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 - 파괴자
20,02,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창조의 시작이 곧 파괴의 시작 !!
여기 교재 8페이지에 보면 머리말이 나오는데, 큰 글자로 "창세기는 심판의 책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번 시간에는 이것을 "창세기는 파괴의 책이다" 라고 바꾸어서 해보자는 겁니다. 서로 같은 의미인데, 즉 창조의 시작이 곧 파괴의 시작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두 번의 창조를 하시는데, 처음 창조를 하고 나서 그 안에 시한폭탄을 설치하시는데, 그러면 창조된 것이 시간이 째깍째깍 가면 그만 '펑' 하고 폭파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신한폭탄은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창조가 되었다고 해도 죽음이 더 우세하다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1장 10절과 11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죽음의 반대가 무엇일까요? 생명인데, 그 생명이 바로 두 번째 창조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놓여있습니까? 처음 창조입니까? 두 번째 창조입니까? 처음 창조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죽는다는 말이죠.
* 신나는 죽음, 신나는 파괴 !!
그런데 성도에게는 1번과 2번, 이 두 개가 중첩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죽는데, 그게 신나는 죽음이라는 말이죠. 혹은 신나는 파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죽는데 신이 나고, 파괴가 되는데 그야말로 신바람이 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겹쳐져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고린도후서 4장과 5장에 나오는데, 4장 18절에서 5장 10절에 걸쳐서 나온다는 겁니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여기 18절에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앞의 16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나이가 들면 이 겉 사람으로 인해서 고생을 많이 하는데, 병원에도 가야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속 사람은 어떻다는 겁니까? 신이 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병원에 가면서 신나게 가야한다는 겁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성도의 이중성 !!
여기서 '겹쳐져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배가 바다를 많이 항해를 하면 철판에 녹이 쓸게 되는데, 그러면 그 녹을 벗겨내야 철판이 보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녹이 끼었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육이 그렇다는 것인데, 물론 성도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것이죠.
성도에게는 녹밖에 없는데, 그래서 긁어내면 결국은 다 없어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중이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이중적인 육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이 원래 창조할 때 이중성을 가지고 창조했다는 증거를 성도에게만 심어주셨다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성도이고 그게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인데, 그러니 이스라엘은 충첩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그게 인간들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그것이 바로 언약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의 힘이 셉니까? 자기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힘이 셉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힘이 셉니까? 당연히 말씀의 힘이 강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유지하려는 이스라엘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이 대단하다는 말이죠.
* 아는 것은 믿음이 아니야 !!
이러한 이중성, 겉과 속, 이스라엘의 열심과 하나님의 열심, 이 두개의 선이 이렇게 나란히 간다는 겁니다. 이런 하나와 두 개의 선, 이 사이에 있는 인식을 아는 것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구약의 믿음인데, 그러니 구약의 믿음은 하나만 있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두 개가 아니라 하나만 있는 것을 '안다' 라고 하는데, 즉 "나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알아도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지금은 과거가 아니라는 겁니다. "옛날에 홍해를 건너왔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후손들은 생각하기를, 자기 선조들이 아무리 홍해를 건너오고 했어도, 지금 당장에는 이방민족들에게 시달리고 있으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이 과거에 홍해를 건너고 출애굽을 한 것을 모두 다 잊어버렸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지사라는 말이죠.
* 머리는 왜 깎는가?
예를 들어서, 동창회 모임을 하는데 중이 된 동창이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가워서 "봉식아!" 라고 하니, "저를 법명으로 불러주세요. 저는 이제 모든 것을 벗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탈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과거지사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중이라면 동창회에 나오지도 않겠지만 말이죠.
그런데 중들이 모순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진리를 아는 것과 머리를 깎는 것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중들이 머리를 깎는다는 것이 곧 권력이 되는데, 그래야 돈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머리를 밀지 않는 중들이 있는데, 그것을 원불교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원광대학교가 그쪽인데, 기존 불교계에서는 그들을 보고 이단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머리를 깎고, 그러니 앞뒤가 전혀 맞지를 않다는 말이죠.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거기에 의미를 두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소위 "공즉시색, 색즉시공" 라고 하는 그들의 교리와도 전혀 맞지 않다는 겁니다.
뭔가 폼을 잡는다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목사가 되어서 뺏지를 다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죠. 그것은 교단의 소속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물론 그런 것을 타파한다고 하면서 예배시간에 슬리퍼를 신고 오는 것도 좀 곤란하고 말이죠.
* 나의 노예로부터 타인의 노예 !!
