을 이야기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뱀이 무슨 말을 하는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자기를 실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악마가 '있음'을 감추기 위한 해답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즉 악마가 과학자나 철학자의 마음에 "그것은 헛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곧 지옥인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있으니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이죠.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만, 지옥의 불구덩이는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넓은 길로 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악마의 회유를 받아서 조작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곧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지면서도, 그들은 지옥에 없다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죠. 좀 솔직한 사람들은 모르겠다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 안 되고, 그것이 참이라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확실한 것이란 말이죠. "가봐야 알지" 라고 하면 안 되는데,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허상인데,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만 나는 예수님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땅에 그 정답으로 태어났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무엇이 실상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이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라는 강의는 2014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에서 한 것인데, 첫째 시간에 제가 한 강의가 무엇인고 하니, "무엇이 실상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라는 것인데, 그러나 우리의 인식부터 먼저 바꾸는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창세기 강의를 모두 들어도, "옛날 사람들이라도 아이디어가 참 좋구나" 라고 하면서 끝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목청을 높여서 강의를 해도 창세기가 오늘날의 참된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실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인간은 안개이고 허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실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과 악마의 싸움, 그것이 곧 참된 것이라는 겁니다.

* 주님과 악마의 싸움 !!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어떠한고 하니까, 여기서 디모데전서 1장을 보겠는데, 18절에서 20절입니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20절에 보면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단이, 즉 악마가 항상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주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노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래, 알았다. 네가 찾는 것을 가지고 가라" 라고 하면서 내어주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 매여 가는 것이 전혀 자연스럽다는 말이죠. 그러니 악마, 즉 악령에게 따라가지 않는 것이 놀라운 것인데,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오, 놀라워라"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 배고픈 사자 !!

여기서 '내어주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악마가 청구했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악마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배고픈 사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먹잇감을 찾아서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닌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본다면, 그게 바로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여기 8절과 9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라고 하는데, 그리고 9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참을 알기 때문에, 즉 진리를 알기 때문에 친구나 일가친척에게 고난을 당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그러하다는 말이죠. 전혀 겁날 것이 없는데,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지 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 겁을 내면서 떤다는 말이죠.

*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어떤 세계관이?

여기서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어떤 세계관이 나오겠는가?"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느냐는 말이죠.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과거와 미래로 퍼지게 되는데, 자기 중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종 코로나가 있다고 하면 피하면 되는데, 자기 환경에 신종 코로나가 터지면 도망을 치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자기 중심인데, 그러니 여기서 '펑' 하고 터지면 저기로 도망을 가면 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살다가 미국이 싫어서 유럽으로 간 사람들이, 이번에 신종 코로나가 터지니까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고 난리인데, 그게 바로 자기 중심이라는 겁니다.

자기 중심이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평생을 두렵고 무서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뭔가 안정된 것이 전혀 없는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자기 몸 하나를 추스르면 그만이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사람은 결국 늙어서 죽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모르겠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으니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가르쳐준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알려주었지만 마귀가 차단을 시켰다는 겁니다. 즉 "끝까지 자기 중심으로 살아라" 라는 것인데, 그렇게 마귀에 의해서 차단된 상태에서 살아가니까, 두렵고 떨리는 것은 평생을 간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 재산이 100억이 된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이 자기의 욕망에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위에는 자기 돈을 뜯어가려고 아부하는 사람들만 많다는 것이죠. 물론 가난할 때는 돈이 전부처럼 보이지만, 막상 돈이 많아지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 나는 신이다 !!

심리학에서 자아실현의 욕구가 가장 강렬한데, 결코 소유가 만족의 최종점이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신이다" 라고 할 때까지, 즉 모든 사람이 자기 말을 들을 때까지, 그렇게 되어야 인간은 비로소 만족을 한다는 겁니다. 신이 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최종 종착점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살게 되고, 늘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문제를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면" 라고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두렵고 떨린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믿지 않으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마귀가 계속해서 막고 있다는 것이죠.

이제 복습을 해보겠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성령을 통해서 말씀 안의 세상이 실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데 그게 말씀에 의하면 마귀에 의해서 막혀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그렇게 막힌 것을 뚫어서 남은 자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러니 그들은 진리를, 즉 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계획을 말이죠.

* 성도는, 주님을 증거하는 허상 !!

