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3a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8편 13절부터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하늘 위에 있는 하나님께서 지상을 향하여 반응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살아 계신 존재하신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모습이 온순한 모습이 아니고 화를 내시는 모습으로 소개돼있습니다.
18편 7절에 보면,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화낸다, 이걸 진노지요. 하나님께서 지상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다. 화를 내는 이유는, 지상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슨 전쟁이냐 하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전쟁이 되겠어요. 무엇이 하나님 뜻에 부합되고 무엇이 하나님 뜻에 부합되지 않는가? 그것을 구분하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지상에서는 참이 아니고 거짓이 이기죠. 거짓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서 편을 들고 있는 겁니다. 진리 편에 서서 화를 내시는 거죠. 여기 10절에 보면, 그룹 천사들까지 동원하셔서 흑암과 공중에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고 밝아야 될 세상이 천사들이 방문하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둡게 보시는 겁니다. 어두움이 등장합니다. 이 세상 전체가 깜깜한 어둠이라면 광채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 쪽에만 빛나는 광채가 비추겠지요.
그 광채와 어둠 사이에 고요하게 빛이 오는 게 아니고 13절에 보면, 우박과 숯불, 숯불이란 태운다는 것, 다 태워죽이겠다는 하나님의 의사표시겠지요. 우박도 마찬가지고. 때리고 태운다. 하나님은 폭력적이라고 이해하면 돼요. 이 세상이 죄악이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잔인한 하나님, 사정 봐주지 않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나타났어요.
하나님이 폭력적이고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근거가 뭐냐? 다윗에 의하면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뭘 위배했느냐? 언약을 무시해버렸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했다. 이렇게 돼요.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니까. 약속에 위배되는 언약을 무시한 거예요. 그러면 이 언약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되겠지요. 처음에 언약과 연속성을 갖는 것과 언약과 불연속성, 언약과 단절된 무엇인지 그것만 아시면 간단하게 문제는 풀립니다.
언약과 우호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생명나무에요. 그 이유가 언약을 믿으면 복을 받으니까, 언약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으니까. 잠언서 8장에 보면, 언약을 하나님, 나를 아는 자가 생명나무라 했으니까. 언약을 안다는 것은 곧 생명나무에요. 그러면 언약을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 되느냐 하면, 바로 선악체계, 또는 선악의식, 선악적인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는 겁니다. 그 결과가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죽음이죠. 저주고, 진노고, 지옥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성경에 우리가 시편 18편을 봤는데 사람이 성경을 펼치게 되면 성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머리 집어넣고 막 성경 속으로 들어갑니까? 그거는 불가능하지요. 왜냐하면 성경이란 자체가 에너지 장으로 돼있어요.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에너지가 있는데 그 에너지 때문에 이 덩치 큰 물체가 성경책이 반발이 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책으로 못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성경책이 있다면 인간은 여기 있겠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쉽게 하도록 애는 쓰겠습니다만. 인간이 어떤 대상을 보는 것, 나무, 산, 사람, 개, 고양이, 또는 책, 탁자, 꽃, 화장지 등 이런 대상을 볼 때 그냥 보는 게 아니고 내 자리에 보탬이 된다는 의식, 내 자리가 공고하게 된다는 요구를 가지고 사물을 보게 돼요.
만약에 길 가다 더러운 것이 있다면 피해가지요. 왜 피해갑니까? 사물을 보는 순간 내 자리에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피해가게 돼있어요. 행동으로 나타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자리라 하는 것은 자기 자리를 보존하고 키우는 그러한 본능에 의해서 요구에 의해서 사물을 대하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사물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내 자리에 보탬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보는 거예요.
이 자리를 어떤 학자는 현존재라 이야기하는데 어쨌든 이 자리를 통해서 볼 때 이 보는 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걸 이해한다고 해요. 만약에 성경책이 있는데 나는 성경책 안 본다고 하면 어떤 경우냐 하면, 이 인간의 자리가 자기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사물을 본다고 했는데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이야기해서 인간이 자기 자리를 스스로 개방한다고 이야기해요.