자유와 편함은 다른데, 성경에 의하면 자유는 남의 노예가 되는 것인데, 어디서부터의 자유인고 하니, "나의 노예로부터 타인의 노예", 즉 남을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는 것이 곧 자유라는 겁니다. 그 남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 자유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종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누구나 다 노예가 되기 싫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성도는 모두가 노예인데, 주님의 노예, 즉 주님의 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믿는 자로서 산다는 것이 힘드는데, 왜냐하면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은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힘드는데, 그러니 산다는 것은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든다는 것이죠.
* 너는 반드시 죽는다 !!
오늘강의를 시작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처음 창조의 경우에, 모든 존재자들은 어디로 끌려가는고 하니,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라고 하는 시한폭탄이 장착되어서, 그것이 째깍째깍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죄인데, 그런 죄의 시한폭탄이 계속해서 있게 되면, 결국에 우리는 죽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죄가 있다는 것을 거북스럽게 여기지 말고, 그것은 팔자라는 말이죠. 주님이 우리를 죄의 종으로 삼기 위해서 고생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잘못으로 고생한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죠. 처음 창조 가운데 우리가 놓여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성경말씀을 찾아보겠는데, 시편 73편 12절입니다.
(시 73: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이것을 퀴즈로 내어도 좋은데,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 ). 다음 중 ( )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합한 것은 몇 번입니까? 1번, 몸이 아프다. 2번, 돈이 없다. 3번, 하는 일마다 실패한다. 4번, 일년 365일을 병원에 다닌다. 5번, 항상 평안하고, 재물이 많다" 라고, 그렇게 문제를 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정답은 몇 번입니까? 5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쉬움이 없는데, 절박함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가도 놀러 다닌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믿어도 믿는 것이 아닌데, 악인도 얼마든지 교회에 다니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악인이라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중복이 되지 않아서 그러한데, 그들은 평안하고 매물이 많은 것을 그냥 복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두 개의 현실이 중복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창조의 경우에는 생명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이 땅에 앞장서서 몰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비록 예수님의 몰골이 형편없어도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생명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악인은 말 먹고 잘 사는데, 아쉬움도 없고 고민거리도 없다는 겁니다. 교회도 그냥 놀러 다닌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서도 감투싸움을 하고 자기 위세를 떨고 자존감을 내세운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들이 알아주는 재미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문제가 있고 예수님 쪽이 옳다고 하는 그 차이점, 그것을 인정할 때 그것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늘 아프고 망한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 좋다고 내세우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왜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고 하니, 우리는 주님의 노예, 즉 종이라는 말이죠. 1번에서 마귀의 종이 되던지, 2번에서 주님의 종이 되던지, 둘 중에서 하나라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몇 번을 하십니까? 한 번이 아닌 두 번을 하신다는 말이죠. 처음 창조에서는 시한폭탄, 즉 죽음을 장착해놓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두 번째 창조에서는 생명이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이 땅에서 같이 등장했을 때 어떻게 됩니까?
마치 처음 창조가 영원하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죠. 반면에 예수님이 앞장서서 오심으로 몰고 오신 두 번째 창조의 경우에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1번 창조와 2번 창조, 이 두 개의 열매가 계속해서 갈 수는 없는데, 한 쪽이 무너진다는 말이죠. 그게 어느 쪽인고 하니, 사람들이 의지한 첫 번째는 시한폭탄이 장착되어있는데, 이것은 곧 죽음이고, 그래서 총체적으로 멸망에 이른다는 겁니다.
옛날 우리가 어릴 때는 아파트가 없었는데, 가난한 사람은 초가집이나 지붕이 함석으로 된 집에 살고, 물론 좀 사는 사람은 기와집에 살았지만 말이죠. 그런데 청소를 하면 어떻습니까? 물론 거의 5년에 한 번씩 하는 청소인데, 방바닥을 깔고 있던 거죽때기를 들어보면 그 안에 벌레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처음 창조의 거죽때기를 들어서 보면,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다는 겁니까? 그 안에는 악마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이 악마는 두 번째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데, 악마는 처음 창조만, 그 구닥다리만 계속해서 인정을 하고 고집을 피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악마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머리 속에는 두 번째 창조가 없는데, 예수님이 두 번째 창조를 몰고 와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이 없다는 말이죠. '믿습니다' 라고 하는 신념은 강한데, 정작 믿음은 없다는 겁니다.
중복이 되어야 믿음인데,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 유지하려고 하니 믿음이 없다는 말이죠. 이렇게 하나를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울고불고 한다는 겁니다. 희노애락, 그 모든 인생의 정열을 오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만 몰아넣고, 그런 다음에 그것으로 자기가 인생에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그것을 따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인생은 게임이 되고 마는데, 믿음이 아니고 말이죠. 누구의 종이라는 것이 아니고, 게임이라는 것이죠. 게임을 할 때는 자기가 누구의 종이나 아바타가 아니고 주인공인데, 그렇게 주인공이 될 때 게임에서 승리하고 실패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는 겁니다.
