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 - 주님을 위한 창조
20,02,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내가 없는 창세기, 내가 있고 난 뒤의 창세기 !!
오늘부터는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라는 책을 교재로 해서 하겠는데, 이 창세기는 알다시피 성경에서 제일 먼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는 사람이 등장하지를 않는데, 그렇지요? 물론 끝에 보면 나오지만 말이죠. 그래서 '내가 없는 창세기', 그리고 '내가 있고 난 뒤의 창세기'로 구분해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먼저 '나' 라는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음을 알아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냐는 말이죠. 자기가 없을 때 분명히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어있었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누구 때문에 있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아직까지 있지를 않는데, 그런데 분명히 해가 있고 달이 있고 별이 창조되어서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해와 달과 별은 누구와 관련이 있는고 하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해, 하나님과 달, 하나님과 별,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아직까지 인간은 없는데, 그러니 인간은 해와 달과 별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그런 피조세계에 인간이 끼어든 식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인간은 하나님과 해, 하나님과 달, 하나님과 별, 그러한 모든 관계를 자기 인간에게로 끌어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해와 달과 별을 그냥 자기와 관계된 것으로 여기고 바라본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칙이라는 말이죠.
* 반드시 하나님을 경유한, 해와 달과 별 !!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반드시 하나님을 경유해서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마치 '나' 라는 것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말이죠. 이것이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자기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를 가는데 비가 왔다고 하면, 그러면 짜증이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사를 가는데 왜 비가 오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마치 우리가 어릴 때 "오늘 소풍을 가는데 왜 비가 오지?" 라고 했던 식이란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만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이 돌아서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짜증이 난다는 것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가 직접 세상에 돌아가는 것을 관여하게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반드시 하나님을 경유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신약에 나오는 내용으로 설명을 해보자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2장을 보겠는데, 12절에서 4절입니다.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사랑에서 나온 것이 교회다 !!
여기에 보면 일곱 교회가 시작되는데, 먼저 에베소 교회가 나오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에베소 교회를 보고 주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디에서 생겼는고 하니, 그것을 상투적으로 "없는데서 생겼다" 라고 하지말고, 그러면 뭐라고 하면 될까요?
"사랑에서 나온 것이 교회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즉 교회가 있기 이전에 사랑이 먼저 있었고, 그 사랑의 구현체가 교회라는 말이죠. 즉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이 땅에 드러내었는데, 그 결과가 바로 교회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이 말과 정반대의 말을 살펴보게 되면 그 함유된 의미를 더욱 제대로 알 수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드러내었다" 라는 것과 정 반대말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했다" 라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만 들어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 하나님은 나를 사랑했다 !!
제가 분명히 방금 '나' 라는 것을 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은 나를 사랑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이단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킹제임스, 네비게이토, 신천지 등등, 그 모든 모임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했다" 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이죠. 개혁주의나 천주교도 마찬가지인데, 요즘 천주교는 불교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슬람교나 힌두교도 그러한데, 모든 종교는 "신은 나를 사랑한다" 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창세기 1장에 의하면 반칙인데, 인간이 있고 난 다음에 해와 달과 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결부를 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 끼어든 용 !!
그러면 이 반칙이 어디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을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이 세상을 자기 의미화를 시키겠다고 시도한 반칙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악한 영, 뱀, 악마, 용, 바로 그것이 끼어들었다는 말이죠.
이 용의 개념은 상당히 재미가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악마를 용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런 용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전체', '전부(ALL)',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용은 우리가 알다시피 신화적 동물인데, 즉 '최고 중의 최고'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관재(觀在), 즉 모든 것을 다 바라본다는 말이죠.
* 관자제보살(觀自在菩薩) !!
'관자제보살(觀自在菩薩)' 이라고, 아미타불의 왼편에서 교화를 돕는 보살이라는 겁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이게 없었는데,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보통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관자제보살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용의 개념인데, 즉 전체개념이라는 겁니다.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는데, 이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죄의 왕노릇'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인간은 짐승들과 동기생 !!
용보다도 더욱 더 힘이 센 동물이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6일째 인간과 같이 태어난 동기생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짐승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6일째 같이 만들어진 짐승의 부류에 속해있기 때문에, 인간은 짐승에 가깝다는 겁니다. 해와 달과 별과는 멀다는 것이죠.
그런 가까운 짐승, 즉 동물들 중에서 가장 간교한 짐승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뱀이라는 겁니다. 6일째 만든 동물이 그만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말이죠. 그 짐승이 곧 뱀이고 용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홍수를 통해서 이런 것들을 완전히 쓸어버렸는데, 육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는 겁니다.
* 숨겨져 있는 바다의 짐승들 !!
여기서 6일째 만든 동물들의 특징은 바다가 아니고 육지에서 나왔다는 것인데, 즉 땅의 짐승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바다의 짐승들이란 겁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특징은 숨겨져 있다는 것인데, 아무리 땅의 인간들이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영역에 숨어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바다의 짐승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땅을 다루었던 인간들이 도저히 다룰 수 없는 것이 바다의 짐승인데, 그런 짐승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기어올라온다고 하면, 마치 도마뱀이 슬렁슬렁 걷듯이 올라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낯설기가 그야말로 짝이 없다는 겁니다. 바다의 짐승은 그렇게 숨겨져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악한 영, 즉 악마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지명수배를 내려서 붙잡으려고 해도 어떻다는 겁니까? 땅에 속한 인간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대상으로서 이 땅을 접수하고 장악했다는 겁니다.