현존재, 인간이란 존재를 자기를 개방하게 돼있어요. 열어놓으면서 받을 것은 받고, 거부할 것을 거부하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걸 개방하면서 나름대로 무엇이 발휘되느냐 하면, 자기를 위한,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나와서 자기로 돌아오는 자기에게로 소환되는 일종에 신적 계시, 그러니까 계시, 희망사항 같은 것을 발산하게 돼있어요. 계시 발산. 인간은 그것을 개방한다. 인간은 자기를 열어놓으면서 무조건 내가 잘되기 위해서 계시를 개방하는 거예요.
개방하면서 여러 가지, 코끼리나 탁자나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개념을 정리하게 되고, 이걸 합치면 해석이 돼요. 이게 세계 해석이에요. 세상에 대한 해석. 세상 해석을 구성해서 세계에 대한 자아는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굉장히 복잡하게 보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성경을 볼 때 의도를 가지고 본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그냥 보는 게 아니고 성경 있네, 나는 펼쳤네, 끝. 이게 아니고 내가 열어놓았는데 내 자리를 보다 활성화시키고 확대시키는 용도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성경에서 한 수 배울 게 있을까, 성경에서 도움 되는 게 있을까 싶어서 성경을 보는 거예요.
자, 성경을 보기 전에 인간의 자리는 아까 계시라고 했지요. 본인이 뭐냐 하면, 본인이 신이 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의 특징은 소멸일까요, 영원함일까요? 영원함이죠. 누가 영원하다? 여기 살아있는 내가 영원히 살아있기를 욕구를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성경을 하나의 물체로 보고 나한테 어떤 이익이 되는 정보가 있는지 그냥 본다 이 말이에요.
만약에 성경 안에 못 들어가는데 들어갔다 칩시다. 이건 마치 뭐냐 하면, 거울 면은 나를 반사하는 거예요. 거울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나를 비추면 그만이란 말이죠. 그런데 성경 세계가 따로 있어요. 만약에 성경 안에 들어간다 하면 내 자리를 가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성경 속으로 안 들어가면 성경책을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필요한 것만 끄집어내면 되겠지요.
그게 아니고 성경 속 안으로 들어가면 성경 속에 뭐가 준비돼있느냐 하면, 현재 나라는 현존재, 나라는 이 인간이란 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보시기에 멀쩡하다, 멀쩡하지 않다, 어느 쪽이에요? 멀쩡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괜찮게 만들었지만 그 다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아까 했지요. 선악체계, 선악적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생명나무와 관련 없는 언약의 혜택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언약을 위반했을 때 저주와 죽음이 온다 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노아언약을 줬잖아요. 노아언약을 위반했을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현존재가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어요.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노아 홍수 때 어디 갔습니까? 죽었지요. 왜 죽입니까? 언약이 등장했기 때문에. 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언약에 위배되는 사람은 다 죽게 되고 하나님의 저주와 폭력적인 조치를 당하고 그들에게 아주 잔인한 하나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선악체계, 중요한 겁니다.
다시 합니다. 우리가 성경 속에 안 들어가고 그냥 이용하려고 하면 나한테 필요한 것, 정보나 얻을까 싶어서 채택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 멀쩡해요. 아무 문제없고 나는 영원히 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영원하고 싶고 나는 신이 되고 싶어. 이유는 몰랐지. 그러나 성경 안에 들어가 보니까 여기는 성경 안의 세계, 성경 속의 세계가 따로 있어요.
성경 속의 세계를 들어가 보니까 멀쩡하다고 여긴 내가 멀쩡한 게 아니고 내가 영원한 신이 되고 신격화 되고 신이 되고 싶도록 누군가 제안을 한 자가 있어요. 누가 제안한 걸게요? 우리에게 신이 되게 해준다고 제안한 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뱀, 악마가 제안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악마와 한 편이지요. 악마의 앞잡이고 악마의 존재를 증거하는 증인이지요.