* 봉준호와 샤론 최 !!
'샤론 최' 라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때 봉준호 감독의 통역을 맡은 여자인데, 그러면 그 여자 분이 상을 받았습니까? 봉준호 감독이 받았습니까? 봉준호 감독인데, 그러니 그 시상식에서 샤론 최는 봉준호 감독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아무리 통역을 잘해도, 자기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인생을 산다고 해도 우리가 결코 주인공이 아닌데,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따라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자기 선에서 결정지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보여주면 주님의 종이고,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면 그것은 마귀의 종이라는 것이죠.
성도 안에서는 그리스도가 나와야 하는데, 처음이 아닌 두 번째에서 말이죠. 처음에서는 고생을 하든 말든 간에 두 번째 네용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국, 즉 "예수님의 나라만이 영원하다. 처음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이죠.
* 다니엘의 세 친구 !!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보여주는 인물들이 성경에 많이 있는데, 대부분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가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는 말이죠. 다니엘의 세 친구는 첫 번째인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겁니다. 죽을 때 귀향을 가서 사약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 속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왜 느부갓네살 왕이 불 속에 넣는고 하니,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경계선이 바로 죽음이란 겁니다. 그것도 불에 태워서 죽인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우냐는 말이죠. 그것도 온도를 7배나 더해서 죽여버리는데, 즉 "누구든지 느부갓네살 왕의 명을 어기는 것이 이 제국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세 친구는 중복이 되어있으니, "그래, 죽여라" 라고 나왔다는 말이죠.
그리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에서 내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생명의 면류관이다" 라고 했는데, 이게 모두 동일한 고백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죽기 이전에 이미 삼층천에 올라가 보았는데, 고린도후서 12장에 그게 나온다는 말이죠.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이미 하늘나라에 갔다왔는데, 그러니 군대에 제대하고 나서 다시 군대에 놀러간 것과 같다는 겁니다. 물론 제대한 군대에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은 다들 없지 싶은데, 너무 지긋지긋해서 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면 부하를 너무 때린 경우인데, 왠지 찜찜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저의 부대 상급자 중에서, 소대장에게 당한 것이 너무나 억울해서 제대를 하고 나서 찾아간 경우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잊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 일은 모두가 과거지사라는 겁니다. 그런 것을 일일이 다 기억하면 사는 것이 힘든다는 말이죠.
* 아하, 망하는구나 !!
아무튼 사도바울과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을 아는고 하니,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계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즉 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처음 창조에 죽음의 요소를 집어넣었다는 것인데, 그게 무슨 나무인고 하니,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의 나무인데, 그 나무는 따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나무라는 겁니다.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죠.
* 아하, 하나님은 계획이 있었구나 !!
그러니 에덴동산을 만들 때부터 하나님은 이미 계획이 다 있었는데, 요즘 "너는 계획이 있구나" 라는 것이 유행어인데(ㅋㅋ), 기생충의 대사에 그게 나온다는 겁니다. 아무튼 두 그루의 나무가 변두리가 아닌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었는데, 중앙에 인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 중심이 아닌데, 인간은 오히려 변두리에 있다는 것이죠.
나무가 중앙을 차지하지 인간이 중앙을 차지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처음 세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도 중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인데, 그런데 그런 인간 중심의 본능을 그 후손들인 우리가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아무리 해도, 돌아서면 자기 중심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무슨 일만 생기면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까? 혹시 손해가 되면 어떻게 될까?"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성공해야 한다는 겁니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누구의 종이 될 마음은 전혀 없는데, 언제나 자기가 최종적인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죠.
자기가 아무리 30년 동안 복음을 전했다고 해도, 딱 보면 그것이 다 보인다는 겁니다. 아는 것은 많고 들은 것은 많은데, 그런데 막상 건드려보면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가 항상 주인공이란 말이죠. 자기가 누구의 종이라고 하는 의식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종은 자기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데, 책임을 지라고 추궁하는 것은 악마라는 말이죠. 악마는 벌써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아놓고 뭐라고 합니까?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야. 남이 잘 되면 화나지? 네가 잘 되어야 한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해" 라고, 그렇게 매일같이 우리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인다는 말이죠.
그래서 "너는 손해를 보면 안 된다. 이익을 봐야지. 왜냐하면 너는 소중하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두 번째 창조, 그 두 번째의 나라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인간에게 자기를 미워하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건너올 수는 없다는 말이죠. 즉 '무능력' 이라는 겁니다.
* 무능력과 창조 !!