* 욕망을 부추기는 악마 !!
그러면 바다의 짐승들이 이 땅을 장악하고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이 땅의 인간들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인간을 계속해서 부추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욕망' 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서,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오히려 욕망에 휘둘리는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인간을 유혹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런 뱀의 속성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란 말이죠. 그게 오늘날 우리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욕망의 특징은 달성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인데, 달성이 되었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욕망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악마에 속한 인간답다는 겁니다.
*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 !!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자기가 알 수 없는 여분의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욕망' 이란 말이죠. 야고보서에서는 이것을 욕심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욕망을 다루는 게 아니고 욕망이 인간을 다룬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 욕망으로 인해서 세상을 사는 즐거움과 보람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것을 '희망' 이라고 하는데, 기대, 목표 등등,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희망이 없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는데, 계획이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이죠. 기업이나 가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모두들 희망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은 밥이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꿈이 없이는 안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포대교에서 투신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데, 자기 희망이 좌절되어서 강에 몸을 내던진다는 말이죠. 밥은 공짜로 먹을 수가 있는데, 그런 봉사단체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노가다판에 가서 하루만 일해도 3일은 견딘다는 말이죠.
그런데 꿈이 좌절되면 어떻게 합니까? 죽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욕망은 그때그때마다 자아를 재규정을 해준다는 말이죠. 이게 오늘 강의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즉 욕망이 자아를 항상 새롭게 업그레이드를 해준다는 겁니다.
* 욕망이 자아를 항상 업그레이드를 !!
예를 들어서, 지하층에서 살다가 빌라로 이사를 가게 되면 처음에는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하지만 그것이 얼마 가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곧 30평짜리 아파트를 소망하게 되는데, 그런 곳으로 이사를 가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만 같다는 겁니다.
하지만 30평짜지로 이사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난방이 아무리 잘 되고 경치가 좋고 해도 10년 이상을 살게 되면 지겹다는 겁니다. 그렇게 욕망이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는데, 이게 역주행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역주행이 되면 그만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만큼 욕망에 길들여졌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꿈과 희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나이 80이 넘어서 그만 아내를 잃으면 슬프기가 짝이 없는데, 그래서 곧 따라갈 것 같이 하지만, 두 달이 지나면 다방에 앉아서 립스틱을 짖게 바른 박 마담과 함께 쌍화차를 마시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함부로 죽을 수도 없다는 말이죠(ㅋㅋ).
왜 그렇게 됩니까?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아내가 욕망인데, 그런데 그 꿈이 좌절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에는 새로운 욕망이 채워진다는 겁니다. 욕망은 어떻게 해서든지 있어주어야지, 없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죠. 인간은 밥이 아니라 욕망으로 산다는 겁니다.
* 밥, 인기, 욕망 !!
그래서 악마의 첫 번째 시험이 밥 먹고 사는 것이고, 두 번째가 남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인데, 그리고 세 번째가 눈에 보이는 모든 좋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욕망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이런 욕망 더불어 있기 때문에 악마는 존재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데, 그렇게 우리는 악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악마가 좋다는 것이죠.
그러면 다음 중에서 어느 힘이 좋은지 보세요. 1번은 세상을 다 가지는 힘이고, 2번은 이 세상에 패배한 힘인데, 이 중에서 이 힘이 더 좋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어느 욕망이 길들여져 있었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1번인데, 점점 자아가 하늘까지 높아진다는 말이죠. 그게 바벨탑을 쌓은 정신이라는 겁니다.
* 이 세상에서 패배한 힘 !!
하지만 이 세상에서 패배한 힘, 물론 이것을 힘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이상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이 힘이 바로 누구의 힘인고 하니, 하나님의 힘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힘이라는 것이죠. 즉 패배해도 좋다고 하는 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한다면, 여기서 갈증이 생기고 결핍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더더더 가지고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패배해도 좋다는 힘은,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 탈출한 힘이기 때문에, 즉 악마의 세력에서 벗어난 힘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주시는 힘은 바로 두 번째 힘인데, 이 세상에서 패배한 힘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혼자 계시지 않았는데, 성령과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데리고 어디로 갔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패배를 너끈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셨는데, 예수님도 그 잔을 마시기 싫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은 그 잔을 마셨다는 것이죠.
(눅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우리도 기회가 되면 같이 예루살렘에 가서 그 현장을 보면 참 좋은데, 그 다락방부터 시작해서 살펴보면 괜찮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드는데, 잘 보존해주어서 말이죠. 왜냐하면 요즘은 분위기가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다 개발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교회가 미리 등기를 다 해놓아서 막았다는 겁니다. 물론 현지의 교회가 아니고 유럽의 교회가 말이죠.
예수님이 죽은 곳에 세워진 교회는 무려 4개나 되는데, 십자가의 현장에 있던 바위를 중심으로 해서 각각 세워져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주도권을 쥔다고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죠. 크기가 우리교회 예배실의 5배 정도이니,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이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 현장은 보존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 어쩌라고? 그래서?