성경 세계 속에 들어가 보니까 악마와 한 편이 되어서 그 사고방식이 선악적 체계, 선악적 사고방식으로 나 좋으라고 나의 영원함, 악마가 제안한 것이 신격화, 신이 되는 것이니까 내가 신이라고 해줄게, 라고 악마가 그렇게 제안한 사실이 성경 세계 속에 들어가 보니까 비로소 나타난 거예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생명나무와는 완전히 빠이빠이 됐어요. 못 가요. 갈 수가 없어요. 행여나 또 갈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켰어요. 끝났어요.
그러면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내가 어느 날 빛을 보고 성경을 보았다. 여기 보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많이 하여서 내가 전에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를 때는 내가 어둠의 존재였는데 빛을 보고 성경 말씀대로 살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변화를 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 이것이 선악체계일까요, 생명체계일까? 이 사고방식이 선악체계지요. 이것은 악마의 제안입니다.
악마가 메시아를 제안해요. 선악체제에 인간들이 이해되는 식으로 메시아, 그러니까 예수를 채택한 거예요. 빛이 되던 예수님이 되던 그 나오는 결과가 뭐냐 하면, 바로 나로 하여금 구원해주겠다, 신이 되게 해주겠다, 라는 것을 요청하는 것, 이것이 내가 성경 속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 바깥에 뭔가 필요한 게 있을까 싶을 때는 이것이 하나님 뜻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성경 속에 들어가 보니까 이런 종교적인 것, 내가 하나님의 말씀 지켜서 지금은 내가 더러운 인간인데 깨끗한 인간 되어서 천국 간다는 이 의식이 이 체계, 이 사고방식이 악마가 천국 못 가도록 가로막기 위해서 하는 악마가 만든 신앙, 악마가 만든 기독교, 종교라는 사실을 성경 속에 들어가 보면 알아요. 성경을 참고로 한 게 아니고 들어가 보면 안다고.
예를 들면 로마서 7장에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게 나오는데, 물어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성령 받았지요. 지금 여기에 자기가 구원받고 자기가 천국 가고 싶고 자기가 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서 내가 전에는 말씀대로 못 살았는데 성령에 의해서 말씀대로 살았다, 할 때 이 성령 받은 사람과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 바울과 생각이 같아야 돼요, 달라야 돼요? 같아야 되지요.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나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내 안에 악이 있다. 자, 내 속의 선이 이길까요, 악이 이길까요? 할 때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은 뭐라 합니까? 자기 내부의 악이 이기죠. 어찌 된 겁니까, 도대체.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은 자기 속의 선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악이 이긴다고 했는데 뭐 빛을 받아서 말씀 지켜서 전에는 나쁜 짓 많이 했는데 이제는 착한 일만 한다고 생각하는 성령 받은 사람과 달라도 어떻게 이렇게 달라요? 누가 말이 옳아요? 사도 바울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귀신나라에서도 유명한 사람인데 왜 말이 달라요?
내가 그대로 선악체계 아래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지요. 그러면 악을 버리고 선한 쪽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잘 키웠다고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보내주시고 상급 주신다, 라는 사고방식(이게 선악이에요)일 때 이 사람은 어디에 주목하겠어요? 예수님한테 주목하겠어요, 변화되는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겠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는 거예요.
만약에 그동안 악을 버리고 차곡차곡 선을 쌓았으면 선한 그것을 절대로 안 다치고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여 그걸 끌어안겠지요. 사도 바울은 자랑을 뭐로 한다고 했어요? 자기가 선한 것을 자랑한다 했어요, 아니면 십자가를 자랑한다 했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의 선과 악을, 악을 떼어내고 선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선악체제 다 뜯어내야 한다고. 선악적으로 나를 주시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를 뜯어내야 되지요.
