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공동의식 1912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2. 26. 10:38
2019-12-15 10:57:33조회 : 38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6 - 공동의식(수정) 이름 : 구득영 (IP:183.102.224.8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6 - 공동의식

19,12,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공동의 세계와 다수의 세계 !!

오늘은 교재 15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천국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인데, 즉 모두가 주도권을 쥘 수 없는, 다만 모두가 참여만 되는, 그런 공동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공동의 세계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천국은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여기에 하늘이 있고 그리고 여기에 땅이 있다고 하면, 그 하늘에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에게 한 분의 아들이 계셨는데, 그 한 분이신 아들, 즉 독생자께서 땅을 경유하셨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죠.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아들이 경유했던 과정이 곧 천국을 유지하는 요소 !!

그러니 하늘나라 자체가 천국이 아닌데,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 아들이 경유했던 과정이 천국을 유지하는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과 땅에서 경유하는 과정, 그 과정에 대해서 천국은 공동의 세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공동의 요소가 등장한다는 것이죠. 즉 예수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오면서 공동의 요소가 생긴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천국은 공동의 세계이니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반해서 이 땅의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개별자들의 세계인데, 다른 말로는 다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알다시피 하나가 아닌 여럿을 다수라고 하는데, 즉 각자가 자기 팔을 흔드는 세계라는 말이죠. 교회도 역시 그러한데, 자기밖에 모르는 세계라는 겁니다.

*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

그러나 천국은 공동의 세계인데, 그러면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개별자, 즉 다수의 세계가 공동의 의식으로, 즉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우리의 것이다" 라는 공동의식이 발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다수의 의식이 부정을 당해야 하는데, 즉 개별자 의식이 부정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은 "나를 위한 세계다" 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데, 천국에 가려면 사람이 전혀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고 하니, 과거에는 '나' 위주로 살다가, 이제는 그런 '나' 위주로 사는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천국에 가는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내 교회', '내 가정', '내 직장', '내 회사' 라고 하는, 이런 '나'와 관련된 모든 관계는 다 끊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천국이란 말이죠. 이런 공동의식이 생겨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천국은 결코 '나'를 위한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죠.

* 하나님의 깊은 마음 !1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하늘에 계신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을 경과하심으로서, 여기에서 공동의 요소가 생겨났는데, 그 요소가 개별자 세계를 부정하고 공격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별자 의식으로는 천국이 아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부자가 지옥에 가서도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개별자 의식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인데, 즉 공동의 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녀가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에게 뭔가 분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성령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성령을 나누어주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신 마음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 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마음이 우리에게 온다는 말이죠.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인데, 십자가라고 하면 보통 고통이니 힘든 것을 생각하는데, 그러한 개별자 의식으로 힘들어봐야, 그것을 가지고 가봐야 끝까지 어디로 가겠습니까? 개별자 의식으로 굳어진다는 겁니다. 즉 "내가 고생한다. 내가 힘들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 아무리 고생을 해도 점점 더 자기 밖에 모르는 세계에 웅크리고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고생을 했다" 라고 해도, 그것은 개별자 의식이 날아간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갈 수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녀가신 취지가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 서로 사랑하라 !!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는 없는 새로운, 즉 개별자에게는 없는 새로운 의식을 주셨는데, 그것이 곧 공동의 의식이라는 말이죠. 즉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셨는데, 이 '서로' 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없다는 것인데, 사랑이 다 덮어버리면 사랑 안에서 교제가 되고 대화가 된다는 것이죠.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다녀가신 것에 대해서 보통 교회에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다. 희생을 하셨다" 라고 하는데, 물론 그것이 성경에도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취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로 개별자 의식을 제거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말이죠.

* 옛날 옛적에 !!

우리나라의 옛날 속담에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다들 아시죠? 이게 유래가 있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머리가 노란 사람들이 있는 줄 전혀 몰랐기에 그냥 검은머리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게 바로 사람이라는 말이죠.

아주 오랜 옛날에 나무꾼이 살고 있었는데, 그가 위기에 처한 노루와 뱀과 젊은 청년을 구해주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노루는 보물을 자기를 구해준 나무꾼에게 가져다주어서 그는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젊은 청년은 그것을 시기해서 관하에 신고를 했는데, 나무꾼이 도둑질을 했다고 말이죠. 나무꾼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사또는 그것을 믿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이 나타나서 사또를 물어버렸는데, 그러자 사또는 몸이 퉁퉁 부어서 죽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뱀은 자기를 구해준 나무꾼도 물었는데, 그리고는 나뭇잎을 하나 주고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러자 나무꾼도 몸이 퉁퉁 부어 올랐는데, 그 나뭇잎을 발라서 나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무꾼은 그 나뭇잎을 사또에게 주어서 사또도 몸이 낫게 되었고, 그래서 사또는 나무꾼을 말을 믿게 되었고, 배은망덕한 그 젊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겁니다.

* 왜 바로 왕에게 재앙이 떨어지는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속담이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성경에도 나온다는 말이죠.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가 살던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가게 되는데, 그러자 애굽의 바로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동침을 하려고 하는데, 물론 아브라함이 자기의 누이동생이라고 속였는데, 아무튼 그러자 바로 왕에게 큰 재앙이 떨어져서 혼이 났다는 겁니다.