아무튼 이 세상에서 패배함으로서 세상을 이긴 힘인데, 즉 욕망에 패배해서 욕망을 벗어난 힘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힘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어쩌라고?", 혹은 "그래서?"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천지에 다 퍼진단다" 라고 하면, "어쩌라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너는 죽는 것이 무섭지 않나?" 라고 하면, "그래, 무섭지 않아"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부터 손도 씻지 않고 중국에 여행을 가고 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말이죠(ㅋㅋ).
그렇게 이 세상에서 패배한 힘이, 죄로 물든 이 세상 속으로, 즉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한다는, 반드시 승자가 되어야한다는 이 세상 속으로 그만 들어와 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와서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되는데,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은 그만 폐기처분이 된다는 것이죠.
*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이유는?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다시 물어보겠는데, 창세기 1장에서, '내가 없던 순간의 창세기', 그리고 '내가 있고 난 뒤의 창세기', 이 두 가지 경우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겁니다. 해와 달과 별이 있다고 하면, 자기가 없던 순간의 해와 달과 별은 자기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우리가 창조되었는데, 그러니 우리는 해와 달과 별과 직접 관련이 되면 안 되고, 반드시 창세기의 의미를 경유해서, 즉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의미를 따라가야 하고, 거기에 합류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와있다는 말이죠.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하나님들 !!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들'이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란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들이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고, 나중에 여기에 인간이 합류하게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들이니, 그림을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고, 또 다른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사랑, 우정, 그런 하나님끼리 통하는 관계를 드러내는, 그렇게 계획을 잡고 완성하기 위해서 경유하는 곳으로서 피조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이죠. 하나님과 하나님에 의해서, 이것이 곧 "주께서 주에게"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라는 것이고, 이것이 신약에서는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라고, 신약의 사도행전에선 성령을 받아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라고, 그렇게 되고 말이죠. 아버지와 아들의 그 관계가 사랑인데, 그러한 온전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피조세계를 경유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그러면 뒤늦게 출발한 우리는 무엇이라고 묻는고 하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이는 좋은 사이가 아닙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우리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데, 즉 창세 전에 숨겨놓은 비밀이라는 것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창세 전에 이미 십자가 사건이 !!
하나님이 그만 자기가 만든 이 피조세계에 패배를 당하고 마는데, 즉 죽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아버지의 관계, 혹은 비밀, 그 모든 것이 다 마감되고 확정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그러니 십자가 사건이 이미 창세 전부터 있었다는 겁니다.
굉장히 골치가 아프게 되어버렸는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해결이 되는고 하니, "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심어놓았는가?" 라는 문제가 풀린다는 말이죠.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는고 하니,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숨겨진 죽음이 피조세계 바깥으로 드러내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이 죽음에 대한 실습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이 모형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죽음이라는 것이죠.
* 인간의 목숨은 파리목숨 !!
더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인간의 목숨이 파리나 모기의 목숨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여름에 모기를 잡아놓고 애도를 합니까? "오늘을 5마리가 죽었습니다. 부디 편히 쉬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시한 문제인데,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즉 십자가 죽음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죽음을 경유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인간의 죽음을 경유한, 예수님의 죽음 !!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만들어놓고, 그 죄에 누가 들어갑니까? 하늘에 계신 아드님이 죄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그렇고 그런 시시한 죽음 속에 무슨 죽음이 나타나는고 하니, 유일하게 부활이 되는 죽음이 여기서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다른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죽음인데,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가는 죽음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어제 제가 낮 설교를 하면서, "인간에서 고기가 되고 그 고기에서 흙이 된다" 라고 해야하는데, 자꾸 흙을 육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물론 그 말도 전혀 틀렸다고는 할 순 없지만, 아무튼 인간에서 고기가 되고, 고기에서 흙이 된다는 겁니다. 고기가 신체, 즉 육인데, 인간이 육이 되고, 그 육은 흙이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흙이 되고 싶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과연 그러했느냐는 겁니다. 4살 먹은 아기가 "엄마, 나는 흙이 되고 싶어요" 라고 한다면, 이것은 천재 중에서 천재라는 말이죠. 이 정도는 되어야 천재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는 "너, 왜 그래?"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이가 "창세기 3장에 보니 그렇게 되어있어요" 라고 하면, 엄마는 "너는 이제 성경을 보지마"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로마서 3장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라고 하는데, 그것을 아이가 보고 "엄마, 의인은 없고 모두가 죄인이래" 라고 하면, 엄마는 아이가 더 이상 성경을 읽는 것을 말린다는 겁니다. "이놈이 알고 말하나? 모르고 말하나?" 라고 하면서 그만 성경을 덮고 만다는 것이죠. 성경의 내용은 비밀이기 때문에 쉬쉬하고 싶다는 겁니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라는 식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죽음이 아니라 정작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 즉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죽음이 중요한데, 그것은 이미 욕망이 자아를 붕 뜨게 만들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
요한계시록 2장에서 무엇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까? "첫 사랑을 잊지 말라" 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처음 사랑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생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과 반대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바로 이단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드러냈는데, 예수님을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무엇으로 받는고 하니, '나에게' 라고, 그렇게 받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에게 사랑을 요청할 때는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고 하니, 제발 자기의 죽음 문제를 없는 것으로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 죽음이 없으면 무엇이 삭제됩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할,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악마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다" 라는 것은 악마의 짓인데, 악마가 그것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온 세상을 다 덮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라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없을 때 해와 달과 별을 창조를 했는데, 인간은 제일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다루시는 그 관계망을 경유해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이 건방지게도 이 피조세계를 직접 다루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 과학정신, 그 한계 !!