그러면 자기는 실상이 아니고 잠시 이 세상에 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즉 허상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허구가 그냥 허구라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 이 허구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이 허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음을, 즉 그분만이 실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답으로서의 허구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정답은 무엇과 연결이 되는고 하니, 우리는 질문을 던진 예수님의 정답으로서 살기 때문에, 비록 우리는 허상이지만 죽어서는 실상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데, 즉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언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 !!

그런데 디모데전서 1장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나오는데, 이 두 사람은 사도바울을 알았던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이 알렉산더의 직업이 나오는데, 그는 구리 세공업자라는 겁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에 있어서 가롯유다와 같은 역할을 한 자라는 말이죠. 즉 해를 끼치는 자라는 겁니다.

(딤후 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그러니 알렉산더는 하지 말아야 하는 짓을 했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이 뛰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도바울은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을 건드린 것은 곧 주님을 건드린 것이 되는데, 그것은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성도를 건드린 것은 주님을 건드린 것인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0절에 보면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건드리면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정도까지 나가는데, 주의 백성들에게는 그 정도의 권세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어떤 직분을 통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나를 건드리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주장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이만희가 하는 짓이고 말이죠. 그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서 허구임을 인정하는, 즉 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이 하신 참과 진리가 허접한 자기 인생을 통해서도 전달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이냐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 되는 것은, 그게 결코 자기가 믿음이 좋다든지 하는 자기 실력이 전혀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다루어 주셔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그게 바로 복을 받은 성도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 비트겐쉬타인 - '이 세상은 게임이다' !!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자기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 인간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세계관을 만들어서 퍼트린다는 것이죠. '비트겐쉬타인' 이라는 20세기 초의 철학자는 말하기를, 이 사람을 철학자의 신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말이죠.

그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이 세상은 게임이다" 라고 했는데, 정말 탁월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말이죠. 아주 조그마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러한데, 그래서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 정당, 거기에 대해서 누가 시비를 걸면 버럭 화를 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지기를 싫어하는데, 그렇게 이 세상을 게임판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자존감'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래서 남녀간에 사귀다가 헤어지더라도, 누가 먼저 차고 차였는지, 그게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 어머니, 그만 오세요 !!

예를 들어서, 할머니가 손자를 하루종일 돌보고 있었는데, 마침 며느리가 올 때 그만 울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하루종일 손자를 봐준 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 손자가 울게 되었는지, 그게 중요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할머니가 잘못해서 울게 되었다고 하면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게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해주었어도, 그래서 "어머니, 정말로 고마워요" 라고 하다가, 한번 삐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인데, 그래서 "어머니, 이제는 오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동안 아무리 분위기가 좋았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비트겐쉬타인이 심사숙고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은 게임판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기 중심이라는 말이죠.

* 날마다 와장창 !!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자기가 여기에 있으면 다들 자기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인간은 신이기 때문에 그래야 만족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것을 멈추지 않는데, 신이 될 때까지 말이죠. 그런데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만약에 부부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물론 자식과 부모의 관계도 그러한데, 왜냐하면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절대자라고 하는 본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리 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왜 사도바울에게 그렇게나 해를 입혔을까요? 그냥 남남이라고 하면 "그래, 당신이 최고다. 잘났다" 해버리고 떠나면 그만인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인정하고 추종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야기하고 오늘 강의는 마치겠는데, 여기서 민수기 16장을 보겠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것이 이미 구약에 다 있다는 말이죠. 1절에서 3절입니다.

(민 16: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민 16: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민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 고라 자손의 반란 !!

그러면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고 여기고, 지금 우리는 광야를 통과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모세에게 반발하는 고라자손이 어느 지파인고 하니, 다른 지파가 아닌 레위지파의 자손인데, 모세나 아론과 같은 레위지파라는 말이죠. 그러니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높은 간부급에서 그만 반란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반란이라고 하지만, 제3자인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누구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까, "물론 모세와 아론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이 알아서 각자를 하시는데, 그런데 그들이 무슨 돗대도 아니고 그들만이 왜 우리의 지도자가 되었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럽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종의 게임판이 되고 만 것인데,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라고 하면, 고라 자손들의 이성적인 반발에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말이죠. 고라 자손과 거기에 동조하는 백성들을 책망하겠습니까? 인정해주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고라 편이 아니고 모세 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 편이 되는 근거를 우리가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이죠.