이게 참 신기한 내용인데, 분명히 아브라함인데, 이 아브라함은 개별자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아브라함 속에는 공동의 요소가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장차 올 아브라함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개별자 안에는 천국의 백성이 들어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을 아브라함도 몰랐고, 물론 바로 왕이 알리는 더 더욱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리니 하나님 쪽에서 그만 화를 내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이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 개인이 아니고, 아브라함 안에 들어있는 약속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기 때문인데, 즉 아브라함의 자손, 자손, 자손, 그렇게 해서 끝에는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 주님은 왜 검은머리 짐승을 거두시는가?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그게 공동의 요소입니까? 개인입니까? 조금 전에 머리가 검은 짐승은 거두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머리가 시커먼 우리를 거두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왜 거두십니까?

그것은 개별적으로 우리가 잘나서 거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는 엄청난 것이 들어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뻐서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예쁘기도 하겠지만(ㅋㅋ),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성과로 얻고 싶은 것이 들어있는데, 공동의 세계를 구성할 천국의 구성원들을 하나님께서 놓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 개별자, 그리고 공동의식 !!

그러면 성도가 되었으면 두 가지를 봐야하는데, 먼저 하나는 개별자로 살아간다는 것이고, 즉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만 알면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되고, 그러니 그 다음으로는 주님이 경유하신 성령이 오게 되면, 공동의 의식, 즉 천국의 백성이라고 하는 신분이 들어있음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개별자 신분을 지우고, 날마다 공동의 요소를 드러내는 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건지고 싶은 것은 반드시 건지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머리가 검은 짐승은 거두어주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께서 배은망덕한 놈을 거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거두시는 겁니까? 그것은 머리가 검은 인간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소중한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물론 여기에는 머리카락이 노랗거나 없는 사람도 다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공동의 요소라는 것은, 독생자가 하늘에 계시다가 땅에 내려오게 되는 그 과정,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심어진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언제 인정을 받는고 하니까, 사랑하는 자기 독생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칠 때, 즉 아버지가 아들을 바칠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 속에 내 마음이 들어있다" 라는 것을 확인해주셨다는 겁니다.

* 개별자를 꺾고 보편자가 나올 때 발생되는 것이, 곧 '허무' !!

지금 강의내용이 약간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렇지요? 개별자 안에 공동의 요소, 이것을 보편자라고 하면, 물론 지상이 아니고 천국의 보편자라는 말이죠. 어느 누구라고, 그렇게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자인데, 그게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개별자를 꺾고 보편자가 나올 때, 여기에서 발생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허무' 라는 말이죠. 지금 우리가 전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즉 개인적인 야망이나 야심을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점점 더 허무해진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를 하면, 개별자와 보편자의 간격이 점점 더 멀어진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사람이 태어나서 만나는 것을 우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갓난아이에게 있어서 우주는 무엇일까? 엄마인데, 즉 소우주라는 겁니다. 그게 자기의 자기됨을 아는 전부인데, 그런데 자라가면서 점점 더 그 범위가 넓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그 영역이 샛길로 파급이 되는데, 살아가면서 관계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즉 카테고리가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주가 넓어지는데, 그것을 물리학을 공부한다든지 절에 가서 수양을 해보면, 그 범위가 자연까지 넓어진다는 말이죠. 자연, 그것을 다른 말로 우주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우주 안에 인간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갓난아이가 어른이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하지만 모두를 다 만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현재 인구가 75억인데, 중국의 시진핑을 만나본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나라의 대통령도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이 허다하다는 겁니다. 다만 자기에게 필요한 자들만 만나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만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자기의 소우주를 구성하게 된다는 말이죠.

* 점점 더 강화가 되는 개별자 !!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서 개별자가 점점 약화가 됩니까? 강화가 됩니까? 강화가 되는데, 즉 커지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이상적인 자기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상적인 가정, 이상적인 회사, 이상적인 교회, 이상적인 국가, 그렇게 가장 표준적이고 자기 욕망을 몽땅 다 담을 수 있는 어떤 소우주를 계속해서 구성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구약에서는 국가라고 하는데, 다니엘서에 나오는 국가라는 겁니다. 우주가 있는데, 물론 우주를 몽땅 다 차지할 수는 없지만, 그 우주보다는 조금 더 못하지만, 인간들이 최종적으로 구성하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국가' 라는 말이죠.

* 하나의 나라, 곧 '국가' !!

이게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데, 그냥 국가가 아니고 지금 지구상에 있는 200여개의 국가가 하나가 되는, 그런 국가라는 겁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대에 이것을 '세계화' 라고 했는데, 온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자는 것인데, 즉 빌리지라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의 마을로 만들어서 소통을 하자는 것인데,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인터넷이라는 겁니다.

(계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계 17:18) 또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우리나라의 방탄소년단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 나라의 소녀들이 난리가 났다는 말이죠. 히잡을 쓰고 와서는 열광을 하는데, 우리나라의 방탄소년단을 왜 좋아합니까? 그게 다 인터넷의 영향이란 겁니다. 미얀마의 아가씨들이 우리나라의 화장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란에서 시청률 90프로를 기록한 것이 드라마 '장금이' 인데, 인터넷으로 전부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죠.