그게 바로 과학정신인데, 그 과학정신의 한계를 간단하게 살펴보자는 겁니다. 과학정신이란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내가 종이를 들었다" 라고 하면, 과학은 그것을 연구한다는 말이죠. 즉 "도대체 어떻게 해서 종이를 들게 되었느냐?" 라는 겁니다.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와 종이가 서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당기고 있는데, 그게 중력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 중력은 힘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자기가 종이를 드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그 중력에서 빠져나오게 되는데, 그래서 '나' 라는 중력에 붙었기 때문에 종이를 들 수 있었다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생물학의 경우에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그 종이를 보고 궁금하게 여기자,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이 작용해서, 그것을 보는 순간 망막을 통해서 시신경이 작동하게 되고, 그래서 척두엽인가 어디에 전달하게 되고, 그래서 종이를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들었고 그 내용을 보았다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묻는데, "그렇게 보고자 하는 것은 누가 시켰는가?" 라고 말이죠. 그리고 "중력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과학은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중력으로 서로 당기고 있다.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중력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모른다는 말이죠.
* '나'가 없을 때의 하나님의 의미는 인정할 수 없어 !!
과학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나' 라는 것이 없을 때의 하나님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어떻게 나옵니까? "모든 것이 다 피조물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고 천사고 간에 모든 것이 다 자기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자연세계는 다시 나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라고,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의 문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와서, 그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 오늘날의 인간이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종교인데, 무조건 자기를 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겁니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는 말이죠. 하나님이라면 우리나라가 이기게 해주어야지, 왜 일본이 이기게 해주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자기가 속한 나라가 이겨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왜 일본이 이기느냐는 겁니다. 지난 36년의 일제압박도 서러운데 말이죠.
중국에도 국가가 인정하는 교회가 있는데, 심지어 북한에도 국가가 인정하는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그 모든 의미는 무엇입니까? "조선인민민주의 공화국은 반드시 있어야한다" 라는 것으로 모여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설교하는 조건 하에서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중국은 어떻습니까? 다니엘서에 보면 모든 국가는 짐승인데, 그렇다고 하면 이 중국에서 과연 다니엘서를 제대로 설교할 수 있을까요? 그런 설교를 하면 시진핑이 가만히 둘 리가 없다는 겁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부정하는 설교를 용납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이것은 실제로 있었든 일인데, 중국의 공안당국이 그만 교회의 십자가를 꺾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교인들이 심히 괴로워하고 탄식을 하면서 "하나님이여, 어떻게 이럴 수가?" 라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놓치고 만 것입니까? 첫 사랑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죠. 즉 패배하는 힘을 놓쳤다는 겁니다.
* 교회, 입지 !!
자기 교회가 그만 자기 힘을 모으는 포지션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는 '입지' 라고 했는데 말이죠. 처음에는 예수님을 외치다가 그만 점점 더 무엇이 더 좋아지고 말았는고 하니,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교회, 즉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교회가 예수님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즉 우상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택한 유일한 민족인 이스라엘,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그만 이스라엘에게 우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처음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일곱 교회가 무너진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고 말이죠. 즉 예수님보다도 자기가 속한 교회가 더 소중했다는 겁니다.
이런 설교를 하게 되면, 물론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두 달이 된 교인이라고 하면 좋아하는데, "야, 어디서 이런 설교를 듣겠노?"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2개월이 아니라 20년을 다닌 장로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교회에 목돈을 투자한 경우라고 하면, "저 목사를 이제 보낼 때가 되었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모든 입지, 모든 포지션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안이 있는데, 그런데 손자가 설날에 세배를 하러 오면서 그만 츄리닝 바람으로 왔다는 겁니다. 자기는 세뱃돈을 챙기는데 급급했지, 옷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절을 하는데 큰 절이 아니고 그냥 보통 절을 했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만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이 손자는 그야말로 자기밖에 몰랐는데, 거기에 같이 모인 친척들을 전혀 고려하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예의고 뭐고 간에 전혀 없었는데, 그동안 자기에게 혜택을 준 어른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한 번 보세요. 인간이란 어떠한고 하니까, 인간의 욕망이 항상 자아를 재조정한다는 말이죠. 업그레이드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아가 이렇게 한껏 높아진 입장에서 누가 개무시를 해버리면, 당연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는 말이죠.
* 저는 아버지와 아들만 계시면 됩니다 !!
이렇게 일곱 교회가 있는데, 그런데 교회만 덜렁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주변에 이 세상 문화가 깔려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가 그만 이 세상에 물들고 말았는데, 마치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나라들이 있어서, 이스라엘이 거기에 물이 들듯이 말이죠.