고라 자손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땅에 입을 벌려서 그들을 삼켰다는 겁니다. 마그마의 그 불구덩이에 빠져서 죽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잔인하게 죽여버렸는데, 마치 조폭들이 살아있는 사람을 땅을 파고 묻어서 죽이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죽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거기에 동조해서 염병에 죽은 백성들이 무려 14,700명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일로 인해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다같이 은혜를 받았으면 모두 같은 백성인데, 그런데 왜 너희만 지도자 노릇을 하지?" 라고,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고라 자손을 포함해서 무려 14,700명이 죽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고라 자손은 그 현장에서 250명이 죽었다는 겁니다.

(민 16:35)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민 16: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실상이 아니고 쓰레기가 되어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이 죽어도 안타까워 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허상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들이 왜 죽었습니까?

* 모세의 겸손 !!

오늘 강의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허상인데, 그런데 무엇으로 여겼다는 겁니까? 자기를 실상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모세가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편을 들면서 "모세는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모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두렵고 떨림으로 살았다는 것이죠.

(히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왜 그렇습니까? 자기는 허상이고 하나님만이 실상이기 때문에, 그 실상, 즉 참을 보여주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자기 안에 참이신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말이죠. 사람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진리를 알고 있었기에 전혀 주저할 게 없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모세의 겸손인데, 그것을 고라 자손들이 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저 인간 대 인간, 그러한 게임판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을 죽여버렸는데,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은 천국에 가봐야 태극기를 들고 시위할 자들이라는 겁니다.

*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와서 !!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인간이 뱀과 이야기를 하는데, 즉 사단이 뱀에게 들어왔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실상인데,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직 말씀만이 실상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과연 뱀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그런 것을 사람들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증명이 될 수도 없고,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성경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인데, 지옥에 가려고 환장을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조종하고 있다는 말이죠.

* 차이성 !!

그렇게 뱀과 이야기를 해보니, 뱀이 이야기하는 것과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것이 같았습니까? 달랐습니까? 달랐다는 말이죠. 물론 유치부 학생들도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데,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것은 그 '차이성' 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A블럭과 B블럭이 있다고 하면, 여기서 "나는 어느 쪽에 속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점을 봐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어야만 자기를 실상이라고 여기는, 그런 자기 위주의 삶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A블럭이나 B블럭, 그 어느 한 곳으로 정해지게 된다면, 그렇게 정해진 자기를 잘난 존재로서 여기고, 또 다시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된다는 말이죠. 즉 "나는 이제 구원을 받았다. 어쩔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 그 차이성에 뛰어드는 것이 곧 성도 !!

그러니 그 차이점을 보자는 것인데, 그 차이점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전도라는 말이죠. 그래서 명절에 친척을 만나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그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내가 다 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우리가 참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차이를 안다는 것인데, 즉 이 세상이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섞여있음을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전혀 주저할 이유가 없는데, 여기서 발생한 것이 바로 십자가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말이죠. 즉 희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피를 소유한다는 생각은 하지말고, 성도는 그 차이성에 뛰어든다는 말이죠. 인간에게 설움을 받는 그 차이성에 주님과 같이 뛰어들게 되면, 비록 남들에게 욕을 얻어먹는다고 해도, 거기에 대해서 전혀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 '따먹어도 된다'에 확 끌리는 우리의 마음 !!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분명하게 두 가지의 다른 소리가 나왔다는 말이죠. 따먹어도 된다고 한 것을 뱀이 이야기했다고 하지말고, 일단 모른다고 치자는 겁니다. 그렇게 "따먹어도 된다" 라는 의견이 있고, 그리고 "따먹으면 죽는다" 라는 의견이 있다는 말이죠. 배후에 누가 있다는 것은 모른다고 치고, 그러면 어느 쪽이 현재 우리 인간의 마음을 확 사로잡느냐는 겁니다.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것은 당연히 따먹고 싶은데, 왜냐하면 인간은 신이 되고 싶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복음을 알고 있어도 돌아서면 죄인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곧 이미 죽었다고 여긴 자기 자신이 계속해서 살아있어서 그러한데,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 말이죠.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 있는 이상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누구를 부르려 오셨습니까? 죄인을 부르러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만을 증거하는 주님의 전략에 우리가 죄인의 모습으로 동참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주어도 금방 자기 중심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임을 고백합니다. 그런 죄인들이기 오직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1,11 오후 2시에 마침.

코로나19 바이러스도 허상임을 알게 하소서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주어도 금방 자기 중심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임을 고백합니다. 그런 죄인들이기 오직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1,11 오후 2시에 마침.

코로나19 바이러스도 허상임을 알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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