아프리카 국가에서 인권이라든지, 이런 것에 문제가 발생하면 미국이 간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네 나라 내 나라가 없다" 라는 겁니다. 이번에 일어난 홍콩사태에 대해서도 미국의 상하원에서 결정을 한 것이 있는데,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인데, 즉 "전 세계가 하나의 나라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청년들이 취직할 곳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노는 사람도 있지만, 이제는 외국으로 나간다는 말이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같은 경우에는 실업률이 무려 20프로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고급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브라질과 같은 곳으로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과는 언어가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동유럽의 경우에도, 거기는 경제가 별로 발전하지 않아서 그 나라의 청년들이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곳에 가는데, 그러니 이제는 '내 나라' 라는 것이 없고, 전체를 하나의 나라로 본다는 말이죠. 이번에 베트남 사람들이 36명이나 영국에 와서 컨테이너 안에서 죽고 말았는데, 취직을 하기 위해서 왔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브로커에서 속은 것 같은데 말이죠.

특히 시리아 난민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터키를 거쳐서 독일로 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 사는 나라에 가서 자기들도 좀 그것을 누리고 싶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네팔이나 캄보디아의 청년들이 몰려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게 하나의 나라가 된다는 말이죠. 소우주인데, 그렇게 우주가 있고 그것을 국가로 채울 때, 그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허무' 라는 겁니다. 그러니 허무라는 것은 천국과 인간들의 이상국가 사이에서 발생된다는 말이죠. 가면 갈수록 천국에는 관심이 없고 이상국가에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서 성경과 연결을 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갓난아이가 크면 어른이 되는데, 즉 소우주가 대우주가 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이 세상에서 출세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출세를 하게 되면 예수님이 다녀간 취지와 상관이 없이, 여기서 그만 벌어지는 틈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이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라는 겁니다. 과연 그러한지 전도서 7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4절까지 누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여기 2절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목사가 감히 설교시간에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죠. 교인들은 전부가 이상사회, 즉 자기가 잘 되는 것을 바라는 입장에서, 그런 개별자의 입장에 놓여있는데, 즉 자기가 살아갈 보람과 의미를 찾고자 교회에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과연 주례사의 본문으로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교인들은 성경을 골라서 보는데, 무슨 아이스크림도 아닌데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자기 마음대로 성경말씀을 뽑는다는 것이죠.

* 우주는 구멍이 뚫렸다 !!

성경은 간단한데, "우주가 막힌 것이 아니라 구멍이 뚫렸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자기 자신인데, 즉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석가모니가 이야기했다고 해서 우리가 무시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석가모니가 우리의 속마음을 대변해주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들은 교회에 나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겁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 즉 개별자밖에는 없다는 말이죠. 그런 정신으로 교회에 나오는데, 그러니 천국에 가도 자기와 자기 식구들만 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 개별자 마음인데, 그것을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이 전도서에서는 허무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게 바로 허무를 양산하는 것이란 말이죠.

* 아빠, 갤럭시 폴드 !!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데, 그래서 갓난아이의 경우에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엄마아빠가 있으면 좋아했다가, 그래서 사탕만 하나 주면 좋아했던 그 아이가, 그런데 점점 자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사탕이 아니라 휴대폰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결혼할 때가 되면 요즘은 아파트를 원하는데, 그러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기가 찬다는 말이죠. 과거 부모 시절에는 그냥 방 한 칸만 있으면 되었는데, 집은 결혼해서 나중에 벌어서 구입하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니라, 결혼하기 전에 먼저 자기 집 정도는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빌라의 경우에는 3억 정도면 되는데, 그런데 아파트를 알아보니 무려 12억 5천이라는 겁니다. 이게 '광산 김씨' 이야기인데(ㅋㅋ), 그래서 엄마는 안타까워하면서 울고, 또한 아버지는 "내가 노끈공장을 하면서 자식에게 아파트도 하나 사주지 못하나?" 라고 하면서 자괴감에 빠져있다는 말이죠. 자식은 오히려 괜찮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자존심을 내세워서 "내가 공장을 팔아서라도 해주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허무를 빼버리고 !!

그러면 이게 무엇이 빠져서 그렇습니까? 허무를 빼서 그렇다는 말이죠. 여기 전도서 7장에서는 허무를 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추구하는 방향, 즉 우주에서 국가가 최고이고, 그런 이상국가를 향해서 살아있는 '나'를 더욱 잘 사는 '나'로 만들기 위해서 점점 더 발전시키는 것, 이것 외에 다른 것은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즉 허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늘에 계시던 독생자가 이 땅에 내려와서 이 땅을 경과하면서 무엇을 경험하셨는고 하니까, 허무 중에서 가장 깊은 허무라고 할 수 있는, 즉 '죽음'을 경험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도서 7장에 나오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라는 말씀을 따라서 돌아가셨다는 말이죠.

* 이 세상 전체는 허무 덩어리 !!