우리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그러한 무능력과 하나님의 창조하심, 그게 의미가 통한다는 말이죠.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데, 만약에 우리가 능력이 있다고 하면, 누가 창조자입니까? 인간이 창조자가 되는데, 그러면 경쟁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따로 자기가 창조자 노릇을 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악마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악마는 인간이 능력자가 되기를 한다는 말이죠. 정말로 이 세상에 악마가 없습니까? 있다는 겁니다. 다들 악마의 아바타인데, 어떻게 악마가 없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능력자, 그것을 요즘은 '덕후' 라고 하는데, 남들보다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교회에 재벌이 등록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교인들은 입이 째지는데, 왜냐하면 덕후, 즉 든든한 자가 왔다는 겁니다. 교회에 의사가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등록을 하면 목사는 좋아서 잠이 오지 않는데, 물론 십일조를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믿음이 아닌데, 든든한 자, 그것은 악마의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신념이라는 말이죠. 물론 비슷한 말로 들리지 모르겠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뭔가 든든한 기둥과 같은 것에 의지함으로서, 즉 무능력자가 능력자에 의지함으로서 자기가 스스로 주인공 노릇을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악마가 심어준 것으로, 즉 1번 창조만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2번 창조는 무엇인고 하니, 아무리 교회가 부흥하고 해도 그것은 믿을 것이 되지 못하고, 믿을 것은 주님께서 지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인도하시고 창조하시는, 바로 그 지금의 창조력에 의지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능력자는 누구를 믿는고 하니, 자기 스스로 주인공이 되겠다는 것이고, 반면에 무능력자는 누구의 종이 되는데, 즉 창조자의 종이 된다는 말이죠.
* 창조자=파괴자 !!
이것을 정리해보면 "창조자=파괴자"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창조자인 주님의 종이 된다고 하면, 자기가 파괴당함을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주님께서 후패하는 겉 사람을 파괴시켜주니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의 암 부위를 도려내고 치료해주는 의사에게 멱살을 잡고 달려들면 안 되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의사인데, 예수님은 우리를 환자로, 즉 병든 자로 보신다는 말이죠. 저도 그런 글을 썼지만, 그것이 우리 인간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리지 몰라도, 주님은 우리를 병든 자로 보신다는 겁니다. 이번 시간에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지금 차근차근히 밟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환자가 될 때 주님이 의사가 되는데, 자기가 멀쩡하다고 하면 의사가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환자는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닌데, 의사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환자라는 말이죠. 즉 의사를 의사답게 만드는 것이 환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면 할 수록 주님의 의사됨의 가치는 점점 더 상승이 된다는 말이죠. 더욱 더 크게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 창조주의 안목으로 !!
여기까지 안다고 치고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면, "창조=파괴" 라고 했는데, 그러면 1번 창조의 세계, 즉 눈에 보이는 창조의 세계에서 이것을 일괄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 관점, 혹은 안목을 누가 가지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창조를 전체적으로 다 하시고 나서 "미처 내가 바퀴벌레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가졌구나" 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스스로 창조하신 분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들에 대해서 관리를 소홀하게 하실 수 있느냐는 말이죠. 전혀 그럴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합니까? 전혀 자기 주변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그런 좁디좁은 안목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게 키워보자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다 아우르는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예술, 음악, 영화, 건축, 정치, 외교, 스포츠, 교육, 가정생활, 그 모든 분야에 있어서 창조주가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저것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내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농부의 마음, 어부의 마음, 그런 사람들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자기 분야가 아니라고 하면서 모른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 모든 것은 파괴의 과정 !!
그러면 그 창조주의 관점이 어떤 관점일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하면 500원인데(ㅋㅋ), 아까 했다는 겁니다. 창조자는 파과자라고 했는데, 자기가 고기를 잡든, 바둑을 두든, 축구를 하든, 그 모든 것은 파괴가 된다는 말이죠.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모든 인간은 그 과정이 파괴의 과정에 속한다는 겁니다.
"이번 아버님 생신에는 제가 크루즈 여행을 시켜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 크루즈 선을 탈 때는 그 배가 파괴가 된다고 여기고 타라는 말이죠. 그런 마음으로 효도를 받으면 되는데,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요코하마에 한 달을 정박하면서 난리가 난 크루즈 선이 있는데, 적어도 그런 각오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파과자의 영역에 있다는 말이죠.
* 목사가 되어서 망해야지 !!
예를 들어서, 자기 아들을 목사를 시키겠다고 하면, 그렇게 목사를 하는 것이 망하는 코스 중의 하나임을 먼저 인정하라는 겁니다. 아들을 검사나 판사를 시켜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코스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어야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는데, 부러워하면 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출세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마귀적인 안목인지 알아야 하는데, 갇힌 방에서 파리가 날아봐야 여전히 그 방 안이란 말이죠. 물론 빨라서 파리채로도 잡기가 싶지 않은데, 그래도 여전히 갇혀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파리가 말을 한다면, "나를 잡아봐라. 나는 승리자야" 라고 하면서 피한다는 말이죠.