뜯어내게 되면 십자가가 있는 사람은, 물론 뜯어낼 때 아파요. 왜냐하면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이걸 다 뜯어내니까 아프잖아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했단 말이죠. 성령 받기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나는 착한 의인이다, 점점 더 의인으로 변화된다. 그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여전히 선악체제 악마가 제시한 메시아, 악마가 제시한 기독교란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관심사가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잘 되는가에 있어요. 이게 뭐냐? 자기 개방성이란 말이죠. 절대적인 자기 자리를 개방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 보면서 성경에서 내가 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료들을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 속으론 못 들어가고. 똥이 있다. 피하지요. 왜? 더러워서 피하지요.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서 피하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더럽다면? 선악체계를 알고 있는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똥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본인을 치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걸 뜯어낼 때 진짜 이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는 사람은 뜯기는 게 아파요. 누구든지 아파요. 누가 나를 욕하면 아프잖아요. 뜯기는 가운데 점차 뭐가 등장하겠습니까? 변화되기를 십자가가 들어있다. 내 죄를 사해준 십자가가 보이지 시작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합니까, 아니면 자기가 그동안 착하게 살려고 변화한 걸 자랑하겠어요?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에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런데 만약에 진짜 안에 십자가가 없다면, 십자가 없이 성령을 거론하고 빛을 거론하고 하나님의 윤리도덕을 거론한다면 이걸 뜯어내면 십자가 대신 안에 진짜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선악체계가 들어있지요. 여기서 등장한 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자기 의입니다.
로마서 10장 2절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지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자리를 개방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자리에 이름을 붙인다면 자기 이름이 되는 거예요.
이건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을 쌓을 때 인간들이 바벨탑을 왜 쌓았느냐 하면, 자기 이름을 하늘에 높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자리를 포기 못해요.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자기 부정이 안 된다고. 그런데 로마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바로 자기 의를 위해서 그동안 하나님 율법을 이용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따져봅시다. 그러면 성령이 하신 일이 뭡니까? 성령이 하신 일이 없는 나의 일을 채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게 성령의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고 바깥의 너는 죄 지은 죄인이다. 이 관계를 보여주는 게 성령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언약이 없이 그냥 선악체제를 고집하는 사람은 성령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면, 전에 나쁜 짓, 나쁜 생각 많이 했는데 지금은 착한 생각하도록 성령께서 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하는 것은 성령을 몰라서 자기 의를 채우는데 우리는 성령을 받은 상태에서 점점 더 나의 의를 채우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을 거기다 끌어당기는 겁니다.
무슨 성령이 선악체계를 그대로 옹호하는 이런 성령은 없어요. 성령이 소개하는 것은 언약의 완성, 십자가의 효과에 관한 겁니다.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돼있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를 모르는 자체가 성령을 안 받았다는 뜻이고,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뭐만 자랑한다 했습니까? 자기의 선악과, 변화된 이것 자랑합니까? 아니죠. 성령 받으면 뭘 자랑합니까?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러면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바깥에 둘러쳐있는 나 자신의 일생에 공들였던 십자가만 드높이기 위해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죄 씻음의 주님의 공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근본적으로 모든 원인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그래요. 또 성경 속으로 들어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을 그냥 참고도서로 내가 구원받는데 도움 되는 것으로 보지 말고 아예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잔 말이죠.