그러면 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습니까? 그 이유가 그 뒤에 나와있는데, 즉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소멸이 되게 되어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인간은 왜 죽습니까?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죠.

우주에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데, 그러면 어디서 가르쳐줍니까? 우주 바깥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구멍이 뚫리고, 거기서 쏟아지는 진리의 말씀이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노력을 해도, 그것 전체가 허무 덩어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 구멍 뚫림을 통해서 비로소 그 이야기를 해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모든 것 전체가 허무 덩어리인데, 그러니 개별자, 즉 "나는 잘났다. 너는 못났다" 라고 하는 것이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전체인데, 그 전체가 다 허무하다는 말이죠.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밤에는 모든 소가 다 검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낮에 보면 흰 소도 있고 얼룩소도 있는데, 그런데 밤에는 그런 것이 다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 전체가 더 하나의 허무 안에 속해있는데, 즉 "너도 허무하고, 나도 허무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다 허무한 존재로서 허무 속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공통적인 요소를 끄집어내는데, 그래서 제가 천국은 공통적인 요소가 되어있다고 했다는 말이죠. 이 지상에 주님이 다녀가면서 공통적인 요소를 끄집어내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모든 인간은 죽는다" 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발전하고 노력해봐야 오히려 허무만 양산하고 키우게 되는데, 그러니 인간은 결국 허무하게 죽는다는 말이죠.

* 네 자신이 헛되다는 것을 알라 !!

이게 전도서 7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인 12장에도 보면 뭐라고 합니까?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항다는 겁니다. 이게 전도서 1장에도 나오는데, 그러니 전도서 전체가 다 그렇다는 말이죠. 즉 "네 자신을 알라" 라는 것인데, "네 자신이 헛되다는 것을 알라" 라는 겁니다.

(전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전 12: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전 12: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전 12: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 12: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 다시 아브라함으로 돌아와서 !!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브라함은 개별자로서 애굽에 내려갔다는 말이죠. 아브라함 자신도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미처 몰랐는데, 그냥 자기 몸 하나 건사하면 그만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죽으면 허무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지 않고 더욱 든든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이나 바로 왕이나 모두 다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거기에 누가 개입을 했습니까? 바로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와 동침을 하려고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바로 왕이 혼이 났는데, 그만 뱀에 물려서 온 몸이 퉁퉁 부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왕이 그게 다행인 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이빨자국이 뒤꿈치에 나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물어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가 허무를 안다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의 주제파악이 된다는 말이죠.

물론 뱀처럼 무는 것이 아니지만, 날마다 십자가가 우리의 눈 앞에 보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마음이 뱀처럼 우리를 물어주어야, 자기가 하는 모든 짓들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천국에 갈 수 없는, 그렇게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짓거리를 평생동안 해왔다는 것을, 그것을 성령에 물리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을 백독을 해도, 전도서 7장에 나오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라는 말씀이, 그게 백 번을 읽으면 이해가 됩니까? 한 번을 보더라도, 물리게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즉 "허무한 것을 허무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을 했구나. 내가 주제파악도 하지 못했구나" 라고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말씀이 와서 우리의 뒤꿈치를 물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 녹취 구 - 요즘 웰시코기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는데, 얼마나 뒤꿈치를 잘 무는지 모릅니다.)

* 죽음의 공포 !!

물론 말씀이 물지 않아도 허무가 찾아오는데, 그런데 일반인들에게는 허무가 찾아오게 되면, 이것이 무엇으로 이어지는고 하니, 죽음의 공포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흔히 죽을 때만 죽음을 안다고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이미 죽음의 공포가 일상의 바닥에 다 깔려있다는 말이죠.

혼자 살면 외롭다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나 죽음의 공포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공포가 깔린 채로 시작이 되고 진행이 된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책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것으로 끌어 모으는 것이란 말이죠.

힘이 되는 것은 무조건 끌어 모으는데, 하지만 아무리 모르고 채워도 우리 인간의 가는 방향이 죽음 쪽으로 계속해서 가기 때문에, 이 죽음의 공포, 이게 곧 허무인데, 이 허무의 강도가 점점 더 커진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러한데, 왜냐하면 허무 속에 갇혀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개별자 의식을 놓아버려야 하는데, 즉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의 설계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고, 그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인데, 그렇게 의식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의식을 돌리지 않고 "나는 버틸 거야. 나는 지킬 거야" 라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기쁨이 없는데, 물론 감사도 없고 또한 고마움도 없다는 말이죠. 항상 바들바들 떨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 하늘이 열렸다 !!