자기 딴에는 잡히지 않겠다고 그렇게 요령을 피우면서 까불고 돌아다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1번 창조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것인데, 여전히 사망과 파괴 속에 갇혀있으면서 성공했다고 하면서 설치고 있다는 말이죠.
특히 재벌 3세의 경우에,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나 개판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20살만 되면 운전면허증을 따서 페라리를 타고 인천대교에서 광란의 질주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술과 담배와 여자로는 모자라서 마약까지도 하는데, 그렇게 온갖 쾌락을 다 추구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가지고 인생을 즐긴다 하는데, 즉 승리한 인생이라는 말이죠.
* 철이 없다 !!
사람들이 흔히 "철이 없다" 라고 하는데, 그냥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근거를 대라는 겁니다. 그 행위자체가 자기가 죽어가면서 하는 행위라는 것을, 그것을 철이 없어서 알지 못한다는 말이죠. 재벌3세가 아닌 여러분의 아들도 마찬가지인데, 자식에게 아무리 복음을 들으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돈 벌기에 바쁜데,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들이 아는 복음은 교회에 나가서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인데,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님께서 그 모든 발걸음을 다 세신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들은 악마의 종이 되어서, 지금 지옥에 가는 삶을 살아가는데, 즉 지옥에서 사는 것을 미리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 자체가 지옥인데, 멸망을 당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가 건전하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 나는 멀쩡하다, 'MY WAY' !!
복음을 모르는 인간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멀쩡하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친구들에게 복을 전하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환자인데 멀쩡하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고 하니, 그게 '마이 웨이' 라는 겁니다.
어제 설교시간에 왜 그 노래를 가사를 다 소개했는고 하니, 그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말이죠. "나는 이제 후회가 없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지옥만 남아있다는 겁니다. 아까 악인은 편안하고 재물도 더한다고 했는데, 즉 절박함이 없다는 것이죠. 물론 절박함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죠.
그러니 평생을 악마의 종으로 살았는데, 악마가 뭐라고 합니까? "너는 나랑 같이 지옥에 가자" 라고 아주 정답게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지옥에 갈 인간으로서, 그 삶의 방식을 이 땅에서 실습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나도 교회를 안다.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자는 것이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마치 자기가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주님의 종이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인데, 자기가 예수를 믿어주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누구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자기 것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여러분은 어떻게 신바람이 나지 않습니까?
* 구원은 주님의 일일까? 나의 일일까?
여기 교재 8페이지에 보면, "구원은 주님의 일일까? 나의 일일까?" 라고 묻고 있는데,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바꾸어서 묻겠는데, 구원은 누구의 일이 아닙니까? 자기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겠다" 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문장이라는 겁니다. 구원은 남의 일인데,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아담에 속했는데, 즉 마귀의 종으로 태어났다는 말이죠.
제가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여기에 검푸른 바다고 또 여기에는 육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육지에 조선소를 세웠다는 말이죠. 그래서 유조선을 멋지게 만들어서 진수식을 한다는 겁니다. 그대로 풀이하면 물 속에 진입한다는 것인데, 인생으로 보면 이게 바로 출생이라는 말이죠.
* 검푸른 바다 !!
그렇게 해서 검푸른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데, 김민기가 불렀던 노래에 그런 가사가 나오는데, 그러니 바다 자체를, 이 세상 자체를 검다고 본다는 겁니다. 저주의 바다라는 말이죠. 그런 바다 위에 배를 띄우면 열심히 노를 젓는데,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여자들은 시집도 가고 말이죠. 옛날에는 시집을 간다는 것이 곧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었다는 것이죠.
물론 여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데, 하지만 그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저주의 바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거기에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무지개가 뜬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언약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무지개 언약, 즉 노아언약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무지개 언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겪었던 이 세상에 네가 태어났다. 따라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즉 파괴의 대상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무지개 언약 !!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방주를 통해서 노아를 살려주셨는데, 그것이 곧 무지개이고, 그러니 그 은총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 무지개가 나중에 구체적인 인물로 변하게 되는데, 그가 곧 아브라함이고, 그 다음이 이삭이고, 야곱이고, 그렇게 되면서 이 야곱의 아들들이 집단이 되는데, 그것이 국가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죠.
그 이스라엘 다음에는 새 이스라엘인데, 예수님의 12제자로부터 시작되는 새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남은 자이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교회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이 되는데, 즉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 나보다 복음이 우선이다 !!