성경 속에 들어가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본 다 사람은 다 이해해요. 성경 속엔 뭐가 있느냐? 이스라엘이 있고 그 다음에 이방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심어줬어요.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다. 그 말도 맞지만 더 적극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면 이방인들은 사랑하지 않고 발로 차는 거예요. 이방인의 특징은 뭐냐? 거부하는 거예요. 배척하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부여하는 거예요. 주를 알지 못하는 민족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지어다.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란 말이죠. 주의 언약을 모르는 자에게 저주를 퍼부으소서.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이방인이죠. 이방인이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권리도 없고 구원받을 이유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께서 버림받는 게 마땅해요. 그래서 이방인 앞에 뭐가 붙느냐? ‘개 같은’ 이방인이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거예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만약에 십자가의 성령이 와서 구원받았다면 그 사람은 지 구원받은 걸 자랑하겠어요, 안 그러면 구원받고 난 뒤에 자기가 개 같은 입장이었음을 자인하는 겁니까? 나는 개 같은 자인데 어찌 저를 구원합니까,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이 사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주님의 공로가 들어가요. 주님의 사랑이 들어간다고.
주님의 사랑, 공로가 들어간다면 아까 성경 속에 들어간다면 이방인들은 어떤 체계 속에 있습니까? 선악체계지요. 선악체계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나는 선하고 싶어, 의롭고 싶어. 나는 착하고 싶어. 나는 악하긴 싫어. 왜? 악한 것은 저주를 받고 선한 것은 복을 받으니까 난 복 받고 싶어. 복 받으면 난 안 죽어도 되잖아. 소멸 안 해도 되잖아. 저주 안 받아도 되잖아. 지옥 안 가도 되잖아. 그러니까 나는 어쨌든 간에 저주 안 받고 벌 안 받고 그런 사람 되고 싶어. 그래서 나는 악을 버릴 거야.
이 사고방식 자체가 선악체계에요. 이게 악마가 집어넣어준 거라고.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이미 그건 생명이 아니에요. 생명체계는 언약에만 있고 언약 바깥에는 생명체계가 없어요. 생명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갇혀있는 겁니다. 갇혀있을 때 나는 선하다, 나는 착하다, 나는 구원받았다, 할 때 결국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세 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메아리. 자기가 자기한테 이야기하는 되고 싶은 것을 그냥 계속 쏟아내면 그게 갇혀진 공간에서는 음파가 갔다가 천정에 마주쳐서 다시 증폭된 음파로 내 귀에 들리거든요. 왕왕 들리는 거예요. 내가 내뱉은 소리를 내가 메아리로 듣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들이 하는 신앙생활이에요. 소위 그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이 이런 겁니다. 착하도록 변화돼야 된다. 옛날에는 나빴지만 점점 더 좋아진다. 이게 바로 악마가 쳐놓은 악마가 지배하는 밀폐된 공간에서 자기가 요구하는 그 소리를 그냥 되풀이해서 듣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시편 18편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인간에 진노하시고 화를 내시고 숯불 내려주시고 우박 내려주시고 아예 망하라고 하시는가? 이게 전쟁을 하는데 거짓된 것이 참 진리라고 행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 편을 드는 거예요. 언약은 참은 뭐가 있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지요. 언약은 현재 시편에서 누구에게 오냐 하면, 다윗에게 언약을 준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이렇게 돼있어요. 1절, 2절에서 지금 전쟁 중에 있으니까. 전쟁 중에서 다윗 편을 들고 있는 겁니다.