지금까지는 알았다고 치고 계속해서 해보겠습니다. 아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갓난아이가 있는데, 즉 소우주가 있는데, 아무리 자라고 해도 어디를 벗어나지 못하는고 하니, 우주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우주 안에는 허무가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허무가 작용한다는 것은 성경 이야기이고, 인간은 그냥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주 바깥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구멍을 뚫어서, 독생자가 그 구멍을 통해서 내려온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것을 "하늘이 열렸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이전에는 하늘이 닫혔다는 겁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그렇게 닫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깥 세계가 있기는 있는데, 그런데 이쪽에 있는 인간들은 그것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그 안에서만 해결을 시도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허무한 세계에서 허무를 끌어 모으면서 허무스럽게 살아가는데, 왜냐하면 그것 외에는 달리 다른 대책은 없다는 말이죠.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뚫어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에게 하늘이 뚫리고 성령이 오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는 하늘에서 시원하게 무엇이 내려옵니까? 성령이 내려오시는데, 그 성령의 무슨 마음인고 하니, 천국의 마음인데, 그러니 이것은 개인을 위한 영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위한 영인데, 그 영이 내려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나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거기에 참여되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초청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초청을 해주었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다고 합니까? 2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천국 혼인잔치 !!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혼인잔치에 참여를 했습니까? 이 혼인잔치의 주체자는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임금님인데, 그러면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기 결혼식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자기의 잘남을 뽐내기 위해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구를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 가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찬송'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어제 에베소서 5장을 설교했는데, 서로가 화답하면서 감사하고 찬미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22장과 연결해서 보면 다 풀린다는 말이죠. 혼인잔치가 있는데 우리는 하객으로 축하를 하러 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는 주체 측에서 요구하는 수준이 있는데, 그것이 '예복' 이라는 말이죠.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러면 그런 예복, 즉 유니폼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기존의 '나' 라고 하는 개별자를 빛내기 위한 옷들은 그 자리에서는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다 허무한데, 그런 것이 무엇이 필요하냐는 말이죠.

* 벌벌 떠는 인간들 !!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인데, 죽음의 공포와 공포끼리 서로 비교해본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재용은 삼성그룹을 가지고 두려워하고, 또한 다른 사람은 각자 자기의 것을 가지고 두려워한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봐야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들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상견례의 자리가 바로 그러한 경우인데, 비싼 음식을 시켜놓고는 제대로 그 맛도 보지를 못하고 어떻게 합니까? 사돈들끼리 양쪽이 다 폼만 잡고 벌벌 떨고 있다는 말이죠.

교회에 와서 교인들이 서먹서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각자 각자가 개별자이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함부로 하면 뒤에서 나에게 욕을 하겠지" 라고 하면서, 그래서 서로가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같이 김장을 하면서도 떨고 있다는 말이죠.

교회에 와서 굳이 감출 이유가 없는데, 어디 폼을 잡을 때가 없어서 교회에까지 와서 폼을 잡느냐는 겁니다. 폼을 잡는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인데, 즉 "남들이 개별자인 나에 대해서 혹시나 험담을 하지 않을까?"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교회의 경우에, 주일오전에 기도하시는 분들을 보면 벌벌 떠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뒤에서 "기도하는 꼬라지를 보니, 신앙이 있는 줄 알았더니만 개뿔도 없네" 라는, 그런 험담이 마구 들려오는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개별자를 더욱 더 개별자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심한지 모르는데, 특히 여자 집사님들의 경우에는 이것 때문에 경기를 일으키는데, 그래서 제가 오후의 기도시간은 없애버렸다는 겁니다. 그동안 오전에는 남자 분들이 기도하고, 오후에는 여자 분들이 기도를 했는데 말이죠.

목사의 입장에서 교인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아서 없애버렸는데, 그러니 교인들이 다들 좋아하더라는 겁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기도를 그렇게 유창하게 하던 분들도 우리교회에 오면 벌벌 떠는데,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개별자는 그렇게 강력하다는 겁니다.

* 친절하신 예수님 !!

예수님께서는 여기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서 너무 친절하고 알기 쉽게 말씀을 해주셨는데, 인간들은 그 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주에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니 말이죠. 즉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이다와 같은 시원한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받지 못하고 답답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아마 오늘 강의제목이 '답답한 인생'이 되지 싶은데,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시원하게 뚫어주시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 개별자로서 일이 있었습니다. 결혼도 해야하고, 장사도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그것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오지 않으면 작살을 낸다고 하니 사람들은 할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갔는데,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감옥이 집어넣었습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내용이 좀 다른가요? (ㅋㅋ)

그러면 이 비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개별자에서 벗어나라" 라는 것인데, 그리고 하늘나라의 잔치는 누가 주최를 하신 분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 초청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즉 초청장 자체가 큰 선물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초청장을 받을 때에 그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합니까? 구멍이 뚫렸으니 허무가 아니고, 그 허무 속에 하늘의 요소가 쏟아져 왔다는 겁니다. 남탕에 가면 냉탕에 쏟아지는 폭포수가 있는데, 여탕에도 있습니까? 있어요? 저는 TV프로에서 없다고 해서 없는 저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렇게 내려옴으로서 이 전체가 허무라는 것이 졸지에 발각되고 마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허무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기쁨인데, 어떤 기쁨입니까? 자기를 챙겨도 되지 않는 기쁨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출세하지 않고 몸이 아파도 상관이 없는, 그런 기쁨이라는 겁니다.

그 기쁨이 곧 성령이 주시는 기쁨인데, 즉 "네 인생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이제 파악하라" 라는 것인데, 자기 인생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개별적 인생은 없다는 것인데, 임금님께서 초빙하기 위한 인생, 즉 주님께서 데리고 가기 위한 인생만이 있을 뿐이란 겁니다.