지금까지의 강의를 들어보면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음을 알 수 있는데, 즉 "나보다 복음이 우선이다" 라는 것인데, 복음이, 진리가 자기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복음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다만 우리가 이전에는 죄의 종, 즉 악마의 이었다가 이제는 예수님의 종이 된다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언약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러면 아침에 일어난 것도 그냥 일어난 게 아니라,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무사히 일어났다는 겁니다. 제가 2월초에 아침에 일어나면 어지러운 날이 종종 있었는데,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그러면서 아침에 어지럽지 않은 것이 하나님은 은혜임을 더 깊이 느끼게 되었다는 겁니다.
* 관절이 쑤셔요 !!
그리고 이가 아픈 것도, 물론 원인을 조사해보면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왜 양치질을 빨리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세분화를 시키게 되면, 거기에는 과학이 손을 댈 수 없는,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상황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만 아는데, "과거, 현재, 미래" 라는 틀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말이죠. 예를 들어서, TV조차도 없는 강원도 할머니의 경우에, 감자를 캐는데 그만 관절이 아프다는 겁니다. 과거에 들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래서 몸이 아프면 신령님이 이제 죽으라고 아프게 해서 아픈 줄로 안다는 말이죠. 그러니 몸이 아픈 이유는 그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의대교수를 하다가 강원도 휴가를 갔다가 그만 감자를 캐는데 몸이 아프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아픈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가지인가요? 그게 아닌데, 자기는 몸이 아픈 이유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관절이 아픈 이유가 276가지라고 한다면, 그러면 277가지는 왜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 실력이 거기까지라는 겁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한 가지, 의대교수는 276가지인데,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둘 다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파괴되는 당연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안다는 것으로 극구 방어를 해보지만, 그 방어책이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죠. 인간은 온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 우리 며느리는 복음을 싫어한다 !!
예를 들어서, "우리 며느리는 복음을 싫어한다" 라고 하면, 그 원인은 서너 가지가 넘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그렇지가 않은데, 아직까지 주님께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조치를 하셨는데, 그게 유일한 이유라는 겁니다. 그래야 주의 종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내가 알아서 조치를 취하겠다"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차원에서 "그래, 내가 대신해서 손자를 봐두면 믿겠나?" 라고 하지는 말라는 것이죠. 시어머니가 고생하면서 자기 자식을 봐준다고 해서 감동을 받아서 믿는다고 하면, 그러나 그런 믿음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창조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다 일일이 챙기시는데, 아주 사소한 것도 빼놓고 일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3년은 족히 했지 싶은데, 거기서 원인을 찾아보니, 원인은 찾지 못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구원을 받는 이유가 자기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신념, 하나님의 기뻐하심,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해주기로 해서 사랑을 받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미움을 받기로 해서 미움을 받았는데,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사항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자꾸만 내가 했다고 내가 생각하는가?
여기서 문장을 하나 적어보겠는데,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자꾸만 내가 했다고 내가 생각하는가?" 라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죠. "내가 왜 그 일을 했을까? 내가 왜 그 자리에 있을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모르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종이 된 자에게는 어떻다는 겁니까? 창조하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은 그 이유를 빼먹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아하, 그것을 미처 몰랐네" 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자꾸만 내가 했다고 내가 생각하는가?" 라고 하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나옵니까? 걱정과 근심이 쏟아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감사와 고마움은 날아가 버리는데, 대신해서 걱정과 근심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앞으로 어떤 완벽한 조치가 나를 살릴 것인가?" 라고 하는, 그것만 남는다는 말이죠. "남들에게 욕을 듣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데, 그게 무엇이 중요하냐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이면 욕을 듣도 말고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만, 주님의 종이라면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은 이 땅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사람으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 대우를 받았다는 겁니다. 즉시 처리해야하는 대상이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만큼 대우를 받아도 괜찮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더욱 더 심한 모욕을 당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을 가지고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인데,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여러 곳에 나온다는 겁니다. 제자가 주인만큼만 되어도 괜찮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죠.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과연 어느 영역에서 살아있는가?
계속해서 교재를 보면 "성도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라고 되어있는데, 좀 어려운데 말이죠. 이것은 달리 말하면 "과연 어느 영역에서 살아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먼저 영역을 동그라미로 그리지 않은 상태에서 바라보면, 거기에서 "나는 살아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그만 동그라미를 치면 어떻게 됩니까? "당신은 어느 동그라미에서 살아있습니까?" 라고 해서, 이 세상의 영역에서 살아있다고 하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 정녕 죽으리라 !!