전쟁이란 고요할 땐 전쟁이 아니지요. 뭔가 달려드니까 전쟁을 하는 것 아닙니까. 달려드는 거짓에 대해서 무엇이 거짓인지 이걸 알아야지요. 선악체계가 성경에 있기 때문에 제가 거짓을 고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이미 출발이 선악체계부터 시작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출발은 뭐다? 악마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생각은 악마의 생각이에요. 이게 성경 속에 들어가면 이렇게 돼요.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잖아. 그거는 현재 우리 인간이 그런 소리할 입장이 안 되지요. 이미 생명나무 가는 길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 전의 상태로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지금 우리 모습은 악마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선악체계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선악체계 자체가 뭐가 없다? 생명이 없는 거예요. 선악체계의 조건이 뭡니까? 선악체계 안에 있으면 네가 뭐가 된다? 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신이다, 신이 되고 싶다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신이 뭐냐? 종교인데요.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서 인간의 품성, 본성을 드러내요. 그 본성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은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아버지 자리가 탐이 나서 자식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아버지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 바로 종교의식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너무 황당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프로이트란 정신분석학의 시조가 말하기를 아버지 자리가 탐이 나서 아버지를 죽여요. 죽이고 난 뒤에 미안하잖아요. 미안하니까 죄책감에 죽은 아버지에 제사 드리는 희생제물 드리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보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아버지 자리가 탐이 난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라고 보느냐 하면, 모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 인간이나 애들에게 묻기를 너, 커서 뭐 될래, 할 때 뭐 된다 합니까? 강다니엘? 이게 그에겐 아버지에요. 탐이 난 자리에요. 또는 애들한테는 방탄소년단? 또는 손흥민? 바둑 두는 사람한테는 박정환? 그리고 나는 대통령 될래. 대통령? 너, 누가 제일 좋아? 아버지를 존경한다. 아버지? 교회에서는 목사님? 직장에서는 사장님, 회장님?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아버지 자리가 육신의 아버지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자리가 하나의 자기의, 아까도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하나의 대상이 있다고. 대상의 자리가 자기의 존재라는 개방이 되게 되면 대상의 자리가 해석의 자리가 되고 그게 욕구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 자리가 탐이 나는 거예요.
탐내지 않는 인간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탐을 내는데 탐낼 때 탑, Top of the world 세계 제일 꼭대기를 인간은 탐을 내게 돼있어요.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아버지의 자리에요. 신의 자리. 나만 신이고 싶은데 나보다 더 신처럼 갖고 있는 절대 권력이 애들 눈에 보이는 거예요.
만약에 피겨를 하는 아이가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누가 피겨 제일 잘했습니까? 김연아지요. 그럼 김연아가 신이 되는 거예요. 트롯 영웅이 누굽니까? 임영웅. 트롯하는 사람에겐 영웅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존재에 보람을 주고 인간에게 사는 기대와 희망을 제공하는 게 신이란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의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게 뭐냐 하면, 본인이 원하는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차지하게 되면 신이니까 신이, 이게 어딜 내 자릴 탐내, 하고 화내겠지요. 화내니까 탐을 낸 본인이 좀 미안스럽지요. 이렇게 봅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어떤 보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희망이 있어야 살거든요. 인간이 희망이 없으면 못 살잖아요. 어떤 목표가 있단 말이죠.
아버지가 어떤 점에서 좋으냐 하면, 나에게 일정한 내게 목표를 제공한 점에선 아버지께 감사해요. 그러나 인간이 나에게 목표를 준 건 하나의 모델에 된 것엔 감사한데 감사로 끝나게 아니란 말이죠. 인간은 기어이 아버지가 갖고 있는 그 자리가 탐이 나서 그 아버지를 뺏어버린단 말이죠.
이게 원래 아버지 자리인데 뺏었으니까 여기서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내 자리가 아닌데 아버지 자린데 뺏었으니까 미안함이 죄책감이 되는 거예요. 죄책감이면 용서를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방법은 뭐냐? 내가 제사를 드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팼다가 미안해서 희생제물 드리고. 이게 종교라는 겁니다. 이 말은 교회 기독교, 불교만 종교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은 다 종교적이란 뜻이에요.