여기 교재 154페이지에 마태복음 13장 44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

어제 오후예배를 마치고 우리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목사님, 목사님의 책에는 비유만 따로 모아놓은 것이 없습니까?" 라고 해서, 그래서 제가 "비유만을 따로 모아버리면 성경전체와 제대로 관련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복음을 왜곡하게 됩니다. 성경내용 속에서 비유를 살펴봐야지, 비유만 따로 뽑아내게 되면, 그 순간 그만 반칙이 됩니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원래 바탕인 복음을 왜곡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아무튼 여기에 천국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우주에 구멍이 뚫렸다고 여기게 되면, 이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비유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인데 말이죠. 천국내용이 성령을 통해서 쏟아져 내려왔다는 겁니다. 어디에 말입니까? 이 허무한 세계에 주어졌다는 것이죠.

그런데 허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야 허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전부가 되는데, 즉 오히려 이상적인 목표가 된다는 겁니다. 죽으나 사나 우주 속에서 살 길만 찾는데, 왜냐하면 죽음의 공포에 쫓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무조건 자기만 살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허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늘에서 공동의 원칙이 내려오니까, 개별자를 살리기 위한 모든 몸부림들이 허무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면 공동자, 즉 보편자와 개별자가 더욱 더 간격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간격이 벌어지는 것을 허무라고 했는데, 자기는 잔치집에 가고 싶은데 성경은 초상집에 가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간격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 전도서는 매워요 !!

그것이 바로 허무인데, 이것이 "잔치집에 가지 말까요?"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인생이란 것은, 인간의 본성상 초상집보다는 잔치집이 더 좋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잔치집에 가면 거기에서는 다소나마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씻을 수가 있기에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잔치집에 가면 서로가 환하게 웃는다는 겁니다.

새로운 부부가 탄생하게 되면 마치 자기가 2시간 뒤에 죽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자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기 때문에, 허무가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서는 잔치집에 가지를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초상집에 가면 그 전체 분위기가 우리 인생의 본질을 이야기해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전도서가 참 매운데, 미운 것이 아니라 맵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감추고 싶은 것은 정확하게 지적해준다는 것이죠.

* 감추어진 보화 !!

다시금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로 돌아와서, 여기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라고 하는데, 그냥 보화가 아니라 '감추어진 보화' 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식으로 주어집니까? 감추어진 채로 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개별자로서 한 통속이라는 겁니다. 즉 주님은 한 공간에 있는데 서로 엮이거나 섞이지 아니한 채로 오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보화를 어떤 농부가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그 농부가 기존의 자기 것에 그 보화를 더합니까? 그게 아니면 자기 것을 다 팔고 그것만 챙깁니까? 쉽게 말해서, 자기 것에다가 주님의 것을 결합을 시킵니까? 그게 아니면 자기 것을 버리고 주님의 것에만 매달립니까?

주님의 것에만 매달리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바로 기쁨이라는 겁니다. 큰 기쁨이 옴으로서 개별자가 누리던 기쁨은 기쁨이 아니라,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다 허무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이미 시작된 공동의 생활, 즉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1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습니까? 아니면 도망을 쳤습니까? 그만 도망을 쳤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감추어진 보화가 아니라, 드러난 보화인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상대하는 것을 평소에 다른 사람과 상대하듯이 했는데, 그러니 예수님에게 자기들이 잘해주면 예수님도 자기들에게 잘해줄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던 방식이란 겁니다.

*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 !!

인간이 살아가던 방식을 다시 정리하면, 그들은 이 세상이 허무한데 그것도 모르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쫓기면서 힘이 되는 것은 다 끌어 모은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무엇을 찾았습니까? 자기들에게 힘이 되는 요소가 있다고 여기고, 그래서 자기들이 예수님에게 잘해주면 예수님도 자기들에게 잘해줄 것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리고 특히 12명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응당 보상을 해줄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같이 있으면서 같은 마음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랐는데, 즉 자기 것에 예수님의 것을 더하게 되면 자기는 죽어도 천국에 간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게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들과 잠시 결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렇게 갈라서게 되니 비로소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했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까이 했어도 가까이 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따로 생각을 했는데, '나' 라는 개별자가 우선이었다는 겁니다.

* 십자가가 곧 초상집 !!

제자들은 초상집에 갈 마음에 전혀 없었는데, 왜냐하면 십자가가 바로 초상집인데, 죽은 자의 시체를 처리하는 곳, 즉 장례식장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자들은 그 자리를 회피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장이 곧 하늘과 땅이 만나는, 즉 땅에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있는 장소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장소가 곧 천국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되는데, 즉 타자마자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주와 함께 죽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현장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 우리는 머리가 검은 짐승일 수밖에 없어 !!