이 세상의 동그라미에서 살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주를 받은 상황인데, 즉 죽음이라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영역 속에 들어있다고 하면, 그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법칙에 의해서 죽어있는 것이란 말이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나는 살아있다" 라는 것이 선악과의 영역이 아니라, 두 번째 창조의 경우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안에는 생명나무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으면 "나는 죽어도 살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예수 안에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말은 참 쉬운데, 논리적으로는 전혀 어렵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원리를 가르치는 방법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실제로 주님께서 우리를 건드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주여,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만 건드리면 "주여, 왜 저를 죽이시려고 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알기는 아는데 주님이 건드리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음의 공포가 다가온다는 것은, 자기가 죽어있다는 인식보다는 "나는 살아있다" 라는 인식이 더욱 강렬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법칙의 우리의 육이 서로 충돌이 일어나는데, 맞지를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자기 안에 남의 자식을 키운다고 생각하시는데, 주님의 나라에 마귀의 종을 키우고 계신다는 겁니다.
*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몸은 율법의 종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 탄식하신다는 겁니다. 즉 "너희는 기도할 줄도 몰라서 응답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나 성령이 너희를 위해서 기도해서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분이 탄식 가운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신다는 것이죠.
그 기도의 응답이 바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 그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이미 영화롭게 하신 것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뜯어내는, 그런 쑤시기를 주님은 계속 하신다는 겁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강의를 하다가 보니 오늘 제목을 그만 잊어버렸는데 말이죠. 아무튼 여기 교재에 "성도는 살아있다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세계에서 살아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성도에게만 그렇다는 겁니다. 불신자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퀴즈를 내겠는데,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1번, 돈을 대준다. 2번, 건강을 준다. 3번, 교회를 부흥하게 해준다. 4번, 네 자신이 답인 것을 확인해준다" 라고 한다면, 몇 번입니까? 4번이라는 말이죠. 주님을 우리가 주님 자신의 작품인 것을 확인하는, 그런 차원에서 흔들기에 나선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흔들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고요하게 무탈하게 살고 싶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자주 흔드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평안하고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해당이 된다는 겁니까? 아까 살펴보았는데, 시편 73편 12절에 보면 "이들은 악인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런 성경구절을 액자로 만들어서 집에 걸어놔야 한다는 겁니다.
(시 73: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결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걱정할 이유가 없는데, 우리는 종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흔들기를 하시는데, 마치 흘러가는 시냇물에 상추를 흔들 듯이 말이죠.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흔들어서, 그런 것들이 떨어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날마다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신다는 말이죠.
* 존재와 사건 !!
그 다음으로 교재 11페이지를 보면, '1강, 존재와 사건' 이라고 나오는데, 이 책을 구입하신 제법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평가가 어떠한고 하니, 책이 너무 어렵다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여기에 철학적인 용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인데, 그게 1강 제목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존재와 사건' 이라고 하는 것이 왜 어려운고 하니, "하나님은 창조를 한 번만 했다" 라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한 번만 창조하셨다고 하면,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의 중앙에 심어놓을 필요가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창조를 스스로 파괴하는 법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고 보니 중요한 성경구절을 하나 빠트렸는데, 히브리서 1장 10절과 11절입니다.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여기에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라고 하는데, 이것이 구약성경인 시편 102편 25절과 26절에도 이미 나온다는 겁니다.
*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
(시 102: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룰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시 102: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그러면 시편 102편에는 나오는데 창세기 1장에서는 왜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고 하니, 성경이 신약으로 가면 갈수록 그 내막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시작은 창세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시작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이죠.
이렇게 변두리가 있다고 하면, 그 중앙은 나타나지 않는데, 비어있다는 겁니다. 그 비어있는 중앙을 향해서 마치 주름치마처럼 거두어지는데, 여기에 변두리에 걸치고 있는 모든 주름이 말이죠. 그러면 종말이 곧 시작점이 되는데, 그라고 시작이 곧 마지막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제 낮 설교였는데, 그러니 처음이 시작이 아니고 처음이 시작점을 향해서 간다는 겁니다. 처음보다 오히려 더 시작점이 있는데, 그곳을 향해서 간다는 말이죠.
*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어요?
요즘은 교회에 다니는 유치원생들도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어요?" 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면, 도대체 그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느냐는 겁니다. 그 질문을 약간만 각색을 하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습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이죠.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을 말이죠.
그러니 주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데, 그러한 주님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은 주님과 주님끼리 서로 주고받고 하기 때문에, 그 주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제한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인간세계 속에 '하나님' 이라는 인식을 남겨놓았다는 것이죠. 이게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이죠.
일부러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처음이 처음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시간이 단선적으로 흘러간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중복된 시간에 의하면 예수님이 처음인데, 그래서 선악과의 죽음의 완성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죽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모든 죽음의 최종의미라는 말이죠.
* 그 모든 의미는 주님을 위해서 !!
이 세상의 모든 의미가 있는 것은 최종의미에 의해서 퍼져나가게 되어있는데,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모든 것을 주를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저렇게 차가 다니는 의미, 꽃이 피는 의미,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번지는 의미, 그 모든 의미는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을 위해서 모든 의미가 퍼져나가게 되는데,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왜 있는고 하니, 멸망을 당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히브리서 1장 10절과 11절에 나온다는 것이죠.