그럴 때 교회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처음 사랑, 즉 자기가 없었을 때 존재하는 의미,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셨을 때 존재하는 의미, 즉 "저는 아버지와 아들만 계시면 됩니다. 저는 그 의미를 찬양합니다" 라는 마음을 계속해서 유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만 '내 교회' 라는 의미를 따로 챙기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원래의 의미를 도둑질한 것이라는 겁니다.
* 무서운, 하나님의 '미리 용서하심'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오해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무섭다" 라고 했을 때, 백이면 백이 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내가 죄를 짓고 잘못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지켜보신다" 라고 이해한다는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놈아!" 라고 하면, 그래서 "아하, 하나님은 무섭구나"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네가 죄를 지으면 지옥에 보낸다" 라고 하면, 우리는 "어머, 무서워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미리 용서하셨을 때, 이게 정말로 더 무섭다는 겁니다. 자기가 전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사랑을 마구 퍼부어 주실 때, 이게 정말로 무섭다는 말이죠.
*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
예를 들어서, 며느리는 도시에 살고 있고 시어머니는 시골에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평소에 며느리가 이 시어머니를 무시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시어머니가 어떻게 하는고 하니, 한 달에 한 번씩 시골에서 반찬거리를 한 차를 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고추장과 된장을 한 차를 가지고 온다는 말이죠.
또한 그 다음에는 다달이 생활비를 하라고 수백 만원씩을 던져준다는 겁니다. 며느리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멈추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좋을까요? 무서울까요? 무섭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국에는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즉 살려주시고 또한 용서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럴 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내가 죄를 지으면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아야지" 라고 하는데, 주님은 반대로 나가신다는 겁니다. 즉 이미 용서를 했다는 말이죠.
* 설 자리가 없어요 !!
그렇게 용서를 해버렸으니, 자기가 회개하는 것조차도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회개를 하면 다시 복을 받아서 원상복귀가 되겠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복을 때려버렸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 가치, 자기 의미가, 그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즉 자기 자리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주님에게 어줍잖케라도 무엇을 했다는 것이 전혀 없는데, 그것이 진짜 무서움이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도 이런 무서운 은혜를 다들 받아놓고도 정작 그 무서움을 모르고 있는데 말이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간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전혀 자기의 노력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늘에서 그냥 반찬이 내려오고 된장이 내려오고, 그리고 용돈이 내려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인데, 너무 무서워서 "주님, 고맙습니다" 라는 잘 조차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사야처럼 무서워서 할 말을 잊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머니, 가만히 좀 계세요. 이번 김장은 조금만 해도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조차도 꺼내지 못하고 마구 내려온다는 말이죠. 자기가 시어머니를 도저히 평가할 수가 없는데, 그런 것을 다 박살낼 정도로 쳐들어와서, 필요이상으로 덮쳐버린다는 겁니다.
* 지워지는 인생 !!
그렇게 되면 "이게 내 인생이 아니구나. 나는 나름대로 계획을 좀 세워보려고 했는데, 주님이 이렇게 계속해서 마구 퍼부어 주시는 것을 보니, 이게 주님의 인생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 인생은 주님의 인생 앞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지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나 과분한 은혜인데, 그 은혜 앞에는 우리는 미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자기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자기 기도, 자기 회개, 심지어 자기 죽음까지도 말이죠. "하나님, 제가 지금 죽어갑니다" 라고 말할 입장도 되지 못하는데, 그것은 시건방지기가 짝이 없는데, 교만이란 겁니다. 옛날부터 이미 죽었는데, 지금 살아있는 것은 자기가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살려주셨다는 말이죠.
저의 경우에는 성질이 급해서 길도 마구 건너가는데, 그러면 제가 놀라는 것이 아니고 차가 놀란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저도 이미 죽어야 하는데 아직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제가 행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저의 행위와 관계없이 주님을 증거하라고 베풀어주신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저는 이렇게 고생합니다.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라고 말할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누구누구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정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이 나오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 우리의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계산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착실하게 살다가 그만 실수를 해서 나쁜 일을 했을 때, 그러면 회개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로 인해서 저나 자식에게 아무런 일도 없게 해주세요"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하고 나서는 "휴, 이제 살았다. 역시 기도는 효과가 있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의 계산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 의미가 자기 욕망에 의해서 계속 유지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 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초조하고 불안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그런 사태를 생각하고 대처를 생각하게 되면, 그러면 지금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죠.
* 납득할 수 없는 사랑 !!
감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감사가 있고, 그렇지 않은 감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감사가 크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납득할 수 없는 감사가 크겠습니까? 납득이 되지 않는 감사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우리의 찬미로도 전혀 모자란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나는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하는 감사가 클까요? 그게 아니면 무영혼, 그야말로 너무 몰두해서 정신이 없는 상태인데, 즉 "나는 정말로 아무런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했을 때, 과연 어느 사랑에 더 감사하겠느냐는 겁니다.