성경자체가 우리 인간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데, 아예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천상천하유아독존인데, 그야말로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아까 어떤 나무꾼이 노루와 뱀과 젊은 사람을 건졌다고 했는데, 여기서 노루와 뱀은 나무꾼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머리가 검은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개별자로서, 즉 자기가 신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만 신이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은 신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최고는 항상 하나이어야 하는데, 두 개를 비교해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앞선, 그런 신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상대방에게 굽신거리고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자기를 대신해서 신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장사를 하면서 친절하게 해도, 특히 일본 사람들은 손님에게 간이라도 빼내줄 것처럼 하는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것은 그 손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신이 되는데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함이지, 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 초상집이 바로 네 집이다 !!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허무한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러한데, 허무 속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가 이야기하는 것은 "초상집이 바로 네 집이다" 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결혼식장인데, 그런데 전도는 전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뒤의 3절 보면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우리의 일상을 뒤집는 말씀이냐는 겁니다. 평소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이죠.

(전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 감추어진 보화와 농부의 기쁨 !!

다시 마태복음 13장의 예수님의 천국비유로 돌아와서, 천국은 감추어진 보화와 같은데, 그런데 보화를 발견한 이 농부는 자기의 것에 이 보화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이 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밭을 농부의 밭이 아니고 남의 밭으로, 즉 임대한 밭으로 설정을 하셨다는 말이죠.

농부는 그 밭에 보화가 있는 것을 알았는데, 그런데 그 밭은 자기가 임대한 것이 되어서, 도저히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지 않고는 그 보화가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구조를 가지고 천국은 이 땅에 찾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자기 것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 그것은 천국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겁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다녀가신 길로 증명이 된다는 말이죠. 제자들이 3,000명나 5,000명, 그렇게 우르르 따라올 때, "저들은 나의 사람들이다" 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좋아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오히려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나를 따르는 것은 너희 각자의 개별자로서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온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다시 말해서, 그런 개별자 의식을 유지한 상태로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불러놓고는, 다시 떠나보내는 조치를 취하신다는 말이죠. 즉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나의 죽음의 현장, 나의 장례식장이 곧 삶의 현장인 것을 모르는 자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라는 것인데, 그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여기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 그 천국비유를 두 글자로 축약해서 표현하면 무엇인고 하니, 농부가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까? '기쁨'으로 했다는 겁니다. 농부가 마지못해서 억지로 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 다시 혼인잔치로 돌아와서 !!

그렇다면 마태복음 22장의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있어서, 그 잔치를 임금님 쪽에서 다 준비를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람들은 초청했는데, 그런데 그들은 그만 각자 개별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바빠서 오지를 못했다는 말이죠. 밭을 매러 갔고, 또한 장사를 하러 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줄을 임금님은 뻔히 알면서도 자기 아들의 결혼식에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그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길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런데 그 자리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혼인 잔치의 자리에 오기는 왔지만,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는 것이죠.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반드시 개별자 의식에서 공동 의식으로 바뀌어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천국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개별자 의식이 그대로 유지가 되는 가운데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것인데, 하지만 이런 기존의 바뀌지 않는 개별자 의식으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개별자 의식에서 공동 의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이 홀로 하신 것에 의해서 분배를 받은 것이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받게 되면, "나는 나다워야 한다" 라는 기존의 마음가짐이 날아가 버리게 되는데, 그러면서 나오는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기쁨' 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공부를 좀 한다는 중들은 자기를 버리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가서 도를 닦고 하는데, 휴대폰도 꺼놓고 소위 '자아 찾기' 라는 것을 한다는 겁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그렇게 하는 중도 있는데, "진정 나는 누구인가? 멈춰야 보인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발동이 걸리면 시간이 흐르는 이상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주는 기쁨이 없는데, 다만 죽음의 공포에서 시달리다가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면 기뻐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기쁨의 요소를 끌어당긴다는 겁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의 기쁨이라는 말이죠.

* 기쁨인가? 공포인가?

그것을 지난 낮 시간에 "술병을 가져다가 꼽는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연속성이라고 했는데, 자기 앞에 있는 술병을 돈을 주고 사면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한 술과 담배, 또한 마약, 그런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가 구입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자기의 괴로움, 즉 죽음의 허무성을,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봐야 자기 개별성 강화밖에 되지 않는데, 즉 "나는 나다. 나는 나다" 라고 하면서 자꾸만 개별성이 강화가 되는데, 그게 인간의 고질병이라는 겁니다. 하늘이 주는 기쁨보다도 자기 것을 누가 건드릴까봐, 그런 공포가 더욱 더 강렬해진다는 말이죠.

* 인간은, 죽음에 끼인 상태 !!

여기 교재 157페이지 제일 위에 보면 "평생을 살아도 허무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인간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작 해답도 모르는 채로 매일 매일 죽음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겁니다. 앞에서는 죽음이 끌고, 또한 뒤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뒤쫓아오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죽음에 끼인 상태'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서는 "죽음이 무서워서 죽음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악마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생이라는 것이죠.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런데 하늘에서 구멍이 뚫려서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인생이 결코 자기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인생도 아닌데 왜 자기가 벌벌 떨고 있느냐는 말이죠. 주인이 따로 있는데, 왜 종이 떨고 있느냐는 겁니다.