"태초에 주님이 계시는데, 이 세상을 멸망을 당하지만 주님은 영존할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필수적인 절차와 과정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 만들어진 것은 다 멸망을 당함으로서 주님의 주되심이 티가 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비로소 그 절차가 완성이 된다는 말이죠.
* 다시, '존재와 사건' !!
일단 이렇게 해놓고 교재 11페이지의 '존재와 사건'을 보겠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철학적 용어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존재, 즉 '있음' 이란 것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건' 이란 것은 현재 있는 것에서 볼록볼록 올라오는 것인데, 마치 온천에서 물방울이 올라오듯이 말이죠. 그렇게 단편적이고 우발적으로 올라오는 것을 사람들은 사건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존재와 사건' 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그냥 '이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 이라고 하면, 그것은 무슨 뜻인지 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과 존재와 사건에서의 사건이 서로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 사건은 존재의 바탕 위해서, 즉 존재에 포함된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사건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볼록볼록 올라오는 것이 곧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존재가 존재답게 포함된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 모든 사건을 박살내버리는 사건, 곧 '십자가 사건' !!
하지만 여기 교재에서처럼 '존재와 사건' 이라고 하면, '와'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니 서로 따로 본다는 겁니다. 왜 제목을 이렇게 붙였는고 하니, '십자가 사건' 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를, 즉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박살내버리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다르다는 겁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나는 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났다. 왜? 나는 배가 아프다" 라고 한다면, 그 사건은 '존재와 사건'에서의 사건이 아니고, '나' 라고 하는 인간이 있는데, 거기서 발생된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얼마든지 아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어.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어" 라고 한다면, '나'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나'를 박살내려고 바깥에서 따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복음인데, 복음은 '나' 잘되라고, '나'를 천국에 보내주려고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죠.
* 파괴자 !!
그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잘 되겠다고 하는, 즉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작태, 그것을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완전히 박살을 내버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파괴자이기 때문에 말이죠. 드디어 오늘 강의제목이 떠올랐는데, '파괴자'로 하자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중첩이 되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이 말이 역겹다는 말이죠. 우리 이 모음에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그들이 왜 복음을 거부합니까? 무엇이 탄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 라는 존재, 이것을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즉 "나를 건드리지 말고, 천국에 보내만 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그냥 부활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때려치우고 부활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즉 "이제 당신은 예수를 믿으면 부활이 됩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에게는 그게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덩치가, 이 몸이 있으나마나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정말로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이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 평생을 그야말로 힘들게, 그리고 비굴하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그런 것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일생을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손을 놔라. 너는 환자야. 네가 왜 너를 치료하려고 하지?"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사건인데, 오순절 사건이 터졌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와 거래하지 않는데, 우리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직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를 보고 구원해주시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게 '사건'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존재 안에 사건을 집어넣으면 안 되고, 따로 떼어내야 한다는 말이죠. 존재는 존재대로 있고, 그것은 멸망을 당해야 하고, 사건은 사건대로, 즉 존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건으로 터져 버릴 때, 그래서 그 둘을 대비시킬 때, 그것이 바로 창세기라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의 시작인데, 그래서 창세기는 성경전체의 흐름이라는 말이죠.
* 나는 뭐꼬?
이제 마지막으로 "나는 뭐꼬?" 라는 것에 대해서 하겠는데, 자기 가치는 바로 '흐름' 이라는 겁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흐름이라는 말이죠. 흐름이 어려우면 바람이라고 해도 되는데, 옛날 사람들은 공기의 흐름을 몰라서 바람을 두고 실체가 없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실체는 없는데, 다만 그냥 뭔가가 분다는 말이죠.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는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인생무상' 이라는 것인데, 상당히 불교적이라는 겁니다. 인생은 그야말로 바람인데, 한 번 태어나서 죽으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즉 '마이웨이' 라는 겁니다.
* 그대 이름은 '바람' !!
하지만 복음적으로 보면, 이 흐름은 누가 '훅' 하고 불어넣은 흐름인데,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바람을, 하나님의 신을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한 일을 하나님께서 마감하실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대 이름은 주님의 이름을 보여주는 바람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니 우리의 실체는 주님의 능력, 주님의 손길, 주님의 열심, 그것을 보여주는 흐름이라는 말이죠. 그게 성도의 모습인데, 그러니 자기 나름대로의 실체를 고집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다만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 개의 세계가 겹쳐져 있다는 것을 그동안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우리의 겉 사람이 왜 후패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2,22 오후 6시에 마침.
십자가 복음인가? 코로나 바이러스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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