두 번째인데, 자기가 무영혼이 되었을 때의 감사다 더 고맙다는 말이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계산적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가 감사할 것만 감사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감사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가 안에서 수습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 다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라고, 누가 이렇게 꼬드기는고 하니까, 이단들이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새댁은 그동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은 죄를 지었고, 기도에 게을렀고, 성경도 보지 않았는데, 하지만 우리 기도원에 와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회복시켜주실 겁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이 욥기 5장에 나오는 엘리바스의 엉터리 설교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라고 하는, 그렇게 계산이 가능한 사랑이란 겁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계산이 꼬였습니다. 이렇게 바로 잡으세요" 라고 하면서 접근하는 이단들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의 자아성, 즉 욕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정작 자기는 그렇게 자기 욕망이 높아진 것을 전혀 모르는데, 오히려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상인 줄로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나옵니까? "나 정도가 되면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주어야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지난 수련회 첫 시간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게 '추락' 이었는데, 그런데 어디까지 추락한다고 했습니까? 바닥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악마가 있는 무저갱까지 추락한다는 겁니다. 바닥이 없는 우물을 무저갱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정도 추락하면 나는 자살할 거야" 라고 스스로 그렇게 계산을 해놓고, "하나님, 적어도 이 정도는 유지시켜주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바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 하나님답습니다" 라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 You Raise Me Up ♬
"주께서 나를 높은 곳에 올리시리라" 라고 하는 팝송이 있는데, 더욱 더 낮아져도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인간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죠. 유명한 노래인데, 우리 인간이 얼마나 교만 덩어리였으면 그런 노래에 감동을 더 하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시편 18편 33절에서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라고 하고, 그리고 이사야서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믿다가 그만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복이었는데, 왜냐하면 패배하는 것이 주와 함께 높은 곳에 가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겁니다. 다른 방식은 없다는 말이죠.
(시 18:33)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창세기는 심판의 책이다 !!
여기 8페이지에 보면, "창세기는 심판의 책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창세기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라는 말씀을 유일하게 해석하고 유일하게 완성할 수 있는, 즉 창세기를 가지고 하나님과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는 분이 누구라는 겁니까?
그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오기 이전의 모든 인간들의 해석이 예수님의 해석과 같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들의 해석은 예수님의 해석과는 다른데, 틀리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의 해석은 심히 수상하고 잘못된 해석이라는 말이죠.
창세기 1장에 의하면 분명히 인간을 만들기 이전에 이 세계가 창조가 되었는데, 그래서 이 피조세계는 먼저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잘났다는 식으로, 즉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피조세계를 자기 쪽으로 당겨왔을 때, 그것 자체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이라는 말이죠.
*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곧 죽음 !!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정녕 죽으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것이 바로 죽음의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게 끊어진 상태가 곧 죽음의 상태라는 것이죠. 숨이 끊어진 것이 죽음이 아니고 말이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부부가 반드시 헤어져야지 이혼이 아니고, 부부사이에 대화가 끊어지게 되면, 그것은 부부로서 산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부부는 11년째 아내가 단답식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전혀 부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도 헤어지지 않고 사는 남자가 훌륭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말이죠(ㅋㅋ).
아무리 남자가 여자를 달래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여보, 오늘 회사에서 내가 이런 이런 일이 있었어. 재미있지?" 라고 하면, 여자는 "그래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오늘 당신이 해준 저녁밥은 왜 이렇게 맛이 있지?" 라고 하면, "그냥 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11개월도 아니고 무려 11년이라는 말이죠.
* 안녕하세요 !!
그 부부가 '안녕하세요' 라는 프로에 나왔는데, 그래서 패널들이 "아니 왜 그렇게 하세요?" 라고 하니, 여자가 "원래 저는 말이 없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남편이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자기 스타일이 그렇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왜 결혼은 했습니까?" 라고 하니, "남편이 말을 조근조근 말을 잘하는, 그렇게 자기에게 없는 요소가 있어서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는 말을 하지 않고 대신 말을 잘하는 사람을 구했다는 것인데, 남편이 아닌 말을 잘하는 종이 필요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패널들이 남편에게 "그러면 당신은 왜 결혼을 했습니까?" 라고 하니, "여자가 말이 없어서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둘이 잘 만난 것인데, 그런데 살다보니 한 쪽은 너무 말이 없고, 다른 쪽은 너무 말이 많다는 것이죠.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만 살란다" 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게 바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의미를 도둑질한 것인데, 먼저 악마가 그렇게 했고, 그 악마와 한 편이 된 인간이 도둑질을 했다는 말이죠. 즉 "너도 신처럼 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심어놓고 도둑질을 하라고 유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부부처럼 11년을 참아도 안 되는데, 그 다음날이 되면 따먹고 싶다는 말이죠. 따먹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매일매일 "따먹으세요" 라고 선악과나무가 그야말로 손짓을 한다는 것이죠.
* 여자의 행동은 충동적 !!
그런데 이것을 부부가 같이 따먹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먼저 따먹었는데, 이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지 않고, 남자를 이용한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 돌발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초치기' 라고 싶은데, 남자가 해놓은 것에 아예 초를 친다는 말이죠.