문방구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와서는 물건을 훔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인이 걱정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점원이 걱정을 하다가 자살을 하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숨이 끊어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는데, 이것도 죽음이라는 말이죠. 자살을 한다고 해서 심판에서 면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데, 인간은 어차피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개별자는 미리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죠. 즉 "저는 미리 당했습니다" 라고, 매도 미리 맞는 것이 낫다고, 십자가 안에서 미리 매를 맞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옮겨진 입장에서, 하지만 자기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또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야합니까?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자기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보편자, 즉 주님께서 우리 안에 천국의 요소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한 것도 감사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바나나를 먹으려면 껍데기를 벗겨야 하듯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벗겨진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다들 그렇게 되는데, 뻔히 아는 사람의 이름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이죠. 안경을 끼고 안경을 찾고, 리모콘을 손을 들고 리모콘을 찾는다는 겁니다.

모든 일에는 변화의 조짐이 있는데, 젊었을 때는 총기가 있었는데, 그래서 달력도 그 달이 지나가면 총알같이 떼어내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됩니까? 12월 중반이 되어도 달력은 여전히 11월인데, 그러니 10개 중에서 8개를 제대로 챙기기도 힘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외출을 하게 되면 불안하기가 짝이 없다는 겁니다. 가스불은 제대로 끊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그리고 매일 타던 버스 번호도 그만 잊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더 심해지면 자기 외출을 왜 했는지, 그 목적마저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 네 탓이 아니거든 !!

그런데 이것이 결코 우리의 잘못이 아닌데, 그게 자기 탓이 되면 또 다시 개별자가 되고 마는데, 그러면 주님은 "네 탓이 아니거든!"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자기 탓으로 돌리게 되면, 그러면 악마의 시험에 들게 된다는 겁니다. "이 철저하지 못한 인간아, 다 네 탓이다. 나가 죽어라" 라는 식으로, 그렇게 악마가 쏘아댄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탓이 아닌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정신이 없도록 태어났다는 겁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말이죠. 우리의 태생이 그러한데, 그러니 머리가 검은 짐승은 거두는 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거두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종자이기 때문에 말이죠.

* 인간은 배신 외에는 몰라 !!

우리 인간은 배신을 때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했다고 하면 무조건 배신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도 모든 것이 다 배신이고 배신이라는 말이죠.

여러분도 나이가 제법 들었으니 이제는 다들 알지 싶은데, 가장 큰 스트레스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을 만나는 것인데, 그게 힘들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힘든 것은 사람과 엮이는 것이고 말이죠. 물론 젊었을 때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았는데,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서로 역이게 되면 말썽만 일어난다는 겁니다.

역이면 결국 후회를 하게 되는데, 검은머리의 짐승은 거두는 법이 아니라는 말이죠. 괜히 동정을 베풀어서 거두어주고 하니, 그 은혜를 은혜로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해댄다는 겁니다. 한 번 주니, 당연히 주는 것으로 여겨서 더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자기 자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ㅋㅋ), 대인관계에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 인생은 시커먼 숯 덩어리 !!

우리가 모두 숯 덩어리, 즉 죽음으로 만나게 된다는 말이죠. 이제는 그런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러하다는 겁니다. 저기에 숯 한 덩어리가 오는데, 보니까 고등학교 동창 숯이라는 말이죠. 전부가 시커먼 죽음 덩어리인데, 그러니 다들 초상집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자들이란 겁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기대를 걸면 안 된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수평적으로 사람에게는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인데, 반면에 수직으로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이렇게 숯 덩어리로 살아가는 것은, 원래 너는 죽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죽게 되어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배반을 했어도 거두어주시는데, 그렇게 해서 십자가 공로, 즉 예수님의 경로를 우리에게 담아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위한 천국이 아니라, 주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나라, 즉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우리의 본향인데, 즉 원래 고향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타향인데,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면서 뭔가 휙휙 지나간다고 해서 아쉬워하지 말고 붙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에 미련을 두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인생 자체가 죽음을 향해서 질주하는 기차와도 같은데, 그야말로 시속 300km를 달리는 KTX와도 같다는 겁니다.

* 함께 있으나,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어 !!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는데, 누구에게 내려왔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게 내려오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나 그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즉 함께 있으나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신 그 성령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데, 비로소 우리는 눈을 떠서 자기 자신이 머리가 검은 짐승이라는 것을, 즉 거두지 않아도 되는데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거두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셨다는 말이죠.

우리가 나이가 들게 되면, 마치 바나나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기억도 날아가고 행동도 어설프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앞으로 나이가 70이 넘어가서 80이 되면 운전도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무엇을 하나 하더라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벗겨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겉모습이 벗겨지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본향이 가깝구나" 라고 여기시면 된다는 말이죠. 이제는 개별자의 생활을 버리고 공동 의식을, 즉 혼인잔치에 주님의 십자가 피가 묻은 예복을 입고 참여한 자로서, 손과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허무한 세상인 줄도 모르고, 나만 출세하면 좋은 세상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초상집에 가라고 하는 날벼락과 같은 말씀 앞에서, 참된 기쁨을 놓치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십자가를 통해서 검은머리의 짐승을 거두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더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12,14 오전 11시에 마침.

주님, 제 몸에서 유일한 자랑거리가 아직 머리가 검다는 것인데,
그것마저 버리게 하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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