결국 오늘 제목이 [악마의 제안]인데 악마의 제안이 뭐냐 하면, 너도 신이 될 수 있다. 신이 되기 위해선 내가 아버지 자리에 앉는데 중간에 실패하거나 좌절하거나 잘리면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무조건 신이 되기 위한 나는 영원해야 돼요. 중간에 끊어지면 안 돼요. 소멸되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되고 죽을 뻔한 건 돼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을 많이 죽을 뻔까지 희생했더니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줬다. 뭐 이러면 괜찮은데 진짜 죽어서 죄인 되어 가버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간당간당하게 뭔가 남아있어야 돼요. 아직도 나는 약한 가는 줄처럼 모든 걸 상실한다 할지라도 상실한 것이지 아예 끊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 들어가면 인간은 아예 끊어졌어요. 하나님과 이어지질 않았어요. 악마와 든든하게 이어졌지요. 악마와 이어져놓고 자꾸 악마가 거짓말하는 게 뭐냐? 너는 신과 이어져있다고 하니까 하나님과 끊어진 입장에서 자기는 나쁜 악마와 이어질 리가 없어. 아직도 내가 부족하고 죄인이고 지옥 가도 마땅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어떤 연결점이 있을 거라고 자꾸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에게는 선한 것을 추구하는 본심이 있으니까 이 선함은 곧 하나님이 선하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선한 품성과 나의 선한 품성과 서로 이어져있으니까 이건 끊어져도 아주 끊어진 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뭐냐? 근근이 자기의 신적인 영원함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그 대목을 읽어볼게요.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묻습니다. 구스인, 흑인이죠. 흑인 피부가 백인 됩니까? 안 되지요. 표범이 반점이 변할 수 있습니까? 표범의 반점이 바뀌면 그게 송아지지 표범이겠어요? 절대로 안 돼요. 절대로 안 되는데 만약에 그것이 변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 말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흑인입니다.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사진 찍을 때도 흑인이에요. 그런데 뉴욕의 맨해튼에서 사진 찍을 때도 백인이 아니고 흑인이에요. 북극에 가서 찍어도 그 눈 많은 곳에서도 흑인이에요. 배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본인이 이미 범죄 하고 이미 저주받았고 하나님의 생명나무에서 끊어진 상태라는 점은 어떤 경우라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변하지 않는 것을 변하게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게 교체가 돼야 돼요. 그 교체가 뭐냐? 대신 죽으심인데 죽어야 돼요. 같이 죽는 분에 의해서 우리가 죄인이 의인 되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만 할 수 있느냐? 예레미야에서는 바로 주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누굴 보내는 거예요. 생명나무 자체가 언약 완성 자체로 우리에게 보내는 겁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더욱 더 착해지는 게 성령이 온 게 아니고요. 그분이 내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성령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선악체계의 못된 버릇으로서 자꾸 나는 착해져야 돼, 착하게 변화돼야 돼, 라는 것을 전부 다 뜯어내는 겁니다. 참 뜯어내니 아프지요. 아까도 했잖아요. 인간이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뜯어내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아프지만 왜 뜯어내시느냐 말이죠. 그래야 내 안에 진짜 십자가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나는 신이다. 그 악마가 들어있는지 보자는 거예요. 십자가 들어있으면 아프지만 뜯기고 난 뒤에는 다시 한 번 십자가 드러낸 것에 대해서 주께서 일방적인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거고.
만약에 십자가도 없으면서도 주님도 없으면서도 마치 주님이 있는 양 예수님이 들어있다고 우기는 그런 사람은 뜯어내게 되면 진짜 죽기 살기로 못 뜯어내도록 강력하게 거부하고 결국 그 안에는 마귀가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버립니다. 뜯어낸다고 했는데 뜯어내는 방법이 오늘 시편 18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작살내버립니다.
진도 나가겠습니다. 시편 18편에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해서 14절에 보면,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부셔버린 거예요. 하늘 있고 물 있고 땅 있는데 물을 통과해서 물 밑에 있는 땅을 다 박살내버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사람은 물 밑에 있는 터가 나타나는데 15절에,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꾸지람이에요, 꾸지람, 나무라는 거예요. 이 땅을 향하여.