방금 그 부부 이야기를 다시 하면,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온갖 짓을 하는데, 새로 나온 신상이란 신상은 다 사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댁에는 십만원을 부쳐도 처갓집에는 매달 백만원씩 부쳐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든 만반의 준비를 다해놓고, 아내가 이제는 고분고분하게 자기 말을 들을 것이라고 여기고는 아내에게 운을 띄우면, 아내는 역시 "그래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니 생색을 내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남자가 여자에게 퍼부은 모든 투자와 정성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신이 나에게 하는 짓은 나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모두 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는 "이크, 들켰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여자는 충동인데, 자기 행동을 자기도 모른다는 말이죠. 충동적으로 따먹을 수밖에 없는데, 그게 여자라는 말이죠. 악마는 영이니 그 점을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여자를 유혹해서 따먹게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여자는 남자에게도 따먹게 해서, 그때부터 한 몸이 두 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인지 모르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이의 관계를,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한 몸으로 만들어놓고, 두 사람을 한 몸이 되게 해놓고, 즉 2가 1이 되게 해놓고는, 다 1이 다시 2가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즉 그 2사이에 주님이 들어오셔서 다시 1이 되는, 그래서 인간은 주님이 하시는 일의 모형이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인간 !!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 위한 인간으로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인간은 모형인데,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늙어서 죽으면 결국은 흙이 되는, 그냥 흙덩어리라는 겁니다. 살았다가 흙이 된다고 여기지 마시고, 원래가 진흙인데 거기에 잠시 생기로 인해서 살아있다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이미 흙인데, 즉 죽었는데, 그런데 코에 생기에 불어서 살게 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냥 마네킹인데, 그것을 질료라고 하는데, 즉 하나의 물질이라는 것이죠. 그 물질에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살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이사야서 2장에 나오는데, 22절을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여기에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라고 하는데, 이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헤아림' 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하나님만이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주체자인데, 그러니 헤아리는 자는 헤아림을 당하는 자를 복속하게 되고,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그 반대로 자기가 남을 헤아리는데, 그리고 하나님도 자기가 헤아린다는 말이죠. 즉 헤아릴 권한이 인간에게 우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전혀 그런 권한이 없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제로가 되어도 전혀 섭섭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원래부터 제로인데, 다만 하나님께서 호흡을 주셨기 때문에 그동안 "내 인생이 이렇구나. 저렇구나"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 주님이 오늘밤이라도 거두어 가시면, 의사가 와서 "드디어 운명하셨습니다" 라고 사망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숨이 끊어져도 두뇌는 몇 시간을 더 간다고 하는데, 그러니 죽을 때도 말조심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아이고, 우리 영감 잘 죽었다" 라고 하면 곤란하고, 두뇌는 활동을 하고 있으니 듣고 있다는 겁니다(ㅋㅋ). "당신이 죽으니 참으로 섭섭하네요" 라고 하면서 찬송가를 불러주고 해야, 마감이 깔끔하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 둘, 셋 "만세, 해방이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인간은 죽어주어야 !!
그러니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죄를 지어서 죽은 것이 아닌데, 이것이 세 번째로 중요하다는 겁니다. 처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용서를 먼저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세 번째로는 인간이 죽는 것은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인간은 죽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죽는다고 하면, 그러면 죄를 짓지 않으면 무슨 권리를 주님에게 요청하겠습니까? "내 자식은 죄가 없는데 왜 죽이십니까?" 라고 나오는데, 그게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으로,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드러내었는데, 그것은 그냥 인간이 아닌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의 인간이란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훼손되지 않는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더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만 선악과를 따먹으니까, 주님께서 "그럴 수도 있지? 처음이니 봐준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을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에서 그만 추방시켜버렸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꾸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 아들을 사랑해야 한다 !!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인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자동적인 인간사랑이냐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 사랑에는 조건이 있는데, 자기 아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조건이 걸리면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온전한 사랑이 아니란 것이죠. 조건부 사랑은 사랑이 아닌데, 우리 인간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피조물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는다는 겁니다. "죄가 왕 노릇을 한다" 라는 것은 "악마가 왕 노릇을 한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러니 이 죄를 인간이 짓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인간을 덮쳤다는 것이죠. 마치 미세먼지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말이죠.
* 창세기는 십자가의 책 !!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는 심판의 책이지만 또한 십자가의 책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세기는 죽음의 책인데, 즉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하기 위한 책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밑에 보면 "구원은 나의 일일까? 주님의 일일까?" 라고 하는데, 구원이 누구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일입니까? 아이의 일입니까? 부모의 일이지, 아이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갓난아이가 어떻게 젖병을 소독해서 젖을 타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갓난아이, 주님의 품속에 있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처음 사랑이라는 겁니다.
키워주시는 분도 주님인데, 다만 우리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키워달라고 하는 것보다 주님은 더욱 많이 키워주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 은혜를 이미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크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 성경에서 개인적인 일은 없어 !!
나중에 우리는 자기 자신이 미워지게 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주님이 주신 은혜에 비해서 자기가 감사하는 것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한심스럽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상처를 입었으니 어쩌니 하는데, 그게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보면 "내가 나인 것이 주님의 일일까요? 나의 일일까요?" 라고 하는데, 누구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모형인데, 그게 히브리서에 분명히 나온다는 말이죠. 즉 "나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성경에서는 개인적인 일이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든지 보지 않든지 간에 자기의 개인적인 일에만 항상 몰두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 개인적 것으로 인해서 매일같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 이웃을 사랑할까요? 말까요?" 라고 하고, 또한 "회개를 할까요? 말까요?" 라고 하는데, 이게 개인적인 일이라는 말이죠. 그 이웃이 누구의 이웃이고, 또한 회개가 누구의 회개입니까? 자기의 이웃이고, 자기의 회개인데, 그러니 개인적인 일이라는 겁니다. 질문 자체를 성경에서 말하는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하나님, 이번에 이웃이 하나 이사를 왔는데, 절에 다니는 보살입니다. 그런데 떡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분명히 절의 향냄새가 풍기는 떡이지 싶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이유를 나에게 설명해보아라" 라고 하시는데, 왜 그 떡을 먹으면 안 된다고 여기느냐는 말이죠.
* 저는 제사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
그러면 "저는 성경말씀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귀신이 드린 제물은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먹지 않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렇게 먹지 않겠다고 버틸 때 얻는 이익이 무엇이냐?"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그것은 바로 나의 구원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문제인데,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주님의 일이지 결코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오늘날의 기독교이고 또한 교회인데, 그러니 요즘은 기독교 자체가 아예 이단이라는 겁니다.
그동안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잘 커왔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자기가 자기를 챙기고 관리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성령까지 관리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아침에 "지난밤에도 무사히 잘 주무셨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영혼으로, 즉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는 게 낫다는 말이죠.
유난을 떠는 것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유난을 떨었다는 겁니다. 자기 나라를 보호하겠다고 나왔다는 말이죠. 하지만 유난을 떨지 말고 막 살면 된다는 겁니다. 정말로 막살아도 괜찮은데, 그런데 그런 용기를, 그런 믿음을 누가 박탈시켰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악마에게 너무나 길들여져 있었다는 말이죠. 이미 받은 사랑은 계산도 하지 못하면서, 그야말로 어줍잖케 "내가 하나님에게 이 정도로 하면 장래의 일이 잘 펴질 것이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그 정도의 대우는 받을 만한 자아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 건방짐과 교만함, 정말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시작도 끝도 모두 예수님이 책임질 일 !!
여기에 교재 8페이지에 보면 "시작도 끝도 모두 예수님이 책임질 일이기에,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라고 하는데, 요즘은 이 머리말을 시처럼 쓰는데, 이때만 해도 완전히 강의식이라는 말이죠(ㅋㅋ). 시작도 끝도 모두 예수님이 책임질 일이라는 것은, 결단코 우리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만약에 자기가 책임을 지면 사적이 일이 되고 마는데, 즉 예수님의 공적인 일로 넘어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가로막는데, 즉 자기 자신이 주님의 일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이죠. 지금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일이 잘 되고 있는데,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기를, "내 인생은 망가졌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원망을 한다는 말이죠.
다시 하겠는데,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진다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죽은 적이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물 위를 걸으시고 떡을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책임을 지는 모습인데, 그러니 책임을 질 줄도 모르면서 그런 건방진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자식을 자기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안 되는데, 오직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만이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이죠. 자식을 위해서 죽을 마음도 없으면서, 책임진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 나는 갑질을 하고 싶어 !!
부모가 돈이 좀 있다고 해서 자식에게 자기 목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그러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식은 "내가 모르는 재산이 좀 있네. 이제 사업이나 해볼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이 사업을 하겠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동안 자기가 을로 살았는데 굶어죽어도 이제는 남들에게 명령을 하는 갑으로 살아보겠다는 것인데, 즉 자아를 높은 자리에 올려보겠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갑질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마음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높이는 겁니다. 999명이 그렇게 해서 실패하고 1명이 성공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999명이 1명을 받쳐준다는 말이죠. 판돈의 특징은 추가적인 돈이 유입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니 A가 돈을 땄다고 하면 그 돈은 나머지가 몰아주었다는 겁니다.
* 나에게 무릎을 꿇어 !!
그게 세상인데, 그러니 돈을 번 것이 아니라 남을 울렸다는 말이죠. 즉 남을 울린 값으로 자기가 돈을 벌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릎을 꿇어!" 라고 하고 싶은, 그 주인공이 남이 아니라 자기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자기가 남들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기 앞에 꿇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김영모가 돌아왔다(?)' 라는 다큐가 있었는데,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름 경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각종 신상들을 투자자를 모아서 가지고 사기를 친 놈인데, 그 사람이 세상은 보는 것은 간단한데, 즉 '도박판' 이라는 말이죠.
그는 자기를 보고 사기꾼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들 사기를 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남는 것이 없어요" 라고 하는데, 그것도 사기라면 사기라는 말이죠. 왜 남은 것이 없으면 아예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작은 사기꾼이 큰 사기꾼을 보고 욕하지 말라는 것인데, 같은 사기꾼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의 특징은 "신은 나를 사랑한다" 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그 바탕에 깔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그 출발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이제 우리가 창세기를 시작했는데, 이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자기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의미에 참여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자기 잘 되라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오직 주님의 의미, 거기에 합류해서 기뻐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경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한 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새 "나는 무슨 이득을 뽑아낼 것인가?" 라는 관점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다 주님의 은혜인 줄 알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2,18 오전 12시에 마침.
아, 사기를 치려고 해도 손님이 없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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