16절에 보면,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주시는 거예요. 그럼 건짐 받았다는 것은, 이 땅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이 땅의 모든 자가 흑인, 그러니까 선악체계에 있는 죄인이라고 봅시다. 마땅한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 거예요.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데 끄집어내줄 때 진짜 우리가 착실히 살아서 끄집어내주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언약, 아까 했지요. 뭐만 자랑한다 했습니까?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다시 할까요. 내 속에 악이 있고 선이 있다. 누가 이긴다? 악이 이겨요. 선하고 싶지요. 선악체계니까. 그런데 악이 이기는데 어떻게 해. 율법을 통해서 악이 아니라 하는 것도 악으로 드러나는데 어떻게 해.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잠자고 있는 악도 거기서 자극을 받아서 완전히 악이 활개를 치고 율법을 위반하는 식으로 우리 몸은 이미 그런 몸이 돼버린 거예요. 죄가 활성화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과 개방성으로 돼있는 우리 몸이란 말이죠. 사도 바울은,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했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이런 짓을 했고 오늘날 교회들이 계속해서 바리새인 짓을 하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인간들의 신이 되고 싶은 그런 충동, 아까 했지요. 바벨탑,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신이 되고픈 악마의 충동에 의해서 교회 나와서 지가 애써 믿고 막 빛 받고 성령 받았다 하면서 지가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거예요.
구원받았으면 십자가를 자랑해야지요. 딴소리하면 안 돼요. 당신 뭘 자랑합니까? 십자가. 얼마나 쉬워요. 딴소리할 필요 없다니까요. 십자가만 사도 바울이 자랑한다면 본인도 그것만 자랑하면 되잖아요.
부부 싸움할 때 꼭 이런 식이에요. 둘이 말다툼하다가 남편이 조용한 게 좋다 싶어서 빨리 상황을 종결시키려고,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그러면 아내가 거기서 멈춥니까? “뭐가 잘못됐는데, 뭐가 미안한데?”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아니, 뭐가 잘못됐는데? 당신은 나를 기분 더럽게 했어. 나를 아주 우습게 봤어. 뭐가 잘못됐는데?”
도대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자꾸 “주님이여, 잘못됐습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너, 내가 호구로 보이지. 뭐가 잘못됐는데?” “어릴 때 엄마 말 안 듣고.” “그거는 옛날에 이야기했잖아. 뭐가 잘못됐는데?” 잘못된 걸 몰라요. 내가 선과 악으로 싸인 이런 생각이 있다는 자체가 잘못됐는데 내가 착하도록 변화되겠다.
이게 잘못됐는데 그게 잘못된 줄 알아야 십자가에 꽂힌 사람이거든요. 나는 뭘 해도 개고 아무리 착해도 나는 더러운 놈입니다. 마땅히 그렇습니다.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뭘 해도 죄인입니다. 이러고 변화되더라도 더욱 더 죄인 되도록 변화됐다고 하면 되는데 그래도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면 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 받아서 점점 착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싸움이 방금 시편 18편에서 싸움이 결국 무슨 싸움이냐 하면,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싸움이에요. 바리새인은 모든 인간들의 대표자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죽었어요.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고방식, 어떤 선악체계로 그들은 자기 의를 고집하고 있는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거든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누구라 했습니까? 악마라 했잖아요. 악마가 남의 이야기고 딴 데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악마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을 계속 유지하게 한 게 악마에요. 우리는 악마의 앞잡이고요.
사람들은 생각해요. 점점 더 착해진다 할 때는 높아지는 거죠. 착한 하나님은 위에 있고 나는 착해지려고 노력하니까 저 높은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신 것이 아니고 제일 낮은 곳에 계셔요. 십자가에 있다고. 그러면 만나려면 내가 점점 더 죄인 돼야 돼요.
죄를 더 지으란 말이 아니에요. 더 지으나 안 지으나 살아가는 자체가 죄기 때문에 그러니까 선악 쪽에서 악을 더 지어서 죄인 되는 게 아니고 선악체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정말 내게는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그 자체가 주님 십자가를 모독하는 죄가 된다고 깨닫는 것, 이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만 주님과 만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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